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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세계사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이탈리아 탐험가

[ Christopher Columbus ]

출생 - 사망 1451.8. ~ 1506.5.21.

1492.4.17 에스파냐왕실로부터 신대륙 탐험에 대한 후원을 받다

1492년은 콜럼버스와 에스파냐에게 행운의 해였다. 카스티야 왕국의 이사벨 1세가 (남편인 아라곤페르난도 국왕과 같이) 이베리아 반도에서 무어인들을 몰아내고 그라나다를 정벌했다. 1492년 1월 2일의 일이었다. 에스파냐를 건설할 초석을 놓은 셈이었다. 그 해 4월 17일 이사벨 1세는 콜럼버스와 협약을 체결했다. 이사벨 여왕의 콜럼버스에 대한 후원은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이탈리아 제노바 출신의 평민이었던 콜럼버스는 자신과 후손들에게 귀족의 칭호인 ‘돈’과 제독의 계급을 요구했다. 더불어 새로 발견된 땅에서 얻은 수입의 10%를 원했고, 모든 무역 거래의 8분의 1을 자신의 지분으로, 그가 발견한 땅이 식민지가 될 경우 자신을 총독으로 임명해달라는 것이었다. 여러 차례의 논의를 거쳤지만 결국 이사벨 여왕은 콜럼버스가 원하는 대로 해주었다. 그래서인지 이사벨 여왕과 콜럼버스가 서로 좋아한다는 풍문도 나돌았다고 한다. 그도 그럴 만한 것이 콜럼버스는 이 후원을 얻기 위해 그 동안 포르투갈과 프랑스를 비롯한 나라를 수년간 돌아다녔지만, 모두 퇴짜를 맞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불굴의 정신으로 그가 원하는 것을 얻어내고 출항할 준비를 시작했다.

카스티야의 여왕 이사벨1세와 아라곤 페르난도 국왕.
이사벨은 아라곤의 왕 페르난도와 결혼하여 에스파냐를 공동통치하고 통일하였다.

콜럼버스, 신대륙 총독이 되게 해줄 거라는 이사벨 여왕의 약속 받고, 항해 시작

콜럼버스는 자신이 죽는 날까지 금과 향료의 나라 ‘동양’이라고 믿었던 신대륙을 발견하기를 원했다. 탐험을 시작한 후 <항해일지>에 이렇게 적었다. “1492년 8월 3일 금요일 8시. 살테스의 강어귀에서 모래톱을 가로질러 항해를 시작했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풍향이 자주 바뀌는 강한 바람을 타고 해질 무렵까지 48마일, 즉 16리그를 항해한 후, 카나리 제도 쪽으로 항로를 잡고서 남서쪽과 남미서쪽으로 항해했다.”

콜럼버스가 탄 산타 마리아호를 복원한 모습

콜럼버스는 이 항해에서 신대륙을 발견했고, 탐험을 꼼꼼히 기록한 첫 번째 <항해일지>를 후원자인 이사벨과 페르난도 두 왕에게 바쳤다. 하지만 콜럼버스가 발견했다고 하는 그 신대륙은 사실은 그가 발견한 것이 아니었다. ‘신세계’ 혹은 ‘신대륙’이라는 표현은 그의 뒤를 이어 탐험한 서구 사람들이 사용했던 표현이었고, 또한 북아메리카, 중앙아메리카, 남아메리카에 속한 서반구는 몇 천 년 전부터 조상 대대로 살고 있던 원주민들의 땅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에 처음으로 도착한 유럽인도 아니다. 북유럽의 바이킹들이 이미 5백 년 전에 아이슬란드와 그린란드를 넘어 북대서양을 가로질러 캐나다 해변까지 가 본적이 있었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콜럼버스가 이룬 중요한 업적은 무엇일까? 그것은 그가 아메리카(그가 죽는 날까지 인도와 같은 동양이라고 믿었던)로 향하는 최단 경로를 찾아 대서양을 가로 질렀고, 콜럼버스 다음 세대 유럽인들에게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그들만의 ‘신세계’를 소개했기 때문이다.

오백 년 전에 왔다 간 바이킹들은 이미 이러한 정보를 완전히 잃어버린 뒤였다. 그래서 콜럼버스의 탐험과 발견은 유럽인들에게 새로운 식민지와 이주의 땅을 얻게 했고, 아메리카 대륙이 오늘날 세계의 중심 국가가 되게 한 신호탄이었다. 이 발견은 올림픽의 금메달과 같은 것이었다. 그는 이 업적으로 서양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 중의 하나로 남아 오늘날까지 그의 이름이 딴 도시와 더불어 각국의 교과서에 반드시 등장할 정도의 위인으로 남게 되었다.

