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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세계사

마거릿 대처

영국의 수상으로 영국 정치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다

[ Margaret Hilda Thatcher ]

출생 - 사망 1925.10.13. ~ 2013.04.08.
“어제 제가 하원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인플레이션을 잡으려면 고통스러운 결과를 감수해야 합니다 (…) 차악의 선택이라고 하겠지요. 지금 그냥 더 많은 돈을 찍어내는 식으로 대응한다면, 결국 물가는 엄청나게 뛰고 실업률도 치솟을 것입니다. 완전한 혼란이 일어날 것입니다 (…) 결국 현실적인 경제원리가 작동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것에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대안은 없습니다.” - 마거릿 대처, 1980년 6월 25일, 런던 주재 미국 언론인 회견에서

깊어가는 "영국병", 대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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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에 “사상 최고 최대의 제국”을 자랑했던 영국의 국세는 세계대전 이후 쭉 내리막길을 걸었다. 1970년대에 들면서는 경제와 사회에서도 일종의 한계가 나타났다. 한때는 대안이 없는 듯했던 케인즈주의의 큰 정부, 복지사회가 일하지 않고, 노력하지 않고, 세금은 많고, 일자리는 없는 “영국병”을 낳으며 심각한 회의의 대상이 되었다. 1970년대 말 영국 경제는 실질성장률 마이너스, 실업률 4~6퍼센트, 인플레이션 15퍼센트라는 지표를 보였으며 새로 기업을 창업하려는 사람들의 의지를 꺾는 복잡한 정부규제와 무거운 세금, 걸핏하면 벌어지는 노동조합의 투쟁으로 사회 전반에 “경제하려는 의지”가 실종된 상황이었다. 이런 암울한 상황을 극복하려면 뭔가 새로운 “대안”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팽배했다. 그리고 그런 새로운 대안은, 정책에서뿐 아니라 인물에서도 찾아져야 했다.

알려진 대로라면, 대처만큼 정치인이 되는 데 가정교육이 큰 영향을 준 사람도 드물 것이다. 그녀는 영국 중부의 작은 마을인 그랜덤에서 태어났으며, 결혼 전의 이름은 마거릿 힐다 로버츠였다.

아버지 알프레드 로버츠는 식료품점을 경영했으며 따라서 대처에게는 수상이 된 뒤에도 “식료품집 딸”이라는 꼬리표가 붙어 다녔다(칭찬과 비웃음 두 가지 다의 경우로). 하지만 알프레드는 마거릿이 두 살 때 시의원에 당선되고, 시의 여러 직책을 거쳐 그녀가 대학에 진학할 즈음에는 그랜덤 시장에 취임했으므로 대처가 평범한 식료품집 딸이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해일 수 있다. 그래도 알프레드는 본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공부도 제대로 마칠 수 없었지만 노력 끝에 점원으로 일하던 식료품점의 주인이 되고, 다시 정치에 입문해 시장까지 된 사람이었기에 여러 사람들의, 그리고 딸의 큰 존경을 받았다. 대처 자신도 특별한 배경이라고는 하나도 없이, 여성이라는 핸디캡도 극복하고 장관에 수상까지 되었으므로 “결국 개인이 노력하기 나름이다. 사회가 개인의 처지를 일일이 돌봐줄 필요는 없다”는 사고방식이 그녀의 정치철학에 자리잡았을 것으로 보인다.

그랜덤에 있는 대처의 생가

그녀의 집안 대대로 믿어온 감리교도 “남에게 기대지 말고, 뭐든 자기 힘으로”와 “늘 반듯하게, 모범적으로”라는 엄격한 가르침으로 대처에게 보수적인 성향을 심어주었을 것이다. 또한 그녀의 아버지는 어린 마거릿을 정치인으로 키우려 했다기보다, 자신의 정치활동을 도울 ‘운동원’으로 키웠다. 그가 1935년의 총선에서 보수당의 승리를 위해 발벗고 나섰을 때, 겨우 열 살이던 마거릿은 벽보를 붙이고 선전물을 돌리며 선거사무소에서 심부름을 하는 등 정신없이 일했다. 알프레드는 이후 스스로 선거에 나섰을 때도 딸의 ‘적극적인 도움’을 받았고, 정치문제에 대해 딸과 토론하거나 다른 후보의 장단점을 분석해서 브리핑해보도록 시키기도 했다.

