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꽃의 영화뜰] 너무 외로워서 친구를 주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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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24.03.25. 오전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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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로봇 드림' 스틸컷.
※ 주의 : 영화 '로봇 드림'의 주요 내용이 포함돼 있습니다.

저녁은 전자레인지에 데운 편의점 도시락, 잠들기 전까지 하는 일은 홀로 TV 보기, 별다른 재미도 없이 소란스럽기만 한 화면을 끄지 못하는 이유라면… 소파에 덩그러니 앉아있던 내 모습이 텅 빈 화면에 비친 어떤 날 그 청승맞음에 화들짝 놀란 적이 있어서겠지. 한때를 불태웠던 연인을 그리워하거나, 다시금 심장을 뛰게 하는 인연을 만나고 싶다는 때늦은 욕심을 부리자는 게 아니다. 그저 하루 중 몇 시간쯤, 아니 일주일 중 며칠쯤 함께 수다 떨고 운동하고 맥주 마시며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맘 맞는 친구가 있었다면.

"외로우신가요? 지금 바로 주문하세요!" 홈쇼핑 화면을 흐르던 이 문장에 홀린 듯 주문 버튼을 누른 건, 바로 그래서다. 13일 개봉한 애니메이션 '로봇 드림'의 주인공 '도그'에게 필요한 건 다름 아닌 친구!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집엔 조립되지 않은 부품 상태의 '로봇'이 배송된다. 나름의 계산법에 따라 나사를 조이고, 팔다리를 조립하고, 머리통을 끼운 뒤 건전지까지 넣어보니 어라? 정말 그럴싸한 로봇이 완성됐다. 비록 나사가 몇 개 남긴 했지만… 뭐 어떤가. 전류를 먹고 깨어난 '로봇'은 '도그'를 바라보며 빙그레 웃는다.

너무 외로워서 친구를 '주문'했다는 설정을 실사영화로 구현했다면 아마 좀 기괴한 느낌의 SF물이 됐겠지만, '로봇 드림'은 애니메이션이라는 장르 특유의 제한 없는 상상력을 미덕 삼아 보편적인 우정 이야기를 완성하는 데 성공한다. 공들여 조립한 '로봇'은 '도그'와 취향이 꼭 들어맞는 절친이 된다. 지하철 타고, 버스킹 구경하고, 공원 산책하고, 롤러스케이트까지 타다니! 특히나 바퀴를 굴려 가며 귀여운 합동춤을 추는 귀엽고 사랑스런 주인공들의 시퀀스에 익숙한 팝 'September'가 덧입혀질 때면 관객의 입가엔 흐뭇한 미소가 가득 고인다.

▲ 영화 '로봇 드림' 스틸컷.
서글픈 건, 두 사람의 즐거움이 그리 오래가지 않는다는 것. 해변으로 나들이 간 '도그'와 '로봇'은 바닷속을 신나게 헤엄치는데, 자신이 기계라는 걸 망각한 '로봇'은 뒤늦게 소금물에 절여진 몸이 굳어 움직이지 않는다는 걸 깨닫는다. 해가 뉘엿뉘엿 지고 해변에서 놀던 이들 모두 자리를 떠나 도움 청할 곳도 없건만… '도그'는 엄청난 무게의 철근 부품으로 조립된 친구 '로봇'을 업지도 끌지도 못해 발만 동동 구른다. 뜬눈으로 밤을 지샌 뒤 부리나케 집으로 돌아가 부품수리용 장비를 챙겨 달려왔지만, 아뿔싸! 때는 이미 늦어버렸다. "해변 입장 불가. 내년 6월1일까지."

둘도 없는 단짝 친구와 이런저런 이유로 멀어져 본 적 있는 관객이라면, 비유적으로 묘사된 '도그'와 '로봇'의 이별이 어떤 상황을 의미하는지 각자의 경험 안에서 나름의 그림을 그려볼 수 있을 것이다. 전학을 가서, 동아리가 바뀌어서, 상대는 취직을 한 반면 나는 진학을 택해서, 그들이 결혼하고 아이를 낳는 동안 나는 일에 전념하느라 바쁜 나날을 보내서… 잦던 만남이 줄어들고, 통했던 대화가 낯설어지고, 서로 삶의 주된 경험마저 달라진 뒤에는 어쩐지 씁쓸한 거리감이 생겨버린 친구들. 특별한 갈등도 상처를 남길만한 싸움도 없었지만 그저 시간의 흐름에 몸을 맡기고 각자 인생에 주어진 길을 따라 걸었다는 이유로 서로 곁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셈이다.

▲ 영화 '로봇 드림' 스틸컷.
'도그'와 떨어진 채 폐쇄된 해변에 눕혀진 고철 신세가 된 '로봇'은 고약한 이들에게 다리를 잘리고 고물상에게 온몸의 부품이 분해돼 팔려나가는 아픔을 겪는다. 다만 운 좋게도, 다시 좋은 친구를 만난다. 새 친구 '라스칼'은 그 나름의 계산법에 따라 나사를 조이고, 중고 다리를 조립하고, 부식된 몸통을 갈아 끼워 그럴싸한 '로봇'으로 복원해 준다. 본의 아니게 '로봇'을 떠나보낸 '도그' 역시 한동안 공허한 날들을 보내지만 결국엔 새로운 로봇 친구를 다시 찾아 일상의 소소한 즐거움을 되찾는다. 이제 '로봇'은 새 친구 '라스칼'의 취향이 담긴 플레이리스트가 소중해졌고, '도그' 역시 새 로봇 친구와 함께 박자 맞춰 추는 춤이 즐거워졌다.

그래서, 한때 절친했던 사이도 전부 부질없어진다는 이야기일 뿐인 거냐고? 그럴 리가. 도리어 반대다. 영화는 그 한때를 즐겁게 빛내줬던 친구의 기억이 아로새겨져 지금의 나를 만든 거라고 말해준다. '로봇'과 '도그'는 이제 각자의 새로운 친구와 함께하지만, 그 덕에 마지막 장면에서 다시 흘러나오는 'September'의 가사는 처음보다 한층 더 깊은 의미로 다가온다. "Do you remember"(너 기억하니) / "As we danced in the night"(우리 춤추던 그날 밤 말야) / "Never was a cloudy day"(구름 한 점 없었고) / "Golden dreams were shiny days"(금빛 꿈이 빛났잖아) 낯간지러워 제대로 표현한 적은 없었지만, 이제 더는 그때와 같은 관계는 아니지만, 둘도 없이 절친했던 친구 네 덕에 그 시절 내가 즐겁게 빛났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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