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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교

다른 표기 언어 Christianity , <라>Religio Christiana , <그>Χριστιανισμός 동의어 크리스트교, 예수교, 기독교, 基督敎

요약 AD 1세기에 활동한 나자렛 예수(그리스도)의 생애와 가르침, 죽음에서 유래한 세계의 주요종교.

그리스도교도들의 수는 17억에 달하며, 가톨릭 교회, 동방정교회, 개신교 등 3개의 주요집단으로 나눌 수 있다. 물론 이 3집단들 이외에도 동방 그리스도교에는 몇 개의 독립교회들이 있고, 세계 전역에는 수많은 종파들이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교회와 종파는 그리스도를 통한 인간 구원의 필요성에 대한 믿음을 표출하고 있다.

역사

그리스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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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교회와 후기 유대교

그리스도교가 유대교 안의 한 운동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때는 유대인들이 오랫동안 이방세력의 영향과 통치 아래 있었고, 그들의 정치나 문화적 업적보다는 종교에서 공동체의 구심점을 찾던 때였다.

아모스(BC 8세기 활동) 이후의 이스라엘 종교는 모든 민족을 위한 구원의 보편적 이상을 함축하고 있던 유일신 개념과 이스라엘을 하느님이 특별히 선택했다는 개념 사이의 긴장을 그 특징으로 한다. 알렉산드로스 대왕 이후의 시기(헬레니즘 시대:BC 3세기~AD 3세기)에 유대인들은 헬레니즘 왕국들과 로마 제국에 흩어져 살았는데, 이것이 유대교로 하여금 보편주의적 경향을 띠게 하는 동인이 되었다.

그러나 이방 통치자들, 특히 시리아 왕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는 BC 168∼165 사이 그리스 문화와 종교 혼합주의를 팔레스타인에 강요하고자 하였고 이는 많은 유대인들로부터 격렬한 저항을 받았다(→ 보편 구원 종교, 특정설).

최초의 그리스도교 교회와 유대교의 관계는 주로 다음 2가지 문제와 관련되어 있었다.

첫째는 나자렛 예수의 메시아적 역할이고 둘째는 만인을 위한 모세법의 영구적 타당성이다(→ 메시아).

히브리 성서(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은 이를 구약성서로 받아들였음)는 역사를 섭리의 드라마가 펼쳐지는 무대로 보았으며, 이 드라마는 종국적으로 계약의 목적을 이루지 못하게 하는 모든 절망의 원천들, 즉 이방세력의 지배 혹은 이스라엘의 죄에 대한 하느님의 승리로 끝난다고 생각하였다.

또한 하느님의 통치는 BC 10세기에 이스라엘 왕으로 활동하였던 다윗 계열의 기름부음 받은 왕, 즉 메시아에 의해 수립될 것이라 보았다.

그러나 이 드라마가 대단원의 막에 이를 것인가에 관해서는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다. 귀족적이고 보수적인 사두가이파는 모세5경만을 성서로 받아들였고, 바리사이파는 훨씬 더 대중적이고 엄격한 입장을 취했다.

바리사이파는 5경 이외의 성서를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부활과 천사의 존재에 대한 교리 등 그 당시 유대교에 수용된 교리들을 포용하였다. 이 교리들은 역사의 종말이 인간사(人間事)에 대한 하느님의 극적이고 대격변적인 개입으로 이루어진다는 종말론적인 대망(待望)에서 비롯되었다. 예루살렘의 산헤드린(유대 의회)은 바리사이파와 사두가이파로 구성되어 있었다.

열심당은 로마로부터의 독립을 모색하는 공격적인 혁명가들이었다.

그 이외의 집단들은 헤로데의 속국을 지지하는 헤로데 당과 정통 유대교로부터 탈피하여 수도원에 버금가는 공동체를 이룩한 에세네파였다. 아마도 사해 두루마리를 보존한 사람들도 에세네파 사람들인 듯하다.

예수의 추종자들이 이 집단들과 어떤 관계를 맺었는가는 명확하지 않다.

정경(正經)으로 인정받는 복음서들(교회가 진정성을 인정하여 채택한 복음서들)에서 예수가 비판한 주요대상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었다.

그 당시의 사회적·정치적 조건에서 사두가이파나 열심당이 지속될 가능성은 적었다. 묵시문학적인 꿈을 실현화하고자 한 열심당은 66~70년과 132~135년 2차례에 걸쳐 로마인들에 맞서 주요반란을 일으켰으나 유대의 파멸로 끝났다. 따라서 많은 유대인들은 바리사이파와 그리스도교 가운데 어느 하나를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바리사이파는 모세법을 세밀한 부분까지 지키는 데 관심을 쏟았고, 그리스도교는 성서 신앙을 온 인류를 위한 보편적 종교로 전파하는 데 관심을 집중하였다.

미시나(구전율법)와 탈무드(구전율법에 대한 주석과 보완)에 보존된 바리사이주의는 규범적인 유대교가 되었다. 그리스도교는 이방인(유대인이 아닌 사람들) 세계에 관심을 기울이고 혁명적인 열심당과 조심스럽게 관계를 끊음으로써 유대교의 특수성과 배타성을 희생시키는 대신 세계종교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가 소수의 유대인을 제외하고는 유대인들로부터 공개적인 지지를 얻는 데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역사가들보다 신학자들에게 더 큰 수수께끼이다.

초기 그리스도교에 관한 신약의 자료들

나자렛 예수를 아는 데 필요한 주요자료들은 〈신약성서〉의 네복음서들이다.

처음의 세 복음서들, 곧 〈마태오의 복음서〉·〈마르코의 복음서〉·〈루가의 복음서〉는 문학적으로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이때문에 공관복음서(共觀福音書)라고 불린다. 〈마태오의 복음서〉와 〈루가의 복음서〉는 〈마르코의 복음서〉를 활용한 듯하다. 그 형식과 내용에서 공관복음서와 구별되는 〈요한의 복음서〉는 공관복음서들보다 더 풍부한 신학적 해석을 담고 있으며, 세밀하게 살펴보면 훌륭한 역사적 정보들을 보존하고 있다.

복음서들에서 두드러지게 불확실한 점은 연대이다.

마태오는 예수가 BC 5년 하반기 혹은 BC 4년 상반기에 있던 헤로데 대왕의 사망보다 최소한 2년 앞서 탄생한 것으로 본다. 루가는 예수의 탄생을 로마의 인구조사가 있던 무렵으로 본다.

요세푸스에 따르면, 이 인구조사는 AD 6~7년에 실시되었고 총독 퀴리니우스에 대한 봉기를 유발시켰다고 한다. 루가의 인구조사 부분은 맞지만 총독의 이름은 잘못된 것 같다.

예수가 유대 총독 본디오 빌라도 치하에서 십자가에 처형당한 때는 29~30년경인 듯하지만, 마찬가지로 확실한 것은 아니다. → 마르코의 복음서, 루가의 복음서, 공관복음서, 요한의 복음서

세례자 요한과의 만남은 예수의 생애에서 중요한 계기였다.

