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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다른 것과 구별하기 위하여 사람이나 사물, 단체, 현상 등에 붙여서 부르는 기호.

개설

‘하늘은 녹(祿)이 없는 사람을 내지 않고, 땅은 이름 없는 풀을 내지 않는다.’고 한다. 이름 없는 풀이 없는데 하물며 이름 없는 사람이 있을 수 없음은 너무도 당연하다. 그러면 여기서 말하는 ‘이름’이란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은 다름 아닌 존재 가치나 의의(意義)를 뜻한다. 이름이 주어짐으로써 사물은 비로소 의미를 얻게 되고, 의미를 얻게 됨으로써 존재가치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민들레나 개나리가 우리들에게서 구체적인 이름을 얻고 있는데, 길섶에 있는 풀들은 구체적인 이름을 얻지 못하고 그냥 잡초라고 불리고 있다.

그것은 잡초는 잡초로서 우리 인간에게 더 이상 중요한 의미를 지니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는 민들레나 개나리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냥 민들레면 민들레지 그것들 하나하나에 따로 붙여진 이름이 없다. 그냥 돌멩이면 돌멩이고, 바위면 바위지 그 이상의 다른 이름이 필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물건 하나하나가 우리에게 특정한 의미를 지니게 되면 이름을 얻게 된다. 집에서 기르는 개가 주인들에게는 의미가 있기 때문에 검둥이나 바둑이라는 이름을 얻는다.

그러나 그 개가 울타리 밖을 나서면 그저 누구네 집 개일 뿐 검둥이나 바둑이가 되지 못한다. 남들에게는 그냥 개라는 짐승의 의미만 지닐 뿐 그 이상의 유의미한 짐승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의 경우는 다르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이름이 있고 그 이름으로 불려지기를 요구한다. 이름을 알 필요가 없거나 모르는 경우에는 그냥 어떤 사람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누구에게나 고유의 이름이 있다는 것을 부인하는 사람은 없다.

그만큼 하나하나가 유의미한 개체요 존재이기 때문이다. 속담에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豹死留皮人死留名).’고 한다. 사람에게 있어서 이름은 단순한 호칭의 수단이 아니라 바로 목적 그 자체이다.

이름의 말뜻

‘이름’이라는 낱말을 겉모양으로 보면 ‘말하다’라는 뜻을 지닌 ‘이르다[謂]’라는 동사와의 관계를 생각하게 된다. 동사의 명사형에서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원을 따지는 데 있어서 현상만을 두고 비교하는 것은 때때로 엉뚱한 결론을 빚을 염려가 있다. 15세기 국어에 있어서 이름의 어형은 ‘일훔’, 혹은 ‘일홈’이요, ‘이르다’는 ‘니르다’로서 형태적으로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그런데 15세기에는 ‘일홈’의 기본형에 해당될 ‘*일다’ 또는 ‘*잃다’와 같은 어형이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나 ‘*일다, *잃다’와 같은 어형이 15세기 이전에는 존재하였을 것이고 그 뜻은 ‘부르다[呼, 稱]’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15세기의 ‘일ᄏᆞᆮ다[稱]’에서 어간 ‘일ᄏᆞᆮ-’은 ‘일ㅎ+*-[呼+曰]’으로 분석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15세기초에 ‘*일다, *잃다’라는 동사는 ‘니르다[謂]’에 합류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비록 ‘이름’과 ‘이르다’ 사이에 나타나는 형태적 동일성이 앞선 시대의 형태발달과정에서 얻어진 것이라고 하더라도 두 어형 사이의 의미적 유연성은 충분히 상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이름의 역사

흔히, 이 세상의 모든 단어들은 이름이라고 말한다. 어떤 사실에 대한 의미부여에서 비로소 단어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존재가 이름을 뜻하는 바와 같이 이 세상에 존재한 사람으로 이름 없는 사람은 생각할 수 없다.

설령 그런 사람이 실제로 있었다 하더라도, 이름이 없는 한 누구도 그 사람을 기억하거나 말할 수 없기 때문에 결국은 존재하지 않은 것과 같은 것이다. 이와 같이 이름은 인간생활은 물론 본질적인 존재의 문제이기 때문에 인간의 출생과 더불어 가장 중요한 관심의 대상이 된다.

다음 항목들에서는 역사를 통해서 한국인의 이름이 어떻게 지어졌고 어떻게 발달해왔는가를 구체적인 자료를 중심으로 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1. 삼국시대 이전 이름]

한 개인의 출생이 그러하듯이 인간의 언어생활은 이름을 짓는 데서 비롯된다. 그것은 우리의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사서(史書)인 『삼국사기』·『삼국유사』의 이야기가 이름을 풀이하는 데서 시작되는 것으로 알 수 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혁거세(赫居世)나 알지(閼智), 그리고 수로(首露)의 전설은 한결같이 이름이 붙은 내력을 말해준다.

흔히 이들 이름에는 박혁거세나 김알지처럼 성씨(姓氏)가 함께 주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것은 후대의 관념일 뿐이다. 박에서 났기 때문에 박(朴)을 성으로 삼았다든지, 금궤에서 났기 때문에 김(金)을 성으로 하였다는 것은 모두가 성씨에 대한 관념이 정착된 후대의 해석일 뿐이다.