콜럼버스는 1451년 8월과 10월 사이에 이탈리아 남서 해안의 항구 도시인 제노바에서 도미니코 콜럼버스와 수산나 디 폰타나로사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이 부부에게는 두 아들 바르톨로메오와 지아코모가 있었는데, 이들은 형을 도와 같이 탐험을 했다. 콜럼버스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고 다만 독실한 가톨릭 교도로 성장해 아버지의 직업인 양모 직공 일을 도왔다는 정도만 남아있다. 15세기 제노바는 조선업으로 유명한 이탈리아의 주요 항구였기에, 이곳에서 자란 콜럼버스는 자연스럽게 바다를 보면서 소년의 꿈을 키웠고, 이곳에서 이루어지는 무역 거래를 눈으로 보면서 무역 항로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당대 이탈리아 상인들과 동방 상인들의 거래가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훗날 콜롬버스가 ‘동양’을 찾아 떠난 이유는 기존의 무역 항로에서 벗어나 동양의 진귀한 물품들을 들여올 새로운 무역 항로를 찾기 위해서였다.

콜럼버스가 사용한 지도. 1490년경에 제작된 것이다(왼쪽)
마르코폴로의<동방견문록>여백에 적혀있는 콜럼버스의 메모(오른쪽)

콜럼버스, 신대륙 향해 전에 지도 제작자로 이름 얻고, 에스파냐어 배우고, 선박 조종도 익혀

꿈을 실현시켜 줄 결정적인 계기는 인생의 큰 위기가 지나고 나서 오기 마련이다. 콜럼버스는 1476년 그의 나이 25세 때 탑승한 제노바의 상선이 프랑스와 포르투갈 해적선의 공격을 받아 수많은 인명 피해를 입고 침몰해 거의 죽을 고비를 넘겼다. 이때 그는 바다에 떠있는 노를 잡고 수영을 해서 기적적으로 살아나 포르투갈의 리스본으로 갔다. 리스본은 대서양을 향해 열린 유럽의 거대 항구로서 전 유럽에서 건너온 선박들이 머무는 곳이기도 했다. 콜럼버스는 리스본에 이미 와 있던 동생 바르톨로메오와 함께 지도 제작을 하기 시작했다. 거대한 항구도시 리스본은 그의 꿈을 실현시키기에 매우 적절한 장소였다. 그곳에는 막 항해를 마치고 온 선장들과 미지의 땅에 대한 도전으로 가득한 사람들이 젊은 콜럼버스의 주위에서 싱싱하게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리스본에서 콜럼버스 형제는 뛰어난 지도 제작자로 명성을 날렸다. 항로와 육로를 정확하게 인식하게 된 이 시기는 이후 콜럼버스가 항해를 할 때 큰 힘이 되었다. 이러한 준비기간이 있었기에 대서양 횡단이 가능했던 것이다. 더불어 독학으로 에스파냐어를 공부했고, 독서를 통해 교양을 쌓았다. 그리고 당시 인기 있던 선박인 카라벨의 조종법을 익혔고 북대서양의 아일랜드와 아이슬란드를 항해하기 시작했다. 콜럼버스는 리스본에서 부유한 포르투갈의 관리이자 선장의 딸인 펠리파 페레스트렐로 에 모니즈를 만났다. 그녀는 전통적인 귀족 집안의 젊고 매력적인 여인이었다. 콜럼버스는 리스본의 한 교회에서 그녀를 만나 1478년에 꿈의 결혼식을 올렸다. 이 결혼으로 인해 콜럼버스는 위험한 탐험의 길을 떠나지 않더라도 최소한 처가의 인맥으로 부유한 상인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거기에 멈추지 않았다. 항상 마음속에는 ‘검은 바다’로 불린 대서양이 파도치고 있었다. 그는 장인이 유품으로 남긴 항해 지도와 선장 일지, 지도 등을 장모로부터 물려받았다. 이 유산은 대서양의 바람과 해류에 관한 소중한 기록들로 그에게는 그 어떤 보물보다 귀중한 것이었다.

당대 유럽인들에게 가장 먼 땅은 지금의 중국인 카다이, 인도, 그리고 일본인 지팡구였다. 유럽인들에게 이곳은 비단과 향료와 같은 이국적인 상품들이 넘쳐나는 곳이며, 황금과 보물이 넘쳐나는 곳으로 동경의 대상이 되었다. 유럽인들의 육식 식탁에 반드시 필요한 향료는 당시 실크로드를 통해 아라비아 상인들과 거래가 되고 있었다. 실크로드는 이동 경로가 멀고 험한 탓에 동양의 물품들은 엄청나게 비싼 가격으로 거래되었다. 이러한 조건 때문에 낙타 대신에 배를 타고 쏜살같이 바다를 가로질러 동양으로 가는 바닷길을 찾는 사람이 많았다. 콜럼버스도 이들 중 하나였다.

