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은 돌고 도는 것…쌓아두면 인생도 멈춥니다”

-아산상 사회봉사상 받은 가수 김장훈씨-

가수 김장훈(40)은 바쁜 사람이다. 인터뷰를 하던 날도 스케줄이 다섯개나 잡혀 있었다. 그는 “신인보다 더 빡빡한 일정”이라고 말했다. 바쁜 생활은 전적으로 본인이 선택한 것이다. 라디오·TV 등 방송활동은 물론이고 비공식 행사의 무대라도 대부분 거절하지 않고 다 오른다. 그는 가진 돈을 다 내놓기 때문에, 열심히 안살면 큰일난다고 했다. “돈을 쌓아놓는 건 사람을 멈추게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때문에 “계속 추구하는 상황이 좋아, 스스로를 벼랑 끝으로 몰고간다”고 했다. “하루를 평생처럼 산다”는 김장훈의 빈번한 억대 기부는 이렇게 그의 방식으로 삶을 살아내기 위한 방편이기도 했다. 김장훈은 지난 20일 아산사회복지재단이 주는 제19회 아산상 사회봉사상을 수상했다. 그간 30억여원의 돈을 기부한 것도 모자라, 이번에 받은 상금 5000만원도 고스란히 내놨다. 그는 ‘새소망의 집’ ‘푸른학교’ 등 복지기관에 매달 1500만원씩 보내고 있고, 지난해에는 1억원을 들여 가출 청소년을 위한 쉼터버스 ‘꾸미루미’를 마련해 운영하고 있기도 하다. 정작 자신은 서울 마포구의 보증금 5000만원짜리 월세 아파트에 살고 있다. 모두들 손아귀에 돈을 움켜쥐지 못해 안달인 세상에서 그는 왜 내놓는 데 열중하는 걸까. 사람들이 ‘기부왕 가수’ 김장훈에게 가장 궁금한 건 그거다. 대체 왜? 지난 23일 오후 서울 여의도의 한 음식점에서 그를 만났다.

[경향과의 만남]“돈은 돌고 도는 것…쌓아두면 인생도 멈춥니다”

-왜 그렇게 많은 돈을, 그것도 자주 기부하는 겁니까.

“그렇게 묻는 사람들에게 저는 오히려 ‘이렇게 좋은 걸 왜 안하니’ 하고 묻고 싶어요. 물론 강요는 아니에요. 그러나 한번 해보면 진짜 행복하고 좋아요. 행복하니까 하는 거죠. 나같은 사람이 누군가를 행복하게 해줘서 그들이 행복해 하는 모습을 보는 건 정말 기쁜 일이에요. 그거, 중독입니다. 저는 사실 발이 먼저 들어가고 마음이 따라간 경우예요. 1996년, 그러니까 제가 ‘뜨기’ 전에, 어머니가 ‘너 돈 많이 벌면 엄마 좀 도울 수 있겠냐’ 해서 알았다고 했어요. 그때는 돈 벌 줄 몰랐죠(웃음). 98년에 ‘나와 같다면’이 히트하면서 돈이 생겼고, 그때부터 조금씩 하기 시작했는데, 비울수록 다시 채워지는구나 하는 걸 느꼈어요. 부, 명예, 인기는 ‘채울수록 마음이 작아지네’ 하고 느꼈는데 말이죠. 비우고 나니까 내가 자유로워지더라고요. 그렇게 점점 미쳐간 거예요. 원래 무언가에 잘 미치는 성격이거든요.”

김장훈이 기부를 시작한 해는 98년이다. 일산에서 불우 청소년을 위한 교회를 운영하고 있는 어머니의 권유로 ‘새소망의 집’ ‘푸른 학교’ 등에 1억원가량을 기부했다. 이후 99년 음반 계약금으로 받은 9억원 전액을 기부하면서 본격적인 ‘기부 인생’이 시작됐다. 그가 ‘미리 쓰는 가계부’를 쓴다는 건 한 TV 프로그램에 공개된 후 이미 유명해진 사실이다. 기부, 공연 등에 지출할 금액을 몇달 단위로 미리 기입해 놓고 그 금액을 제외한 나머지 돈으로 생활한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기부가 “내가 한 게 아니라 일종의 순환일 뿐”이라고 했다.

“이번 연말 공연을 위해 가을, 겨울 온갖 행사를 뛰면서 돈을 모았어요. 세계 최강의 공연을 하겠다고 팬들과 약속했거든요. 아무래도 이런저런 돈이 많이 들 것 같아서 열심히 모았죠. 그런데 매표 상황을 보니까 그것만으로도 적자를 안 볼 것 같아요. 그럼 내가 이것 때문에 모아놓은 돈은 보너스가 된 거잖아요. 팬들의 사랑 덕택에. 그럼 사람들에게 다시 돌려줘야죠. 그래서 모아뒀던 2억5000만원이랑, 이번에 받은 상금 5000만원이랑 해서 내놓은 거예요.”