흔히 김알지의 자손으로 알려진 말구(末仇)·아도(阿道)·미사흠(未斯欽)·사다함(斯多含) 등을 그냥 이름만 부를 뿐, 김말구·김아도·김미사흠·김사다함 등으로 부른 예가 없는 것을 보면 고대에는 성이 없었을 뿐 아니라, 그것이 씨족이름으로 세습되지도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서(漢書)』를 비롯한 중국의 역사서를 보아도 삼국시대 이전의 이른 시기에는 왕이건 벼슬아치건 간에 성을 가진 사람은 나타나지 않는다. 『한서』 왕망전(王莽傳)에도 주몽(朱蒙)의 이름으로 추(騶)가 나타나 있고, 『후한서(後漢書)』의 고구려전에도 왕들의 이름에 성을 쓰지 않았다.

추·궁(宮 : 太祖王)·수성(遂成 : 次大王)·백고(伯固 : 新大王)·대가(大加) 등으로 이름만 나타나 있다. 또한 『삼국사기』의 고구려전에도 이이모(伊夷母 : 故國川王)·위관(位官 : 山上王) 등과 같이 성이 없다.

그러던 것이 남북조시대의 『송서(宋書)』에 이르러 비로소 장수왕을 고련(高璉)으로 기록하여 고구려 왕실의 성을 적고 있다. 백제도 온조(溫祚)를 비롯한 초기의 왕들에게는 성이 없는데 13대 근초고왕부터 성을 써서 여구(餘句 : 近肖古王)·여영(餘瑛 : 典支王)·여비(餘毗 : 毗有王)·여륭(餘隆 : 武寧王)·여명(餘明 : 聖王)·여창(餘昌 : 威德王)으로 적다가 29대 무왕 때부터는 달리 부여씨(夫餘氏)로 적고 있다.

신라의 왕들도 초기에는 모두 이름만 적어오다가 23대 법흥왕을 모명진(募名秦)이라 하여 성을 모씨(募氏)라 하였고, 『북제서(北齊書)』에서 진흥왕을 처음으로 김진흥(金眞興)이라 적음으로써 신라의 왕가 성씨를 밝히고 있다. 왕의 경우가 이런 것을 보면 삼국시대 이전의 평민들에게는 아예 성씨에 대한 관념이 없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을 방증하는 자료로 진흥왕시대(540∼576)에 건립된 순수비(巡狩碑)와 적성비(赤城碑), 그리고 578년(진지왕 3)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무술오작비(戊戌塢作碑) 등에 관리들의 이름에 성씨가 전혀 없다는 것을 들 수 있다.

예컨대, 568년(진흥왕 29)에 건립된 마운령비(摩雲嶺碑)에는 “喙部 居杜夫智 伊干”, “沙喙部 另力智 迊干” 등의 인명이 다수 나타나 있다. 여기서 앞에 쓰인 ‘喙部(탁부)’·‘沙喙部(사탁부)’ 등은 마을이름이고, 다음에 쓰인 ‘居杜夫智(거두부지)’·‘另力智(영력지)’ 등이 사람이름인데 성을 쓴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마지막의 ‘伊干(이간)’·‘迊干(잡간)’ 등은 벼슬이름이다.

신라인의 이름에는 ‘智’ 혹은 ‘知’·‘只’ 등이 쓰인 것을 흔히 볼 수 있는데, 그것은 ‘閼智(알지)’에서 보는 것과 같은 것으로 단순한 인칭접미사이거나 존칭접미사인 듯하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의 기록대로 유리왕(儒理王) 때에 육부(六府)에 성(姓)을 내려준 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이름을 적을 때 성을 쓰지 않고 마을이름과 사람이름만 쓴 것을 보면 고대인들에게는 성씨의 관념이 없었던 것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신라 35대 경덕왕 때에 와서 지명과 인명·관명(官名) 등을 한자식(중국식)으로 바꾼 것을 보면 삼국시대 이전의 이름들은 모두 순 우리말이었음을 알 수 있다. 예컨대, 미추왕의 이름은 비록 한자로 쓰여 있으나 한자의 뜻과는 전혀 관계 없이 ‘믿왕(本王, 始王)’을 나타내는 것이니, 그가 곧 김씨의 시조왕이기 때문이다.

참고로 진흥왕 때 세워진 단양적성비(丹陽赤城碑)의 인명을, 1979년 최범훈(崔範勳)이 시독(試讀)한 것을 소개하면 당시인들의 이름이 어떠하였는가를 살펴볼 수 있다.

伊史夫智(잇부지) 西夫叱智(셧부지)

內禮夫智(놀부지) 比次夫智(빗부지)

助黑夫智(죠검부지) 豆弥智(둔지)

武力智(무력지) 導設智(도셜지)

也尒智(야이지) 巴珎婁(바도루)

刀只(도기) 烏禮兮(오례혜)

道豆只(도두기) 勿支次(물기지)

[2. 통일신라시대의 이름]

이 시대에는 중국문화와의 접촉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수많은 신라의 유학생들이 당나라에 드나들게 되고, 그들을 통하여 중국의 문물이 그대로 우리 나라에 유입되기에 이른다.

