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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몽골, 그 천년의 비밀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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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한국과 몽골, 그 천년의 비밀을 찾아서

<기황후>, 한·몽 관계를 왜곡하다 ⑦

드라마 <기황후>는 보편적인 한국인들의 왜곡된 역사인식을 보여준다. 드라마에서는 몽골은 오랑캐라는 것이다. 그래서 노예 상인의 입을 빌려 "힘없는 나라에 태어난 것, 그래서 버림받는다는 것, 죄 중에 가장 무서운 죄(罪)이지"라고 한다(23부). 고려 폐주 왕유는 "칼을 들고 싸운 것은 원나라 때문이고 … 적을 품에 안아 심장을 노릴 수 있다."고 비분강개하고 있다(24부). 전체적으로 원나라에 대한 분노가 과잉상태이다. 이것은 이 작가나 PD가 잘못된 역사교육을 너무 오랫동안 받아온 탓이다.
원나라는 일본과 베트남 정벌에 실패하였다. 베트남의 열대 밀림은 일본의 가미가제(神風)과 함께 원나라 군대로부터 자국을 보호한 일종의 수호신이었다. 이들을 제외하고는 몽골군이 들어갈 수 있는 모든 영토가 원나라에 복속되었다. 베트남과 일본을 제외하면 고려가 유일하게 독립성을 유지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라마 <기황후>는 지나치게 분노를 터뜨리고 있다. 이것은 역사를 왜곡시키면, 그 후유증이 얼마나 오래가는지를 보여준다(이 역사의 왜곡은 조선 태조 이성계와 정도전, 후에는 조선의 인조에게도 책임이 있다. 다른 장에서 상술할 것이다).

지금까지 고려인과 몽골인들의 특수한 관계에 대하여 많은 이야기를 했다. 이를 통해, 몽골이 단순히 고려가 해전(海戰)에 강하고 강력한 군사력을 가졌기 때문에, 또는 독종이었기 때문에, 사신이나 다루가치를 살해해도 내버려 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이제 몽골이 왜 고려인(한국인)들에 대해서 형제같이 인식을 했는지 그 역사의 비밀들을 본격적으로 찾아가야 할 시점이다.

필자는 그 동안 몽골과 한국과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친연성(親緣性)에 대해서 이미 <대쥬신을 찾아서>(해냄, 2006)에서 충분히 밝혔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좀 더 다른 각도에서 그동안 나온 모든 논의를 종합적으로 검토하여 한국과 몽골의 정체성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이를 통해, 수천 년 동안 밝혀지지 않았던 한국과 몽골의 역사적 비밀을 추적해 갈 것이다.

이 부분은 두 가지 방향에서 검토할 것이다. 첫째는 공식적인 사서(史書)들을 중심으로 먼저 살펴보고(7장), 둘째는 고고학이나 현대 유전과학의 기법들로 밝혀진 부분으로 살펴볼 것이다(8장).

먼저 공식적인 사서(史書)와 역사학자들의 연구들을 중심으로 살펴보도록 하자. 이 부분은 많이 어렵고 지루한 부분이기는 하지만 원나라와 고려의 관계에 대한 천년(千年)의 비밀(秘密)을 밝혀낼 수 있는 중요한 고리이기도 하다.

전설의 미녀 쿨란의 나라, 메르키드 코리아

몽골인은 한국을 솔롱고스(Solongos : Солонгос) 또는 고올리, 가올리 올스(Гаули улс), 코리(Кори), 솔롱고(Солонго), 솔호(Солхо) 등으로 부른다.(주1) 솔롱고스에 관한 가장 오래된 사료는 1240년 전후에 편찬된 것으로 추정되는 <몽골비사(蒙兀秘史)>로 "주르치드와 솔롱고스(莎郞合思)에 원정했던 잘라이르타이-코르치"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솔롱고스라는 단어 옆에 한자로 고려(高麗)라고 표기하고 있다.(주2)

칭기즈칸은 메르키드족(Merkid)을 정벌하여 미녀 쿨란(Kulan 또는 Khulan, 1164∼1215 : 메르키드족)을 얻었는데, 이 메르키드가 솔롱고스라고 불렸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주3) 쿨란 공주는 17세기 문헌인 <몽골원류>와 <알탄톱치> 등의 사서에는 '솔롱고스의 공주'라고 기록되어있다. 당시의 솔롱고스가 고려(高麗) 또는 발해(渤海) 또는 신라(新羅) 가운데 어떤 것을 의미했는지는 명확하지는 않지만, 메르키드를 솔롱고스와 동일하게 인식한 것은 분명하다. 이것은 몽골인이 몽골의 한 부족인 메르키드가 남하하여 고구려(부여)를 건국했다고 믿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1204년경 메르키드는 셀렝게(Selenge)강 일대를 주무대로 활동했던 부족이었다. 전설적인 미녀 쿨란 공주가 메르키드이니까 몽골인들은 아마도 고려 여인들을 가장 아름다운 사람들로 생각한 듯도 하다.(주4) 몽골인들은 메르키드족의 일부가 동남으로 진출하여 대흥안령 북부 훌룬부이르(Hulunbuir) 몽골 초원에 이르러 일부 국가를 구성하기도 하고 한반도 쪽으로 이동해갔다고 보고 있다. 그 유적으로 알려진 것이 부이르(Buir) 호반의 유명한 고올리칸(弓王: Goolikhan) 석상이다.

솔롱고스의 피가 흐르는 칭기즈칸

비공식적이지만 공인된 사실로, 칭기즈칸의 생부(生父)는 예수게이(Yesügei, ?~1171)가 아니라 메르키드(솔롱고스)족인 예케 칠레두(Chiledu)이다. 예수게이는 칠레두의 아내였던 임신한 후엘룬(Hoelun)을 납치하였고, 이때 태어난 아이가 바로 테무친(鐵木眞 : 칭기즈칸)이다. 당시 후엘룬은 출산을 위해 고향으로 가던 길에 오논(Onon) 강변에서 예수게이에게 납치당한 것이다. 그렇다면 칭기즈칸 역시 솔롱고스(메르키드)의 피를 이은 사람이다. 따라서 원나라 황실은 솔롱고스의 피가 흐르고 있다. 아마 이것도 원나라가 고려에 대해서 특별히 생각하는 중요한 원인이었을 수가 있다.

