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end Interview]
바둑 세계랭킹 1위
신진서 9단
바둑 세계랭킹 1위
신진서 9단
알파고와의 대국으로 세계의 주목을 받았던 이세돌. 그가 서른일곱의 나이에 은퇴를 선언하면서 말했다. "이제 바둑은 게임이 됐다"고. 인간 세계에서 인간들이 두는 바둑은 도(道)와 예(禮)였는데 인공지능(AI)이 출현하면서 바둑을 도와 예로 볼 수 없었다. 그 회의와 아쉬움이 은퇴 이유 중 하나였다.
조훈현이 지금도 잊지 못하는 그 스승에겐 한국 중국 일본에 각각 한 명의 제자가 있었는데 중국 제자가 바둑의 전설로 통하는 우칭위안(吳淸源), 일본 제자가 관서기원 창시자인 하시모토 우타로이다. 조훈현이 거둔 제자는 돌부처 이창호. 조훈현은 뼛속부터 다른 이창호를 가르쳐 세계 최고의 기사로 만들었다.
지금의 바둑 세계에서 이런 문하생 문화는 사라졌다. 바둑으로 세계를 호령하려는 기사들 누구에게나 스승은 있지만 그 스승은 단 한 명이다. 바로 AI. 도와 예를 가르칠 순 없다. 오직 기술만 전수한다.
일본의 한 유명한 기사가 만약 바둑의 신(神)이 있다면 두 점을 깔겠다고 했다. AI가 신이다. 그가 AI와 바둑을 둔다면 장담컨대 두 점으로 버티지 못한다. 그는 "만약 목숨을 건다면 네 점이면 될 것"이라고 했다. 인간 최고수로선 참 겸손한 발언이었다. 지금은 어떨까? 그는 아마 목숨을 잃을 것이다. 10판을 아무리 잘 둬도 분명 한두 판은 AI에 패할 게 확실하다. 그러니 누가 누구를 가르치겠는가? 모두들 AI를 끼고 산다.
AI가 가르쳐준다. AI는 한 수 한 수 둘 때마다 승률을 말해준다. 만약 승률이 60%였는데 한 수 두고 나니 40% 정도로 급격히 떨어졌다면 그게 바로 패착이다. 승률 80%에서 20% 정도로 수직 낙하하면 그건 망착(妄着)이다. 흔히들 떡수라고 한다. 지금 어디를 둬야 하는 지 인간 세계에선 여러 시나리오가 있다. 이렇게 둬도 한 판, 저렇게 둬도 한 판. 동양철학 음양(陰陽)의 음이다. 음은 불확실, 양은 확실이다. AI는 최선의 수를 알려준다. 가장 승률이 높은 곳. 바둑 중계를 보면 가끔 해설자가 AI 프로그램을 돌려 그 지점을 말해준다. 보통 파랗게 표시된다. 이른바 블루스폿(Blue spot). AI 추천수이다. AI엔 음은 없다. 모두가 양이다.
은퇴한 이세돌은 이게 싫었다. 인간의 자존심이 있었다. 그에게 블루스폿은 통계였고. 그걸 찾는 건 게임이었다. 그러나 신진서는 다르다. 그는 "아무리 존경하는 기사의 생각이라도 동의할 수 없다"고 말한다. 신진서는 AI시대에 세계 무대에 뛰어든 기사다. 그에게 AI는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블루스폿은 AI가 이길 확률이 가장 높다고 인간에게 알려주는 수(手)입니다. 그러나 그 이상의 무엇이 있습니다. 저는 복기를 하면서 당시 판단했던 최선의 수와 인공지능의 블루스폿 차이에서 상상력의 빈곤을 느낍니다. 그래 그렇게 두면 좋은데 난 왜 그런 생각을 못했을까 라고요."