따라서, 관명·지명과 함께 사람의 이름도 중국식으로 짓는 것이 점차 보편화되기에 이른다. 중국식의 인명이란 이름의 형태뿐 아니라 성씨를 함께 적는 것을 뜻하는데, 성씨 한자에 이름 두자를 적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

그러나 문화의 교류가 아무리 활발하였다 하더라도 일부 지배층에 한하는 것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성은 없었고 이름 역시 고유어식이었을 것이다. 그 시대 지배계급 사람들의 이름이 전시대에 비하여 얼마나 달라졌는가는 다음의 인명들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곧, 김춘추(金春秋)·김유신(金庾信)·김인문(金仁門)·김대성(金大城)·장궁복(張弓福)·최승우(崔承祐)·최치원(崔致遠)·김품석(金品釋) 등이 그 예인데, 오늘날의 인명과 조금도 다른 점이 없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시대 사람으로 역사에 널리 알려진 사람 가운데도 성을 쓰지 않고 이름만 쓴 사람이 적지 않고, 그것도 순 우리말로 된 것도 있다.

곧, 홍술(弘述)·백옥(白玉)·삼능산(三能山)·복사귀(卜沙貴)·궁예(弓裔)·순백(珣伯)·청광(靑光)·신광(信光)·근종(近宗)·신홍(神弘)·신검(神劒)·원종(元宗) 등이 그 예인데, 이 가운데서 백옥·삼능산·복사귀 등은 고려 태조 왕건을 추대한 공로로 각각 성을 얻어 배현경(裴玄慶)·신숭겸(申崇謙)·복지겸(卜智謙) 등의 이름과 성을 얻으니, 각각 경주배씨(慶州裴氏)·평산신씨(平山申氏)·면천복씨(沔川卜氏)의 시조가 된 사람들이다.

[3. 고려시대의 이름]

통일신라시대부터 일부 계층에서 중국식으로 성과 이름을 적기 시작한 것이 고려시대에 오면 더욱 정착되기에 이른다. 특히, 고려 태조 왕건은 개국공신들이나 투항자들에게 대대적으로 성을 내려주기에 이르고, 제4대 광종 때에 와서 중국식 과거를 보게 함에 따라 한문화는 한층 뿌리를 깊이 내리게 된다.

그리하여 고려 초기부터는 귀족이나 관료 계급은 성을 쓰지 않는 사람이 없게 되었으나, 중기인 1055년(문종 9)에 성을 쓰지 않는 사람에게는 과거에 급제할 자격을 주지 아니하는 법령을 내린 것을 보면, 그때까지도 지식층 가운데 성이 없거나 쓰지 않는 사람이 많았던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으로 미루어 일반백성들은 여전히 고유어식으로 이름을 짓고 대부분은 성이 무엇인지 모르거나 없는 상태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4. 조선시대의 이름]

조선은 건국과 함께 억불숭유(抑佛崇儒)의 정책을 씀에 따라 문물제도 전반을 중국식으로 확립하게 된다. 따라서, 성씨는 물론 이름을 짓는 방법도 한자식으로 확립되기에 이른다.

그러나 이것도 공식적인 차원에서의 일이요, 대부분의 상민들의 이름이나, 특히 노비의 이름들은 철저하게 고유어식으로 짓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것은 조선 초기의 노비문서나 불경 시주질(施主秩) 등에 나타난 이름들이 거의 모두가 고유어식 이름들이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의 인명을 담고 있는 자료들은 수없이 많이 있으나, 그 가운데서도 훈민정음이 반포된 직후(1449)에 김수온(金守溫)이 엮은 내불당낙성기(內佛堂落成記)인 『사리영응기(舍利靈應記)』가 최초의 자료이다.

여기에는 총 47명의 인명이 한자로 된 성씨와 함께 쓰여져 있는데, 특히 고유어 인명을 훈민정음으로 적고 있어서 그 시대 사람들의 이름들을 가장 정확하게 알아볼 수 있다.

그 중에는 동명이인(同名異人) 7명이 있어서 실제 이름 수는 40개인데, 이를 열거하면 막동·타내·올마대·오마디·오마대·오망디·오미디·쟈가둥·마딘·도티·고소미·매뇌·리대·올미·더믈·샹재·검불·망오지·구디·수새·쇳디·랑관·터대·둥·우루미·어리딩·돌히·눅대·아가지·실구디·검둥·거매·쟈근대·북쇠·은뫼·망○·모리○·강○·곰○ 등과 같다.

성을 한자로 적으면서 이름을 굳이 한글로 적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이들의 이름이 고유어식 이름밖에 없었던 때문이었다.

이들 이름은 최근까지 이어져온 아명(兒名)들과 같은 것으로 천명장수(賤名長壽)의 사상이 짙게 배어 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이나 ‘쇠’ 혹은 ‘○’가 들어 있는 것은 그들의 신분이 천하기 때문이 아니라 장수를 기원하는 부모의 간절한 소망을 담고 있는 것이다.

이보다 150여년 뒤에 나온 『진관관병편오책(鎭管官兵編伍冊)』이 있는데, 이것은 임진왜란 당시 진관(鎭管)의 편대조직을 보인 것으로, 여기에 병졸의 이름이 나타나 있다.

조선시대 군역(軍役)은 상민이나 노비들이 담당하였는데, 이때에 오면 상민들이라 하더라도 남자들에게는 관명이 한자식으로 주어져 있었던 것을 보게 된다.