<원사(元史)>에 "박사인보카(박불화)는 자(字)가 덕중(德中)이고 솔롱고스 사람이다."라고 되어있다.(주5) 즉 고려 대신에 솔롱고스(肅良合台)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원사>에 원 혜종(순제)이 기황후에게 책과 보물을 주면서 "너 솔랑카(肅良合 : 고려를 의미)씨는 명족(名族)에서 독실하게 태어나 이 나라로 와서 짐을 몸소 섬겼고, 조심하고 삼가면서, 낮밤으로 항상 신실하였다. 오랫동안 공손하며 검소하게 아랫사람들을 이끌어 왔다."라고 하였다.(주6)

이 같은 사실로 미루어 볼 때, 13세기 이전에 몽골에서는 '솔롱고스'라는 말이 널리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주7) 그동안 솔롱고스는 청나라 초기에 등장한 "솔론(Solon)이라는 부족과의 관련성이나 '무지개의 나라'라는 말과도 관련이 있는 것처럼 생각되었으나 최근의 일부 몽골 연구들은 이를 부정하고 오히려 역사적인 근거를 찾는 데 집중하고 있다.(주8) 즉 당시 몽골인들이 신라(新羅)의 존재를 알았고, 그 신라라는 이름이 전달되는 과정에서 솔롱고스가 되었을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주9)

이와 같이 사서들에서는 고려(한국)를 '솔롱고', '솔롱고스'라고 표기하고 있지만, 실제로 입에서 입으로 전하는 말은 '코리', '고올린 올스'라고 부르는 경우도 많다. 몽골의 동부 지역에는 고올린 올스(고려)라는 이름과 관련 있는 구전(口傳), 역사, 전설, 성터, 석인상, 조개무지, 오보 등이 산재해 있다(아직도 이 부분은 구체적으로 연구된 바가 없다). 따라서 몽골인들이 한국인들을 부를 때 솔롱고스 또는 코리, 고올린 올스(까오리, 고려 등의 음사로 추정) 등으로 불렀고, 이 말들은 오래전부터 사용된 말임을 알 수 있다.

메르키드(솔롱고스) 족들의 거주지와 이동 경로와 고올리 성읍터의 유적들을 추정해보면 몽골인들이 생각하는 고구려인(부여인)들의 이동 과정을 알 수 있다.

▲메르키드 이동과 부여의 유적 및 중심지. ⓒ김운회
즉 몽골인들은 메르키드의 일부가 셀렝게강에서 거주하다가 남하한 것으로 보는데 고올리 성읍터(고구려 유적) 들은 부이르 호에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동명성왕의 원주지로 추정되는 곳(주10)이 대흥안령 북부 지역이므로 이후의 부여 지역의 유적들을 함께 표시하면 대체로 메르키드는 셀렝게 → 부이르호 → 동명성왕 원주지 → 눙안 등지를 거쳐 한반도로 유입된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알타이를 중심으로 대흥안령 산맥과 함께 오르도스를 경유하여 중국 내부로 들어간 경우도 있으므로 이를 청동기 유적지와 비교하여 다시 솔롱고스의 이동 경로를 추정해보면, 아래와 같이 될 것이다.([그림 ②]) 오르도스를 경유해 들어간 부족들은 메르키드를 포함한 몽골의 다양한 부족일 수도 있다.
▲ 청동기 유적지 및 몽골족들의 한반도로 이동. ⓒ김운회

한국은 몽골의 한 부족인가? 몽골은 한국의 한 부족인가 ?

몽골 학자 바트술해(Batsuuri) 교수에 따르면, 몽골과 고구려는 5세기부터 활발히 교류해왔으며 400년 몽골의 니런(Nirun) 지방과 고구려 사이에 공식적 외교관계가 성립되었다고 한다. 479년 니런 군주와 고구려 군주는 만주 디고간(Digogan) 지방을 함께 공격하기로 하고 동맹을 맺었다. 몽골 학자 달라이에 따르면, 400년대 중반에 고구려(또는 부여)를 지칭하는 '솔롱고스'라는 명칭이 몽골인들 사이에서 이미 사용되었다고 한다.(주11)

오치르(Aio'dync Oehir) 교수는 "몽골 사람들은 한국을 솔롱고스라고 하는데 17세기 말까지 메르키드(Merekid), 발가(Barga), 부리야트(Buryat) 등의 몽골 일부 부족을 역시 솔롱고스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 때문에 몽골인들은 그들의 종족의 일부가 한반도까지 남하하여 까우리(Khori : 코리)의 나라인 코리어(Korea)를 건설했다고 믿고 있다.

현대 몽골의 대학 교재나 교양서적에서는 몽골 지역의 고대유목국가의 역사를 기술할 때 그들의 영토 중 동쪽에 접하는 나라로서 '솔롱고스'를 기록하고 있는데 원나라 시대를 기록할 때에는 '솔롱고스'와 '고올리(高麗 : Korea)'라 섞어 쓰고 있다. 이 때 솔롱고스나 고올리는 모두 한국을 뜻하는데 시기적으로는 고조선 - 부여․고구려 - 통일신라 - 고려 등을 포괄하고 있다. 예를 들면, 흉노(匈奴), 선비(鮮卑), 돌궐(突厥) 등의 북방유목제국과 동쪽으로 경계를 지는 나라로서 솔롱고스를 언급하고 있다. 이 때 솔롱고스는 '부여' 때로는 '고구려'이다.(주12)

부여와 몽골은 동류

몽골은 8세기 무렵 아무르강 상류인 에르군네(Ergüne)하(河) 유역에서 몽골실위(蒙兀室韋)라는 이름으로 처음 등장하여 당(唐)과 위구르 등이 와해되는 틈을 타서 지속적으로 서쪽으로 진출하여 11∼12세기 무렵에는 오난江(Onan河) 일대까지 진출한다. 오난강(江)으로 진출한 몽골은 케레이드(Kereyid), 메르키드(Merekid), 타타르(Tartar), 나이만(Naiman) 등의 부족들과 서로 다투면서 성장하다가 1206년 칭기즈칸(成吉思汗)이 이들을 통일하여 세계제국을 건설한다.

