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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POP의 '무서운' 다양성

등록 2000-08-01 15:00 수정 2020-05-02 19:21

3차 개방으로 빗장 열린 일본 대중음악… 엄청난 음반시장을 떠받치는 힘은 무엇인가

지난 6월 말 발표된 일본 대중문화개방 3차 개방 조처는 국내 대중음악에 큰 영향을 끼칠 만한 내용을 담고 있다. 2천석 이상의 공연장에서 일본어로 된 노래를 부를 수 있도록 허용한 것이다. 1, 2차 개방 이후 클럽 등의 소규모 공연장이나 대중음악 페스티벌에서 간간이 일본의 ‘언더’밴드들을 만날 수 있었지만 이제 잠실 올림픽경기장 같은 대규모 공연장에서 일본 주류 가수들의 인기곡을 들을 수 있게 됐다.

200만장 넘기는 가수가 열서너명

여전히 음반시장은 빗장이 걸려 있지만 인터넷을 통해 노래를 다운받고 음반을 구입하는 것은 손쉬운 일이 됐기 때문에 이번 조처는 일본 대중음악의 전면개방에 가깝다. 발표된 지 두달이 지나면서 ‘오버그라운드’에서 활동하는 일본 대형가수들의 국내 상륙이 시작되고 있다. 22년 동안 활동하면서 일본뿐 아니라 동남아에서도 공연 때면 6만∼7만명의 관객을 모으는 남성 듀오 ‘차게 앤 아스카’가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에서 8월26일과 27일 첫 테이프를 끊는다. 9월에는 국내 팬사이트만도 수십개에 이르는 아이돌 스타 아무로 나미에가 올림픽 주경기장에서 공연할 예정이다.

이들의 음악은 장르적으로 교집합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흔히 함께 묶어 ‘J-POP’이라고 부른다. 따지고 보면 일본 대중음악이 개방되지 않았던 시절에도 J-POP은 우리에게 그다지 낯선 음악이 아니었다. 한 예로 표절시비가 붙었던 국내 댄스곡의 대부분은 J-POP 곡들을 베꼈다는 혐의를 받는다. 표절까지 가지 않더라도 국내 대중음악의 큰 두 갈래인 댄스와 발라드의 인기곡들이 J-POP의 색깔을 많이 띠고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평이다.

J-POP은 일본 스타일의 팝음악, 즉 서구의 팝음악을 일본화시켜 발전된 일본의 대중음악이다. 디즈니나 다른 서양의 애니메이션과 구별되는 일본 애니메이션을 ‘아니메’라고 부르듯 일본 대중음악에만 독특하게 붙이는 용어다. 아니메와 J-POP이라는 용어의 발단에는 작은 차이가 있다. 아니메는 외국인들이 붙인 일본 애니메이션 일반을 지칭하는 말이지만, J-POP은 일본인 스스로 만든 일본 대중음악의 어떤 부분을 가리키는 말이다. J-POP이라는 용어는 일본 대중음악이 큰 변화를 겪던 70년대 만들어진 신조어다. 시장을 휩쓸던 엔카의 위력이 약해지고, 서양에서 들어온 팝음악에 일본색에 의해 화학적 변화를 일으키면서 대중적으로 큰 인기를 얻기 시작하자 이를 가리키는 현대적인 일본대중음악을 J-POP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엔카라는 고전적인 의미의 일본대중음악, 그리고 ‘안그라’라고 하는 언더그라운드 록이나 포크 음악과 구별되는 J-POP이 가지는 일본 시장 규모는 엄청나다. 한 예로 지난해 J-POP의 신성으로 떠오른 17살의 여가수 우타다 히카루의 데뷔 앨범 는 일본에서 840만장이 팔렸다. 같은 해 국내 최고를 기록한 조성모의 (120만장)에 비해 일곱배에 달한다. 일본과 한국의 인구 차이를 감안한다면 세배 반에 이르는 규모다. 이뿐만 아니라 한해 200만장 이상의 판매고를 기록하는 가수가 열서너명에 이른다. 단일 앨범으로 국내에서 200만장 기록을 넘겼던 음반은 김건모의 뿐이다. 일본 음악시장에서 활성화되어 있는 싱글음반의 판매량까지 포함한다면 그 판매량은 거의 천문학적인 수준이다. 현재 일본 음반시장의 규모는 약 6조억원. 미국에 이어 두 번째로 큰 시장이고 인구 대비 세계최고다.

