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자전쟁의 뿌리엔 1936년 ‘아랍 대봉기’가 있었다 [책&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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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24.05.10. 오전 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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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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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 투쟁의 잊힌 역사 ‘1936~1939 대봉기’
아랍인들 분열과 좌절, 유대 국가 수립 토대 낳아
주요 인물들 행적 중심 서술로 읽는 재미 쏠쏠
1936년 4월 팔레스타인 야파에서 영국 경찰이 시위 중인 아랍 군중을 해산하고 있다. ‘일러스트레이티드 런던 뉴스’ 1936년 6월13일치. 위키미디어 코먼스


팔레스타인 1936
오늘의 중동분쟁을 만든 결정적 순간
오렌 케슬러 지음, 정영은 옮김 l 위즈덤하우스 l 2만8000원

“팔레스타인 문제는 결코 쉽지 않다. 두 개의 강력한 세력이 충돌하고 있으며, 유혈사태는 피할 수 없다. 피는 과거에도 흘렀고, 지금도 흐르고 있으며, 어느 한쪽이 승리하지 않는 한 미래에도 계속 흐를 것이다.”

이스라엘과 하마스 사이에 지금 벌어지고 있는 가자전쟁에 관한 서술이 아니다. 미국의 진보 주간지 ‘더 네이션’ 1936년 6월3일치에 실린 이 글은 1936년에서부터 1939년까지 이어진 아랍 대봉기를 가리킨다. 영국의 위임통치를 받고 있던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이 급증하는 유대인 이민과 토지 매입을 통한 유대 국가 건설 움직임에 반대하며 총파업을 벌이고 시위와 불매운동에 나서는가 하면 공공시설과 유대인들을 공격하면서 벌어진 폭력 사태였다. 1929년 헤브론 폭동을 비롯해 대봉기 이전에도 간헐적이지만 꾸준하게 물리적 충돌이 있었지만, 대봉기는 “팔레스타인 혁명의 시작을 알렸”으며, 이때 사용된 상징과 구호들이 “팔레스타인 민족적 수사의 초석이 되어 오늘날까지도 사용되고 있다”고 역사학자 무스타파 카브하(이스라엘 오픈대학교 교수)는 설명한다.

그럼에도 오늘날 팔레스타인 사태를 설명할 때 1948년 5월14일 이스라엘 건국에 따른 실향과 이산을 가리키는 ‘나크바’(대재앙)에 비해 대봉기는 소홀히 취급된다. 나크바에 관한 책들이 셀 수 없이 많은 것과 달리, 대봉기를 다룬 대중서는 “놀랍게도 단 한 권도 존재하지 않는다.” 게다가 대봉기는 “팔레스타인인이 승리에 가장 가깝게 다가간 순간이었고,” 그 뒤 “80여 년간 이어지고 있는 아랍 세계와 이스라엘의 대립에 여전히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미국 저널리스트 오렌 케슬러가 대봉기를 다룬 책 ‘팔레스타인 1936’을 쓴 까닭이다.

‘팔레스타인 1936’에 따르면 대봉기 당시 영국군은 “수많은 과잉진압과 학대를 자행한 혐의를 받았다.” 사진은 1936년 예루살렘에서 영국군이 행진하고 있는 모습. 위키미디어 코먼스

대봉기의 첫 희생자가 나온 것은 1936년 4월15일이었다. 트럭을 이용해 가금류 유통 일을 하던 유대인 이민자 이스라엘 하잔은 바리케이드를 설치하고 차를 세운 아랍인들에게 붙잡혀 총에 맞았다. 아랍인들은 그 전해 11월 경찰에 쫓기다가 사살당한 무장단체 ‘검은 손’의 설립자 이즈 알 딘 알 카삼의 원수를 갚겠다며 무기를 살 돈을 요구했다. 하잔의 소식을 접한 유대인들이 이튿날 밤 권총을 들고 바나나 농장의 노동자 숙소를 습격하면서 대봉기의 첫 아랍인 사망자가 나왔다. 다시 다음날 열린 하잔의 장례식은 유대인들의 대규모 시위와 폭력 행위로 이어졌고, 바나나 농장 사건에 분노한 아랍인들 역시 유대인들을 공격해 사상자를 낳았다. 양쪽의 보복이 거듭되면서 희생자 숫자는 계속 늘었고, 무슬림 지도자 하지 아민은 4월25일 아랍고등위원회를 창설하면서 “영국이 팔레스타인 정책을 대폭 수정할 때까지 총파업을 강행하겠다”고 발표했다. 요구 사항은 세 가지. 유대인 이민 중단, 토지 매매 금지, 그리고 팔레스타인의 아랍인 다수를 반영하는 대의 정부 설치였다. 1939년 7월 말까지 3년 남짓 이어진 대봉기의 시작이었다.

