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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연방공화국'''({{llang|de|Bundesrepublik Deutschland|분데스레푸블리크 도이칠란트}}, {{문화어|도이췰란드련방공화국}}<ref>{{웹 인용|url=http://mfa.gov.kp/view/article/13790|제목=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외무성|확인날짜=2023-03-19}}</ref>), 약칭 '''독일'''({{llang|de|Deutschland|도이칠란트}}, {{소리|De-Deutschland.ogg|듣기}}, {{문화어|도이췰란드}})은 [[중앙유럽]]에 위치한 [[국가]]이다. 인구는 2022년 기준 83,695,430명으로 [[유럽]]에서 [[러시아]]에 이어 두 번째로 인구가 많은 나라이자 [[유럽연합]](EU) 회원국 중 인구가 가장 많은 국가이다. 독일은 북쪽으로 [[발트해]]와 [[북해]]와 남쪽으로 [[알프스산맥|알프스 산맥]]의 사이에 위치하며, 북쪽으로 [[덴마크]], 동쪽으로 [[폴란드]]와 [[체코]], 남쪽으로 [[오스트리아]]와 [[스위스]], 서쪽으로는 [[베네룩스|베네룩스 3국]]{{efn|[[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와 [[프랑스]]와 접해 있다. 독일의 영토는 357,021[[제곱킬로미터|km<sup>2</sup>]]이며, [[기후]]는 주로 [[온대 기후]]를 보인다. [[공용어]]는 [[독일어]]이고, [[소수 민족]]어나 [[러시아어]], [[영어]], [[소르브어]], [[덴마크어]], [[프리지아어]]도 쓰인다. 독일의 수도이자 [[독일의 인구순 도시 목록|가장 인구가 많은 도시]]는 [[베를린]]이고, 주요 금융 중심지는 [[프랑크푸르트]], 가장 넓은 도시권은 [[루르]]이다.
'''독일연방공화국'''({{llang|de|Bundesrepublik Deutschland|분데스레푸블리크 도이칠란트}}, {{문화어|도이췰란드련방공화국}}<ref>{{웹 인용|url=http://mfa.gov.kp/view/article/13790|제목=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외무성|확인날짜=2023-03-19 |archive-date=2023-03-19|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230319044613/http://mfa.gov.kp/view/article/13790|url-status=}}</ref>), 약칭 '''독일'''({{llang|de|Deutschland|도이칠란트}}, {{소리|De-Deutschland.ogg|듣기}}, {{문화어|도이췰란드}})은 [[중앙유럽]]에 위치한 [[국가]]이다. 인구는 2022년 기준 83,695,430명으로 [[유럽]]에서 [[러시아]]에 이어 두 번째로 인구가 많은 나라이자 [[유럽연합]](EU) 회원국 중 인구가 가장 많은 국가이다. 독일은 북쪽으로 [[발트해]]와 [[북해]]와 남쪽으로 [[알프스산맥|알프스 산맥]]의 사이에 위치하며, 북쪽으로 [[덴마크]], 동쪽으로 [[폴란드]]와 [[체코]], 남쪽으로 [[오스트리아]]와 [[스위스]], 서쪽으로는 [[베네룩스|베네룩스 3국]]{{efn|[[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와 [[프랑스]]와 접해 있다. 독일의 영토는 357,021[[제곱킬로미터|km<sup>2</sup>]]이며, [[기후]]는 주로 [[온대 기후]]를 보인다. [[공용어]]는 [[독일어]]이고, [[소수 민족]]어나 [[러시아어]], [[영어]], [[소르브어]], [[덴마크어]], [[프리지아어]]도 쓰인다. 독일의 수도이자 [[독일의 인구순 도시 목록|가장 인구가 많은 도시]]는 [[베를린]]이고, 주요 금융 중심지는 [[프랑크푸르트]], 가장 넓은 도시권은 [[루르]]이다.


[[고전 고대|고대]]부터 다양한 [[게르만족|게르만]] [[부족]]이 현대 독일의 북부 지역에 거주했으며, 이 지역은 기원전 100년 이전부터 [[게르마니아]]라는 기록되기 시작했다. 962년에 형성된 [[독일 왕국]]은 [[신성 로마 제국]]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이후 16세기 동안 [[북독일]] 지역은 [[종교 개혁]]의 중심지가 되었다. 1806년 [[나폴레옹 전쟁]]으로 인한 [[신성 로마 제국의 해체]] 이후에 독일에서는 [[독일 연방]]이 결성되었다.
[[고전 고대|고대]]부터 다양한 [[게르만족|게르만]] [[부족]]이 현대 독일의 북부 지역에 거주했으며, 이 지역은 기원전 100년 이전부터 [[게르마니아]]라는 기록되기 시작했다. 962년에 형성된 [[독일 왕국]]은 [[신성 로마 제국]]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이후 16세기 동안 [[북독일]] 지역은 [[종교 개혁]]의 중심지가 되었다. 1806년 [[나폴레옹 전쟁]]으로 인한 [[신성 로마 제국의 해체]] 이후에 독일에서는 [[독일 연방]]이 결성되었다.

2023년 8월 4일 (금) 08:04 판

독일연방공화국
Bundesrepublik Deutschland

국기

국장
표어 독일어: Einigkeit und Recht und Freiheit
표어 설명 통일과 정의와 자유
국가 독일인의 노래[a]
수도 베를린[b] 북위 52° 30′ 02″ 동경 13° 23′ 56″ / 북위 52.500556° 동경 13.398889°  / 52.500556; 13.398889
정치
정치체제 연방제, 단원제[c], 공화제, 의원내각제
연방대통령
연방총리
연방상원 의장
연방의회 의장
연방헌법법원장
프랑크발터 슈타인마이어
올라프 숄츠
마누엘라 슈베지히
바르벨 바스
스테판 하르바스
입법부 독일 연방의회
독일 연방상원[c]
집권여당 연립정부
사회민주당
동맹 90/녹색당
자유민주당
역사
분할 통치  
 • 연합군 점령하 독일 1945년 6월 5일
 • 독일연방공화국 수립 1949년 5월 23일
 • 독일의 재통일 1990년 10월 3일
지리
면적 357,600km2[3] (63 위)
내수면 비율 2.416%
시간대 CET (UTC+1)
DST CEST (UTC+2)
인문
공용어 독일어[d]
데모님 독일인
인구
2023년 어림 84,607,016[5] (19위)
인구 밀도 236명/km2 (58위)
경제
GDP(PPP) 2023년 어림값
 • 전체 $5조 5370억[6] (5위)
 • 일인당 $66,037[6] (19위)
GDP(명목) 2023년 어림값
 • 전체 $4조 4620억[6] (3위)
 • 일인당 $52,823[6] (21위)
HDI 0.942[7] (9위, 2021년 조사)
통화 유로[e] (EUR)
종교
종교 가톨릭교회(24.8%)
개신교(22.6%)
동방 정교회(2.2%)
그 외의 기독교(1.1%)
이슬람교(3.7%)
그 외의 종교(1.7%)
무종교(43.8%)[8][9]
기타
ISO 3166-1 276, DE, DEU
도메인 .de
국제 전화 +49

독일연방공화국(독일어: Bundesrepublik Deutschland 분데스레푸블리크 도이칠란트[*], 문화어: 도이췰란드련방공화국[10]), 약칭 독일(독일어: Deutschland 도이칠란트[*], 이 소리의 정보듣기 , 문화어: 도이췰란드)은 중앙유럽에 위치한 국가이다. 인구는 2022년 기준 83,695,430명으로 유럽에서 러시아에 이어 두 번째로 인구가 많은 나라이자 유럽연합(EU) 회원국 중 인구가 가장 많은 국가이다. 독일은 북쪽으로 발트해북해와 남쪽으로 알프스 산맥의 사이에 위치하며, 북쪽으로 덴마크, 동쪽으로 폴란드체코, 남쪽으로 오스트리아스위스, 서쪽으로는 베네룩스 3국[f]프랑스와 접해 있다. 독일의 영토는 357,021km2이며, 기후는 주로 온대 기후를 보인다. 공용어독일어이고, 소수 민족어나 러시아어, 영어, 소르브어, 덴마크어, 프리지아어도 쓰인다. 독일의 수도이자 가장 인구가 많은 도시베를린이고, 주요 금융 중심지는 프랑크푸르트, 가장 넓은 도시권은 루르이다.

고대부터 다양한 게르만 부족이 현대 독일의 북부 지역에 거주했으며, 이 지역은 기원전 100년 이전부터 게르마니아라는 기록되기 시작했다. 962년에 형성된 독일 왕국신성 로마 제국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이후 16세기 동안 북독일 지역은 종교 개혁의 중심지가 되었다. 1806년 나폴레옹 전쟁으로 인한 신성 로마 제국의 해체 이후에 독일에서는 독일 연방이 결성되었다.

1866년 8월 18일 프로이센이 주도하는 북독일 연방이 수립되고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을 통해 1871년 독일 제국이 성립되면서 독일은 현대의 국민 국가로의 공식적인 통일이 이루어졌다. 제1차 세계 대전1918-1919년 독일 혁명 이후, 제국은 대통령제 바이마르 공화국으로 재편되었다. 나치의 집권은 독일의 전체주의 독재, 제2차 세계 대전홀로코스트를 만들어냈다. 유럽에서 제2차 세계 대전의 종전과 동시에 성립된 연합국 점령지 기간이 끝난 후 독일 전체는 일반적으로 서독이라고 불리는 '독일연방공화국'과, 동독으로 불리는 '독일민주공화국'이라는 제한된 주권을 가진 두 개의 개별 국가로 조직되었다.[g] 독일연방공화국(서독)은 유럽 경제 공동체(EEC)와 유럽 연합(EC)의 창립 회원국이었고, 독일민주공화국(동독)은 동구권 국가이자 바르샤바 조약 기구의 회원국이었다. 동독에서 공산주의 정부몰락한 이후 독일이 재통일되어 이전 독일의 주들은 1990년 10월 3일 독일연방공화국에 가입하여 독일은 연방 의회 공화국이 되었다.

독일은 강력한 경제를 가진 강대국으로 여겨진다. 실제로 독일은 유럽에서 가장 큰 규모이고 명목 GDP로 세계 4위, 구매력 평가 기준으로 세계 5위인 경제를 가지고 있다. 산업, 과학과 기술 분야의 글로벌 강국으로서 세계 3위의 수출국이자 수입국이다. 선진국으로서 사회보장제도, 의료 서비스와 무상 교육을 제공한다. 독일은 국제 연합(UN), 유럽 연합(EU), 북대서양 조약 기구(NATO), 유럽 평의회(CoE), G7, G20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회원국이다. 또한 독일은 세 번째로 많은 유네스코의 세계유산을 보유하고 있다.