공식적인 사서들의 기록에 따르면, 몽골은 동호(東胡)에서 나왔는데, 동호들 가운데 남부 사람들이 거란(契丹 [쇠단 ?])이 되었고 북부 사람들이 몽골(실위)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들은 당나라 때에는 현재의 흑룡강 부근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이 때 몽골 또는 머골(蒙兀)이라는 이름이 나타났다고 한다. 구체적으로 몽골과 거란은 동호(東胡) → 선비(鮮卑)·오환(烏桓) → 거란(남)·실위(북) 등의 계통을 밟는다. 여기서 실위(室韋)가 바로 칭기즈칸의 몽골과 직접 관련이 있다.

실위(室韋)는 <위서(魏書)>에 처음 등장하는데 실위(失韋)라고도 쓰지만 수당대 이후 실위(室韋)로 통일하여 사용하였다. 대부분 연구자들은 실위라는 말이 몽골어의 '삼림(Siγui[시귀])'에서 나왔다고 보지만, 서양 선교사 연구자인 펠리오(P.Peliot)는 선비(鮮卑)에서 나온 말로 보고 있다.(주13) 만약 실위가 몽골어의 삼림에서 나왔다고 하면, 이 말은 만주족들을 가리키는 물길(勿吉[웨지] : 만주어로 삼림)이나 왜(倭[와]), 옥저(沃沮[오쥐]) 등과도 다르지 않다.
<수서(隋書)>에는 "실위는 거란의 한 종류이다. 남쪽에 있는 사람들을 거란이라 하고 북쪽에 있는 사람들을 실위라고 부른다."(<隋書>「室韋傳」)라고 하였다. <구당서(舊唐書)>와 <신당서(新唐書)>의 「실위전(室韋傳)」에는 "실위는 거란의 별종으로 … 황룡부(금나라 수도) 북쪽에 있고 … 적게는 천호에서 많게는 수천호로 하천과 계곡 근처에서 흩어져 살며 … 비록 용감하여 전쟁을 잘하지만 강국이 되지 못했다."라고 한다. 이들은 "때로 모여서 사냥하고 일이 끝나면 흩어졌다.(<구당서>)"고 하는데 그래서 <신당서>에서는 신속(臣屬)이 되지 않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每戈獵卽相嘯聚 事畢去 不相臣制)고 했다. 즉 당나라 시대까지도 이들은 정상적인 국가체제를 형성하지 못했던 것이다.

중국의 장지우허(張久和)는 "실위는 당연히 선비(鮮卑)의 후예지만 탁발 선비의 귀족들이 이들처럼 정상적인 국가체제를 갖추지 못한 사람들을 자신들과 분리하여 실위라고 했다."고 한다.(주14) 즉 동족(同族)이라도 제대로 된 국가체제를 갖추지 못하고 잡거(雜居)하였기 때문에 실위라고 했는데 일종의 비칭(卑稱)이다. 마찬가지로 같은 예맥(濊貊)이라도 고구려인이나 부여인(夫餘人)들은 잡거하는 예맥과 분리하여 서술한 경우도 많이 나타난다. 거란과 해(奚)의 경우도 동일하다. 해(奚)는 거란의 원류지만 거란이 국체로 형성되었을 때는 일종의 거란 변방인 실위와 동일하게 취급되었다.

344년 선비족들 내부에서 모용부(慕容部)가 우문부(宇文部)를 정벌하자 우문부의 일부가 달아나 송막[松漠 : 현재의 시라무렌(西拉木倫) 및 랴오하(老哈河)강 일대의 천여 그루 송림 지대]으로 가서 자리를 잡았는데, 이 때 이들의 명칭이 거란, 고막해 등이었다.(주15)

그런데 <위서(魏書)>에는 북부여의 후예들인 두막루(豆莫婁 또는 달말루 : [더모로?])가 실위의 동쪽에 살았는데 <신당서>에서는 "고구려가 부여를 멸하여 유민들이 나하(那河 : 현재의 눈강과 제1송화강)를 건너 그 곳에 거주했다."(<新唐書>「東夷傳」)고 한다. 즉 부여의 후예(두막루)가 실위의 거주지 쪽으로 이동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당시 실위가 눈강 유역에 거주하고 있었다는 것을 고려하면, 부여의 유민들과 실위인(거란, 고막해)들이 섞여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주16)

여기서 중요한 점은 <위서>에서 "거란, 고막해(실위), 두막루의 언어가 같다.( <魏書>「室韋傳」)"고 한 것이다. 언어란 하루아침에 바뀌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위진 남북조 시대에는 부여 및 고구려(부여의 별종) 등과 이들 실위가 다른 민족들이 아님을 말해주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부여나 고구려와 실위가 같은 종족이었다는 말이다. 다만 지역적으로 흩어져 있다가 이 시기에 합류한 것이고 그 지역이 바로 눈강(嫩江, Nèn Jiāng) 유역이었을 뿐이다.

남북조 시대에 두막루는 실위의 동쪽에 있었고, 당나라 때에는 달말실위로 불렸다.(주17) 즉 부여의 후예들도 실위로 불렸다는 것이다. 결국 고구려계(부여계)와 동호계인 실위가 민족적으로는 큰 차이가 없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위서>에 따르면, 남북조 시대의 실위는 주로 고기잡이와 사냥을 하면서 생활하였다. 그러나 당나라 후기에 이르면 실위의 일부가 쿨룬 부이르 초원과 음산산맥 북부, 몽골 고원 등으로 이동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이들이 기르는 가축 수가 크게 증가하고 양(羊)과 같은 새로운 가축 품종을 기르기 시작했다. 몽골 쪽으로 이동해간 실위는 이전의 수렵과 어로(漁撈), 일부 농업 등의 경제에서 대규모 유목경제(遊牧經濟)로 탈바꿈하기 시작한 것이다. 9세기 중반에 나타나는 이러한 변화들은 <자치통감(資治通鑑)>, <당회요(唐會要)>, <책부원귀(冊府元龜)>, <신오대사(新五代史)> 등에 상세히 나타나고 있다. 특히 요나라 시기(10∼11세기)에서는 말과 낙타 등에 대한 대규모의 세공(歲貢)들이 나타나고 있다.(주18) 10세기 초에 이르면 일부 실위 부족들은 유목을 위주로 하고 사냥으로 보완하는 단계에 진입하게 된다.

