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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세상을 바라보는 눈

겨울이 봄의 탄생을 알린다. 봄은 그저 오지 않는다. 혹독한 추위와 살을 저미는 폭풍이 휩쓸고 간 계절의 끝을 견디는 사람에게 봄은 온다.   세상 모든 것들은 진화한다. 인간과 동물, 꽃과 나무도 진화한다. 길가에 피는 이름 없는 풀도 살아남기 위해 변화를 거듭한다. 진화는 천체나 항성, 화성암과 지형의 변화, 지질구조 등 자연현상에도 적용된다.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면 멸종된다.   20세기를 대표하는 영국 출신 팝아트 화가 데이빗 호크니(David Hockney)는 회화뿐 아니라 사진, 판화, 삽화, 무대 디자인의 장르를 넘나들며 새로운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 87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아이패드 등 새로운 디지털 기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며 예술 세계를 확장해왔다.   호크니는 세계에서 가장 비싸게 작품이 팔리는 현대 미술가 중 한 명이다. 2018년 11월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예술가의 초상(두 인물이 있는 수영장, 1972)’이 약 9030만 달러(당시 환율 한화 1019억원)에 판매돼 당시 살아 있는 예술가의 작품 중 가장 비싼 작품으로 기록됐다. 이 기록은 2019년 제프 쿤스의 스테인리스 조각 ‘래빗(토끼)’이 1082억5000만원에 낙찰되며 깨졌지만, 현재 전 세계 콜랙터들이 아이패드 그림 한 점이라도 소장하기 위해 줄을 선다.   “세상은 제대로 바라보기만 하면 매우 아름답다. 하지만 사람들은 대부분 세상을 잘 보려고 하지 않는다. 내 말은 색이란 곧 즐거운 것이란 이야기다. 내 작품 역시 관람객에게 즐거움을 주었으면 한다.” 호크니의 예술론이다.   런던에 이어 두 번째로 라이트룸서울에서 게최된 ‘데이비드 호크니: Bigger &Closer’는 현존하는 작가가 직접 전시 기획에 참여해 3년간 제작팀과 함께 몰입형전시를 선보여 풍부한 콘텐츠에 음악과 조명. 애니메이션을 더해 호크니의 예술과 삶을 깊이 이해할 수 있다. 자신의 작품세계를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형태로 기획해 높은 작품성과 아름다운 영상미로 관객을 매료시킨다.   호크니는 추상과 구상의 경계를 흔들며, 강렬하면서도 매혹적인 색감, 원근•기억•공간•자연에 대한 천재적인 해석과 열렬한 탐구 정신으로 식지 않는 호크니의 인기를 회화와 접목해 새로운 시대, 새로운 관점으로 감동을 준다.   호크니는 화가이면서 멋쟁이로도 유명하다. 그림을 그릴 때도 정장을 입는다. 패션에 신경 쓰는 이유를 ‘우리는 모두 예쁘고 멋진 것 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느냐’고 묻는다. 이메일에는 ‘삶을 사랑하라(Love Life)’라고 적는다. “후회 따윈 하지 않는다. 현재를 살아갈 뿐이다. 그것이 삶을 사랑하는 방법이다.”라고 말한다.   세상을 바라본다는 것은 나만의 눈을 가지는 것이다. 맑은 눈으로 세상을 보면 세상이 아름다워지고 어두운 눈으로 보면 세상이 캄캄해진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은 사람에 따라 다르다. 시간의 흐름이나 나이가 들면서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진다,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보이지 않는 것들이 보인다.   사람들은 회화의 종말을 얘기하지만 세계에서 가장 유명하고 흥미로운 아티스트 중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화가들이다. 사람들은 회화를 통해 아름다움과 색채, 현실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보고 사랑하는 법을 배운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지면 인생이 풍요로워진다. 단순한 진화가 아닌, 순간에서 영생의 빛을 본다. (Q7 Fine Art 대표)   이기희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예술 세계 아이패드 그림 변화 지질구조

2024-04-30

[손원임의 마주보기] 더 빅 파이브, OCEAN

성격은 개인의 고유한 심리적 체계의 표상화로서, 한 인간의 삶과 환경에 대한 인지적, 정서적, 행동적 패턴과 양상의 결합체다. 사람은 저마다 나름대로 독특한 성격을 타고 나며, 때에 따라서 성향, 특질, 특성, 인성 등으로 표현된다. 이러한 성격에는 다양한 종류가 있으며, 사람을 판단하는 매우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한다. 그래서 그 누구도 인격장애자나 성격이상자, 더 나아가 인격파탄자로 불리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러면 우리의 성격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성격의 특성을 이해하고 분류하는 여러 가지 방법들이 있지만, 나는 ‘더 빅파이브’ 모델을 매우 유용하게 생각한다. 이 모델은 성격을 특정한 타입들로 세세하게 분류하기 보다는 그 유형을 크게 다섯 가지로 나눈다. 그 5가지 성격 특성(Big Five personality traits) 요소는 경험에 대한 개방성(openness), 성실성(conscientiousness), 외향성(extraversion), 친화성(agreeableness), 그리고 신경성(neuroticism)이다. 이 모델은 각 영어 단어의 첫 번째 알파벳 글자를 따서 ‘OCEAN’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성격 유형은 심리학, 사회문화학, 경제학, 신경과학, 정신병학, 교육학 등 다방면에 적용되고, 지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구애 없이 활용이 가능하다.     ‘더 빅파이브’ 각 요인의 정의를 간단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개방성은 보수주의에 반하여 고정관념을 타파하고, 상상력과 호기심이 많고, 모험적인 성향을 보인다. 게다가 문화생활을 즐기며 지적 호기심 또한 강하다. 성실성은 목표 지향적이며, 책임감이 높고, 심사숙고 해서 계획을 세우며, 꾸준히 노력하는 모습과 완벽성을 보인다. 외향성은 매우 사교적이며, 사회성과 활동성이 높을 뿐 아니라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활력을 찾고 리더십을 보인다. 친화성은 호감성과 우호성이 높으며 타자에게 협조적이다. 또한 타인에 대한 배려와 이타심, 휴머니즘을 보인다. 신경성은 정서적 불안전성으로 걱정과 불안이 많고, 불쾌한 정서를 쉽게 느껴 스트레스가 높다. 게다가 자의식이 강하며 충동성과 분노와 함께 우울성과 민감성, 신경질적 성향을 드러낸다. 인간은 바로 이 다섯 가지 요인의 강도와 그 결합 정도에 따라 성격의 차이를 보이는 것이다.     하지만 이에는 유전과 환경의 상호작용이 계속적으로 영향을 미침은 물론이다. 그래서 나는 성격을 상황과 경우에 따라 다소 유동적인 개념으로 본다.   2024년 4월 서울의 한 5성급 호텔에서 머무르며 조식 뷔페에서 다양한 계란요리를 맛본 적이 있었다. 그때 ‘에그 스테이션’에서는 계란이라는 하나의 기본 재료를 갖고서 맛있는 여섯 가지의 요리, 즉 오믈렛, 스크램블 에그, 오버 이지/미디움/하드, 써니 사이드 업, 수란, 에그 베네딕트를 해주었다(그 옆에는 요일에 따라 새우를 얹은 계란찜이나 샥슈카도 미리 준비되어 있었다). 그 스테이션 앞에서 줄서 기다리는 사람들은 저마다 각자 원하는 계란요리를 다르게 주문했다. 그래서 올리브유를 원하거나 치즈나 양파 같은 재료를 넣고 빼는가에 따라서 이미 다양한 계란요리가 더 세부적으로 갈라졌다.     우리 인간의 성격도 마찬가지다. 사람은 신체, 즉 몸과 두뇌라는 기본 물질을 갖고 태어나나 환경과 유전의 상호작용에 따른 조합과 발현 양상에 따라 참 천차만별의 모습과 성격을 띤다. 그리고 그 수많은 다양성이 인간 세상을 재미와 흥미가 있게 만들며, 변화와 혁신을 거쳐서 진보하게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겠는가!     결론적으로 ‘더 빅파이브’의 구성 요소의 정도 차이에 따라 인간 성격에 크고 작게 차이가 생긴다. 그리고 여기서 그 어떤 성격 특성이 “제일 좋다 나쁘다”고 말할 수도 없다. 중요한 점은 자신이 갖고 태어난 성격을 받아들이되 장단점을 파악하고 개선시켜가며, 자신의 개성을 발휘하여 사회인으로서 바로 살도록 노력하는 데에 있다.     나는 ‘더 빅파이브’ 중에서 성실성이 높게 나왔다. 하지만 신경성과 친화성과 개방성의 요인도 갖고 있다. 그리고 나는 아주 부드러운 ‘오버 이지(over easy)’ 계란요리를 좋아한다. 그때 그 에그 스테이션의 셰프(chef)도 ‘오버 이지’를 “가장 좋아한다”고 했는데, 수많은 손님들의 까다로운 주문을 아주 잘 소화해 냈다. 아마도 성실하고 친화성 높은 사람들이 “오버 이지 스타일”을 좋아하는 것은 아닌가 싶다! (전 위스콘신대 교육학과 교수, 교육학 박사)   손원임손원임의 마주보기 파이브 ocean 성격 유형 성격 특성 정서적 불안전성