국명

독일 자국 내에서의 표기인 Deutschland(도이칠란트), 원래 diutisciu land(독일의 땅)은 deutsch(Cf. Dutch)에서 유래되었다. 이 Deutsch일반적인 평민들의 언어라틴어, 로망스어군와 그 후대 언어들로부터 구분되기 위해 사용되었으며, 인도유럽조어 단어 tewtéh₂(사람들)과 þeudō에서 유래된 게르만조어 단어 þiudiskaz(사람들의)에서 유래되었다.[11]

독일 국외에서 독일의 국명은 세계 각국에서 다양하게 불린다. 대표적으로 영어로 '절머니'(Germany),[h] 프랑스어 '알마뉴'(Allemagne), 폴란드어 '니엠치'(Niemcy), 중국어 '더궈'(德国) 등이 있다.

현재 대한민국에서 쓰이는 '독일'이라는 한국어 명칭은 일제강점기일본어한자 음차 표기인 '도이쓰'(일본어: 独逸)[i]를 받아들여 이를 한국식 한자음으로 읽은 것이며,[13] 그 전에는 중국의 영향을 받아 '덕국'(德國)이라 불렀다. 해방 후에는 일제강점기의 잔재를 없애고 독일어 원발음에 좀 더 가깝게 하기 위해 '도이칠란트'로 표기하기도 했으나 대한민국에서는 이 표기법이 정착하지 못하였고,[14][j] 현재는 대한민국 주재 대사관에서도 스스로를 '주한 "독일" 대사관'으로 일컫고 있다.[k]

역사

인류 이전의 조상인 '다누비우스 구겐모시'[l]는 1,100만 년 전에 독일에 살았으며, 직립보행하는 가장 초기의 사람과 유인원 중 하나로 이론화되었다.[15] 고대 현 인류는 최소한 60만 년 전에 독일에 존재했다.[16] 최초의 현 인류가 아닌 화석(네안데르탈인)은 독일 네안데르 계곡에서 발견되었다.[17] 현재까지 발견된 가장 오래된 악기인 약 4만 2천 년 된 플루트,[18] 약 4만 년 된 사자 인간,[m][19] 약 3만 5천 년 된 홀레 펠스의 비너스[20] 등을 포함하여 유사한 연대의 현 인류의 증거들이 슈베비셰 알프라는 산에서 발견되었다. 청동기 시대에 만들어진 네브라 하늘원반은 독일 유적지에서 발견되었다.[21]

게르만 부족과 프랑크 제국

4세기 로마 제국의 일부였던 '아우구스타 트레베로룸'[n]의 모형

게르만족북유럽 청동기 시대 혹은 초기 청동기 시대에서 시작된 것으로 여겨진다.[22][23] 스칸디나비아 반도 남부와 북독일에서 그들은 남쪽, 동쪽, 서쪽으로 확장하여 켈트족, 이란족, 발트족, 슬라브족과 접하게 되었다.[24]

아우구스투스 치하에서 로마 제국은 게르만 부족들이 거주하는 땅을 침략하기 시작하여 라인강과 엘베강 사이에 게르마니아 속주를 만들었다. 서기 9년, 세 개의 로마 군단토이토부르크 숲 전투에서 아르미니우스에게 패배했다.[25] 이 전투의 결과로 인해 게르마니아를 지배하려는 로마인들의 야망을 단념시켰고, 따라서 이는 유럽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로 여겨진다.[26] 서기 100년 타키투스가 《게르만족의 기원과 현황》을 썼을 때, 게르만 부족들은 라인강과 다뉴브강(리메스 게르마니쿠스)을 따라 정착하여 현대 독일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그러나 바덴뷔르템베르크, 남부 바이에른, 남부 헤센과 서부 라인란트로마의 속주편입되었다.[27][28][29]

260년 경에 게르만족이 로마가 지배하는 땅에 침입했다.[30] 375년 훈족의 침공 이후인 395년부터 로마가 쇠퇴하기 시작하면서 게르만 부족들은 남서쪽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그곳에 정착한 게르만족들은 프랑크 왕국을 설립하고 작센바이에른을 정복하기 위하여 동쪽으로 이동했으며, 현대 독일의 동부 지역에는 서슬라브족이 거주했다.[27]

동프랑크와 신성 로마 제국

843년의 동프랑크 왕국.
1483년 아이슬레벤에서 태어난 마르틴 루터로마 가톨릭교회에 도전하여 종교 개혁개신교를 일으켰다.

카롤루스는 800년 카롤루스 제국을 세웠으나, 이 제국은 843년 베르됭 조약으로 분할되었다.[31] 동프랑크 왕국의 동쪽의 후대 왕국은 서쪽으로는 라인강에서 동쪽으로는 엘베강까지, 북쪽으로 북해에서 남쪽 알프스 산맥까지 뻗어 있었다.[31] 그 후 신성 로마 제국이 등장하였고, 오토 왕조 시기(919-1024)에 여러 주요 부족공국들을 통합했다.[32] 996년 오토 3세는 자신이 신성 로마 황제로 즉위한 직후 자신의 친척 그레고리오 5세를 교황으로 임명해 그레고리오 5세는 독일계 최초의 로마 교황이 되었다. 신성 로마 제국은 잘리어가 시기(1024-1125)에서 북부 이탈리아와 부르고뉴를 흡수했지만 이 시기에 서임권 투쟁으로 인해 황제는 권력을 잃었다.[33]

호엔슈타우펜가 시기(1138-1254)에서 독일 왕자들은 남쪽과 동쪽으로의 독일인 정착을 장려하는 동방식민운동을 벌였다.[34] 대부분의 북독일의 도시들은 한자 동맹의 일원으로서 무역의 확장을 통해 번영했다.[35] 인구는 1315~1317년의 대기근으로 인해 감소하기 시작했으며, 뒤따라 1348~1350년 흑사병이 퍼졌다.[36] 1356년에 발표된 금인칙서는 제국의 헌법 구조를 정립하였으며, 7명의 선제후에 의한 황제 선출을 성문화했다.[37]

요하네스 구텐베르크는 유럽에 활자 인쇄술을 도입하여 지식의 민주화의 토대를 마련했다.[38] 1517년 마르틴 루터는 개신교 종교 개혁을 선전하였으며, 그의 성경에 대한 해석은 언어의 표준화를 불러 일으켰다.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는 '복음주의' 신앙(루터교회)을 용인했으나, 동시에 군주의 신앙이 신하들의 신앙이 되어야 함(Cuius regio, eius religio)을 선언했다.[39] 쾰른 전쟁부터 30년 전쟁(1618-1648)에 이르는 종교 분쟁은 독일의 땅을 황폐화시켰고 인구를 크게 줄였다.[40][41]

베스트팔렌 조약은 제국 영지의 통치자들 간의 사이의 종교 전쟁을 종식시켰다.[40] 영지의 대부분 독일어를 사용하는 통치자들은 로마 카톨릭교회루터교회 또는 개혁 신앙을 공식 종교로 선택할 수 있었다.[42] 일련의 '제국 개혁'(약 1495-1555)에 의해 시작된 법률 체제는 상당한 지방 자치권과 강력한 제국 의회를 만들었다.[43] 합스부르크가는 1438년부터 1740년 카를 6세가 사망할 때까지 제국의 황제 직위를 가졌다.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엑스라샤펠 조약에 따라 샤를 6세의 딸 마리아 테레지아왕후로 황제가 된 남편 프란츠 1세와 함께 제국을 통치했다.[44][45]

1740년부터 합스부르크 군주국프로이센 왕국 사이의 이원론이 독일의 역사를 지배했다. 1772년, 1793년, 1795년에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는 러시아 제국과 함께 폴란드 분할에 동의했다.[46][47] 프랑스 혁명 전쟁, 나폴레옹 전쟁 이후 제국 의회의 최종 회의 기간 동안 대부분의 자유제국도시는 왕조의 영토에 합병되었고, 교회의 땅도 마찬가지로 세속화되고 합병되었다. 끝끝내 1806년 제국은 해체되었다. 프랑스, 러시아, 프로이센, 합스부르크(오스트리아)는 나폴레옹 전쟁 동안 독일 내의 패권을 놓고 경쟁했다.[48]

독일 연방과 제국

1815년의 독일 연방.

나폴레옹이 몰락한 후의 빈 회의39개의 주권 국가들로 구성된 느슨한 동맹인 독일 연방을 수립했다. 오스트리아의 황제를 연방 의장으로 임명한 것은 프로이센의 영향력 증대에 대한 의회의 거부 의사를 반영한 것이다. 복원된 정치 내의 의견 충돌은 부분적으로 자유주의 운동의 부상으로 이어졌고, 이 운동은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 후작에 의한 새로운 탄압을 받았다.[49][50] 독일의 관세동맹(Zollverein)은 체제가 확립된 후 독일의 경제적 통합을 촉진시켰다.[51] 유럽의 혁명 운동에 영향을 받은 지식인들과 평민들은 독일 문제를 제기하면서 독일의 여러 국가들에서 1848년 혁명을 시작했다.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황제의 칭호를 받고도 권력을 잃었고, 이에 반발한 그는 자유주의자들이 제안한 왕관과 헌법을 거부했으며, 이는 독일에서 자유주의 운동의 일시적인 중단이었다.[52]

빌헬름 1세는 1862년 오토 폰 비스마르크프로이센의 총리로 임명했다. 비스마르크는 1864년 덴마크와의 전쟁을 성공적으로 끝냈으며, 결정적으로 18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을 승리로 이끌면서 그는 오스트리아를 배제한 북독일 연방을 수립할 수 있었다.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프로이센이 승리한 이후, 독일의 군주들은 1871년에 독일 제국의 건국을 선포했다. 프로이센은 새로운 제국 내에서 제국을 지배하는 성격의 구성국이었고, 이로 인해 프로이센의 국왕이 독일의 황제였으며 프로이센의 수도 베를린은 독일의 수도가 되었다.[53][54]

독일의 통일 이후 그륀더차이트 시대에 독일 총리로서의 비스마르크의 외교 정책은 새로운 동맹을 구축하고 전챙을 피하여 강대국 독일의 지위를 확보했다.[54] 그러나 빌헬름 2세 치하에서 독일은 신제국주의적 노선을 취하며 주변국과 마찰을 빚었다.[55] 이 시기 독일은 다민족 국가 오스트리아-헝가리와의 이중 동맹을 구축하였고 1882년 삼국 동맹을 구축하면서 이탈리아를 동맹으로 끌여들었다. 영국, 프랑스와 러시아 3국은 발칸 반도에서 러시아의 이익에 대한 합스부르크의 간섭, 혹은 프랑스에 대한 독일의 간섭으로부터 자국을 보호하기 위해 동맹을 맺었다.[56] 1884년 베를린 회담에서 독일은 동아프리카, 남서아프리카, 토골란드(토고)와 카메룬을 포함한 여러 식민지의 영유권을 주장했다.[57] 나중에 독일은 식민 제국을 확장하여 태평양과 중국의 영토를 얻었다.[58] 1904년부터 1907년까지 남서아프리카(현 나미비아) 식민 정부는 반란에 대한 대응으로 현지 헤레로인과 나마인들을 말살했으며,[59][60] 이것은 20세기 최초의 집단학살이었다.[60]

1914년 6월 28일 오스트리아 황위 계승자를 암살한 사라예보 사건은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세르비아를 침공하여 제1차 세계 대전을 개전할 구실을 제공했다. 약 2백만 명의 독일인이 사망한 4년 간의 전쟁 끝에,[61] 일반적인 휴전이 전쟁을 종식시켰다. 1918년 11월 독일 혁명에서 빌헬름 2세와 집권 제후들은 직위를 포기했으며 독일은 연방공화국을 선포했다. 독일의 새로운 지도부는 1919년 연합국으로부터의 패배를 인정하는 베르사유 조약에 서명했다. 독일인들은 이 조약을 굴욕적이라고 생각했고, 역사가들은 이러한 분위기가 아돌프 히틀러의 부상에 영향을 끼쳤다고 보았다.[62] 독일은 유럽 영토의 약 13%를 잃었고 아프리카와 태평양에 있는 모든 식민지 영토를 승전국에 할양했다.[63]

바이마르 공화국과 나치 독일

1933년부터 1945년까지 나치 독일의 독재자 아돌프 히틀러.
제2차 세계 대전 기간인 1942년 독일이 점령한 유럽의 지도. 검은색 부분이 나치가 점령한 곳이다.

