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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세계사

올리버 크롬웰

청교도혁명으로 공화정을 수립한 영국의 혁명가

[ Oliver Cromwell ]

출생 - 사망 1599.4.25. ~ 1658.9.3.

1640년부터 1660년까지, 찰스 1세가 ‘장기 의회’를 소집할 때부터 왕정복고가 이루어지기까지, 20년 동안 영국에서 벌어진 ‘청교도 혁명’은 역사가들의 고민거리다. 한편으로 보면 이는 유럽의 어느 나라보다도 빠르게 이루어진 시민혁명이며, 근대 민주주의와 국민국가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유럽의 나라들이 이미 치르고 넘어갔던 종교전쟁의 늦깎이였다. 그리고 찰스 1세와 함께 이 시기를 대표하는 인물이 된 올리버 크롬웰에 대한 평가도 크게 엇갈린다. 그는 경건하고 사심 없는 혁명가였는가, 잔혹하고 광신적인 독재자였는가?

왕과 의회, 정면 충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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튜더 왕조의 엘리자베스 1세, 그녀의 치세 기간에 잉글랜드는 유럽 대륙의 강국들보다 한발 뒤처져 있던 처지에서 벗어나 강대국으로 가는 길에 접어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자손을 남기지 않고 죽었으며, 따라서 차기 왕위는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스튜어트(제임스 6세)에게 돌아가게 되었다.

제임스 스튜어트의 어머니 메리 1세(메리 스튜어트)는 외가 쪽으로 헨리 7세의 피를 받았기 때문에 서자 출신 논란에 시달리던 엘리자베스 1세보다 잉글랜드 왕위 계승 서열이 높았다. 이로 인해 엘리자베스 1세로부터 죽임을 당했지만, 결국 그녀의 자식 대에 튜더 가로부터 잉글랜드 왕위를 넘겨받은 셈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엘리자베스의 부왕 헨리 8세와 플랜태저넷 가의 에드워드 1세가 그토록 염원했던 대로,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웨일스의 지배권이 한 사람의 왕에 의해 통일되는 것을 뜻하기도 했다. 1603년에 잉글랜드 왕 제임스 1세로서 즉위한 제임스 스튜어트는 젊어서부터 열렬한 왕권신수설 지지자였다.

[자유로운 군주국의 참된 법]이라는 책까지 썼던 그는 왕이란 신에게서 지배권을 받은 존재이므로 인간이 만든 어떤 법률의 구속도 받지 않는다는 주장을 내세웠다. 그리고 스코틀랜드를 그런 식으로 통치해왔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의회의 권한이 강력했던 잉글랜드의 왕이 되자 마찰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엘리자베스 시절에는 왕권옹호파로 유명했던 에드워드 코크가 “새로운 왕은 잉글랜드의 사정에 어두우니 잉글랜드의 법과 관습, 의회의 의사를 존중하며 통치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제임스 1세는 “어떻게 왕이 법률 아래 있을 수 있다는 말인가?”라고 외쳤다. 그러자 코크는 “왕이란 모든 인간의 위에 있지만, 신과 법률의 아래에 있습니다”고 대꾸했고, 결국 감옥에 갇히고 말지만 왕권과 의회권의 대립은 이로써 시작된 셈이었다.

엘리자베스 1세 시절에 진행된 많은 사업으로 잉글랜드의 재정은 방만해져 있었는데, 따라서 왕이 새로운 징세를 자주 추진하자 대헌장에 따라 징세 동의권을 갖고 있었던 의회와는 충돌이 잦아졌다. 게다가 종교 문제까지 겹쳤다. 제임스 1세는 영국 국교회를 강력히 옹호하며 가톨릭과 기타 개신교파를 탄압하는 정책을 취했으며, 따라서 국교회 이외의 교파들의 강한 반발을 받았다. 1605년에는 가이 포크스를 비롯한 가톨릭교도들이 왕을 암살하려고 국회에 폭약을 설치했다가 발각된 ‘화약음모사건(가이 포크스 사건)’이 일어났고, 1620년에는 청교도들이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아메리카로 집단 망명했다. 그리고 장로교회가 지배적이던 스코틀랜드에서도 불만이 누적되다가 다음 왕인 찰스 1세 때 반란으로 불거져 나온다.