2024-04-30

[사설] 다시 ‘찐윤’ 원내대표라니 국민의힘 제정신인가

━ 총선 참패 책임 적잖은 이철규, 오히려 중용설 ━ 민심보다 윤심 중시한 오만으론 쇄신은 불가능 국민의힘 차기 원내대표에 친윤계 핵심인 이철규 의원이 유력하게 거론된다고 한다. 국민의힘은 오는 9일 새 원내대표를 선출할 예정인데, 이 의원을 제외하면 마땅한 다른 도전자도 없는 모양이다. 이 의원만 단독 출마를 하면 경선 없이 원내대표에 추대된다. 국회의원 총선에서 한 번도 아니고 연거푸 참패를 당한 정당치고는 너무나 한가한 풍경이라 가짜뉴스가 아닌지 의심이 들 정도다. 이 의원은 세상이 다 아는 ‘찐윤’ 인사다. 윤석열 정부 출범 후 이런저런 일들을 겪으면서 친윤 그룹에서도 윤 대통령과 소원해진 사람이 많이 생겼다. 그러나 이 의원은 지금까지 여당에서 윤 대통령의 복심(腹心)으로 활동한 최측근이다. 이런 인사가 원내대표가 된다는 것은 총선 민심에 귀를 막겠다는 얘기밖에 안 된다. 이번 총선에서 국민의힘이 대패를 당한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윤 대통령의 일방통행식 국정운영 때문이었다. 김건희 여사 명품백 논란이나 채 상병 수사 외압 의혹 같은 문제들도 사실 사건 초기에 윤 대통령이 민심을 정확히 읽고 적절한 조처를 했더라면 지금처럼 커질 일이 아니었다. 그 고비마다 친윤 일색이었던 국민의힘 지도부는 용산 눈치만 보다가 민심 이반을 자초했다. 이런 와중에 국민의힘이 ‘찐윤’ 원내대표를 뽑는다는 건 여전히 ‘민심’보다 ‘윤심’을 더 중시하겠다는 오만이 아니면 뭔가. 이래서야 어떻게 당의 혁신을 기대하겠는가. 벌써 친윤 그룹이 이 의원을 미는 건 특검법 부결 표 단속 때문이란 비판이 나온다. 게다가 이 의원은 지난해 서울 강서구청장 보궐선거에서 무리한 공천을 주도하다 선거 패배의 책임을 지고 사무총장에서 물러난 전력이 있다. 그랬다가 다시 이번 총선에서 당 인재영입위원장과 공천관리위원을 맡아 선거에 깊숙이 관여했다. 당연히 총선 참패에 정치적 책임을 져야 할 위치다. 심지어 이 의원은 선거전이 한창인 와중에 한동훈 비대위원장을 비난하는 저격 회견을 열어 당 내분까지 일으켰다. 자숙한다고 해도 모자랄 판인데 원내대표라니 정말 해도 너무한다는 탄식이 안 나올 수 없다. 가뜩이나 국민의힘 새 비대위원장에 황우여(77) 전 새누리당 대표가 지명된 것도 혁신과는 거리가 멀다는 비판을 받는 마당이다. 6월 전당대회 때까지만 맡는 임시직이라고 하지만 8년 전에 정계를 떠난 인사를 당의 얼굴로 세우면 어쩌자는 것인가. 비대위원장에 거론됐던 당내 중진들은 죄다 고사했다고 한다. 실권도 없는데 궂은일은 떠맡기 싫다는 속내였을 것이다. 당이 수도권에서 소멸할 위기를 맞았는데도 지금 국민의힘에선 혁신 의지도, 희생정신도 찾기가 어렵다. 아마 국민의힘은 지금이 바닥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대로 가면 바닥 밑에 지하실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 날이 반드시 오게 마련이다.

2024-04-30

[사설] 범죄구조금 받았다고 범죄자 형량 깎아주는 모순

━ 감경 요인인 ‘피해 회복’을 구조금에 기계적 적용해 ━ 반성·합의 전제돼야…막무가내 공탁도 감형 제외를 범죄 피해자들이 범인이 감형받을 것을 우려해 국가에서 주는 범죄피해자구조금을 거부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예상치 못한 범죄로 죽거나 다친 것도 억울한데 국가의 구조금을 받았다고 범죄자의 형량을 깎아주는 것은 평범한 시민의 상식으론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지난해 8월 발생한 분당 서현역 흉기 난동 사건 피해자와 유족들은 범죄피해자구조금 신청을 하지 않고 있다고 한다. 당시 이 사건으로 2명이 숨지고 12명이 다쳤다. 범인 최원종은 구속돼 1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항소했다. 그런데 항소심 재판부가 혹시 형량을 깎아줄까 봐 피해자들이 구조금 신청을 기피하는 것이다. 대법원의 살인죄 양형 기준에 따르면 피해자의 ‘처벌 불원이나 실질적 피해 회복’은 특별 감경 요인, ‘상당한 피해 회복’은 일반 감경 요인이 된다. 피해 회복에는 공탁도 포함된다. 이런 규정을 둔 것은 피고인이 신속하고 실질적인 피해 회복에 나서도록 유도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구조금이나 보험금을 받으면 나중에 국가나 보험사가 피고인에게 구상금을 청구하게 된다. 결국 피고인 주머니에서 돈이 나간다는 이유로 판사들이 이를 피해 회복으로 간주하는 경우가 종종 벌어지고 있다. 올 2월에도 인천지법은 술집에서 시비 끝에 옆 좌석 손님을 때려 숨지게 한 50대 남성에게 징역 2년을 선고하면서 유족이 범죄피해자구조금을 받은 점을 감형 사유 중 하나로 적시했다. 정작 범인은 반성이나 피해 보상을 통해 합의할 노력도 하지 않는데, 국가가 구호 차원에서 준 돈을 받았다고 피해가 회복됐다며 감형해 주는 조치는 피해자와 유족에게 또다시 상처를 입히는 것이다. 법무부는 이런 관행이 부당하다고 판단해 구조금 지급 후 구상금 청구를 판결 확정 때까지 미루는 것을 고려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금전 수령을 피해 회복으로 인식하는 법관들의 기계적인 법 적용 관행이 바뀌지 않는다면 별 도움이 되지 않을 수 있다. 이를 원천적으로 차단하려면 대법원이 양형 기준을 고쳐, 범죄피해자구조금과 보험금은 감경 요인으로 적용하지 않도록 강제해야 한다. 또 공탁을 감형 요인으로 판단하는 규정도 재고할 필요가 있다. 지금도 형사 법정에선 피해자가 합의를 거부하는데도 피고인 측이 선고 직전에 합의금을 공탁하고 감형받는 일이 비일비재하다고 한다. 심지어 피해자가 수령을 거부한 공탁금을 형이 확정되자 피고인이 몰래 빼간 사례도 있었다. 금전 보상이 감형 사유가 되려면 가해자가 깊이 뉘우치고 피해자가 용서해 주는 것이 전제돼야 한다. 피해자 마음에 상처가 여전한데 어찌 피해가 회복됐다고 간주할 수 있겠는가.

2024-04-30

[정운찬 칼럼] 진정한 자유주의와 창의적 국정 운영

제22대 총선 다음날 미국에 사는 친구로부터 오랜만에 메일이 날아왔다. 자업자득, 사필귀정. 그는 윤석열 정권의 총선 패배에 아쉬움을 표하면서도 윤 대통령에게 책임을 돌렸다. 그 친구는 나보고 다른 정당도 마음에 안 든다며, 왜 이렇게 한국 정치가 엉망이냐고 물었다. 이번 선거는 국민이 공천 부조리 등 도덕적으로 타락한 야권을 비판하려다가도 여권의 독선을 더 준엄하게 심판한 것이다. 현상적으로만 보면 마치 우리 국민이 정치권의 심각한 부도덕을 용인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내면에는 ‘정부와 여당의 무능과 독선에 오죽 넌더리가 났으면 부도덕함을 알면서도 야권을 찍어 주었을까’라는 개탄이 자리하고 있다. 무능·독선 국정 실망해 야당 찍어 참패 후에도 사과 진정성 안 보여 경제적 강자-약자 균형 도모하고 인적 쇄신으로 다양성 추구해야 윤석열 정부의 오만은 총선 참패 후에도 멈추지 않았다. 윤 대통령은 국민에 대한 사과를 국무회의 모두발언으로 대신했다. 기자회견을 열고 직접 질의응답을 받았어야 했는데 안타깝다. 그뿐만 아니라 사과의 진정성이 안 보였다. 국정의 방향은 옳았으나 국민이 알아듣지 못한다는 게 말이 되나. 더 가관인 것은 국무회의 사과가 부족했다고 비판이 일자 주변 사람들이 나서 사과 발언을 보충 설명하는 식으로 넘어가려고 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국민의 마음을 읽지 못했기 때문이다. 대통령은 국민을 가르치려 들지 말고 국민의 말을 잘 들어야 한다. 그러자면 국민이 마음속에 담아 둔 말을 낮은 자세로 경청하고 공감할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모인 민의에 기초하여 국민 다수의 삶이 나아지는 방향으로 국정을 운영하고, 의견을 달리하는 개인과 집단은 설득을 통해 동참을 끌어내는 리더십을 보여줘야 한다. 국정운영의 결과도 중요하지만 그 과정도 그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중요하다. 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이번 선거에서 가장 중요한 이슈는 물가, 크게는 경제였다고 한다. 지금 민생은 도탄에 빠졌고 한국 사회는 유례없는 양극화에 시달리고 있다. 호화 명품 매장은 북적이지만 서민경제는 바닥이다. 코로나 여파가 아직 가시지 않은 탓도 있겠지만, 언제까지 코로나 타령만 할 수는 없다. 윤석열 대통령은 경제정책의 기조를 바꿔야 한다. 윤 대통령은 후보 시절부터 친기업적인 제스처를 취해왔다. 그는 기업의 자유로운 활동을 방해하는 요소들을 제거하는 것이 정부가 해야 할 일이라고 강조했다. 그것은 옳은 방향이다. 그러나 그 연장선에서 시행된 법인세 인하는 주로 경제적 강자에게만 혜택이 돌아갔고 국민 다수의 삶은 제자리이거나 더 나빠지는 결과를 가져오고 있다. 존 스튜어트 밀이 『자유론(On Liberty)』에서 밝혔듯이 자유란 다른 사람과 더불어 사는 사회성을 유지하면서 각자가 자기 발전을 추구하고 자기 나름의 방식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경제정책의 측면에서 보면 자유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경제적 강자와 약자 사이에 ‘힘의 불균형’을 줄여야 한다. 특히 정부는 경제적 강자가 약자의 자유를 존중함으로써 각자 원하는 경제활동을 할 수 있도록 보장해야 한다. 대기업의 기술 탈취나 납품가 후려지기 등 각종 불공정 행위는 하청기업이 정당하게 누려야 할 이익을 빼앗아 하청기업 임직원들의 경제적 자유를 심각하게 침해한다. 경제적 강자와 약자 간 ‘힘의 균형’을 도모하는 방식에는 입법을 통한 사전적 방식과 공정한 이익 배분과 같은 사후적 방식이 있다. 현재 야당이 절대다수를 장악하고 있는 국회에서 입법을 통한 사전적 방식은 현실성이 없다. 따라서 국회를 장악하지 못한 윤 대통령은, 민생의 구체적 사안에서 발견되는 불균형과 불공정을 바로 시정해야 한다. 이것은 품이 많이 드는 작업이지만, 윤 대통령은 이 길을 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더욱 거센 반발에 직면할지도 모른다. 또한 대통령은 국정의 창의적 운영을 위해서 대대적인 인적 쇄신을 단행해야 한다. 지금까지 윤석열 정부의 대통령실과 내각 구성은 너무 편향적이었다는 게 세간의 평가다. 학력으로는 서울대가 너무 많고 경력으로는 검찰을 비롯한 공무원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지역적으로는 서울·영남 일색이고 나이와 성별로는 60대 남성이 대부분이다. 지금 한국경제가 살려면 창의로운 인재를 적재적소에 잘 활용해야 한다. 그러려면 국정운영에도 다양성을 추구해야 한다. 다양성은, 창의성의 충분조건이 아닐지 모르지만, 적어도 창의성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윤 정부 국정운영의 난맥상은 의정갈등에서도 나타났다. 그 결말이 어떻게 될지는 두고 봐야 하지만, 대학의 입학 정원을 정부가 정하는 것은 대학의 자율성을 침해하는 것이다. 대학은 어느 기준으로 학생을 몇 명 뽑아서 무엇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 정부는 창의적 국정운영의 시작으로 의대 정원 문제를 자유주의적 원점으로 돌려 다시 생각하는 것이 옳다. 정운찬 동반성장연구소 이사장·전 서울대 총장