이와는 달리 노예에게는 성이 없었고 이름도 고유어식 천명으로 부르는 경우가 많았다. 위의 예에서 ‘走叱同(주질동)’은 ‘줄똥’이요, ‘竹伊(죽이)’는 이름 그대로 ‘죽이’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전통적으로 특수한 경우가 아니면 여자에게는 아명 이외의 이름이 주어지지 않았는데, 앞에서 보인 내불당 참례자의 이름들은 모두가 여자의 이름이었기에 고유어식 아명으로 되었고, 남자의 경우는 대개가 한자식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여기에 『불설대보부모은중경언해(佛說大報父母恩重經諺解)』(1687)와 『동국신속삼강행실(東國新續三綱行實)』(1617)에 실린 부녀자의 이름과 천인·노비의 이름을 통해서 조선시대 사람들의 고유인명의 특성을 살펴보기로 한다.

여자 이름으로는 박시다녜·니시긋뎡·김시긋셤·심치슈·김시녜옥·윤시녜향·박경녈·뉴시오월·님시셕염·원시운·니시죵이냥위·송시슉향·됴시말양위·니시업녜·김시향이·됴시뎡녜·박시향이·박시셰운·최시만녜·신시응 등을 볼 수 있는데, 이 이름들에 성씨가 적힌 것은 그들의 신분이 천민이 아님을 알 수 있게 한다.

노비의 이름은 한결같이 고유어로 지었는데, 江阿之(강아지)·姜兒只(강아지)·介也之(개야지)·揷士里(삽사리)·揷沙里(삽사리)·壽快(수캐)·道也之(도야지)·道牙之(도아지)·大也知(대야지)·馬牙之(마아지)·梅兒只(매아지)·夢牙之(몽아지)·加莫伊(가막이)·加馬貴(가마귀)·杜路未(두로미) 등과 같이 동물이름을 따서 지은 것이거나, 甘實(감실)·巨墨介(거묵개)·居墨伊(거묵이)·古邑丹伊(곱단이)·古邑同(곱동)·古溫介(고온개)·立分德(입분덕)·於汝非(어여비)·入分伊(입분이)·足古萬(족고만)·古孟伊(고맹이)·同古里(동고리) 등과 같이 용모의 특징 등을 잡아서 지었다.

[5. 일제시대 이후의 이름]

우리 국민들이 누구나 성명을 가지게 된 것은 극히 최근에 와서의 일이다. 1910년 5월에 완성된 이른바 민적부(民籍簿) 작성 때만 하여도 우리나라 사람으로서 성씨가 없는 사람이 있는 사람의 1.3배에 이르렀다고 하니, 조선시대까지만 하여도 우리의 성명제도가 얼마나 소홀하였는지 알 수 있다.

성씨와 함께 한자식으로 된 이름을 가졌다는 것 자체가 신분을 보장해 줄 정도로 성씨와 관명은 소중하고 얻기 어려운 것이었다.

노예는 물론 여자들에게도 관명(冠名)이 없었기 때문에 민적정리를 하는 호적계원의 붓끝에서 즉흥적인 이름이 지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참고로 이 시대의 충청북도 단양군 영춘면의 제적부(除籍簿)를 중심으로 고유어식 인명의 실상을 살펴보면, 약 1만6000여명의 인명 중에서 고유어식으로 된 것이 408명인데, 그 가운데서 남자의 이름이 67명이고 나머지 341명이 여자의 이름이었다고 한다.

남자의 경우는 거의 모두가 천민이지만, 여자 가운데는 노비나 천민이 아닌 경우에도 고유어식 아명을 그대로 적었기 때문에 수가 많게 된 것이다.

그것은 실제로 ‘간난이(干蘭, 簡瀾, 干蓮, 干郎, 干洛)’·‘아기(阿基, 阿只, 牙己, 岳伊, 愛基, 阿低)’·‘언년(어린년, 言年, 言連, 言蓮, 彦年, 彦連, 焉年)’·‘분해(府內, 粉內, 粉年, 粉老味, 痛忿)’·‘서운(西云, 西雲, 西元)’·‘음전이(巖全, 奄全, 音全, 音田, 陰田)’ 등이 가장 많은 사실로도 증명되고 있다.

또, 여자의 이름 가운데 ‘이(伊)’자를 가진 것이 많은 것도 어릴 때 쉽게 부르던 외자 이름에 편의적으로 한 글자를 첨가한 결과라 하겠다.

복이(福伊)·선이(仙伊)·홍이(弘伊) 등 ‘伊’자를 가진 이름이 53개나 되는데, 그 가운데 위의 세 개만 남녀공용이고 나머지 50개는 모두 여자 이름이었다는 것이다. 이로 미루어 보면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여자나 노비에게는 아명 이외의 정식이름이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자는 어려서는 가정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않으며, 혼인과 함께 새로운 관명이라 할 수 있는 택호(宅號)를 얻기 때문에 새로운 이름이 필요하지 않았고, 노비는 성은 물론 이름마저 떳떳하게 가질 수 없는 가축과 같은 신세를 면할 수 없었다고 하겠다.

여자에게는 오히려 이름이 금기였다는 것은 혈통을 중시하는 족보에 남편의 성명이 오를 뿐 여자의 이름이 오르지 않은 데서도 짐작할 수 있다.

일제의 통치와 함께 그들의 지배를 받게 되자 새로운 관명을 짓게 된 여자의 이름에 일본식 작명법이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남자의 이름에는 족보의 항렬(行列)이 있고 전통적인 작명법이 확립되어 있었으나 여자의 경우는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8·15광복 전후에 태어난 여자의 이름에 ‘영자(英子)’·‘춘자(春子)’·‘옥자(玉子)’ 등 ‘자’자 이름이 많은 것은 모두 일본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제 식민통치하에서 있었던 창씨개명(創氏改名)이야말로 인류역사상 가장 혹독한 문화적 범죄라 아니할 수 없다.