절대왕권을 수립하려던 제임스 1세(왼쪽)와 그의 후계자 찰스 1세(오른쪽)

제임스 1세는 1625년에 병사했다. 암살되었다는 설도 있지만, 불확실하다. 왕위는 그의 아들 찰스 1세에게 전해졌는데, 그는 아버지를 본받아 전제왕권을 추구했으며 당연히 의회와 대립했다. 1628년에 에드워드 코크가 기초한 ‘권리 청원’이 제출되자, 찰스 1세는 이를 일단 받아들였지만 이듬해에 의회를 해산하고는 이후 11년 동안이나 의회를 열지 않으며 자신의 뜻대로 만든 특별법에 따라 통치하는 독재적인 모습을 보였다. 또한 찰스 1세는 프랑스 출신의 왕비(헨리에타 마리아, 그녀는 앙리 4세의 딸이자 루이 14세의 숙모였다)를 얻고, 국교회에 속했으나 가톨릭과 친밀한 고교회파인 윌리엄 로드를 캔터베리 대주교로 임명하면서 “잉글랜드를 가톨릭교회 세상으로 만들려고 한다”는 의심을 사게 되었다. 그리하여 불만이 쌓이고 겹치는 가운데 1639년에 스코틀랜드의 장로교도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전쟁 비용을 댈 도리가 없던 찰스 1세는 마지못해 11년 만에 의회의 문을 연다. 그리고 3주 만에 다시 해산시켜 버렸지만 그 해 가을에 다시 열었고, 이 의회는 1653년에야 폐회되는 ‘장기 의회’로 역사에 남게 된다(그 직전의 3개월짜리 의회는 ‘단기 의회’로 불렸다).

장기 의회는 개원하자마자 찰스 1세의 측근인 윌리엄 로드와 스트래퍼드 백작을 체포하고 “의회의 개폐를 국왕의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법률을 제정하는 등 그동안 쌓인 울분을 마음껏 풀기 시작했다. 아일랜드에서 인기가 있던 스트래퍼드가 의회에 의해 체포되고 일방적으로 처형되자 아일랜드에서는 반란이 일어났고, 이것이 찰스 1세의 배후 조종에 의한 것이 아닌지 의심한 의회는 왕을 더욱 불신하게 되었다. 마침내 1642년, 의회파와 왕당파는 제각기 병력을 소집하고 상대방에게 무기를 겨눈다. 휴전과 개전을 거듭하며 1651년까지 세 차례에 걸쳐 일어나게 될 영국 내전의 시작이었다.

크롬웰, 의회파의 구세주가 되다

내전은 처음에 왕당파 쪽에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말을 소유하고 있는 귀족의 다수가 국왕 편에 섰고, 그들의 기동력을 의회군이 당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의회군은 향토 민병대가 대부분이다 보니 자기 사는 지역을 벗어난 곳에서는 애써 싸우려 들지 않았다. 이런 문제점을 꿰뚫어보고, 대안을 제시하여 전세를 역전시킨 사람이 바로 크롬웰이었다.

크롬웰은 1599년 4월 25일에 잉글랜드 동부의 헌팅던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젠트리(영국의 토착 유력자층으로, 귀족과 평민의 중간적 존재)였으며 독실한 청교도이기도 했다. 케임브리지 대학을 나와 법률 공부를 했으나 한동안은 고향에서 지주로 지극히 평범한 삶을 살았던 듯, 40세 이전의 삶은 거의 흔적이 남아 있지 않다. 40대에 들어선 다음에야 역사에 이름을 새기기 시작하는데, 1640년에 단기 의회와 장기 의회의 의원으로 선출된 것이 그 시작이었다. 내전이 시작되자 그는 고향으로 달려가 60명의 기병대를 조직해서 의회군에 가담했다. 그리고 첫 전투에서 패배 직전의 의회군을 구원하는 수훈을 세운 그는 의회군이 내전에서 이기려면 기병대의 확충, 각개 방위 수준을 넘어서는 연합군의 조직, 그리고 병사들의 규율과 사기의 진작이 필요함을 지적했으며, 이를 실현하고자 백방으로 노력했다.

