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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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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자연에는 인류의 생존을 위해 알아야 하는 규칙성이 존재한다. 진정한 규칙성은 자료에 대한 공정한 검토를 거친 후 세워져야 한다. 이러한 과정을 거친 규칙성에 대한 이해가 과학이다.
규칙성이 수학적으로 표현되어 자연의 법칙이 되었다. 여전히 인과관계 영역에는 불일치가 존재한다. 인과관계와 설명이 필수적인 것으로 여겨지더라도 과학에서 허용되는 원인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리는 것이다.
근대과학은 자연법칙에 제한되어 있고 초자연적인 것에는 의존하지 않지만 합리적 신성에 대한 믿음이 합리적 질서를 볼 수 있게 해주었는 경우가 있다. 몇몇 과학자들은 합리적인 자연세계에는 그것을 이끌어주는 어떤 합리적 정신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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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에는 인류가 살아 남기 위해 이해해야 하는 여러 규칙성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태양과 달의 주기적 운동은 지상에서 일어나는 중요한 사건들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 그러나 규칙성에 대한 단순한 이해가 과학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인식된 어떠한 규칙성은 단순히 인간의 지적 능력의 결과일 수 있다. 인간은 혼돈보다 규칙적인 형태를 선호하기 때문에 객관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에 규칙성을 부여할 수도 있다. 진정한 규칙성은 자료에 대한 공정한 검토를 거친 후 세워져야 한다.

규칙성이 수학적으로 표현되어 자연의 법칙이 된 후에도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만족스럽지는 못하다. 어떤 이들은 진정한 이해는 법칙의 원인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인과관계의 영역에는 큰 불일치가 존재한다. 예를 들어 양자역학은 근본적 인과관계에 의한 추구를 포기하고 수학적 기술에만 의존하고 있다. 반면 생물학은 분자·세포·유기체와 같은 실체들의 활동으로 생명현상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인과관계가 존재한다. 그러나 인과관계와 설명이 필수적인 것으로 여겨지더라도 과학에서 허용되는 원인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렸다.

이것은 과학사의 많은 부분에서 자연철학자들이 초자연적이고 신성한 힘에 호소해왔다는 사실들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한편 근대과학은 자연법칙에 제한되어 있고 초자연적인 것에는 의존하지 않는다. 그러나 합리적 신성에 대한 믿음은 세계에서 합리적 질서를 볼 수 있게 해주었다. 그리고 몇몇 과학자들은 합리적인 자연세계에는 그것을 이끌어주는 어떤 합리적 정신이 존재한다고 믿었다(비록 이러한 믿음이 어떤 특정한 자연현상에 대한 설명과 관계되지 않더라도).

역사

천문학

17세기 네덜란드 지도제작가 프레데리크 더빗이 만든 성도

ⓒ Frederik de Wit/wikipedia | Public Domain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중국에서도 천문학이 가장 먼저 출현한 과학으로 보인다.

천문학은 종교와 의례적(儀禮的) 차원에서 깊은 관계가 있었고, 이에 따른 천문학연구의 강조는 수학의 성장을 촉진시켰다. 하늘의 변화는 지상의 중요한 변화를 예언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천문학과 점성술은 중국에서 국가들이 태동했던 BC 2000년경부터 정부체계 속에 자리잡고 있었다. 연금술(화학의 선조였던)·의학·지질학·지리학 등도 국가에 의해서 장려되었고 널리 번창했다.

높은 수준의 실제적 지식은 중국인들로 하여금 수백 년 동안 실제적인 문제를 다룰 때 어느 정도 수준을 유지하게 해주었다. 이러한 수준은 서양에서는 르네상스 시기에 와서야 도달되었다.

인도의 천문학은 실제적·종교적 일을 위한 달력의 제작에 이용됐다. 태양과 달의 운동이 강조되었고, 항성은 이러한 발광체(發光體)들이 가장 먼저 운동하는 배경으로만 여겨졌다. 한편 인도 수학은 꽤 앞서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특히 기하학과 대수학이 두드러진다.

특히 대수학은 인도 계산법체계의 유연성에 의해서 자극받았을 것이다. 이것은 후에 서구에서 힌두-아라비아 숫자로 전해졌다.