세례자 요한은 유대 사막의 금욕주의자로서 다가오고 있는 하느님의 나라를 내다보면서 회개와 세례를 설교하였다. 예수는 세례자 요한을 그가 출범시키고 있는 하느님 나라의 선구자라고 인정하였다. 예수는 그의 고향 갈릴리에서 행한 첫번째 설교를 생동적인 비유로 하였으며, 기적적인 치유도 베풀었다. 공관복음서 기자들은 예수가 공생애 마지막에 단 한 번 예루살렘을 방문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요한은 예수의 예루살렘 방문이 이보다 더 잦았고 그의 공생애 기간이 1년 이상이었다고 기록하고 있고 이 기록이 옳을 가능성이 많다(루가 13:7도 이 사실을 암묵적으로 뒷받침하고 있음).

율법준수에 대한 예수의 태도는 바리사이파와 갈등을 불러일으켰다.

민중이 그를 보호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유대 통치 당국의 공포와 적대감을 불러일으켰다. 유월절(BC 13세기에 히브리인들이 이집트에서 탈출한 사건을 기념하는 절기)에 예수가 개선하는 것처럼 예루살렘에 입성한 것은 최후의 위기를 알리는 서곡이었다.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마친 후 예수는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인 유다에게 배반당해 체포되고 심문을 받았다. 심문은 처음에는 산헤드린에서, 그다음에는 필라테 앞에서 진행되었다. 필라테는 예수에게 십자가 처형을 선고하였다.

필라테에게 제출된 고소의 내용은 반란교사죄였지만, 복음서 기자들은 이를 날조된 죄명으로 본다. 예수가 죽은 지 사흘 만에 하느님의 능력에 의해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였다는 것은 그리스도교의 보편적인 신앙이다.

예수는 하느님 나라가 임박했음을 설교하였다. 그는 어떤 본문에서는 하느님 나라가 미래에 완성될 것으로 말하기도 했고, 또 어떤 본문에서는 이미 와 있는 것으로 말하기도 했다. 예수의 언행은 하느님의 최후 승리로 끝나게 될 하느님 나라 과정의 시작이라고 믿어졌다.

그의 제자들은 그를 메시아, 즉 기름부음 받은 자로 인정하였으나 정작 그가 이 호칭을 자신에게 사용하였다는 기록은 없다. 그는 예언자와 랍비라는 호칭으로도 불렸다. 그가 스스로 사용한 수수께끼같은 칭호는 '사람의 아들'이었다. 그

는 이 칭호를 어떤 경우에는 자신이 받을 고난을 언급하면서, 또 어떤 경우에는 자신이 장차 맡을 재판관의 역할을 언급하면서 사용하였다.

이 칭호는 〈다니엘〉(7:13)의 환상에서 나온 것이다. 이 환상에서 동물의 형상들과 대비되는 '사람의 아들과 같은 자'는 외세에 의해 정복을 당했으나 하느님의 심판에 의해 그 권리를 되찾게 될 하느님의 백성을 대표한다. 그후 복음서 전승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초월적인 심판자라는 주제인 것 같다.

예수의 가르침은 암시적으로 혁명을 거부하면서도 기존질서에 대해 비판적이었고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 용기를 북돋아주었다.

폭력은 하느님 나라의 윤리와 양립될 수 없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광야에서 5,000명을 먹인 기적이 암시하듯이 예수의 활동이 열심당 운동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었던지간에, 복음서들은 자기 역할에 대한 예수의 이해와 열심당 혁명 사이의 거리는 아주 멀었다고 주장한다.

인간의 완전성에 대한 어두운 평가는 이처럼 혁명적 이상주의와 일정한 거리를 취하는 것과 그 맥을 같이 한다.

회개의 복음은 각 개인과 사회가 깊이 더럽혀져 있음을 전제로 하고 있다. 악령의 세력 아래서 인간이 겪는 고난과 고통은 사랑과 긴급한 선교를 필요로 한다. 제자라면 심지어 원수까지 전적으로 사랑하고 용서해야 하고, 재산과 세속적인 복락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야 한다. 예수에게는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사람들(창녀들, 동족의 미움을 받는 가혹한 세리들 등)이 특별한 관심의 대상이었으며, 남을 헐뜯는 태도는 좋은 덕목이 아니었다.

국가는 어떤 점에서는 소원한 실체로 간주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금과 시민적 의무를 요구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로마 황제의 권리들은 반드시 존중되어야 하지만, 하느님의 요구를 이행하는 일과 양립될 수 있다고 생각되었다.

복음은 유대교 안에서 저항에 직면하였다.

따라서 복음의 메시지는 초기 교회의 위대한 선교사인 사울(사도 바울로:이 이름은 나중에 쓰여졌음)에 의해 이방인들의 세계로 전파되었다. 사울은 원시 교회를 박해한 열렬한 바리사이파 사람이었다. 소아시아의 타르소(다소)에서 태어난 사울은 유명한 랍비인 가말리엘의 제자로서 예루살렘에 와서 루가가 "헬라주의자들"이라고 한 그리스도교 집단을 괴롭혔다. 이 집단의 지도자는 스테파노(그리스도교 최초의 순교자)였는데 그는 예수가 타락한 예루살렘 예배를 정화하기 위해 보냄을 받은 개혁자라고 생각했다.

바울로는 예수의 제자들을 박해하는 임무를 수행하던 중 갑자기 그리스도교 신앙으로 개종하였으며, 이와 동시에 배타적이고 특수한 유대교 의전들에 얽매일 필요없이 복음을 비(非)유대인의 세계로 전파해야 한다는 확신에 이르렀다. 바울로는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유대인들에게서는 인정을 받지 못했다.

그들의 견해가 보수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전 생애에 걸쳐 줄곧 논쟁의 대상이 된 인물이었다. 그는 이방인 선교를 통해 개종자들을 얻었으며 이 때문에 예루살렘의 그리스도교 공동체로부터 인정을 받았다. 바울로는 교회가 메시아, 혹은 그리스도의 도래를 확신하면서 온 인류를 향해 보편적인 선교를 펼치는 것이 곧 랍비적 보수주의에 대한 철저한 결별을 의미한다는 것을 분명하고도 정확하게 깨달았다.

몇 편의 무게있는 서신들이 보존됨으로써 바울로는 사도 시대(AD 1세기)에 자신의 의견을 뚜렷이 남긴 유일한 인물이 될 수 있었다.

동시대 사람으로서 그보다 나이가 많고 헬레니즘화된 디아스포라 유대인이던 알렉산드리아의 필론과 마찬가지로 그는 〈구약성서〉를 우의적(상징적)으로 해석하였으며 예수가 안식일을 자유로운 관점에서 해석했듯이 그도 문자에 대한 영(靈)의 우위성을 주장하였다. 그는 예수의 십자가 처형을 최고의 구원행위인 동시에 인류의 죄를 위한 대속의 수단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바울로의 사상에서 구원은 양심에 호소하는 도덕주의에 의해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은혜의 선물이다. 이 교리에서 바울로의 선구를 이룬 사람은 필로이다. 바울로는 이 교리에, 복음은 모세법으로부터의 해방을 뜻한다는 자신의 논지를 연결시켰다.

