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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세계사

토머스 제퍼슨

미국 민주주의의 대의를 밝힌 독립선언서의 작성자

[ Thomas Jefferson ]

출생 - 사망 1743.4.13. ~ 1826.7.4.

1776년 6월, 아메리카 식민지의 13개 주가 영국과의 전쟁에 돌입한 지 1년여가 경과된 상황에서, 식민지 대표자들의 모임인 대륙회의는 이제 본국과의 완전한 분리를 향한 일련의 조치를 감행했다. 그중 하나인 독립선언서의 작성을 위한 기초 위원회는 당대 최고의 문인 벤저민 프랭클린(펜실베이니아)을 비롯해서 존 애덤스(매사추세츠), 로버트 리빙스턴(뉴욕), 로저 셔먼(코네티컷), 그리고 토머스 제퍼슨(버지니아)까지 모두 다섯 명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초안 작성을 거의 도맡았던 제퍼슨은 그때까지만 해도 중앙 무대에서는 그리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지만, 7월 4일을 기해 대륙회의에서 독립선언서를 채택, 공포함으로써 훗날 미국 민주주의를 상징하는 인물 가운데 하나로 부각되었다.

출생과 성장, 그리고 독립선언서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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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머스 제퍼슨은 1743년 4월 13일, 미국 버지니아 주 서부의 앨버말에서 대농장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부친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그는 겨우 14세 때에 5000에이커(약 300만 평)의 토지와 수십 명의 노예를 거느린 집안의 가장이 되었다. 어린 시절에는 개인이 운영하는 소규모의 기숙학교에서 공부했고, 1762년에 윌리엄스버그에 위치한 윌리엄 앤드 메리 대학에 입학해서 2년간 공부했다. 1767년에는 변호사 자격을 취득했지만, 그의 법조인 경력은 오래 가지 못했다. 불과 2년 뒤인 1769년에 버지니아 식민지 의회의 하원의원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후 대통령을 역임하고 은퇴할 때까지 40여 년간 지속된 그의 정치 인생의 시작이었다.

비록 뛰어난 연설가까지는 아니었지만 제퍼슨은 당대의 여러 정치인 가운데서도 손꼽히는 문장가였다. 1775년, 제2차 대륙회의에 버지니아 주 대표로 참석한 제퍼슨은 1776년에 독립선언서 기초 위원 5인 가운데 한 명이 되어 그 유명한 문서의 초안을 작성했다.

버지니아로 돌아온 제퍼슨은 주 하원의원을 거쳐 1779~81년에는 주지사로 재직한다. 1783~4년에는 연방의회의 의원으로 재직하며, 원래 에스파냐인의 통화 단위였던 ‘달러’를 신생국 미국의 통화 단위로 삼자고 제안했다. 1784~89년에는 벤저민 프랭클린의 후임으로 프랑스 주재 공사가 되었으며, 그로 인해 아쉽게도 1787년의 제헌의회에는 참가하지 못했지만, 1789년 7월의 프랑스 혁명을 현장에서 목도할 수 있었다. 1789년에 워싱턴이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자, 휴가 차 일시 귀국했던 제퍼슨은 초대 국무장관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정치적 성향이 달랐던 재무장관 해밀턴과 사사건건 갈등을 빚어, 결국 워싱턴의 두 번째 임기 도중인 1793년 말에 장관직을 사임한다. 이후 해밀턴의 연방파와 연신 대립하던 제퍼슨의 공화파는 훗날 ‘민주공화당’을 거쳐 오늘날의 ‘민주당’이 되었다(반면 연방당은 불과 20여 년 만에 해체되었고, 링컨 시대에 가서 오늘날의 ‘공화당’이 창당되었다). 강력한 중앙정부의 주도 하에 행정의 효율성을 도모했던 해밀턴주의와는 달리, 제퍼슨주의는 작은 정부와 권력 분산을 통한 자유의 극대화를 목표로 삼은 것이 특색이었다.

독립선언서의 초안을 작성해 대륙회의에 제출하는 토머스 제퍼슨과 다른 위원들을 묘사한 존 트럼불의 <독립선언서>(1819)

당시 미국의 대통령 선거는 후보자의 득표 수에 따라 대통령과 부통령이 정해지는 방식이었다. 1796년의 선거에서 연방파 존 애덤스가 대통령이 되고 공화파 제퍼슨이 부통령이 된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1800년의 선거에서 제퍼슨은 드디어 대통령에 당선되었지만, 여기에는 적잖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공화파의 대통령 및 부통령 후보로 나선 제퍼슨과 애런 버가 73표로 동률을 이루었는데, 의회에서의 결선 투표가 36차례나 거듭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결판이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양쪽 모두를 미워했던 해밀턴이 ‘그래도 버보다는 차라리 제퍼슨이 나은 편’이라면서 연방파 의원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함으로써 제퍼슨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이후 해밀턴과 버의 관계는 점점 더 악화되었고, 급기야 두 사람이 벌인 결투에서 해밀턴이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대통령 당선과 루이지애나 매입

