본문 바로가기

내 사랑 찬란하길- 9장. 하룻밤 너와 함께

2024.05.12. 오전 8:00

“엄마, 이제 이 구질구질한 집에서 우리 벗어나는 거다. 그치?”

“그러네. 그 사람이 나도 많이 신경써주고 참 고맙구나.”

결혼하게 되면 엄마는 더 좋은 시설로 옮겨드리겠다는 그 사람의 제안이 어찌나 고맙던지. 날 위할 뿐만 아니라 우리 엄마까지 챙겨주니 사실 더 바랄 것이 없어. 난 항상 이 집이 싫었거든. 유달리 낮은 천장은 날 집어 삼킬 것 만 같았고, 습할 때면 시멘트 냄새가 진동해서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지. 내 모든 아픔의 상징이자 벗어날 수 없었던 굴레가 단 한 사람의 손길로 끝을 맺다니.

행복이 이미 내 손안에 와있는 느낌이었어. 하지만 언제 깨어질지 몰라 나도 모르게 조급증이 나더라. 결혼식 날짜는 잡았지만 혹시 잘못되지 않을 까 걱정하던 시기였어.

그런데 그때 잊고 있었던 K가 전화를 했어. 군대에서 다쳤다는 말과 함께 면회 와 주면 안되겠냐고 했어. 순간 거절할까 란 생각을 하다가 그래도 만나서 지금 내 사정을 말하는 게 낫겟지 싶었어.

“알겠어. 면회 갈게. 이번 주 주말에 보자.”

울산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서울행 버스를 타고 가는데 머리 속이 복잡하더라. 그냥 전화로 결혼 날짜 잡았다고 이야기 하는 게 나았을 텐데, 괜히 번거로워 진 것 같았어. 그래도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K의 얼굴을 한 번 보고 싶었던 것도 사실이야. 날 책임지겠다던 그 말도 여전히 기억났었고. 바보 같고 이기적인 남자 아이지만 내게 보여준 감정들은 진실이었다고 생각했거든.

이런 저런 생각들에 복잡했는데 어느 덧 그 아이가 근무하는 서울역 경찰서에 도착했어. 나 온다고 경찰서 앞에서 기다리며 바보처럼 웃고 있더라.

‘뭐가 좋다고 저렇게 웃고 있담.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할 줄 알고.’

“수지야. 오랜만이네. 요새 바빴어? 전화도 잘 안받고 편지 답장도 안하고.”

저 아이에게 나는 여전히 수지이구나. 수지. 내가 만든 가짜. 이제는 듣기 싫다.

“유치원 일이 좀 많았어. 너 다쳤다는 건 괜찮아? 의경은 편하다더니 출동했다가 다친 거야?”

“어. 많이 다친 건 아니고 사실 너 보고 싶어서.”

둘이서 대학로로 가서 맛있는 것도 사먹고 옛날 이야기도 하고. 처음에는 서먹했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니 예전으로 다시 돌아간 느낌 이었어.

“수지야. 이거 예쁘다. 너 한테 어울릴 것 같아.”

K가 악세사리 가판대에 있는 십자가 목걸이를 사서 목에 걸어주었는데, 얼마 전 받은 다이아몬드 반지에 비하면 너무 초라해. 하지만 나쁘지 않은 이 기분은 뭘까?

“오늘 외박증 받았어. 너랑 같이 있어도 되는데. 어때? 괜찮겠어?”

이러면 안되는데,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어. 우리는 손을 잡고서 모텔로 향했는데, 사실 이상했던 첫 경험 이후로 밤을 함께 보내는 것은 처음 이었어. 사실상 마지막 밤이 될 테지만.

프리미엄 구독자 전용 콘텐츠입니다.

때늦은 비는 구독으로 더 많은 콘텐츠를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