이 논지는 소(小) 야고보와 예수의 직계 제자단의 지도 아래 있던 예루살렘 교회에서 많은 어려움을 불러일으켰다. 62년에 예루살렘에서 순교한 야고보는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유대인들을 권위있게 대표했다. 야고보가 쓴 것으로 되어 있는 서신은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교리를 반율법적으로 해석하는 입장들에 대해 단호히 반대한다.

베드로는 둘 사이의 중간 입장을 취했던 것 같다. 모든 복음서들은 예수가 베드로에게 12 사도들의 지도자로서 특별한 임무를 맡겼다고 기록하고 있다. 베드로가 어떤 생을 살았는지는 어렴풋이밖에 알 수 없으나, 초기의 전승에 따르면 그는 바울로와 같은 시기(64)에 네로의 박해를 받고 로마에서 순교하였다.

바울로의 신학에서 예수의 인간적 업적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자신의 임무에 복종하고 충성을 다한 예수의 태도는 예수의 자기희생에 도덕적이고 구속적인 가치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요한의 복음서〉에서는 강조점이 이와 다르게 나타난다. 2세기의 전승에 따르면 이 복음서는 에페소스에서 씌어졌는데 교회와 헬레니즘화된 유대인들 사이의 논쟁, 정통 그리스도교와 소아시아의 영지주의 분파들 사이의 논쟁 등 당시 그 지역에서 논란이 되던 문제들이 일부 반영되어 있다. 요한의 독특한 개성은 역사적 사건들과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현재적인 구원 경험 사이의 관계를 해석하는 그의 관점에서 찾을 수 있다.

그는 역사를 신앙에 이르는 수단을 제공할 수 있도록 상징적으로 다루었다. 역사는 한 특수한 인간의 생애에서 일어난 우연한 사건들과는 잘 부합되지 않는 범주이기 때문에, 요한은 이전에 존재했던 로고스가 예수 안에서 육화(肉化)되었다는 사상을 발전시켰고, 이 사상은 예수의 우주적인 의미가 헬레니즘 세계에 더 잘 인식되도록 도왔다.

고대 세계에서 신의 현존은 신의 영감이나 육화로 이해되었다. 공관복음서들이 신의 영감을 선택하였다면, 〈요한의 복음서〉는 육화를 선택한 셈이다. 이 2가지 유형의 그리스도론 사이의 긴장은 4세기 후반기에 안티오키아 학파와 알렉산드리아 학파 사이에서 일어난 논쟁에서 최초로 첨예화되었다.

초기 교회의 가르침과 조직

교회는 유대교로부터 우상숭배와 이교적 성애주의(性愛主義)와 구별되는 거룩함에 관한 강한 의식을 유산으로 물려받았다.

다신교와 그것에 부수되는 관용이 고대 사회에 널리 스며 있었지만, 그당시 그리스도교의 도덕적 엄격성은 그리스도교인들로 하여금 특정한 상업활동과 직업에 종사할 수 없도록 제한했다. 세례를 받을 때, 어떤 그리스도교인이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다신교·미신·부정직 혹은 악과 타협할 수밖에 없는 직업에 종사하고 있을 경우 그 직업을 버려야 했다. 군복무에 관해서는 의견이 일치되지 않았다.

대다수 그리스도교인들은 군인이 개종하여 세례를 받을 경우 군대를 꼭 떠나야 할 필요는 없다고 주장했지만, 이미 세례를 받은 그리스도교인이 정식으로 군인이 되는 문제에 대해서는 주저했다. 또한 엄격한 그리스도교인들은 가르치는 직업을 높게 평가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교사는 이교적 관념들과 외설적인 내용으로 가득찬 문학작품을 젊은이들에게 가르치기 때문이다. 연극과 춤도 달갑지 않은 직업이었고 마술은 어떤 경우에도 금지되었다.

이렇듯 그리스도교 윤리는 사회로부터 다소 초연할 것을 요구하였고 이로 인해 때로 경제적 곤란을 겪기도 하였다. 고대 사회의 구조는 계급에 의해서가 아니라 후견인과 피후견인의 관계에 의해 지배되었다. 노예나 자유인이 된 사람도 자신의 생계와 앞날이 후견인에게 달려 있었다.

가정에서 아버지의 권위는 막대했다. 어떤 사람의 사회적 권력은 그에게 의존하는 사람들과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에 따라 달라졌다. 많은 경우 그리스도교는 1차적으로 여성과 어린이들, 특히 상류계층 여성과 어린이들을 통해 사회 속에 파고들었다. 그러나 가장이 그리스도교인인 경우에는 그에 속한 사람들도 가장의 뒤를 따르는 경향이 있었다. 그리스도교 공동체 자체는 밀접한 유대를 이루고 있었다. 3세기의 한 자료에 따르면, 그리스도교인들은 동료 신자들끼리 돈을 거래하기도 하고 서로 멀리 떨어진 집단들은 상업활동과 상호부조를 통해 서로 도왔다.

바울로의 서신에는 매주 첫날 예배를 드렸다고 기록되어 있고 〈요한의 묵시록〉에서는 일요일이 "주의 날"로 언급된다.

매주 일요일에 갖는 부활을 기념하는 행사가 지금까지 토요일에 갖던 유대인 회당모임을 대신하게 되었다. 할례 의식은 사라졌고, 입교는 세례에 의해 이루어졌다. 주일마다 성찬례에 참여하는 일이 지속적으로 교회의 일원임을 나타내는 표시였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주어지는 물의 세례는 교육(교리문답)과 금식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졌다. 세례를 받고자 하는 사람들은 악을 버릴 것을 선언한다.

그리고 신앙을 공표하면서 몸을 물에 잠깐 담근다. 그다음 성령의 은사를 받고 그리스도의 몸과 한 몸을 이룸을 상징하는 기름부음과 안수(견진성사)로 세례의식은 전부 끝난다. 세례를 받은 사람만 최후의 만찬 때 예수가 한 말을 회상하는 성찬례에 참여할 수 있었다. 성찬례 때는 봉헌하는 하느님의 백성에게 성령이 임재할 것을 기원하고 거룩하게 구별된 빵과 포도주를 신자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성찬례의식에 관한 기록은 유스티누스(150경)의 저작들과 특히 로마의 히폴리투스(220경)의 〈사도전승 Apostolic Tradition〉에 나온다.