▲ 실위 부족들의 분포도.張久和(2009, 그림 화보)에서 재구성 ⓒ김운회
그뿐만 아니라 이 시기의 실위는 상당한 수준의 금속 제련술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신오대사>에서는 "그들은 솜씨가 좋아서 구리와 철로 만든 여러 그릇들이 모두 아름답고 훌륭하였다."라고 하였다(<新五代史> 卷74 「四夷附錄第二」 胡嶠陷虜記). 그리고 이 시기를 전후로 하여 기존의 거주방식인 소거(巢居 : 여름)와 혈거(穴居 : 겨울)로 부터(<隋書>「室韋傳」) 게르(Ger : 몽골 천막)로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이것을 알 수 있는 사료는 <요사(遼史)>인데, "(901년) 요나라 태조 야율아보기가 실위 등의 부락들을 정벌하고 천막을 노획하였는데 그 수는 헤아릴 수도 없었다."고 한다(<遼史>卷34「兵衛志上」) 바로 이런 터전 하에서 몽골 제국이 기지개를 켰던 것이다.

쇠는 모든 한국인의 심볼

<수서(隋書)>나 <북사(北史)> 등에 따르면, 거란과 실위는 기원이 같고, 남부인들을 거란, 북부인들을 실위라고 한다고 했다. <위서>에는 "실위의 언어는 거란, 고막해, 두막루와 같다( <魏書>「室韋傳」)"고 하고 <요사>에서는 "거란이 해(奚)와 언어가 서로 통하니 사실상 하나의 나라다.(<遼史>卷73「耶律曷魯傳」)"라고 한다. 그러면 이들의 민족 또는 국가 명칭들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고 그것이 어떻게 민족의 정체성을 찾아갈 수 있게 하는 지 알아보자.

몽골의 원류인 동호계(東胡系)는 주로 해(奚 : 현재의 내몽골 지역 - 거란 원류지만 거란이 국체로 형성되었을 때는 일종의 거란 변방인 실위와 동일하게 취급), 실위(室韋 : 현재의 몽골과 아무르, 북만주 지역 - 몽골 원류) 등인데(주19), 이 한자 말들은 서로 다르게 보여도 발음은 모두 [쉬] 또는 [쇠(iron - 鐵)]에 가깝게 나타난다. 즉 해(奚)는 씨[xī], 실위(室韋 shiīwéi : 반절법으로는 式質切)는 정확한 당시의 발음은 알 수 없더라도 [쇠] 또는 [시에] 등으로 추정되므로 일반적인 한국인을 의미하는 쉬(濊 : 예) 또는 쉬모(濊貊 : 예맥)과도 별로 다르지 않다. 이 가운데서 해(奚)는 거란(契丹)이 되고 실위(室韋)가 바로 몽골이 되었다고 한다.(주20)

평생을 알타이 연구에 바치신 박시인 선생은 "거란(契丹)이란 이름이 의미하는 쇠[빈철(賓鐵)]도, 금나라의 쇠[金]도 다같이 '새 아침'의 새[新]라는 말에서 온 것이며 몽골(蒙兀)란 이름이 의미하는 은(銀)도 쇠의 일종이다."라고 분석하였다.(주21) 쇠는 태양의 다른 형태로 땅속의 태양을 의미한다. 쇠는 유목민들의 가장 중요한 상징이며 쇠의 가장 고귀한 형태가 바로 금(金)이다. 금은 인간의 역사가 존재했던 한 화폐이며 보물이었다. 중간 상인이자 금은 세공업자였던 알타이 중심의 유목민들에게는 청동기 기술과 금은 세공 기술의 개발과 유지 발전은 매우 중요한 것이었고 부(富)의 원천이었다. 현대로 말하면 최고의 부가가치를 지닌 ICT나 반도체 산업에 해당되는 최첨단 기술이자 산업이었다. 금은 가벼운 데 비해 워낙 고가에 거래되므로 이동을 위주로 하는 유목민들에게는 더 없이 유용한 산업이다(이 부분에 대해서는 <대쥬신을 찾아서(2006)>에 충분히 해설되어있다).

<신오대사(新五代史)>는 거란과 동류인 "쉬[奚(해)]는 본래 흉노(匈奴)의 별종", <북사(北史)>는 "쉬[奚]는 거란(契丹 : [쇠단?])과 이종동류(異種同類)로 본래 고막해(庫莫奚 [구모쉬?])라 하였는데 그 선조가 동호(東胡)의 우문(宇文)의 별종"이라고 한다. 요(遼)나라의 태조(太祖)가 쉬[奚(해 : 거란인들 가운데 잡거하고 있던 사람들)]를 정벌하면서 "거란과 쉬[奚]는 언어가 서로 통하니 하나의 나라이다."라고 했다.(주22) 요나라는 거란의 발상지인 현재 내몽골 자치구 빠린줘치(巴林左旗)를 상경(上京)으로 하였다.(주23)

▲거란(쇠단) 발상지. ⓒ김운회

박원길 교수에 따르면, 거란[쇠단]은 5세기 무렵 시라무렌(Siramuren) 강변 일대에서 발원한 몽골족계의 유목민족으로 원명은 키타이(Kitay[쉬타이])이며 그 뜻은 '(쇠)칼날'이라고 한다. 거란[쇠단]은 정복왕조(Conquer Dynasty)의 효시라고 불릴 만큼 초원의 전통 제도를 바탕으로 새로운 시대이념을 창출했다. 거란[쇠단] 제국의 창시자인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 : [야루 아버지?(father of Yalu?)])는 초원민족의 전통인 샤머니즘을 시대이념의 중심으로 삼았고 흉노 이래의 전통인 직접 참여민주주의 전통 즉 무엇을 하던 간에 다수가 모여 반드시 먼저 하늘의 뜻을 확인하는 절차를 의무화했다. 이러한 시대 이념을 통해 거란[쇠단]은 초원민족들의 자발적인 귀부를 받으며 놀라운 속도로 몽골고원을 평정해 갔다. 당시 서양 사람들은 동아시아 자체를 키타이(Kitay) 제국이라고 불렀다. 그들의 눈에는 거란[쇠단]이 바로 동아시아 지역의 대표주자로 보였던 것이다.(주24)

흉노는 알타이를 중심으로 거주한 포괄적인 유목민 집단으로 한국인, 몽골인, 터키인 등으로 분리되기 이전 단계의 선민족(先民族)으로 볼 수 있다. 흉노의 군주는 동방계 유목민족들의 세계관을 반영하여 자신을 '하늘의 아들(Tenggeri kotu)'이라고 칭했다. 그리고 이 구도에 맞추어 유라시아세계에 관통하고 있었던 자연법적 인식체계를 신격화된 하늘(Tenggeri) → 흉노의 군주 → 백성이라는 3분 구도로 체계화시켰다. 흉노의 군주는 유능한 군사령관이자 하늘의 뜻을 백성에게 전하는 최고 사제(司祭)로서의 지위를 거머쥔 것이다.(주25) 단군왕검(檀君王儉)과 완전히 일치하는 개념이다.