전장으로 나가는 크롬웰(왼쪽), 신 모범군 병사들이 휴대했던 병사용 교리서(오른쪽)

그는 자신이 지휘하는 부대를 특별히 선발하고 조련했는데, 기병 위주의 편성과 무서운 공격력 때문에 ‘철기대(鐵騎隊)’라는 별명을 얻었다. 철기대가 승승장구하는 모습을 보이자 크롬웰은 1645년부터는 의회군의 전체 기병대를 지휘하게 되었는데, 철기대를 육성한 방식을 그대로 적용하여 병력을 재편성, ‘신 모범군(New Model Army)’이라는 이름으로 명성을 떨치게 했다. 신 모범군이 강력했던 비결은 전문성 강화와 철저한 기율, 그리고 종교적 열정을 이용한 높은 사기 유지였다. 크롬웰은 전문직업군인이 없었던 당시 영국에서 귀족이거나 연장자라는 이유로 장교가 된 사람들을 전쟁 경험이 많고 지휘능력이 있는 사람들로 교체했고, 사병들에게도 별도의 군복을 입고 군기와 군가를 갖추게 했다. 그리고 최고의 장비와 최고의 봉급을 어김없이 지급해 주었다. 한편 당시만 해도 반쯤은 폭도와 다름없었던 병사들에게 절대로 양민을 약탈하거나 음주, 도박 등을 하지 않도록 강조하며 어기는 사람은 가혹하게 처벌했다. 그리고 병사들마다 기도서와 찬송가를 늘 들고 다니면서 전투 중에도 틈만 나면 기도회를 갖도록 했다. 크롬웰의 병사들 대부분은 “찰스 왕은 사탄의 부하이며 왕당파를 타도하는 것은 신이 내린 명령이다” “세상의 끝이 다가왔다. 곧 예수께서 재림하실 것이며, 참된 믿음을 갖지 못한 사람들은 심판을 받을 것이다” 등의 광신적 믿음을 주입 받고 있었다.

이처럼 물적으로 우수하고 정신적으로 물불을 안 가리는 군대는 당연히 무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크롬웰의 탁월한 지휘가 무적의 신화를 쌓는 마지막 벽돌이 되었다. 그는 자신의 군대를 누구보다 빠르고 강하게 만들었지만, 전장에서는 유연성 또한 필요함도 알았다. 그래서 돌격 도중에라도 언제든 방향을 바꾸고, 진형을 다시 짤 수 있도록 했으며, 기병들에게 권총을 채워 주어 적이 생각지 못한 방향에서 덤벼도 즉시 대응할 수 있도록 했다. 실로 불세출의 명장이라고 할 수 있었던 크롬웰, 이런 사람이 청교도 혁명을 만나지 않았으면 평범한 시골 지주로 늙었을지 모른다. 반대로 이런 사람이 없었다면 청교도 혁명은 의회파의 철저한 패배로 끝났을지도 모른다. 이것은 신의 뜻일까? 역사의 묘미일까?

“왕을 처형하라!”

찰스 1세의 재판

그러나 군인과 종교인의 공통점은 타협을 싫어한다는 점이다. 신 모범군의 활약에 힘입어 의회파는 내전 중기부터 승세를 확실히 잡았지만, 자신들이 시작한 이 내전을 어떻게 끝내야 할지 의견이 엇갈렸다.이대로 내전을 계속 하다가는 외국의 침략을 불러올 수 있다는 주장, 찰스 1세를 타도하고 나면 대안이 무엇이냐는 주장 등이 적당한 선에서 국왕과 타협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이루어 강경파와 대립했다.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크롬웰은 마침내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다. 1648년 12월, 그의 병사들은 의회를 기습하여 온건파 의원 약 2백 명을 내쫓거나 감옥에 가두었다. 그리고 크롬웰을 지지하는 삼분의 일 정도의 의원만이 남아서 의회를 운영했는데, 이를 ‘잔부(殘部) 의회’라고 부른다. 잔부 의회는 크롬웰의 꼭두각시로서 포로로 잡아놓고 있던 찰스 1세의 재판을 추진했다. 말이 재판이지 왕을 처형하기 위한 요식행위였던 재판에서 찰스 1세는 “짐은 적법한 국왕이며 의회에는 짐을 심판할 권리가 없다”는 이유로 재판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법률 이론상 찰스 1세의 그런 주장은 일리가 있었으나, “우리는 그의 머리를 왕관을 씌운 채로 베어버려야 한다!”는 크롬웰의 말이 바로 판결문이나 마찬가지였다. 1649년 1월 30일, 찰스 1세의 목에 도끼가 내리쳐졌다. 그의 할머니인 메리 스튜어트를 비롯해서 처형당한 군주는 전에도 있었으나, 자국민의 손으로 적법하게 즉위한 국왕을 처형하는 일은 사상 최초였다. 전 유럽의 왕실이 이 엄청난 사건에 전율했다.