대통령 재임시절의 제퍼슨

대통령 시절 제퍼슨의 가장 큰 업적은 1803년의 루이지애나 매입이었다. 동쪽으로는 미시시피 강에서 서쪽으로는 로키산맥에 달하는 루이지애나(현재의 ‘루이지애나 주’는 그 중에서도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는 대략 오늘날 미국의 중부 지역에 해당되며, 100년 넘도록 프랑스와 에스파냐가 번갈아 가며 소유권을 주장하고 있었다. 하지만 두 나라 모두 본국과 멀리 떨어진 아메리카 식민지를 경영할 능력이 없었던 반면, 미국인은 이미 상당수가 국경 너머인 미시시피 강 서쪽으로 이주해 살아가고 있었다. 때마침 프랑스와 에스파냐 모두를 장악한 나폴레옹이 아이티의 흑인 혁명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재정 압박을 느끼자, 이를 눈치 챈 제퍼슨은 신속하게 협상을 벌여 루이지애나를 1500만 달러의 가격에 사들였다.

이 사건으로 미국 정계는 발칵 뒤집히고 말았다. 가뜩이나 제퍼슨을 미워하던 야당에서는 막대한 국고를 털어 가면서 불모지를 사들인 것이 대통령의 월권이라며 비난을 일삼았지만, 루이지애나 매입은 대서양에서 태평양에 이르는 미국의 광활한 영토가 수립되는 데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사건이었다. 212만 제곱킬로미터의 그 넓은 땅을 매입함으로써 미국의 영토는 삽시간에 두 배로 늘어서 현 영토의 3분의 2가량을 차지하게 되었다(1840년대에 이르러 미국은 서부 지역과 멕시코를 합병함으로써 지금과 같은 영토를 확정했다). 1867년에 미국이 720만 달러를 들여 160만 제곱킬로미터의 알래스카를 러시아로부터 사들인 사건과 함께, 루이지애나 매입은 세계 역사상 가장 수지맞는 토지 거래 가운데 하나로 손꼽힌다.

제퍼슨은 새로 획득한 영토를 조사하기 위한 원정대를 파견했다. 그 당시에만 해도 루이지애나의 경계가 정확히 어디인지는 파악되지 않았던 까닭이었다. 북아메리카의 내륙에 정확히 뭐가 있는지도 파악되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태평양을 통해 서부 연안 탐사가 이루어진 바는 있었지만, 북아메리카 중부와 서부는 아직까지도 미국인에게는 미지의 땅에 불과했다. 제퍼슨은 개인 비서이며 군인이었던 메리웨더 루이스와 윌리엄 클라크를 지휘관으로 임명했다. 30여 명으로 구성된 원정대는 1804년부터 1805년까지 2년여에 걸쳐 미주리 강을 거슬러 올라가 로키산맥을 넘고, 컬럼비아 강을 따라 내려가 태평양에 도달했다. 이로써 루이지애나의 경계가 확인되었으며, 아울러 내륙 지방의 풍부한 천연자원에 관한 소문이 만천하에 퍼지면서 본격적인 서부 개척의 막이 올랐다.

루이지애나(한가운데 붉은색으로 표시된 부분)의 매입으로 인해 미국의 영토는 순식간에 두 배로 늘어났다. 19세기 중반에 들어 서부와 멕시코를 합병함으로써 미국은 오늘날의 영토를 확정했다.

1804년의 선거에서도 승리한 제퍼슨은 두 번째 임기를 무사히 마치고 고향 버지니아에 직접 설계한 저택 몬티첼로(이탈리아어로 ‘작은 산’이라는 뜻)로 돌아왔다. 이 저택은 미국 초창기를 대표하는 건축물 가운데 하나이며, 그가 설계한 또 다른 걸작인 버지니아 대학 건물과 함께 오늘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1826년 7월 4일, 아메리카 식민지가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지 50년째 되던 기념일에 토머스 제퍼슨은 83세의 나이로 자택에서 사망했다. ‘몬티첼로의 현자’로 통하던 그가 직접 작성한 묘비명에는 본인이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세 가지 업적이 다음과 같이 명시되어 있다. “독립선언서와 버지니아 종교 자유법의 작성자이며 버지니아 대학 설립자인 토머스 제퍼슨 이곳에 묻히다.”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대통령 가운데 한 사람으로 손꼽혀