2024-04-30

[이상언의 시시각각] 김 여사 조사, 피할 방법 있습니까?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전 미국 대통령은 주어진 과업을 네 종류로 분류했다. ①긴급하고 중요한 것, ②긴급하지만 중요하지 않은 것, ③긴급하지 않지만 중요한 것, ④긴급하지도 중요하지도 않은 것으로. ①은 즉각 처리, ②는 다른 사람에게 위임해 처리, ③은 시간을 갖고 해결, ④는 일단 무시로 대응을 달리했다. ‘아이젠하워 매트릭스’로 불리는 일 처리 방법이다. 검찰의 김건희 여사 조사(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사건 관련)는 지난 3년간 ④에서 ③의 단계를 거쳐 ①의 문제가 됐다. 대통령에 대한 국민의 압도적 지지와 영부인의 높은 인기→검찰의 서면조사→여론 지지→불기소 처분으로 사건 종결. 이 시나리오가 대통령 부부 입장에서는 가장 바람직했으나 현실은 그렇게 전개되지 않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디오르 가방 문제가 불거졌다. 검찰이 김 여사를 소환해 정식으로 조사해야 한다는 여론 압박이 오히려 커졌다. 초읽기에 몰린 영부인 수사 문제 특검법과 검찰 내부 사정이 압박 정면 돌파 외의 해결책이 보이나 이제는 초읽기에 몰렸다. 대통령 지지도가 20%대로 떨어진 여론조사 결과가 나오고, 야당은 ‘특검’ 카드로 대통령을 옥죈다. 여당의 총선 패배가 결정타가 됐다. 야권이 합세해 의결한 특검 법안에 대통령이 재의 요구를 하는 것은 위험한 도박이 된다. 국회의 재표결에서 여당 의원 8명이 ‘가(可)’를 적으면 더는 막을 방법이 없다. 만에 하나, 그렇게 되면 ‘레임덕’ 수준을 한참 초과한 권력 공백이 온다. 대통령을 힘들게 하는 게 또 있다. 검찰 내부 사정이다. 다수의 검찰 관계자에 따르면 수사팀에서 수개월 전에 김 여사 소환조사를 처리 방안의 제1안으로 상부에 제시했다. 1안, 2안, 3안 식으로 건조하게 의견을 담았지만, 검사들은 다 안다. 1안에 수사팀의 뜻이 담겨 있다는 것을. 소환조사가 필요하다는 말의 완곡 화법일 뿐이라는 것을. 검찰 수뇌부가 선거에 크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이유로 수사 방법에 대한 결정을 보류했는데, 이제는 총선도 지나갔다. 내세울 수 있는 다른 명분은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사범들에 대한 항소심 재판이다. 이르면 7월에 선고가 이뤄질 것으로 예상된다. 검찰 안팎에서 이 재판의 결과까지 반영해 김 여사 사안을 한 번에 처리하는 게 원만한 수순이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런데 이 아이디어에는 두 가지 걸림돌이 있다. 하나는 야당이 그때까지 가만히 있겠느냐는 것이다. 더불어민주당과 조국혁신당이 선명성 경쟁을 벌이고 있다. 개혁신당 입장도 이 건에는 다르지 않다. 다른 하나는 검찰 인사 문제다. 박성재 법무부 장관이 2월에 취임했는데, 지금까지 검찰 간부 인사가 없었다. 인사를 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김 여사 관련 사건 지휘 책임자들을 다른 곳으로 보내도, 그대로 둬도 말이 많을 수밖에 없다. 좋은 자리를 내줘도, 좌천성으로 보여도 시끄러울 수밖에 없다. 그러나 검찰 인사를 계속 미루기는 어렵다. 다음 달에 송경호 검사장이 서울중앙지검장이 된 지 만 2년이 된다. 그 자리를 한 사람이 2년 넘게 맡는 것은 검찰 관례에서 벗어난다. 중간 간부들이 인사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기도 하다. 요직 등용, 지방에서의 상경을 고대하는 검사들이 즐비하다. 박 장관과 이원석 검찰총장이 이런 현실을 계속 모르는 척하기가 힘들다. 인사 지연에 따른 내부 불만이 커간다. 검찰이 김 여사 조사를 기약 없이 미루면 야당은 특검법안의 수사 대상에 ‘검사 직무유기 의혹’을 추가할 것이다.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늘 그래왔음을 윤 대통령이 누구보다 잘 안다. 후배 검사들이 특검 사무실에 불려 다니는 것은 윤 대통령에겐 그 무엇보다 가슴 아픈 일이다. 야당은 검찰의 수사권을 빼앗는 제2의 ‘검수완박’ 입법으로 검찰청을 기소청으로 바꾸겠다고 이미 으름장을 놓고 있다. 검사가 대통령이 됐는데, 그의 고향인 검찰은 자칫 만신창이가 될 위기에 놓였다. 이 문제의 해법을 대다수 국민이 안다. 수사팀의 1안에 있다. 정면 돌파 말고 다른 수가 있나. 이상언(lee.sangeon@joongang.co.kr)

2024-04-30

[강찬호의 뉴스메이커] “당 간부 첩에 뇌물 줘야 평양 가는 현실에 탈북 결심했죠”