몽골에 나타나는 고구려 유적들

시간이 흐를수록 몽골이 고구려와 관련이 있다는 증거들이 지속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몽골 지역에서 고구려를 구성한 민족 즉 맥족의 고올리(高句麗) 성읍터나 구비전승 자료들이 광범위하게 발견되고 있다. 박원길 교수는 이 맥족의 고올리 즉 '모골' 또는 '머골'에서 몽골이 나왔다고 보고 있다. 그런데 맥족의 고올리란 맥족의 나라라는 뜻이므로 고구려나 부여, 백제와 별도 다르지 않다.

▲고올리의 성읍터. ⓒ김운회
몽골 학자 수미야바타르(Б.Сумъябаатар) 교수는 보이르호 남쪽호반에 서 있는 고올리칸 훈촐로를 동명성왕상(東明聖王像)이라고 주장한다. 박원길 교수는 고구려가 기원적으로 몽골과 유사성을 가진 민족으로 원래 코리(Khori)족 또는 맥족(貊族)이 남하하여 만든 국가라고 한다. 박원길 교수에 따르면, 코리족(Khori : 솔롱고스)이란 동몽골의 광활한 대초원인 메네긴탈(Menengintal)에 살던 민족으로 케룰렌(Kerulen) 강과 할하(Halh :Халх) 강 유역에서 동북대평원 멀리 흑룡강(黑龍江)과 송화강(松花江) 일대를 경유하여 남하한 부족들이라고 한다.

칭기즈칸의 후예로 알려진 바이칼의 부리야트(Buryat)족은 바이칼 일대를 코리(Khori : 솔롱고스)족의 발원지로서 보고 있으며, 이 부리야트(Buryat)족의 일파가 먼 옛날 동쪽으로 이동하여 만주 부여족의 조상이 되었고 후일 고구려의 뿌리가 되었다고 믿고 있다. 김병모 교수(고고학)에 따르면 이 종족이 한국인들과 유전인자가 가장 가까운 종족이라고 한다. 강길운 교수(언어학)는 고구려의 지배층이 사용한 몽고계 언어는 부여어로 부리야트 방언의 고대어로 추정되며 부여는 Burit(Burya-tu 사람)의 Burya[부리야]를 의미하고 그것은 몽골족의 한 갈래라고 주장하였다. 강길운 교수는 108개의 고구려 지명들 가운데 몽골계가 68개가 대응하고 있으며 만주어(滿洲語)와는 31개, 터어키어와는 30개, 길략어와 가야어(伽倻語)와는 13개가 대응한다고 분석하였다.(주26) 몽골 연구가인 정재승 선생에 따르면 이런 얘기는 동몽골이나 바이칼 지역에서는 상식적인 이야기로 이 지역 사람들은 동명왕을 코리(Khori)족 출신의 고구려 칸(Khan)이라 부른다고 한다.

동호는 동이

이제 보다 근본적으로 몽골이 그 뿌리를 두고 있는 동호(東胡)와 한국인들로 일반적으로 지칭되는 동이(東夷)와의 관련성을 검토해 보자. 동호계(東胡系)는 주로 쉬[奚(해) : 현재의 내몽골 지역], 쉬웨이[室韋(실위) : 현재의 몽골 지역) 등인데, 이 가운데서 쉬[해(奚)]는 거란(契丹)이 되고 쉬웨이[실위(室韋)]가 바로 몽골이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결론부터 말하면, 동호(東胡)는 일반적인 한반도 사람들을 의미하는 동이(東夷)와도 다르지 않다. 이 점을 구체적으로 보자.(주27)

첫째, 동호라는 말은 역사서에 잠깐 나온 말로 동북방의 오랑캐를 일반적으로 지칭하는 말에 불과한데 이것을 대부분의 사가들이 특정 민족의 이름으로 받아들여 역사 연구에 혼란이 왔다. 즉 동호(東胡)란 동이(東夷)라는 말과도 다르지 않다. 동호라는 말은 <일주서(逸周書)>, <산해경(山海經)>등의 책에 보이기는 하나 신뢰하기 어렵고, 사서에는 <사기(史記)>에 처음으로 나타나는 말로 "연나라 장수인 진개(秦開)가 동호(東胡)를 기습하여 공격하니 동호는 1천여 리의 땅이 빼앗기고 말았다."라는 기록이 있다. 그런데 같은 사건을 <삼국지>에서는 <위략(魏略)>을 인용하여 동호 대신에 조선(朝鮮)이 들어가 있다. 즉 동호 = 조선(고조선)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사기>에 "동호는 오환(烏桓)의 선조이며 후에 선비(鮮卑)가 되었다. (동호는) 흉노의 동쪽에 있기 때문에 동호라고 하였다."라고 한다.(주28) 즉 흉노 동쪽의 광대한 부족을 통칭하여 동호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면 동호는 고조선의 구성 민족인 예맥과도 차이가 없어진다. 춘추시대를 기록하고 있는 문헌들에는 동호라는 이름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춘추전국 시대에는 예맥(濊貊) 또는 맥(貊)이 중국 동북의 민족들로 인식되었다. 예를 들면, <순자(荀子)>에는 전국시대에 흉노를 호(胡) 그 동쪽에 있는 민족을 맥(貊)으로 보고 있고 이 기록은 자주 등장한다. <순자(荀子)>에 "진(秦)나라 북쪽으로는 호(胡)와 맥(貊)이 접하고 있다."고 하는 기록과 <사기>의 진(秦)의 승상 이사(李斯)의 글에 "저는 북으로는 호맥(胡貊)을 쫓고 남으로는 백월(百越)을 평정하여 진나라를 강대하게 만들었습니다."라는 기록 등이 있다.(주29)

둘째,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예맥의 대표적인 나라인 고구려나 고조선의 중심지가 사서에 나타나는 동호의 중심 지역과 일치하고, 고조선의 주요 유물이나 유적(비파형 동검 등)이 동호 지역에 집중적으로 나타난다. 예를 들면, 일반적으로 동호의 후예로 알려진 요나라의 중심지역이 과거 조선의 영역이었다거나 고조선과 같이 팔조범금(八條犯禁) 관습과 전통을 보존하고 있다거나 동호의 모용황(慕容皝, 297~348)이 조선공(조선왕)에 봉해졌다는 사실 등을 들 수 있다.