중앙아메리카의 마야 문명도 천문학과 점성술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복합사회를 형성했다. 여기서도 달력은 실제적·종교적 중요성 모두를 가지고 있었다(→ 마야력). 아직은 복잡한 수학을 사용한 천문학은 없었지만 마야의 달력은 주의 깊은 관찰과 상당한 독창성을 보여주었다.

이집트에서는 중국과 마찬가지로 우주에 질서가 존재한다는 믿음이 있었다.

그러나 험한 날씨와 지진이 빈번한 재앙을 몰고왔던 중국에 비해 이집트에서의 생활은 평온했다. 아마도 이러한 상대적 평온이 이집트인들로 하여금 물리적 죽음 이후에도 그 평온을 보전하려는 엄청난 지적·육체적인 노력을 기울이게 했던 것 같다. 이집트 신학과 피라미드는 이러한 열의의 표현이었다. 이당시 천문학은 매년 일어나는 나일 강의 범람을 예측하기 위한 날짜 계산에 주로 이용되었고 수학은 거의 요구되지 않았다.

메소포타미아는 중국과 더 비슷했다.

땅은 거칠었고, 따라서 광범위한 저수(貯水)와 관개사업에 의해서만 살아갈 수 있었다. 안정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수리사업(水理事業)에 상당한 수준의 기술이 요구되었으며, 메소포타미아 신학의 강력하고 전제적(專制的)인 신들의 파괴적인 힘들을 저지할 만한 능력이 필요했다. 평야도시에는 승려계급이 운용하는 사원이 중심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승려들은 주요한 공공사업을 계획하고 신의 파괴적인 분노를 피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아마도 무게와 크기의 측정체계에서 비롯되었을 메소포타미아의 수체계는 60(도·분·초 체계의 기원)이라는 수에 기초하고 있었다.

이들 큰 강을 중심으로 한 문명들은 둘 다 복잡한 신학을 발달시켰는데, 이 신학은 인간의 위치와 운명에 대한 많은 질문에 해답을 제공했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스 종교와는 다른 것이었다.

그리스 종교는 사원보다는 모닥불놀이에 알맞는 민간설화 모음과 거의 다를 바가 없었다. 따라서 그리스에는 통찰력있는 탐구방식을 위한 폭넓은 여지가 남아 있었고, 철학과 그것의 가장 오래된 자손인 과학이 출현했다. 헬레니즘 전통에 따르면 최초의 자연철학자는 밀레토스의 탈레스였다. 그는 BC 585년 일식을 예언했고, 원의 지름이 그 원의 면적을 반으로 나눈다는 것을 증명함으로써 기하학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를 시작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가 하나의 단일물질인 ''(물은 기체·액체·고체의 모든 상태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였을 것임)의 변화로써 관찰되는 모든 자연현상들을 설명하려 했다는 점이다. 이것으로부터 우주를 질서있는 구조로 파악하는 견해와, 이러한 질서는 기계적인 질서가 아니라 유기체적인 질서라는 확신이 생겼다(모든 현상에는 목적이 있었는데 그러한 목적은 자연적으로 그것의 목표에 봉사해야 했다)(→ 목적론).

이런 추측은 지적 폭을 확장시켰고, 이후 대부분의 논의는 근본원소에 대한 그의 이론을 좀더 세련되게 비판하는 것이었다.

여러 종류의 단일한 근본원소들이 제시되었다. 대부분의 자연철학자들은 흙(차갑고 건조함)·불(뜨겁고 건조함)·물(차갑고 습함)·공기(뜨겁고 습함)로 자연의 대립되는 성질들을 설명한 4원소설을 받아들였다.

한편 피타고라스는 음조(音調)가 현의 길이에 비례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수'가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정성적인 것(음색)이 정량적인 것(정수에 비례하는 수)으로 환원되었고, 결국 수학에 기초한 물리학이 태어난 것이다.

생물학은 상당히 목적론적이며(유기체의 한 부분은 유기체 안에서 어떤 특정한 기능을 위해서 존재한다고 이해됨), 해양생물에 대한 훌륭한 관찰자였던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전통의 대표자이다.

