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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세계사

엘비스 프레슬리

로큰롤의 왕

[ Elvis Aron Presley ]

출생 - 사망 1935.01.08. ~ 1977.08.16.

1977.8 사망의 원인에 대한 구구한 추측을 남긴 채 세상을 떠나다

1953년 여름 어느 날, 미국 테네시 주 멤피스에 위치한 허름한 벽돌건물 앞에서 기타를 어깨에 멘 백인 청년 한 사람이 서성이고 있었다. 잠시 후, 그는 마침내 뭔가를 결심한 듯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어떻게 찾아왔느냐는 여직원의 물음에 그는 자비로 음반을 하나 녹음하고 싶다고 대답했다.

멤피스 음악계를 주도하던 선 레코드의 스튜디오에서는 4달러만 내면 누구나 자작음반을 만들 수 있었다. 청년은 노래 두곡을 불렀고, 음반사의 여직원은 그의 재능에 좋은 인상을 받아 이름과 전화번호를 적어둔 다음, “좋은 발라드 가수. 꼭 붙잡을 것”이라고 덧붙여 두었다.

어머니의 생신 선물로 자비 음반을 만든 청년

훗날 이 청년은 그날 만든 자비 음반이 어머니의 생신 선물이었다고 말했지만, 일각에서는 그가 가수가 되려고 자청해서 오디션을 본 것이라고도 해석했다. 청년은 낮에는 트럭 운전사로 일하고, 밤에는 근처 술집을 돌아다니며 노래를 부르는 생활을 계속했다. 첫 번째 자비 음반을 만든 지 1년이 지난 1954년 여름, 드디어 그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흑인 창법으로 노래하는 백인 가수”를 찾던 선 레코드의 사장 샘 필립스가 예전에 본 그 청년을 기억해냈던 것이다. 최초의 정식 녹음 작업 도중에 청년은 That's All Right (Mama)라는 유명한 곡을 장난삼아 자기만의 독특한 스타일로 바꿔 불렀는데, 거기 있던 사람들은 모두 그 노래를 듣고 신선한 느낌을 받았다.

7월 10일 밤 9시 30분경, 그 노래가 멤피스의 라디오 방송국에서 방송되자 청취자들의 엽서와 전화가 폭주했다. 그때부터 이 청년은 본격적으로 무대에 올라 멤피스 인근에서 이름을 알렸고, 그윽한 눈매와 냉소적인 미소로 십대 소녀 팬들의 인기를 독차지했다. 곧이어 그는 일명 ‘대령’으로 통하는 톰 파커를 매니저로 맞이하고 대형 음반회사인 RCA와 계약했다. 1956년 초에 Heartbreak Hotel이 빌보드 차트 1위를 차지한 것을 시작으로 Hound Dog, Don't Be Cruel, Love Me Tender 등이 연이어 히트했다. 아울러 노골적으로 엉덩이를 흔드는 특유의 몸동작은 큰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로큰롤의 왕 엘비스 프레슬리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남부의 가난한 백인 청년에서 로큰롤의 슈퍼스타로

엘비스 애런 프레슬리는 1935년 1월 8일에 미시시피 주 투펄로에서 태어났다. 원래는 쌍둥이였지만 형이 태어나자마자 사망했기 때문에 외아들로 자라났다. 프레슬리의 부모는 이른바 ‘힐빌리’로 불리는 남부의 가난한 백인 계층이었다. 어머니는 목화밭이나 공장에서 일해 생계를 유지했고, 아버지는 한때 밀주 판매 혐의로 옥살이를 했다. 엘비스는 그 어머니의 외모와 음악적 재능을 물려받은 것으로 여겨지며, 아버지가 무능하고 폭력적인 까닭에 모자관계가 유별나다 싶을 정도로 돈독했다.

1955년 유명세를 얻기 시작할 당시의 엘비스 프레슬리

1948년에 엘비스의 가족은 테네시 주 멤피스의 빈민가로 이사한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에 트럭 운전 등의 일을 하던 엘비스는 앞서 설명했듯이 우연한 기회에 가수의 길에 들어섰다. 초기의 엘비스는 말론 브랜도나 제임스 딘 같은 유명 배우의 냉소적인 반항아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차용했다. 특유의 외모도 나름의 계산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여드름을 가리려고 두툼한 메이크업을 선호했고, 눈을 돋보이게 하려고 마스카라와 아이섀도를 상용했으며, 나중에는 코에 약간의 성형수술도 받았다. 머리카락도 원래는 짙은 금발이었지만, 무대에 설 때면 항상 검은색으로 염색했다.