1805년 제퍼슨의 초상화

제퍼슨은 미국 민주주의를 대표하는 인물 가운데 하나다. 워싱턴이나 링컨이 미국 민주주의의 실천가였다고 한다면, 제퍼슨은 그 이론가로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제퍼슨이 천명한 미국 민주주의의 대의는 바로 독립선언서에 담겨 있다. 물론 초안에서 최종안에 이르기까지의 수많은 논의 과정에서 벤저민 프랭클린을 비롯한 다른 사람의 견해가 가미된 것도 사실이다. 그래도 독립선언서에는 제퍼슨이 평소에 갖고 있었던 신념이 곳곳에 피력되어 있는 것으로 평가되며, 제퍼슨의 정치사상은 그로부터 100년 전에 활동했던 영국의 철학자 존 로크의 정치사상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은 것으로 평가된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자명하다고 주장하는 바이다. 즉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창조되었으며, 어떤 불가분의 권리를 조물주로부터 부여 받았으니, 거기에는 생명과 자유와 행복 추구의 권리가 포함된다. 이러한 권리를 지키기 위해 국민 사이에 정부가 조직되며, 통치 받는 국민의 동의로부터 정부의 정당한 권력이 나온다. 어떠한 형태의 정부든지 이런 목적을 파괴하게 되는 경우, 그런 정부를 바꾸거나 폐지하고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는 것은 국민의 권리이다. 이때 새로운 정부는 앞서 말한 것과 같은 원칙에 근거하며, 국민의 안전과 행복에 가장 잘 효과를 미칠 수 있는 형태로 그 권력을 조직한다.” 이 유명한 구절은 링컨이 언급한 “인민의,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정부”와 함께 민주주의의 가장 간단명료한 정의로 종종 인용된다.

미국의 초창기에 독립선언서를 작성하고 헌법을 제정한 인물 가운데 상당수가 이신론자라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헌법상으로 정교분리의 원칙을 제시하고 종교의 자유를 보장한 것도 이 때문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창기 미국 사회에는 전반적으로 청교도적인 사고방식이 팽배해 있었다. 자유에 큰 가치를 부여했던 제퍼슨은 어린 시절부터 종교에 대해 회의적이었고, 1779년에 작성한 버지니아 종교 자유법은 그의 종교적 신념을 대표하는 문서로 평가된다. “어느 누구도 특정한 종교의 예배나 장소나 성직자에 대한 참석이나 지지를 강요받지 않아야 하며, 어느 누구도 이와 관련해 자신의 신체나 재산에 대한 강요나 억제나 폭력이나 부담을 받지 않아야 하며, 자신의 종교적 의견이나 믿음 때문에 고통을 받지 않아야 한다.”

물론 제퍼슨도 시대적인 한계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까지는 아니었다. 그는 수백 명이나 되는 흑인 노예들의 피와 땀으로 한 평생 안락하고도 고상한 생활을 영위한 버지니아의 대농장주였다. 물론 제퍼슨처럼 명민한 지성의 소유자가 노예제의 문제점을 모를 리는 없었다. 하다못해 흑인을 노예로 부리다 보면 백인의 정신이 타락하게 된다는 실용적인 이유 때문에라도, 그는 노예제가 언젠가 반드시 철폐되어야 한다고 쓰기도 했다. 하지만 그건 어디나 이상에 불과했고 현실은 별개였으며, 제퍼슨이 자신의 신념을 실현하기 위해 실제적인 노력을 했다는 증거는 없다. 미국의 가장 큰 죄악인 노예제는 제퍼슨 사후 수십 년 뒤에야, 그리고 그 부산물인 인종차별의 폐지는 그로부터 100여 년이 더 지나서야 비로소 가능했다.

미국의 2달러 지폐에 나와 있는 제퍼슨의 초상(1819)

제퍼슨은 오늘날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대통령 가운데 한 사람으로 손꼽힌다. 워싱턴 DC에는 제퍼슨 기념관이 있고, 러시모어 산에는 워싱턴과 링컨, 그리고 시오도어 루스벨트와 함께 제퍼슨의 거대한 얼굴이 나란히 새겨져 있다. 미국의 2달러 지폐와 5센트 동전에도 제퍼슨의 얼굴이 나와 있다. 존 F. 케네디는 재임 중에 49명의 노벨상 수상자들을 위해 베푼 연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제 생각에 오늘처럼 탁월한 재능들과 지성들이 한 자리에 모인 것은 백악관 역사상 최초의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물론 토머스 제퍼슨이 이곳에서 ‘혼자’ 앉아서 식사했을 때는 제외하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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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제퍼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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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미국의 정부와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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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 2010. 05.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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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공처 정보

  • 박중서 출판기획자, 번역가

    글쓴이 박중서는 [약소국 그랜드 펜윅] 시리즈인 [뉴욕 침공기]와 [월스트리트 공략기] 등 수 십권의 책을 우리 말로 옮긴 번역가다. 1만권이 넘는 책을 소장했으며, 독서 관련 칼럼을 쓰고 있다. [불굴의 용기], [끝없는 탐구] 등 인물 논픽션을 번역했으며 외국 인물들에 대해 관심을 갖고 꾸준히 소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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