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회 질문 답변

A Korean Anglican FAQ blog

성공회 질문 답변 블로그 안내

leave a comment »

[성공회 질문 답변]은 원래 주낙현 신부의 홈페이지 질문 게시판으로 유지하다가 (2000년-2006년) 문을 닫은 뒤, 그 내용을 선별해서 올린 블로그입니다. 매우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이 블로그는 갱신되지 않습니다. 

여기에 담긴 답변들은 성공회의 공식적인 입장을 늘 대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질문과 답변들은 옆에 있는 검색 창과 관련 태그 구름을 통해서 살펴 볼 수 있습니다.

성공회에 대한 점더 상세한 정보는 성공회 위키 백과를 통해서 발전시켜 나가려 합니다.

아울러 아래 인터넷 성공회 지식 프로젝트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그동안 질문 답변 게시판을 통해 격려해 주시고 참여해 주신 분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참여해 주신 분들을 통해서 많은 자극을 받고 큰 배움을 얻었습니다.

주낙현 신부 합장

http://viamedia.or.kr

Written by skhfaq

2008년 5월 21일 at 2:51 am

Uncategorized에 게시됨

이 블로그의 댓글 정책

이 블로그 소개에서도 적은 바와 같이 이 블로그는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갱신되지 않습니다. 이는 댓글에도 적용되어 그동안 댓글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최근 매우 좋은 댓글로 여기서 시작된 이야기를 발전시키려는 모습이 눈에 띕니다. 또한 이 블로그 내용들이 좀거 깊은 이야기를 펼쳐가는 씨앗이 되었으면 한다는 바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댓글을 허용합니다. 다만 차후 승인을 받은 형식으로 합니다. (스팸 댓글 방지와 불필요한 논쟁을 방지하기 위한 것입니다.) 

댓글에 대한 제 답변은 약속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이 질문과 답변의 원래 맥락을 염두하시고, 이미 답변된 내용을 발전시킬 수 있는 방향으로 이야기를 펼쳐 나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관심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주낙현 신부 합장

Written by skhfaq

2008년 9월 12일 at 4:37 am

Uncategorized에 게시됨

성공회와 평화주의, 그리고 C.S. 루이스

with 2 comments

안녕하세요.

두번째는 성공회의 평화주의에 대한 생각입니다.
요즘 성공회 신도인 C.S루이스가 쓴 ‘순전한 기독교’를 읽고 있습니다.
루이스는 글중에서 전쟁에 반대하는 평화주의를 이해는 하지만,동의하지는 않는다고 했습니다.물론 기독교 사상가인 그의 사견이겠지만,성공회에서는 평화주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합니다.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한 성공회의 입장도 설명해주시면 더 좋겠습니다.


하지만 너그럽게 이해해주시고요,자세한 답변 부탁드립니다.

신부님이 부디 무사히 학업을 마치고 귀국하시기를 항상 기도합니다.

김재홍 바우로 드림

성공회와 평화주의, 그리고 C.S. 루이스

어려운 주제여서 간단히 대답하기가 어렵습니다만, 이와 관련한 전체적인 논의의 상을 그려보고 이후 이 문제에 대한 공부의 방향이라는 셈으로 한번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우선 평화주의란 전쟁이라는 폭력적인 현실에서 이에 대한 폭력적인 대응으로서 ‘정당한 전쟁”에 대한 대안적 개념으로 나온 것을 염두해야 합니다.

우선 예로 들으신 아시다시피 C.S. 루이스는 전형적인 성공회 신자인데도, 개신교 복음주의자들에게 여전히 각광받고 있는 신앙 저자 가운데 한 분입니다. 특히 최근 영화화된 “나르니아 연대기”로 더욱 유명해지고 있습니다. 이런 양상에서 전쟁과 그분의 신앙적 신학적 태도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전형적인 성공회 신자라는 측면에서 루이스는 서방 그리스도교 (천주교와 개신교)에서 발전시킨 전쟁과 폭력에 대한 기본적인 가르침을 그대로 이어받고 있습니다. 특별히 어거스틴과 아퀴나스, 그리고 이후 칼빈을 통해서 더욱 분명해지는 “정당한 전쟁” 이론을 그대로 따르고 있습니다. 이 이론에 따르면, 국가 간 혹은 국가 내 전쟁은 불가피하고 이에 따라 많은 죽음이 있기 마련인데, 이러한 전쟁 속에서 무고한 사람을 보호하기 위한 대항적 폭력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고한 사람들을 보호하는 것이고, 이 때문에 정당한 전쟁을 위해서 이에 합당한 원칙들, 즉 정당한 이유, 상응한 정의, 적법한 권위, 좋은 의도, 성공의 가능성, 인명 손실의 비례 우위성, 최후의 수단으로서 폭력의 사용 등과 같은 원칙을 충족시켜야 합니다. 어쨌든 나쁜 폭력에서 무고한 사람을 보호하기 위한 대항 폭력, 즉 좋은 폭력이 가능하다는 것이지요.

이에 반해, 평화주의자들은 폭력에 대항한 폭력이 – 특히 그것이 전쟁일 경우 – 사람의 생명에 손상을 가하는 한 정당화될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예수님의 산상설교의 가르침과 초기 그리스도교의 순교자들, 그리고 종교개혁기 이후의 급진적 종교개혁 운동 (재침례파, 퀘이커, 메노나이트 등)에서 그 성서적, 역사적인 근거를 찾습니다.

C.S. 루이스는, 말씀하신 그 유명한 “단순한 그리스도교”에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의 전쟁 개입에 반대하는 영국의 평화주의자들에 논박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실제로 이것은 영국국영방송(BBC)를 통한 방송대본을 기초로 한 것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전쟁 중에 있던 많은 이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한 그분의 가장 중요한 글은 “나는 왜 평화주의자가 아닌가?” 하는 것인데, 이 역시 1941년 전쟁 중에 발표된 것입니다 (출판은 되지 않다가, 1980년대에 이르러 미국에서 출판되었습니다. 왜 미국에서 1980년대에? 의문을 가져볼 만한 대목입니다). 여기서 C.S. 루이스는 위의 정당한 전쟁 이론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 평화주의자들이 여러 면에서 현실성이 부족하며, 사람들의 감정의 현실이나 논리, 그리고 국가의 적법한 권위라는 측면에서 오류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즉 역사에서 보자면 전쟁은 쓸모 없는 나쁜 전쟁과, 유익한 좋은 전쟁이 모두 있었으며, 사랑하는 사람이 폭력에 희생될 때, 그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 폭력을 저지시키려 폭력을 동시에 행사하여 그 희생을 중지시킬 수 있으며, 그렇게 해야 되고, 또한 적법한 국가가 이를 지지하고 있다면 이에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징병제에 응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의무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C.S. 루이스의 “나르니아 연대기” 영화에서도 보듯이, 세계에 대한 그의 생각에는 선악의 전형적인 이분법이 강하게 흐르고 있습니다. 이 환타지 소설에서 그는 선약의 갈등 속에서 전쟁이라는 이미지로 선의 승리를 그려내고 있습니다. 그 전쟁에 따른 선의 승리 과정은 다름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 사건을 표상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물론 여기에는 구체적인 전쟁 과정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C.S. 루이스가 그리스도의 부활을 악에 대항한 전쟁으로 표상한다면, 거꾸로 전쟁은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을 재현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도 있습니다. 여러 해석이 있을 수 있겠지만 C.S. 루이스의 전쟁관은 최소한 그렇게 제게 비칩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이 시기는 영국에서 이른바 평화주의가 가장 크게 성장한시기이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국교로서 영국성공회는 종교의 통일성을 위해 다른 교파들을 억압하기도 했고, 국가적 권위를 매우 중요하게 여겨 평화주의 운동의 씨앗이 되었던 퀘이커 등과 같은 교파들을 억눌러왔습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성공회의 성직자들과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해서 이러한 평화주의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나타나서,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성공회 평화주의 연대”(Anglican Pacifist Fellowship)와 같은 평화운동 전통을 형성했습니다.