넷째, 동호(東胡)에서 사용되는 호(胡)라는 말이 예맥을 지칭하는 고구려나 고조선을 나타내는 말로도 혼용되고 있다. 예를 들면, <한서(漢書)>에는 "유주(幽州 : 현재의 베이징 인근)를 조선호(朝鮮胡)들의 나라이고 고구려(高句驪)현은 구려호(句驪胡)."라고 하였다. 즉 고구려와 조선을 호[胡]로 보고 있다. 이와 같이 호(胡)라는 말이 한국인들의 범칭으로 쓰인 예는 매우 많다. 수많은 사례들을 보면 호(胡)라는 개념은 동북방에 있는 광범위한 사람들의 총칭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주30)

다섯째, 중원에 위협을 주는 존재로 예맥은 동호의 대표 민족인 오환(烏桓)․선비(鮮卑)라는 이름으로 바뀌고 있다. 즉 예맥(濊貊)이라는 말이 <한서(漢書)>에서는 거의 사라지면서 오환과 선비가 이를 대신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예맥은 <삼국지(三國志)>에서는 드물게 보이다가 <진서(晋書)>에서는 완전히 사라지고 이후에는 고구려, 부여, 선비 등의 구체적인 형태로 나타난다. 즉 일반적인 한국인을 의미하는 맥(貊) 또는 예맥(濊貊)이라는 말은 진(秦)나라 이전의 문헌에서는 동북방의 이민족을 부르는 보편적인 명칭인데, 이 명칭이 한나라를 지나면서 거의 사라지고 동호(東胡)나 동이(東夷)라는 말로 바뀌었다. 즉 이전에 동북방의 오랑캐로 불리던 예맥이 위진남북조 시대에서는 소멸되면서 오환․선비 등과 구체적인 나라 이름(예를 들면, 고구려․부여․동예) 등으로 바뀌어 간다는 것이다.

맥(貊)은 <시경(詩經)> 등의 중국의 대표적인 고대 전적에서 야만족의 대표적인 종족으로 묘사되어왔다. 이를 종합하여 <상서(尙書)>는 "북방을 일컬어 맥(貊)이라고 한다."라고 결론지었다.

<전국책(戰國策)>에는 "동호는 오환의 선조인데 후에 선비가 되었다. 흉노의 동쪽에 있어서 동호라고 불렀다. (중국 고대 인문지리서인) <괄지지(括地志)>에서 말하기를 동호는 한나라 초기에 모돈 선우가 이를 멸하였고, 그 남은 사람들이 오환산으로 들어가 오환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라고 하고 있다. 이 기록은 연나라와 동호가 남북으로 서로 인접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흉노의 동쪽'이라고 하는 표현은 특정한 민족으로서의 동호를 의미한다기보다는 동북지역의 포괄적인 오랑캐 즉 동이(東夷)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사기>에는 연나라 문후(燕文侯)의 말을 인용하여 "연나라 동쪽에는 조선과 요동이 있다."라고 한다.(주31) 이 기록은 대체로 다른 기록들과 일치하는데 이 기록에서는 동호가 아예 나타나지 않고 동호의 지역에 조선이 나타나고 있다. <산해경>에서도 "맥국은 한수(漢水)의 동북에 있으며 그 땅은 연나라와 가깝다."라고 하여 연나라와 대치한 나라가 맥국(貊國)이고 이 나라가 고조선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주32)

결론적으로 동호와 동이, 예맥과 동호(오환․선비) 등은 서로 다른 말이라기보다는 시기적으로 달리 나타난 용어에 불과하고 한국인들을 의미하는 예맥이라는 말이 사라지면서 오환․선비가 이를 대신하고 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그래서 중국의 석학 뤼이푸(芮逸夫) 선생은 <삼국지>와 <후한서>를 분석한 후 중국 대륙의 동부에 거주했던 모든 민족은 동일한 기원을 갖고 있다고 결론지었다.(주33) 뤼이푸(芮逸夫) 선생의 견해가 중요한 것은 중국이 역사적 영토에 대한 정치적 해석이 있기 전에 객관적으로 판단한 것이기 때문이다.

동호와 고조선을 판단하는 하나의 기준이 되는 국가는 연나라인데 고조선과 동호는 연나라의 북쪽에 있었고 그 위치가 서로 일치하고 있다. 나아가 관련 기록들이 동호와 고조선(또는 예맥)을 서로 혼용하고 있어 '동호=고조선' 임을 알 수 있다.

고조선은 북방 역사의 호수, 멸망 후 고구려부, 선비오환부로 분리

초기의 고조선에 대한 기록들이 거의 없지만 일부 선진(先秦) 문헌들과 <삼국지>, <사기> 등을 토대로 보면, 고조선은 춘추전국 시대에는 연나라와 겨루는 강국이었고 BC 4세기경에는 보다 독립적인 고대국가를 형성하여 연나라와의 대치했으며 연나라의 공격으로 국력의 소모가 있었고 BC 3세기 말에는 진(秦)나라와 화평을 유지하면서 국경을 맞대고 있었다.(주34)(참고로 고조선이라는 말은 원래 없고 이성계의 조선과 구별하기 위해 편의상 고조선이라고 사용하고 있다).

BC 108년 고조선이 멸망하자 고조선 지역과 인근 사람들은 거대한 유민(流民)이 되어 떠돌다가, 한 갈래는 고구려를 건설하였고 다른 한 갈래는 일정한 국체를 이루지 못하고 선비(鮮卑)라는 이름으로 잡거(雜居)하였다. 크게 보면 고조선 후예들은 고구려부(高句麗部)와 선비오환부(鮮卑烏桓部)로 나뉜다. 고구려는 고조선 멸망 이후 국가체제를 건설하였고 나머지 유민들은 국가 형태를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선비나 오환 등으로 불리며 할거하였다. 선비족은 뚜렷한 근거가 있는 말이 아니고, 그저 선비산 근처에 살던 사람이라는 의미로 계통적으로 보면, 고조선 지역의 북서부에 주로 거주하던 사람들이다.