4·10 총선 유일한 탈북민 당선인 박충권 박충권 국민의미래 비례대표 당선인(38)은 4·10 총선 유일의 탈북민 당선인이다. 북한에서 엘리트만 갈 수 있는 국방종합대에 입학해 탄탄대로를 걷다 탈북한 뒤 서울대 공학박사와 대기업 연구원을 거쳐 국회에 입성했다. 북한 인권단체의 선전물이나 한국 드라마를 한 번도 본 적 없이, 자생적인 사고 끝에 단신 탈북한 점에서 삶의 궤적이 남다르다. “국방대 학생조차 배고픔 달고 살아” Q : 엘리트 꽃길 대신 탈북을 결심한 동기가 궁금합니다. A : “국방대 3학년인 2005년 학생 간부가 됐어요. 소속 중대(학급) 80명의 사상교육을 지휘하는 요직이죠. 이 자리에 오르면 학내 보위부 지도원의 지도를 받는데, 이때 북 체제에 처음 의심을 품게 됐어요. 간부가 되자 지도원이 방으로 저를 불렀는데 시뻘건 글씨로 ‘우리의 생명’이라 적힌 액자가 붙어있는 등 분위기가 살벌했어요. ‘생명’이란 김일성 왕조를 뜻합니다. 지도원이 ‘네 중대 김○○ 학생을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어요. ‘괜찮은 아이’라고 답하자 ‘친구랑 술에 피를 타 마시며 의형제 맺자고 했다더라. 사상이 의심스러운 친구’라고 하더군요. 중대에 보위부 스파이들이 깔려있어 80명 전원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더라고요. 등골이 오싹했어요. 나중에 지도원과 친해져 술자리를 하면서 ‘누가 스파이냐’고 물으니 ‘1조엔 최○○, 2조엔 조××’ 식으로 귀띔해줘요. 다 착하고 말 없는 친구들이었으니 제가 얼마나 놀랐겠어요. 80명 중 8명, 10%가 스파이더라고요. 이러니 친구들 앞에서도 하고 싶은 말을 절대 못 하는 거예요 북한이 어떻게 사람을 통제하는지 그때 깨달았는데 이건 시작에 불과했어요.” ‘급우 중 10%가 보위부 스파이’ 알고 북 체제 회의 품어 ‘노동당 간부 내연녀에 달러 줘야 평양 배치’ 듣고 경악 북, 고교생 해킹전사 양성…스위스 은행 해킹이 방학숙제 탈북자가 ‘배신자’ 소리 듣는 현실 깨려 국회 진출 결심 Q : 체제에 회의를 품게 한 계기가 이어진 건가요. A : “그렇죠. 국방대에서 사상교육용 ‘노작’ 수업을 하는데, 김정일이 썼다는 ‘사회주의는 과학이다’ 논문을 공부해요. ‘사회주의는 전체주의·행정명령식·병영식’이란 서방의 비판을 반박하는 내용인데 읽어보니 ‘그 비판이 맞네’란 생각이 들더라고요. 사람은 생각이 다 다른데 왜 유일사상을 강요하냐는 의심이 이어졌죠. 북한 당국은 또 남한의 ‘광우병 쇠고기’ 시위 소식을 전하면서 이명박 정부를 비난했어요. 그런데 저는 ‘남조선은 반정부 시위를 할 수 있고, 우리라면 앞뒤 안 가리고 먹을 미국산 쇠고기도 거부할 만큼 삶의 수준이 다른 나라네’란 생각이 들었죠. 북한은 배급 수준이 최고인 국방대 학생들조차 배고픔을 달고 살아요. 단백질은 한주에 두 번, 비지국·순두붓국이 전부고 고기는 명절에만 줘요. 인간의 바닥을 경험하죠. 이런 가운데 탈북을 결단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생깁니다.” Q : 그 계기가 뭡니까. A : “졸업을 앞둔 4학년 때였어요. 국방대 졸업생은 대개 출신 지역 군수공장에 배치돼요. 한데 다들 선망하는 평양에 배치되려면 돈을 써야 해요. 액수도 정해져 있어요. 전 그걸 몰랐죠. 어느 날 평양 고위층의 아들인 한 친구가 ‘충권아, 평양 가고 싶어?’ 하더니 ‘4000달러쯤을 예쁜 여자한테 주면 돼’라고 해요. ‘예쁜 여자가 누군데?’라고 물으니 ‘노동당 간부의 여자(첩)’란 거예요. 울분이 터졌어요. 그때까지 노동당만은 썩지 않았을 거라 믿었는데, 그 유일한 믿음마저 무너진 거죠. 이틀간 잠 못 자고 고민한 끝에 탈북을 결심했습니다.” Q : 탈북을 실행한 과정이 궁금합니다. A : “2007년 국방대 졸업 후 고향 함흥에 내려간 뒤 가족을 돌본다는 핑계로 군수공장에 안 가고, 장사를 해 돈을 벌었어요. 이 과정에서 알게 된 탈북 브로커를 1만 달러에 고용한 뒤 2009년 3월 북·중 국경 도시 무산에 잠입해 한 달간 은신했어요. 북한이 은하 2호 발사로 축제 분위기였던 그해 4월 10일 새벽 1시가 D-데이, H-아워였습니다. 브로커가 알선해준 두만강 변 한 집에 숨어있다 개구멍으로 강둑에 진입해 엎드려 있었죠. 근처에 숨어있던 브로커가 ‘가라!’고 속삭이는 순간 맨발로 강에 뛰어들었어요. 주변에 국경경비대 초소 2곳이 있었는데 브로커가 매수해둔 대원들이 근무를 개시한 직후 입수한 거죠. (왜 맨발입니까.) 신발 신으면 소리가 나 위험해요. 워낙 적막한 심야라, 물에 뛰어들 때 ‘텀벙!’하는 소리도 굉장히 크게 들려요. (수심은.) 키가 177㎝인데 머리 쳐들면 턱까지 잠길 정도였죠. 강에 얼음이 남았을 만큼 수온이 낮았지만, 워낙 긴장해 차갑다는 느낌도 안 들더군요. 사방이 칠흑이라 건너편이 안 보였지만 브로커 얘기대로 앞만 보고 직진하니, 10분쯤 만에 중국 땅이 나타나더군요. 맨발로 마구 뛰었어요. 나중에 보니 발이 피투성인데다 동상 직전이었어요. 숲이 나타나자 브로커가 준 번호로 휴대전화를 거니 중국 측 브로커가 나타나더군요. 조선족인 그를 따라 은신처에 도착하니 도시락을 주면서 ‘북에선 쌀밥 구경 못 했을 것’이라고 해요. 부끄러움과 분노가 치밀어 ‘사람 무시하나. 가져가라’고 소리 지르니 ‘미안하다’고 하더군요.” 중국 공안, 여권도 안 보고 “통과” Q : 대한민국에는 어떻게 들어왔습니까. A : “북한 사람으로 보이면 안 되니 중국 옷으로 갈아입은 뒤 인천행 크루즈가 운항하는 단둥까지 트럭으로 하루 넘게 달려 도착했어요. 마중 나온 한국인 브로커가 푸른색 대한민국 여권을 주더군요. 진짜 여권인데 다른 사람, 어떤 한국 여성의 여권이더라고요. 놀란 내 얼굴을 본 브로커가 ‘통과시켜주니 당당하게 내밀라’고 해요. 출국 게이트에서 중국 공안에 여권을 건네니 정말 얼굴도 안 보고 도장 쾅! 찍어 보내주더라고요. 한시름 놓고 오후 4시쯤 배를 탔지만, 배가 북한 바다를 빠져나가는 자정까지는 긴장의 연속이었습니다. 이튿날 아침 배가 인천항에 도착하자 브로커가 ‘경찰이 보이면 북에서 왔다고 하라’고 해요. 입국장에 들어가니 경관 2명이 있더군요. ‘북에서 왔습니다’고 하니 놀란 표정을 짓다 국정원 직원에 인계하더군요. 6일간 조사받았습니다. 북한 국방대에서 개발 중인 탄도미사일 현황과 미사일 관제 센터 위치 등 의미 있는 정보를 알려줬죠.” Q : 성장사가 궁금합니다. A : “할머니 손에 자라다가 10살 때부터 군인이자 노동당원인 아버지와 살았어요. 당시는 고난의 행군 시절이었죠. 뺨이 움푹 들어간 친구가 어느 날 학교에 나오지 않으면 아사한 거예요. 5~6세 꼬마들이 들판에서 풀 뜯어먹는 걸 보기도 했어요. 중학생 때는 1년 반 넘게 학교 안 가고 놀았어요. 겨울에 난로조차 못 땔 만큼 열악하니 누가 학교 갈 생각하겠어요. 저처럼 고난의 행군 시절 중·고교를 다닌 82년생~88년생이 북한에서 최저 학력 세대가 된 이유죠. 그러다 중학교 졸업이 다가오면서 아버지 강권으로 벼락치기 공부 끝에 고교에 입학한 뒤 열심히 공부해 전교 3등으로 졸업했어요. 1, 2등 친구들은 해커부대로 빠졌어요. 북한은 전국 고교에서 수석·차석자를 해커부대로 데려가 전문가로 키워요. 북한 해킹 능력이 세계 3~4위권인 이유예요. 그 친구들이 휴가차 귀향했을 때 ‘네 부대에서 뭐하니’라고 물었더니 ‘말하면 안 돼. 스위스 은행 계좌에 돈이 얼마나 있는지 알아내는 게 방학 숙제야’라고 하더군요. 저는 전교 3위라 김일성대 갈 생각을 했는데, 국방대 가면 ‘군수 분야 간부 0순위’란 친구 얘기 듣고 시험 쳐 입학했죠.” “친북 세력 의정활동 감시할 것” Q : 대한민국의 품에 안긴 뒤 청년 과학기술자가 됐는데요. A : “서울대 화학과 한 교수님의 도움으로 공대 인턴 하다가, 대학원에서 재료공학 박사 학위를 땄습니다. 북한 국방대랑 수준차가 컸지만 밤잠을 줄여가며 공부한 끝에 1년 만에 수업을 따라잡았죠. 박사 딴 뒤에 현대제철 상무님을 만났는데 절 좋게 보셨는지 입사를 권유해 책임연구원으로 7년간 일했습니다. 자동차 변속기·기어 부품 개발 등 보람 있는 일을 했죠.” Q : 국회의원이 된 경위는요. A : “지난해 12월 국민의힘에서 ‘인재로 영입됐다’는 전화가 왔어요. 한참 고민하다 전 정부 시절 유화 일변도 대북 정책으로 약화된 나라 안보를 살리려면 국회에서 일해야 한다고 판단해 응낙했습니다. 의원 임기가 시작되면 1호 법안으로 이공계 지원 특별법 개정안을 낼 생각입니다.” Q : 우리 정치권엔 탈북자를 ‘배신자’라 부르는 이들도 있습니다. A : “전쟁 위협하고, 주민을 억압하는 북한 정권에 저항해 탈북한 사람이 왜 배신자입니까? 탈북 후 가장 큰 의문이 이렇게 풍요롭고 자유로운 대한민국에 친북을 외치는 이들이 있다는 거였죠. 이번 총선에서도 친북 논란이 야기되어 온 진보당이 3석을 확보했지 않습니까. 앞으로 친북 세력의 국회 진입과 의정 활동을 규제·감시하는 입법을 추진하고 싶습니다.” 강찬호(stoncold@joongang.co.kr)

2024-04-30

말기암 257명 못다한 말…"사랑해 왜 이 말을 못했나, 너무 후회"

신성식의 레츠 고 9988 2022년 사망자는 37만 2939명이다. 교통사고·자살 같은 사고나 심장마비 등의 급사를 제외하면 60~70%가 암을 비롯한 만성질환 사망자이다. 이들은 사망 시기를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어 주변을 정리할 시간이 있다. 하지만 한국인은 마지막 이별에 서툴다. 표현이 어색하다. 병원의 차가운 분위기도 한몫한다. 지난해 전체 사망자의 75.4%가 병원에서 숨졌다. 아쉬움과 후회가 남지 않는 사람은 없다. 그걸 풀고 가는 게 품위 있는 마무리이다. 용서를 구하고, 감사를 표하고, "사랑한다"는 말을 쏟아야 한다. 평소에도 이런 말 하기가 쑥스러운데, 말기 암 상황에서는 더욱 어렵다. 제3자가 도와주면 환자와 가족, 양쪽이 마음을 연다. 누가 그 역할을 할까, 의사? 간호사? 진료에 쫓기는 의료인이 그리하기 쉽지 않다. 가장 적합한 직군은 사회복지사이다. 복지사의 말기암 257명 인터뷰 서운함·아쉬움·무한애정 쏟아내 3자에게 속깊은 말 하기 쉬워 소통하면 환자·가족 모두 평온 말기 암환자 257명 인터뷰 최근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발간하는 학술지 『보건사회연구』최신호(44권 1호)에 '말기 암환자의 자문형 호스피스 이용 경험 연구'라는 논문이 실렸다. 서울대병원 완화의료·임상윤리센터 고주미 사회복지사(사회복지학 박사)가 제 1저자이다. 고 박사는 10여 년째 말기 암환자 257명(가족 일부 포함)을 인터뷰했다. 일간지 기자 출신이어서 그리 어렵지 않았다고 한다. 고 박사는 그 프로그램에 '내 마음의 인터뷰'라는 이름을 붙였다. 인터뷰를 편지로 써서 가족에게 전달한다. 그 전에 숨지는 경우도 있다. 고 박사는 2022년『사회복지연구』에 구술 편지 분석 논문을 싣기도 했다. 두 논문과 학회 발표자료를 종합해 마지막 이별을 정리한다. 말기 암환자는 배우자에게 할 말이 참 많다. 이혼한 전 배우자라도 그렇다. 50대 대장암 환자와 전 아내의 고백이다. "당신을 처음 만났을 때 너무도 예뻤소. 꼭 좋은 사람 만나서 잘 살기를…. 성격 탓에 이 얘기를 별로 안 했다. '사랑한다, 지금도 사랑한다'"(환자) "행복하게 살고 싶은 마음 간절한데, 내 능력이, 내 노력이 부족했는지 너무 아쉬워요. 당신을 포기하지 않고 곁에 남아있을 거예요. 당신 나으면 제주 크루즈 여행 떠나요."(전 아내) "맨뒤에 아내를 뒀다니…" 70대 간암 환자는 "회사와 갈등을 빚고 나서 실직하고, 아내가 얼마나 힘들었을까. 내 성격이 굉장히 급한데, 남들에게 얼마나 건방지게 보였을까. 다른 사람은 아내와 상의라도 한다던데, 나는 그런 거 없었다. 아내는 내색하지 않고 잘 버텨준, 그런 사람이다"라고 회한을 토로했다. 50대 중반의 담도암 환자는 "지금 와서 보니 제일 중요한 아내는 (내 인생의) 맨뒤에 가 있고, 다음이 자식이다. 엉망진창이다. 그 모든 게 후회된다"고 말한다. 80대 위암 환자의 아내는 한평생의 한을 쏟았다. "그렇게 억척스레 살면서 그렇게 나한테 모질게 하고 까다롭게 굴더니…. 왜 그랬는지, 미안하지 않은지 궁금하지만 이렇게 누운 사람이 무슨 말을 할까 싶기도 해. 다음 생에는 남 괴롭히지 말고 좋은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좋겠어. (중략) 자식들한테도 앙금이 있으면 다 풀었으면 좋겠어." 다른 폐암 환자의 아내는 "날 위해 조금 더 먹으라고 했는데, 당신이 악착같이 살고 싶지 않다고 (거부)하니 너무 섭섭하더라"고 말했다. 50대 여성 말기 암환자는 "남편은 말하는 게 좀 무뚝뚝하다. 술 안 마실 때 가장 좋아요"라고 말했다. 말기 암환자에게 자녀는 여전히 아픈 손가락이다. 자녀가 어리다면 더 걸린다. 40대 식도암 환자는 "칭찬, 그때그때 못한 거 미안하다. 강해지고 성실해지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40대 유방암 여성환자는 아들에게 "유치원 때 시키지도 않았는데 재활용 쓰레기를 버리더라. 초등학교 때 싫은 내색 안 하고 피아노를 끝까지 마쳐줘서 고마워…. 아직 아들이 마음의 준비가 안 됐을 텐데, 엄마가 벌써 가게 돼 미안해"라며 울음을 터트렸다. 88세 "갈때 돼 기쁘게 간다" 50대 엄마를 보내는 대학생 딸은 "엄마 병명(췌장암)이 드라마나 영화에 나오는 얘기인 것 같다. 이제 잘하려고 했는데, 내가 늙을 때까지 엄마가 옆에 있을 줄 알고 여유 부린 건데, 내가 잘 못 해줘서 미울 따름이야"라고 말했다. 60대 대장암 환자는 아내에게 "어머니보다 먼저 가는 불효자가 됐다. 불고기 좋아하니 챙겨드려"라고 어머니를 부탁했다. 어떤 이는 "갑자기 죽는 게 겁이 난다"고 두려움을 표했다. 반면 87세 환자는 "갈 때가 됐으니 두렵지 않아요. 기쁘게 간다"고 했다. 말기 암환자가 가장 많이 한 말은 "사랑해"였다. 60대 위암환자는 "당신 이름, 얼굴, 생각, 보이지 않는 것, 보이는 것, 당신과 연관된 모든 것을 다 사랑한다"며 무한 애정을 표했다. 연명의료결정법이시행된 지 6년 지났다. 30일 기준 35만여명이 고통을 덜 받고 떠났지만, 마음속 응어리를 풀고 간 사람이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60대 간암 환자는 "아이들에게 살갑게 대하지 못했다. 표현을 잘 못 했다"고 말한다. 어떤 환자는 수목장을 준비해 놓고도 아내에게 말도 못하고 끝까지 끙끙댔다. 고주미 박사는 "연명의료 중단이라는 하드웨어(제도)를 만들었지만, 속마음을 전하는 걸 도와주는 소프트웨어가 부족하다"며 "말기환자라고 해도 여건이 되면 자기표현을 잘한다. 소통하고 떠나면 가는 이도, 남는 이도 평온해진다"고 말했다. 신성식(ssshin@joongang.co.kr)