다만 당시 전쟁 중에 영국 정부는 이러한 평화운동 단체의 활동을 제한하고 방송 금지를 시키는 상황 속에서, C.S. 루이스는 그의 “정당한 전쟁”론을 방송하도록 했습니다. 그러니 누구도 그 상황의 복잡한 이해관계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생각해야 할 것 같습니다. 영국성공회 내의 굵직한 성직자들의 이러한 평화주의에 대한 헌신과 노력 때문인지, 영국 정부는 강제 징집제를 실시하지 않고 선택적 징집제, 즉 징병에 응하지 않으면 대체 복무를 할 수 있도록 배려 했습니다. 그리고 세계성공회는 이들의 영향을 받아서 1930년 1948년에 있었던 세계성공회 주교회의인 람베스 회의에서 부분적으로 평화주의의 원칙을 수용하기에 이릅니다.

평화주의 내에도 그 원칙과 그 적용 범위에 따라 여러 그룹으로 나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종교적 그룹이 있는가 하면, 정치적인 그룹도 있고, 좀더 급진적이고 원칙주의적 그룹에서 실용주의적 그룹까지 다양합니다. 일부에서는 정당한 전쟁론의 장점이라고 할 수 있는 무고한 사람을 보호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최후의 보루로 폭력적인 개입을 인정하는 주장도 혼재합니다. 하나의 답변을 내리기 어려운 문제이지요.

하나의 타협점이라고 한다면, 저는 그 점을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의 말씀 가운데서 한번 찾아보려고 합니다. 그분은 언젠가 이러한 문제에 직면해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을 반대하는 사람이 양심을 갖고 있다면, 간디처럼 비폭력의 길을 따르십시오. 그러나 여러분의 대적자가 히틀러처럼 양심이 없다면, 그때는 본회퍼의 길을 따르십시오.”

간디는 인도의 비폭력저항 운동의 대표자인 것을 잘 아실테고, 디트리히 본회퍼는 독일 나찌 정권 하에서 교회가 히틀러에 협력하는 것을 반대하는 새로운 교회 운동을 이끌면서, 히틀러 암살 음도에 가담했다가 체포되어 처형당한 독일 루터교 목사이자 신학자입니다.

논리적으로만 보자면 본회퍼는 “정당한 전쟁론” 선상에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C.S. 루이스의 생각과 근접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C.S. 루이스 역시 독일의 침공이라는 역사적 현실이 있었지만, 본회퍼 만큼 급박한 상황의 마지막 수단으로 적용하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루이스의 경우는 평화주의에 대한 비판을 하면서, 전쟁의 불가피성을 일반화시키고 실제로 누구 어떻게 권력을 행사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상황들을 선명하게 구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단순한 그리스도교” 안에 있는 그의 말 속에서도 스스로 자신 없는 결론이 비치기도 합니다. 실제로 전쟁에는 악인도 다 이유가 있고, 선인도 다 이유가 있기 때문이지요. 사담 후세인도 이유가 있고, 부시도 이유가 다 있습니다. 그러나 둘 다 무고한 사람을 보호하기는커녕 더 죽이고 있지요. 여기에 평화주의의 끈질긴 문제제기가 있습니다.

아무리 정교한 “정당한 전쟁” 이론이라 하더라도, 그리고 앞서 인용한 비폭력주의자 마틴 루터 킹의 말도, 어떤 처지에 있는 누가 사용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르게 해석되어 이용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미국 우파 복음주의자 가운데 하나인 팻 로버슨 목사는 얼마 전 남미 베네주엘라 좌파 정권의 차베스 대통령을 암살이라도 해서 축출해야 한다면서, 본회퍼의 경우를 인용했습니다. 권력과 부를 갖고 있는 이들, 그리고 미국을 쥐락펴락하는 우파 복음주의자들은 본회퍼의 전체 신학이 아무리 자신들의 신학과 정반대일지라도, 그 몇 마디 말과 상황을 교묘히 조작해서 자기 말로 만드는 데는 혀를 내두를 만한 특기를 가졌습니다. 그러니 어떤 권력이, 그리고 어떤 상황의 어떤 사람이 이런 말을 하느냐가 이런 문제를 분별하는데 매우 중요하다고 봅니다.

저 역시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의 말씀이 전해주는 고민 가운데 있습니다. 고전적인 정당한 전쟁론을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가 하면, 급진적인 평화주의가가 되지도 못합니다. 이런 처지에서 평화주의의 한 움직이라고 할 수 있는 양심적 병역 거부와 관련해서도 여러가지 생각이 교차합니다. 하지만 몇 년 전에 양심적 병역 거부 문제가 불거졌을 때, 성공회 신문에 한국 성공회에 이 문제에 대해 적극적인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토막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양심적 병역 거부에 찬성하고 있지만, 이는 사견일 뿐 한국성공회의 전체 의견은 아닙니다. 그러나 세계성공회의 많은 교회와 단체들은 평화운동에 헌신하고 있고, 양심적 병역 거부와 같은 문제에 대해서 매우 적극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어떤 확실한 답변도 드리지 못해 미안합니다만, 이런 기회를 통해서 이 문제에 대해서 다시 한번 살펴볼 기회를 가졌다고 스스로 위안을 삼습니다. 하나의 답이 쉽게 나오지 않는 것을 함께 깨닫고 예수님이 살아가신 길이 무엇인지를 이런 문제에 비추어 다시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사실 어떤 이론과 어떤 대가의 말보다는 예수님께서 어떻게 걸어가셨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그리스도교 신앙의 진정한 바탕일테니까요. 사순절이 바로 그 예수님이 걸어가셨던 길의 가장 분명한 표상입니다. 그 여정 속에서 다시 전쟁과 폭력, 그리고 평화를 생각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낙현 신부 합장

Written by skhfaq

2006년 3월 6일 at 1:28 pm

성직자 유학기간, 장애인이 성직자 될 수 있나?

leave a comment »

안녕하세요.

주낙현 신부님.

…성공회 신부님들의 유학기간에 대한 궁금증입니다.
제가 신앙생활하는 성공회 부평교회에 승우라는 귀엽고 영리한 꼬마가 있습니다.
영국유학중인 성공회 신부님의 아드님인데,사모님과 같이 출석합니다. 미사를 봉헌한후 저와 알까기를 하면서 노는 승우를 보면서 한가지 궁금한게 생겼습니다. 신부님들은 유학생활을 얼마나 하실수 있는지입니다. 성공회 신문을 보니 유학생활이 너무 길어서인지 의원면직되신 분도 있던데,교회에서 허용할 수 있는 기간은 얼마인지요..