몽골은 바로 이 선비오환부에서 파생된 민족

선비오환부는 다시 지역에 따라 모용부(慕容部), 탁발부(拓拔部), 우문부(宇文部), 단부(段部) 등으로 나뉘는데, 서기 46년을 전후해 만주 몽골 일대가 메뚜기 습격으로 수천리가 붉게 변하고 초목이 말라죽어 황무지가 되는 등 천재지변으로 흉노가 약화되자, 선비오환은 오르도스(현재 내몽골 바우터우 인근) 일대까지 세력을 확장하였다.

고조선과 만주, 몽골은 2세기경 선비족을 중심으로 재통합되는데, 이때의 영웅이 바로 단석괴(檀石槐 : [텡스궤이?])이고 그는 칭키스칸만큼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였다. 여기서 유념할 점은 단석괴는 한국 건국 신화의 원형에 있어서 역사적으로 유일한 증거가 되는 분이다. 즉 '햇빛에 의한 회임'과 관련된 이야기를 갖고 있는 실존 인물은 기록상 선비족의 영웅 단석괴(檀石槐)가 유일하다. 단석괴의 탄생과 성장과정은 동명성왕과 유화부인 이야기의 원형이다. 고구려 건국 신화는 4∼5세기 정비된 것인데, 고주몽을 단석괴와 동일시하고 있다.

단석괴의 사후 2세기 말 이 지역은 일시적으로 약화되었다가 4세기경에 선비족은 '조선(朝鮮)'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등장한다. 즉 <진서(晋書)>에 "모용외(慕容廆, 269 ~333)가 조선공(朝鮮公 : 조선왕)이 되었고 이를 모용황(慕容皝)이 계승하였다."고 한다. 놀라운 일이지만 조선의 이름이 고구려 아닌 모용황으로 이어진 것이다. 이것은 고조선이 멸망 450여년 만에 더욱 강력하게 부활한 것을 의미한다. 조선왕 모용황은 기존의 고조선 영역뿐만 아니라 훨씬 더 남하해 북중국 주요부를 대부분 장악하고 중국을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국호를 연(燕, 전국시대 연과는 다름)이라고 하였다. 모용씨 세력이 약화된 뒤, 역시 고조선의 후예인 탁발씨(拓拔氏)가 대두하여 건설한 국가는 북위(北魏 : 386∼534)다. 북위와 고구려는 때로는 결혼으로 연합하면서 때로는 서로 경쟁하면서 성장하였다.

10세기 번성했던 거란(요나라 중심세력)은 우문부의 후예다. 우문부는 모용부에 의해 궤멸된 후 남은 사람들로 후에 거란으로 불렸다. <요사(遼史)>는 요나라의 발상지가 요택(遼澤)이라고 하는데 이 요택(요하의 삼각주 유역)은 대릉하~요하 유역의 세계 최대 습지로 전국시대에는 고조선 땅이었고 고구려의 건국지에 속하는 곳이었다.(주35)

▲고조선의 후예들과 몽골의 기원(몽골은 계통적으로 우문부의 후손). ⓒ김운회


이상의 논의를 토대로 보면, 몽골의 원류였던 동호(東胡)는 한국인들의 뿌리인 동이(東夷)와 별 차이가 없는 말이다. 결국 몽골과 한국의 친연성은 역사적으로 같은 뿌리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 몽골인들은 몽골의 한 부족이 한반도로 내려갔다고 믿고 있었으며 칭기즈칸은 솔롱고스(한국)의 피를 가지고 있었다. 이를 통해서 왜 몽골이 "성질이 급한 몽골인답지 않게" 긴 시간 동안 인내하면서 고려를 품에 안으려고 한 것인지를 알 수 있다. 몽골인들은 한국인을 외국인이 아니라 오래전 흩어진 형제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본문 주석