J-POP의 주력은 댄스가 아니다!

일본 대중음악 또는 J-POP에 관해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사실로 J-POP이 아이돌 스타 중심의 댄스음악이라는 오해가 있다. 90년대 중반 이후 기획사가 만든 10대의 보이그룹, 걸그룹이 바람을 일으키면서 국내에서는 일본음악이 바로 댄스음악이라는 식으로 이해되고 있지만 실상 J-POP의 특징은 그 다양성에 있다. 물론 일본에서 아직까지 아이돌 스타의 위력은 대단하다. 일본의 H.O.T라고 할 수 있는 스맵이나 일본의 S.E.S 또는 핑클이라고 할 수 있는 스피드는 텔레비전 쇼와 10대들의 잡지 표지를 장식하며 팬 군단을 몰고 다닌다. 그러나 일본의 조용필이라고 비유할 만한 포크록 듀오 차게 앤 아스카 역시 공연 때면 수십만 관중을 운집시킨다.
미국의 빌보드 차트처럼 일본에서 권위를 인정받고 있는 오리콘 차트 7월24치를 보자. 뉴 엔트리로 1위에 오른 곡은 라는 록음악으로 남성 록밴드 B’z가 불렀다. 이들은 1988년 데뷔한 ‘노장’ 뮤지션으로 그동안 정상자리를 놓치지 않으면서 싱글 음반만 3천만장 가까이 팔아치웠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들은 텔레비전에 일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가수로 유명하다는 사실이다. 텔레비전 순위 프로그램 출연으로 앨범 판매에 사활을 거는 국내 대중음악 시장과 극명한 차이를 이룬다. B’z 아래에는 출산 뒤 활동을 재개한 아무로 나미에와 힙합 그룹 드래곤 애쉬, R&B 가수 우타다 히카루, 10대 아이돌 댄스 그룹 기니기니 기즈 등이 10위 안에 들어 있다.
“J-POP에서 독보적인 가수라는 말은 성립되지 않는다. 록음악, R&B, 테크노, 댄스 음악 등 장르가 다양하고 장르마다 정상급의 가수들이 수백만장의 음반 판매고를 기록하기 때문에 우리나라처럼 가수 한둘이 무림천하에 군림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국내 케이블 음악채널에서 J-POP을 소개하고 있는 일본 대중음악 평론가 신용현씨의 말이다. 이런 다양성 가운데서도 90년대 이후의 두드러진 특징으로는 자신들의 음악을 직접 만드는 록밴드들의 강세를 들 수 있다. 90년대 중반부터 우리나라에서도 팬클럽이 만들어지는 등 큰 인기를 모았던 비주얼 록그룹 X-JAPAN은 록음악의 광범위한 인기몰이에 도화선이 된 그룹이다. X-JAPAN이 성공에 이르는 과정은 오늘날 밴드들도 따라가는 길이다. 이들은 고등학교 때부터 음악친구들끼리 거리에서 연주하다가 일본 록음악의 텃밭인 라이브 하우스로 자리를 옮겼다. 이 당시 자신들이 만든 인디레이블 ‘엑스터시’에서 찍어낸 첫 앨범 1만장이 1주일 만에 매진되면서 메이저 음반사인 소니와 손잡게 됐고 이를 통해 두 번째 앨범에 이르러 슈퍼스타의 반열에 오른 것이다. 여전히 인기 높은 비주얼 록 장르에서 정상을 달리고 있는 글레이나 라캉시엘 같은 그룹도 이와 비슷한 길을 걸어왔다. 비주얼 록은 아니지만 스피츠나 미스터 칠드런 같은 록그룹 역시 언더그라운드를 거쳐 오버그라운드로 올라오며 10년 동안 정상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대표적인 뮤지션이다. 단순한 싱어가 아니라 싱어 송 라이터를 선호하는 현상은 록뿐만 아니라 다른 음악장르에서도 늘어나고 있다. 신용현씨는 “지난해 우타다 히카루의 경이적인 성공을 만든 요인에는 작사, 작곡, 노래 모든 것을 다한다는 독립적인 이미지가 크게 작용했다”면서 “가수들이 직접 만든 곡에 자신의 메시지를 담는 것이 전체 음악계의 큰 흐름으로 자리잡고 있다”고 진단했다.