1940년 제2차세계대전을 앞둔 일제는 한반도에서의 식민통치를 한층 강화함으로써 전쟁수행능력을 제고시키기 위하여 한민족말살정책의 일환으로 국어말살·창씨개명이라는 전대미문(前代未聞)의 폭거를 자행하게 되었다. 창씨개명으로 한국인들은 천수백년 지켜온 성씨를 잃고, 이름 역시 일본식 독음(讀音)을 강요받았다.

그러나 1946년에 내린 「조선성명복구령(朝鮮姓名復舊令)」에 의하여 강요된 창씨개명을 무효화함으로써 본래의 성과 이름을 되찾게 되었다.

아무튼 조선시대 이래 남자의 이름은 크게 바뀐 일이 없으나, 여자의 이름은 시대를 따라 상당한 변모를 거듭하고 있는데, 그것은 남자에 비하여 작명상의 구속을 덜 받기 때문이었다.

‘이’나 ‘자’자의 안이한 작명법을 벗어나 뜻이나 음이 아름다운 글자를 찾아 자유로운 변모를 거듭하고 있었는데, 그 결과 전통적으로 여자이름에 즐겨 쓰였던 ‘희(姬)’·‘숙(淑)’·‘옥(玉)’·‘정(貞)’·‘순(順)’은 물론, ‘미(美)’·‘연(娟)’·‘주(珠)’·‘혜(惠)’ 등 곱고 아름다운 글자들이 많이 쓰이게 되었다.

특히, 최근에 이르러서는 전통회복과 국어순화운동의 일환으로 순 고유어식 이름이 등장하고 있는데, 그것은 가장 전통적인 명명법이면서도 우리에게 가장 새롭고 아름다운 인상을 심어주고 있다. ‘고아라’·‘유한나’·‘박미리내’·‘진달래’·‘배누리’·‘이한샘’·‘심소담’·‘한예나’ 등 새로운 이름들이 낯설지 않은 것은 우리들 본래의 전통적인 모습들이 그 속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이름의 종류

크게 보아 이름이라고 할 때 그 속에는 실로 다양한 내용들이 포함된다. 정식이름이라고 할 수 있는 관명을 포함해서 아명·별명이 있고, 그 밖에도 자(字)·호(號)·별호(別號)·시호(諡號)·택호·법명(法名)·예명(藝名)·가명(假名)·당호(堂號) 등이 있다.

이렇게 이름의 종류가 많고 다양한 것은 한국인들이 이름(호칭)에 대하여 얼마나 관심이 컸던가를 말해주는 것이다. 전통사회에서 한국인은 누구나 관명(호적명)이 있고, 아명이 있으며, 성인이 됨에 따라 자와 택호를 가지는 것이 보통이다.

아명은 나면서부터 가정에서 불려지는 이름으로, 대개는 고유어로 짓는데, 천한 이름일수록 역신(疫神)의 시기를 받지 않아 오래 산다는 천명장수의 믿음에서 천박하게 짓는 것이 보통이다.

‘똥개’·‘동냇개’·‘쇠똥이’·‘개똥이’가 보통이고, 어른의 회갑에 나면 ‘갑이’·‘또갑이’로 지어지며, 튼튼하라는 염원에서 ‘바우’라 부르고, 늦게 얻으면 ‘끝봉이’가 되는 것이다.

아명은 곧 애칭이기 때문에 가족뿐 아니라 이웃에서까지 부담 없이 불려지게 마련이지만, 홍역을 치를 나이를 지나면 이름이 족보에 오르고 서당에 다니게 되면서 정식 이름을 얻게 된다.

정식이름인 관명, 곧 호적이름을 얻게 되면 아명은 점차 쓰이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하여 얻은 이름은 평생을 두고 소중한 것이기 때문에 아무에게나 함부로 불리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입신양명 현저부모(立身揚名 顯著父母)’라 하듯이 과거장에서 이름이 드날리기만을 소망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남자가 성장하여 사회생활을 할만한 나이가 되면 성인식이라 할 관례(冠禮)를 치름과 함께 새로운 이름인 자(字)를 얻게 되는 것이다.

자(字)는 이름의 대용물로서 가까운 친구간이나 이웃에서 허물없이 부르는 것으로, 대개는 이름을 깊고 빛나게 하기 위해서 화려하게 짓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다가 혼인을 하여 성인이 되면 또 다른 이름인 택호를 얻는다. 택호는 원래 새로 시집온 여자에게 붙여지는 이름인데, 대개는 그 여자가 살아온 마을이름을 따서 시집어른들이 부르기 좋도록 지어주는 것이다.

그런데 여자에게 택호가 주어지면, 그것은 여자의 이름 대용물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남편의 새로운 호가 되기도 한다.

그 아내가 ‘홈실댁’이면 그 남편은 ‘홈실양반’이 되고, 그 아내가 ‘조호댁’이면 그 남편은 자동적으로 ‘조호양반’이 된다. 여자에게는 홈실이나 조호에서 시집온 여자라는 뜻이 되고, 남자에게는 그 곳으로 장가든 사람이라는 뜻이 된다.