…장애인도 성공회 신부님이 될 수 있는가입니다.
제 소견에는 부제님이나 복사가 도와드리면 미사를 집전하시는데 어려움이 없는 분까지는 괜찮을 것 같은데요.여성도 복사나 성직자로 활동할 수 있는 성공회의 장점을 생각해보면, 장애인도 신부님이나 부제님으로 서품받은후 사목할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개신교의 경우는 장애인 목사님들도 활발히 활동하는데,성공회는 장애인 신부님이나 부제님이 계신지도 궁금합니다.

김재홍 바우로 드림

1. 성직자 유학 기간

성직자의 유학 기간에 대해서는 정해진 것이 없습니다. 유학이 학위의 목적이라면 학위가 끝날 때까지이겠고, 그렇지 않은 사목 연수의 경우라면 단기간에 돌아오게 되니까요. 유학 중이라도 주교님과 교회가 부르면 다시 가야지요. 다만 제가 아는 한 유학 생활이 길어서 성직자가 면직된 경우는 한 건도 없습니다. 실제 유학이 아니었거나 다른 일이 있었던 게지요. 오해가 없기를 바랍니다. 그런 경우가 있다면 알려주세요. 그건 조사 대상입니다. ^^

2. 장애인은 성직자가 될 수 있는가?

우선 한국 성공회의 헌장과 법규 어디에도 장애인이 성직자가 될 수 없다는 규정이 없습니다. 물론 장애의 종류와 범위에 따라 달라지겠고, 그 내용은 성소위원회에서 판단할 일이지만, 신체적인 장애가 성직자가 되는데 결격 사유가 되는 경우는 매우 제한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참고로 이곳에서 저와 같이 공부한 하반신 장애를 가진 신학생이 있었는데, 늘 휠체어를 밀고 다녀야 했지만 작년 사제 서품 이후 현재 대학교의 채플린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Written by skhfaq

2006년 3월 6일 at 1:25 pm

Uncategorized에 게시됨

Tagged with ,

성직자의 직업 문제

leave a comment »

안녕하세요, 주신부님의 블로그를 자주 찾는 성공회 신자입니다.

한가지 궁금한 것이 있었는데, 이문제는 특별히 주신부님께 여쭈어야지 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오늘에야 마음에 여유가 생겨서 질문을 드리게 됩니다.
제가 알기론 성공회의 사제는 교회를 맡게 되면 다른(직업)일은 교회법상 못하게 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부분이 성경과 어떻게 균형을 갖게 되는지 여쭙고 싶습니다. 물론 구약식으로 생각해 ‘레위인’으로 본다면, 큰 문제가 없겠지만, 신약으로 보자면 사도들도 많은 경우 교인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일한것으로 압니다(예를들면 데살로니카전서에서 처럼 말입니다.)

동방정교회에서는 교회의 규모가 워낙 작아서, 사제들의 겸업이 허용되는 것으로 아는데, 성공회도 교회 크기나 교구에 따라 다른지요? 또, 성경적으로 보자면 양쪽다 맞다고 해야 하는지요? 혹은 현대의 교회와 사회상황하에서 볼때 어느쪽이 더 바람직하다고 보시는지 신부님의 의견도 알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 주님의 평화

안녕하세요? 좋은 질문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상하게도 이제 이 “질문 답변란”을 닫을 때가 되었구나 싶으면 하나씩 질문이 올라오는군요. 하여튼 덕분에 이 게시판의 생명이 한동안의 유예기간을 얻었습니다.

굳이 제게 질문하셔야 할 이유를 모르겠습니다만 (^^) 언젠가 어떤 분이 비슷한 질문을 하셔서 그에 대해 제 생각을 간단히 밝힌 바가 있습니다. 물론 그 질문은 성직자가 세속적인 직업을 갖는 것에 대해서 부정적인 생각과 경험에 근거한 것이었는데, 아마도 이번 질문을 주신 교우님께서는 좀 긍정적인 방향에서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어쨌든 무슨 일이든 다 그렇듯 성직자가 성직 수행을 위한 사목 활동말고 다른 직업을 가지는 것에는 부정적면도 있고 긍정적인 면도 있습니다.

우선 그때 질문에 대한 답변이 참고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

성공회에서도 기본적으로 성직자는 다른 세속직업을 가질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애매한 규정이어서, 몇가지 상황에서는 예외적인 것이 많습니다. 굳이 표현하자면, 예를 들어서 학교에서 가르치는 일을 하는 교사나 교수직도 세속적인 직업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런 일에 성직자나 수도자가 참여하는 것은 어떤 점에서 바람직하고 필요한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말씀하신대로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 행위와 관련해서는 부정적인 인상이 짙습니다. 그리고 그런 예를 저 개인적으로는 본 적이 없습니다.

다만 성공회는 “자급 성직”에 대한 규정이 있습니다.
아직 많은 논란이 있고, 이의 기원에 대한 분명하지 못한 이해때문에 오해의 여지가 있긴 합니다만, 성직자가 교회에서 사례금이나 생활비를 받지 않고, 스스로 일해서 자기 생활을 꾸려 나가는 경우를 두고 일컫는 말입니다.

이러한 전통은 사실 사도 바울로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사도 바울로는 스스로를 천막장이(tent-maker)로 불러서, 스스로의 생계를 벌어 꾸려 나갔고, 이에 따라서, “tent-making ministry” 라는 말도 있습니다. 개신교에서는 이를 “자비량 선교”라고 번역하지만, 그저 “자급 목회” 혹은 그 해당자에 관해서 “자급 사목자”라고 하면 이견이 없으리라고 봅니다.

이에 근거해서 로마 가톨릭 교회와 성공회에서도 매우 훌륭한 자급 성직의 사례를 남기기도 했습니다. 이를바 “노동 사목”과 관련하여 많은 로마 가톨릭 사제들과 성공회 사제들이 노동 현장에서 스스로 육체적인 노동을 하면서 생계를 꾸려 나가며, 노동 현실에 대한 고발과 그 현장에 있는 노동자들과의 나눔을 형성한 아름다운 전통이 있습니다. 이런 점들은 현대적으로 새롭게 해석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http://viamedia.new21.org/spboard/board.cgi?id=qna&page=1&action=view&number=131-1.cgi&img=no&category=sub_cmt&keyword=%C1%F7%BE%F7&start_num=

여기에 제 개인적인 견해와 보고 배우는 경험을 좀더 덧붙이겠습니다. 위 답변에서와 같이 성직자가 다른 직업을 갖는 것은 초대 교회의 한 전통이기도 했지만, 교회가 커지고 사목의 내용이 좀더 복잡해지면서 성직 자체가 하나의 독립된 전문직이 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사실 여기에는 복잡한 교회사적인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나쁜 쪽으로 지적하자면, 이른바 성직자의 계급화 혹은 성직자주의가 진행되면서 성직은 세속적인 직업과 영영 이별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그러다보니 성직과 세속적인 직업은 별개의 것이 되어버렸고, 사람들도 그걸 당연한 것으로 인정하고 있는 듯합니다.