세례를 받은 후 중대한 잘못을 저지른 사람은 교회로부터 제외되었다. 그러나 파문을 당한 사람도 시편 낭송, 성서 낭독, 설교로 이루어지는 예배의 첫부분에는 계속 참여할 수 있었다. 테르툴리아누스 같은 몬타누스파와 로마 가톨릭 분파였던 노바티아누스파는 교회의 사면권을 부정하였으나 그 엄격성보다는 분파성이 더 심해 카르타고의 키프리아누스조차도 노바티아누스파를 비판할 때 그들의 엄격성보다 분파성을 겨냥하는 것이 더 쉽다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3세기에 이르러서는 공적인 고해(告解)가 등장하였다. 고해는 금욕적 고행을 전제조건으로 일생에 단 한 번 허용되었다. 고해자들은 안수를 받음으로써 교인들과의 친교를 회복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고해자들은 덜 힘들고 덜 공적인 고행을 요구받았다.

제1세대 그리스도교에서 교회의 권위는 예수의 친족들이나 예수로부터 사도와 선교사의 임무를 부여받은 사람들에게 있었다.

사도들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사도들의 권위있는 목소리가 호소력을 가졌다. 그러나 사도들이 모두 죽자 권위의 소재와 관련해 첨예한 문제가 제기되었다. 아주 오랜 3~4세기 그리스도교 문헌들은 주로 교직의 위계질서를 세우는 권위가 무엇인가를 주제로 다루고 있다. 사도회의는 보통 원로들(presbyteroi:그리스어로 사제들)이나 감목들(episkopoi:주교들)이 봉사자(diakonoi:부제들)의 보조를 받아 운영되었다.

성직자는 설교, 세례와 성찬례, 가난한 사람들에게 구제금을 나누어주는 책임이 있었다. 각 도시에서는 원로들로 구성된 단체(총회)의 수장이나 원로가 자연히 특별한 권위를 갖게 되었다. 그는 다른 교회들과 서신을 교환하였고, 이 교회들이 새 수장을 임직할 때는 그가 속한 공동체의 대표로서 그리고 그리스도교 교회의 가톨릭적 성격(보편성과 통일성)을 나타내는 상징으로서 성직수여식에 참여하곤 했다.

초기 그리스도교는 주로 도시에서 발전했다.

시골의 농부들은 옛 방식에 집착하였으며, 토지를 소유한 귀족들 대부분이 선호하던 이교(異敎)를 믿었다. AD 400년경 토지소유자들 가운데 개종하는 사람이 생겨났고, 그들은 자신의 소유지에 교회를 세우고 사제에게는 '성직록'(聖職祿)을 주었다. 이 경우 사제들 가운데는 권력자의 노예도 있었다. 아프리카 동부와 북부에서는 보통 고을마다 주교가 있었으나, 서부지역에는 주교들이 적어서 보다 넓은 지역을 관할하였다. 4세기 이래 이 지역들은 세속적인 용어로 주교관구라고 지칭되었다.

4세기에 이르러 이와 같은 서방의 관습을 동방의 관습에 맞추어 주교의 수를 증가시켜야 한다는 압력이 강해지자 서방의 주교들은 이에 저항하였다. 그 이유는 이 조치로 인해 주교들의 사회적 지위가 낮아질 수 있다고 우려했기 때문이다.

3세기말에 관구 수도의 주교는 점차 그의 동료들보다 더 큰 권위를 갖게 되었고, 대도시의 주교(4세기 이래 수도대주교라고 지칭됨. 대주교라고 지칭되는 경우도 많았음)는 동료 주교들의 주교 서품자(敍品者)였다.

3세기의 로마 주교, 알렉산드리아 주교, 콘스탄티노폴리스(AD 320 창건) 주교의 권위는 자신의 관구를 넘어서까지 영향을 미쳤다. 그리스인들은 이 3개의 대주교 관구를 5개의 대주교 관구로 늘렸다. 파파(papa:아버지)라는 칭호는 처음 600년 동안에는 신자들이 자신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주교를 부르는 애칭이었으나 6세기 이래 로마의 주교들에게 특별히 사용되기 시작하였고, 9세기에 이르러서는 거의 로마 주교들에게만 사용되었다.

애초부터 로마의 그리스도교인들은 교회를 지도해야 한다는 특별한 책임의식을 갖고 있었다. AD 165년경 로마에는 사도 베드로와 바울로에게 바치는 기념물이 세워졌다. 베드로를 위한 기념물은 바티칸 언덕의 공동묘지에 세워졌고 바울로의 기념물은 오스티아로 가는 길목에 세워졌다.

이 건립사업은 로마 교회가 사도전승의 수호자라는 의식을 반영해준다. 이러한 의식은 AD 190년경 로마의 주교 빅토르가 춘분 후 첫 만월이 지난 일요일에 부활절을 지키지 않고 예로부터의 관습에 따라 유대교 유월절에 부활절을 지킨 소아시아의 그리스도교인들을 파문하겠다고 위협한 사건에서 또다른 형태로 표현되었다. 256년 로마의 스테파노 1세는 예수가 베드로에게 위임했다는 성서 구절(마태 16, 18~19)을 근거로 권위를 주장한 최초의 교황이다.

그리스도교 성서의 형성

그리스도교인들은 처음에는 아무 논란없이 히브리 성서를 유산으로 물려받았다. 그리스도교인들은 히브리 성서를 역사순례의 무대에서 하느님의 백성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말씀으로 인정했던 것이다. 그런데 만일 사도 바울로의 이방인 선교가 타당한 것이라면, 〈구약성서〉의 율법은 더이상 하느님의 백성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최종적인 말씀으로 간주될 수 없기 때문에 히브리 성서는 '옛 계약'으로 불리기 시작하였다.

교회는 어떤 책들을 성서에 포함시켜야 하는가를 놓고 주저하였다. 〈구약성서〉의 그리스어 번역본(70인역 성서)에는 솔로몬의 지혜, 집회서 등과 같이 히브리 정경에 채택되지 않았던 책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전부는 아니지만 대부분의 이방인 그리스도교 공동체들은 70인역 성서를 정경으로 받아들였다.

3세기의 알렉산드리아 신학자 오리게네스와 특히 라틴 성서학자 예로니모(4~5세기 활동)는 보편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책들에 근거하여 신학적 주장을 하는 것은 염치없는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영어판 성서들이 히브리 정경에는 채택되지 않았으나 70인역에 채택된 구약의 일부분을 외경이라는 이름(이 명칭은 사람들을 오도하기 쉬움)으로 별도로 인쇄하는 경우는 이러한 고대 교회의 망설임에서 비롯된 것이다.

예로니모(Eusebius Hieronym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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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서〉의 형성과정은 훨씬 더 복잡하고 논쟁이 많았다. 1세기의 그리스도교인들은 예수의 행위와 말씀에 관한 이야기를 전할 때 문서전승보다는 설교와 가르침을 통해 구전전승을 더 많이 활용하였으나, 이 이야기들이 권위를 갖기 위해 기록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마르코가 처음으로 이 이야기들을 서로 연관된 하나의 이야기로 짜보려고 생각했다. 복음서들이 널리 돌려가며 읽혀지기 시작한 이후에도 구전전승은 여전히 통용되었고 오히려 선호되었다. 그래도 공들여 복사한 문서들은 전승이 훼손되지 않도록 하는 안전 장치가 되어주었다.