이렇게 자연스레 “정치적 인간”이 된 마거릿은 1943년에 옥스퍼드 대학교에 입학, 화학을 전공하면서도 바로 정치에 참여하려 했으나 당시 대학가는 진보파가 절대로 우세했기에 학생회에서 활동할 수는 없었고, 비교적 소수의 동아리인 옥스퍼드 보수협회에 가입해 활동했다. 그리고 남다른 열성과 노력으로 곧 그 협회의 회장이 되었다. 당시 옥스퍼드에는 마거릿 같은 중류 출신은 드물었고, 어려움이라고는 조금도 모르고 자란 상류층 자제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런 사람들이 말끝마다 민중과 혁명을 이야기하며, 체제를 뒤집어엎어야 한다고 설치는 일을 마거릿은 차갑게 보았다. 스스로 노력해서 얻는 부와 명예, 독실한 신앙, 가족과 전통에 대한 애착. 미국의 신보수주의 정치인들이 대부분 공유했던 특성과 신념을 그녀 역시 가졌고, 그 가치를 위해 누구에게도 굽히지 않고 맞섰다.

정치하는 과학도, “영국 최초”가 되다

마거릿은 1948년에 옥스퍼드를 졸업했는데, 그 해 보수당의 연차대회에 참석했다가 보수당 클럽 회장의 눈에 들어 다트포드의 보수당 후보로 1950년 총선에 출마하게 되었다. 여성 후보로서는 전국 최연소였고, 보수당 후보로는 유일한 여성 후보였다. 비록 선거에서는 떨어졌지만, 이 때 만난 11세 연상의 비즈니스맨, 데니스 대처와 1951년 12월에 결혼하여 마거릿 대처가 된다. 정계에 발을 디디는 한편 변호사 시험 준비를 하고 있던 그녀는 법률 공부 자금 마련을 위해 화학 관련 회사에서 일했으나, 결혼 이후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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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화학 실험실에서 일하는 대처.

1966년, 재무장관 시절

1955년, 변호사이자 두 아이의 엄마가 된 그녀는 정치에 본격적으로 나서고자 했으나 “집에서 애나 볼 것이지......”하는 인식에 젖은 보수당 간부들 때문에 계속해서 기회를 얻지 못했다. 그래도 선거 유세장마다 따라다니며 열성으로 보수당의 선거운동을 도운 결과, 1958년 런던의 핀츨리 선거구에 입후보할 수 있었다. 그 지역구는 보수당의 세력이 큰데다 대처처럼 자수성가한 사업가들이 많은 곳이어서, 대처는 마침내 1959년에 꿈에도 그리던 국회의사당에 입성할 수 있었다.