하지만 한국 교회의 일각에서도 이미 성직자가 사목 활동 이외에 생계를 위한 다른 직업을 갖는 것이 논의된 적이 있습니다. 개신교에서는 대체로 이것을 “자비량 선교”라는 이름을 붙이곤 했는데, 물론 반대와 찬성이 엇갈리긴 했어도 매우 중요한 논의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성서와 교회의 전통에서 보는 바와 같이 어떤 원칙이리기 보다는 그 상황과 목적에 따라 융통성 있게 받아들여야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앞서 지적한대로 교수직이나 교사직도 사실 세속직이거든요. 그렇지만 성직자로서의 사명을 그런 방향에서 수행하는 것이기도 하지요. 물론 성직 수행과 사목 활동에 반하지 않는 직업이어야 한다고 봅니다.

미국에서 공부하는 관계로 많은 신학생, 그리고 이곳 신부님들을 만납니다. 그리고 많은 분들이 전문직의 경험을 가지고 있거나, 또한 이를 병행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판사도 있고, 법률가도 있으며, 교사도 있습니다. 이 분들 가운데는 교회 사목만을 전담하려는 분도 있지만, 현 직업을 유지하면서 성직자로서 새로운 방향으로 그 직업을 발전시키려는 분도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어쨌든 우리의 특수한 문화적인 현실과 상황, 그리고 사목직의 환경때문에 교회법에서도 다른 세속적인 금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만, 여전히 그것도 융통성이 있다고 봅니다. 다만 현재 우리 교회에서 마련한 “자급 사제”에 대한 규정이 신학적인 반성이 결여되고, 매우 협소한 이해에 기초한 정책이어서, 오히려 “자급 사제”라는 성서적, 교회사적인 전통의 예를 왜곡할 여지마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깊은 고민과 성찰 없이 만들어진 정책이 가져온 대표적인 폐해인게지요.

이런 식으로 생각과 논의를 넓혀가면 어떨까 생각합니다. 우선 “성소”에 대한 생각으로 시작합니다. “성소”는 이른바 모든 신자들이 갖는 하나의 신앙적 소명이라는 전제 속에서, 성직은 그 성소의 한 특별한 형태입니다. 많은 신자들이 다들 자신의 성소를 자신의 생활 속에서 수행하듯이, 성직자 역시 그 성소를 복음을 전파하고 교회 공동체를 위해 섬기는 일로 수행합니다. 그 과정에서 그 섬기는 방법이 상황에 따라 다양하겠으니, 성직자들 역시 다른 직업을 가질 수도 있고, 무엇보다도 그 직업은 자신의 성직 성소의 연장 선상에 있는 것이야 합니다. 이런 결정은 성직자 자신은 물론이요, 그 해당 교회 공동체의 동의를 통해서 이뤄져야 합니다.

내용없이 장황해진 것은 아닌지요. 게시판 검색란에서 “직업”을 넣어서 다른 글들도 한번 참고해보셨으면 합니다.

복된 사순절이길 빕니다.

주낙현 신부 합장

Written by skhfaq

2006년 3월 5일 at 1:23 pm

Uncategorized에 게시됨

Tagged with ,

고해성사의 의미와 준비

leave a comment »

안녕하세요.
주낙현 신부님.

겨울이라 날이 추운데 몸 건강하신지 모르겠습니다.
이번에 타교파 영접식으로 바우로라는 신명을 받았습니다.주임사제인 오정열 신부님이 지어주셨는데, 바우로처럼 살라는 좋은 뜻이 있을 거라고 봅니다.

주 신부님께서는 제가 성공회 교회에 잘 적응하기를 바란다고 축복하셨는데,덕분에 잘 적응하고 있습니다.교우님들이 따뜻하게 대해주시는 덕분이겠지요.

몸이 안 좋아서 한주 쉰 적이 있는데, 그 다음주 미사시간에 신부님과 교우님들이 환영해 주신적이 있을 정도입니다.
제가 글을 올린 이유는 고해성사와 만도에 대한 궁금증 때문입니다.

성탄절이 얼마 안남아서 신부님이 고해성사와 만도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들으니,자세하게 어떻게 고해성사와 만도를 드리는지 궁금해졌습니다.
오 신부님은 공도기도문에 다 나와있으니 보고 하면 된다고 하셨지만, 아직 성공회에 대해 모르는게 더 많은 저로서는 무척 궁금합니다.

이야기를 주저리 주저리 써 보았습니다.

바우로 드림.

+ 주님의 평화

김재홍 바우로 교우님 안녕하세요? 대림의 설레는 기쁨으로 함께 만나게 되어 기쁩니다. 먼저 성공회 신앙 전통 속에서 주님의 길을 함께 걸어가가게 된 것을 축하하고 기쁘게 생각합니다.

고 해성사와 만도에 대한 질문을 주셨는데, 우선 구분을 하자면, 이 두 가지가 필히 연결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고해성사는 성공회가 전통적으로 가지고 있던 성사 가운데 하나이고, 만도(晩禱)는 현재 새로운 기도서에서 “저녁기도”로 쓰고 있는 예배의 한 형태를 말합니다. 성탄절이나 부활절, 혹은 큰 축일 전에 있는 만도 혹은 저녁기도는 대체로 “밤예식”이라는 다른 이름을 갖는데 영어식 표현으로는 “비질”(vigil)이라고도 합니다. 교인들이 모두 함께 참여하는 예배이므로 함께 안내를 받으며 함께 따라하시면 큰 문제는 없습니다. 문제는 역시 참여요 경험이니까요.