공관복음서들은 AD 150년경 로마의 변증가였던 순교자 유스티누스에 의해 일찍이 종합복음서(또는 복음서들을 종합한 것)라는 형태로 사용되었던 것 같다. 유스티누스의 제자인 시리아 교회의 타티아노스는 여기에 〈요한의 복음서〉를 추가하여(4복음서에 따른) 디아테사론(Diatessaron)을 만들었다. 이 네 복음서의 종합판은 매우 성공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타티아누스의 고향이었던 메소포타미아에서는 250년 동안 낱권의 복음서들을 실제로 전혀 사용하지 않을 정도였다(→ 구비문학).

사도서신들, 특히 바울로의 서신들은 공관복음서 다음의 권위를 누렸다. 바울로의 서신들 가운데 주요부분은 AD 90년 이전에 서간집의 형태로 회람되었다(→ 바울로의 서신).

그리스도교 초기의 이단운동

영지주의는 150년 이전에는 그리스도교에 대한 가장 큰 위협이었으나 점차 그 정도가 약화되었다. 영지주의자들은 이 세상의 악과 하느님 사이에는 전면적인 대립이 존재한다고 생각하였다. 구원이란 무능하고도 악한 세력들에서 파생된 피조세계의 혼돈으로부터 해방되는 것, 즉 선택받은 사람들이 소외된 수인들처럼 살아가는 이 세계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구원의 방법은 선택받은 사람의 영혼 안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발견하고 영혼이 지복(至福)의 본향으로 올라가는 것을 가로막는 적대적인 세력들을 어떻게 통과할 것인가를 터득하는 것이었다.

영지주의는 하느님이 역사에 나타났다는 개념을 파괴하였다. 영지주의의 염세주의와 이원론(물질은 악한 것, 정신은 선한 것으로 생각)은 도덕적인 일관성없이 금욕주의와 자유방임주의 경향을 둘 다 가지고 있었다. 영지주의는 반이성적(反理性的)인 종교사상으로서 완전히 초월적인 계시만을 주장하여 창조된 세계 안에 자연적 선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게 하였으며, 개인의 책임이 설 자리를 없애버렸다.

정통파 신학자들과 3세기의 이교 철학자 플로티노스는 영지주의가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한다는 이유를 내세워 거짓되고 위험한 미신이라고 규정하고 이를 배척하였다.

정통신앙은 사도들에게 근거를 둔 교회들이 확인해준 전승을 고수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이단자들은 이 주장에 맞서 열광적인 예언에 호소함으로써 훨씬 더 위험한 대응을 하였다. AD 172년경 몬타누스와 2명의 여성 예언자들이 프리기아에서 일어난 준오순절(準五旬節)운동을 이끌었다. 이들은 세계종말의 임박성을 거듭 주장하였고, 몬타누스는 성부의 시대(구약시대), 성자의 시대(신약시대), 예언자 몬타누스가 예고하는 성령의 시대가 있다고 가르쳤다.

몬타누스주의로 개종한 중요한 인물은 카르타고의 라틴 신학자 테르툴리아누스이다. 〈신약성서〉를 보완해야 한다는 몬타누스파의 주장은 전교회적으로 거부되었다.

신학논쟁

251년 로마의 노바티아누스 분파는 사변적 신학으로부터 관심을 돌려 교회의 교인 자격과 성사의 유효성에 관한 법적 문제에 집중했다.

이 문제들은 로마와 북아프리카 교회의 분열을 가져왔으며, 그 핵심은 도나투스가 표방한 사상들에 관한 카르타고 논쟁이었다(313). 도나투스파는 성사의 유효성이 성직자의 자격에 달려 있다고 말했으나, 로마 그리스도교인들과 로마와 유대관계에 있었던 북아프리카의 그리스도교인들은 성사의 유효성이 사람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로부터 나온다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설령 효력은 없을지라도 분파주의자가 집전한 세례도 유효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히포의 주교(396~430)이며 위대한 신학자였던 아우구스티노는 도나투스파와 관련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많은 힘을 쏟았으나 마침내 합리적인 논거를 포기하고 마지못해 제한된 강제력 사용을 정당화하기에 이르렀다.

서방 교회에서 일어난 또 하나의 중요한 논쟁은 훨씬 더 착잡한 문제였다.

그것은 신앙이 하느님의 은총에서 비롯되는가, 아니면 인간의 자유에서 비롯되는가 하는 문제였다. 영국의 수사 펠라기우스는 아우구스티노가 하느님의 명령을 수행해야 할 인간의 책임을 파기하고 인간의 능력을 부정했다고 항변했다. 아우구스티노와 펠라기우스는 모두 이 문제를 풀기 위해 적절치 못한 비인격적인 사유범주들을 적용했다. 교회는 펠라기우스의 사상을 정죄했고, 아우구스티노의 극단적인 주장들 가운데 일부(특히 예정론과 원죄의 유전론)도 흔쾌히 승인하지 않았다(→ 펠라기우스주의, 자유의지).

그리스 동부에서는 4세기 내내 알렉산드리아의 사제 아리우스(250경~336)가 내세운 주장을 둘러싸고 논쟁이 그치지 않았다.

그는 몸을 가지고 태어나 고난을 당하고 죽은 그리스도가 모든 고통 너머에 있는 초월적인 창조의 제1원인일 수 없다고 주장했다. 니케아 공의회(325)는 아리우스의 사상을 정죄하고 하느님의 아들은 그 본질에서 성부와 동일하다고 주장했다. 이 공식주장은 로고스가 독립된 인격적 실체라는 교리를 거부하고 성부 하느님만이 완전한 신성을 가진다고 주장하였던 단일신론에 반대할 안전장치를 갖추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논쟁은 그후에도 오랫동안 계속되다가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381)가 아리우스 사상을 동방에서 완전히 근절시킨 뒤 비로소 해소되었다.

5세기의 그리스도론 논쟁은 라오디게아의 아폴리나리우스(360~380 활동)의 교리와 모프수에스티아의 테오도루스(350경~428)의 교리 사이에 벌어진 각축에서 비롯되었다. 이 교리들은 서로 경쟁관계에 있었던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안티오키아 학파를 각각 대표하였다.

알렉산드리아의 대주교 키릴로스가 이끈 에페소스 공의회(431)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대주교 네스토리우스가 가르친 안티오키아 학파의 극단적인 그리스도론을 정죄하였다.

그 이유는 이 그리스도론이 인간 예수를 신의 말씀과 별도로 존재하는 독립된 인격이라고 주장하고,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를 '테오토코스'(theotokos:'하느님을 잉태한 자')로 부르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키릴로스는 "육화된 말씀의 단일 본성"을 공식주장했다(→ 단성론자).

교황 레오 1세(440~461 재위)는 이 단성론(單性論)을 칼케돈 공의회(451)에서 결정적으로 거부했다. 이 공의회는 그리스도가 한 인격 안에 두 본성(hypostasis)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양성론). 그렇게 해서 칼케돈 공의회는 이집트와 시리아의 단성론자들을 소외시켰다.