엘비스의 초기 활동에서는 음악 못지않게 영화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엘비스는 1956년부터 1969년까지 모두 31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대부분 뮤지컬이거나 노래를 중요한 소재로 삼은 영화였지만, 어디까지나 가수로서의 인기에 편승해 졸속으로 제작된 것이다 보니 흥행에는 성공했지만 혹평을 받기 일쑤였다. 재미있는 사실은 엘비스가 평생 춤에는 능숙하지 못해서, 영화 촬영 중에도 종종 안무가가 가르쳐 준 스텝을 까먹고 쩔쩔 맸다는 점이다. 그가 종종 무대에서 선보인 ‘엉덩이 춤’이 몰고 온 센세이션을 생각해 보면 역설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군 복무와 인기의 쇠퇴, 그리고 은둔 생활과 비극적인 최후

1957년 말, 엘비스는 징집영장을 받았다(미국은 1973년까지 징병제를 실시했다). 국방부에서는 연예 사병 근무를 제안했지만 엘비스는 외부의 시선을 의식해 그냥 일반 전투병으로 복무하기로 결정한다. 영화 제작으로 인해 한 번 입대를 연기한 그는 1958년 3월 24일에 머리를 깎고 군복을 입는다. 군 복무 기간 동안에 가장 큰 사건은 어머니의 사망이었다. 엘비스는 이 사건으로 큰 정신적 충격을 받았으며, 일각에서는 이후 그의 은둔과 기벽 역시 이 중대한 사건에서 비롯된 결과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해 가을, 엘비스는 기초 훈련을 마치고 서독의 미군 기지로 배치되어 18개월 동안 근무했다. 훗날 아내가 된 프리실라 블라우를 만난 것도 이때였다.

1958년 입영 전 머리를 깎으며 익살스런 표정을 짓고 있는 엘비스 프레슬리

1960년 3월 2일에 전역한 엘비스는 대대적인 환영을 받으며 귀국했다. 그러나 군 복무 중에도 여전했던 인기는 엘비스가 과거의 반항아 이미지를 벗어버리고 보다 성숙해진 모습을 보여주면서부터 조금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십대외에 장년층에게도 인정받으며 인기의 폭은 넓어졌지만, 그 열기는 예전만 못했던 것이다. 이때부터 엘비스는 음악보다 영화 쪽에 전념했고, 촬영이 없을 때에는 멤피스의 저택 그레이스랜드에 은거했다. 이른바 ‘멤피스 마피아’로 통하는 그의 친구들이 일종의 친위대 노릇을 하며 갖가지 향락의 뒤치다꺼리를 해주는 까닭에 종종 구설수에 올랐다.

1960년대의 엘비스는 음악적으로 슬럼프를 겪고 있었다. 데뷔 시절의 인기 요인이었던 빠른 템포의 곡에서 벗어나 It's Now or Never, Are You Lonesome Tonight 같은 스탠더드 팝 계열의 곡으로 변신을 꾀했지만, 팬들의 반응은 이전만큼 열광적이지 않았다. 비틀즈를 위시해 크림, 지미 헨드릭스, 도어스 등이 줄줄이 등장해서 로큰롤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던 그 즈음, 엘비스는 30대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이미 한물 간 스타로 여겨졌다. 특히 비틀즈는 1965년의 미국 투어 도중에 그레이스랜드에서 엘비스와 역사적인 만남을 갖는다. 그러나 정작 이들의 우상 엘비스는 1961년 이래 영화 말고 음악 공연은 한 번도 하지 않고 있었다.

1967년 5월 1일, 엘비스는 프리실라와 결혼한다. 이듬해에 외동딸 리사 마리가 태어났지만, 결혼 생활은 5년 만에 파경을 맞는다. 1968년에 엘비스는 컴백 공연을 통해 재기에 성공했고, 1973년에는 인공위성 생중계인 하와이 공연에서 다시 한 번 슈퍼스타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하지만 그의 건강상태는 이미 한계에 이르러 있었다. 그 한 해 동안 엘비스는 무려 네 번이나 죽을 뻔한 위기를 가까스로 넘겼다. 각성제로 시작한 약물 남용이 점점 더 강력한 약을 섞어 먹는 지경에 이르며 그의 몸을 망가트렸던 것이다.

1977년 8월 16일, 엘비스는 자택 화장실에서 쓰러진 채로 발견된다. 급히 병원으로 옮겼지만 이미 사망한 다음이었다. 사인은 심장마비였지만, 일각에서는 그의 약물 남용이 직접적인 원인이라는 주장이 제기되는 한편, 관계자들은 어째서인지 극구 말을 아끼는 바람에 지금까지도 종종 논란이 되고 있다. 갑작스런 타계 소식이 알려지자 미국은 물론이고 전 세계가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오늘날 멤피스는 미국은 물론이고 세계 곳곳에서 팬들이 순례하는 엘비스의 성지가 되었다.