정치인으로서 대처는 여느 영국 정치인들과 다르게 유머감각이라고는 없었고, 말도 거창하고 화려한 표현을 쓰지 않고 필요한 말만 했다. 그래도 두각을 나타낼 수 있었던 것은 역으로 “필요한 말한 하는” 점, 과학도답게 연설에서 반드시 통계수치와 계량적 지표 등을 내세우며 듣는 이의 신뢰감을 높인 점, 그리고 무엇보다 여성이면서도 당차고, 열정적이고, 강철 같은 의지를 내보인 점에서 찾을 수 있다. 그래서 그녀는 의원이 된 지 2년 만에 차관 제의를 받았으며, 이는 금방 보수당 정권이 와해되면서 무산되었지만 1965년부터 에드워드 히스가 당수를 맡자 ‘섀도 내각’의 각료로서 해당 분야의 정책을 연구하고 실제 부처의 정책을 검토, 비판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주택장관과 연금장관, 재무장관, 에너지장관, 교육장관, 교통장관 등을 두루 거쳤다. 그리고 1970년에 히스의 보수당이 승리하자 히스는 그녀에게 교육장관을 맡겼는데, 이 때 전국민에게 마거릿 대처의 이름이 알려지게 된다. 그러나 좋은 쪽이 아니라 나쁜 쪽이었다. 그녀는 평소의 신념대로 취학 아동에게 무상으로 지급되던 우유를 유료로 전환하기로 했다. 그러자 노동당과 언론은 길길이 뛰며 정부를 성토했고, “우유 도둑은 물러가라!”고 쓴 플래카드를 든 학부모단체가 도심 시위를 벌이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녀는 회고록에서 이를 “최소한의 효용 때문에 최대한의 정치적 희생을 겪은 일”이었다고 썼다. 스스로 대단치 않은 개혁에 너무 큰 위험을 감수했다고 자책한 것이었지만, 동시에 ‘왜 영국의 정치는 그토록 대단치 않은 개혁에도 벌벌 떨어야만 하는가?’라는 의문도 남겨준 사건이었다.

히스 내각이 1974년에 무너지면서 그녀는 야당 정치인으로서의 설움도 겪게 되었으나, 그것은 동시에 크나큰 기회였다. 정권을 빼앗긴 책임을 물어 히스의 당권에 도전하고, 1975년에 보수당 당수가 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이후 그녀는 야당 당수로서 노동당 정부를 매섭게 몰아붙였고, 마침내 1979년, 경제난과 총파업이 엎친 데 덮치며 “불만의 겨울” 속에 노동당이 무릎을 꿇었다. 마거릿 대처는 보수당 최초의 여성 당수에 이어 영국 최초의 여성 수상이 되었다. 서구 국가들 중에는 최초의 민선 여성 최고통치자이기도 했다.

당연히 그녀는 여느 수상보다 훨씬 많은 주목을 받았고, 영국을 넘어 세계적으로도 이름난 정치인이 되었지만 정계에서는 입지가 튼튼하지 않았다. 아직도 정치는 남성의 영역이라고 보는 의원들, “많이 키워줬더니” 그녀가 배신했다며 이를 갈던 히스와 그를 따르는 보수당 원로들은 그녀를 흰눈으로 흘겨보며 뭔가 꼬투리만 잡았다 하면 물고 늘어졌다. 심지어 그녀의 각료들까지도 그녀를 수상으로 대접하지 않았다. 하지만 “철의 여인”은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으며, 대중정치와 마키아벨리즘으로 난관을 극복했다. 매스컴을 최대한 활용하여 자신을 위대한 정치인으로 부각시키는 이미지메이킹을 하는 한편(가령 지루할 뿐이던 보수당 전당대회도 그녀는 자신과 보수당을 적극적으로 어필하는 화려한 볼거리로 탈바꿈시켰다), 자신을 싫어하는 정치인들의 뒷조사를 해서 만약 자신을 계속 적대시하면 그들의 비리를 폭로하겠다고 위협한 것이다. 결국 막강해 보였던 화이트홀의 반 대처 전선은 군데군데 구멍이 나기 시작했고, 1980년대 중반쯤에는 그녀에게 대들 정치인은 사실상 없어져 버렸다.

“대안은 없다”

대처는 1979년의 총선에서 감세 정책과 자력경생, 법질서의 회복을 내세우며 승리했다. “불만의 겨울”을 거치며 지나친 세금과 고물가, 노조의 공격성에 부자들뿐 아니라 “조용한 다수”까지 진절머리를 내게 되었다는 표시였다. 대처는 자신과 보수당의 신자유주의 노선만이 해답이라면서 경제 정책 과제를 이렇게 정리했다. “정부는 통화안정에 힘쓰고, 세금과 정부지출을 줄여야 한다. 법인세와 준조세를 줄이고 각종 규제를 철폐하여 기업이 활동하기에 최대한 유리하게 만들어줘야 한다. 민영화를 확대해야 하고, 노조의 세력을 약화시키며 노동 유연성을 늘려야 한다.”