그후 250년 동안 비잔티움의 황제들과 대주교들은 단성론자들과 화해하기 위해 크나큰 노력을 기울였으나 연속해서 이루어진 3번의 화해 시도도 실패로 끝났다.

① 제노 황제 시대(482)의 통일공식주장(Henotikon)은 칼케돈 공의회에 대한 단성론자들의 비판이 정당할 수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로마 교회를 공격하였다(→ 헤노티콘).

②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시대에는 알렉산드리아 키릴로스의 신학과 단성론을 비판하는 몹수에스티아의 테오도레, 테오도렛, 이바스의 글이 실린 '세 장들'(Three Chapters)을 정죄함으로써 칼케돈 규정을 억지로 옹호하였다(→ 삼장논쟁). 시리아 교회의 단성론자 야콥 바라데우스는 이에 대항하여 경쟁적인 단성론자들의 주교회의를 창설하고 항구적인 분립을 이루고자 하였다.

③ 이라클리오스 황제(610~641 재위) 시대에 칼케돈파는 단성론자들을 초청하여 그리스도는 2가지 본성과 단일한 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단의론(單意論)으로 재결합을 시도하였다(→ 단의론자). 그러나 이 회합은 단성론자들 가운데 어느 한 사람과도 화해를 이루지 못했으며 칼케돈파 자체의 분열만 일으켰을 뿐이다.

칼케돈의 '양성론'은 지금까지도 줄곧 아르메니아 사도교회, 콥트 정교회, 에티오피아 정교회, 시리아 정교회 의 안티오키아 대주교 관구(시리아 야코부스파)에 의해 거부되고 있다.

교회와 제국의 동맹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후(312) 동서 로마 전체를 지배하는 황제가 되었고(324), 니케아 공의회의 실제 주관자였으며(325), 콘스탄티노폴리스 도시를 창건하고(330), 337년에 사망하였다.

4세기에 그는 특히 종교부문의 위대한 혁명가로 간주되었다. 그는 그리스도교를 제국의 종교로 만들지는 않았으나, 새로운 로마가 되리라 생각하며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그리스도교 도시로 창건한 것은 장래의 정치구조와 교회구조에 영향을 끼쳤다.

콘스탄티누스는 교회를 은둔상태로부터 세상으로 끌어내어 사회적 책임을 받아들이도록 하였고, 그리스도교가 이교사회를 자기 수중으로 끌어들이도록 도왔다. 교회와 황제의 동맹은 2가지 측면에서 저항을 불러일으켜 그리스도교인들 가운데서는 수사들의 사막은둔으로 표출되었고, 이교도들은 배교자 율리아누스의 짧은 통치기간(361~363)을 제외하면 수동적인 저항을 했을 뿐이다.

4세기에 고조되었던 이교에 대한 무언의 압력은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379~395 재위)의 칙령들에서 절정에 달했다. 그는 정통 그리스도교 신앙을 선한 시민이라면 반드시 갖추어야 할 필요불가결한 요소로 만들었다.

테오도시우스 황제 시대에 많은 이교 사원들이 폐쇄되거나 파괴되었다(예를 들면, 알렉산드리아의 세라페움). 그러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527~565 재위) 시대까지는 이교도들이 대체로 정부로부터 별 어려움을 당하지는 않았다.

교회와 국가의 결속은 주교들에게 수여된 작위와 훈장을 통해 표현되었다.

주교들은 또한 황제의 사절 임무를 맡기 시작하였다. 400년경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대주교는 궁정에서 모든 문관들의 앞자리를 차지하였다. 밀라노의 주교 암브로시우스(374~397 재임)의 기록에서는 '로마'와 '그리스도교'라는 낱말이 거의 동의어로 쓰여졌다. 아리우스 논쟁(아리우스의 사상에는 예수의 신성에 대한 부정이 포함되어 있었음)은 콘스탄티우스 황제가 아리우스 사상을 지지하자 교회와 국가의 갈등으로 발전하였다.

암브로시우스는 테오도시우스에게 압력을 가하여 황제를 교회에 굴복하게 만들었다. 황제는 교회의 주인이 아니라 교회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정통파 황제들을 위시하여 대부분의 그리스도교인들은 교회와 국가가 사실상 어깨를 나란히 하는 대등관계에 있다고 생각하였다(→ 아리우스주의).

교회는 아주 천천히 제국의 국경선 너머로 선교사업을 펼쳐나갔다.

고트족의 울필라스는 고트족을 아리우스 사상으로 개종시켰고(340경~350), 성서를 번역하였다(→ 고트족의 개종). 그는 〈구약성서〉의 호전적인 구절들을 부적합하다고 판단하여 삭제하였다. 고트족은 그들이 믿는 아리우스파 신앙을 반달족 같은 게르만 부족들에게 전했다(최초로 그리스도교도가 된 부족은 프랑크족이다. 프랑크족은 506년경에, 그 뒤를 이어 비시고트족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였다).

5세기에 서방지역은 야만적인 고트족·반달족·훈족의 침략을 받아 서로마 제국이 멸망했으나, 이로 인해 교회나 국가에 별다른 변화가 나타난 것은 아니다.

서방에서는 교황의 지위가 국가권력의 쇠퇴로 인해 높아졌다(→ 야만인).

726년 이후로 비잔티움은 성상파괴논쟁에 휩쓸려 들어갔다. 이 논쟁은 성상들을 보존하기 위한 투쟁이었을 뿐만 아니라 황제의 뜻에 교회가 예속되는 것을 물리치기 위한 투쟁이기도 하였다. 성상들에 대한 제국의 공격은 서방교회에서 신랄하게 비판되었다.

그런데 그리스의 성상파괴론자들이 제7차 니케아 공의회(787)에서 정죄당하자, 교황 아드리아누스 1세(772~795 재위)의 마지못한 동의를 받아내어 독일의 프랑크푸르트 교회회의(794)에 모인 프랑크 왕국의 샤를마뉴 왕의 주교들은 이 결정을 비난하고 나섰다.

동방교회에서 성상파괴론이 득세하자(815~843) 서방교회에서는 이에 대한 반작용이 일어났다.

마침내 서방교회는 제7차 공의회의 결정사항들을 받아들였다. 서방교회는 성상들을 동방교회와 다르게 평가하였다. 서방교회에서는 거룩한 그림들이 동방교회에서처럼 성례전적 구원의 실제적인 매체가 아니라 헌신의 보조수단으로 생각되었다.

성상파괴를 지지하는 황제들과 교황들 사이의 적대관계는 8세기의 교황들로 하여금 보호자를 찾도록 만들었다. 카를 마르텔(719~741 재위)과 프랑크 왕국의 번영은 바로 이러한 보호자를 제공해주었다. 프랑크 왕국의 왕들은 서방교회의 이해관계를 지켜주었고, 교황과 프랑크 왕국의 동맹은 800년 크리스마스에 교황이 샤를마뉴를 제1차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로 인정하여 대관식을 거행해줌으로써 그 절정에 달했다.