그러므로 성인남녀에게 택호는 평생 동안 바꿀 수 없는 것으로, 명예가 되는 동시에 구속이 되는 것이다. 택호를 얻게 되면 가족이나 친척들은 자연히 택호를 부르게 된다. ‘홈실아주머니’·‘홈실아저씨’·‘조호할머니’·‘조호할아버지’가 되는 것이다. 물론 직계 존비속은 택호를 부르지 않고, 가까운 친구들은 여전히 자를 부른다.

그런데 남자에게는 호 혹은 아호가 주어지고 여자에게는 당호가 주어지는 경우가 있다. 남녀 다같이 학문과 덕행이 높아져서 이웃에 널리 알려지고 존경을 받게 되면 호를 얻게 되는 것이다.

호란 원래가 학문이나 도덕, 혹은 예술에서 일가(一家)를 이루어 남을 가르칠만한 자리에 이른 사람만이 가지는 영예인데, 대개는 스승이 지어주거나 가까운 친구가 지어주기도 하고, 때로는 스스로 짓기도 한다.

남이 짓는 경우의 호는 화려한 것이 보통이고, 자신이 지을 경우에는 스스로 낮추어 부르거나 자신의 뜻을 담는 것이 보통이다.

전통적으로 호를 가진 사람에게는 ‘선생’이라는 극존칭을 붙이는 것이 예사인데, 포은(圃隱)선생·퇴계(退溪)선생·율곡(栗谷)선생 등의 호칭과 같은 것이다. 사람이 호를 얻게 되면 그 이상의 영예가 없으므로 그 이웃이나 제자들은 모두 호를 부를 뿐, 자나 이름을 부르지 않게 된다.

조선조 이래 지금까지 명인들의 호는 한결같이 자연에 대한 회귀를 담고 있는데, 특히 ‘산(山)’·‘계(溪)’·‘은(隱)’ 등의 글자를 즐겨 쓰고 있는 것이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여자로서 당호를 얻은 사람도 적지 않은데, 그 가운데서도 신사임당(申師任堂)·가효당(佳孝堂)·허난설헌(許蘭雪軒)·의유당(意幽堂) 등은 널리 알려진 이름들이다.

최근에는 문인·학자·서예가 등에게 호가 많고, 특히 동양화를 전공하는 사람들의 호는 낙관(落款)과 함께 작품의 성가(聲價)를 좌우하기도 한다.

살아서 불리는 호에 못지 않게 조선시대 혹은 그 이전인 고려시대의 사람으로서 시호를 받은 사람도 적지 않다. 시호는 주로 높은 벼슬을 하거나 나라에 큰 공로가 있는 사람이 죽었을 때 나라에서 서훈(敍勳)하여 받드는 것으로서, 죽은 뒤에 즉시 주어지는 경우도 있고,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 주어지는 경우도 있다.

시호는 묘당(廟堂)에서 공적을 논하여 그 업적에 맞게 적당한 이름을 짓지만, 직접적으로 명명하여 왕의 이름으로 내린다.

시호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자는 ‘문(文)’·‘충(忠)’·‘무(武)’·‘열(烈)’·‘정(貞)’ 등인데, 다같이 시호를 받았더라도 어떤 글자를 받았느냐에 따라 영광의 크고 작음을 구별하는 것이 예사이다.

조선조에 있어서는 특히 학문을 숭상하였기 때문에 ‘문’자가 든 시호를 자랑스럽게 생각해왔다. 문충공(文忠公)·문정공(文貞公)·문열공(文烈公)·문간공(文簡公)·문원공(文元公) 등을 흔히 볼 수 있는데, 좋은 글자가 한정되어 있으므로 같은 시호를 지닌 조상들이 많은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역대 임금들의 왕호(王號)도 모두 죽은 뒤에 주어지는 시호라 할 수 있는데, 연산군과 광해군은 도덕과 의리에 벗어나 시호를 얻지 못하였으므로 임금이었으면서도 왕호가 없는 것이다.

그 밖에도 불교에 입문하여 얻는 법호가 있고, 천주교에서 얻는 본명(本名) 혹은 세례명(洗禮名)이 있으며, 예능인들이 즐겨 쓰는 예명이 있고, 언론인들이 편의적으로 적는 필명들이 있으나 보편적인 이름이 아니다.

한국인의 작명법

우리나라 사람은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사주팔자(四柱八字)나 관상(觀相)과 함께 후천적으로 주어지는 이름이 그 사람의 운세를 결정하는 데 중요한 구실을 한다고 믿어왔다.

그러한 생각은 지금까지도 계속되어 도시의 골목골목에 작명의 명인(名人)들이 진을 치고 있는 것이다. 명칭이 의미를 결정한다는 점에서 볼 때 사람의 이름이 그 사람에 대한 이미지(image)를 형성해 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작명이야말로 새로운 한 사람의 탄생을 뜻하기 때문에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동양의 전통적인 작명관(作名觀)을 전적으로 믿을 수 없는 것은, 이른바 작명철학으로 풀 수 없는 서양사람이나 고유어로 이름을 지은 사람들도 얼마든지 자신의 능력에 따라서 운명을 개척해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사람의 성명은 대체로 성씨 한 자에 이름 두 자를 기본으로 한다. 성씨는 날 때부터 주어지는 씨족의 공통적인 이름이기 때문에 선택의 여지가 없다.

서양에서는 생활을 중심으로 가족을 보기 때문에 여자가 혼인을 하면 성씨마저 그 가장의 것을 따르지만, 우리 나라에서는 혈통을 중심으로 하므로 성씨를 바꾸는 일이 없다.