-아무리 어머니의 권유였다고 해도 쉽지 않았을 텐데요, 처음에 그렇게 행동하도록 마음을 움직인 건 무엇이었나요.

“아마 제 성장기와 관련있는 것 같아요. 고등학교를 중퇴했고, 청소년기에 방황을 많이 했던 아픔이 있어요. 제가 그랬기 때문인지, 어머니가 교회에서 (사회에서 흔히 말하는) ‘비행’ 청소년들을 사역하는 일을 하셨어요. 그런데 이 아이들이 처음엔 거칠게 굴다가도 사랑으로 감싸면 펑펑 울면서 자기 이야기를 해요. 그때 그 아이들의 눈빛 속에 담긴 분노, 슬픔 같은 것들이 크게 다가왔어요. 사실 아이들은 영혼이 맑잖아요. 잘 도와주면 좋은 쪽으로 잘 변화하기도 하고. 그들을 위해 뭔가 하는 건 신나고 아름다운 일이에요. 그래서 그들을 도우려고 돈을 보내기 시작한 거죠. 그런데 그 일을 할수록 나를 둘러싼 우주도 아름답게 바뀌는 것 같아요. 어딜 가도 ‘좋은 일 한다’고 잘해주세요. 너무 고마워서 내가 이 사람들 봐서라도 잘 해야겠다 생각하죠.”

-돈 욕심은 없는 겁니까.

“가족을 위해 쓰는 돈에는 욕심이 많아요. 백수이던 내가 엄마, 누나, 조카를 도울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적같아요. 나는 월세 살아도 상관 없어요. 자신있게 ‘청년의 기상’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해요. 물론 나이는 중년이지만(웃음). 청년은 이사 자주해도 돼요. 월셋집 전전하던 엄마한테 집 마련해드려서 그게 지금은 마음이 제일 편해요. 저는 어려서부터 돈 욕심은 별로 없었던 것 같아요. 엄마가 항상 ‘사내 새끼가 돈 갖고 치사하게 굴지 마라’고 하셨거든요. 걸어오더라도 돈 ‘꼬불치지’ 말고 다 털어주고 오라고. 저도 물론 예쁜 옷 사고 맛있는 거 사먹고 이런 거 좋아해요. 다만 돈을 재어놓는 것, 이건 사람을 고여있게 하는 것 같아요. 등 따뜻하고 배부르면 정신이 죽죠. 저는 항상 통장이 마이너스가 되면 맞추고, 맞추고 하면서 벼랑 끝에서 살아요. 그래서 열심히 안살면 큰일 나요.”

기부는 “삶을 최대한으로 살아내는” 그의 생(生)의 방식과 깊은 연관이 있어 보였다. 그는 스스로를 ‘극단적 허무주의자’라고 칭했다. 꿈은 ‘후회없이 죽는 것’밖에 없다고 했다. 그러나 그가 느끼는 허무는 오히려 그날 그날 최선을 다해 살게 한다. “그냥 열심히 하루를 쌓다보면 마지막 날이 오는 것”이고, 때문에 “산다는 건 과정일 뿐 아옹다옹하는 게 아무 의미없다”는 것이다. 그는 계속해서 ‘벼랑’ 얘기를 이어갔다.

“예술가는 벼랑 끝에 서 있는 게 좋아요. 편안하게 있으면 진정한 바람을 체험할 수 없어요. 따뜻한 바람, 찬 바람, 비바람 다 맞아봐야 편안함이 좋은 것도 알고, 진짜 삶이 뭔지 알죠. 그래야 좋은 노래도 나올 수 있고요. 저는 ‘노래는 생각의 반영이고 생각은 생활의 반영’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좋은 노래는 편안하고 배부를 땐 잘 안나와요. 좋은 노래를 만들고 싶어서 예전엔 일부러 길에서도 자고 그랬어요. 삶도 마찬가지예요. 계속 뭔가를 추구하는 상황이 좋은 거죠. 꿈은 이뤄지는 순간에 허망해지는 것 같아요. 꿈을 꾸기 때문에 계속 설레는 삶이 좋은 거죠.”

-음악에 애착이 큰 것 같은데, 자신의 노래보다 기부가 부각되는 것 같아 아쉬운 점은 없습니까.