1919년 8월 11일,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대통령은 민주적인 바이마르 헌법에 서명했다.[64] 이어지는 권력 싸움에서 공산주의자들은 바이에른에서 권력을 장악했고, 다른 곳의 보수 세력들은 카프 폭동을 일으켜 공화국을 전복하려고 시도했다. 주요 산업 중심지에서의 거리 전투, 벨기에와 프랑스군에 의한 루르 점령에 더해 초인플레이션 기간이 뒤따랐다. 부채 구조 조정 계획과 1924년의 새로운 통화 생성은 예술적 혁신과 자유로운 문화 생활의 시대인 '황금의 20년대'를 열었다.[65][66][67]

1929년 전 세계적인 대공황이 독일을 강타했다. 하인리히 브뤼닝 총리 정부는 재정 긴축과 디플레이션 정책을 추구하며 1932년까지 거의 30%의 실업률을 초래했다.[68] 아돌프 히틀러가 이끄는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나치당)은 1932년 특별선거 이후 독일의회에서 가장 큰 정당이 되었고 이내 1933년 1월 30일 파울 폰 힌덴부르크는 히틀러를 독일의 총리로 임명했다.[69] 국가의회 의사당 화재 사건 이후, 새로운 법령은 기본적인 시민권을 폐지했고 최초의 나치 강제 수용소가 열리게 만들었다.[70][71] 1933년 3월 23일, 전권 위임법은 헌법을 무시하고[72] 히틀러에게 무제한적인 입법권을 부여하여 나치 독일의 시작을 알렸다. 히틀러의 정부는 중앙 집권화된 전체주의 국가를 수립하고 국제 연맹에서 탈퇴했으며 재무장을 선언하며 군대를 극적으로 늘렸다.[73] 공공 사업에 중점을 둔 경제 재건을 위한 정부의 후원 프로그램으로 가장 유명한 것은 라이히스아우토반(Reichsautobahn) 정책이었다.[74]

1935년 히틀러 정권은 베르사유 조약을 어기고 유대인과 기타 소수 민족을 대상으로 하는 뉘른베르크법을 도입했다.[75] 또한 독일은 1935년 자르의 통제권을 다시 획득했고,[76] 1936년 라인란트를 재무장시켰으며, 1938년 오스트리아를 합병하고 같은 해 뮌헨 협정을 통해 주데텐란트를 합병하였다. 1939년 3월 협정을 위반하고 체코슬로바키아를 완전히 점령하였다.[77] 수정의 밤(Kristallnacht)에 히틀러 정권은 시나고그를 불태우고 유대인 기업을 파괴하며 유대인들을 대량으로 체포했다.[78]

1939년 8월, 히틀러 정부는 동유럽을 소련과 독일의 세력권으로 나누는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을 체결했다.[79] 1939년 9월 1일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고 9월 3일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에 선전포고하며[80] 유럽에서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다.[81] 1940년 봄, 독일은 덴마크와 노르웨이,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프랑스를 침공하여 점령하고 프랑스 정부가 휴전 협정에 서명하도록 강요했다. 그러나 영국군은 영국 본토 항공을 통해 독일군의 공습을 격퇴했다. 1941년 유고슬라비아, 그리스소련을 침공하였다. 1942년까지 독일과 그 동맹국들은 유럽의 대부분북아프리카의 대부분을 장악했지만,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소련이 승리하고 북아프리카를 연합국에게 다시 빼앗기고, 1943년 연합국이 이탈리아에 상륙한 이후 독일군은 반복되는 군사적 패배를 겪었다. 1944년 소련은 동유럽을 점령했고, 서방 연합국은 프랑스에 상륙하여 독일의 마지막 반격을 이겨내고 독일에 입성했다. 베를린 공방전 도중 히틀러가 자살한 후, 독일은 1945년 5월 8일 항복 문서에 서명하여 유럽[81][82]과 독일에서의 제2차 세계 대전을 종식시켰다. 전쟁이 끝난 후 살아남은 나치 관료들은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서 전쟁범죄로 재판을 받았다.[83][84]

나중에 홀로코스트로 알려지게 되는 나치 독일 정부의 정책은 독일 내의 소수 민족들을 유럽 전역의 강제 수용소와 절멸 수용소에 억류하는 것과 같이 소수 민족을 박해했다. 총 1,700만 명이 조직적으로 살해당했은데, 여기에는 유대인 600만 명, 롬인 최소 13만 명, 27만 5천 명의 장애인, 수천 명의 여호와의 증인, 동성애자 수천 명, 정치와 종교적인 반대자 수십만 명이 포함된다.[85] 독일 점령지에서 독일의 정책으로 인해 폴란드인 약 270만 명,[86] 우크라이나인 130만 명, 벨라루스인 100만 명, 소련의 전쟁 포로 350만 명이 사망했다.[87][83] 독일군의 사상자는 530만 명으로 추산되며,[88] 독일의 민간인 약 90만 명이 사망했다.[89] 약 1,200만 명의 독일인들이 동유럽 전역에서 추방되었고 독일은 전쟁 전 영토의 약 4분의 1을 잃었다.[90]

동독과 서독

1947년 제2차 세계 대전의 종전 이후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의 점령지프랑스가 합병한 자르 보호령을 포함하는 지도. 오데르-나이세선의 동쪽 영토는 포츠담 회담에 따라 폴란드와 소련에 양도되었다.[91]

나치 독일이 항복한 후 연합군베를린과 남은 독일의 영토를 4개의 점령 지역으로 분할했다. 프랑스, 영국, 미국이 통제하는 서부 지역은 1949년 5월 23일 독일 연방공화국(독일어: Bundesrepublik Deutschland, 서독)이 형성되면서 하나로 합쳐졌고, 1949년 10월 7일 소련이 점령한 지역은 독일 민주공화국(독일어: Deutsche Demokratische Republik, 동독)으로 재편되었다. 이 국가들은 비공식적으로 '서독'과 '동독'으로 불렸다.[92] 동독은 동베를린을 수도로, 서독은 을 임시 수도로 선택하여 두 국가 분할은 일시적인 것임을 강조했다.[93]

서독은 '사회적 시장경제'를 가진 연방 의회 공화국으로 설립되었고, 1948년부터 서독은 미국의 마셜 플랜에 따라 재건을 위한 원조를 받는 주요한 국가가 되었다.[94] 콘라트 아데나워는 1949년 독일의 첫 연방총리로 선출되었으며, 독일은 1950년대 초부터 장기적인 경제 성장(Wirtschaftswunder)을 누렸다.[95] 서독은 1955년에 북대서양 조약 기구(NATO)에 가입했고 유럽 경제 공동체(EEC)의 창립국이었다.[96] 1957년 1월 1일, 자르는 서독에 가입하여 연방의 일원이 되었다.[97]

동독은 소련으로부터 점령군과 바르샤바 조약 기구를 통해 정치적, 군사적으로 통제받는 동구권 국가였다. 동독이 자신이 민주주의 국가임을 주장했지만 모든 정치적 권력은 비밀 정보 기관인 국가보안부의 지원을 받는 독일 사회주의통일당의 지도부(폴리트뷰로)에 의해서만 행사되었다.[98] 동독의 선전이 동독의 사회 프로그램의 혜택과 서독의 침략 위협에 근거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동독의 시민들은 자유와 번영을 위해 서독을 찾았다.[99] 1961년에 세워진 베를린 장벽은 동독 시민들이 서독으로 탈출하는 것을 막았고 나중에 이 장벽은 냉전의 상징이 되었다.[100]

동독과 서독 사이의 긴장감은 1960년대 후반 빌리 브란트 총리의 동방 정책(Ostpolitik)에 의해 완화되었다.[101] 1989년 헝가리는 철의 장막을 해제하고 오스트리아와의 국경을 개방하기로 결정했고, 이로 인해 수천 명의 동독의 시민들이 헝가리와 오스트리아를 거쳐 서독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이것은 정기적인 대중 시위들이 점점 더 많은 지지를 받고 있던 동독에게 치명적인 영향을 미쳤다. 동독의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노력의 일부로 동독 당국은 국경 제한을 완화했지만, 실제로는 독일이 완전한 주권을 되찾은 2+4 조약으로 분수령이 되는 개혁 과정이 과속화되었다. 이로 인해 1990년 10월 3일 구 동독의 재건된 5개의 주가 독일 연방공화국에 가입하면서 독일의 재통일이 허용되었다.[102] 1989년 베를린 장벽의 붕괴는 공산주의의 몰락, 소련의 붕괴, 독일의 재통일과 전환점(Die Wende)의 상징이 되었다.[103]

통일 독일과 유럽 연합

1989년 붕괴된 베를린 장벽브란덴부르크 문(사진)은 냉전 종식의 첫 번째 발전 중 하나였으며 이는 최종적으로 소련의 해체로 이어졌다.