"에스파냐와 인도는 가까우며, 적당한 바람만 있으면 며칠 만에 닿을 수 있다"

콜럼버스는 이 시기에 13세기 이탈리아 상인이자 탐험가인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을 읽고 몽골 제국의 황제인 쿠빌라이 칸을 만날 생각을 했다. 그의 항해일지를 보면 “이제 ‘그레이트 칸’을 만날 것”이라는 구절이 많이 보이는데 이것은 아메리카 대륙을 중국으로 착각한 것이다. 그리고 피에르 추기경의 책 <세계의 형상>을 읽으며 전문적인 지식을 획득해 나갔다. 오늘날의 관점으로 보면 오류가 있는 정보도 있었지만(그 오류조차도 콜럼버스에게는 미지의 세계를 향한 에너지가 되었다.) 그는 드디어 대서양을 가로질러서 동양으로 가겠다는 포부를 세웠고 당시 최고의 지도 제작자로 알려진 토스카넬리와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대서양 횡단의 뜻을 품었다. 콜럼버스는 이렇게 생각했다. “에스파냐와 인도의 시작은 가까우며, 적당한 바람만 있으면 분명 며칠 만에 닿을 수 있다.” 그가 계산한 수치는 실제와는 4배나 차이가 나는 것이었지만, 이 오류가 위대한 발견의 시작이 될 줄은 콜럼버스 자신도 몰랐을 것이다. 그는 어서 배를 타고 인도에 가 좋은 향료와 황금을 얻고 가톨릭을 전파할 생각에 부풀어 있었다.

1484년부터 콜럼버스와 그의 동생은 자신들의 항해를 도와줄 후원자를 찾기 시작했다. 그 사이에 사랑하는 아내는 세상을 떠나고, 콜럼버스는 아들 디에고와 함께 포르투갈을 떠났다. 포르투갈과 프랑스를 비롯한 여러 나라를 오가는 천신만고 끝에 에스파냐의 이사벨 여왕을 만나 1492년에 그 뜻을 이룬 것이다. 그리고 항해를 같이 할 핀손 형제를 만나게 된다. 그들은 팔로스 최고의 선원이었다. 마르틴 알폰소 핀손과 비센테 야네스 핀손의 도움으로 선원들을 모았다. 의사, 목수, 은세공사, 에스파냐 황실의 사절, 아랍어 통역사까지 모두 90명의 인원이 모였다.

"육지가 보이지 않으면 내 머리를 잘라도 좋소"

콜럼버스가 탄 산타 마리아호, 핀손 형제가 탄 핀타호, 그리고 니냐호가 에스파냐에서 대서양으로 항해를 시작했다. 콜럼버스는 이 세 척의 배를 이끌고 아직까지는 미지의 ‘검은 바다’인 대서양을 향했다. 그들에게 첫 항로인 대서양을 횡단하는 동안 오랜 바다 생활에 지친 선원들이 폭동을 일으킬 위험도 있었고, 낮게 드리워진 구름을 육지로 착각하기도 했다. 금방 도착한다는 선장 콜럼버스의 말과는 달리 육지가 보이지 않자 선원들은 더욱 거칠어졌다. 콜럼버스는 9월 24일의 항해일지에 이렇게 적었다. “육지가 나타날 조짐이 보이는데도 현재 나와 선원들의 관계는 심각한 상태다.”

10월이 되자 다시 에스파냐로 돌아가자는 원성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때 콜럼버스는 말했다. “육지가 보이지 않으면 내 머리를 잘라도 좋소. 그럼 여러분 모두 편안하게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요.” 콜럼버스는 이 항해에 목숨을 걸었다. 1492년 10월 12일 새벽에 드디어 육지가 보였다. 육지를 첫 발견한 사람은 핀타호에 타고 있던 로드리고 데 트리아나였다. 그가 “육지가 보인다”라고 외친 순간은 세계 역사의 한 획을 긋는 순간이었다. 그곳이 인도나 일본과 같은 동양이라고 믿었다고 해도 말이다.

1492년 10월 12일 콜럼버스는 오랜 항해 끝에 신대륙에 상륙했다.