2024-04-30

[시론] 근로자의 날에 생각하는 ‘일의 본질’

매년 5월 1일은 ‘근로자의 날’ 이다. 법정 휴일은 아니고 법정 기념일이라 모두가 쉬는 날은 아니다. 근로기준법이 아닌 국가공무원법과 교육공무원법에 의해 근로 조건이 따로 규정된 교사·교수·공무원은 평일과 다름없이 근무한다. 근로자의 날을 앞두고 삼성그룹의 임원 주6일제 시행 소식을 접한 필자는 오늘도 대학으로 출근하면서 일이란 무엇인지 새삼 생각해 본다. 근로는 ‘부지런히 일함’을 뜻한다. ‘일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만큼 어렵다. 정부든 개인이든 일의 주인 돼야 태도·열정·인내심이 성공 요인 ‘꺾이지 않는 마음’이 제일 중요 일의 본질은 ‘왜 일을 하는가’를 이해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일의 목적을 명확히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다음은 ‘어떻게 일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고 이건희 삼성 회장이 생전에 기업의 개념, 업의 본질에 대해 강조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 회장은 본질에 대한 생각이 없으면 사업 성공의 필수요소가 무엇인지 파악할 수 없다고 봤다. 호텔업은 부동산업이자 장치산업이고, 반도체 산업은 타이밍 산업이자 양심 산업이라고 규정했다. 반도체 개발은 설계부터 제조까지 수많은 단계를 거친다. 따라서 개개인 모두가 중요하니 양심 산업이라는 말에 공감하게 된다. 그럼 일의 목적은 무엇일까. 살기 위해서, 일상생활을 위해서, 필요한 돈을 벌기 위해서 우리는 일한다.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직장에서 하루의 대부분을 보낸다. 사람들은 일이 많다고 스트레스 받고 힘들어한다. 힘들 때 직장을 그만두고 싶다고 호소한다. 하지만 정작 일이 없을 때 더욱 힘들어한다. 사람들과 어울려 일하면서 즐겁고 행복한 삶을 만들어가기 때문이다. 일은 삶의 활력소다. 그렇다면 일을 잘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성공의 방정식은 ‘능력×열정×방법=성공’이다. 필자가 기업에서 많은 과제를 수행하며 얻은 결론이다. 뛰어난 역량을 갖춘 인재들이 아무리 많아도 일에 대한 열정이 부족하면 과제는 실패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반대로 기술력·지식·경험이 부족해도 일에 대한 열정이 있으면 성공하는 경우를 많이 봤다. 열정은 일을 대하는 태도에서 나온다.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반드시 해내겠다고 하는 ‘꺾이지 않는 마음’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하지만 열정이란 단지 ‘열심히 일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열심히 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가 있다. 진정한 열정은 바로 ‘일을 사랑하는 것’이다. 실제로 일을 잘하느냐 못하느냐는 업무 지식보다 일에 대한 태도와 자세에서 정해지는 경우가 많다. 정부든 개인이든 일의 구경꾼이 아니라 일의 주인이 돼야 한다. 주위에 성공한 사람을 보면 풍부한 지식과 뛰어난 능력의 소유자가 아닌 경우가 많다. 자기 일에 진정으로 몰입하고 꾸준히 해낸 사람들이다. 공직자든 직장인이든 어떤 마음가짐으로 일을 바라보며 다가갈 것인지, 어떻게 해낼 것인지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하지만 결국 일을 어떤 관점에서 보는지가 중요하다. 긍정적인 태도·열정·인내심·꾸준함이 가장 중요한 일의 성공 요인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이때 중요한 것은 일의 목표가 분명하고, 일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있어야 한다. 일하는 이유가 분명해야 한다. 예컨대 정책을 발굴하거나 제품을 개발한다면 수요자인 국민이나 고객에게 기쁨과 행복을 주기 위해 일한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 마지못해 일하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일을 통해 얻는 것은 소득(돈)과 경험이다. 일을 열심히 해야 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본인이 속한 조직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 열심히 일해야 한다. 이를 통해 경험이 쌓이고 경쟁력이 생기기 때문이다. 일은 우리 삶의 일부다. 삶을 영위하기 위한 필수조건이 일이다. 일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기도 하지만 일 덕분에 행복할 수도 있다. 결국 일이란 나를 성장시키고, 행복을 주는 즐거움의 원천이다. 삶의 목적은 재미있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세상을 떠날 때 더 많이 일하지 않았음을 후회하는 사람은 드물다. 인생을 가치 있게 살았는지를 더 따진다. 일 자체가 인생이다. 일은 없어서는 안 될 즐거움과 행복의 요소다. 진정한 삶은 일을 통해 완성된다. 내가 하는 일을 사랑해야 하는 이유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김용석 성균관대 전자전기공학부 교수

2024-04-30

[김창규의 시선] 경제 약자 울리는 인플레이션

“헨리 8세(재위 1509~1547년)의 시기에 잉글랜드는 무너지는 것처럼 보였다. 목격자에 따르면 거지가 이렇게 많았던 적이 없었다. 모든 사람이 화폐 가치가 떨어지고 있다고 의심했다. 도덕은 화폐만큼이나 타락했다. 뭔가 옳지 않다는 느낌은 1590년대 금융 위기, 사회 불안, 전쟁으로 휩싸였던 유럽 전역에 퍼져 있었다.” 영국의 이코노미스트지는 2년 전 물가 상승을 분석하는 글에서 1500년대 유럽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했다. 그러면서 이런 혼란의 근본 원인은 인플레이션이었다고 진단했다. 이전 300년간 유럽의 물가는 거의 변화가 없었다. 하지만 1500년 이후 잉글랜드의 물가는 50년 만에 두 배나 뛰었다. 이탈리아 물가는 연평균 5%씩 올랐다. 인플레이션으로 사회와 정치는 갈수록 불안정해졌다. 원인은 복합적이다. 흑사병이 대유행한 뒤 인구는 급속도로 늘고 있었고 많은 사람이 도시로 몰려나왔다. 이 때문에 식료품에 대한 수요는 늘었는데 농사지을 사람은 줄었다. 일부 국가에선 전쟁, 궁전 건설 등에 쓰기 위해 다른 금속과 섞은 주화를 마구 찍어댔다. 여기에 더해 남미 볼리비아에서 거대한 은 매장지가 발견돼 스페인을 통해 유럽 전역으로 은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통화량이 크게 느니 물가가 폭등했다. “스페인에서는 은 빼고 모든 게 비싸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임금인상이 물가상승 못 따라가 경제 약자의 지갑 갈수록 얇아져 인플레이션에 정치 사회 불안정 1500년대 이야기를 꺼낸 건 요즘 인플레이션이 심상치 않아서다. 코로나19 이후 미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은 천문학적인 돈을 풀었다. 여기에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원자재 수급 불안 등이 겹치며 물가가 널뛰기 하고 있다. 국내에서는 식품과 생필품값까지 다락같이 오르고 있다. 한국의 소비자물가지수는 2022년 5.1%, 2023년 3.6% 상승했다. 올해 들어서도 1월엔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2.8% 올랐다가 2·3월에도 3.1%씩 고공행진을 거듭하고 있다. 심각한 건 서민 가계와 직결된 신선식품 값이 급등하고 있다는 점이다. 신선식품지수는 1월에 전년 동월보다 14.4% 올랐고 2월엔 20%, 3월엔 19.5%나 뛰었다. 특히 3월에는 신선과일이 40.9%나 폭등했다. 정부는 이상기후로 인한 작황 부진, 저장량 감소 등으로 설명하고 있지만, 서민은 ‘올라도 너무 오른다’며 울상이다. 고삐 풀린 물가는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정부 눈치를 보던 많은 기업이 총선이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식료품 등의 가격을 올리고 있다. 초콜릿·과자·아이스크림부터 치킨·김밥·버거까지 거의 전방위로 가격 인상 러시가 벌어지고 있다. 세계 기준으로도 한국의 인플레이션은 심각하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2월 한국의 ‘식료품 및 비주류음료’ 물가상승률은 6.95%로 OECD 평균치(5.32%)를 훌쩍 넘어섰다. 통계가 집계된 35개 회원국 가운데 튀르키예(71.12%), 아이슬란드(7.52%)에 이어 세 번째로 높다. 미국도 물가가 고공행진을 하는 탓에 연방준비제도(Fed)의 금리 인하 가능성은 갈수록 멀어지고 있다. 3월 미국의 소비자물가지수(CPI)는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3.5% 올라 2월(3.2%)은 물론 전문가 예상치(3.4%)를 웃돌았다. 이렇게 인플레이션이 기승을 부리면 가장 고통받는 계층은 경제 약자다. 비즈니스 인사이더에 따르면 미국에서는 빈곤층으로 분류되진 않지만 소득이 제한돼 있어 복지 사각지대에 놓인 ‘앨리스’(ALICE·Asset Limited, Income Constrained, Employed) 계층이 전체 가구의 29%에 달했다. 이 비율은 지난 10년간 계속 증가했다. 임금 인상 속도가 치솟는 인플레이션과 주택 가격을 따라잡지 못한 탓이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지난해 물가 수준을 반영한 근로자 1인당 월평균 실질임금은 355만4000원으로 전년보다 1.1% 감소했다. 2022년 사상 처음으로 연간 실질임금이 줄어든(-0.2%) 데 이어 2년 연속 감소세를 보였다. 이런 흐름은 올해 더욱 가팔랐다. 1월 실질임금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1.1% 급감했다. 소득이 줄어드니 저소득층은 지갑을 닫기 시작했다. 지난해 4분기에 전체 가구 중에서 소득 하위 20%만 지출을 줄였다. 그럼에도 이들은 소득보다 지출이 많아 월평균 29만1000원의 적자 살림을 해야 했다.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토머스 사전트 뉴욕대학교 교수는 “인플레이션은 일종의 세금”이라고 말한다. 정부의 화폐 발행 효과에 따라 ‘세금’ 여부는 달라지겠지만 분명한 건 인플레이션이 소득을 갉아먹는다는 점이다. 특히 살림살이가 빠듯한 저소득층에게 다가오는 충격이 크다. 인플레이션을 잡지 못하면 삶의 질 저하, 그 이상의 고통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김창규(teenteen@joongang.co.kr)