‘팔레스타인 1936’은 대봉기의 시작과 전개, 결말을 순서대로 좇는 가운데 특히 주요 인물들의 행적과 발언을 중심으로 서술함으로써 흥미와 가독성을 높인다. 시온주의 지도자로 이스라엘 초대 총리에 오른 다비드 벤구리온, 케임브리지에서 공부한 아랍민족주의 활동가 무사 알라미, 레바논의 그리스정교 집안에서 태어난 아랍인으로 역시 케임브리지에서 공부했으며 ‘아랍의 각성’(1938)이라는 영문 저서로 큰 반향을 일으킨 조지 안토니우스, 우크라이나 오데사 태생으로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가 이끄는 리쿠드당 등 우파 시온주의의 전신이 된 수정시온주의운동을 창설한 블라디미르 자보틴스키, 러시아 태생 시온주의 지도자로 밸푸어 선언 협상에서 주도적 역할을 했으며 1·2차 세계대전 사이 대부분의 기간 동안 세계시온주의자기구를 이끌었고 말년에는 초대 이스라엘 대통령이 된 하임 바이츠만, 영국 출신의 강경파 기독교 시온주의자로 유대 군대 창설에 큰 기여를 한 오드 윈게이트, 대봉기 기간 팔레스타인 고등판무관을 지낸 영국 관료 아서 워코프 경과 식민장관 맬컴 맥도널드 등이 그들이다.

당시 팔레스타인 땅을 위임통치 하고 있었던 영국은 아랍인과 유대인 양쪽의 의견을 수렴하면서 폭력 사태의 종식과 영구적인 해결책을 모색한다. 1917년 밸푸어 선언에서 팔레스타인의 유대 민족국가 수립을 지지했던 영국은 필 위원회 보고서(1937)에서 처음으로 ‘두 국가 해법’을 내놓았고, 1939년 2월에 시작된 런던 원탁회의를 거쳐 “명시적으로 아랍 국가도 유대 국가도 아닌 독립적인 ‘팔레스타인 국가’를 설립하기로 약속했다.” 유대인 이민에 제한을 두는 등 팔레스타인 쪽에 크게 유리해진 이 방침에 유대인들은 테러를 벌이면서 극렬하게 반발한 반면 아랍인들은 대부분 찬성했지만, 레바논에 망명 중이던 하지 아민만은 공식 반대 입장을 밝히면서 결국 ‘팔레스타인 국가’ 수립은 좌절되고 말았다.

1936년 대봉기 당시 아랍 남성과 여성 전사들의 모습. 위키미디어 코먼스

하지 아민의 경쟁 가문 출신인 젊은 정치인 파크리 나샤시비는 공개서한을 발표해 수천 명에 달하는 동료 아랍인의 죽음에 대해 하지 아민의 책임을 물었다. 그는 ‘평화단’이라는 이름의 무장대를 창설했는데, 평화 회복보다는 “정치적 경쟁자나 가문의 숙적에 대한 보복을 위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가 많았다.” 대봉기 기간 동안 유대인 약 500명과 영국군 및 경찰 250명 정도가 사망했고, 아랍인은 최소 5000명에서 많게는 8000명 이상이 숨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 가운데 최소 1500명은 동료 아랍인의 손에 죽었을 가능성이 있다. ‘3인방’으로 불린 무장 지도자들의 살해와 체포 등으로 대봉기는 결국 소득 없이 막을 내리고 말았다. 대봉기로 “아랍 경제는 그야말로 회복 불능 상태가” 된 반면, 유대인들은 오히려 자급자족 경제 체제를 구축했으며 영국군의 지원 아래 이스라엘 방위군의 초기 형태를 갖추었다. “팔레스타인 유대인이 국가를 세우기 위한 인구적·지리적·정치적 기반을 공고히 한 것은 1948년이 아닌 바로 이 시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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