신성로마 제국은 1806년까지 지속되었다. 샤를마뉴는 서방 교회에 대해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였다.

동서 교회의 분열

성상파괴논쟁은 종식(843) 되었지만, 파벌을 유산으로 남겼다. 847~877년까지 자신의 직위를 빼앗기기도 하고 되찾기도 하면서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총대주교로 활동했던 이냐시오스는 858년 당국에 의해 추방당했고 포티오스가 그를 대신하였다. 평신도 학자로 제국 법원의 수장이던 포티오스는 총대주교로 선출되어 6일 동안 총대주교 자리에 있었다.

포티우스(Saint Photi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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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냐시오스의 지지자들이 교황 니콜라오 1세(858~867 재위)를 설득하여 포티오스를 인정하지 않게 했기 때문이다.

니콜라오는 불가르족에 대한 비잔티움 교회의 선교에 대해 격노하였다(→ 볼가리). 왜냐하면 그는 불가르족이 자신의 선교영역에 속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니콜라오가 불가르족에 서신을 보내 그리스 의식들에 공격을 가하라고 명하자, 포티오스는 서방교회가 성령이 아버지와 아들에게서 나온다(Filioque)고 말함으로써 신경를 이단적으로 변조하였다고 고소하였다(→ 필리오쿠에).

포티오스로 인한 분열의 주요내용은 로마가 교황 니콜라오와 하드리아노의 주장대로 모든 교회들에 대한 전제군주적인 관할권을 소유하고 있는가, 아니면 포티오스와 그리스인들의 생각대로 로마가 5개의 준독립적(準獨立的)인 총대주교 관구들의 맏형에 불과하므로 교회법에 의거하여 다른 관구들의 내부문제에 간섭할 수 없는가 하는 문제였다.

포티오스 시대에 나타난 상호불신은 교황이 이탈리아 남부의 그리스인들에게 라틴식 관습을 강요하였던 11세기 중반에 다시 한번 고개를 들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총대주교 미카엘 케룰라리우스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라틴 교회들을 폐쇄하였다.

1054년 7월 16일 이탈리아에서 온 한 교황사절은 냉대를 받고,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의 제대 위에 미카엘 케룰라리우스를 파문하는 로마 교황의 파문장을 올려놓았다. 또 성령에 대한 그리스식 교리를 정죄하였고, 기혼자의 사제 서품을 매도하였으며, 성찬례를 위해 누룩을 넣은 빵을 사용하는 그리스 방식을 비난하였다.

그 당시만 해도 이 불화는 양편이 얼마간 격분하여 행동한 데서 비롯된 작은 폭풍으로 취급되었으나 그리스인들과 라틴인들이 점점 더 소원해지자 사람들은 1054년의 사건이 동서의 최후 분열을 일으킨 계기라고 생각하게 되었다(1965년 12월 7일 교황 바오로 6세와 세계 총대주교 아테나고라스 1세는 마침내 1054년의 상호 파문을 철회하였다).

중세 그리스도교와 종교개혁

동방교회와의 갈등은 중세기에 서방 그리스도교가 특색있게 발전하게 한 원인이기도 하고, 그러한 특색있는 발전의 결과이기도 하다.

교황 그레고리오 7세(1073~85)는 안으로부터 교회와 교황권을 개혁하였다. 그는 교황직이 부패와 외부의 공격에 의해 위협을 받고 있을 때 교황직의 교회법적·도덕적 권위를 확립하였다.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의 재임기간(1198~1214) 동안 교황의 보편성 주장은 교회생활의 모든 수준들에서 그 정점에 달했다.

이 두 교황이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와 다른 세속 통치자들로부터 교황권을 방어하지 않으면 안되었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교회가 봉건주의에 편입되고 세속군주들이 십자군에 참여한 것은 이 주제가 변형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중세가 시작된 이후 수세기 동안 중세 그리스도교의 산물 가운데 가장 큰 영향력을 가졌던 것은 중세사상, 특히 스콜라주의 신학과 철학이다. 이 신학과 철학의 탁월한 대표자는 성 토마스 아퀴나스(1224/25~1274)였다.

스콜라주의 신학은 초기 교회의 교부들로부터 물려받은 교리 전통들을 서로 조화시키고 고대의 고전적 업적들과 연결시키려고 노력했다. 동방과 서방의 초기 교부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플라톤적 사유방식의 영향 아래서 그들의 신학을 발전시켰기 때문에, 이 신학들을 스콜라주의에 의거하여 재해석하기 위해서는 전통적인 교리내용을 플라톤주의의 형이상학적 가정들로부터 분리해내야 했다.

스콜라주의 신학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재발견을 이 목적에 가장 잘 부합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아리스토텔레스를 연구하는 이슬람 철학자들과 신학자들의 연구결과를 통해 먼저 알려졌으며, 결국 비잔티움 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아리스토텔레스의 진본 문헌들을 번역하고 연구함으로써 재발견되었다. 스콜라주의는 성서와 전통에 대한 충실성을 '자연정신'에 대한 비판적이고도 적극적인 태도와 결합시켜주었기 때문에 그리스도교의 역사와 서구문화사 모두의 지표가 된다.

그것은 보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 중세사회와 문화의 그리스도교화를 나타내는 상징일 수도 있고, 중세사회와 문화에 그리스도교가 야합했음을 나타내는 상징일 수도 있다.

스콜라주의와 중세교회 자체에 대한 후기의 해석은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을 고취시켰다. 프로테스탄트는 서구 가톨릭주의의 교회법적·신학적·성례전적 발전에 대하여 철저히 논박했다는 점에서, 중세 후기에 나타난 다양한 저항운동들과 구별된다. 처음에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자들은 교회의 교리와 생활을 안으로부터 개혁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있었으나 이와 같은 개혁은 불가능했다.

그것은 가톨릭 교회의 비타협성과 개신교 운동들의 배타성 때문이기도 했고, 정치적·문화적 상황 때문이기도 했고, 이 모든 요인들이 합해졌기 때문이기도 했다. 종교개혁을 중세신학과 경건성, 교회조직에 대한 저항의 정도에 따라 몇몇 파로 분류하는 것이 편리할 수도 있다.

마르틴 루터와 그의 운동 및 영국의 종교개혁자들은 가톨릭 교회 전통을 다룰 때 전반적으로 극히 보수적이었다.

장 칼뱅과 그의 추종자들은 덜 보수적이었다. 재세례파와 종교개혁 좌파의 다른 집단들은 보수적인 성향이 가장 적었다. 이들은 서로 큰 차이점들이 있고,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그러나 거의 모든 종교개혁운동들은 교회나 교회전통과 구별되는 성서를 종교의 권위로서 강조한다는 점, 죄사함과 관련하여 자유로운 은총의 절대성을 주장한다는 점, 하느님에게 받아들여지는 전제조건으로 업적을 전혀 도외시하고 믿음만을 강조한다는 점, 평신도가 교회의 활동과 예배에서 더 중요한 지위를 차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는 점이 공통의 특징이다.