통일 독일은 서독의 확장된 연장선으로 여겨지며 각종 국제 조직의 회원 자격들을 유지했다.[104] 1994년 '베를린-본 법'에 의거하여 베를린은 다시 독일의 수도가 되었으며, 본은 일부 연방 부처를 유지하는 연방 도시(Bundesstadt)라는 독특한 지위를 얻었다.[105] 정보 이전은 1999년에 완료되었고, 동독 경제의 현대화는 2019년까지 지속되었다.[106][107]

통일 이후 독일은 1992년 마스트리흐트 조약과 2007년 리스본 조약에 서명하고[108] 유로존을 공동 설립하는 등 유럽 연합(EU)에서 보다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했다.[109] 독일은 발칸 반도의 안정을 확보하기 위해 평화유지군을 파견했고, 탈레반 축출 이후 아프가니스탄안보를 보장하기 위한 NATO의 노력의 일부로 독일군을 아프가니스탄에 파견했다.[110][111]

2005년 독일 연방의회 선거에서 앙겔라 메르켈은 최초의 독일의 여성 총리가 되었다. 2009년 독일 정부는 500억€(유로) 규모의 경기 부양 계획을 승인했다.[112] 21세기 초 독일의 주요 정치 프로젝트 중에는 유럽 통합의 진전, 지속 가능한 에너지 공급을 위한 에너지 전환(Energiewende), 균형 잡힌 예산을 위한 부채 억제, 출산율 증가 정책(출생주의), 인더스트리 4.0으로 요약되는 독일 경제의 전환을 위한 첨단전략 등이 있다.[113] 2015년 유럽 난민 위기 동안, 독일은 백만 명 이상의 난민과 이주민을 받아들였다.[114]

자연 환경

독일의 지형도.

독일의 면적은 357,021km2로, 육지 면적 349,223km2와 내수면 면적 7,798km2로 이루어져 있으며, 유럽에서 7번째로 영토가 넓은 국가이다.[115] 독일은 북쪽으로 덴마크, 동쪽으로 폴란드체코, 남동쪽으로 오스트리아와 남서쪽으로 스위스와 국경을 접하고 있고, 서쪽으로는 프랑스, 룩셈부르크, 벨기에, 북서쪽으로 네덜란드와 맞닿아 있다. 독일은 북서쪽으로 북해를, 북동쪽으로 발트해와 마주하고 있다.

독일의 해발고도는 남쪽의 고도가 높은 알프스 산맥(가장 높은 점: 추크슈피체산의 2,962m)에서 고도가 낮은 북서쪽의 북해 해안과 북동쪽의 발트해까지 다양하다. 독일 중부에 숲이 우거진 고지대와 북부의 저지대(가장 낮은 점: '빌슈테르마르슈, 노이엔도르프-작센반데', 해발 3.54m[116])에는 라인강, 다뉴브강, 엘베강 등의 주요한 여러 강이 가로지른다. 독일의 주요한 천연 자원들에는 철광석, 석탄, 칼륨, 목재, 갈탄, 우라늄, 구리, 천연 가스, 소금과 니켈 등이 있다.[115]

기후

독일은 북쪽과 서쪽의 해양성 기후부터 대륙성 기후에 이르는 다양한 종류의 온대 기후를 가지고 있다. 겨울에는 일반적으로 강수량이 많지 않은 흐린 날씨로 남쪽의 알프스의 추운 날씨부터 서늘한 날씨가 있으며, 여름에는 덥고 건조한 날씨부터 시원하고 비가 오는 날씨까지 다양하다. 북부 지역은 북해에서 습한 공기를 받아 기온을 낮추고 강수량을 증가시키는 편서풍이 우세하다. 반대로, 남동부 지역은 더 극단적인 일교차를 보인다.[117]

2019년 2월부터 2020년까지 독일의 월평균 기온은 2020년 1월 최저 온도 3.3 °C (37.9 °F)에서 2019년 6월 최고 온도 19.8 °C (67.6 °F)까지 다양했다.[118] 월 평균 강수량은 2019년 2월 4월 제곱미터당 30리터에서 2020년 2월 제곱미터당 125리터까지 다양했다.[119] 월 평균 일조시간은 2019년 11월 45시간에서 2019년 6월 300시간까지 다양했다.[120]

정치

독일 연방공화국은 16개의 주가 각자 헌법·정부·재판소를 두는 연방 국가로서, 국가 원수는 대통령이다. 그리고 행정부의 수반은 총리이다. 따라서 연방수상이 내각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다. 총리는 연방 의회의 과반수를 얻은 자로서, 임기는 4년이다. 입법 기관은 연방 상원과 연방 하원으로 이루어진 양원제로서 상원은 연방 의회의 의결에 대한 거부권이 없다. 연방 의회 의원은 비례대표제소선거구제를 병용한 직접 선거인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로 선출되며, 임기는 4년이다. 현 연방 의회 의원 수는 672명(지역구 배정 초과 의석 때문에 매 총선거마다 총수는 달라진다.)이다. 한편 연방 상원은 각 주와 특별시에서 인구 비례에 따라 임명된 대표로 구성되며, 주 정부는 연방 상원을 통하여 연방의 입법과 행정 업무에 참여한다. 입법권은 연방 의회와 연방 상원 모두에 있으나 실질적 권한은 연방 의회에 있다. 정당으로는 독일 기독교 민주연합(CDU)과 그 자매당인 바이에른 기독교 사회연합(CSU), 독일 사회민주당(SPD), 독일 자유민주당(FDP) 등의 기성 정당이 있으며, 1980년대 서독에서 등장하여 기성 정당에 많은 자극과 영향을 준 독일 녹색당, 동독 독일 사회주의통일당의 후신인 독일 민주사회당(PDS), 1990년 구 동독지역 진보 세력이 창당한 동맹 90 등이 있다.

1949년부터, 독일의 정치 구도는 크게 기독교 민주연합과 사회민주당이 양분하고 있으며 모든 총리들은 이 두 정당들 중 하나에서 배출했다. 허나 상대적으로 더 규모가 작은 자유민주당이나 동맹 90, 녹색당 등도 여러 차례 연립 정부에 참여하며 점차 입지를 넓히고 있는 형편이다. 1982년 10월에 중도 자민당의 내각 사퇴로 슈미트 정권이 붕괴하고 콜 총리가 이끄는 중도 보수 연립 정권이 들어섰다. 1994년 10월 총선 결과 콜 총리의 집권 여당이 승리하여 제5차 콜 정권이 탄생하였다. 독일은 통일 후 중부 유럽 국가에 대규모 경제 지원을 제공하고 이들의 대서방 관계설정에 선도적 역할을 자처하는 한편 세계 무대에서의 영향력 증대를 꾀하고 있다. 1998년 총선에서 사민당이 승리함으로써 슈뢰더 사민당 당수가 새로운 총리가 되었고 2002년 재취임했다. 2005년 총선이후 기민련의 앙겔라 메르켈이 독일 최초의 여성총리로 취임하였다. 2007년부터는 좌파 계열 정당인 좌파당이 독일의 주요 정당들 중 하나로 떠올랐으나, 단 한번도 정부 운영에 참여해보지는 못했다. 2017년 총선에서는 극우 포퓰리즘 계열 정당인 독일을 위한 대안이 처음으로 의회에 의석을 얻을 수 있을 정도로 많은 표를 득표하는 데에 성공했다. 현재는 올라프 숄츠독일의 총리에 선출되면서 좌파 정당독일 사회민주당, 녹색 정치 정당동맹 90, 자유주의 정당지유민주당과 함께 연립내각을 구성하여 오늘날 의회를 장악하고 있다.

독일의 주요 정당

독일 연방하원 2017년 독일연방공화국 국회의원 총선거 의석수 순서대로 정렬했다.

연방 하원엔 진출하진 못하였으나 주의회, 유럽 의회에 진출한 주요 군소정당은 이렇다.

행정 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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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개 주(Land. 정식 명칭은 연방주 Bundesland)로 구성되어 있다.

  1. 바덴뷔르템베르크주 (Baden-Württemberg)
  2. 바이에른주 (Bayern)
  3. 베를린 (Berlin)
  4. 브란덴부르크주 (Brandenburg)
  5. 브레멘주 (Bremen)
  6. 함부르크 주 (Hamburg)
  7. 헤센주 (Hessen)
  8. 메클렌부르크포어포메른주 (Mecklenburg-Vorpommern)
  9. 니더작센주 (Niedersachsen)
  10.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 (Nordrhein-Westfalen)
  11. 라인란트-팔츠 주 (Rheinland-Pfalz)
  12. 자를란트주 (Saarland)
  13. 작센주 (Sachsen)
  14. 작센안할트주 (Sachsen-Anhalt)
  15. 슐레스비히홀슈타인주 (Schleswig-Holstein)
  16. 튀링겐주 (Thüringen)

국방

독일은 서방국가 중에서는 거의 유일한 징병제 국가였으나[121], 2010년에 기존 정책을 폐기하고, 모병제로 전환하였다. 148,996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으며, 전차 408대, 전술기 783대, 군함 90척을 보유하고 있다. 예산 감축으로 독일 연방방위군은 전력이 절반 이하로 크게 줄어버렸으며, GFP의 순위에서도 10위 밖으로 밀려났다. 독일은 제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추축국이어서 그것에 관련된 조약들이 있다. 독일은 2차세계대전 (나치독일) 당시에 세계 최초의 순항미사일 V-1 로켓과 세계 최초의 탄도 미사일 V-2 로켓과 그 외에도 여러 탄도 미사일을 개발하였거나 설계하였다. 세계최초의 제트 전투기 Heinkel He280을 개발하였다. 프로토타입이 시험비행에 성공하기도 했다. 세계최초의 양산 제트 전투기인 메서슈미트 Me 262도 있다. 세계최초의 스텔스 항공기 Horten Ho 229 전익기를 개발하였고 세계 최초로 램제트 엔진을 개발하였다. 여러 종류의 제트 전투기들도 개발하거나 계획하였다. 세계최초의 지대공미사일 Fliegerfaust(Luftfaust) Surface-to-Air Unguided Missile, 세계 최초의 공대공 유도 미사일 Ruhrstahl/Kramer X-4, 세계최초로 성공적으로 만들어지고 개발되고 무선으로 조종되며 고체연료를 사용하는 공대공(AAM)미사일 Luftkampfrakete Henschel Hs 298, 최초로 실용화된 공대공 로켓 Brodrakete R4/M "Orkan"(Hurricane, 허리케인), Wgr 21(Wurfgranate 21) 210mm 로켓탄(쉽게 말해 다연장 로켓탄을 전투기에 장착하였다.), Jagerrakete X4(Fighter Rocket X4)를 개발하였다. 독일은 세계 최대 잠수함 건조 국가이다. 1706척(1·2차대전 1540척+전후166척)을 건조하였다.

독일 해군은 세계 최고 수준의 재래식 동력 잠수함(디젤 잠수함) 및 구축함 등을 보유 중이고 대양 해군을 추구하고 있다.

경제

독일은 기본적으로 시장 경제 국가로, 매우 뛰어난 질의 노동력을 보유하고 있으며 부패도도 매우 낮으며 혁신성은 높은 선진국이다. 세계 3위의 수출국이며, 명목 GDP 순으로는 세계 4위, PPP로 환산할 시에는 5위에 달하는 경제 규모를 자랑하며 유럽 내에서는 가장 거대한 규모의 경제력을 가지고 있다. 1인당 GDP는 EU 국가 평균의 121%에 달한다. 전체 GDP의 69%가 서비스업이며, 산업이 31%, 농업이 1%로 집계되고 있다. 2020년 1월 기준으로 실업률은 3.2%로, EU 전체에서 4번째로 낮았다.