2024-04-30

[송길영의 빅 데이터, 세상을 읽다] 본의 아니게 일찍 왔습니다

커피 드시나요? 우리네 삶 속 마시는 행위를 나누어 관찰해본 후, 아침에는 ‘각성의 커피’, 점심에는 ‘위안의 커피’, 오후에는 ‘해우소의 커피’를 즐기고 있음을 이야기한 지도 벌써 10년이 다 되어갑니다. 그 이후에도 커피는 꾸준히 우리 곁에서 더 많은 이들의 일상 속으로 다가왔습니다. 저 역시 업무의 동반자는 커피였습니다. 정해진 마감을 위해 집중해서 글을 쓸 때도, 도반들과 토론을 위해 희뿌연 머리를 깨워야 할 때도, 지친 일정 속 강연을 위해 힘을 낼 때도 커피는 빠른 효과를 약속하는 든든한 페이스 메이커로 제 곁을 지켰습니다. 그러던 제게 얼마 전부터 데이터 속에서나 보이던 일이 다가왔습니다. 커피를 마시면 잠이 통 오지 않아 ‘하루 1잔, 오후 2시 이후에는 마시지 않기로’ 했다는 인생 선배들의 글이 현실로 찾아온 것입니다. 잠이 오지 않아 일찍 간 강연 행사 주최 측은 감사와 환영 한 시간의 배려·여유만으로 우리의 삶은 따뜻해지기도 1000m 달리기 정도는 3분 53초 이내에 가볍게 주파하고 이온음료를 마신 후 곧바로 축구장으로 뛰어가던 10대의 근력처럼, 몇 잔의 커피를 마시고도 저녁이 되면 쿨쿨 잠을 자던 젊음의 몸은 더 이상 내 것이 아니게 된 것입니다. 이것 말고도 비만과 불면, 잘 낫지 않는 상처와 같이 노화의 조짐은 한두 가지가 아님은 이미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짙은 안개 같은 머리에 순식간에 선명한 날카로움을 되찾아주는 확실한 효과와 이미 인이 박인 알싸한 맛까지 기대하게 만드는 매일의 리추얼을 빼앗긴 분함은 좀처럼 보상이 어려웠습니다. 어쨌든 할 수 없이 두 달여를 절제하고 살아오다 지난주 바쁜 일상 속, 갈증의 대안이 없는 곳에서 방심하고 마신 두 잔의 커피 효과는 대단했습니다. 야외의 행사를 온종일 마치고 돌아와 녹초가 되어 자정 즈음에 쓰러졌지만, 새벽 3시가 되자 거대한 알람 소리를 들은 것처럼 잠을 깨고 만 것입니다. 오랜만에 흡수한 카페인은 엄청난 각성 효과로 휘몰아치며, 피곤하지만 결코 잠을 잘 수 없는 가사 상태의 기상을 선사했습니다. 깨어 있어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멍한 머리로 뒤척이다 별달리 대안도 없어 예정된 아침 강연을 위해 새벽에 집을 나섰습니다. 그리고 강연의 시작 시각보다 1시간도 한참 전에 도착했습니다. 너무 일찍 도착했다는 사실 마저 건물을 들어설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을 만큼, 오랜만에 카페인으로 흠씬 두들겨 맞은 저의 뇌는 아무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다음 반전은 강연의 준비를 위해 이른 새벽에 먼저 나와 계신 주최 측 분들이 큰 환영의 함박웃음으로 감사의 표현을 몇 번이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통상 바쁜 일정의 강연자들이 시간에 딱 맞추어 도착하는 것이 다반사인 데다가, 혹 아침 교통 체증으로 늦을까 노심초사하던 담당자분에게 이렇듯 일찍 오는 인사는 배려가 넘치는 사람으로 보인 것입니다. 이왕 일찍 간 김에 이것저것, 두루두루 사는 이야기를 하며 서로의 안부를 물었습니다. 잠이 안 와서 일찍 왔다는 정직한 저의 표현마저 겸손하고 소탈한 성품으로 오해하시는 그분들의 모습을 보며 지나간 저의 행동이 부끄러워짐을 느꼈습니다. 서로 불필요한 시간 낭비를 줄이기 위해서라도 정시에 맞추어 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생각했었기 때문입니다. 이왕이면 조금이라도 먼저 가서 불안함을 없애 드리는 편이 좋았으리라는 것을 이제서야 알게 된 것입니다. 깨달음은 실천으로 옮기는 것이 중요합니다. 마침 그날 오후에 예정된 행사에도 1시간 넘게 일찍 도착했습니다. 오전의 깨달음도 한몫을 했지만, 그 전이라면 점심 후 카페에서 시간을 맞췄을 터이나 새벽의 곤경으로 다시 커피를 끊을 수밖에 없게 된 저에게 별달리 다른 선택지가 없었던 것도 주요한 이유였습니다. 이곳에서도 역시 지난 강연자들보다 훨씬 일찍 왔다는 칭찬을 몇번이나 받으며 저의 오전의 깨달음은 더욱 강화되었습니다. 오후에 도착한 곳은 지역에 본사를 둔 금융기관의 서울 사무소로, 다른 고장의 인재들이 낯선 큰 도시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었습니다. 마침 그 전주에 그 고장에 다녀왔기에, 그분들의 고향에 대해 더욱 흥미로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제 책도 읽고 오셔서 사인도 해 드리고 사진도 함께 찍으며 찰나의 만남이지만 따뜻한 정을 나누었습니다. 큰 도시에서 많은 사람을 지나치다 잠시 만나 함께 하는 것은 그저 스치는 인연에 불과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단순히 기능으로 만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나누는 행운의 조우는 우리의 삶을 아름답게 채워줄 수 있음을, 그리고 그 시작은 한 시간도 안 되는 작은 여유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수 있음을 배웠습니다. 커피를 마시지 않고도 일상 속 예쁜 즐거움을 발견하며, 카페인 없는 새로운 각성을 경험합니다. 오랜 친구였지만 이제는 가까이하기 어려운 커피에게서 여유라는 뜻밖의 선물을 받았습니다. 송길영 Mind Miner

2024-04-30

[노트북을 열며] 부디 공약을 잊어주세요

한바탕 총선이 끝났다. 이달 30일이면 22대 국회가 문을 연다. 대통령과 정부, 여·야 정당은 물론 국회의원 당선자까지 선거 기간 내뱉은 말(정책과 공약)을 주워 담을 결산의 시간이다. 그런데, 진짜로? 윤석열 대통령은 올해 들어 3월 28일까지 22차례 주재한 민생토론회에서 각종 정책을 쏟아냈다. 다주택자 중과세 철폐(1월 10일), 금융투자소득세 폐지(1월 17일), 수도권광역급행철도(GTX) 건설 본격화와 철도·도로 지하화 추진(1월 25일), 부산 가덕도 신공항 건설 속도(2월 13일), 전남 영암~광주 ‘한국형 아우토반’ 초고속도로 건설(3월 14일), 부동산 공시가격 현실화 폐지(3월 19일) 등이다. 하나같이 막대한 예산이 들거나, 세수(국세 수입) 감소가 불가피하다. 선거에서 압승한 만큼 야당발(發) 공약도 힘을 받을 전망이다. 간병비 건강보험 급여화, 18세 미만 자녀 1인당 아동수당 월 20만원 지급, 경로당 무상급식…. 정점은 국민 1인당 25만원씩 ‘민생회복지원금’을 지역 화폐로 지급하는 내용이다. 기초생활수급자·차상위계층에게는 1인당 10만원씩 더 쥐여주겠다고 했다. 소요 예산은 13조원. 민주당은 “추가경정예산(추경)을 편성하면 재원을 마련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전쟁이나 대규모 재해, 경기 침체, 대량 실업 등을 추경 편성요건으로 규정한 국가재정법 89조가 무색하다. 당선증을 받아든 지역구 후보자의 공약은 한술 더 뜬다. 청와대 청주 이전(이연희·청주 흥덕), 수도권광역급행철도(GTX)-C 노선 신창 연결(복기왕·충남 아산갑), 충주 허브 공항 유치(이종배·충북 충주), 지상철 수성 남부선 추진(이인선·대구 수성을)….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이 ▶필요 재원 ▶재원조달 방안 ▶이행 시기 ▶이행 방법 ▶예비타당성 조사 가능성 등을 따졌을 때 실현 가능성이 작다고 평가한 공약이다. 이런 공약(空約)이라면, 차라리 지키지 않기를 바랄 정도다. 한숨만 쉬기에 금배지의 어깨가 무겁다. 국회의원은 입법권을 행사하고, 행정부를 견제하며, 정부 예산을 심의·의결한다. 올해 정부 예산(656조6000억원) 기준 국회의원이 임기(4년) 동안 다루는 예산이 2626조4000억원이다. 허술한 공약을 내놓는 마음가짐으로 일한다면 곳곳에서 예산이 줄줄 샐까 우려된다. 당선자는 정책과 예산을 다룰 때마다 실현 가능한지, 세금 낭비는 아닌지 따지는 상식을 되새겼으면 한다. 더는 한 표가 다급해 ‘묻지 마 공약’을 쏟아내던 후보자 신분이 아니기에 하는 얘기다. 김기환(khkim@joongang.co.kr)

