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 의제숙의단은 두 개의 상반된 의제를 도출했다. 하나는 국민연금 보장성을 강화하는 안이고, 다른 하나는 국민연금 재정 안정성을 강화하는 안이다. 쉽게 말해 제1안은 더 내고 더 받는 안이며, 제2안은 더내고 현재와 똑같이 받는 안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제1안은 40년 납부자 기준으로 소득의 13%를(현행 9%) 기여금으로 내면, 65세 이후 소득의 50%를 받는 안이다. 제2안은 소득의 12%를 기여금으로 내고 현행 40%의 소득대체율을 유지하는 방안이다.
제1안과 제2안은 확연히 다른 안이다. 그렇지만 제1안과 제2안 모두 나름 큰 폭의 개혁방안을 담고 있다. 제1안은 납부액을 무려 44%나 증대하여 보장성을 25% 증대하는 안이며, 제2안도 납부액을 33% 증대한다. 보장성을 강화하고자 하는 사람은 1안을 선택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2안을 선택하면 된다.
우리나라는 현재 노인 빈곤율, 노인자살률 모두 세계 최악인 나라다. 이는 너무 당연하다. GDP대비 노인 관련 국가 예산 비율은 OECD 평균 지출액 7.4% 절반에도 이르지 못하는 3.1%에 불과하다.
우리나라와 경제규모가 비슷한 이탈리아는 GDP의 13.4%를 국가가 노인을 위해 지출한다. 우리나라는 불과 3.1%다. 노인 빈곤율과 자살률이 높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하다. 저출생을 극복하고자 예산을 아무리 많이 써도 출생률은 좀처럼 늘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기초연금 이후 노인 자살률은 나름 드라마틱하게 떨어졌다. 기초연금 도입 이후 과거 극단적인 노인자살률 1위 국가에서 지금은 그냥 노인 자살률 1위국가로 개선(?)되었다. 예산을 투입한다고 사람이 태어나지는 않지만 예산을 투입하면 자살률은 크게 낮아진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노인 빈곤율과 자살률을 지금처럼 유지하는 방안, 기초연금을 강화하는 방안, 국민연금 보장성을 강화하는 방안 세가지다. 그런데 기초연금은 적립금이 전혀 없다. 100% 국민 세금에서 지급된다. 올해에도 24조원이 세금에서 지원되고, 2050년에는 재정소요가 125조원이 든다. 모두 국민 세금이며, 기초연금 지급액만큼 국가부채가 늘어나고 미래세대의 부담이 된다.
기금 기여금을 의제숙의단 안대로 12%, 또는 13%로 올린다 하더라도 언젠가 기금은 소진된다. 그러나 기금 소진은 정부가 단 한 푼도 국민연금에 재정지원을 하지 않는다는 가정하에서만 발생하는 일이다. 일종의 '스트레스 테스트'일 뿐이다. 현실에서는 정부가 어떤 형태로든 국민연금에 재정지원을 해야한다.
현재 정부는 기초연금에도, 건강보험에도 재정지원을 한다. 많은 국민들이 기초연금, 건강보험의 보장성을 강화하기를 바라고 정부지원을 늘리기 바란다. 유독 국민연금만 재정지원을 하지 않을 논리는 없다. 국가가 국민의 실업, 건강, 노후를 책임져주지 못하면 국가가 왜 있고 우리는 왜 국가에 세금을 낼까?
사회 정책은 무균실에 존재 하지 않는다. 이세상에 아무런 단점이 없는 완벽한 제도란 존재하지 않는다. 부담도 낮고, 노후 대책도 되면서 재정 부담이 없는 정책은 존재하지 않는다. 국민연금은 처음 제도 설계 때부터 기금 소진을 계획했다. '의도적 적자'라는 의미다. 그래서 우리의 연금개혁의 목표는 '지속가능한 고갈'이다. 즉, 기금 소진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지속가능할 수 있도록 지나치게 과한 적자를 조절해 나가는 것이 목표다. 납입금과 소득대체율 숫자를 미세조정하는 대증요법(모수개혁)으로 지속가능한 국민연금을 만드는 것이 연금개혁의 목표다.
언론은 비판하는 것이 업이다. 엉망이면 엉망이라고 비판하고 개선책을 내놓으면 다른 측면에서 단점을 부각한다. 의제숙의단이 두 가지 다른 측면을 모두 담은 방안을 내놓자 이제는 근본적인 처방이 아니라고 비판한다. 그러나 모든 병을 씻은듯이, 부작용 없이 고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의사가 아니라 사기꾼일 확률이 높은 법이다. 현실 한계 내에서 부작용을 점진적으로 줄여가는 대증요법(모수개혁)을 너무 폄하하지 않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