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스타] 강동원 외증조부 ‘이종만’ 게시글에 대한 오해와 진실

입력 2017.03.06 (17:26) 수정 2017.03.06 (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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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강동원 측이 강동원의 외증조부 친일파 이종만에 대한 게시글을 삭제해 논란이 일었다.

영화 홍보사 맥스무비에 게재된 게시글이 인터넷에 퍼졌고 강동원 측은 명예훼손을 사유로 게시물 게재 중단을 요청했다.

"강동원의 외증조부 이종만이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1급 친일파. 친일단체에서 활동하며 위안부 창설, 유지를 위한 자금을 지원. 대가로 채굴권을 얻어 부를 쌓았다. 태평양 전쟁 시 일본에 전쟁 자금을 상납하기도 함" (맥스무비)

사람들은 강동원 측이 "친일파 행적에 대한 사과 없이 무작정 글을 숨기려 했다"고 비판했고 강동원은 "저 또한 배우이기에 앞서,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아야 하고 다시는 그런 부끄러운 일이 되풀이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 일에 대해 진심으로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다"고 사과했다.

이어 "과거를 정확히 인지하지 못한 점, 미숙한 대응으로 논란을 일으킨 점, 빠른 시간 내 제 입장을 말씀드리지 못한 점, 모두 저의 잘못이라 통감한다. 저는 제 외증조부의 부끄러운 과거를 알게 됐다. 이번 일을 통해 역사에 대해 더욱 공부하고 또 반성해나가겠다. 아울러 미약하게나마 제가 할 수 있는일을 찾아 실천하겠다. 다시 한 번 이번 일로 심려 끼쳐드린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사과드린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강동원 측과 맥스무비 측은 해당 글의 어떤 점이 사실과 달라 명예훼손에 해당하는지 자세히 설명하지 않았고, 강동원 외증조부 이종만에 대한 의혹이 불거져갔다.

KBS는 친일인명사전을 펴낸 민족문제연구소의 이용창 편찬실장에게 해당 글에서 크게 논란이 되는 세 부분을 짚어 무엇이 오해이고 사실인지 확인했다.

사진 출처 : 온라인 커뮤니티사진 출처 : 온라인 커뮤니티

이종만은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1급 친일파다?

강동원의 외증조부 이종만은 2009년 친일인명사전에 등록됐다. 하지만 이종만을 '1급 친일파'라고 지칭한 표현은 적절하지 않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친일인명사전 등재 시 '급수'를 구분하지 않는다.

"여러 사료와 문헌을 바탕으로 조사했고 그의 친일 행적을 다수 발견했다. 이종만 씨의 딸 이남순 씨가 펴낸 책에는 이종만 씨가 사회 환원으로 독립운동을 했다고 서술되어 있다. 하지만 학계에서는 이종만 씨의 사회 환원 활동과 독립운동과의 연관성을 찾지 못했다" (이용창 편찬실장)

친일인명사전의 수록 대상자는 '을사조약 전후부터 1945년 8월 15일 해방 때까지 일본제국주의의 국권침탈·식민통치·침략전쟁에 적극적으로 협력한 사람으로 매국노, 민족반역자, 부일 협력자에 이르기까지 그 범위가 넓다. 그중 민족문제연구소는 역사적 책임이 무겁다고 판단되는 사람들로 수록 대상을 제한했다.

사진 출처 : 민족문제 연구소 홈페이지 / 구글 마켓에서도 친일인명사전 어플을 다운로드할 수 있다.사진 출처 : 민족문제 연구소 홈페이지 / 구글 마켓에서도 친일인명사전 어플을 다운로드할 수 있다.

이종만이 위안부 창설, 유지를 위한 자금을 지원했다?

이종만이 위문대에 기부했는데, 위안부가 위문대에 포함된 개념으로 이종만이 위안부 창설에 일조했다는 논란이다.

