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태조가 수도를 한양으로 옮긴 이듬해인 1395년부터 1910년 한일합방으로 경성부로 개칭될 때까지 516년간 사용한 조선 왕조 수도의 행정구역명이자 관청명으로, 오늘날의 서울특별시에 해당한다.
한성부의 관할지역은 도성 안과 성저십리(城底十里; 도성으로부터 사방 10리까지의 지역)였다. 지리적 범위는 대략 북으로 북한산, 남으로 한강 노도, 동으로 중랑천, 서로 사천(모래내)에 이르렀고, 도성의 범위는 백악산(북악산), 낙산, 목멱산(남산), 인왕산을 연결해 쌓은 둘레 약 18km의 성곽 안쪽이었다.
한성부의 관할업무는 크게 호적·혼인·시전·부역·진휼·풍속 관리 등 행정업무와 도로·화재·공공위생·시체검시 등 도시관리업무로 나누어진다. 형조, 사헌부와 함께 사송관련 업무를 관할하는 조선시대 삼법사(三法司) 중 하나로 사법기능도 부여되었는데, 주로 민사소송을 다루고 구타·절도·채무 관련 형사사건도 담당하였다. 가장 중요한 업무 중 하나는 호적관련 업무로 단지 한성부뿐 아니라 전국의 호적을 관장하였다.
한성부의 행정체계는 고려 말 개성부의 관제를 계승한 것으로, 시기에 따라 여러 차례 변화하였다. 성종 5년(1474) 간행된 <경국대전>에 따르면 예종 때 개편된 한성부 직제는 판윤 1명, 좌윤과 우윤 각 1명, 서윤 1명, 판관 2명, 참군 3명으로, 이 직제는 숙종 때까지 지속되었다. 이중 6조판서와 동등한 정2품직 판윤은 현재의 서울시장에 해당되는 자리로 시기에 따라 판부사 또는 부윤으로 불리기도 했다.
시기별 차이는 있지만 종5품 이상 관직은 대략 6~8명이고, 실무직인 서리, 서사, 서원, 사령 등까지 합치면 관원수는 약 90명이었다. 실무는 기능별 관리조직인 육방조직이 담당하였는데, 호방은 호적과 시전·가옥 관리, 예방은 왕가의 간택과 묘지소송, 병방은 도성 내 순찰과 화재 관련, 형방은 시체검시와 치안, 공방은 도로·교량·하천 관리 업무를 맡았다.
지역별 하부조직은 5부(북부, 중부, 남부, 동부, 서부)로 구성되고, 5부의 하위조직으로 방(坊), 방의 하위조직으로 계(契)를 두었다. 태조 때는 5부 52방, 세종 때는 5부 49방이었고, 영조 때에는 5부 46방 328계로 구성되었다. 5부 방 체제에 편성된 몇 곳의 성저십리 지역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도성 내부의 행정체제로 기능하였다.
한성부 관청은 궁궐 앞 광화문 육조거리의 호조와 이조 중간에 있었다. 한성부의 인구는 세종 10년(1428) 당시 10만 9,372명(도성 내 10만 3,328명, 도성 외 6,044명)이었는데 이는 비슷한 시기 유럽 주요도시의 인구에 뒤지지 않는 수였다. 이후 정조 4년(1780)에는 인구가 약 2배로 증가하여 20만 1,070명이 거주하였다.
조선의 중앙정치기구
참조항목
의정부 |
백관(百官)을 통솔하고 서정(庶政)을 총리하던 조선시대 최고의 행정기관. |
승정원 |
조선시대 국왕의 비서기관. |
의금부 |
조선시대의 사법(司法)기관. |
사헌부 |
고려·조선시대의 관청. |
한성부 |
조선 왕조 수도인 한양의 행정구역 명칭이자 수도를 관할하는 관청의 명칭이다. |
사간원 |
조선시대 언론을 담당했던 기관. 국왕에 대한 간쟁(諫諍)과 논박(論駁)을 담당한 관청. |
홍문관 |
조선시대에 궁중의 경서(經書) ·사적(史籍)의 관리, 문한(文翰)의 처리 및 왕의 자문에 응하는 일을 맡아보던 관청. |
춘추관 |
조선시대에 시정(時政)을 기록하는 일을 맡아보던 관청. |
성균관 |
고려말과 조선시대 최고의 교육기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