콜럼버스는 원주민들을 인도 사람이라는 뜻인 ‘인디오’라고 불렀고 그곳을 일본이나 중국의 해변이라고 믿으면서 <동방견문록>에 나오는 황제인 ‘그레이트 칸’과 금은보화를 찾으러 돌아 다녔다. 동시에 이사벨 여왕처럼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콜럼버스는 두 왕에게 존엄한 기독교 정신을 바쳤다. 그는 항해일지에 이러한 편지도 남겼다.

“두 분 폐하, 저는 그들의 언어를 잘 아는 독실한 종교인이 있으면, 그들이 모두 쉽게 그리스도 교도가 될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따라서 두 분 폐하께서 일찍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하는 자들을 멸망시켰듯이, 이 종족을 개종시켜 교회로 이끌기 위해 단호한 노력을 기울이겠다고 주님의 이름으로 결정하시리라 믿습니다. 그렇게 되면 두 분 폐하께서 승하하신 이후에도(사람은 누구나 몸이 세상을 떠나기 마련이므로), 왕국은 이단이나 악으로 물들지 않고 평온한 상태를 유지할 것이고, 두 분 폐하께서는 영원한 창조주의 왕좌 앞에 서시게 될 것입니다.”

신대륙에는 금광이 많다고 거짓말 한 콜럼버스, 이사벨 여왕으로부터 영웅 대접

그는 첫 항해에서 발견한 섬들, 오늘날 미국의 플로리다 주 남쪽 해안가의 바하마 제도에 있는 조그만 섬들과 쿠바를 돌아다녔다. 이곳에서 원주민들이 피우던 담배(쿠바의 시가는 지금도 유명하다.)와 해먹을 발견한다. 유럽에 담배가 첫 소개되었고, 해먹은 이후 선원들의 흔들침대로서 애용되고 있다. 콜럼버스는 이국적인 아름다운 풍광, 총 천연색의 바닷물고기에 감탄했다. 비록 금은보화를 찾지는 못했지만 온갖 진귀한 것들을 발견하고 수집해서 천진난만한 인디오들과 함께 에스파냐로 돌아갔다. 그리고 콜럼버스는 자신이 발견한 원주민들의 땅이 에스파냐의 왕과 여왕의 것임을 하느님의 이름으로 선포했다. 이것은 가혹한 식민지 시대의 막을 여는 것이었다.

콜럼버스는 항해를 마치고 에스파냐로 돌아가 이사벨 여왕과 페르난도 왕의
환영을 받았다.

이러한 상황을 전혀 짐작도 할 수 없었던 원주민들의 모습을 콜럼버스는 이렇게 적었다. “그들은 작은 창 말고는 무기도 없었고, 태도도 호의적이었다. 내가 칼을 보여주자 한 남자가 모르고 칼날을 잡는 바람에 손이 베였다. 나는 원주민들이 우리에게 호감을 갖도록 하고 싶다. 무력이 아니라 사랑으로 개종시키고 싶다.”

그는 이렇게 칼도 모르는 사람들을 상대로 십자군 정신으로 식민지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기어이 첫 항해에서 39명의 선원이 다스리는 작은 식민지를 만들고 에스파냐로 돌아갔다. 무사히 첫 번째 항해를 마치고 에스파냐로 돌아가자, 그는 에스파냐의 영웅이 되어 이사벨 여왕과 페르난도 왕에게 환영을 받았다. 그는 미리 왕에게 보낸 편지에 향료가 많고 금광과 여러 광산이 많았다고 ‘거짓말’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순간이 콜럼버스의 인생에서 가장 화려한 순간이었다.

“콜럼버스는 의기양양하게 왕국으로 향했다. 생선 뼈와 금으로 만든 장신구와 머리 장식을 한 인디언들과 화려한 앵무새를 비롯한 여러 새들을 거느리고 행진하는 이 용감한 모험가의 특이한 행렬을 보기 위해 농부와 귀족들이 모여들었다. 고용된 하인들이 순금과 호박을 들고 콜럼버스와 선장들의 뒤를 따랐다. 바르셀로나 왕궁에서는 콜럼버스가 들어서자 귀족들이 일제히 일어섰다. 이것은 이 나라에서 가장 저명한 귀족들만 누릴 수 있는 존경의 표시였다. 왕궁의 으리으리한 홀로 들어선 콜럼버스가 페르난도와 이사벨 앞에 무릎을 꿇자 두 사람은 그를 일으켜 세우고, 여왕의 오른편에 앉아 모험담을 이야기하도록 했다.”