아이돌 스타, 탁월한 기획상품

80년대보다 시장 장악력이 떨어지기는 했지만 기획상품인 10대 아이돌 스타는 여전히 J-POP의 큰 축을 떠받치고 있다. 아이돌 스타의 탄생과 성공 전략은 한국과 일본 대중음악산업이 매우 흡사하다. 수려한 외모가 그 중심에 놓이고 기획자에 의해 훈련받은 가수들은 텔레비전의 각종 쇼 프로그램에 얼굴을 내밀면서 성공의 승부를 건다는 점에서 그렇다. 90년대 일본의 아이돌 스타의 돌풍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가수가 이번에 내한하는 아무로 나미에와 미다스의 손으로 불리는 제작자 고무로 데쓰야다. 10대 초반부터 걸 그룹에서 활동하던 아무로 나미에는 17살 때 고무로 데쓰야를 만나면서 96년 최고의 히트 상품이 됐고 긴 생머리와 미니 스커트, 롱 부츠는 젊은 여성들의 유니폼이 될 정도로 요란한 신드롬을 일으켰다. ‘글로브’라는 댄스그룹의 리더로도 활동하는 고무로는 자신의 이름 이니셜을 딴 ‘TK 패밀리’, 즉 그의 휘하에 소속된 가수 군단을 이끌고 있다. 그는 무명가수를 발굴해 그들에게 직접 만든 곡을 주고 음반제작에서 공연까지 필요한 세부사항들을 직접 지시한다. 고무로는 가라오케에서 노래하고 클럽에서 춤추는 90년대 젊은이들의 생활습관을 간파해 따라 부르기 쉽고 춤추기 좋은 곡들로 승부를 본다. 또한 방송을 통해 가수를 홍보하고 가라오케에서 인기곡을 띄우는 방법으로 스타를 만드는 전형적인 방식을 택했다. 이러한 고무로의 방식은 우리나라의 음반기획자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래서 텔레비전 방송 중심과 댄스음악 위주의 국내 대중음악을 비판할 때 고무로 데쓰야가 등장하기도 하는데 이에 대해 의 지은이 김봉석씨의 생각은 조금 다르다.
“고무로 데쓰야가 철저하게 상업적인 음악을 해왔지만 주류 음악의 테두리 안에서 변화, 발전을 추구해왔다는 점은 높이 평가할 만한 부분”이라고 평가한다. 김씨는 "한명의 여성 보컬과 DJ, 세명의 댄서라는 독특한 편성을 실험한 그룹 TRF의 성공이나 아무로 나미에가 유로테크노 댄스에서 R&B 가수로 변신하며 노래 가사 속에 일본 여성들의 성장과정에 따르는 감수성의 변화를 포착해낸 것은 J-POP의 상업성에 질적 성숙을 보태준 예"라고 덧붙인다.

한국시장 지배는 불가능한 일

이제 서서히 상륙을 준비하는 J-POP이 한국의 대중음악시장을 장악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한 전문가들의 의견은 낙관적이지 않다. 일본계 음반사인 포니 케년 코리아의 이자묵 대표는 “초기에는 소비자들의 호기심 때문에 많으면 전체 시장의 15%까지도 점유할 수 있겠지만 시장이 안정되면 7% 미만으로 낮아질 것”으로 예측한다. 신용현씨 역시 비슷한 수치를 예측하면서 “대중음악이 생활 속에 깊숙이 침투하기 위해서는 듣는 이의 심성을 자극할 수 있는 노래말이 중요한 데 J-POP은 서구의 팝음악과 마찬가지로 이 부분이 결여돼 있어 시장에 큰 파장을 일으키는 성공을 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진단한다. 다만 아직까지는 특별한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 주요 음반사들이 한국어 버전 음반을 만들어 지리적 조건이 유리한 한국시장에서 일본시장과 동시에 전면적인 홍보를 한다면 의외의 성공도 가능할 것이라고 내다본다.
김은형 기자 dmsgud@hani.co.kr