물리학의 경우 목적론이 그렇게 분명하지 않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주에 대해서도 목적론을 부가해야 했다. 그는 스승이었던 플라톤으로부터 항성과 행성이 문자 그대로 신성하고, 따라서 완전하다는 식의 목적론적 견해를 물려받았다. 즉 천체들은 완벽하고 불변하는 운동인 원운동만을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모든 운동의 궁극적 원인은 우주 바깥에 있는 최고의, 혹은 움직이지 않는 동자(動者)인 신(神)이었다.

아르키메데스는 에우클레이데스가 기하학에서 한 증명처럼 지레의 법칙을 정확하게 증명할 수 있었던 수학자였다. 그는 물리적 특성을 기하학적인 형태로 바꾸어 수학적으로 다룰 수 있게 만들었는데, 유체정역학에 이 새로운 방법을 도입해서 성공을 거두었다.

BC 5세기까지 병(病)은 신의 벌 또는 인간의 죄 때문이라고 생각되었고, 주술이나 기도에 의해 고칠 수 있다고 믿어졌다.

이에 반해서 히포크라테스는 병은 자연적 원인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갈레노스는 소위 영(靈)에 바탕을 둔 3부분의 체계 위에 그의 생리학 체계를 완성했다. 3가지 영은 자연의 영, 생명의 영, 동물의 영이었고 이 영들이 각각 정맥·동맥·신경을 지나면서 전체적으로 신체를 생동케 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독창적 연구정신은 로마인들에게는 꽤나 생소한 것이었고 과학적 혁신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그리스 유산은 흥미 위주였던 로마 백과전서에서 축소되고 손상되었다(예를 들면 플리니우스의 〈자연사 Natural History〉가 있음). 그러나 고대의 학문은 로마 제국의 몰락과 함께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기독교 수도원의 수도사들은 고전을 충실히 베껴서 후세를 위해 보관했다. 동방에서는 비잔틴 제국이 계속 강성했고, 고대의 전통을 이어갔다.

AD 7세기경 아라비아 반도에서 일어나 거대한 제국을 만든 아랍인들에게 고대과학은 귀중한 보물이었다.

힌두 수학자들과의 접촉 그리고 정밀한 천문학의 필요성은 수와 기하학에 대한 아랍인들의 연구를 고무시켰다. 또한 그들은 헬레니즘 시대의 고전을 열심히 재발굴했고, 번역했다. 이슬람 천문학과 점성술은 거대한 관측소 건설로 크게 융성했는데, 이 관측소들은 프톨레마이오스의 예측을 점검해볼 수 있는 여러 관측자료를 제공해주었다. 수에 대한 그들의 관심은 대수학의 발달을 자극했다.

서구에 고대 학문을 전달하는 것 외에도 중세 유럽에는 몇 가지 중요한 발명이 있었다.

자연에 대한 과학적 이해를 얻는 데도 많은 노력을 했지만 과학은 주로 신의 창조를, 즉 신(神) 자체를 이해하는 하나의 수단으로 간주되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이 성서뿐 아니라 자연이라는 책의 저자이기도 하다는 견해를 제시했고, 자연에 대한 지식을 신학 속에 조심스럽게 포함시키려 시도했다. 그러나 그 2가지 책(자연과 성경)은 서로 모순되었고, 마침내 양자간의 투쟁으로 이어졌다.

고대 권위의 무조건적 수용에 대한 최초의 심각한 타격은 신대륙의 발견이었다.

그리스의 위대한 천문학자이며 지리학자였던 프톨레마이오스는 지구 위에 유럽·아프리카·아시아 3대륙만 존재한다고 생각했고, 어떤 학자들은 만일 지구가 둥글다면 지구 반대편에 사는 사람들은 거꾸로 뒤집혀 걸어다녀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프톨레마이오스 체계). 하지만 좀더 신뢰할 수 있는 과학에 의존했던 항해술은 그당시 많은 부(富)를 약속했기 때문에, 신대륙을 발견하기 위해서 수행된 항해는 수학의 발전을 고무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1543년에 출판된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의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 De revolutionibus orbium coelestium〉는 과학혁명의 신호탄이 되었다. 코페르니쿠스는 지구가 아닌 태양을 우주의 중심에 놓아 복잡함을 단번에 제거하고 우아한 단순성으로 환원시켰다.