종교개혁은 콘스탄티누스 이래 번영을 누렸던 기성 그리스도교 내부의 운동으로 출발했다.

종교개혁은 교회 내부의 분열을 염두에 두지 않았고 1,000년 이상 발전해온 그리스도교 문화의 해체를 의도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종교개혁이 완료되었을 때 교회와 문화는 철저하게 변형되었다. 이와 같은 변형은 부분적으로 종교개혁의 결과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종교개혁의 원인이기도 했다. 지리상의 대발견, 자본주의 경제의 태동, 과학시대의 동틈, 르네상스의 문화 등 이 모든 요인들과 그밖의 다른 요인들이 '중세적 종합'을 붕괴시키도록 도왔다.

그러나 이 요인들 가운데 종교개혁은 가장 중요한 요인들 가운데 하나였고, 그리스도교 역사에서도 확실하게 가장 의미있는 요인이었다. 왜냐하면 비록 의도하지는 않았다 할지라도 종교개혁의 사실상의 결과는 그리스도교의 분열과 서구의 세속화였기 때문이다. 개신교 못지않게 가톨릭 교회주의도 이 결과들이 함축하고 있는 의미에 자신의 역사적 형태를 맞추려고 노력하며 근대세계에서 역사적으로 발전해왔다.

4세기 이래 서방에서 발전해온 기성 그리스도교가 종교개혁 이후 모든 곳에서 일시에 끝난 것은 아니지만 마침내 그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근대 그리스도교

역설적이게도 낡은 의미의 '기성 그리스도교'의 종언은 교회역사상 가장 빠르고 가장 광범위한 팽창을 낳았다.

아메리카 대륙의 그리스도교화와 아시아·아프리카·오스트레일리아의 복음화는 '에큐메니컬'이라는 그리스도교적 용어에 처음으로 지리적 실체를 부여했다. 그러나 지리적 범위와 교인수의 증가가 반드시 교회의 영향력 강화와 일치하는 것은 아니었다. 근대의 전기간에 걸쳐 교회는 지속적으로 힘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리스도교는 여러 전선들에서 후퇴했고, 정치적으로나 지적으로 많은 특권과 권위를 상실했다.

근대 서구 역사가 형성되던 시기, 대략 16세기초부터 18세기 중엽까지 그리스도교는 수많은 문화적·정치적 팽창운동들에 가담했다.

신세계의 탐험가들을 바로 뒤따른 사람들은 선교사들이었다. 탐험가가 동시에 선교사는 아니었지만, 개신교와 가톨릭 성직자들은 그당시 정치·문학·과학 부문에서 탁월한 인물들이었다. 계몽주의와 합리주의가 특히 17~18세기의 많은 지식인들을 교회로부터 떨어져나가게 했지만, 이 사람들이 그리스도교 신앙과 생활의 전통적인 형식과 결별했어도 예수라는 인물이나 성서의 가르침에 대해서는 보통 신실성을 유지했다.

대표적인 계몽주의자들은 종교적 편협성의 위험을 보여주는 예로 종교개혁의 신학적 갈등과 그 갈등에 따른 정치적 갈등을 말하면서, 점차적으로 국교폐지, 관용, 종교의 자유를 대부분의 서구 국가들에 도입했다. 이 운동을 통해 그들은 교리의 진리에 대해 무관심하기 때문이 아니라 개인의 신앙을 자유롭게 결정하는 일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종교의 자유를 옹호하는 개개인의 그리스도교인들과 그리스도교인 집단들과 연합하게 되었다.

17~18세기의 교회에서 나타난 그리스도교 신앙과 생활의 모습은 그당시의 정신을 반영하거나 저항한 것이다.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이 가톨릭 교회 안의 개혁 움직임 일부를 흡수했지만, 교회의 신학과 도덕은 가톨릭 교회의 반종교개혁을 통해 크게 수정되었다. 교황은 국가 단위의 가톨릭 교회를 건립하려는 여러 국가들의 시도를 분쇄하는 한편 종교개혁의 역사로부터 교훈을 배우고 그때 저지른 실수들을 피하기 위해 애썼다. 반대로 개신교는 로마로부터 분립했다고 해서 개신교가 비난해 마지않았던 가톨릭 교회의 많은 경향들로부터 반드시 면역되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다.

17세기에 루터교와 개혁교회에서 발전된 정통주의 교의학은 종교개혁자들이 중세 스콜라주의에 대해 공격을 가했음에도 불구하고, 중세 스콜라주의의 많은 특징들을 보여준다. 선행을 희생시키면서까지 교리를 지나치게 강조한 정통주의를 부분적으로 보완하고자 한 경건주의는 개신교 신자들에게 신앙과 그 목적에 대해 더 심각하게 생각하도록 설교했다.

그러나 경건주의의 설교가 타당한 것이었다 하더라도, 경건주의가 강조한 주관성은 뜻밖에도 그 적들의 수중에서 놀아났다. 경건주의적 주관성은 계몽주의와 합리주의가 전통적인 그리스도교 신앙의 기초를 흔들어놓도록 도왔던 것이다.

계몽주의 정신과 손잡고 진행된 18~20세기의 혁명들은 이처럼 그리스도교의 밑바닥을 무너뜨리는 과정을 촉진시켰다. 과거에 유럽 식민지였던 아시아·아프리카의 가톨릭 교회는 그들 자신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적들에 의해 구체제의 일부로 규정되었고, 구체제와 더불어 거의 소멸되고 말았다.

과학의 발견들이 증가함에 따라 이 발견들은 이제까지 소중하게 여겨져왔고, 조직화된 그리스도교의 여러 지도자들이 열렬하게 지지하는 창조교리에 관한 옛 개념들과 충돌하게 되었다. 근대 학문의 비판적 방법이 전통적인 그리스도교 사상을 자주 공격했지만 그것은 오히려 그리스도교 신앙의 주요문서들, 곧 성서와 교부 문서들, 종교개혁자들의 저작들이 활발히 편찬되도록 했다.

또 교회의 역사에 대해 전례없는 관심을 갖게 했다.

19세기는 가톨릭 교회와 개신교 선교의 역사에서 위대한 세기로 일컬어져왔다. 교회에 대한 비판자들이 그리스도교를 공격한 덕분에 교회 안에서 새로운 신앙의 변증가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이 변증가들은 근대의 새로운 철학 및 과학과 연결시켜 신앙을 창조적으로 재해석했다. 20세기에는 그리스도교의 대의에 대한 또다른 도전들이 공산주의, 새롭게 부흥하는 세계종교들, 무관심의 형태로 나타났다. 이 때문에 교회와 국가의 관계, 교회의 선교 프로그램들은 재고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리고 20세기에는 교회 내의 분열을 치유하려는 새로운 노력이 나타나기도 했다. 에큐메니컬 운동은 개신교와 영국성공회로부터 시작되었지만 마침내 동방정교회의 일부를 포함하게 되었고, 특히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65년) 이래로 가톨릭 교회의 주목을 받고 공감을 얻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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