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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 - 언어와 욕망 체계

2024.03.28. 오전 11:04

한때 삼순이 신드롬을 일으켰던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에서는, 김삼순의 현재와 미래를 대리하고 있는 두 개의 이름이 충돌을 일으킨다. 남들에 의해 불려지는 음절의 조합 자체가 듣기 싫지만, 살아온 세월 내내 듣고 살 수밖에 없었던 이름 김삼순과 김삼순이 선망하고 있는 미래의 이름인 김희진이 그것이다.

김삼순과 같은 처지가 아니더라도 ‘김삼순과 같은 처지’가 어떤 상황인지에 대해서는 공감할 수 있다. ‘김삼순’이라는 이름에 대한 느낌이 김삼순과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즉 이름이 불리는 자와 이름을 부르는 자들이 같은 정서를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드라마는 아주 오랜 전에 유행했던 유머 하나를 패러디함으로써, 김삼순과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정서를 증명한다. 이름 때문에 친구들에게 놀림을 받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잡아탄 택시, 연실 울어대는 사연의 대강을 듣고서 김삼순을 위로한답시고 택시기사가 건넨 한 마디.

"뭘 그런 것 같고 울어? 이름이 어때서? 삼순이만 아니면 됐지."

가득 차오르는 설움을 몇 줄기 눈물로 추스르고자 했던 김삼순의 슬픔은 급기야 오열로 쏟아져 내린다.

​연암 박지원이 권고하는 성명학의 기초 원리, 이름은 부르는 사람의 기준이 아니라 듣는 사람의 기준으로 지어야 하는 것이다. 스스로 부르기보다는 남들에 의해 더 많이 불려지게 되는 나 자신의 표상이라는 역설, 도덕경의 첫 페이지에 실려 있는 ‘名可名非常名(명가명비상명)’은 철저히 타자의 담론인 이름에 대한 지적이다.

삼순이라는 이름이 그 이름을 지닌 이의 속성을 대변하는 것은 아니지만, 삼순이라는 이름이 촌스럽게 느껴지는 현상 또한 음절이 지닌 속성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니다. 삼순이가 촌스러운 이름이 아닌 시절이 있었듯, 언어는 본질을 규명하는 도구가 아니라 그저 시대적이고 사회적인 합의를 대리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름으로 인해 발생하는 편견에서 자유롭지도 못하다. 이것이 소쉬르가 밝혀낸 언어의 구조주의적 폐해이다.

그렇게 기다려왔던 순간이었건만, 김삼순은 정작 개명신청서 작성을 앞두고서는 갈등을 일으킨다. 자신이 사랑하는 현진헌이 김삼순이란 이름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하필 ‘희진’이란 이름이 현진헌의 옛 연인을 상기시키는 흔적이다. 결국 개명을 포기하기로 한 김삼순은 그 자리에서 신청서를 찢어버린다.

실상 ‘김삼순’이나 ‘김희진’이라는 이름이 김삼순의 정체성일 수는 없다. 그저 ‘시니피앙(signifiant, 기표)’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언어는 사고를 지배하는 법, 기억으로 남은 누군가의 이름은 그 사람을 떠올리게 하는 표상이다. 그저 호명을 위한 '소리'에 불과했지만, 어느 순간 '의미'로 전이되어버린 이름은 그 사람의 정체성을 대리하기도 한다. 핸드폰 액정에 떠오르던 자음과 모음의 조합에 불과했지만, 헤어진 연인의 이름을 가진 다른 누군가의 이름을 우연히 듣게 된 순간에 밀려들던 먹먹함을 상기한다면 이해는 더욱 쉬워진다. 한때 ‘희진’이란 이름을 가진 여인을 사랑했던 현진헌의 트라우마 역시 같은 맥락이다.

'김삼순'을 '김희진'으로 개명할 경우, 시니피에(signifié, 기의)로는 김삼순을 가리키는 것이 변함없지만, 시니피앙으로는 김희진이라고 발음하게 된다. 현진헌 입장에서는 김삼순의 바뀐 이름을 부르면서도 과거의 '희진'을 떠올릴 수가 있다. ‘희진’이란 이름을 포기한 김삼순의 선택은, 적어도 그녀 자신만을 대리하고 있는 촌스러움의 표상이었다.

'생긴대로 논다'라는 표현을 관상이 담고 있는 근원적 인격에 대한 고찰이라고 한다면, '이름값을 한다'는 명예에 대한 등가의 자격을 유지하고 하는 노력을 칭송하는 표현일 것이다. 그러나 이름이 작용하는 중력의 범주가 명예를 걸만한 거창함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한 인간의 정체성으로 회귀하는 인문 영역 전반을 포함하기도 한다. 삼순이냐 희진이냐를 선택해야 했던 순간이, 김삼순에게는 자신의 인생을 걸고 고심해야 했던 일대 사건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모르고 살아도 아무런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는 문제에 대해 이런 쓸데없는 논의까지 필요한 것일까 하는 의문도 들겠지만, 전혀 쓸데없지가 않기 때문에 굳이논의를 하는 것이다. 아무런 불편함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은, 이미 의식의 영역을 벗어나 무의식화가 되어버린 문제라는 반증이기도 하다. 소쉬르의 연구는 의식의 영역인 언어의 분석을 통해 무의식의 영역에 접근한 사건이었다. 그리고 철학사는 자크 라캉의 페이지를 준비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