행성의 겉보기 역행(逆行)과 순행(順行) 운동의 경우 지구를 중심으로 하는 동심구들로 이루어진 프톨레마이오스 체계에서는 여러 가지 기묘한 고안이 필요했지만, 코페르니쿠스 체계에서는 다른 행성들의 움직임과 관련된 지구만의 궤도운동으로도 설명이 가능했다.

코페르니쿠스 체계는 행성의 밝기변화를 잘 설명할 수 있었다.

하지만 코페르니쿠스 체계가 더 깨끗하다고 해서 곧바로 모든 사람들이 동의한 것은 아니었다. 코페르니쿠스 체계에는 몇 가지 수학적인 어려움이 있었고, 어떤 사람들은 만약 지구가 회전한다면 왜 그 표면에 있는 사람들이 떨어져나가지 않느냐고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아무도 지구의 공전에 따른 별의 위치변화(연주시차)를 관측할 수 없었는데, 코페르니쿠스는 별까지의 거리가 지구의 공전궤도보다 훨씬 더 크기 때문에 별의 시차가 관측되지 않는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그렇다면 '왜 신이 우주에서 지구를 그리고 그 위에 살고 있는 인간을 보잘것없는 존재로 만들었을까?' 이것은 당시 사회체제의 근본을 뒤흔드는 심각한 문제였다.

티코 브라헤는 별과 행성의 운동을 상당히 정확하게 측정했는데, 태양 주위를 지나가는 혜성의 경우 달보다 훨씬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그는 천상(天上)의 완벽함에 대한 고대의 믿음에 의문을 던졌다. 전통적 우주관에 대한 훨씬 더 심각한 도전은 망원경을 발명한 갈릴레오에 의한 것이었다.

그는 망원경으로 하늘을 관측해서 달표면에도 산이 있고, 목성 주위를 도는 위성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확인했다. 또한 태양에 흑점이 있고 무수히 많은 별이 존재함을 관측했다. 요하네스 케플러는 화성의 궤도가 원이 아니라 타원임을 발견했다.

역학에서 갈릴레오의 공헌은 코페르니쿠스의 체계를 뒷받침하는 데 직접적으로 연관되었다.

그는 운동하는 물체는 그 운동을 유지하려 하며, 지구표면의 물체는 지구와 함께 운동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 운동을 느끼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아이작 뉴턴은 그의 천재성 덕택에 탐구되어야 할 현상들을 잘 선택할 수 있었고, 자신이 고안한 미적분학(라이프니츠에 의해 동시에 발명된)으로 힘이라는 개념을 수학적으로 유추할 수 있었다. 그 결과는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 Philosophiae Naturalis Principia Mathematica〉(1687)에 잘 정리되어 있는데, 지상과 천상의 물체 모두에 동일하게 적용되는 물리학이 그 내용이다.

뉴턴의 3가지 운동법칙과 중력법칙은 새로운 우주체계를 통제하는 데 충분했지만, 그에게는 신의 도움이 있을 때만 가능했다. 〈광학 Opticks〉(1704)에서 뉴턴은 한 주제에 대해서 어떻게 실험적으로 연구하고 숨어 있는 법칙들을 발견하는가를 보여주었다.

안드레아스 베살리우스의 〈인체의 구조에 관해서 De humani corporis fabrica〉(1543)는 갈레노스의 해부학을 신랄하게 비판한 책이었다.

이것은 이탈리아를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해부학 연구의 돌풍을 일으켰는데, 이 조류는 윌리엄 하비가 인체에서 피의 순환을 발견함으로써 그 정점에 올랐다. 〈동물의 심장과 혈액의 운동에 관하여 De Motu Cordis et Sanguinis in Animalibus〉(1628)에서 하비는 심장과 혈액의 관계를 펌프와 도관체계에 비유했다.

새로운 기구의 발명과 신세계(新世界)로의 팽창은 정보의 홍수를 가져왔다.