"위문대의 대는 주머니 대(袋)로 병사들에게 전하는 주머니라는 뜻이다. 위안대, 정신대 등의 부대 대(隊) 자와 다르다. 위안부가 위문대에 포함된다고 보는 건 잘못된 해석이다. 이종만 씨는 1937년에는 위문품대에 금 1,000원을 기탁했고, 1939년에는 1000원을 헌금해 통조림 3,600개를 구입했다고 기록돼있다. 우리가 공개하지 않은 자료에서도 마찬가지다. 물론 위문주머니를 만들기 위해 부녀자들이 동원되었지만 위안부와는 다르다. 다른 증거가 없는데 위안부를 위문대로 해석하는 건 왜곡이 될 수 있다" (이용창)

조선일보. 1937년 7월 21일 "종로 3정목 대동광업회사 사장 이종만 씨는 19일 애국부인회 조선본부를 찾아가 황군위문품대로 금 1,000원을 기탁했다. 계원은 감격해 이를 취했다고 한다"

매일신보. 1939년 7월 6일 "최전방에서 활동하는 장병들에게 보내는 위문대가 차츰 감소돼 가고 있는 것을 유감스럽게 여겨, 대동광주식회사 사장 이종만 씨와 전 회사원 일동이 현금 1000원을 지난달 28일 군 애국부에 헌금했다. 군 사령부는 이 뜻에 감격, 통조림 3,600개를 전선 제일선에 보냈다고 한다"

이종만이 친일 행위의 대가로 채굴권을 얻었다?

이종만의 사업과 부가 친일 행위의 대가라는 논란이다.

"정확한 연간 관계를 밝혀낼 수 없다. 어떤 분들은 이종만이 친일 행위를 해서 채굴권을 따냈다고 주장한다. 당시 채굴권을 따내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또한 주관적인 해석이다. 이종만 씨가 그 사업에 몸으로 부딪쳐 얻었는지, 돈을 주고 샀는지는 알 수 없다" (이용창)

증거가 있는 사실만 수록한 친일인명사전에는 이종만의 사업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이종만(1886~1977) : 강원도에서 지하자원 개발과 광산업에 종사하며 강원도 평강 개간사업, 함경남도 영흥 범포 개척 등을 추진했다. 1928년 함경남도 함흥과 신흥 등지에서 폐광 위기에 있던 금광을 개발하여 성공한 뒤, 평안북도 자성의 금은광구를 소유하여 '광산왕'으로 이름이 알려졌다. 조선 제일의 철광 자성광산도 소유했다. 서울에 거주하면서 1937년 6월 대동광업주식회사를 설립하며 사장에 취임했고, 대동광산중앙조합 이사장과 대동농촌사 이사장을 겸했다. 대동출판사도 설립했다"(친일인명사전)

K스타 강지수 kbs.kangji@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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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정2017-03-06 18:2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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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강동원 측이 강동원의 외증조부 친일파 이종만에 대한 게시글을 삭제해 논란이 일었다.

영화 홍보사 맥스무비에 게재된 게시글이 인터넷에 퍼졌고 강동원 측은 명예훼손을 사유로 게시물 게재 중단을 요청했다.

"강동원의 외증조부 이종만이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1급 친일파. 친일단체에서 활동하며 위안부 창설, 유지를 위한 자금을 지원. 대가로 채굴권을 얻어 부를 쌓았다. 태평양 전쟁 시 일본에 전쟁 자금을 상납하기도 함" (맥스무비)

사람들은 강동원 측이 "친일파 행적에 대한 사과 없이 무작정 글을 숨기려 했다"고 비판했고 강동원은 "저 또한 배우이기에 앞서,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아야 하고 다시는 그런 부끄러운 일이 되풀이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 일에 대해 진심으로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다"고 사과했다.

이어 "과거를 정확히 인지하지 못한 점, 미숙한 대응으로 논란을 일으킨 점, 빠른 시간 내 제 입장을 말씀드리지 못한 점, 모두 저의 잘못이라 통감한다. 저는 제 외증조부의 부끄러운 과거를 알게 됐다. 이번 일을 통해 역사에 대해 더욱 공부하고 또 반성해나가겠다. 아울러 미약하게나마 제가 할 수 있는일을 찾아 실천하겠다. 다시 한 번 이번 일로 심려 끼쳐드린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사과드린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강동원 측과 맥스무비 측은 해당 글의 어떤 점이 사실과 달라 명예훼손에 해당하는지 자세히 설명하지 않았고, 강동원 외증조부 이종만에 대한 의혹이 불거져갔다.

KBS는 친일인명사전을 펴낸 민족문제연구소의 이용창 편찬실장에게 해당 글에서 크게 논란이 되는 세 부분을 짚어 무엇이 오해이고 사실인지 확인했다.