“저는 하루 종일 음악과 무대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노래와 무대를 전부라고 생각하고 살았고, 그래서 남들이 생각하는 세상 기쁨을 다 놓쳤지만 그래도 무대에 오를 수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감사해요. 사실 노래하는 사람은 노래로 부각돼야 하는데, 우리나라의 기부문화가 워낙 열악해서 나 같은 사람이 조명되는 것 같아요. 처음엔 부담스러워서 도망쳤어요. 그런데 계속 숨어있다보니 그러면 음악활동을 못하겠더라고요. 그래서 위기를 기회로 삼자 싶었어요. 더 초인적으로 열심히 하자 생각했죠. 그만큼 공연을 열배, 백배 더 제대로 보여주자, 해서 겨울 공연 연습을 6월부터 들어갔어요. ‘마에스트로 프로젝트’도 시작했어요. 트로트, 힙합, 록, 재즈, 뮤지컬, 클래식 등 여러 장르의 곡을 3개월에 하나씩 디지털 싱글로 발표하고, 그걸 다 모아서 내년에 발매될 10집 앨범에 오케스트라 협연으로 편곡해 담을 계획이에요. 다 마치고 술 한잔 하면 정말 뿌듯할 것 같아요.”

-오늘도 상대적으로 음악 얘기는 많이 못해 아쉽네요. 그렇게 노래하고 싶었던 이유는 무엇인가요.

“답답해서요. 어릴 때부터 기관지가 안좋아 초등학교 때 몇년 동안 병원 신세를 졌어요. 만날 하늘이나 보고 답답했죠. 누가 주입식으로 짓누르는 것도, 학교 가서 맞는 것도, 아버지 없는 자식이라는 편견도 모두 답답했어요. 어느날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는데 가슴이 시원하더라고요. 지금도 나는 소리를 추구하잖아요. 소리 지르면 내가 통쾌해지고, 내가 원하는 소리가 나오면 그걸로 족했어요. 지금은 노래로 다른 사람들을 위로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공연하면서 내 노래를 들어주는 그들이 없으면 나는 없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팬들, 공연에 대한 사랑이 각별하죠.”

-많은 사람들이 김장훈씨의 기부 활동에 감화를 받고 있는 것 같아요. 이렇게 기부했으면 좋겠다거나 기부 문화가 이렇게 바뀌었으면 좋겠다 하는 게 있습니까.

“어떤 방법이든 하면 좋다고 생각해요. 아무렇게나, 천원 내도 되고, 만원 내도 되고, 자랑해도 돼요. 무조건 하면 좋아요. 저는 돈을 많이 버니까 많이 내는 거지만 얼마를 하든 똑같은 거예요. 현장에 나가보면 많은 자원봉사자들이 있어요. 그분들은 제가 마음 깊이 90도로 허리 숙여 인사하는 사람들이에요. 돈을 내는 건 나한테 쉬워요. 그러나 몸으로 봉사를 나가는 건 고생스럽기 때문에 나가기 전에 나를 설득해야 하는 과정이 있어요. 그런데 그 사람들은 아무도 안 알아주는데 그냥 가서 하는 거잖아요. 나는 연예인이니까 누가 알아주기라도 하죠. 그분들은 정말 존경스러워요. 그렇게 하면 더 좋고요. 생색내도 돼요. 세상에 그런 거 다 숨기고 할 만큼 그렇게 숭고한 사람은 없다고 생각해요.”

▲김장훈은?

1991년 1집 타이틀곡 ‘그곳에’로 데뷔했다. 1, 2집을 실패하고 밑바닥 생활을 전전하다 동아기획을 찾은 그는 3집 ‘노래만 불렀지’로 반향을 일으킨다. 98년 4집에 수록된 발라드곡 ‘나와 같다면’이 히트를 쳤고, ‘세상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사노라면’까지 인기를 얻었다. 이후 방송 출연이 잦아졌으며 재치있는 입담으로 유명인사가 됐다. ‘난 남자다’ ‘슬픈 선물’ ‘오페라’ 등의 히트곡이 계속 나왔다. 독특한 아이디어로 팬들을 즐겁게 하는 공연으로도 정평이 나 있다. 물을 뿌리거나 별이 쏟아지게 만드는 특수효과뿐 아니라, 공연 때마다 비상식량이 담긴 배낭을 배포하는 등의 배려로 팬들을 감동시킨다. 올 연말에도 블록버스터급 공연을 준비중이다. 12월21~24일 서울 올림픽공원 올림픽홀에서 ‘2007 김장훈 크리스마스 콘서트 원맨쇼’를 펼친다. 그는 “올해는 배낭에 하이힐을 신은 여성 관객을 위한 슬리퍼도 담았다”고 귀띔했다. 현재 MBC 예능 프로그램 ‘공부의 제왕’ 진행을 맡고 있으며, 7개 라디오 방송의 고정 게스트로 활약중이다.


〈글 이로사·사진 박재찬기자 r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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