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식의小窓多明] 단일민족의 울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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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17.11.27. 오후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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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수많은 종족들 귀화로 / 다양한 외래문화와 풍습들 유입 / 1000년 전 이미 다문화국가 형성 / 단일민족론 아직 유효한지 의문
지금부터 꼭 천 년 전인 서기 1017년은 고려왕국의 8대 왕 현종이 즉위한 지 8년 차를 맞은 해로 고려가 북방의 거란족에 의해 많은 압박을 받을 때였다. 6년 전 거란의 1차 침입으로 황폐해진 국토를 재건하기 위해 현종은 막강한 무신의 권한을 축소하고 문신을 발탁하며 나라를 되살리려 애를 썼다. 이때 북방에 살던 여진인과 거란인의 내조(來朝), 곧 귀순이 잇달았다.

여진 말갈(靺鞨)의 목사(木史)가 부락을 거느리고 귀순한 것이 시작이다. 현종은 이들에게 작위를 주고 이어 의물을 내려 주었다. 또 거란의 매슬(買瑟)·다을(多乙)·정신(鄭新) 등 14명이 와서 의탁했다. 흑수말갈(黑水靺鞨) 아리불(阿離弗) 등 6명도 왔다. 9월에 거란의 군기곤기(群其昆伎)와 여진의 고저(孤這) 등 10호가 와서 의탁했다.

이후 북방인의 내조는 점점 늘어난다. 13년 뒤인 현종 21년엔 거란의 수군(水軍)지휘사로 호기위(虎騎尉)의 벼슬을 가진 대도(大道) 이경(李卿) 등 6명이 내투(來投·귀화)했다. “이때부터 거란과 발해인이 귀화하는 일이 매우 많았다”고 ‘고려사’는 기록한다. 그 전 해에 발해의 후예인 대연림(大延琳)이 거란에서 발해부흥운동을 일으켜 흥요국(興遼國)을 세운 게 도화선이 됐다. 이후 여진족의 금(金)나라가 건국(1115년)되는 12세기 초까지 수많은 이민족 주민이 고려에 귀화한다. 여진과 말갈만이 아니라 중국의 송나라에서도 주민이 많이 고려로 넘어왔다.

한 연구에 따르면 고려 건국 후 12세기 초까지 약 200년 동안 가장 많이 귀화한 주민은 발해계로서 38회에 걸쳐 12만2686명이 귀화했다. 전체 귀화인 가운데 73%를 차지한다. 발해국이 멸망한 결과다. 그다음으로 여진계 주민이 4만4226명에 달한다. 거란계 주민은 1432명이 귀화했다. 이들은 거란의 피정복민으로 억압을 받아오다 고려와 거란의 전쟁이나 거란의 내분을 틈타 고려에 귀화했다. 한인(漢人) 귀화인은 송나라와 그 이전의 오월(吳越), 후주(後周) 등 이른바 오대(五代)의 주민을 포함해 42회에 걸쳐 155명이 귀화했다. 고려에 귀화한 이민족 주민의 총수는 약 17만명으로, 12세기 고려 인구를 200만명으로 추산한 ‘송사(宋史)’의 기록에 근거할 때 결코 적지 않은 비율을 차지한다(박옥걸, ‘고려시대의 귀화인 연구’).

이처럼 고려가 다양한 종족·국가 주민의 귀화를 받아들인 사실은 우리 역사를 일컬을 때에 전가(傳家)의 보도(寶刀)처럼 거론돼 온 단일민족론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일찍이 사학자 손진태씨가 ‘조선민족사개론’에서 정의한 그대로 우리는 유사 이래 동일한 혈족(血族)이 이 땅에서 동일한 문화를 지니고 공동의 운명체로서 살아왔다는 의식을 공유하고 있다. 반만 년이라는 역사 속에서 공동의 민족투쟁을 해 나오면서 공동의 역사를 지니고 생활해 왔다고 믿는 것이다. 그런데 고려 초기를 생각하면 우리가 같은 피를 가진 단일민족이라고 부르는 것은 어폐가 있음을 알게 된다.

이동식 언론인·역사저술가
단일민족의 중요한 기준을 피의 순수성으로 본 것은 지금의 입장에서 볼 때 너무 주관적이다. 또 다른 기준인 지역과 문화의 동질성도 고정불변한 것은 아니다. 고유문화도 외래문화를 수용, 융합해 새로운 문화로 창조된다. 변화하지 않는 문화는 존재하지 않는다. 수많은 종족이 고려 왕조에 귀화한 사실은 오히려 다양한 문화와 풍습이 고려에 유입돼 새로운 문화, 사회체제로 변화하는 계기가 된다. 단일민족론에 대한 반성과 성찰이 필요한 시점이다.

국민대 박종기 교수는 고려 태조 왕건의 아버지도 896년 궁예에게 귀순하면서 고조선과 한사군의 땅, 말갈과 발해의 땅, 한반도 남부지역을 아우르는 통일왕조를 꿈꾸었음을 지적하면서 그 아들인 왕건의 고려 건국에는 특정한 민족보다는 한반도와 만주에 살고 있는 여러 종족을 아우르는 통일국가의 건설이라는 이념이 반영돼 있었다고 분석한다. 한반도 최초의 실질적인 통일국가를 지향한 고려의 의지가 대륙 정세의 변동으로 나타난 수많은 이민족의 귀화를 적극 받아들인 것이라는 해석이다.

몽골의 침략으로 고통을 받았던 고려 후반기에 이승휴(李承休)는 “부여·비류국·신라·고구려·옥저·예맥의 임금은 누구의 후손인가. 대대로 단군을 계승한 후예다”라고 ‘제왕운기(帝王韻紀,1287년)에서 밝혔다. 일제의 식민지 지배를 목전에 둔 한말의 지식인들이 이승휴에게서 우리가 단군의 후손이기에 단일민족이라는 개념을 추출해 근대 민족의식을 고취했다. 그러나 1000년 전 우리는 이미 단일민족이 아닌 다문화국가였다. 따라서 지구가 하나가 되고 수많은 인종과 언어가 교차하는 21세기라는 이 시대에도 단일민족론이 여전히 유효한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단일민족의 기준인 동일한 핏줄, 동일한 문화, 동일한 땅은 고정불변이 아니고 변화·발전하는 것이라면 이 시대에 우리는 어떤 민족관을 가져야 하는지, 우리나라에 오는 중국 동포, 아시아 각국의 이민자, 이웃 일본으로부터 귀화하는 사람을 어떻게 포용하고 살아가야 하는지를 고민해야 할 것이다. 신생아 출생률이 세계에서 가장 낮은 수준이라고 걱정하는 이 나라는 여전히 단일민족이라는 관념 속에 갇혀 있는 것은 아닐까?

이동식 언론인·역사저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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