독일은 유럽 단일시장의 일원으로, 무려 4억 5천만 명에 달하는 시장에 자유롭게 물건들을 내다팔 수 있다는 막대한 이점을 가지고 있다. 2017년 기준으로 독일은 유로존 경제의 28%를 차지하였으며, 2002년에는 단일 통화인 유로를 받아들였다. 유로의 금융정책은 프랑크푸르트에 위치한 유럽 중앙은행이 통제한다. 독일은 현대식 자동차의 고향으로 불릴 정도로 자동차 산업이 발달해있는데, 세계 4위의 자동차 생산국이기도 하다. 독일의 10대 수출품은 장비, 기계류, 화학물질, 전기제품, 약품, 음식, 고무, 플라스틱 제품 등이 있다.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500대 기업들 중 29개가 독일에 본사를 두고 있다. 30개에 달하는 독일 기업들이 프랑크푸르트 주식거래소의 닥스에 상장되어 있다. 독일의 유명한 기업에는 메르세데스-벤츠, BMW, 폭스바겐, 아우디, 아디다스, 포르셰, 도이치 텔레콤 등이 있다. 특히 독일의 수도인 베를린은 스타트업 기업들의 허브라고 불릴 정도로 창업하는 기업들이 많으며, 유럽 연합 내에서도 막강한 경제적 위치를 점하고 있다. 독일은 중소기업 강국으로 손꼽히며, 각자 분야에서 세계 선두를 점하고 있는 중소기업들이 전체의 48%에 달할 정도로 매우 기술력이 뛰어나다.

독일은 과학 기술에도 엄청난 투자를 쏟고 있는데, 2018년 기준으로 독일은 세계에서 4번째로 연구 논문을 많이 발표한 나라이며, 특히 막스 플랑크 연구소 등 저명한 연구소들이 독일에 집중되어 있다. 또한 독일은 유럽 우주국의 최대 자금 공급국이기도 하다.

경제사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의 폐허 속에서 독일 경제는 기적적인 부흥을 이룩하여 민주주의 국가 중에서는 미국과 일본 다음가는 지위를 굳혔다. 이러한 성장을 가져오게 한 요인은 공산주의가 유럽에서 세력을 넓히지 않게 하기 위해 경제적 지원을 한 미국의 마셜 플랜과 국민의 근면성·높은 기술수준·적절한 경제정책에 바탕을 둔 공업생산력의 비약적인 발전 등이다. 독일은 국민총생산의 1/3을 수출에 의존하고 있어 서방선진국과 비교해 볼 때 높은 편이다. 독일은 1975년 창설된 서방 경제선진국 정상모임인 G7의 일원이다. 또한 EU의 통합에 프랑스와 같이 중추세력을 형성하고 있다.

통일 이후

통일 후 독일 경제는 큰 혼란을 겪었다. 통일 당시 동독주민의 노동생산성은 서독의 1/5에 지나지 않았다. 또한 기술의 상대적 낙후, 장비의 노후, 환경오염 및 사회기반시설의 낙후로 동·서독지역이 균형있게 발전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투자가 불가피하게 되었다. 신탁관리청 산하의 관리대상으로는 8,500개 이상의 국유기업, 국영 도소매업·서비스업, 사회주의통일당(SED) 및 구 동독 정부기관의 부동산, 구 인민소유 집단농장(LPG) 등으로서, 사유화 대상기업에 소속된 노동자수는 410만 명으로 구 동독 전 노동자수의 45%에 달한다. 원래 공매절차를 고려하였으나 기업의 부실 정도가 지나쳐 수의계약에 의한 매각방법을 채택할 수밖에 없었다. 통일 후 신생연방주의 산업입지 여건은 막대한 국가지원에도 불구하고 불리하다. 90∼93년 신생연방주에 투자한 액수는 공공·민간부분을 합쳐 3,110억 마르크로 한 해 평균 1,000억 마르크 이상을 상회하였으나, 이 액수는 같은 기간 구연방주에 투자한 액수의 16.3%에 지나지 않는다. 과거 2차산업 부문의 40%가 넘던 산업구조가 34.8%, 3차산업 50%로 행정·통신·교통·상업 부문과 건설 부문에서 급격한 발전이 이루어졌다.

과학 기술

독일은 물리학, 기계공학 수준이 우수하다. 여기에는 독일 정부의 과학기술 연구소 및 연구회에 대한 전폭적 지지가 바탕이 되는데, 독일의 총 연구개발투자(공공 및 민간포함)는 약 964억 9000만 달러(2008년, GDP의 약 2.64%) 수준으로 미국일본에 이어 세계 3위 규모이며 연방정부와 주정부가 전체 지출액의 약 28%를 부담한다. 정부는 앞으로 연구에 대한 투자를 GDP의 10%수준까지 끌어올리고 R&D투자 또한 3%까지 끌어올리겠다는 계획을 세우는 등 과학기술 연구소에 큰 투자를 지속하고 있다.[122] 현재 독일에는 750여개의 국가 지원 연구기관이 있으며, 공공재원으로 운영되는 정부출연연구기관은 막스 플랑크, 프라운호퍼, 헬름홀츠, 라이프니츠 등 4대 연구협회에 속해 있다. 또 연구협회별로 연방정부와 주정부의 연구비 지원 비율이 각각 다르게 적용되는 등 매우 합리적이고 체계적으로 조직되어 있다.[123] 막스 플랑크 협회는 산하 80개 연구소를 둔 기초과학분야 중심의 연구회이며, 프라운호퍼 협회는 56개 연구소를 가진 응용과학분야 연구회이다. 헬름홀츠 협회는 장기 프로젝트 위주의 연구를 하는 15개 대형 연구소의 연합이다. 마지막으로 라이프니츠 과학협회는 연방 및 주정부의 공동 지원을 받는 개별 80개 연구소들의 연합이다.

산업

농·수산업

·수산업GNP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1.2%다. 농업용 토지이용은 국토면적의 1/2로 경작지가 32.1%, 초지가 14.7%를 차지한다. 농업인구는 전독일 경제활동인구의 3.1%를 차지한다. 농산물은 북부의 호밀·감자, 중부의 ·사탕무, 서부의 낙농제품·포도, 남부의 호프 등이다. 사실 독일의 농업은 목축과 밀접히 맺어져 있어, 어느 농가에서나 가축을 사육하고 사료작물을 만들고 있다. 의 총생산량은 22,800,000톤(2011년, 세계 9위, 3.24%)[124]이다. 축산물의 수요 증대에 따라 북부 독일의 저습지 등에서도 목축업이 매우 성하다. 국토의 1/4을 차지하는 삼림은 대부분이 침엽수림으로서, 제재·펄프 원료로 이용되고 있다. 어업은 연안어업 외에 북해·북극해에서 조업하고 있으나, 북해해양오염으로 어획량은 계속 감소될 것으로 보인다. 주로 청어·대구 등이 잡힌다.

자원·광업

석탄은 독일 공업의 어머니로 불리며, 루르 탄전과 자르 탄전 등에서 출탄하며 가장 규모가 큰 광산물로 되어 있다. 한편 암염석탄과 함께 주요 광물자원으로서 수출되고 있다. 이 밖에 칼륨, 보크사이트, 철광석 등을 대량 산출한다.

공업

광공업에 종사하는 인구율은 전체 경제활동인구의 31.1%이며 GNP 기여율은 36.7%이다(1992). 매출액을 기준으로 하였을 때 자동차·기계·전기·전자·화학·식품공업이 비슷한 규모로 주요산업을 구성한다. 독일 최대의 공업지역은 라인·루르 지역이다. 이 곳은 조밀한 교통망과 독일 전역을 연결하는 수로망이 구축되어 있으며, 이 곳의 뒤스부르크항은 유럽최대의 내륙항으로 루르 지역의 관문이 된다. 독일 공업의 특징적인 성격은 중화학공업비중이 아주 높다는 것이다. 특히 자동차 공업과 철강·전기공업·기계금속공업·화학공업도 높은 성능과 품질세계 시장에서 신뢰받고 있다.

무역

독일은 세계의 주요 흑자국이다. 주요 수출품은 기계류·자동차·전기기기·철강·화학공업 제품 등이고, 수입품원유·농산물·전기기기·의류제품 등이다. 에너지절약 기술의 발달로 석유수입이 차지하는 비율1980년 초 17%에서 1990년대 7% 이하로 감소하고 있다. 원료를 수입하여 고품질의 생산재·반제품·완제품을 수출하는 고도의 선진 공업형 무역구조를 가지고 있다. 주요 무역대상국은 EU 역내교역이 55%로 그 비중이 가장 높고 그 중에서도 프랑스가 최대의 교역국이다. EU 외의 국가 중에서는 미국, 중국, 스위스가 가장 중요한 교역상대국이다. 통일 후 동구권 및 독립국가연합(CIS) 국가와의 급격한 교역증대가 기대되었지만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한편 통일 후 수출액이 감소하고 있어 흑자폭 또한 감소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신생연방주에서의 수요가 급격히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독일은 세계 1~2위를 다투는 수출국가로 2000년대 들어 미국, 일본을 제치고 세계 최대의 수출국으로 이름을 알리고 있다. 2008년까지 수출액 세계 1위였으며, 2009년에는 1조1500달러로 중국에 이어 세계 제2위를 기록하였다. 2009년 수입액은 9310억 달러로 미국, 중국에 이어 세계 3위였다.

교통

독일 통일동독의 ‘제국철도’는 국철에 통합되었다. 철도의 총영업거리는 4만 900km이고, 이 중 1만 6,000km가 전철이다. 1992년 등록된 자동차 수는 4,667만 대이며, 이 중 3,900만 대가 승용차이다. 주도 이상의 도로는 총연장이 22만 1,000km에 달하고, 이 중 고속도로는 1만 1,000km로 미국 다음으로 세계 제2위이다. 독일에는 세계 최초의 고속도로아우토반이 있다. 독일의 항공사로는 국영의 ‘루프트한자’가 있으며 220대의 여객기를 가지고 있다. 90여개국과 상호 항공로가 개설되어 있으며 세계의 200여 주요도시를 연계시키고 있다. 프랑크푸르트·뮌헨·뒤셀도르프·베를린·함부르크 등 주요 도시에 국제공항이 있으며, 특히 프랑크푸르트 국제공항은 유럽 제2의 국제공항이다.