어느 전설에 따르면 처형이 끝나고 군중들이 흩어졌을 때, 얼굴을 숨긴 크롬웰이 몰래 찰스 1세의 시체에 다가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미안하오. 하지만 우리의 이상을 위해서는 어쩔 수가 없었소.” 크롬웰로서도 찰스 1세가 처형을 면치 못할 만큼 사악하지는 않으며, 법적인 문제도 있음을 알았으나 수백년 동안 내려온 왕정의 전통을 쳐부수고 공화국을 수립하기 위해서는 왕의 처형이라는 극약처방이 필요하다고 믿었다는 해석이 뒤따른다. 하지만 이 전설은 전설일 뿐이며, 실제의 크롬웰은 자기 병사들에게 주입시킨 그대로의 광신적 믿음에 사로잡혀 찰스 1세를 죽이는 일을 악마의 끄나풀을 없애는 일로 당연시했다는 해석도 있다.

영웅인가, 악당인가?

이 전설을 둘러싼 이견처럼, 그 이후의 크롬웰의 행동을 놓고 역사가들은 영웅과 악당의 두 가지 해석을 내세우며 격론을 벌인다. 찰스 1세의 목을 벤 뒤 측근들이 대신 왕위에 앉으라고 부추겼으나 단호히 거절했다는 일화가 있는가 하면, 크롬웰은 사실 왕이 되고 싶었지만 주변 여건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을 뿐이라는 분석도 있다. 또한 크롬웰은 내란 종식과 왕의 처형 후에도 반란을 멈추지 않던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를 누비며 그들을 모조리 제압하고 오랜만에 브리튼 전역에 평화를 가져왔는데, 이 과정에서 지나치게 잔인무도한 짓을 했다고 한다. 가령 1649년 8월에는 아일랜드의 드로이다를 점령하고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2천 명을 학살해 버렸다. 갓난아이도 살려 두지 않았으며, 당시 주민들이 교회로 대피하자 크롬웰은 교회의 문을 잠그고 불태워 버리게 했다고 한다. 따라서 그를 피에 굶주린 광신적인 학살자라고 비난하기도 하지만, 이미 무장봉기가 장기화된 상태에서 무기를 내려놓게 하려면 그러한 충격과 공포로 전의를 상실하게 만들 필요가 있었다고 보기도 한다.

아무튼 평화가 회복되자, 크롬웰은 공화국을 선포한 다음 ‘호국경’에 취임하여 사실상 독재적으로 브리튼을 통치했다. 고대 로마의 호민관에서 따온 호국경은 오늘날의 대통령과 비슷한 지위였으며, 따라서 그를 “영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부르는 경우도 있다. 호국경으로서의 그의 통치 역시 평가가 엇갈린다. 그는 1653년 4월에 1648년에 했던 것처럼 의회에 군대를 투입했다. 그리고 찰스 1세가 그랬듯 의회를 폐쇄해 버렸다. 찰스 1세가 의회를 무시하고 독재를 한다고 내전까지 일으켜서 그를 없애고 왕정을 폐지했는데, 크롬웰이 똑같은 짓을 한다면 왕정과 공화정의 차이가 무엇이란 말인가? 이런 회의와 비판에 대해 크롬웰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당시의 의회는 이미 귀족과 젠트리들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모여 앉은 클럽에 지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가령 크롬웰이 스코틀랜드로 원정 가 있는 사이에 자신들의 이익만 고려한 ‘항해조례’를 만들어 네덜란드와의 전쟁을 초래하는 등 국익에 해를 끼치는 일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따라서 폐쇄는 불가피한 점이 없지 않았다고 한다.

