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동학대 주목해도, ‘구조적 폭력’은 간과하는 사회

입력
기사원문
본문 요약봇
성별
말하기 속도

이동 통신망을 이용하여 음성을 재생하면 별도의 데이터 통화료가 부과될 수 있습니다.

비영리 이주인권단체 활동가의 질문-‘아동 최선의 이익’이란 무엇일까
한국이주인권센터 2018년부터 매주 일요일 운영하는 이주아동 공부방. 난민/미등록 이주민의 아이들과 만나며, 한국 사회의 아동권/아동의 안전/아동학대/아동 최선의이익 담론이 제한적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출처: 한국이주인권센터)    


아동인권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아동 최선의 이익’이란 문구를 들어봤을 것이다. 유엔아동권리협약에 나오는 이 표현은 아동인권과 관련한 핵심적인 원칙으로, 시민사회뿐 아니라 아동관련 업무를 하는 정부 및 지자체까지 포괄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특히 ‘아동의 안전’에 대한 인식이 향상되면서, ‘아동 최선의 이익’이라는 논리는 아동을 위한 제도를 만들 것을 요구하는 근거로서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한편으로는 지자체, 경찰, 권한을 가지고 있는 복지기관들이 아동의 안전을 위해 개별 가정에 개입하는 명분을 부여하기도 한다.
 
아동에게는 선택권이 없이 그들의 삶이 부모에게 종속되어 있다는 인식은 ‘아동에게만큼은’이라는 생각으로 특별한 지원체계를 형성한다. 선한 행동을 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아동의 생존과 안전을 위해서 자신이 가진 것을 기꺼이 나누기도 한다. 한편으로는 그 초점이 불안전한 상태에 놓이는 아동을 양산해 내는 ‘부모’에게로 옮겨지기도 한다. 안전하지 않은 환경에 놓인 아동에 대한 염려는 부모의 행동에 대한 비난과 규율로 귀결되기도 한다.
 
나는 이러한 시각들이 아동을 둘러싼 정부 및 비정부 지원체계에도 고스란히 이식되어 있음을 목격하고 있다. ‘신체’적 위기상태에 놓인 아동들에 대한 일시적 개입, 그리고 위기상태의 아동 문제의 해결을 보호자의 행동을 규율하는 것으로 귀결시키는 것은 아동인권 문제 해결에 대한 어떤 로직처럼 순환되고 있다.
 

난민신청자들이 농성장에 자녀를 데려오자 ‘안전’ 문제제기 돼
미래가 없는 불안한 삶, 대체 어디에 있어야 이 아이들이 안전할까?
 
몇 년 전, 난민신청자들이 수년간의 난민인정절차 지연에 항의하며 정부기관 앞에서 텐트를 치고 농성을 했던 적이 있다. 부모들은 자녀들을 데리고 나왔다. 그들은 난민신청자로서의 자신과 가족들의 삶이 낭비되고 있다고 얘기했다. 자신들이 농성하는 이유를 언론에서 알리길 바랐고, 법무부와 면담을 하길 바랐다. 그 어느 것 하나 쉽게 성사되는 일이 없었다.
 
하지만 그들의 농성에 대한 즉각적인 반응은 아이러니하게도 아동들을 대상으로 이루어졌다. 시의 아동관련 부처나 경찰이 방문하여 아동들이 차도가 있는 거리에서 놀면 위험하니 길 건너 공터에서 놀게 하라고 했다. 아동들이 다니던 보육기관 또는 학교에서 연락이 와서 아동이 ‘안전’한지를 확인했다.
 
당시 아이들의 상황이 ‘안전’했다거나 그러한 방문과 안전확인이 잘못되었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아이들은 농성장에서 공놀이를 하다가 또는 뛰어 놀다가 차도로 넘어가기도 했고, 습하고 무더운 날씨에 배앓이를 하기도 했다. 부모가 아이들을 힘들게 한다고 걱정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농성장에 아이를 데리고 나오지 않으면, 또는 부모가 농성을 중단하면, 그 아이들이 안전해지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쉽게 판단할 수 없다.
 
난민신청비자로 거의 6년이 넘게 한국에서 버티고 있던 가족들은 의료-건강보험에 가입할 수 없어 아이들이 아파서 병원에 갈 때마다 큰 스트레스를 받는다. 정부의 보육료 지원에서 배제되어 있기 때문에 돌봄 고비용 사회에서 아동들을 보육기관에 보내지도 못하고, 아이들을 넉넉하게 교육시킬 수도 없는 환경에 놓여 있었다. 노동의 방식에 제약이 있기 때문에, 부모들은 아이들과 함께 안전한 미래를 만들어갈 수 있을까에 대해 늘 걱정하는 상황에 처해졌다. 이런 정황들을 아는 사람으로서, 도대체 어디에 있으면 이 아이들이 ‘안전’할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해서 끊임없이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출입국보호소에서 싱글맘과 6세 아동을 구금한 사건 알려져 지탄,
풀려났지만 ‘경제활동 제약, 사회복지 배제’라는 구조적 폭력은 계속돼
 
지난해 출입국사무소에서 6세의 아동을 어머니와 함께 23일간 구금한 사건이 있었다. 당시 사건을 조력하면서 출입국 담당자에게 들은 말은 나에게도 상처로 남겨져 있다. 담당자는 ‘아이는 울지도 않고 잘 지낸다. 엄마가 아이를 내세워서 출국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건 엄마가 아이를 학대하는 것이다. 나도 아이가 있는데, 엄마가 되어서 아이가 걱정되면 데리고 얼른 나가면 된다. 아동 때문이라면 엄마를 풀어줄 수 없다.’라는 말을 하였다.
 