사회

민족과 인구

독일 연령별 인구 구성 (2015년)

주민의 거의 대부분은 독일인이다. 동화되었지만 켈트인·라틴인·슬라브인 등 복잡한 가 섞여 독일 민족을 구성해왔다. 소수민족덴마크인, 소르브인, 튀르키예인, 러시아인, 세르비아인, 화교, 쿠르드족, 기타가 거주하고 있다. 이들은 고유의 문화와 언어, 역사, 민족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독일 민족 구성 (2010년)
민족 %[125] 인구[126]
유럽인 88.0 70,593,332
독일인 80.7 64,737,294
폴란드인 2.0 1,604,394
러시아인 1.7 1,363,735
유고슬라비아인 및 기타 유럽인 3.6 2,887,909
중동인 5.2 4,171,424
튀르키예인 4.0 3,208,788
아랍인, 이란인 및 기타 중동인 1.2 962,636
아시아인 2.0 1,604,394
아프리카독일인, 흑인 1.0 802,197
혼혈 2.0 1,604,394
그 외(주로 미국인) 1.8 1,443,955
전체 인구 100.0 80,219,695

독일의 인구는 2011년 5월 기준으로 8,020만 명으로[127], 유럽 연합에서 가장 많은 인구를 가진 나라이고 유럽에서는 러시아 다음으로 많은 인구를 가진 나라이며, 세계에서는 16번째로 많은 인구를 가진 나라이다.[128] 인구 밀도는 평방킬로미터당 225명이다. 독일인평균 수명은 80.19세(남성은 77.93세, 여성은 82.58세)이다. 출산율2011년 기준 여성 1인당 1.41명, 인구 1,000명당 8.33명으로 세계에서 가장 낮은 수준이다. 1970년대부터 사망률출산율보다 높은 상태가 유지되어 독일 인구의 자연증가율은 만성적으로 감소세를 기록하고 있다.[129]

독일 이주자의 생활

이주민 가정은 독일에서 사회적으로 향상되거나 경제적으로 윤택한 생활을 하기가 어려울 수도 있다. 그러나 과거 20년 동안 사회통합 분야에서는 큰 진전이 있었다. 독일 국적 취득을 위한 법적 기준이 완화되었고 이민자와 독일인 간의 교류가 활성화되었으며, 다른 인종문화의 다양성을 수용하는 분위기가 크게 강화되었다.

독일 이주자의 인구

2011년 독일 통계청에서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전체 79,652,370명 중에 15,016,960명의 이주자들이며, 이는 전체 인구의 약 18.9%에 해당한다. 지역별로 보면,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에 약 4백만 명의 가장 많은 수의 이주자가 살고 있다.[130] 독일 경제는 전후 50년대의 경제성장 이래로 이주자들에게 의존하고 있다. 독일은 외국인 노동자의 나라에서 차차 이민자의 나라로 변한 것이다. 독일로 이주해오는 또 하나의 큰 집단으로는 수 세대 전부터 구 소련, 루마니아, 폴란드 등에서 살다가 공산체제 붕괴 후 독일로 돌아온 이들을 꼽을 수 있다. 이 두 가지 부류의 이주민들로 인해 80년대 독일의 인구 수 대비 이주민 수는 전통적 이민국인 미국, 캐나다, 호주보다도 높았다. 독일에 살고 있는 외국인 가운데에는 튀르키예인이 250만 명으로 가장 많으며, 나머지 150만 명은 주로 구 유고슬라비아 또는 그 후속국가에서 온 이주민이다.

독일 인구 비율[130]
지역 2011년 5월 9일 기준 인구 (단위: %)
 합 비이주자 이주자
 합 거주 지속 기간
5년 이하 5~10년 10~15년 15~20년 20년 이상
바덴뷔르템베르크주 13.1 74.8 25.2 10.4 11.2 13.2 15.7 49.5
바이에른주 15.5 81.4 18.6 12.2 12.9 14.3 15.4 45.2
베를린 4.1 76.1 23.9 14.3 13.3 13.5 12.8 46.1
브란덴부르크주 3.1 95.6 4.4 15.0 18.5 17.1 11.3 38.0
브레멘주 0.8 74.9 25.1 12.2 11.9 14.7 17.4 43.9
함부르크 주 2.1 72.5 27.5 11.6 12.5 14.0 15.2 46.7
헤센주 7.4 75.1 24.9 11.5 11.9 13.4 15.7 47.5
메클렌부르크포어포메른주 2.0 96.3 3.7 18.1 20.9 20.1 9.5 31.5
니더작센주 9.7 83.5 16.5 11.5 12.8 17.9 20.3 40.5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 21.9 75.8 24.2 10.1 11.7 13.7 15.4 49.1
라인란트팔츠주 5.0 81.3 18.7 11.9 12.7 14.5 18.1 42.8
자를란트주 1.2 83.8 16.2 12.0 12.3 13.7 17.4 44.7
작센주 5.1 95.7 4.3 18.8 19.6 19.3 11.2 31.1
작센안할트주 2.9 96.5 3.5 17.9 21.0 18.7 11.7 30.7
슐레스비히홀슈타인주 3.5 88.3 11.7 11.7 14.1 16.5 16.4 41.4
튀링겐주 2.7 96.7 3.3 17.3 19.1 19.6 11.7 32.3
독일 전체 100.0 81.1 18.9 11.4 12.4 14.1 15.8 46.3

종교

종교 구성 (독일)[131]
무종교
  
34%
로마 가톨릭
  
29.9%
개신교
  
29.8%
이슬람교
  
2.6%
그 외 종교
  
2.3%
동방 정교회
  
1.6%

독일의 기독교는 프랑크 왕국 시대에 로마 가톨릭이 본격 도입이 되어서 전파되었고 신성로마제국 초기까지 크게 융성하였다. 로마 가톨릭의 문제들을 신학적으로 논박한 루터종교개혁으로 로마 가톨릭에서 개신교가 분리된 이후에 피비린내 나는 종교전쟁30년 전쟁역사가 있었다. 하지만 개신교로마 가톨릭간의 분쟁은 종교자유가 선포됨으로써 극복되었다. 독일 국민의 대부분이 기독교(로마 가톨릭루터교회)를 신앙하고, 일부는 이슬람교, 유대교, 기타 신흥 종교를 믿는다. 가톨릭바이에른을 중심으로 남부 독일에 많고, 개신교는 북부 독일에 압도적이다. 최근에는 영국동유럽이민에 의해 성공회정교회가 들어옴에 따라 독일교회의 교파는 더욱 다양해지고 있다.

언어

독일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공식적인 언어독일어이다. 독일어유럽 연합에서 사용되는 23개의 공식적인 언어 중 하나이며, 유럽 위원회에서 사용되는 3개의 언어 중 하나이다.[132] 독일에서 유래된 소수 언어는 덴마크어, 저지 독일어, 소르브어, 이디시어, 프리지아어 등이 있다. 이민자에 의해 가장 많이 사용되는 언어는 튀르키예어, 쿠르드어, 폴란드어, 러시아어 등이 있다. 67%의 독일인독일어를 제외한 한 가지 이상의 외국어를 할 수 있고 27%는 독일어를 제외한 두 가지 이상의 언어를 할 수 있다고 한다.[132]

교육

독일의 교육의 감독 책임은 기본적으로 각 주에 있으며 연방정부의 역할은 크지 않다. 만3~5세 사이의 어린이는 선택 과정인 키타에서 유치원 교육을 받는다. 이후의 10년에서 13년의 교육은 의무적이다. 독일의 6세에서 10세까지의 초등학교 다음 과정으론 숀더슐레, 하우프트슐레, 게샴슐레, 레알슐레, 김나지움 등이 있다. 먼저 하우프트슐레는 5년제인데 졸업을 하면 바로 직업전문학교로 가게 된다. 레알슐레는 6년제인데 졸업하면 직업 전문학교를 갈 수도 있고 중등 2단계로 바로 갈 수 있다. 마지막으로 김나지움은 9년제이고 대학교로 진학할 수 있다. 김나지움은 5-10학년은 중등1단계, 11-13학년은 중등 2단계로 구분되어 있다. 김나지움 2단계까지 마치면 독일의 모든 대학교를 갈 수 있는 아비투어 시험을 치를 수 있다. 독일에선 초등학교를 4학년 때 졸업할 수 있다. 어떤 초등학교는 6학년에 졸업을 하는 학교도 있다.

방송과 언론

독일연방공화국 기본법 제 5조에 의거, 언론의 자유가 보장되며 표현, 출판 및 보도의 자유를 인정하고 국가에 의한 검열 제도는 부정한다. 그러나 이 같은 언론의 자유는 무제한의 자유가 아니며, 청소년을 잔인하고 비윤리적인 출판물과 영화로부터 보호하고 개인의 인격과 비밀을 보호해야 할 윤리적 의무를 수반한다.[133] 독일은 미디어에 대한 집중도가 가장 높고, 언론의 다양성이 가장 잘 드러나는 나라 중의 하나인데,[134] 430종 이상의 신문과 60종 이상의 주간지, 그리고 2만 종 이상의 잡지가 발간되고 있다.[135]

신문과 잡지

독일의 신문은 전통적으로 사기업에 의해 운영되어 왔으며 신문에 관한 입법은 주 정부 소관사항이다. 유력한 신문으로는 베스트도이체 알게마이네 차이퉁, 빌트,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 쥐트도이체 차이퉁, 디 벨트가 있으며 이 중 베스트도이체 알게마이네 차이퉁이 최대 구독지의 자리를 지키고 빌트가 최대 판매 부수를 자랑한다. 독일의 신문은 이전의 부정기적인 인쇄 신문이 기술적·내용적 면에서 발전하여 나타난 것으로, 그 중요 요인의 하나로는 특히 자유민주주의 사조의 대두를 들 수 있다. 1848년 독일 혁명으로 신문 발행이 비교적 자유롭게 되자 신문의 종수가 크게 증가하여 1851-60년간에는 그 종수가 482개에 이르게 되었다. 독일의 일간지 중 지방지는 335종, 전국지는 10종이며 전국지 판매량은 160만부에 불과하나 지방지는 1430만부로 강세를 보인다. 주간지는 현재 약 60종 이상이 발간되고 있다. 대표적인 주간지로는 가장 권위있는 시사 주간지로서 함부르크에서 발행되며 독일의 타임즈로도 불리는 슈피겔, 그리고 1993년에 창간되어 여론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포쿠스, 제 2차 세계대전서독의 주요 주간지였던 슈테른포커스 등이 있다.[136] 다른 나라와 비교할 때 발행되는 신문·잡지수의 다양함, 지방지의 발달, 광고 전문지의 강세, 국제 기사의 비중 강화, 수준 높은 주간지의 발행, 정당지의 약세 등의 특징이 있다.[133]