고해성사에 대해서 말씀드립니다. 고해성사는 그 동안 고백자의 “개인적인 죄의 고백”에만 초점을 두고, 또한 사제의 사죄권에만 집중되어, 그 의미가 손상되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 반영으로 “고백성사”라는 말이 한동안 통용되었고, 혹은 현재 사용하는 “고해성사” 혹은 “고해예식” 역시 “고백”(이를 고)과 “죄의 용서”(풀 해)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고해성사의 큰 뜻은 죄의 고백과 회개 (penance) 그리고 하느님과의 화해 (reconciliation)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잘못된 행동에서 “돌이켜서” 다시금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로 “화해”하는 것이 고해성사의 목적이라고 하겠습니다. 실제로 이러한 뜻을 가장 잘 드러내는 성사는 세례와 견진 성사입니다. 세례를 통해서 새로운 사람이 되어 새로운 공동체로 환영받음으로써 성찬을 함께 나누는 신앙 성장의 과정 속에서, 고해성사는 한번뿐인 세례와 견진이라는 입교예식을 계속해서 되새기고 우리 생활에 옮기면서 성찬을 위한 준비가 됩니다. 바로 이 때문에 많은 기도서들은 순서상 세례와 견진 성사 다음에 고해성사의 예식을 두는데, 매우 적절한 배열이라고 하겠습니다. 우리 기도서 역시 그런 배치를 따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고해성사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앞서 말씀드린 의미를 따라 생각한다면, 세례를 받기 전에 씻어내고 쓸어내려고 했던 것 – 유아세례라면 이후의 학습이나, 입교의 과정 속에서 새롭게 다짐했던 것 – 을 되새기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즉 내 앞에 놓여 있어, 치워버리지 않고는 내 길을 걸어갈 수 없는 걸림돌들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그 내용을 고백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또한 이것은 대체로 하느님과 이웃과의 화해라는 견지에서 살펴야 한다고 봅니다. 그리고 신앙이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라는 점에서 볼 때, 하느님을 불편하게 해드리는 것, 결국 그로 인해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 (이웃)을 불편하게 하는 내용들을 고백하고 용서를 청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고해성사가 하나의 신앙 훈련의 과정이라고 할 때, 너무 광범위하고 추상적인 내용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내용을 구체화시키는 것이 좋습니다. 예를 들어 어느 특정한 기간을 두고 제한을 하든지, 가장 마음을 떠나지 않고 괴롭히는 문제들을 가지고 신부님과 만나시면 좋겠습니다. 고해성사는 구체적인 어떤 실마리를 명확히 함으로써 전체의 문제를 풀어나가는 기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때문에 여러 가지 역사적인 신학적인 논란에도 불구하고 성공회가 고해성사를 중요하게 여기며 보존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먼저 신부님과 고해성사를 위한 시간과 약속을 잡으시는게 우선이겠지요. 교회의 처지에 따라 다르지만, 아마 작은 고해소를 마련하거나 고해를 위한 칸막이를 설치하는 일이 많을 것입니다. 아니면 마주 비스듬히 앉아서 이야기할 수 있는 작은 고해방이 마련될 것입니다. 편안한 마음으로 다가 가셔서, 자신이 생각하고 준비했던 큰 마음의 걸림돌들을 가능하면 적으셔서 예식에 따라서 고하십시오. 그 전에 다른 상담이 필요하면 신부님께 요청할 수 있습니다. 고백을 듣는 신부님의 존재는 내가 잘할 때나 잘못할 때나 우리 삶에서, 그리고 우리 곁에서 내내 지켜 보고 계시던 하느님께서 “아무런 걱정 말거라” 하시면서, “어떤 문제라도 용서는 이미 선언되어 있다”라고 건네시는 하느님의 말 없는 표현을 위한 확증이라고 생각하십시오. 그러면 하느님께서는 신부님의 입을 빌어 “평안히 가십시오”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주낙현 신부 합장

Written by skhfaq

2005년 12월 13일 at 4:02 pm

Uncategorized에 게시됨

Tagged with

성공회 예배 참석 – 성공회와 장로교

leave a comment »

안녕하셨는지요. 주낙현 신부님.

오랜만에 신부님의 홈페이지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제가 궁금한 것은 성공회 서울대성당을 나가고 싶은데,적응할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전 장로교에서 신앙생활하기 때문에, 초대교회의 전통을 갖고 있는
성공회 예배에 적응할 수 있을지 걱정입니다. 성공회 예배와 장로교 예배의 차이점을 알려주시면 좋겠습니다.

그 다음 궁금한게 하나 더 있습니다.

전 감리교 장로가 운영하는 개신교계 달력회사에서 상호쇄입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미국의 다양한 한인 교회들을 만나게 됩니다. 침례교,장로교.오순절교회등 다양한 교파들을 만났지요..

그러다가 미국성공회에 속한 어느 한인 교회에서 상호쇄입을 부탁해서 작업한 적이 있는데, 이상한 점은 그 교회를 목회하는 성직자가 자신을 담임목사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약도에 적은 미국교회명에는 Episcopal Church 즉, 미국성공회라고 되어 있고, 성공회에는 목사가 없는데 말이죠..어떻게 된 것일까요..

좀 쓸데없는 질문인지 모르지만,무척 궁금합니다.

+ 주님의 평화

김재홍님 다시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성공회에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직접 예배에 참석하시려 한다니 기쁩니다. 예배 참석에 대해서 너무 걱정하시지 말고, 그저 참석해서 그 흐름에 맡겨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서로 다른 점들이 무엇인지를 스스로 발견하고, 어떤 점들이 새롭고 좋은 점들인지, 어떤 점들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인지, 그런 궁금점들을 스스로 정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 가운데 나오는 문제들을 가지고 함께 이야기하면 더욱 좋을 것 같습니다.

우선은 공통점에서 출발합시다. 성공회와 장로교 예배는 우선 하느님의 백성이 하느님을 예배하기 위한 시간이요 공간입니다. 그리고 그 구조면에서 하느님께 기도를 드리고, 찬양하며, 말씀을 읽고, 말씀의 풀이를 들으며, 주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성찬을 나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예배는 전통적으로 “말씀의 예배”와 “성찬의 예배” 둘로 구성됩니다. 물론 세분하지만 앞 뒤로, “시작 예식”과 “마침 예식”이 들어가겠습니다만… 그러니 다시 설명하자면… 시작예식 – 말씀의 예배 – 성찬의 예배 – 마침(파송) 예식의 구조입니다.

장로교 예배 – 실은 한국 장로교 예배의 한 편향일 뿐입니다만 – 는 이 가운데서 “말씀의 예배”에 집중하고 있다고 봅니다만, 시작예식과 마침예식의 요소도 들어 있습니다. 이런 구조는 어떤 점에서 성공회가 가지고 있는 성무일과의 아침기도 그리고 저녁기도와 비슷한 형태입니다.

그러니 현 상황에서 큰 차이점을 말하라면, 성공회는 매 미사때마다 성찬의 예배를 거행하면서, 말씀의 예배와 성찬의 예배라는 전통적인 예배의 틀을 유지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성공회 예배는 기도서를 중심으로 진행됩니다. 이미 정해진 예전 텍스트를 중심으로 예배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성공회와 같은 예전적 교회들은 이러한 텍스트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이것이 비예전적 교회와의 차이점입니다만, 근래에는 개신교회들도 이런 예전 텍스트를 새롭게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예전적 교회와 비 예전적 교회의 차이점을 극복하기 위한 중요한 작업이 WCC의 리마 예전을 통해서 나왔습니다. 가능하다면 이 예식서를 구해서 일독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예전은 텍스트도 아니요, 설교 듣기도 아닙니다. 예전과 예배는 무엇보도 하느님의 백성인 많은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하느님의 구원 행동을 축하하며 감사하고, 그 구원의 행동에 스스로를 적극적으로 참여시키는 행위입니다. 이러한 전망에서 말씀도 듣고, 성찬도 함께 나누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교회에 가시면 안내를 하시는 분들이 예배 내내 도와주시리라 생각합니다. 그런 분을 만나지 못하면, 주위 분들에게 요청하시기 바랍니다. 성찬 참여의 문제는 실제로 교회마다 신부님마다 조금씩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으며, 영성체에 대해서는 사전에 신부님과 면담을 하시기 바랍니다. 신부님들께서 흔쾌히 상담에 응해 주실 겁니다.