그러다 아동이 구금되어 있는 사건이 공론화가 되니, 부랴부랴 어머니와 아동의 구금을 해제했다. 당시 비슷한 시기에 공론화가 된 아동구금 사건들을 통해 ‘아동구금 절대 금지의 원칙’에 대한 토의가 진행되기도 했다. 아동에게 심각한 트라우마를 발생시키는 구금에 대한 절대금지 원칙을 사회적으로 합의하고 환기하는 것은 매우 필요한 일이다.

한국이주인권센터 일요일 이주아동 공부방. 2018년. 한국사회에서 ‘아동 최선의 이익’은 아동을 가시적인 폭력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러나 아동의 몸은 더 깊은 사회적 배경과 연결고리 속에 놓여있다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출처: 한국이주인권센터)    


 
그와 더불어 애초에 그 아동이 왜 엄마와 함께 구금되었는지를 강조하고 싶다. 미등록 상태인 싱글맘이 원룸 월세를 내지 못하고 연락이 되지 않자, 집주인이 경찰에 신고를 했기 때문이다. 보호소에서 구금이 해제된다고 하여, 그녀의 경제적 상황이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다시 미등록 체류자로서 그리고 한부모 여성가장으로서 부딪히는 제약들 속에, 또 다른 사회적 감옥 속에 놓여진다.
 

독자들은 지금까지 내가 들은 예들이 혹시 어떤 특별한 상황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다. 단언컨대 그렇지 않다. 내가 만난 대부분의 아동들은 부모의 체벌, 학대, 방임 때문에 불안전한 상황에 놓여져 있지 않다. 오히려 국가가 부모들의 경제적 활동을 제약하고 사회복지 체제에서 배제시키면서 부모의 양육과 아동의 성장을 가로막는, 국가적 폭력에 의해 이 아동들은 불안전한 상황에 놓여져 있다.
 
때문에 이 폭력은 일시적인 것이 아닌 만성적인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아동과 부모가 놓여진 위기상황이 제도에 의해 발생하는 만성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아동의 위기 상황에 대한 책임은 오롯이 부모가 지게 된다는 것, 또한 사회적 도움은 빈곤함을 포함한 ‘도움 받을 자격’에 대한 증빙을 해야지만 일시적으로만 주어진다는 그 불일치에서 발생한다.
 
아동의 권리 둘러싸고 부모, 교사를 감시하는 한국 사회
아동의 ‘안전’이 사회적 배경과 연결고리 속에 놓여있다는 사실 간과
 
최근에 만난 난민신청자는 병원비 때문에 아이가 아프면 버티고 버티다가 정말 큰일나겠다 싶을 때 아이를 병원에 데려간다고 말했다. 어머니는 아이가 계속해서 아픈 건, 곰팡이가 많은 주거환경 때문인 것 같다고 했다. 하지만 주거를 옮길 수 있는 보증금이 없다. 아버지는 생존을 위해 하루하루 주어진 일용직 일자리를 닥치는 대로 하는데도 한 달이 지나면 남는 돈이 없다. 어머니는 자신의 옷은 물론이고, 아이의 새 옷을 사준 것이 언제인지 모르겠다며 눈물을 흘렸다.
 
사람들은 이야기한다. 그럼 본국으로 돌아가면 되는 거 아니냐고. 과연 본국에 돌아가면 아이가 안전할까? 그것이 아이의 안전을 염려하는 얘기일까? 그저 이들이 눈에 보이지 않게 없어지면 된다는 것이 아닌가?
 
한국사회에서 이야기되는 ‘아동 최선의 이익’은 대부분 아동을 가시적인 폭력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학대, 방임과 같은 폭력으로부터의 아동의 신체적 안전은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이상하다. 아동의 몸에 대한 안전을 놓고 서로가 서로를 의심하고 감시한다. 아동보호담당자들은 부모를, 부모는 교사를… 아동을 둘러쌓고 아동의 보호에 대한 책임이 있는 모두가 모두를 감시하고 규율하는 것에 온 신경이 곤두서 있는데, 정작 아동이 어떤 조건과 환경 속에서 ‘안전’하게 성장할 수 있는지는 상대적으로 부각되지 않는다.
 
유엔아동권리협약에는 아동 최선의 이익이라는 원칙이 아닌 다른 원칙들이 있다. 그것은 비차별의 원칙, 생존과 발달의 권리, 아동의견 존중의 원칙이다. 특정 아동의 몸을 물신화하는 것이 아니라, 아동의 몸이 더 깊은 사회적 배경과 연결고리 속에 놓여있다는 이해에서 출발할 때 우리는 비로소 아동의 안전에 다가가는 것일 거다.
 
[필자 소개] 박정형. 한국이주인권센터 사무국장. 현재는 아랍여성들과 함께하는 활동을 위해 센터에서 만든 ‘오아시스 와하’의 공간지킴이 역할이 크다. 이주민들이 처하는 어려움들을 상담하고 이주민들과 함께 활동하기도 하면서, 우리의 존재가 한국사회에 던지는 질문들이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이 쌓여갔다. 그 나름의 답을 찾기 위한 여정으로 문화인류학을 전공하고 있기도 하다.

이 기사는 언론사에서 사회 섹션으로 분류했습니다.
기사 섹션 분류 안내

기사의 섹션 정보는 해당 언론사의 분류를 따르고 있습니다. 언론사는 개별 기사를 2개 이상 섹션으로 중복 분류할 수 있습니다.

닫기
이 기사를 추천합니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