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글자크기 설정

기사 상세

사회

`신공지능` 세계 바둑 1위 신진서 "AI 엄청난 묘수, 가슴 뛴다"

손현덕 기자

입력 : 
2021-03-05 17:04:19
수정 : 
2021-03-05 19:09:14

글자크기 설정

[Weekend Interview]
바둑 세계랭킹 1위
신진서 9단
사진설명
16년 전 이창호는 농심배에서 중국과 일본 기사 5인을 연파했다. 이른바 상하이 대첩. 그걸 이번엔 신진서가 해냈다. 신진서 앞에 놓인 바둑이 지난 2월 25일 중국의 마지막 주자인 커제와의 대국이다. [이충우 기자]
만 4세에 돌을 잡았다. 부산에서 수련바둑학원을 운영하던 부친 신상용 씨는 그의 기재(棋才)를 발견한다. 첫째 아들인 진현도 재능이 있었지만 부친은 1, 2등 할 게 아니라면 아예 바둑에 빠지지 않는 게 좋다고 판단했다. 둘째는 달랐다. 무시무시한 능력이었다. 3년이 안 돼 소위 기원 1급이 된다. 부친은 20년간 운영하던 학원을 정리하고 서울 응암동으로 이사를 한다. 바둑의 명가 충암도장 근처다. 거기서 중학교 2학년을 채 마치지 않고 학업을 접는다. 그게 신진서(21) 학력의 전부다. 현재 명실상부한 세계랭킹 1위. 그에겐 천적이 두 명 있었는데 한국엔 박정환, 중국엔 커제다. 박정환에겐 2018~2019년 1승 9패. 작년엔 14승 2패. 천지개벽이다. 커제와 역대 전적은 5승 10패. 그러나 지난 삼성화재배 결승전 패배의 악몽을 딛고 최근 두 번의 대국에서 승리했다. 특히 이번 농심배에서 커제를 비롯한 최강의 중국 기사 3인, 일본 기사 2인을 연속해 무찔렀다. 올킬(All Kill)이었다.

알파고와의 대국으로 세계의 주목을 받았던 이세돌. 그가 서른일곱의 나이에 은퇴를 선언하면서 말했다. "이제 바둑은 게임이 됐다"고. 인간 세계에서 인간들이 두는 바둑은 도(道)와 예(禮)였는데 인공지능(AI)이 출현하면서 바둑을 도와 예로 볼 수 없었다. 그 회의와 아쉬움이 은퇴 이유 중 하나였다.

사진설명
과거 바둑은 철저한 문하생 문화였다. 스승에게 도와 예를 기본으로 배우고 기(技)는 어깨너머로 배웠다. 기회가 되면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지도 대국을 한 판 두곤 했다. '목숨을 걸고 둔다'는 조치훈은 6세의 나이에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기타니 미노루(木谷實) 문하생이 된다. 당시 일본 바둑의 고수들 열에 아홉은 기타니 제자들이다. 불세출의 천재 기사 조훈현. 당시만 해도 변방으로 평가받던 한국 바둑을 세계의 중심으로 올려놓은 그는 세고에 겐사쿠(瀨越憲作)란 스승 밑에서 수업했다. 어처구니없게 져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날에도, 화끈하게 이기고 돌아와서 의기양양한 날에도 세고에는 마당을 쓸라느니, 술상을 봐오라느니 하며 잡일을 시켰다.

조훈현이 지금도 잊지 못하는 그 스승에겐 한국 중국 일본에 각각 한 명의 제자가 있었는데 중국 제자가 바둑의 전설로 통하는 우칭위안(吳淸源), 일본 제자가 관서기원 창시자인 하시모토 우타로이다. 조훈현이 거둔 제자는 돌부처 이창호. 조훈현은 뼛속부터 다른 이창호를 가르쳐 세계 최고의 기사로 만들었다.

지금의 바둑 세계에서 이런 문하생 문화는 사라졌다. 바둑으로 세계를 호령하려는 기사들 누구에게나 스승은 있지만 그 스승은 단 한 명이다. 바로 AI. 도와 예를 가르칠 순 없다. 오직 기술만 전수한다.