2024-04-30

[로컬 프리즘] 공무원 이름도 가리게 만드는 세상

전직 공무원 A씨는 악성 민원인에 시달리다 숨진 김포시 소속 공무원의 이야기가 “남 일 같지 않았다”고 했다. 경기도의 한 지자체에 근무할 당시 악성 민원으로 마음고생을 심하게 했기 때문이다. 민원인의 과도한 요청에 “안 된다”고 거절한 것이 시작이었다. 해당 민원인은 찾아오거나 전화로 욕설이 섞인 항의를 하는 것도 모자라 시청에 지속해서 “A씨가 불친절하다”는 민원을 넣었다. 시의원과 지역 언론에 A씨에 대한 거짓 내용을 제보하기도 했다. 각종 증빙 자료 등을 제출해 오해를 풀긴 했지만, 부정적인 소문은 ‘발 없는 말’을 타고 여기저기로 퍼졌다. A씨는 “황당하고 억울했지만, 민원인에게 또 다른 빌미를 줄 것 같아서 제대로 대응도 못 했다”고 씁쓸해했다. 악성 민원으로 인한 피해는 A씨만의 일이 아니다. 행정안전부에 따르면 2022년 기준 공무원에 대한 폭언·폭행·성희롱 등 불법 행위 건수는 4만1558건이다. 대한민국공무원노동조합총연맹이 지난해 8월 21일부터 9월 8일까지 조합원 7061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서도 응답자의 84%가 최근 5년 사이에 악성 민원을 받은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악성 민원으로 고통받다 숨진 공무원 사례가 이어지자 각 지자체는 속속 공무원의 이름과 연락처를 비공개로 전환하고 있다. 홈페이지에 ‘김○○’처럼 성(姓)만 표시하거나, 아예 직급만 게시하는 방식이다. 사무실 입구에 비치된 조직도에서 공무원의 사진과 이름을 빼는 지자체도 나오고 있다. 현재까지 김포시 등 50여 곳이 넘는 지자체가 공무원의 이름을 비공개로 바꾸거나 검토 중이라고 한다. 오죽했으면 공무원 이름까지 숨길까 싶지만, 일각에선 “모든 민원인을 잠정적인 악성 민원인으로 보는 것 아니냐”는 불만이 나온다. “공무원들의 신상을 가리면 ‘책임 행정’이 아닌 ‘소극·무책임 행정’ 같은 부작용이 생길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된다. 이런 우려를 의식해 경기도는 다음 달 도청 직원과 도민 여론조사를 통해 공무원들의 신상공개 범위를 정하기로 했다. 경기도 관계자는 “직원들 사이에선 신상정보를 비공개하자는 여론이 많지만, 행정 기관 입장에선 도민 불편 최소화도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문제이기 때문에 여론조사를 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신상정보 비공개가 악성 민원의 해결책이 될지는 의문이다. 홈페이지 등에서 이름을 가려도 다른 창구를 통해 얼마든지 담당 공무원의 신상 정보 파악이 가능하다.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은 지난 25일 서울 동대문구 종합민원실을 방문해 “공무원이 업무에 전념할 수 있도록 안전한 민원환경을 조성하겠다”고 밝혔다. 악성 민원으로 인한 사고가 발생했을 때마다 전임 장관들도 같은 얘길 했다. ‘뒷북’이나 ‘미봉책’이 아닌 제대로된 보호 대책을 고민해야 할 때다. 최모란(choi.moran@joongang.co.kr)

2024-04-30

[비하인드컷] 가짜 뉴스 제조기? BBC의 AI 활용법

인공지능(AI)도 거짓말을 한다. 유명인사 얼굴을 딥페이크 조작한 가짜 인터뷰 영상으로 허위 정보도 유포한다. 보이스피싱을 넘어, AI 생성한 지인 얼굴로 화상통화를 거는 페이스피싱까지 등장하다 보니, AI가 날조나 범죄의 수단이란 인식마저 생겼다. 하지만 무서워하고 외면할 수만은 없다. 영국 영화감독 제임스 하웨스 말을 빌리면 “램프의 지니(마법 요정)는 이미 램프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가파른 속도로 진화하는 지니를 어떻게 잘 쓸지 고민하는 시간조차 빠듯하다. 지난해 2월 영국에선 AI가 진실 보도에 도움이 된 사례가 나왔다. BBC 다큐멘터리 ‘홍콩의 자유를 향한 투쟁’(사진) 제작진이 취재에 응한 시위대의 신원보호를 위해 AI를 활용했다. 시위자와 같은 조건으로 대역 연기자를 촬영 후 생성형 AI를 두 달간 훈련해 시위자 영상에 대역 얼굴을 덧씌웠다. 그 결과, 시위자를 보호하되 진실을 말하는 강력한 AI 영상이 탄생했다. 최근 영화진흥위원회가 발간한 ‘영국 영상산업의 AI 사용 현황 및 정부 규제 정책’ 보고서의 내용이다. 결국 AI도 사람 하기 나름이다. 유럽연합·미국 등도 잇따라 AI 규제책을 내놨다. 한국은 아직 ‘AI 기본법’조차 없다. 여야 정쟁 속에 1년 넘게 국회 문턱을 못 넘고 계류 중이다. ‘AI 강대국 3위’에 들겠다는 우리 정부의 현주소다. 영국도 성문법은 준비 단계지만, 정부 가이드라인에 따라 올 초 각 산업 분야에 AI 규제 원칙이 발표됐다. 저작권 존중, 인간 창의성 중시, 투명성, 다양성과 포용성, 정보 보호 등이다. 산업 현장의 혼란을 최소화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한 건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나원정(na.wonjeong@joongang.co.kr)

2024-04-30

[최훈의 심리만화경] 해인이도 현우도 모두 슬펐던 것이다

한동안 주말에 새로운 루틴이 생겼었다. 와이프와 함께 드라마 ‘눈물의 여왕’ 보기. 이혼을 생각하던 부부인 해인과 현우. 그러나 해인이 시한부 판정을 받게 된 후, 다시 사랑이 시작되는 이야기. 우리 부부가 함께 눈물을 흘리며 애청했었다. 환경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결혼을 결심할 만큼 사랑하던 두 사람이 서로 멀어지게 된 건 유산된 아기를 대하는 태도 때문이었다. 어느 날 퇴근한 현우는 아기의 물건이 모두 버려지는 모습을 보게 되고, 죽은 아기를 쉽게 버리는 것 같은 아내 해인의 태도에 실망한다. 말 그대로 오만 정이 다 떨어져 버린 상황. 하지만 해인도 슬프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그 슬픔을 대하는 방식이 달랐을 뿐이다. 애도 이중과정모델에서는 상실로 인한 슬픔에 대처하는 2가지 방식을 이야기한다. 하나는 떠난 사람을 추억하거나, 그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떠난 사람과 관련된 정서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이를 상실지향적 대처라고 하는데, 떠난 아기의 물건을 계속 보면서 아기를 떠올리며 추억하고 싶었던 현우의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또 다른 방식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고 일상생활로 복귀하는 데 중점을 두는 방식으로, 이는 회복지향적 대처라고 한다. 슬픔을 떠올리게 하는 아기의 물건들을 치우고, 경영자의 위치로 빨리 복귀하고자 했던 해인의 방식과 유사하다. 우리는 이 2가지 방식을 번갈아 사용하며 슬픔에 대처한다. 아기의 물건을 모두 치워버린 해인이가, 초음파 사진은 끝까지 못 버린 것처럼, 1가지 방식으로만 슬픔을 대처하지 않는다. 하지만 타고난 성격과 현실적인 상황에 따라 주도적으로 사용하는 방식이 다를 수 있다. 어떤 방식으로 대처하든, 상실의 상황에서는 모두 아프고 슬프다. 나와 다른 대처 방식을 사용한다고 슬프지 않은 것은 아니다. 부부라면 슬픔과 그 슬픔을 대처하는 방식을 솔직히 서로에게 말하는 것이 가장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최훈 한림대 교수

2024-04-30

[스티븐 도버의 마켓 나우] 최고투자책임자는 어떤 관점으로 투자할까

올해 들어 주식시장은 상승세를 이어왔고 미국 연방준비제도(연준)가 ‘최대 6번’ 기준금리를 인하할 것이라는 전망은 ‘두 차례 이하’ 인하로 조정됐다. 글로벌 채권 수익률은 상승했고 ‘신용 스프레드’(국채와 회사채 간 수익률 차이)는 축소됐다. 유가는 급등했고 달러의 강세는 시장 컨센서스를 뛰어넘는다. 불확실성이 높은 이런 상황에서는 현장의 의견을 경청할 필요가 있다. 1조4000억 달러(약 1929조원) 규모의 자산을 운용하는 프랭클린템플턴의 최고투자책임자(CIO) 20명에게 그들은 어떤 관점으로 투자하는지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다수는 답변에서 올해 미국 경제가 회복세를 유지하고 경기 침체를 피할 것으로 예측했다. 또 인플레이션이 서서히 완화될 것이며 연준이 통화정책 완화에 신중하게 접근할 것이라는 관점을 공유했다. 그들은 ‘기업이익 컨센서스’(특정 혹은 전체 기업에 대한 애널리스트들의 종합적인 이익 예상치)가 너무 높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예상치 못한 경기 침체만 없으면 올해 기업이익 증가율이 마이너스를 기록하지 않는다고 내다봤다. 에너지·금융·인프라·정보기술 등 일부 산업은 ‘어닝 서프라이즈’(투자자들의 예상보다 좋은 실적)를 기록할 수 있다는 의견도 있었다. CIO들은 올해 들어 지금까지 글로벌 주식 시장이 예상과는 다르게 완화적 통화정책 리프라이싱(금리 인하 기대 후퇴)의 여파를 비교적 유연하게 흡수했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미국의 견고한 경제와 4% 미만의 실업률에도 불구하고 인플레이션율이 상승한다면, 주식·채권 시장은 큰 충격을 받을 수 있다. 설문에 참여한 CIO들의 2024년 핵심 투자 테마는 대부분 변함없이 유지됐다. 주식 시장에서는 미국 이외 지역, 특히 신흥국과 일본 주식 시장이 유망하다는 의견이 있었다. 또한, 장기적 관점에서 에너지 및 에너지 인프라 산업에서 기회가 있다고 판단했다. 마지막으로, CIO들은 최근 글로벌 주식 시장의 이례적인 성과에 비추어 볼 때 현재 진행 중인 보합 국면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진단했다. 글로벌 주식의 가치 평가 수준이 지역과 업종별로 매우 다르지만, 미국 증시의 전반적인 주식 가치 상승과 금리 인하 기대감 감소로 인해 향후 6~9개월간 수익률 변동성이 2023년 가을보다 더 커질 수 있다고 전망했다. 이번 설문조사를 통해 CIO들은 ‘장기 듀레이션 채권’(만기가 길고 금리 변동에 따른 가격 변동성이 큰 채권) 확대 및 주식의 지역 포트폴리오 변경 등을 통한 적극적인 리밸런싱, 부동산 및 대체자산에 대한 선별적 투자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스티븐 도버 프랭클린템플턴 연구소장