타성입양(他姓入養)의 경우나 데릴사위가 되는 경우에 성이 바뀌는 예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전통적으로 용인되는 풍속은 아니다. 그러므로 이름을 짓는다는 것은 성을 제외한 두 글자의 선택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두 글자 가운데의 한 글자는 그 종족에서의 세대(世代) 수를 표시하는 이른바 항렬자(行列字)이기 때문에 출생 이전부터 미리 정해져 있는데, 그것도 항렬자의 위치까지 규정되어 있으므로 한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고유의 이름자는 주어진 위치에 놓을 수 있는 한 글자뿐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항렬자는 성씨와는 달라서 따르지 않아도 무방하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혈통을 존중해온 우리 나라 사람들은 어떤 혈통(姓氏)의 어느 세대(行列)에 속한다는 것을 밝히는 것을 영광으로 여겼기 때문에 억지로 그것을 벗어나려고는 하지 않는다.

항렬자는 같은 씨족을 두고도 분파에 따라 다른 글자를 쓰는 것이 보통이지만, 그 일족들끼리는 세대 수를 짐작할 수 있게 되어 있다. 항렬자의 배열은 역학사상(易學思想)에 바탕한 오행(金·水·木·火·土) 순환의 이치를 따르는 것이 보통이지만, 때로는 숫자를 쓰기도 하고, 간지(干支)를 배합하기도 한다.

오행순환이란 ‘금생수(金生水)·수생목(水生木)·목생화(木生火)·화생토(火生土)·토생금(土生金)’의 순환이치를 바탕으로 하는 것인데, 윗대에서 ‘금(金)’자를 항렬자로 취하면 아랫대는 ‘수(水)’자를 취하고, 다시 그 아랫대는 ‘목(木)’자를 취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렇게 하면 5대를 지나서 다시 항렬자가 되풀이되지만, 항렬자가 위에 놓이고 아래에 놓이는 순서가 교대로 되기 때문에 사실상 10대를 분별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항렬자를 쓰는 것은 생면부지(生面不知)의 혈족끼리도 족친으로서의 우의(友誼)를 다지기 위함이니, 우리 나라 사람들의 혈연관념이 얼마나 큰가를 알 수 있게 한다.

성명 석 자에서 두 자가 이미 주어져 있고 그 나머지 한자로써 이름을 변별하고자 하니 종족들 사이에 동명이인이 많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에 비하여 여자의 이름은 항렬을 벗어나는 경우가 많으므로 같은 형제자매간이라 하더라도 다양한 것이 예사이다.

우리 나라 사람들이 언제부터 항렬자를 써왔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신라시대 이래 김인문·김대문(金大門)이 있고, 고려시대에도 김부식(金富軾)·김부일(金富佾)·김부의(金富儀) 등 같은 형제들이 같은 글자를 써서 이름을 지은 것을 보면 항렬자를 써서 세대를 분별하려는 의식이 매우 오래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름을 짓는 데도 윗대 조상의 이름자를 피하는 것은 당연하며, 특히 성현이나 임금의 이름을 함부로 쓸 수 없는 것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운명론적인 작명관을 떠나서도 부르기 좋고 뜻이 좋은 이름을 짓는 것은 필요한 일이다. 현대적인 의미에서도 좋은 이름이 되기 위해서는 적어도 다음과 같은 조건을 갖추고 있어야 할 것이다.

첫째, 소리가 부드럽고 분명하여야 한다. 지나치게 딱딱한 소리는 그 사람의 인상까지 거칠게 심을 염려가 있다. 그런데 발음이 분명하다는 것은 이름만을 두고 하는 것은 아니다.

국어에는 주지하다시피 다양한 음운변동규칙이 있는데, 주어진 이름으로 하여 성씨가 분명하지 않게 된다든지, 이름자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 일이 없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예컨대 ‘박노영’·‘신문호’ 등과 같은 이름은 누구에게나 ‘방노영’·‘심문호’ 등으로 들려서 혼란을 줄 것이고, ‘은례’·‘혁로’ 등은 ‘을례’·‘형노’ 등으로 들리게 될 것이다. 이는 자음동화현상을 유념하지 않고 이름을 지은 결과이다.

둘째, 음성상징적 가치에 유의하여야 한다. 음성상징적 가치는 개념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누구나 느낄 수 있는 감정적 가치로서, ㅏ, ㅗ 등 양성모음들은 밝고 가벼운 느낌을 주지만, ㅓ, ㅜ 등 음성모음은 정중하고 무거운 느낌을 주는 것이다.

지나치게 밝은 소리들만 모으면 가볍고 경망하게 들릴 염려가 있고, 지나치게 어두운 소리들만 모으면 둔중하고 침울하게 들릴 염려가 있다. 성씨와의 균형과 조화를 생각할 필요가 있다.

셋째, 한자를 쓸 경우에는 지나치게 뜻이 드러나는 것은 피하여야 할 것이다. 만복(萬福)·천수(千壽)·미향(美香) 등은 그 뜻이 너무 강렬하게 드러남으로써 오히려 역설적으로 비천하게 들릴 염려가 있는 것이다.

되도록 은근하고 중립적인 뜻을 모으는 것이 저항을 없애는 길이라 할 것이다. 그 밖에도 글자의 시각적 균형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특정한 글자에 획수가 지나치게 많거나 구석지고 별로 쓰지 않는 글자를 써서 남에게 부담을 주는 것도 이로울 것은 없을 것이다. 성명철학이라는 것도 궁극적으로는 의미적·형태적인 조화의 바탕을 추구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이름과 우리 문화

‘입신양명 현저부모’를 효도의 궁극적 가치로 보는 우리 문화는 모든 것을 자신은 물론, 부모나 가문의 이름을 지키는 데서 비롯하였다.