그녀는 이를 실천하고자 취임 첫해에 외국환 관리 철폐와 국영사업 민영화에 착수하는 한편, 노조 활동을 규제하는 입법에 나섰다. 1981년에는 공정금리를 폐지해 정부주도의 금리통제를 중지하고 시장기능에 맡긴다는 정책을 취했다. 이밖에 정부의 주택구입 보조비를 폐지하며, 고등교육 지원금을 폐지하는 등(이 때문에 그녀는 모교인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명예박사를 받기로 예정되었다가 학내 반발로 무산되기도 했다) 교육 투자 예산 대폭 감축 등을 추진했다.

1984년, 런던에서 벌어진 탄광 파업 노동자들의 시위

이런 정책들의 효과가 반드시 뚜렷하지는 않았으며, 특히 1980년대 초에는 성장률과 물가는 조금씩 나아졌지만 실업률(1982년에는 실업자 수가 300만 명을 돌파했다)과 무주택자 비율은 늘기만 하여 노동자들을 비롯한 서민들의 반발을 불러왔다. 그리하여 1981년 여름에는 런던과 리버풀의 빈민가를 비롯한 각 지역에서 폭동이 일어나 “불만의 겨울이 끝나나 했더니, 이제는 무더운 여름이다”라는 푸념을 불렀고, 1984년에는 전국적인 탄광 파업이 일어났다. 대처 정부가 174개의 국영 탄광 중 20곳을 폐업하고 2만 명의 탄광 노동자를 해고하겠다고 발표한 데 따른 반발이었지만, 친기업 반노조의 대처 정권에 대한 노동계의 힘겨루기 성격을 짙게 띠었다. 그러나 결국 대처는 이 힘겨루기에서 승리했는데, 전에 없는 강경 진압이라는 카드를 꺼냈을 뿐 아니라 노조 내부의 분열을 유도하고, 미리 확보해 둔 석탄 재고를 풀어 국민의 불편을 최소화하며 버텼기 때문이었다. 1985년 3월에 탄광조노가 파업을 풀자 대처는 “국가복지제도의 전면 재검토”를 선언하며 기세를 올렸고, 1988년에는 40억 파운드의 대규모 감세와 함께 고용법을 개정해 기존의 ‘클로즈드 숍(closed shop)’, 즉 노조 가입자만 고용이 가능한 제도를 없애고 사측의 입장을 따르는 개인 노동자나 제2노조도 가능하게 함으로써 “노조 천국”이라던 영국에서의 노조의 권력에 치명타를 안겼다.

그녀는 1980년 6월 25일의 인터뷰에서 자유 시장과 자유 경제를 옹호하며 “대안은 없습니다(There is no alternative).”라고 잘라 말했다. 이 발언은 TINA라고 약식 표기되며, 신자유주의만이 진리라는 입장을 나타내는 발언으로 종종 인용된다. 1987년 9월의 인터뷰에서는 “사회라는 것은 없습니다. 남자와 여자, 개인이 있을 뿐입니다 (…) 개인은 반드시 스스로를 도와야 하며, 누가 당연히 뭘 해 주리라고 기대하면 안 됩니다”라고도 했다.