방송

독일 방송국 설립에 관한 입법은 각 주의 소관 사항이며 독일 방송은 공영 방송민영 방송이 공존하는 이중 체계다. 이전에는 공영 체제로만 운영되었으나 1980년대에 들어서 상업 방송의 필요성이 대두되며 일정한 조건 아래에서는 상업적 방송을 허가하는 입법이 1984년 니더작센주에서 통과되었고 민영화 텔레비전라디오 방송사가 인가되었다. 결과적으로 현재는 공영/민영 혼합 체제로 운영되고 있다. 공영 방송에 관한 사항은 주 정부의 법률 또는 주 정부간의 국가 조약에 의해서 규정되고 있으며 방송의 경우 신문보다 시설, 재정에 있어서 엄격한 규제를 받고 있다.[133] 독일의 방송은 연방 정부의 감독 하에 공단(公團)으로 운영되는데, 각 방송 공단은 각각 독자적으로 방송 내용을 편성·방송하고 있다. 독일의 공영 방송사는 9개의 지방 공영 방송사의 연합체인 ARD와 주 정부간의 합의로 설립된 ZDF, 독일의 해외 홍보 공영 방송인 도이체 벨레가 있다. 민영 방송사는 1985년 설립된 Sat.1, 1986년 설립된 RTL 텔레비전, Tele 5, 프로지벤 등이 있다. 위성 방송으로는 3satTagesschau 24가 있으며, 1982년 이래 케이블 텔레비전을 설치하기 시작하여 민간 유선 방송망이 활발히 설치되고 있다.[135] ARD가 2012년에 수행한 조사에 따르면 프로그램별 편성에서 공영 방송의 경우 뉴스를 비롯한 정보 프로그램이 전체 방송시간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ARD가 42%, ZDF가 47%를 차지하며, 상업 방송사들은 평균 20% 이하의 편성비율을 보인다.[137] 독일의 라디오 방송1923년 베를린에서 처음으로 시행하였고,[138] 현재는 500개가 넘는 방송국이 있다. 대표적인 해외 공영 방송인 도이체 벨레에선 전 세계에 30개의 언어로 정보와 뉴스를 방송한다. 전국 공영 방송으로는 도이칠란트라디오에서 뉴스 중심의 도이칠란트푼크(DLF)와 음악 위주의 도이칠란트라디오 쿨투어(DKultur)를 방송하며 각 지방 방송마다 별도의 라디오 채널이 있다. 라디오 방송에서는 공영 방송이 강세를 보이고 있으며, 특히 청소년들이 라디오 방송을 즐긴다.[133]

복지

1. 연금보험 법정 연금 보험은 독일 연방의 사회복지제도에서 중요한 기둥의 하나이다. 이것은 취업자가 취업생활 후에도 적절한 생활수준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방책이다. 2. 실업보험 기본적으로 모든 근로자는 실업보험에 가입되어 있다. 실업보험의 보험료는 근로자와 사용자가 반반씩 지불한다. 3. 간병보험 1995년 1월 1일부터 실시된 간병보험은 간병이 필요한 경우를 위한 사회보장의 보완책이다. 4. 가족에 대한 혜택 1996년부터 가족은 육아보조금이나 면세할당액 중에서 선택을 할 수 있다. 5. 사회보조금 사회보조금은 스스로 생계를 유지할 수 없고, 다른곳에서 어떤 도움도 받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지급된다. 독일 연방의 사회보조금법에 따르면 이런 어려운 상황에 처한 사람은 독일인이건 외국인이건 사회보조금을 청구할 권리가 있다.

문화

독일의 문화는 종교적, 세속적 측면들이 섞여 있으며, 기나긴 유럽 역사 동안 여러 굵직굵직한 사건들을 거쳐오며 상당한 변화를 겪었다. 역사적으로 독일은 ‘시인과 사유자들의 땅’이라고 불렸으며, 독일의 작가들과 철학자들은 서구 사상에 지대한 공헌을 하기도 했다. BBC에서 조사한 국제 연구 조사에 의하면, 2013년과 2014년에 독일은 세계에 가장 긍정적인 효과를 끼치는 국가로 조사되었다. 독일은 옥토버페스트와 크리스마스 리스, 크리스마스 마켓, 글뤼바인, 크리스마스 트리, 스톨렌 등 크리스마스 풍습 등으로 유명하다. 2016년 UNESCO는 41개에 달하는 풍습들을 세계유산으로 등재하였다. 독일은 연방국가답게 공휴일도 주마다 따로 정하는데, 그들 중에서도 10월 3일은 독일 통일의 날로 정해 전국에서 기념하고 있다.

루트비히 판 베토벤

음악

독일은 세계에서 가장 잘 알려진 작곡가들을 여럿 배출한 바 있다. 제바스티안 바흐, 프리드리히 헨델, 디트리히 북스테후데 등은 바로크 기에 활동한 유명한 작곡가이며, 세계적인 작곡가 베토벤은 고전기와 낭만기 중간의 음악사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낭만기에는 카를 마리아 폰 베버, 펠릭스 멘델스존, 로베르트 슈만, 브람스 등 여러 작곡가들이 활동하였다. 특히 바그너는 오페라 음악에 기여를 하였고, 리하르트 스트라우스는 후기 낭만기와 현대 초기에 뛰어난 작곡가로 이름을 날렸다. 20세기와 21세기 초에는 카를하인츠 슈토크하우젠과 볼프강 림 등의 작곡가들이 활동하였다.

2013년 기준으로 독일은 유럽에서 2번째 가는 음악 시장을 가지고 있었으며, 세계에서는 4위를 차지했다. 20세기와 21세기 독일 대중음악은 주로 팝, 헤비메탈, 펑크, 팝 락, 인디 음악 등이 번성하였으며, 특히 독일의 전자 음악은 세계적인 명성을 얻기도 하였다. DJ들과 예술가들, 폴 반 다이크나 파울 칼크브레너 등은 테크노 음악 등으로 세계적으로 진출하고 있다.

예술

독일 예술은 여러 면에서 서양 미술사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독일의 르네상스기에는 알브레히트 뒤러, 한스 홀바인, 마티아스 그뤼네발트, 루카스 크라나흐 등의 예술가들이 활동하였으며, 바로크기에는 루벤스, 요한 밥티스트 치머만이, 낭만기에는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 칼 스피츠베그가, 인상주의에서는 막스 리베르만, 초현실주의에는 막스 에른스트 등의 화가들이 활동하였다. 19세기 들어서는 여러 화가 모임들이 생겨났고, 이로 인하여 뮌헨과 베를린의 화풍에 영향을 미쳤다.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에는 표현주의에 대항하여 신객관주의가 떠올랐으며, 2차 세계대전이 종전된 이후에는 신표현주의가 유행을 탔다.

독일의 건축은 카롤링거 양식과 오토 양식 등이 있는데, 이후 로마네스크 양식과 고딕 양식에도 영향을 주었다. 르네상스와 바로크 양식도 후대에 점차 전파되었다. 독일 민간 건축의 특징은 목재 프레임 구조를 먼저 지은 후 그 사이에 벽토를 채워넣어 만드는 것이다. 유럽에 산업화의 물결이 밀어닥치자, 이에 대항하여 전통을 지키기 위하여 고전주의 양식이 잠깐 유행하였다. 1910년대에는 표현주의 건축이 유형을 탔고, 아트 데코와 다른 현대 건축에도 영향을 주었다. 독일은 세계의 모더니즘 건축의 선도국들 중 하나이기도 하였는데, 20세기 전반에 걸쳐 수많은 모더니즘 건축가들이 독일에서 배출되기도 하였으며 유리로 뒤덮인 초고층건물의 모습을 이때 처음 설계하기도 했다. 독일의 유명한 건축가들에는 고트프리드 뵘, 프라이 오토 등이 있다. 독일의 디자인도 매우 세계적인 수준인데, 베를린 패션위크는 독일 디자인업의 상징 격으로 매 2년마다 한 번씩 열린다.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철학

독일 문학은 최소 중세 시대부터 시작되었으며, 발터 폰 데어 포겔바이데와 볼프람 폰 에셴바흐 같은 작가들이 등장하여 당대에 이름을 날렸다.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독일인 작가로는 요한 볼프강 폰 괴테, 프리드리히 실러, 고트홀트 에프라임 레싱, 테오도르 폰타네 등이 있다. 또한 그림 형제가 모아 출판한 독일의 민화들은 크게 인기를 끌어 국제적인 명성을 얻기도하였다. 그림 형제들은 독일어로 된 지역별 다양한 구전들을 모아 책으로 엮었고, 그 과정에서 독일어를 분석하며 ‘그림 독일어 백과사전’을 함께 출판하기도 하였으며 초본이 1854년에 처음으로 출간되었다.

20세기 독일의 유명한 작가들에는 크게 게르하르트 하웁트만, 토마스 만, 헤르만 헤세, 귄터 그라스, 하인리히 뵐 등이 있다. 이같이 대문호들을 연이어 배출해낸 독일은, 지금까지도 미국과 중국에 이어 세계에서 3번째로 거대한 책 시장을 보유하고 있으며, 프랑크푸르트 북 페어는 5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도서 전시회들 중 하나이다.

독일은 철학적으로도 매우 발달한 국가들 중 하나이다. 고트프리드 빌헬름 라이프니츠는 합리주의에 크게 기여하였으며, 임마누엘 칸트는 계몽주의를 이끌었다. 독일 관념론의 대표적인 철학가들에는 요한 고틀리프 피히테,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빌헬름 요제프 셸링 등이 있다. 쇼펜하우어는 칸트의 철학을 이어받아 자신만의 이기적, 염세주의적 철학관을 구축하였으며, 카를 마르크스프리드리히 엥겔스는 공산주의의 기초를 놓았고 프리드리히 니체는 인식론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존재에 대한 깊은 연구를 남겼으며, 오스발트 슈펭글러는 문화철학을 연구하였다.

요리

독일의 요리는 지역과 지역마다 다르고, 지역들마다 인접한 이웃 국가들의 식문화와 상당히 유사하다. 남부 지역들, 예를 들어 바바리아와 스와비아는 스위스와 오스트리아의 식문화와 매우 흡사하기도 하다. 또한 해외에서 들어온 음식들, 예를 들어 피자, 초밥, 중화요리, 그리스 요리, 인도 요리, 케밥 등도 매우 인기가 많다.

독일 요리의 주식은 빵으로, 독일 제빵업계는 현재 600여개가 넘는 빵들을 생산하고 있으며 1,200개가 넘는 종류의 파스트리와 롤빵들을 굽고 있다. 독일의 치즈 생산은 유럽 전체 치즈 생산의 22%를 차지할 정도로 규모가 거대하다. 2012년 기준, 독일에서 생산된 육류의 99%는 돼지고기, 닭고기, 소고기였다고 전해진다. 독일인들은 이렇게 잡은 고기들을 이용하여 1,500여개가 넘는 소시지들을 생산하는데, 유명한 소시지 종류로는 브라트부르스트바이스부르스트 등이 있다. 음료의 경우, 현대에 들어서는 포도주가 점차 인기를 얻고 있지만 국민 전체로 보았을 때에 독일의 국민음료는 바로 맥주이다. 독일인들은 2013년 기준으로 1인당 110리터에 달하는 맥주를 소비하였으며, 전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치의 맥주 소비량을 자랑하고 있다. 워낙 맥주가 역사적으로도 유명한 국민 음료였기에, 16세기에 독일의 왕 빌헬름 4세는 맥주 순수령을 내려 전국의 맥주 질을 상향시키고자 하기도 했다.