2024-04-30

[오경아의 행복한 가드닝] 봄바람이 불 때

내가 사는 속초엔 거센 봄바람이 분다. 강원도 양양에서 동해안 간성(고성지역의 옛 지명)으로 분다고 하여 ‘양간지풍(襄杆之風)’이라고 한다. 반대 방향으로 불면 높새바람이 된다. 이곳 농부들은 이 바람이 지나가야 식물을 심는다. 이 봄바람은 해마다 찾아오지만, 간혹 건너가는 해도 있다. 4월 20일 전후인 곡우를 기준으로 바람이 불지 않으면 올해는 쉬어주는구나 생각도 한다. 다행히 올해는 아직 바람이 없다. 그런데 우리 동네에서 가장 오랫동안 농사를 짓고 계신 노인회장님이 아직 논에 모를 내지 않고 있다. 이 분이 심지 않으니, 다른 논에도 모내기가 아직이다. 아마도 봄바람이 한 번은 올 것 같다고 예감하신 듯하다. 나 역시 노인회장님댁 논에 모내기가 됐나 안됐나를 살피며, 큰 나무를 심어도 될지 그 시기를 따져본다. 요즘 인기인 ‘삼체’라는 영화 시리즈를 보면, 태양이 하나라는 사실이 얼마나 축복받은 일인지 알 수 있다. 하나의 태양을 중심으로 모든 행성이 돌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하루의 길이, 1년의 공전, 지역별 날씨 등의 예측이 어느 정도 가능하다. 하지만 영화 속 외계인 삼체인은 세 개의 태양을 두고 있어, 어떤 계산 방법으로도 태양의 주기를 계산할 수 없다. 세 개의 태양에 의해 날씨와 중력이 요동을 치고 결국 모든 생명체는 파멸을 맞는다. 인류가 지구라는 행성에서 고도의 문명을 이룬 것은 예측 가능한 안정 때문이라고 영화는 말한다. 예측은 사전에 ‘미리 헤아려 짐작하다’로 적혀 있다. 예측이 가능하면 아무리 혹독하고 힘겨워도 대비하고 이겨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예측이 통하지 않는다면 재앙이 따를 수밖에 없다. 속초에 찾아온 봄바람 없는 이 평온함에 나는 안심과 두려움을 동시에 느낀다. 지금 정원엔 피어났던 튤립의 꽃잎이 떨어지는 중이다. 이 튤립이 다 지면 여름이 찾아올 것이다. 올해도 무사히 이 모든 계절이 우리 곁에 잘 와주길 바라고 또 바란다. 오경아 정원디자이너·오가든스 대표

2024-04-30

[천하람이 소리내다] 누적적자 얘기 쏙 빼고…'답정너' 연금 개악

‘조금 더 내고 훨씬 더 받는 국민연금’이라니 터무니없다. 전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기울어가고 있는 국가의 모든 무게를 미래세대에게 통째로 떠넘기자는 얘기나 다름없다. 미래세대는 기성세대를 부양할 능력이 없다. 부양할 수 있는 인구 자체가 없다. 1970년의 출생아는 100만 명인데, 필자가 태어난 1986년의 출생아는 63만 명이다. 2022년 출생아는 24만 명이고, 2023년 출생아는 약 23만 명으로 추정된다. 앞으로 출생아 감소 속도는 더 빨라질 것이고, 합계출산율이 0.7명보다 더 떨어지지 말라는 법도 없다. 국회 연금개혁특별위원회 산하 공론화위원회는 지난달 22일 492명의 시민대표단 설문조사에서 보험료율을 9%에서 13%로, 소득대체율은 40%에서 50%로 올리는 ‘더 내고 더 받는’ 1안이 다수(56%)로 선택됐다고 밝혔다. 2안은 ‘더 내고 똑같이 받는 안’(보험료율 12%, 소득대체율 40%)이다. 1안이 현실화하면 2015년생은 중년에 월급의 35.6%를 국민연금 보험료로 납부해야 한다. 현 기성세대는 13% 정도다. 필자의 아들이 2016년생이다. 2016년생은 월급의 35.6%를 국민연금 보험료로, 10% 이상을 건강보험료로 내야 할 것이다. 각종 복지지출을 감안하면 소득세도 오를 것이다. 월급의 60~70%를 세금과 보험료 등으로 내야 할 판이다. 자산을 형성하고 자녀를 출산하는 것은 꿈같은 이야기다. 대한민국의 소멸을 더욱 부추기고 있는 꼴이다. ━ 아들 세대가 아빠 세대 부양 못 해 미래세대의 선택지는 크게 ▶이민 ▶포기 ▶저항이다. 소득이 높아 연금·세금 등 부담이 큰 최상류층은 이민을 시도할 것이다. 일부는 보험료, 세금 내면 남는 것도 없는 데 차라리 적극적 소득 활동을 포기하고 부모 혹은 사회의 도움을 받아 편하게 살자고 할 것이다. 대부분의 2016년생은 저항할 것이다. 월급의 35.6%를 국민연금 보험료로 내는 것은 과도하고, 세대 간 형평성에도 어긋난다는 문제의식은 아주 쉽게 공유될 것이다. 필자도 정치인이지만, 국민연금을 납부하지 말고 저항하자는 선동은 가장 무능한 정치인도 할 수 있는 가장 쉬운 선동일 것이다. 2015년생 이하의 미래세대는 결집할 것이고 저항할 것이다. 세대 간 갈등이 폭발하고, 폭탄은 터질 것이다. 지금의 10·20·30대 모두 안전하지 않다. 63만 명에 이르는 1986년생을 24만 명밖에 되지 않는 2022년생이 부양할 수 없다는 것은 상식적인 판단이다. 미래세대의 저항이 본격화되고, 재정도 취약한 초고령 대한민국에서 국민연금이 별 탈 없이 존속할 수 있다는 생각은 무책임한 희망 회로 돌리기다. 공론화위원회는 자료집에 미래세대에 떠넘기는 빚의 규모를 명시하지 않았다. 자료집의 기금 고갈 시점은 1안은 2061년, 2안은 2062년으로 1년 차이가 난다. 받는 돈을 확 늘리는데 고갈 시점에 별 차이가 없어 1안 선호가 높았을 것이다. 하지만 국회예산정책처에 따르면 2안(더 내고 똑같이 받는 안)은 향후 70년간 누적적자를 1970조원 줄이지만 1안(더 내고 더 받는 안)은 오히려 702조원 늘린다. 누적적자 증감액은 2700조원가량 차이가 난다. 그런데 시민대표단 자료집에는 누적적자에 대한 내용이 빠져있었다. 1안에 불리한 결정적인 지표가 누락된 것이다. 시민대표단 구성도 문제다. 492명 중 40대 이상이 69%에 달한다. 18~29세는 79명(16%), 30~39세는 74명(15%)이고 18세 미만은 참여하지 않았다. 낼 사람은 젊은층과 미래세대지만 개혁의 결정권은 중장년층이 쥔 구조다. 시민대표단을 추린 방식도 공정하지 않았다. 대표단은 일반 국민 1만 명에게 국민연금 보험료율과 소득대체율 인상 폭 선호도를 물어 ‘소득 보장’과 ‘재정 안정’ 응답 비율에 따라 구성했다. 소득 보장을 선호한 이들이 1.4배 더 많았다. 한 마디로 ‘답정너(답은 정해졌으니 너는 대답만 해)’ 공론화였다. 이번 시민대표단 조사 결과는 폐기해야 한다. 애초에 1안, 2안만으로 조사한 것도 말이 되지 않는다. 2안이 1안보다는 낫지만, 2안에 따르더라도 기금이 소진되면 미래세대는 월급의 31.2%를 연금 보험료로 내야 한다. 역시 납부가 불가능한 규모다. 이런 상황에서는 아랫세대가 윗세대를 부양하는 제도설계를 근본적으로 바꿔야 한다. ━ 연금 제도 설계 근본적으로 바꿔야 마침 지난 2월 한국개발연구원(KDI)은 국민연금을 ‘신·구연금’으로 분리하자고 제안했다. 미래세대에게 과중한 짐을 떠넘기지 않기 위해서다. 지금까지 쌓인 보험료는 구연금 계정으로 분리하고, 개혁 시점부터 신연금은 납부한 보험료와 운용 수익률을 더해 연금을 받는 ‘완전 적립식’으로 운영하는 투트랙 방식이다. KDI 방식을 적용하면 미래세대는 15.5%의 보험료를 부담하면 국민연금을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다. 신·구연금 분리 방안이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진정한 ‘연금개혁’이다. 미래세대의 등골을 부러뜨리는 ‘연금 개악’이 아니라 우리의 현실에 맞게 세대 간 형평성을 지키는 진정한 연금개혁이 반드시 필요하다. 미래세대에 꿈과 희망을 물려주지는 못할망정 빚과 절망만 물려줘서는 안 된다. 무엇보다 기성세대가 만든 초저출산, 초고령화 대한민국에서 미래세대는 자기 한 몸 건사하기도 힘들 것이다. 미래세대는 기성세대를 부양할 수 없다. 폭탄을 떠넘기면 반드시 터진다. 앞세대에서 최소한의 폭탄 해체 작업이라도 해놓아야 뒷세대가 앞세대와 함께 폭발하는 비극을 막을 수 있지 않겠나. 천하람 개혁신당 국회의원 당선인 ※외부 필진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천하람(think@joongang.co.kr)

2024-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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