(주1) 예를 들면 몽골인이 한국을 부를 때, "솔랑가스(Solanggas)"(<몽골비사>), "고올리(Gouli), 꾸리(Guuli), 솔롱고스(Solonggos)"(롭산단잔의 <황금사>), "가올린(Gaulin)"(잠발도르지의 <볼로르 톨리 <水晶鑑>), "솔롱고스"(<차강투흐(白史)>), "가올리(高麗, Gauli)"(<元史>), "솔랑가(Solongg-a), 솔롱고스(Solonggos) "(<靑史>) 등으로 기록되어 있다. 소미야바아타르, <13~14세기 몽-한 교류문서 제1권> 참고.
(주2) <몽골비사> 에 "이전에 여진과 솔롱고스에 원정했던 잘라이르타이-코르치의 후원으로 예수데르-코르치를 출정시켰다(<몽골비사> 274절)"라고 하는데, 옆에 표기된 高麗(고려)라는 한자 번역어는 <몽골비사>의 원본에 표기된 것이 아니라 홍무년간(洪武年間)에 만들어진 한자몽음본(漢字蒙音本)의 전사본(轉寫本)에 표기된 것이다. <몽골비사>의 원본은 일찍이 유실되었고, 현재는 한자 몽음본의 전사본만이 전해지고 있다. 박원길 외, <몽골비사의 종합적 연구> (민속원, 2006) 참고.
(주3) 11∼12세기의 몽골 초원에는 나이만(Naymann), 케레이트(Kereyid), 메르키드(Merkid), 타타르(Tatar), 옹구트(Ongghud) 등의 여러 부족으로 나뉘어져 있었고, 몽골(Mongghol)도 이러한 여러 부족 중의 하나였다.
(주4) 쿨란은 칭기즈칸의 여러 황후들 가운데 가장 사랑을 받은 사람이다. 칭기즈칸은 대부분의 서역 원정 기간을 쿨란과 함께 하였다. 몽골 제국 내에서 쿨란의 지위는 대황후였던 보르테(孛兒帖) 다음이었다.
(주5) "朴賽因不花, 字德中, 肅良合台人, (有膂力, 善騎射. 由速古兒赤授利器庫提點, 再轉爲資正院判官, 累遷同知樞密院事, 遷翰林學士, 尋陞承旨, 賜虎符, 兼巡軍合浦全羅等處軍民萬戶都元帥, 除大司農, 出爲嶺北行省右丞, 陞平章政事)" <元史> 列傳 83, 忠義 4
(주6) "帝乃授之冊寶,其冊文曰:…咨爾肅良合氏,篤生名族,來事朕躬儆戒相成,每勤於夙夜;恭儉率下" <원사> 卷114 后妃 <完者忽都皇后列傳>.참고로 기황후의 몽골어는 얼제이투-코톡토-카톤(Öljeitü-Khutugtu-Khatun)인데, 그 뜻은 '길상(吉祥)의 황후(Khatun)'라는 뜻을 지닌 몽골어다. 박원길, <배반의 땅, 서약의 호수>(민속원, 2008) 15~42쪽 참조
(주7) B.소미야바아타르 <13~14세기 몽-한 교류문서 제1권, XIII-XIV>(울란바타르,1978) 및 Ch.달라이(Ч.Далай) <몽골과 한국의 고대역사 관계(Монгол Солонгосын эртний тʏʏхэн харилцаа)>(울란바타르, 1998) 등.
(주8) 몽골제국 시대에 군대를 몰아 동쪽으로는 백두산 인근까지 다다르면, 백두산 주변에 늘 무지개가 떴기 때문에, 이 산맥의 남쪽에 살던 나라인 고려를 "솔롱긴 올스(무지개의 나라)"라고 불렀으리라는 추측이 있다. 또 고려인들의 고유 의상인 여성 한복(색동저고리)의 색깔이 다채롭고 아름다워서 무지개의 나라로 불렀다고 보는 경우도 있다. J.바트터르(Ж.Баттөр)「몽골역사에서의 솔롱고스(한국)의 이미지(Монголын тʏʏхэн дэхь Солонгосын им%иж)」<몽골국립대 사회과학부 논문> No. 245 (24) 역사(Тʏʏх, IV), 울란바타르(2005) 258쪽.
(주9) Ts.체렌도르지 「솔롱고스라는 이름에 대하여(Солонгос хэмээх нэрийн учирт)」<중앙아시아 유목민들의 기원, 문화, 생활의 모습(Төв Азийн нʏʏдэлчдийн угсаа, соёл, амьдралын хэв маяг)>(유목문명연구 국제연구소, 2005).
(주10) 참고 그림에서 몽골의 수미야바타르(Б.Сумъябаатар) 교수가 주장해 온 동명성왕의 원주지가 표시되어있다. 몽골 도로노드 아이막 할힝골에 석인상을 현지에 사는 원주민들은 '순록치기 임금'이라는 의미로 '고올리칸 훈촐로'로 부른다. 수미야바아트르 교수는 이 석인상을 동명성왕으로 비정하고 있다.
(주11) Batsuuri 「한국-몽골의 역사적 관계와 향후 전망」(한몽국가연합의 의의 세미나) : <신동아> 2007. 6월호 참고.
(주12) 8학년용 몽골사 교과서 <몽골역사Ⅱ>(아드몽출판사, 2005).
(주13) 펠리오(P.Peliot)는 室韋[시웨이]나 鮮卑[시안베이]가 음역(音譯)한 것인데 그 발음들이 Sirbi, Serbi, Sirbi 등으로 서로 같은 표현이라고 하였다. 張久和<몽골인 그들은 어디서 왔나?>(소나무, 2009) 206쪽.
(주14) 張久和, 앞의 책, 69쪽.
(주15) 張久和, 앞의 책, 72쪽
(주16) 두막루(豆莫婁)는 대막루(大莫婁), 대막로(大莫盧), 달말루(達末婁)라고도 부른다. 두막루는 부여의 유민들이 나하를 건너가 건국한 나라라고 알려져 있다. 두막루는 송화강의 북쪽 눈강 중하류 동쪽의 송눈 평원에 있었다. 그리고 실위의 눈강 유역 거주에 대한 것은 張久和, 앞의 책, 123쪽 및 129쪽 참고.
(주17) 張久和, 앞의 책, 113쪽.
(주18) 張久和, 앞의 책, 163쪽∼165쪽.
(주19) <新五代史> 卷74 「契丹」; <北史> 卷94 「奚」.
(주20) 김운회<대쥬신을 찾아서 2> (해냄, 2006) 184~239쪽.
(주21) 박시인 <알타이 신화> (청노루 : 1994) 232쪽.
(주22) <遼史> 卷72 「宗室列傳」
(주23) <契丹國志> 卷22 「四京本末」
(주24) 박원길<유라시아 초원제국의 샤머니즘>(민속원 : 2001) 201~235쪽.
(주25) 박원길 <유라시아 초원제국의 역사와 민속>(민속원 : 2001) 참고.
(주26) 강길운 <고대사의 비교언어학적 연구>(새문사 : 1990) 8쪽, 162쪽.
(주27) 보다 구체적인 내용은 김운회 <고조선은 가짜다(역사의 아침, 2012> [부록 2] 207∼215쪽.
(주28) <史記>「匈奴列傳」내에 정의(正義)편에서의 복건의 주석.
(주29) 이사(李斯)의 글에서 호(胡)는 주로 흉노를 말한다. 참고로 중국의 동북민족 전문가인 쑨친지(孫進己)는 호맥을 동호로 보고 있다. 쑨친지(孫進己) <東北民族源流> (동문선 : 1992) 85쪽.
(주30) 보다 구체적인 내용은 김운회, 앞의 책(2012), 210쪽
(주31) "説燕文侯曰:「燕東有朝鮮遼東 北有林胡樓煩 西有雲中九原."<史記>卷69「蘇秦列傳」
(주32) "貊國在漢水東北 地近于燕."『山海經』卷11 「海內西經」.
(주33) 芮逸夫「韓國古代民族考略」<韓國民族起源과 箕子朝鮮의 問題> 원저는 中華文化出版事業委員會 <現代國民基本知識叢書> 第3輯(1955) 39쪽.
(주34) 보다 구체적인 고증은 김운회, 앞의 책(2012) 참고.
(주35) <수서(隋書)>, <수경주(水經注)>, <구당서(舊唐書)>, <한서(漢書)> 등의 기록을 토대로 보면 고구려의 건국지가 란하에서 선양 일대임을 알 수 있다. 구체적인 고증은 김운회, 앞의 책(2012) 10장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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