2018년 미슐랭 가이드는 독일에 3스타 레스토랑 11개를 선정하였고, 독일에 있는 별 개수들을 모두 합치면 300개가 넘는다.

스포츠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Borussia Dortmund)와 샬케(Schalke)간의 분데스리가(Bundesliga) 축구경기

독일은 올림픽, 월드컵축구, 포뮬러원(F1) 같은 세계 3대 스포츠 축제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유일한 국가다. 올림픽에서 항상 상위권 성적을 유지하고 있다. 축구의 강국으로 브라질, 이탈리아와 더불어 단 3개국밖에 없는 FIFA 월드컵에서 세 번 이상 우승한 국가들 중 하나이며 월드컵의 평균성적이 상당히 좋으며 2014년 FIFA 월드컵에서 우승하며 통산 4차례 우승 국가가 되었다. 포뮬러원에서는 2013년에 제바스티안 페텔이 종합우승을 차지해 4년연속 챔피언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야구의 경우 베이스볼 분데스리가가 성행 하고 있다.

독일에서 가장 대중적인 스포츠는 축구이다. 독일축구연맹은 700만 명이 넘는 공식 회원들이 있으며, 단일 스포츠 기구로는 전세계에서 최대 규모이다. 독일의 최고 리그인 분데스리가는 모든 전문스포츠리그에서 2번째로 많은 관심을 받는 세계 최대 규모의 게임 리그이기도 하다.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은 1954년, 1974년, 1990년, 2014년 FIFA 월드컵에서 승리하였으며, 2017년에는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에서도 금메달을 따냈다.

독일은 세계 모터 스포츠의 선도 국가로, BMW와 메르세데스와 같은 기업들이 모터스포츠 장비들을 대량으로 생산하며, 포르셰는 르망 24시에서 19번이나 승리하였으며, 아우디는 13번을 승리하였다. 유명한 독일인 드라이버인 미하엘 슈마허는 7번이나 포뮬라 원에서 금메달을 얻어내며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드라이버로 유명해지기도 했다. 그 외에도 제바스티안 페텔도 포뮬라 원에서 가장 성공적인 드라이버 5인들 가운데에 꼽힌다. 독일은 올림픽에서도 항상 매우 좋은 성적을 보여왔는데, 현재까지 얻은 모든 메달 수를 합하면 전세계 3위에 달하기도 한다. 또한 독일은 1936년 베를린 하계올림픽1936년 동계올림픽을 동시에 개최하며 동일 년도에 동계와 하계 올림픽을 개최한 마지막 국가가 되었다. 뮌헨은 1972년 하계 올림픽을 개최하기도 했다.

대외 관계

대한민국

독일과 대한민국1883년 11월 26일 독일전권대신 주(駐)요코하마 독일총영사 에드워드 잡페(Edward Zappe)와 조선전권대신 민영목간에 통상조약을 체결하면서 외교관계를 맺었다가 한일 병합 조약 (경술국치)로 불가피하게 끊어졌다. 대한민국서독간의 외교관계1955년 12월 1일 재개되었다. 이후 서독대한민국경제발전에 많은 지원을 해 주었다. 대한민국의 대(對)독일 수출은 107억 218만USD, 독일의 대(對)대한민국 수출은 143억 489만USD(각 2010년)에 달하여, 독일은 대한민국에 있어서 제8위의 수출국, 제6위의 수입국이다.[139] 과거 분데스리가에서 차범근, 이영표. 차두리 등의 축구 선수들이 활약하였고, 현재는 구자철, 박주호, 지동원 같은 젊은 선수들이 활동하고 있다. 한국에서 독일로 가는 항공편은 대한항공아시아나항공인천-프랑크푸르트 노선루프트한자부산-인천-뮌헨 노선(이 노선의 경우, 부산-인천 구간만의 탑승은 불가능하다.)이 있으나, 인도네시아에서 독일로 가는 경우와 같이 홍콩이나 싱가포르를 경유하여 독일로 가기도 한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의 관계는 1990년 10월 3일 독일 통일로 동독과의 외교관계가 끊겼으나 2001년 3월 1일에 다시 수교하였다.

일본

독일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는 일본의 적대국이었지만 제2차 세계대전에서 함께 추축국으로서 연합국과 맞서 싸웠다. 대전 후, 양국은 잿더미에서 기적적인 부흥을 이뤄낸 경제대국이고, 중요한 파트너로서 일본에 있어 독일은 영국, 프랑스를 앞지르고 유럽 최대의 무역 상대국이 되었다. 또한 정치적인 측면에서도 독일은 일본과 함께 상임이사국을 노리는 G4 국가의 파트너로서 행동하고 있다.

러시아

제2차 세계 대전을 앞두고 나치 독일소련독일-소련 불가침 조약(1939년 8월 23일)을 맺었다. 이 조약에서 양국은 폴란드 등을 분할, 점령하기로 합의하였다.[140] 그러나 1941년 6월 독일은 불가침 조약을 깨고 소련과 중앙유럽을 침공하였다. 이 때부터 1944년까지 소련이 점령하던 지역은 독일의 오스틀란트(Ostland)의 일부가 되었다.(몰다비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제외) 그 후 소련은 동부 전선에서 일련의 전투를 치르며 독일을 서쪽으로 밀어냈다.[141]

폴란드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하여 독일과 폴란드의 관계는 더 이상 악화될 수 없을 때까지 악화되었다. 하지만 나치가 패망한 이후 서서히 외교 관계를 회복하고 있다.

루마니아

루마니아는 제1차 세계 대전 중에 연합국에 가담하여 한때 전 국토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독일 제국군에 점령당하여 동맹국에 항복을 한 바가 있었다(부쿠레슈티 강화 조약).

프랑스

프랑스 혁명(1789년)으로 알자스 지방에 독일군주들이 갖고 있던 소유권이 영향을 받게 되자 프랑스와 독일군주들간의 긴장관계가 야기되었다.[142]

헝가리

955년 아우크스부르크 부근에서 일어난 레히펠트 전투에서 오토 1세(재위: 936년 - 973년)의 군대에 패해 지휘관들이 처형당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헝가리는 최소한 서부 유럽에 있어서는 일시적으로 약탈을 중단하고, 보다 평화적인 방향으로 노선을 바꾸게 된다. 오토 3세(재위: 991년 - 1002년)는 헝가리의 그란(현재의 에스테르곰)에 주교 통치 지역을 건설하여 이슈트반 1세를 헝가리의 왕으로 추대(1000년)[143]:53하고, 헝가리 왕국을 건국하게 하였다. 이렇게 해서 헝가리는 중앙유럽에 위치한 가톨릭 국가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20세기 초, 미클로시 호르티의 헝가리는 영토를 상실함에 따른 반작용으로 차츰 우경화되었다. 호르티는 수정주의 정책을 실시하고 이탈리아 파시스트와 독일 나치의 접근을 용이하게 한다.[144]:200 이리하여 헝가리는 1930년대나치 독일의 강요로 동맹 관계를 맺었다. 히틀러는 헝가리에 있는 유대인들을 학살하기 위해 헝가리를 침공하여 호르티를 나치 합작자로 대체해야 했다.

아르헨티나

아르헨티나의 인구구성이 1위가 스페인계, 2위가 이탈리아계이며 독일계는 그 뒤를 이은 3위이다. 이 때문에 여러 가지 부분에서 친분을 쌓고 있다. 문제는 좋은점과 그렇지 못한 점 양쪽 모두에서 독일과 아르헨티나가 상호협력관계라는 점인데 이 때문에 나치의 전범들이 제 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하자 모두 아르헨티나로 도주했다. 하지만 독일 정부의 요청으로 1990년대 이후에 이르러서야 나치 전범들의 상당수를 체포해서 재판에 회부하고 있는 상황이다.

같이 보기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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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일에 대한 모든 것》

참고 자료

각주

내용주

  1. 1952년에서 1990년까지 "독일인의 노래" 내용 전체가 국가로 지정되어 있었으나, 공식 행사에서는 팽창주의와 나치와 연관이 있는 1절과 2절은 빼고 3절만을 불렀다. 이마저도 1991년 통일 이후 1절과 2절은 국가에서 제외되었다.[1]
  2. 베를린은 헌법상 유일한 수도이자 법적 행정부 소재지이지만, 통일 이전 연방공화국의 임시 수도였던 은 6개의 부처 소재지를 유지하는 연방직할시(Bundesstadt)라는 독특한 지위를 가졌다.[2]
  3. 독일의 연방상원은 독일의 연방의회에 속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표기인데, 그 이유는 독일 헌법은 연방의회와 연방상원을 2개의 별도의 입법부로 정의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독일의 입법부는 1개의 양원제 의회가 아닌 2개의 단원제 의회로 구성된다.
  4. 덴마크어, 저지 독일어, 저지 프랑켄어, 소르브어, 롬어, 프리슬란트어지역 혹은 소수 민족에 대한 유럽 헌장에 의해 공식적으로 인정된다.[4]
  5. 2002년 이전은 독일 마르크(DM)
  6.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
  7. 법률상으로 베를린은 4대국 협정 체제를 유지했다.
  8. 율리우스 카이사르라인강 동쪽의 지역을 지칭하면서 사용했던 라틴어 Germania에서 유래되었다.[12]
  9. 현재 일본에서는 한자 음역은 쓰이지 않고 가타카나로만 '도이쓰'로 표기한다.
  10. 단, 도이칠란트는 현재까지 독일과 함께 이 나라를 가리키는 명칭의 복수 표준어로 인정되고 있다.
  11. 공식 홈페이지
  12. Danuvius guggenmosi, 1,160만 년 전 마이오세 중후기의 독일 남부에서 살던 현재 멸종한 사람과 유인원.
  13. Lion-man, 독일 헤센주에서 발견된 선사 시대 사자 머리에 인간의 몸을 가진 상아 조각.
  14. Augusta Treverorum, 트레베리족 땅의 아우구스투스의 도시.

참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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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0. 상세한 것은 독일-소련 불가침 조약을 참조.
  141. 상세한 것은 동부 전선을 참조.
  142. 김용구 (1989). 《세계외교사》 1995(上•下 合本)판. 서울대학교 출판부. 2쪽. ISBN 89-7096-413-4. 프랑스혁명은 결국 프랑스의 순수한 국내문제로 남아 있을 수 없게 되었다. 알사스지방에 독일군주들이 갖고 있던 소유권이 혁명으로 영향을 받게 되자 독일군주들과의 긴장관계가 야기되었다. 
  143. 박래식 저, 《이야기 독일사:게르만 민족에서 독일의 통일까지》 청아출판사(2006) ISBN 89-368-0354-9
  144. 조르주 뒤비 지음, 채인택 옮김, 《지도로 보는 세계사》, 생각의 나무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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