자신들의 자료에 대한 확신을 원했던 자연철학자들은 독립적이고 비판적인 논평을 필요로 했는데, 이러한 목적을 위해서 과학학회와 관련 학술지가 생겨났다. 발표되는 새로운 규칙들은 언어의 정확성이 요구되었고, 기꺼이 정보를 공유하고자 했다. 만약 보고된 논문의 결과를 다시 얻는 데 실패할 경우에는 처음 보고된 결과에 대해 의심을 품게 되었다.

18세기에는 많은 물리문제가 복잡한 해석학적 방법에 의해 수학적 문제로 환원되었다.

레온하르트 오일러는 매우 복잡한 문제들을 다루는 데 강력한 도구를 제공했던 변분법(變分法)을 개발했다. 장 르 롱 달랑베르와 조제프 루이 라그랑주는 역학을 완전히 수학화하는 데 성공했다. 피에르 시몽 라플라스는 행성의 중력에 의한 섭동(攝動)이 주기적이며, 신의 개입 없이도 태양계가 안정하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뉴턴을 능가했다.

화학에서의 주요한 진보는 화학반응에서 공기의 역할과 일반적인 기체의 역할을 밝힌 것이었다.

화학자들은 일군의 특별한 기체들의 모임을 발견하고 그것들의 성질을 연구했다. 앙투안 로랑 라부아지에는 일련의 정밀한 실험들을 통해 연소란 플로지스톤(phlogiston)이라고 부르던 연소성을 가진 물질이 타는 물체에서 빠져나가는 것이 아니라, 그가 산소라 이름붙인 기체와 물체가 서로 결합하는 것임을 보여주었다.

한스 크리티안 외르스데드는 전선을 통해 전기가 흐를 때 주위에 있던 자침이 영향받는 것을 발견해서 전기와 자기가 서로 연관되어 있음을 보여주었다.

마이클 패러데이는 전류와 자석에 의해 형성되는 힘의 형태에 주목했다. 그는 장이론(場理論 field theory)의 기초를 쌓았는데, 이것에 의하면 에너지는 실제적 혹은 가설적 입자에 국한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계 전체에 퍼져 있는 것이다.

패러데이는 전기분해에서 일정량의 전기력이 일정량의 화학물질을 분해시킨다는 것을 관찰했는데, 이것은 제임스 프리스콧 줄, 로베르트 마이어, 헤르만 폰 헬름홀츠 등의 연구를 자극했다.

그들은 에너지가 보존된다는 것을 제안했다. 전기와 자기현상은 윌리엄 톰슨(후에 켈빈 경)과 제임스 클럭 맥스웰에 의해 분명한 수학적 형태로 표현되었다. 19세기말에 이르러 물리세계는 에테르(ether) 속에서 다양한 역학적 변화들을 기술하는 수학적 형식들로써 완전하게 이해될 수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원자의 미시세계도 비슷하게 이해되었다.

돌턴은 원자의 종류가 그것들의 무게에 의해서만 구분된다고 가정했다. 드미트리 멘델레예프에 의해 고안된 주기율표는 기본적 성질들을 지배하는 원자구성입자가 존재함을 암시했다.

생명과학에서 카를 폰 린네는 18세기에 어느 정도 인위적이었지만 합리적인 2명법(二名法) 체계를 도입했다.

장 바티스트 라마르크는 시간이 지나면서 종(種)이 변한다는 생각을 제안했지만 일반적 동의를 얻어내는 데는 실패했다. 그것은 주로 그가 작인(作因)을 설명하는 데 시대에 뒤떨어진 화학에 의존했고, 완전성을 의식적으로 추구하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찰스 다윈은 종의 변화를 뒷받침할 수 있는 많은 자료들을 모았을 뿐만 아니라 순전히 자연적 원인으로만 설명되는 진화의 메커니즘을 제시했다.

그 메커니즘이 자연선택이었고, 이 자연선택에 따라 작은 변화들이 생존경쟁을 통해 선호되거나 제거되었다. 그의 〈종의 기원 On the Origin of Species by Means of Natural Selection, or the Preservation of Favoured Races in the Struggle for Life〉(1859)은 유기체 세계에 질서를 가져다주었다.