일본의 한 유명한 기사가 만약 바둑의 신(神)이 있다면 두 점을 깔겠다고 했다. AI가 신이다. 그가 AI와 바둑을 둔다면 장담컨대 두 점으로 버티지 못한다. 그는 "만약 목숨을 건다면 네 점이면 될 것"이라고 했다. 인간 최고수로선 참 겸손한 발언이었다. 지금은 어떨까? 그는 아마 목숨을 잃을 것이다. 10판을 아무리 잘 둬도 분명 한두 판은 AI에 패할 게 확실하다. 그러니 누가 누구를 가르치겠는가? 모두들 AI를 끼고 산다.

사진설명
신진서도 마찬가지다. 현재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세계 최강. 10년 이상 세계 무대를 평정한 이창호가 세운 승률 기록을 32년 만에 갈아치운 그다. 88.37%. 76승10패였다. 이 정도면 같은 9단도 두 점을 접을 수 있는 실력이다. 바둑을 다 두고 나면 복기(復棋)라는 걸 한다. 처음부터 다시 똑같이 돌을 놓아가면서 실수를 찾는 작업이다. 과거 복기를 하면서 주변의 기사들이 촌평을 했다. "이 수가 패착(敗着)이었어", "이럴 땐 이렇게 두는 게 좋았을 것 같은데"라면서. 이런 게 다 소용없어졌다.

AI가 가르쳐준다. AI는 한 수 한 수 둘 때마다 승률을 말해준다. 만약 승률이 60%였는데 한 수 두고 나니 40% 정도로 급격히 떨어졌다면 그게 바로 패착이다. 승률 80%에서 20% 정도로 수직 낙하하면 그건 망착(妄着)이다. 흔히들 떡수라고 한다. 지금 어디를 둬야 하는 지 인간 세계에선 여러 시나리오가 있다. 이렇게 둬도 한 판, 저렇게 둬도 한 판. 동양철학 음양(陰陽)의 음이다. 음은 불확실, 양은 확실이다. AI는 최선의 수를 알려준다. 가장 승률이 높은 곳. 바둑 중계를 보면 가끔 해설자가 AI 프로그램을 돌려 그 지점을 말해준다. 보통 파랗게 표시된다. 이른바 블루스폿(Blue spot). AI 추천수이다. AI엔 음은 없다. 모두가 양이다.

은퇴한 이세돌은 이게 싫었다. 인간의 자존심이 있었다. 그에게 블루스폿은 통계였고. 그걸 찾는 건 게임이었다. 그러나 신진서는 다르다. 그는 "아무리 존경하는 기사의 생각이라도 동의할 수 없다"고 말한다. 신진서는 AI시대에 세계 무대에 뛰어든 기사다. 그에게 AI는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블루스폿은 AI가 이길 확률이 가장 높다고 인간에게 알려주는 수(手)입니다. 그러나 그 이상의 무엇이 있습니다. 저는 복기를 하면서 당시 판단했던 최선의 수와 인공지능의 블루스폿 차이에서 상상력의 빈곤을 느낍니다. 그래 그렇게 두면 좋은데 난 왜 그런 생각을 못했을까 라고요."

그는 "비록 AI가 두는 수는 기계적인 느낌이 들긴 하지만 AI가 보여주는 엄청난 묘수를 발견하면 가슴이 뛴다"며 "흥분도, 좌절도, 낙관도, 비관도 없이 오직 알고리즘에 의해 계산하고 분석하고 판단하는 게임 같은 수들이 그러나 인간이 보기엔 독창적"이라고 말한다. 인간의 경험이 수백 년간 켜켜이 쌓여 형성된 편견과 고정 관념을 깨는 창의적인 수들이다. 그동안 인간은 스스로의 울타리에 갇혀 바둑을 예술로 여겼으나 AI는 보다 더 심오한 예술의 세계가 있음을 일깨워줬다.

신진서에게 붙은 별명은 신공지능. 현존하는 프로 기사 중 가장 AI처럼 둔다. 계산적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독창적이다. 이기기 위한 수라 할 수 있지만 가장 예술적인 수를 둔다. 물론 신진서도 인공지능엔 안 된다. 두 점 정도는 깔아야 한다. 그러면 다 이길까? 그럴 자신은 없다. 그는 기계가 아니라 인간이다. 상황이 좋으면 안전하게 물러나기도 하고 불리하다 싶으면 참지 못하고 흥분도 한다. 바둑은 집중력의 싸움이다. 그가 아무리 집중력이 뛰어난들 인공지능을 이길 수는 없으며 또한 집중력의 지속성 면에서 인공지능 발밑에도 못 미친다. 인공지능은 커피도 안 마시고 화장실에도 안 가며 도중에 출출하다고 바나나나 초콜릿을 먹는 법도 없다.