두 번째로 신대륙 찾아가자, 남아 있던 선원들은 원주민들한테 몰살 당한지 오래고·····

두 번째 항해에는 17척의 선박과 1200여명의 선원들이 모여 들었다. 이 항해에서는 좀 더 멀리 가서 반드시 금광을 찾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다시 도착한 식민지에는 이미 선원들이 원주민들에게 몰살당한 뒤였다. 그들의 약탈과 강간에 화가 난 원주민들의 공격이 시작된 것이다. 꿈의 땅인 줄 알고 같이 온 선원들은 슬슬 동요하기 시작했다. 그곳에는 콜럼버스가 말한 금은보화가 없었다. 식민지는 난장판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러자 노예사냥이 시작되었다. 콜럼버스는 1495년 초에 타이노 족 5백 명을 4척의 선박에 실어 유럽에 노예로 팔기도 했다. 그는 노예제도도 만들어 14세 이상의 원주민 남자들은 모두 석 달에 한 번씩 금을 바치게 했다. 원주민들은 동요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유럽의 질병인 천연두와 같은 바이러스가 퍼져서 50년 동안 수십만 명에 달하는 카리브해 원주민들이 사망했다.

콜럼버스는 모두 4번에 걸친 항해를 했다. 하지만 두 번째 항해부터는 서서히 몰락했다. 왕과 여왕은 콜럼버스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여러 차례 갈등이 있었지만, 콜럼버스는 페르난도와 이사벨이 지원해 준 작은 배 4척을 타고 1502년 5월 마지막 항해를 떠났다. 동참하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이 항해에서도 금은보화를 찾지 못한 콜럼버스는 1년 동안 자메이카 해안에 갇혀 고생 하다가 1504년에 에스파냐로 돌아왔다. 그 해 그의 강력한 후원자였던 이사벨 여왕이 세상을 떠났다. 그녀와 함께 콜럼버스의 영광의 날들도 노을로 물들었다. 페르난도 왕은 그를 상대하지 않았다. 탐험가인 그는 좌절감과 관절염에 시달리다가 1506년 5월 21일 그가 그토록 가고 싶었던 동양의 꿈을 꾸면서 파란만장한 55년의 세상을 뒤로 하고 눈을 감았다. 에스파냐 왕실에서는 아무도 그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1542년 그를 추앙하는 사람들이 그가 일군 식민지인 히스파니올라에 새로 건립된 산토 도밍고 대성당에 콜럼버스의 시신을 옮겨 묻었다.

필자가 추천하는 덧붙여 읽으면 좋은 책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의 항해 기록집인 <콜럼버스 항해록>은 콜럼버스의 모든 것이 담겨 있는 책이다. 콜럼버스는 1492년 8월 3일부터 1493년 3월 15일까지, 220여 일의 1차 항해 기간 중에 쓴 항해 기록을 페르난도 왕과 이사벨 여왕에게 바쳤다. 그 원본은 왕실 서고에 있다가 사라져 버렸고, 현재 전해지는 것은 필사본으로 라스카사스가 요약하여 정리한 것이다. 관련 그림들과 사진들이 수록되어 있어 유익하다.

그리고 <콜럼버스가 바꾼 세계>는 신대륙 발견 이후 세계를 변화시킨 흥미로운 교환의 역사를 살펴보는 책이다. 물질 문화사와 환경사라는 새로운 역사학 장르를 개척한 과학사학자 앨프리드 W. 로스비의 노작이다.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이후 신세계와 구세계 사이를 사람들이 오가면서 동식물들이 옮겨져 재배ㆍ사육되고, 다양한 병원 미생물들이 서로 교환되면서 신세계와 구세계의 사회와 문화를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살펴볼 수 있다.

또한 청소년용으로 나온 <놀랍다 탐험과 항해의 세계사 2 - 콜럼버스와 아메리카 항해 놀라운 지식 시리즈 32>는 비교적 수월하게 콜럼버스의 인생을 소개하고 있다. 저자인 팀 맥니스는 일반인을 위한 70여 권의 입문용 역사책을 쓴 노련한 필체로 콜럼버스의 공과 과를 그려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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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럼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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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Basic 중학생이 알아야 할 사회· 과학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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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발행일 : 2009. 04.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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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재훈 시인, 소설가

    글을 쓴 원재훈은 1988년 시 '공룡시대'로 등단했으며 <낙타의 사랑>, <사랑은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라 하네> 등의 시집과 <만남, 은어와 함께 보낸 하루>, <모닝커피>등의 소설, <네가 헛되이 보낸 오늘은 어제 죽은 이가 그토록 그리던 내일이다.>, <나무들은 그리움의 간격으로 서 있다> 등의 산문집에 이르기까지 왕성한 집필을 통해 독자들과 만나고 있는 작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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