성조기와 나란히, 휘날리는 유니언 잭

한편 그녀는 외교와 안보에서 국방력을 강화하고 영국의 세계적 지위를 회복한다는 기치를 내걸었다. 1982년 2월에 벌어진 포클랜드 전쟁으로 ‘확인’되었다. 당시 아르헨티나 근해의 영국령 포클랜드 섬을 아르헨티나가 무력 점령하자, 대처는 외교적 타협을 권하는 내외의 목소리를 일축하고 해군 기동부대를 파견했다. 결과는 두 달 만에 아르헨티나가 손을 드는 것으로 끝났고, 대처는 “대영제국의 영광이 되살아났다”며 한껏 기뻐했다. 이는 사실 그녀가 국방력 강화를 말하면서도 정작 국방비는 대폭 감축해 버린 후에 벌어진 사건으로, 위험천만한 일이었으나 대처와 영국에게는 결과가 좋게 끝난 것이었다.

1982년, 포클랜드 전쟁에 반대하여 수상 관저 앞에서 데모하는 영국 시민들

그런데 외교적으로 대처는 그 어느 때보다도 미국에 밀착하는 노선을 시종 유지했다. 1983년에는 미국의 크루즈 미사일을 유럽에서는 최초로 배치했으며, 1985년에는 레이건의 전략방위구상(SDI)을 외국 정상으로는 처음으로 지지했다. 또 1986년에는 리비아 폭격을 위해 미군 폭격기들에게 영국 공군기지 사용을 허가함으로써 카다피에게서 “피의 보복” 위협을 받았다. 이런 노선은 대영제국의 영광은커녕 “미국의 푸들”로 전락하는 셈이 아니냐고 야당과 언론의 비난이 끊이지 않았으나, 대처는 당시의 미국과 이념적으로 맞았을 뿐 아니라 공산진영과의 대결에 있어 미국과의 협력을 긴밀히 하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믿었다. 또한 초강대국 미국의 군사적 보호를 상정하고서야 비로소 신자유주의와 신보수주의의 모순, 즉 국방비를 비롯한 정부예산을 감축하면서 동시에 국방력을 강화한다는 모순을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대처는 국내적으로도 항상 비타협적이고 치안 유지를 위해 무력 사용을 주저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내세웠으나, 이면에서는 협상과 타협에 힘쓰기도 했다. 탄광노조와 정면대결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온건파 노조와 제휴했던 것처럼, 현대 영국의 고질병 중 하나였던 아일랜드공화국군(IRA)과의 갈등에서도 겉으로의 강경과 속으로의 유화로 대응했다. 그래서 1981년에는 수감되어 있던 IRA의 단식투쟁을 냉혹하게 외면하여 10명이 굶어죽는 사태를 빚고, 1984년에는 IRA의 폭탄 테러로 암살되는 것을 간신히 모면하기도 했지만, 1985년에는 이들과 타협하여 영국 정부 최초로 “북아일랜드 협정”을 맺었다.

1991년,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에게서 ‘자유의 메달’을 받는 대처.

다우닝 가 10번지를 떠나서

대처는 1979년에 처음 집권한 후 1983년, 1987년의 총선에서 잇달아 승리하며 20세기 들어 처음으로 총선 3연패를 기록하는 기염을 토했다. 그러나 1980년대 말이 되어 경제지표가 일제히 나빠지면서 대처의 장기집권에도 빨간불이 켜졌다. 처음 집권했을 때 마이너스를 기록했던 성장률은 1988년에 5.2퍼센트까지 올라갔으나, 이후 점점 낮아져서 1990년에는 0.8퍼센트가 되었다. 물가상승률도 1990년에는 10퍼센트에 육박했으며, 실업률과 주택보급률에서는 임기 내내 큰 개선이 없었다. “친기업 정책을 펴면 투자가 늘고, 투자가 늘면 경제가 성장하며 고용이 증가한다”는 신자유주의의 믿음이 현실적 한계를 드러냈던 것이다.