인터뷰/ 내한공연하는 자게 앤 아스카


“일본어 음반 팔게 해줘요”


“다른 해외공연과 달리 특별한 사명감과 불안감이 동시에 든다….” “우리는 전후세대이고, 노래는 정치와 전혀 다른 것이어서….” “지난 역사의 모든 일을 부정해서는 안 된다….”
8월26∼27일 서울 잠실 올림픽 공원 체조경기장에서 일본 대중문화 3차 개방 이후 일본 대중가수로는 처음으로 대형 단독콘서트를 여는 자게 앤 아스카는 한·일 과거사를 ‘지나치게’ 의식했다. 지난 7월25일 도쿄의 한 호텔에서 열린 한·일 공동기자회견에서 대부분의 답변을 의례적인 정치적 수사로 시작하자 한 기자가 “우리도 전후 세대여서 과거사에 대한 문제에 크게 민감해하지 않는다. 한국에서 관심갖는 것은 일본 대중음악이 미칠 산업적 여파다”라고 설명해야 할 정도였다. 어쨌든 자게 앤 아스카는 “상업적 이유나 음반 판매가 목적이라면 성사되기 힘들었을 공연으로 시민단체와 한국 정부의 지원으로 가능했다”며 이번 공연의 ‘역사적 의미’를 거듭 강조했다. 아사히, 요미우리, 니혼게이자이, NHK, 후지텔레비전 등 100여명에 이르는 일본 취재진이 자게 앤 아스카보다 한국 기자단의 반응을 취재하는 데 더 열심인 풍경은 왠지 희극적이었다.
42살의 동갑내기 듀엣인 자게 앤 아스카는 일본적인 포크록을 만들어 22년째 정상급 인기를 누리고 있는 관록의 뮤지션이다. 일본 애니메이션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가 뮤직비디오로는 유일하게 이들의 노래 를 애니메이션으로 만들기도 했다. 이번 공연은 수익금이 한국 불우여성을 돕는 여성기금으로 전액 기탁되는 자선 콘서트로 열리며, 지금까지 일본팬 4천여명이 한국 관광을 겸한 콘서트 관람을 신청했다.
자게 앤 아스카는 3차 개방에서도 일본어 음반 발매가 여전히 풀리지 않은 것을 무척 안타까워했다. 음반 발매가 병행되지 않는 해외공연은 여러 가지 면에서 실효를 보기 힘든 게 사실이다. 이들은 “한국팬들 가운데 일본어로 된 원곡을 듣고 싶어하는 이들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판매가 빨리 허용됐으면 좋겠다”며 “올 크리스마스쯤이면 발매가 가능할 것으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대신, 공연에 앞서 막시 프리스트, 보이 조지 등 유럽 뮤지션과 함께 영어로 불러 96년 발매했던 앨범 를 국내에서 새로 발매한다.
국내 대중음악계가 산업적 차원에서 일본 대중음악의 완전개방을 걱정하고 있는 것에 대해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들어보지 못한 음악이라 일시적인 붐은 만들어질지 몰라도 자국어로 노래를 부르고 듣고 싶어하는 욕구 때문에 순간의 붐은 곧 정리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들의 소속 프로덕션인 리얼캐스트의 와타나베 데쓰지 사장은 “많은 일본의 프로덕션들이 한국 시장에 큰 기대를 걸고 있는 게 사실”이라며 “그러나 한국 인구는 일본의 3분의 1에 불과한 게 객관적인 시장 조건이고, 외국에 음악을 들고 나가는 데에는 커다란 위험부담이 따른다는 점에서 지나치게 낙관적이다”라고 말했다.
공연문의 02-3665-8147∼9.
도쿄=이성욱 기자/ 한겨레 문화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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