두번째 질문에 대해서 짧게 답변드립니다. 그 교회가 어느 교회를 지칭하는 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알고 있는 정보로 추측하건데… 미국에 있는 한인순복음교회 하나가 목사님과 더불어 미국성공회로 들어온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가지 교회의 습속상, 그리고 한인이미자 70%가 개신교신자인 이민사회의 특수성을 고려해서 예전 교회의 관습과 명칭들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물론 점차로 이를 바꾸어 나가기를 희망하고 있기도 합니다만). 실제로 영어 표현상은 하등의 문제가 없습니다만, 우리나라에서는 성직자의 호칭 문제가 교회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인양 보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도움이 되었길 바랍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된 형제,

주낙현 신부 합장

Written by skhfaq

2005년 10월 22일 at 3:59 pm

Uncategorized에 게시됨

Tagged with , ,

성공회와 천주교 – 전례 개혁의 관계

leave a comment »

+항상 기뻐하십시오…

안녕하세요? 신부님!! 미국에서 고생이 많으시죠?? ^^

한 번도 뵌 적은 없지만 제가 알고 있는 유일한 성공회 신부님이라는 사실에 신부님과의 만남을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희 수도 공동체에 함께 살고 계신 신부님께서 작년 태백에 있는 성공회 신부님께서 활동하시는 공부방에서 형제들과 함께 며칠 계셨다고 하는데 참 좋았다고 하시더군요… ^^

성공회 신부님과 교류를 하시는 모습이 참 보기 좋던데…저도 신부님과 그런 교류가 가능하겠죠?? ^^

아~~ 주제에서 벗어나는 말을 오랫동안 했군요…

질문의 핵심은 이렇습니다.

가톨릭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해 전례개혁을 했습니다. 성 비오 5세 미사 또는 트리덴틴 미사라고 일컫는 미사를 대신해서 자국어로 미사를 봉헌할 수 있고, 제대위치도 벽을 보는 것이 아닌 회중을 향하게 되었고 미사가 다소 간소화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바티칸 공의회를 주도하신 바오로 6세 교황께서는 트리덴틴 미사를 아예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런 전통도 인정하면서 보편적으로 드릴 수 있는 미사를 제정하셨는데요…

성공회와 가톨릭의 미사 형태가 비슷한 시점에서 성공회의 미사는 어떤 변화를 거쳐왔는지요… 어떤 성공회 성당의 제대를 보니 벽쪽에 제대를 붙여 놓은 곳도 있던데…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거치면서 성공회 내에서도 미사전례에 대한 변화가 있었는지, 아니면 독자적인 변화를 거쳤는지…

그리고 가톨릭의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에도 성공회의 미사는 지금의 형태를 가지고 있는지 궁금하네요… ^^

질문이 많죠?? ^^

주님의 은총이 가득하시길 기도드립니다.

주님 안에서 일치하는 그대의 벗 이정은(요한 보스코)수사 두 손 모음…

+ 주님의 평화

이정은 수사님 안녕하세요? 근래에 이 공간을 통해서 자주 만나게 되어 기쁩니다. 성공회와 로마 가톨릭 교회의 에큐메니칼 대화와 협력은 서로의 전통에 대한 깊은 이해와 존중,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느님 나라를 향한 공동의 발걸음이라는 점에서 매우 의미 있는 일이겠습니다. 무엇보다도 그것이 양 교회의 공식적인 채널뿐만이 아니라 “아래로부터의” 대화와 협력일 때에 그 진정성을 굳건히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늘 새로운 물음과 열린 대화의 태도로 좋은 물음을 던져 주시는 이수사님은 이런 대화를 이끌어 가시는 분입니다. 이수사님의 손에 끌려 다니다가 덤으로 얻는 배움이 크다고 먼저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전례(예전)개혁에 관련해서 말씀드립니다. 아시다시피 그리스도교계의 세계적인 전례 개혁은 이른바 “전례 운동”(Liturgical Movement)이라는 이름으로 19세기말과 20세기 초에 추동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주제는 역시 형식화되고 화석화된 예배가 아니라 신앙인의 “적극적 참여”(active participation)를 기반으로 한 하느님 백성의 일(레이투르기아)로서 예배를 회복하자는 것이었지요. 그 반세기 넘은 결과물로 바티칸 2차 공의회의 그 유명한 “거룩한 전례에 관한 헌장”(전례 헌장)이 나오게 되었고, 그 영향력은 로마 가톨릭 교회뿐만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교계에 걸쳐 지대한 것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로마 가톨릭 교회의 전례개혁은 “하느님 백성”의 전례에 대한 “적극적 참여”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로 “라틴어 미사”가 각 지역 언어 미사로 번역될 수 있었고, 기존의 미사와 성사를 대대적으로 개정하여 1969년과 1970년(로마 미사)에 나왔던 것이지요. 즉 전례 개혁의 요지를 바티칸 2차 공의회의 용어로 정리하자면 ‘하느님의 백성이 백성의 일(의무)인 전례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격려하기 위하여 미사와 성사를 개정하고, 미사의 지역어 번역을 허용한다’는 것이겠지요.