살아 있는 동안의 영화보다도 유방백세(遺芳百世), 그 빛나는 이름이 길이 후세에 남아 전하기를 바랐던 것이다. 호랑이가 죽어서 좋은 가죽을 남기듯이 훌륭한 이름을 역사에 남기는 것이 생의 최고의 이상이었던 것이다.

우리 나라 사람들이 의식(衣食)을 해결할 만하면 족보를 만들고 조상의 산소에 빗돌 하나라도 세우는 것을 소원하는 것은 이름을 그만큼 소중히 하기 때문이다.

“역적의 오명(汚名)을 쓴다.”든지, “도둑의 누명(陋名)을 듣는다.”는 데서 보듯이, 역적이나 도둑이 되는 것보다 그 이름이 더럽혀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 우리 나라 사람이다. 또, “그런 짓 하면 네 이름이 무엇이 되느냐?”는 말에서도 잘못된 행동 자체보다 이름이 손상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가치관을 볼 수 있다.

물론 이러한 가치관은 자칫하면 실질보다 형식을 중시한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비판의식은 ‘이름이 좋아 불로초’라든지, ‘이름 좋은 하눌타리’라는 말이 겉모양은 좋으나 실속은 없다는 의미로 쓰이고 있음에서 확인될 수 있다.

그러나 일정한 형식이나 격식이 없는 문화가 있을 수 없음을 생각하면, 오늘날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이만한 자존(自尊)은 역시 이름을 소중하게 생각해온 전통에 뿌리를 내리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우리의 문화는 실로 이름의 문화라 할 정도로 이름을 짓고 얻는 데 심혈을 기울여왔다. 같은 관원이라고 하더라도 1급이나 2급이 되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당하관(堂下官)에서 당상관(堂上官)이 되는 것을 바랐고, 통훈대부(通訓大夫)나 통정대부(通政大夫)가 되는 것보다 대광보국 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가 되는 것을 원하였다.

그 숱한 직위마다 다른 품계 이름이 주어져 있었으니, 그 이름 하나를 얻기 위해서 평생을 살아온 셈이다. ‘치수 보아 이름 짓는다'는 속담에서 보듯 우리 나라 사람은 이름을 짓고, 이름을 얻기 위해서 사는 것이다.

우리의 문인들은 수없이 많은 사람들의 이름을 짓고 불러왔다. ‘길동’을 짓고, ‘몽룡’을 지었으며, ‘춘풍’을 짓고 ‘충렬’을 지었다.

그 숱한 이름들 속에 의미를 담은 것이다. 여인들의 이름은 작품 속에서도 감추어지는 것이 예사이다. 「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의 사씨가 있고, 「박씨전(朴氏傳)」의 박씨가 있으며, 「장화홍련전」의 포악한 허씨가 있었지만 그들의 이름은 깊숙이 감추어져 있다. 여자들의 이름은 흔히 성씨로 대신된다. 윤씨할머니·김씨부인·연안김씨·박실(朴室)·김서방댁 등이 모두 그런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알아둘 필요가 있는 것은 여자들의 이름이 감추어지는 것은 그들의 이름이 무시되는 것이 아니라 존중되는 것이라는 점이다. 그것은 기녀들의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고, 어린 소녀들의 이름이 오히려 남아 있는 데서 확인된다.

숙향·옥단춘·춘향·운영·영영·채봉·숙영 등은 기녀들로서 작품 속에 남아 있고, 매화(梅花)·명옥(明玉)·진이(眞伊)·계랑(桂娘)·한우(寒雨) 등은 역사 속에 살아 있다.

1920년대에서 1950년대에 이르기까지 농촌을 배경으로 한 작품 속에 등장하는 남자의 이름을 보면 다음과 같다. 삼돌이·삼보·식이·기덕·성두·길서·수룡·욱이·학보·득추·문수·박추·천수·윤패·명준·진수·뭉태·영득·치삼·득아·들께·쇠다리·시봉·철한·억쇠·득보·덕근·수택·돌쇠·길보·견만·기섭·대섭·윤섭·용칠이·장손·기선·만득이·복돌·준이·구길·돌이·붓들이·만이·칠성·바우 등이며, 여자의 이름은 복녀·순이·기특·얌전·확실이·이쁜이·모화(毛火)·낭이·술이·중실·옥분·동이·분녀·순야·옥녀·을손·월손·섭춘·점순·봉필·덕순·분이·설희·용녀·정이·필련·기실·정아·필녀·선이·순녀·옥남·연이·춘례·구월이·화산댁·복술·해순·탄실·떠벌네·판례 등이다.

이상의 이름들은 작가들이 그 시대의 소박한 농민의 아들딸들의 이름으로 지은 것들이다. 투박한 아명들이 그대로 젖니처럼 남아 있어서 오히려 인정미를 더해 주고 있다.

요컨대, 우리나라 사람들은 개인보다도 가문의 이름과 함께 태어나 그 이름을 지키기 위해서 평생을 노력하다가 이름과 함께 세상을 떠나는 사람들이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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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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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성씨에 대한 고찰」(신석호, 『한국인의 족보』, 일신각, 1977)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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