1967년에 프리실라와 결혼해 이듬해 외동딸 리사 마리를 얻었다

흑인 음악을 훔친 백인 가수, 또는 십대 음악 시장의 개척자

‘왕’(The King)이라는 별명처럼 엘비스는 로큰롤의 역사에서 결코 빠트릴 수 없는 인물이며, 그 장르의 폭발적인 인기를 선도한 최초의 슈퍼스타였다. 빌보드 차트 10위권 안에 36곡, 1위에 17곡을 올렸고, 미국 내 1억 장 이상, 전 세계 10억 장 이상의 음반을 판매한 엘비스의 기록에 버금가는 음악인은 비틀즈뿐이다(참고로 비틀즈의 기록은 각각 29곡, 20곡, 1억 7천만 장 이상, 10억 장 이상이다). 엘비스의 흑인 창법은 한때 “흑인 음악을 훔친 백인 가수”라는 비난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반면 일각에서는 인종차별이 심하던 시절에 그나마 엘비스의 인기 덕분에 흑인 음악인의 운신 폭이 더 넓어졌다는 긍정적인 면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이보다 더 첨예한 논란은 엘비스의 인기가 음악성 때문인지, 아니면 한때의 유행 때문인지 하는 점이다. 아마도 그의 성공에서 음악 못지않게 ‘논란 마케팅’이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을 꼬집는 지적이 아닐까. 목소리 하나만큼은 훌륭한 엘비스였지만, 악기 연주나 작곡 능력을 비롯한 전반적인 음악성에서는 뚜렷한 한계를 지닌 것이 사실이었다. 초기의 폭발적 인기가 수그러진 다음, 오로지 음악성으로만 승부해야 할 시점에 내놓은 작품의 완성도가 높지 않았던 점은 이런 한계 때문으로 지적된다. 비틀즈를 위시한 다른 후배 음악인들이 새로운 실험과 변모를 시도했던 것에 비하자면, 과거의 영광에 안주하고 변화를 기피한 엘비스의 태도는 큰 아쉬움을 남겨주는 면이 아닐 수 없다

특유의 쇼맨십으로 무대를 압도하는 엘비스 프레슬리(1975년)

한편으로 엘비스의 인기는 십대 문화의 대두와 맥을 같이한다. 빙 크로스비와 프랭크 시내트라의 감미로운 스탠더드 팝이 대세일 때 청천벽력처럼 나타난 로큰롤은 기성세대와의 단절과 반항을 상징했다. 젊은이들은 로큰롤에서 억눌린 욕망의 분출구를 발견했다. 엘비스의 ‘엉덩이 춤’은 성적 암시를 담았다는 이유로 언론과 학부모에게 뭇매를 맞았고, 데뷔 초 TV에 출연했을 때는 공연 내내 카메라가 그의 상체만 비추었을 정도였다. 하지만 정작 십대들, 특히 소녀 팬들은 그 모습에 열광했다. 엘비스야말로 오늘날처럼 십대 팬을 대중음악의 중요한 소비계층으로 만든 장본인인 셈이다. 비록 반항아 이미지를 적극 차용하여 우상이 되긴 했지만, 엘비스 본인은 오히려 반항아와는 거리가 먼 모범생 타입이었다는 점도 흥미로운 역설이 아닐 수 없다.

엘비스는 죽었지만 그의 전설은 영원히 살아있다

엘비스의 약물남용 문제는 오래 전부터 숱한 논란의 대상이 되었지만 지금은 주로 암페타민 등의 각성제를 남용한 것이 사실로 인정된다. 그가 사망할 즈음에는 재정 상태 역시 적잖은 문제가 있었다는 점은 또 다른 의외의 사실이다. 무절제한 사치생활 때문이기도 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엘비스가 수입의 절반 이상을 매니저인 ‘대령’에게 뜯기는 전형적인 노예계약의 희생자이기 때문이었다. 제아무리 로큰롤의 슈퍼스타라 하더라도, 예나 지금이나 똑같은 연예계의 비리 앞에서는 무력했던 셈이다. 엘비스 사후에 유족들은 결국 ‘대령’을 상대로 법정 투쟁을 벌여 고인의 권리를 일부나마 회복했다. 오늘날 엘비스 관련 산업은 매년 수천만 달러의 수익을 내고 있다.

한때나마 세상 누구도 부럽지 않은 막대한 부와 명예를 거머쥔 엘비스였지만, 그의 내면에는 그 모든 것이 졸지에 물거품으로 돌아갈지도 모른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항상 자리 잡고 있었다. 군 복무 시절, 그는 자신의 인기가 뚝 떨어져서 결국 모든 것을 잃고 예전과 같은 빈털터리가 되는 악몽을 자주 꾸었다. “힘든 일, 눈물, 잠 못 이루는 밤이 얼마나 많았는지 사람들은 몰라요.” 엘비스의 말이다. “엘비스 프레슬리로 존재하는 데 너무 지쳤단 말이에요.” 그의 이런 발언 때문일까? 지금도 어떤 사람들은 엘비스가 죽지 않았으며 어디선가 은둔 생활을 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엘비스는 죽었지만 그의 전설만큼은 결코 죽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화다.