사진설명
그의 바둑은 과거 전성기의 조훈현, 그리고 이세돌을 닮았다. 조훈현의 별명은 전신(戰神). 전투의 신이다. 이세돌의 별명은 쎈돌. 신진서도 늘 직공이다. 바둑이 유리하면 좀 참기도 하는데 그는 수가 난다고 확신하면 우회로를 찾지 않는다. 1인자만이 가지는 독기다. 믿는 대로 둔다. 그 믿음이 착각임을 깨닫는 순간 역전패가 찾아왔다. 그게 신진서의 약점이었다. 그런 신진서 바둑에 변화가 오기 시작했다. AI란 스승이 그의 마음에 참을 인(忍)자를 새겨놓았다. 어렸을 적(지금도 만 20세로 어리지만) 그는 오직 이기고 지는 것만 생각했다. 지금은 다르다. "아주 최근의 일입니다. 승패가 전부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지금은 과정을 생각합니다. 대국 전에 정신 집중은 제대로 돼있는가, 그리고 대국 중에는 경솔함이 있었는가. 유리하다고 자만하지는 않았는가, 불리하다고 포기하지는 않았는가, 실수를 했을 때 그걸 떨치고 다시 일어설 수 있었는가. 이런 것들입니다. 바둑에 경외심이 생겼습니다."

그에게 솔직히 물었다. "지금 인간 세계에서 바둑을 둔다면 본인이 질것이라고 생각하는 기사가 있는가"라고. 답이 명쾌하다. "기사라면 당연히 내가 인간 세계에선 최고라는 자신감은 있어야 되는 것 같다"고. 그는 일단 현시대 기사 중 가장 많이 세계대회 타이틀을 차지하는 기사가 되고 싶다고 말한다. 세계 타이틀은 모두 7개. 신진서는 지금은 무관(無冠)이다. 수많은 영웅들이 출몰하는 춘추전국시대에서 1등이 되긴 쉽지 않다. 그러나 신진서가 그걸 해낼 거라 많은 바둑팬이 기대하고 신진서 또한 그럴 자신감이 있다. 과거에는 자신감 그거 하나였는데 이제는 실력을 갖춘 신진서다.

바둑은 알파고 이전과 알파고 이후로 나뉜다. AI가 없었던 시절의 고수들. 그들은 스승에게서 배운 초식과 본인이 쌓은 내공으로 정상에 올랐다. 그들이 칼을 찬 무사들이라면 신진서는 AI란 스승에게서 총을 건네받았다. 그 스스로 "엄청난 배움의 차이"라고 말한다. 과거에는 답이 없지만 답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게 바둑이었는데, 지금은 정답이 나와 있고 그걸 AI를 통해 아는 그 차이다. 바둑에 AI가 나온 2년 전부터는 모든 기사가 과거와는 다른 바둑을 둔다. 그 정상에 신진서가 있다.

그는 신공지능이란 별명에 만족한다. 그 의미가 좋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AI를 뛰어넘는 바둑을 두고 싶어한다.

"AI가 제 바둑 발전에 무한한 도움을 주고 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AI가 아무리 완벽하다고 하지만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투혼과 승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바둑을 두다 보면 AI 추천수가 아닌데 확률이 AI보다 더 높아지는 수들이 있습니다. 한 판에 한 수 정도 나올까 말까 하는데 전 그게 인간의 가능성이라고 믿습니다."

바둑 고수의 반열에 오르면 그의 기풍(棋風)을 본떠 별명이 붙었다. 조훈현은 전신·조제비, 이창호는 돌부처·신산(神算)이다. 이세돌은 쎈돌, 서봉수는 잡초, 유창혁은 일지매, 최철한은 독사란 별명을 얻었다. 신공지능은 중국이 신진서에게 붙여준 별명이다. 아직 그의 기풍을 딴 별명은 없다. 그러나 본인도 알고 동료 바둑기사들도 안다. 머지않아 '신진서류(類)'라는 그만의 세계를 구축해나갈 것임을. 세계 제패는 결과물에 불과할 것이다. 1, 2년 내에 그날이 온다.

[손현덕 주필]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이 기사가 마음에 들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