의회를 폐쇄하는 크롬웰

하지만 그렇다면 그의 강력한 권력으로 ‘기득권’ 체제 자체를 개혁하려는 움직임을 보여야 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잉글랜드의 사회체제는 청교도 혁명 전이나 후나 그대로였다. 크롬웰은 “귀족, 젠트리, 자유농민이라는 계급 구성은 공화국의 주춧돌이다”라는 말까지 했다. 소시민의 권리 신장과 계급 평등을 주장했던 수평파는 철저히 탄압되었다. 따라서 봉건 귀족 체제를 무너뜨리려 했던 프랑스 혁명과는 달리, 청교도 혁명은 진정한 의미의 근대 시민혁명이 아니었다고 보기도 한다. 왕당파와 의회파의 대결을 부추긴 것은 민주주의나 자유주의 이념보다는 종교 문제였으며, 따라서 그것은 수십 년 전 유럽 대륙에서 벌어졌던 종교 전쟁의 마지막 모습일 뿐이라는 것이다. 여기에 맞서 크롬웰은 공화국 내에서 종교의 자유를 인정했으며, 3백 년 전 추방되었던 유대인들도 귀국할 수 있게 허가했다는 지적도 있다. 그러나 이 역시 “크롬웰은 세상의 종말이 임박했다고 굳게 믿었으며, 유대인들을 다시 불러들인 것은 하루바삐 그들을 개종시켜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는 반박을 받는다.

아무튼 5년 동안 철권통치를 하며, 한때 하늘을 찔렀던 크롬웰의 인기는 바닥까지 떨어졌다. 암살 시도가 끊이지 않았고, “독재자” “반역자” “악마” 등의 욕지거리가 런던의 뒷골목마다 넘쳐흘렀다. 아일랜드에서는 그를 자기 민족을 무참히 학살한 원수로 여겼고, 스코틀랜드에서는 자신들의 왕(찰스 1세)을 죄 없이 죽인 악당으로 취급했다. 자신이 정성 들여 키운 군대 말고는 누구도 믿을 수 없게 된 크롬웰은 깊은 우울증에 시달렸고, 결국 말라리아에 걸려 59세로 숨을 거둔다. 1658년 9월 3일이었다. 그가 죽은 후 호국경의 지위는 아들인 리처드 크롬웰에게 이어졌으나 그에게는 이미 민심의 이반을 막을 힘이 없었다. 마지막까지 기댔던 군부조차도 파벌로 갈라져서 서로 다투었다. 결국 1660년 5월, 프랑스에 망명해 있었던 찰스 1세의 아들 찰스 2세는 대대적인 환영을 받으며 런던에 입성하여 왕위에 앉았다. 크롬웰의 시신은 무덤에서 파헤쳐져 토막났다.

적어도 내전에 있어서, 크롬웰이라는 인물이 없었다면 의회파는 왕당파에게 승리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면 그 다음은 어떨까? 크롬웰이 없었다면, 왕과 의회 사이에서 적절한 타협이 이루어져 민주주의가 원만하게 발전했을까? 아니면 “왕은 아흔아홉 번 패배해도 여전히 왕이다. 그러나 우리는 한 번이라도 패배하면 반역자일 뿐이다. 왕에게 이기려면 왕을 없애야만 한다”라고 한 크롬웰의 말대로, 더 엄격하고 잔혹한 절대군주체제가 들어섰을까? 크롬웰이 없었다면 수평파의 이상이 실현될 수 있었을까?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가 평화롭게 브리튼의 일원이 될 수 있었을까? 아니면 끝없는 갈등과 살육만이 이어졌을까? 우리는 알 수 없다. 어쨌거나 올리버 크롬웰은 역사적인 인물이었으며, 그 한 사람의 몸은 영국의, 또는 유럽의 민주주의 발전 과정에서 반드시 밟고 건너야 할 외나무다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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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 의회

잉글랜드 의회 1640년 재소집된 잉글랜드 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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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Wikim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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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 2010. 04. 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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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함규진 서울교육대학교 교수, 역사저술가

    글쓴이 함규진은 여러 방면의 지적 흐름에 관심이 많다. 정치학을 전공하여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한편, 주로 역사와 관련된 책을 여러 권 썼고, 인물이나 사상에 대한 번역서도 많이 냈다.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 보수와 진보 등 서로 대립되는 듯한 입장 사이에 길을 내고 함께 살아갈 집을 짓는 것이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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