자크 뢰프는 하등동물의 소위 본능이라는 것은 단지 물리화학반응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박테리아가 많은 질병의 특정한 원인임이 루이 파스퇴르와 로베르트 코흐의 연구를 통해 밝혀졌다.

앙리 베크렐은 1896년 방사능을 발견함으로써 원자가 쪼갤 수 없는 것도 아니며 불변하는 것도 아님을 밝혔다. 20세기 물리학에서 골치 아픈 문제의 하나는 원자로부터 방출되는 복사에 관한 것인데, 당시에 알려져 있던 역학원리로는 설명하기가 어렵다는 사실이 점점 더 명백해졌다.

또한 물리학자들은 감지할 수 없는 에테르의 가설적 성질들에 더욱더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막스 플랑크는 열복사문제에 대한 해답에 고전열역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불연속적인 에너지의 개념을 도입했다.

고전물리학에 가장 큰 파문을 던진 것은 1905년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발표한 특수상대성 이론이었다.

이것은 에테르의 존재와 에테르에 의존하여 설명했던 물리학을 무너뜨렸을 뿐만 아니라 물리학을 사건(event) 그 자체에 대한 연구보다는 사건과 관찰자 상호관계에 대한 연구로 재정의(再定義)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관찰된 것, 즉 발생한 사건은 이제 다른 사건에 대한 관찰자의 상대적 위치와 운동에 의해서 다루어졌다.

아인슈타인과 플랑크는 전자기 복사가 불연속 에너지 양자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하지만 아직도 실험적으로는 전자기 복사가 간섭 또는 회절과 같은 파동적 성질을 가진다는 것이 인정되었다. 루이 드 브로이는 단순히 이러한 2중적 존재를 받아들이면 된다고 제안했고, 에르빈 슈뢰딩거는 계의 에너지 준위와 그밖의 관측 가능한 성질들을 계산할 수 있는 수학적 '파동역학'을 제시했다. 그리하여 측정의 본성에 관한 우리의 시각에 새롭게 영향을 미친 또다른 혁명인 양자역학이 시작되었다.

그것의 특징 중 하나는 베르너 하이젠베르크가 제시한 불확정성원리(不確定性原理)이다. 불확정성 원리는 어떤 계를 교란시키지 않고 그 계에 대한 정확한 측정을 하는 것은 원칙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양성자와 중성자를 묶고 있는 쿼크(quark)나 색깔힘(colour force)과 같은 색다른 현상들이 결국 원자구성입자 세계에 대한 우리 시야를 넓히는 결과를 가져왔다.

상대론·양자역학·입자물리학과 같은 새로운 물리학은 상식에 위반될 수도 있으나 그것은 물리학자들로 하여금 물리적 실제의 한계에 대해 탐구할 수 있게 해주었다.

이 혁명은 화학과 생물학으로 번져나갔다.

화학자들은 오늘날 분자재단(molecular tailoring)을 당연한 일로써 행하고 있다. 유전공학은 진화과정에 인간의 적극적 개입을 가능하게 했고 특정한 일을 위해 인간을 포함하여 생명체를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인간을 가공해내는 후자의 일은 인간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일들로 여겨지게(그것이 좋은 일이건 나쁜 일이건 상관없이) 될 수도 있다.

가장 오래된 과학인 천문학은, 무한히 넓고 상상할 수 없는 격렬한 사건들로 가득찬 우주상을 그려왔다.

우리는 태양이 우주 속의 수십억 개 은하계 중 하나의 은하계에 속해 있는 수십억 개 별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수십억 광년 떨어진 데서는 퀘이사[準恒星體 quasi-stellar objects]로 불리는 강력한 물체가 감지되고 있다. 또한 우리는 관측 가능한 우주의 초기 팽창을 표시해주는 '대폭발'(Big Bang)의 희미한 전자기 반향(反響)을 검출했다고 믿고 있다.

우주 자체의 기원과 구조 그리고 별의 일생과 소멸에 관한 이론들은 우리 몸을 구성하고 있는 복잡한 원자를 포함해서 물질의 기원에 대한 이론에 도움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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