경제 악화로 일부 지방정부의 재정이 심각하게 나빠지자, 대처는 인두세를 도입하기로 결정했다. 이는 감세를 핵심으로 삼던 신자유주의 정책기조에도 어긋났을 뿐 아니라, 소득수준에 상관없이 머릿수로만 세금을 내는 세금이므로 저소득층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한, 불공평한 세금이었다. 따라서 인두세에 반대하는 시위가 불길처럼 일었고, 진압경찰과의 몸싸움과 부상자가 끊이지 않았다. 여기에 유럽공동체 가입 문제가 겹쳤다. 대처는 신자유주의자답게 공동시장에는 원칙적으로 찬성했으나 영국이 당시의 유럽공동체에 가입하면 득보다 실이 많을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반유럽’ 정책을 취하자 이는 유럽 국가들의 반발과 보복을 불러왔고, 당시 영국의 사정이 더 힘들어지는 결과를 낳았다.

그녀의 인기가 전에 없이 떨어져 있던 1990년 11월 20일, 그녀는 보수당 당수 선거에서 과반수를 넘는 득표를 했으나 1차투표만으로 확정하기에는 불과 4표가 부족해(규정상 65%를 득표해야 했다)2차투표로 넘어가게 되었다. 그러자 그녀는 후계자격인 존 메이저를 밀기로 하고, 사임했다. 이로써 한 시대가 끝났다.

퇴임 후 그녀는 하원의원 신분으로 돌아와 있다가 1992년 선거에 불출마함으로써 그나마도 사퇴했으며, 이후에는 세계 각지를 다니며 강연을 하고, 필립 모리스 사의 경영고문이 되거나, 미국 윌리엄 메리 대학교의 총장을 지내는 등 여러 공직을 역임했다. 그러나 2002년에는 뇌졸중의 후유증으로 공식 행사를 자제하기로 하고, 2003년에는 남편 데니스의, 그리고 2004년에는 오랜 친구이자 동지인 로널드 레이건의 죽음을 맞았다. 2011년 있었던 윌리엄 왕자의 결혼식에 건강상의 이유로 불참한 그녀는 2013년에 사망했다.

“제3의 길”이라는 개념을 내세워 한때 큰 주목을 받았던 영국 사회학자 앤서니 기든스는 “대처리즘”을 모순되는 이념의 접합이라고 평가했다. 자유주의는 개인의 자유 증대와 정부의 권력 약화를 지향하는데, 보수주의는 오히려 전통과 가족, 종교의 이름으로 개인을 제약하고 국방과 치안 등에서 정부의 역할을 강화한다는 것이다. 대처리즘이 사상적으로 깔끔하지 못하며, 그 정책의 결과도 문제점이 많음은 틀림없다. 하지만 대처는 행동가이지 사상가가 아니며, 그녀의 정책은 대부분 애덤 스미스나 하이에크의 책보다는 어린 시절 형성된 가치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당시 영국의 평범한 중류 가정이었던 그녀의 집에는 ‘자유주의’와 ‘보수주의’가 자연스레 공존했다. 인두세조차도 “누구나 각자 자기의 몫을 해야 한다”는 어린 시절부터의 신념에 따라 정당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처럼 소박한 생각과 정서가 대처리즘의 핵심이었기에, 말하자면 보통 사람들의 상식에 통하는 점이 있었기에, 많은 반발과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대처가 집권하여 그토록 오래 그 자리에 머무를 수 있지 않았을까. 되는 일도 없고 안 되는 일도 없던 영국에 다시 활기를 불어넣고, 국민적 자존심과 일체감을 찾기 위해서는, 그녀의 무쇠 같은 의지와 마음이 필요했던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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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거릿 대처(1925~2013), 출처: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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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 2012. 03.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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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함규진 서울교육대학교 교수, 역사저술가

    글쓴이 함규진은 여러 방면의 지적 흐름에 관심이 많다. 정치학을 전공하여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한편, 주로 역사와 관련된 책을 여러 권 썼고, 인물이나 사상에 대한 번역서도 많이 냈다.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 보수와 진보 등 서로 대립되는 듯한 입장 사이에 길을 내고 함께 살아갈 집을 짓는 것이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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