사진 출처 : 온라인 커뮤니티
이종만은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1급 친일파다?

강동원의 외증조부 이종만은 2009년 친일인명사전에 등록됐다. 하지만 이종만을 '1급 친일파'라고 지칭한 표현은 적절하지 않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친일인명사전 등재 시 '급수'를 구분하지 않는다.

"여러 사료와 문헌을 바탕으로 조사했고 그의 친일 행적을 다수 발견했다. 이종만 씨의 딸 이남순 씨가 펴낸 책에는 이종만 씨가 사회 환원으로 독립운동을 했다고 서술되어 있다. 하지만 학계에서는 이종만 씨의 사회 환원 활동과 독립운동과의 연관성을 찾지 못했다" (이용창 편찬실장)

친일인명사전의 수록 대상자는 '을사조약 전후부터 1945년 8월 15일 해방 때까지 일본제국주의의 국권침탈·식민통치·침략전쟁에 적극적으로 협력한 사람으로 매국노, 민족반역자, 부일 협력자에 이르기까지 그 범위가 넓다. 그중 민족문제연구소는 역사적 책임이 무겁다고 판단되는 사람들로 수록 대상을 제한했다.

사진 출처 : 민족문제 연구소 홈페이지 / 구글 마켓에서도 친일인명사전 어플을 다운로드할 수 있다.
이종만이 위안부 창설, 유지를 위한 자금을 지원했다?

이종만이 위문대에 기부했는데, 위안부가 위문대에 포함된 개념으로 이종만이 위안부 창설에 일조했다는 논란이다.

"위문대의 대는 주머니 대(袋)로 병사들에게 전하는 주머니라는 뜻이다. 위안대, 정신대 등의 부대 대(隊) 자와 다르다. 위안부가 위문대에 포함된다고 보는 건 잘못된 해석이다. 이종만 씨는 1937년에는 위문품대에 금 1,000원을 기탁했고, 1939년에는 1000원을 헌금해 통조림 3,600개를 구입했다고 기록돼있다. 우리가 공개하지 않은 자료에서도 마찬가지다. 물론 위문주머니를 만들기 위해 부녀자들이 동원되었지만 위안부와는 다르다. 다른 증거가 없는데 위안부를 위문대로 해석하는 건 왜곡이 될 수 있다" (이용창)

조선일보. 1937년 7월 21일 "종로 3정목 대동광업회사 사장 이종만 씨는 19일 애국부인회 조선본부를 찾아가 황군위문품대로 금 1,000원을 기탁했다. 계원은 감격해 이를 취했다고 한다"

매일신보. 1939년 7월 6일 "최전방에서 활동하는 장병들에게 보내는 위문대가 차츰 감소돼 가고 있는 것을 유감스럽게 여겨, 대동광주식회사 사장 이종만 씨와 전 회사원 일동이 현금 1000원을 지난달 28일 군 애국부에 헌금했다. 군 사령부는 이 뜻에 감격, 통조림 3,600개를 전선 제일선에 보냈다고 한다"

이종만이 친일 행위의 대가로 채굴권을 얻었다?

이종만의 사업과 부가 친일 행위의 대가라는 논란이다.

"정확한 연간 관계를 밝혀낼 수 없다. 어떤 분들은 이종만이 친일 행위를 해서 채굴권을 따냈다고 주장한다. 당시 채굴권을 따내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또한 주관적인 해석이다. 이종만 씨가 그 사업에 몸으로 부딪쳐 얻었는지, 돈을 주고 샀는지는 알 수 없다" (이용창)

증거가 있는 사실만 수록한 친일인명사전에는 이종만의 사업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이종만(1886~1977) : 강원도에서 지하자원 개발과 광산업에 종사하며 강원도 평강 개간사업, 함경남도 영흥 범포 개척 등을 추진했다. 1928년 함경남도 함흥과 신흥 등지에서 폐광 위기에 있던 금광을 개발하여 성공한 뒤, 평안북도 자성의 금은광구를 소유하여 '광산왕'으로 이름이 알려졌다. 조선 제일의 철광 자성광산도 소유했다. 서울에 거주하면서 1937년 6월 대동광업주식회사를 설립하며 사장에 취임했고, 대동광산중앙조합 이사장과 대동농촌사 이사장을 겸했다. 대동출판사도 설립했다"(친일인명사전)

K스타 강지수 kbs.kangji@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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