그는 "비록 AI가 두는 수는 기계적인 느낌이 들긴 하지만 AI가 보여주는 엄청난 묘수를 발견하면 가슴이 뛴다"며 "흥분도, 좌절도, 낙관도, 비관도 없이 오직 알고리즘에 의해 계산하고 분석하고 판단하는 게임 같은 수들이 그러나 인간이 보기엔 독창적"이라고 말한다. 인간의 경험이 수백 년간 켜켜이 쌓여 형성된 편견과 고정 관념을 깨는 창의적인 수들이다. 그동안 인간은 스스로의 울타리에 갇혀 바둑을 예술로 여겼으나 AI는 보다 더 심오한 예술의 세계가 있음을 일깨워줬다.
신진서에게 붙은 별명은 신공지능. 현존하는 프로 기사 중 가장 AI처럼 둔다. 계산적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독창적이다. 이기기 위한 수라 할 수 있지만 가장 예술적인 수를 둔다. 물론 신진서도 인공지능엔 안 된다. 두 점 정도는 깔아야 한다. 그러면 다 이길까? 그럴 자신은 없다. 그는 기계가 아니라 인간이다. 상황이 좋으면 안전하게 물러나기도 하고 불리하다 싶으면 참지 못하고 흥분도 한다. 바둑은 집중력의 싸움이다. 그가 아무리 집중력이 뛰어난들 인공지능을 이길 수는 없으며 또한 집중력의 지속성 면에서 인공지능 발밑에도 못 미친다. 인공지능은 커피도 안 마시고 화장실에도 안 가며 도중에 출출하다고 바나나나 초콜릿을 먹는 법도 없다.
그에게 솔직히 물었다. "지금 인간 세계에서 바둑을 둔다면 본인이 질것이라고 생각하는 기사가 있는가"라고. 답이 명쾌하다. "기사라면 당연히 내가 인간 세계에선 최고라는 자신감은 있어야 되는 것 같다"고. 그는 일단 현시대 기사 중 가장 많이 세계대회 타이틀을 차지하는 기사가 되고 싶다고 말한다. 세계 타이틀은 모두 7개. 신진서는 지금은 무관(無冠)이다. 수많은 영웅들이 출몰하는 춘추전국시대에서 1등이 되긴 쉽지 않다. 그러나 신진서가 그걸 해낼 거라 많은 바둑팬이 기대하고 신진서 또한 그럴 자신감이 있다. 과거에는 자신감 그거 하나였는데 이제는 실력을 갖춘 신진서다.
바둑은 알파고 이전과 알파고 이후로 나뉜다. AI가 없었던 시절의 고수들. 그들은 스승에게서 배운 초식과 본인이 쌓은 내공으로 정상에 올랐다. 그들이 칼을 찬 무사들이라면 신진서는 AI란 스승에게서 총을 건네받았다. 그 스스로 "엄청난 배움의 차이"라고 말한다. 과거에는 답이 없지만 답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게 바둑이었는데, 지금은 정답이 나와 있고 그걸 AI를 통해 아는 그 차이다. 바둑에 AI가 나온 2년 전부터는 모든 기사가 과거와는 다른 바둑을 둔다. 그 정상에 신진서가 있다.
그는 신공지능이란 별명에 만족한다. 그 의미가 좋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AI를 뛰어넘는 바둑을 두고 싶어한다.
"AI가 제 바둑 발전에 무한한 도움을 주고 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AI가 아무리 완벽하다고 하지만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투혼과 승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바둑을 두다 보면 AI 추천수가 아닌데 확률이 AI보다 더 높아지는 수들이 있습니다. 한 판에 한 수 정도 나올까 말까 하는데 전 그게 인간의 가능성이라고 믿습니다."
바둑 고수의 반열에 오르면 그의 기풍(棋風)을 본떠 별명이 붙었다. 조훈현은 전신·조제비, 이창호는 돌부처·신산(神算)이다. 이세돌은 쎈돌, 서봉수는 잡초, 유창혁은 일지매, 최철한은 독사란 별명을 얻었다. 신공지능은 중국이 신진서에게 붙여준 별명이다. 아직 그의 기풍을 딴 별명은 없다. 그러나 본인도 알고 동료 바둑기사들도 안다. 머지않아 '신진서류(類)'라는 그만의 세계를 구축해나갈 것임을. 세계 제패는 결과물에 불과할 것이다. 1, 2년 내에 그날이 온다.
[손현덕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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