한편 성공회는 흥미롭게도 이미 종교개혁(16세기) 이래로 이러한 전례 개혁의 원칙들을 발전시켜 왔습니다. 즉 영어(지역어) 성서 번역과 함께, 성서에 기초하면서 초대 교회와 중세 교회를 아우르고 영국 지역에서 발전된 예전 전통(대체로 사룸 미사)를 종합한 성찬례(미사)를 영어(지역어)로 만들어 냈습니다. 아울러 성직자 혹은 수도자 중심으로 되어 있던 성무일도를 개혁하여 “아침기도”와 “저녁기도”로 이루어진 공동 예배의 틀을 마련하여 사용했습니다. 아울러 방만하게 나뉘어져 있던 여러 예전서들을 취합하여 성직자와 평신도 모두가 함께 사용할 수 있도록 예전과 성사, 그리고 사목 예식들을 간소화하고 이를 한 권의 기도서로 만들어서 접근이 쉽도록 했습니다. 즉 1549년으로부터 1662년에 이르는 공동기도서(The Book of Common Prayer)의 개정 과정을 통해서, 1) 성서에 근거한 전례, 2) 초대 교회 전통에 부합하는 전례, 3) 교회의 일치를 위한 전례, 그리고 4) 모든 신자들이 쉽게 접근하여 사용할 수 있는 전례라는 전례 개혁의 원칙을 마련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공회의 공동기도서는 성공회가 어떤 교리적 혹은 신학적 선언에 기초한 교회가 아니라, 기도서의 영성에 기초해서 끊임없이 기도하는 교회 (Church in Prayer)라는 점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성공회에는 이런 공동기도서에 기초하면서 여러 신학적 성향과 교회의 흐름에 따라 다양한 경향의 예배를 발전시켰습니다. 그러다가 19세기 말 로마 가톨릭에서 일어난 전례 운동과 비슷한 전례 운동이 19세기에 “의례주의”(Ritualism) 운동이라는 형태로 영국 성공회 안에서 발전되었고, 이러한 흐름은 당시의 신학적 운동 가운데 하나였던 옥스퍼드 운동과 만나면서 세계성공회 내에 교회 역사 전체를 아우르는 전통적 전례에 대한 깊은 관심을 불러일으키게 됩니다. 실제로 당시 영국 성공회의 경우 전례복이나 전례 지침 혹은 행위 등이 매우 간소화되어 있었고 성찬례도 일년에 네 차례, 혹은 한달에 한번 꼴로 이뤄지는 것이 대부분이었고, 주일 예배는 공동 예배 의식으로 마련된 “아침 기도”를 통해서 드리는 것이었기에, 이러한 흐름은 매우 새롭고도 획기적인 운동이었습니다. 이런 움직임에 힘입어 성공회는 초대 교회의 다양한 예배들을 다시 연구하고, 중세의 전례 관습을 비판적으로 복원하면서 현재의 로마 가톨릭과 비슷한 형태의 전례가 급속하게 퍼지게 되었던 것이지요. 그러니까 성공회가 현재와 같은 매우 전례적인 교회의 모습을 일반적으로 회복한 것은 이제 겨우 100여년 된 현대적 현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편, 성공회는 앞서 말씀드린 대로 자국어 전례와 전례 개혁의 자율성을 전통을 갖고 있었던데다, 세계 성공회의 구조 상 각 관구 교회가 독립된 교회로서 치리의 자율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자국어 전례와 전례 개혁(대체로 기도서 개정)의 자율적 권한을 자연스럽게 발전시켰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1958년 람베스 회의(세계성공회 주교회의)에서는 이러한 전례 개혁의 자율성과 전례 토착화의 필요성을 처음으로 공식화함으로써, 당시 그리스도교 전체에서 일고 있던 전례 운동의 흐름에 협력하며 서로 영향을 주고 받게 되었습니다. 이후 세계성공회의 각국 성공회는 대대적인 기도서 개정과 전례 개혁을 시도하게 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로마 가톨릭 교회와 정교회의 유산, 그리고 다른 개신교 전통 교회들과 깊은 교류를 얻게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바티칸 2차 공의회의 “하느님 백성의 적극적 참여”라는 개혁의 원칙은 역시 성공회의 원칙이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다시 말해서 전례 개혁에 관하여 이제는 로마 가톨릭, 성공회, 개신교회들이 모두 함께 연구하고 이 연구의 성과를 각 교단의 전통에 따라 반영하고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러다 보니 이제는 전례의 구조적 특징(특별히 성찬례)과 관련해서는 거의 일치된 형태를 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세계성공회는 영국성공회의 기도서인 1662년의 기도서를 모본으로 삼아서 기도서 개정을 진행하였고, 이후 세계성공회 국제 전례 위원회를 통해서 함께 전례 개혁의 신학적 원칙을 연구하고, 각국 교회에 권고하는 전례 문서를 발행하고 있습니다. 각국의 성공회는 이를 원칙적으로 존중하지만, 그 교회의 전례는 그 교회에서 결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세계성공회의 전례는 그 형태 상의 특징이 서로 다르게 나타날 수 밖에 없습니다.

또한 같은 나라에서 같은 기도서를 사용한다 하더라도, 그것을 실행하는 다양한 전례 관습을 강제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에, 교구에 따라 혹은 심지어는 같은 교구 안에서도 개별 교회에 따라, 다른 전례 관습이 온존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여러 다른 조건들이 관여하는 바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한국에는 여전히 벽에 붙은 제대를 사용하는 교회가 있는데, 이는 현존하는 성당의 구조상 그런 것일 뿐인 경우가 많고, 새롭게 지어지는 성당에서는 신자들을 향한 제대 배치가 대부분입니다. 또 기본의 벽에 붙은 제대가 있다 하더라도 이를 보존하고 새로운 제대를 신자를 향해 마련하여 미사를 드립니다.

전례에 대한 에큐메니칼 연구가 확대되는 것이 세계 교회의 현실이지만, 한국의 경우는 그렇지 않은 것 같아서 아쉽습니다. 전통적인 전례의 구조와 형태를 강조하다 보면 왜 로마 가톨릭 교회를 따르냐는 핀잔이 개신교 측에서 우세하다면, 좀더 자유롭고 현대적인 예배의 모본을 전례 전통의 교회에 도입하려 하면, 왜 개신교적 ‘악습’을 도입하려 드느냐는 또 다른 핀잔이 다른 쪽에서 나옵니다. 그러나 다시 한번 생각해야 할 것은 성공회의 전례 개혁 선구자들과 로마 가톨릭의 바티칸 2차 공의회 교부들이 올바르게 밝혔듯이 “하느님의 백성”이 하느님을 경배하고 그분과 대화하며 호흡하는 “하느님의 일인 전례”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이야 말로 전례 개혁의 원칙이 되어야 하겠지요.

함께 하느님의 백성인 것을 기뻐하며,

주낙현 신부 합장

성공회와 천주교의 상호 미사 참석 문제

leave a comment »

안녕하세요..

주신부님… 전 에큐메니컬 운동에 관심이 많은 카톨릭 신자입니다… 성공회, 정교회, 콥트교회등의 형제교회에 관심이 많습니다… “왜 갈라졌어야만 하나” 생각이 계속 머리 속을 떠나지 않습니다… 물론 우리가 누누히 배운 역사적 배경이나 정치적 배경은 떼어 놓고 말입니다.. 전 30대 초반의 청년 신자인 동시에 직장인이라서 카톨릭 교회에서 주관하는 사도직학교에 등록하기가 현실적으로 어렵습니다.

가끔 미사 후 저희 본당 신부님께 교회의 일치에 관한 질문을 많이 합니다….

카톨릭 신자로서 성공회 미사에 참석할 수 있는지…(가능하다고 하셨습니다)
성체를 모셔도 되는지… 또 거꾸로 성공회 신자의 카톨릭 미사 참석은 그러한지…
다른 분들에 의해 저의 질문이 교리적 논쟁을 일으킬 소지가 있다면…답변은 안 해 주셔도 되구요… (예를 들어… 신품성사, 수위권등…)

아울러 여기 방문하시는 카톨릭 신부님, 수사님, 신학생님의 고견도 듣고 싶습니다…

오늘은 카톨릭 교회에서 지정한 농민 주일입니다…
저희의 일용한 양식을 땀과 힘으로 경작하는 이 세상의 모든 농민들께 주님의 축북이 함께하시기를 빕니다… 요셉 배상…

+ 주님의 평화

요셉님 안녕하세요? 교회 전통 간의 대화에 깊은 관심을 가지신 분을 만나니 기쁘고 반갑습니다. 교회의 분열은 그리스도교의 역사에 많은 유산을 마련해 놓았습니다. 대체로 그것은 서로에 대한 반목과 질시로 이어졌지만, 한편으로는 서로 다른 문화와 역사라는 맥락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다양한 신앙의 열매를 가져다 주는 불가피한 것이었다는 생각에 이르기도 합니다.

역사적 배경과 원인은 그 나름대로 언급하고 논구해야 할 여지가 있다면, 또 그것과 다른 맥락 속에 있는 우리가 서로 함께 이해해야 할 면들이 더욱 크고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요셉님의 고민은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나눠야 할 태도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주신 질문은 대체로 천주교 측에서 답변해야 할 것들이라는 생각이 먼저 들지만, 그걸 성공회의 처지로 돌려 놓고 답변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자면 질문의 방향이 조금 달라지는 것도 피할 수 없습니다. 그걸 이해해 주시겠지요?