필자가 추천하는 덧붙여 읽으면 좋은 책

우리나라에 나온 엘비스 프레슬리의 전기로는 피터 해리 브라운과 팻 H. 브로스키 공저의 <엘비스, 끝나지 않은 전설> 이 아직까지는 유일무이하다. 다만 이 책은 정작 엘비스의 음악보다는 마약과 연애 같은 사생활에 초점을 맞추었다는 점 때문에 팬들의 비난을 받는다. 여기서 문득 떠오르는 의문은, 과연 한 예술가의 생애와 업적은 어떤 연관이 있을까 하는 점이다.

생애의 문제점 때문에 업적이 폄하되어서도 안 되지만, 반대로 업적 때문에 생애가 미화되어서도 곤란할 것이다. 이런 면에서 엘비스는 어느 누구보다 더 치열한 논란의 대상이 되는 인물이고, 그에 관한 평가는 관점에 따라 “위대한 가수”에서 “약물 중독자”에 이르기까지 극과 극을 달리기 일쑤다. 엘비스의 사후에는 특히나 “신화 깨트리기”의 경향을 지닌 비판과 폭로가 연이어졌다. 하지만 뒤집어 보자면 그런 경향은 그의 생전에나 사후에나 “신화 구축하기”가 지나쳤기 때문일 수도 있다. 애초에 미화와 은폐가 컸던 까닭에 폭로와 고발의 후유증 역시 컸던 것은 아닐까. 이런 논란과 검증이야말로 한 인물이나 사건이 역사로 자리 잡는 과정에서는 당연히 벌어지게 마련임을 기억한다면, 한 사람에 대한 다양한 (물론 때로는 좀 심한 경우도 있지만) 평가를 무작정 잘못되었다고 비난할 수도 없는 일이다.

보다 종합적이고 입체적인 평가를 위해서는 찬사뿐 아니라 비난까지도 청취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런 경우에 해당하는 책이 <엘비스 프레슬리의 연인들>(정영일 옮김, 대종출판사, 1978)은 아닐까 싶다. 엘비스는 사망 직전인 1976년에 자신의 친위대인 ‘멤피스 마피아’ 가운데 세 명(레드 웨스트, 소니 웨스트, 데이비드 헤블러)을 돌연 해고했다. 이에 대한 앙갚음으로 이들은 엘비스의 사생활을 폭로하는 책을 썼는데, 위의 책은 그 번역본이다. 다분히 선정적인 내용이지만 엘비스를 가까이에서 지켜본 사람들의 증언(비록 어느 정도의 과장이나 악의가 있다 치더라도)임을 고려해 본다면 참고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본다.

엘비스의 음악에 관한 보다 진지한 논의는 찰스 T. 브라운의 <비틀즈 뒤집기> 의 관련 항목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제목만 보면 마치 비틀즈에 관한 책 같지만, 원제는 “로큰롤의 예술”(The Art of Rock and Roll)로 엘비스에서 시작해 비틀즈를 거쳐, 포크 록, 아트 록, 잉글리시 록, 컨트리 록, 헤비메탈로 발전해 나가는 로큰롤의 역사를 주요 장르와 음악인 별로 일별하는 책이다. 저자는 엘비스의 음악적 스타일을 가사, 보컬 특징, 무대 매너, 신앙심과 성적 매력, 후대에 미친 영향 등의 여러 가지 주제로 나누어 고찰하고 있다. 하지만 엘비스의 본령이 가수이니만큼 그의 노래를 듣는 것이 무엇보다도 필수이리라. 아울러 지금은 여러 인터넷 사이트에서 그의 활동 초기와 말기의 공연 모습을 비롯한 다양한 동영상을 찾아볼 수 있어서, 그의 전성기 때 모습을 대략이나마 짐작할 수 있게 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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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William V. Robertson 출처: 20세기 디자인 아이콘 : 앨범커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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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발행일 : 2009. 08. 04.

출처

제공처 정보

  • 박중서 출판기획자, 번역가

    글쓴이 박중서는 [약소국 그랜드 펜윅] 시리즈인 [뉴욕 침공기]와 [월스트리트 공략기] 등 수 십권의 책을 우리 말로 옮긴 번역가다. 1만권이 넘는 책을 소장했으며, 독서 관련 칼럼을 쓰고 있다. [불굴의 용기], [끝없는 탐구] 등 인물 논픽션을 번역했으며 외국 인물들에 대해 관심을 갖고 꾸준히 소개하고 있다.

  • 이미지 gettyimages/멀티비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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