우 선 천주교 신자가 성공회 미사에 참석할 수 있느냐는 질문입니다. 요셉님께서 상담하신 천주교 신부님께서는 가능하다고 하셨는데, 그 참여가 어느 정도까지 가능한 지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제가 아는 한에서 한국 천주교의 사목지침서에서는 피치 못하게 천주교에서 미사를 드리지 못하는 경우, 혹은 위급한 경우에 한해서 성공회에서 미사를 드리고 영성체를 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사목적 상황에 따른 제한이 있습니다. 성공회는 어떤 경우이든 적법하게 세례를 받은 신자라면 성공회 미사(감사성찬례)에 참여하여 영성체를 할 수 있습니다. 천주교회와는 달리 성공회는 이런 적법한 세례의 범위를 거의 대부분의 건전한 개신교 교단들과 천주교, 정교회의 세례까지 확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삼위일체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성공회 미사에 참석하고 영성체를 할 수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찬례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열려 있는 식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성찬 이해의 교리적 차이가 여전하기 때문에 되도록이면 미사에 참석하기 전에 성공회 성직자와의 상담이나 대화를 갖도록 권유합니다.

두 번째 질문은 성공회 신자가 천주교 미사에 참여해서 영성체를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천주교 측이 답변해야 할 것이지만, 제가 이해하고 있는 내용을 밝히면 이렇습니다. 천주교가 성공회의 세례를 적법한 것으로 인정하고 있으나, 일정한 교리 교육과 “일치 예식”을 통해서 천주교 신자가 된 이후에 영성체를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잘못된 이해라면 고쳐주시기 바랍니다.

이 와 관련해서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는 특수한 처지에서 제 경험을 나누고자 합니다. 이곳은 지역과 교회마다 차이가 있긴 하지만, 성공회 신자가 천주교 안에서 조건 없이 영성체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성공회의 경우는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영성체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정교회는 서방교회(천주교, 성공회 및 기타 개신교단) 신자들을 영성체로 초대하지 않습니다.

아 울러 성공회 일각에서 논의되는 문제 가운데 하나는 세례를 받지 않은 사람도 영성체를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른바 “영성체 개방”(Open Communion)에 관련된 논쟁이 그것인데, 예수님의 식탁 공동체 혹은 밥상 공동체가 어떤 차별의 벽도 철폐하는 매우 급진적인 환대(radical hospitality)였다는 점에서 그 뜻을 새롭게 하고 실천하자는 취지입니다. 이를 둘러싸고 많은 논쟁이 진행되고 있습니다만, 어쨌든 도대체 성찬례라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근본적인 질문을 새롭게 생각하고, 그리스도인됨이 무엇인지를 되새기는 계기라고 생각합니다.

제 짧은 답변이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좋은 대화의 계기를 열어주신 요셉님께 감사 드립니다.

주낙현 신부 합장

Written by skhfaq

2005년 7월 21일 at 3:52 pm

Uncategorized에 게시됨

Tagged with , ,

고해성사와 별세 만도

leave a comment »

안녕하세요.
주 신부님…
궁금한게 있어서 글을 드립니다.
제가 다니는 장로교회에서는 고해성사와 별세만도라는게 없습니다.
그래서, 이들 성사에 대해서 밑의 한겨레 기사를 읽으면서, 궁금증이 생기더군요.
자세히 이들 성사에 대해서 설명해 주십시오.
그럼 하느님이 주시는 평안이 항상 충만하시길…

+ 주님의 평화 김재홍님 안녕하세요?

답변이 늦어 따라 질문 글을 올리셨군요.

우선 한겨레 신문에 난 소식을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잘 아는 친구 신부의 소식을 이렇게 들으니 매우 기쁩니다.

문의하신 고해성사와 별세만도에 대해서 답변드리겠습니다.

우선 고해성사에 관한 성공회의 이해는 이미 이 “질문이 있어요” 게시판에서 다룬 적이 있습니다. 그 내용을 따라가시면 도움을 얻으시리라 생각합니다. “고해성사”로 검색을 하시든지, 다음 링크를 따라가시면 됩니다. 고해성사 1 고해성사 2

두 번째, 별세만도에 관한 것입니다. 이는 쉽게 말해서 유교식의 제사를 대신해서 드리는 성공회식 별세자 기념 예배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만도”란 “저녁기도”의 한자말이니, 별세자 기념 저녁 기도라고 풀이할 수 있겠습니다. 개신교의 추도 예식에 해당하는 말입니다.

“별세 만도”라는 용어는 2004년 개정된 성공회 기도서 직전까지 사용되던 용어로서, 실은 장례기간 동안에 드리는 별세자 기념 저녁기도에 대한 명칭으로 상장예식의 일부입니다. 그러나 이 형식을 일반적으로 별세자 기념일(기일)에 가정에서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2004년 개정된 성공회 기도서에서는 상장예식에 있는 예배와 더불어, “별세 기념 예식”이라는 사목 예식을 따로 마련하고 있습니다. 성공회는 이 예식에서 전통적인 그리스도교 예배를 따르되, 우리 문화에 대한 존중과 가족들의 화목한 기념을 위해서 제사상을 차리는 것과 절하는 것을 금하지 않습니다.

다음은 2004년 성공회 기도서에서 따온 별세 기념 예식의 설명입니다.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별세 기념 예식” 이 예식은 차례나 기일 혹은 묘지방문시에 사용할 수 있다. 좀 더 엄숙한 예식이 필요하다면 빈소기도(별세기도)를 사용할 수 있다. 신자들이 드리는 별세기도는 별세자를 기억하며 그 영혼의 안식을 기원하는 하느님께 드리는 예배이다.

우리가 별세한 이를 위해 기도하는 이유는 첫째로 교회는 산자만의 교회가 아니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이들이 교회의 구성원이라는 신앙 즉 성도의 상통에 따른 것이며 둘째는 비록 별세한 이라도 우리가 아직 사랑하고 기억하고 있으며 그들이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까지 하느님을 온전히 뵈올 수 있도록 성숙하는 과정 중에 있다는 신앙에 기인한다.(사도신경과 신앙의 개요)

절과 진설의 문제는 많은 이견의 차이가 있으나 이로 인한 가족 간의 갈등이 없도록 배려해야 한다. 다만 절은 생전의 부모님을 기념하고 그 영혼이 주님의 자비를 얻도록 기원하는 것이며 진설된 음식은 가족들의 화목과 우애를 위한 것임을 분명히 이해시켜야 한다.

기도상에는 십자고상과 촛불 2개 그리고 고인의 사진을 준비한다. 가능한한 꽃을 장식해서 분위기를 밝게 해둔다. 사진이 없으면 고인의 이름을 써서 붙여도 좋다. 기도상에 촛불을 점화함으로서 예식을 시작한다. 고인이 즐겨부르던 성가나 다른 적절한 성가를 선택해서 함께 부른다. (성공회 기도서 2004)

참고로 예식의 차례와 구성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시편 교독 2) 성서 독서 3) 사도신경 4) 주의 기도 5) 별세자와 가족을 위한 기도 6) 끝기도 7) 사랑과 화목을 위한 식사 도움이 되었길 바랍니다.

주낙현 신부 합장

Written by skhfaq

2005년 5월 27일 at 3:37 p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