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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세계사

빌 클린턴

제 42대 미국 대통령

[ Bill Clinton ]

출생 1946.8.19.

1999.2.12 르윈스키사건 위증과 사법방해 혐의로 제출된 탄핵 동의안 부결되다

나는 잘못된 행동으로국민들에게큰 부담을 안겨줬던 점에 대해 깊이 사과하고 ‘미국의 화해와 부흥의 시대’를 이루기 위해 다시 헌신할 것임을 밝혔다. 누군가가 내게 “당신은 진심으로 용서하고 잊을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나는 대답했다. “용서를 구하는 사람은 용서하려는 마음의 준비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고 생 각합니다.”

인간적인 약점을 극복하고미 대통령 재선에 성공하다

백악관 회의중에 귓속말을 주고 받는 빌 클린턴과 영부인 힐러리 클린턴(2000)

예일 법대 강의실에서 그 동안 사귀던 여학생에게 실연당한 지 얼마 안 된 학생 하나가 당분간은 여자 친구를 절대 사귀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있었다. 그때 앞자리에 앉아 있는 화장기가 전혀 없고 두꺼운 안경을 낀 여학생이 이 젊은이의 눈길을 끌었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 년 동안의 고독>을 수업시간에 읽던 그 학생. 교수가 자신의 강의보다 더 재미있는 책이 그 소설이냐는 물음에 그 남(??)학생은 '이 책은 윌리엄 포크너 이후 가장 위대한 소설'이라고 대답한 적도 있었다. 그는 곧 그 여학생을 졸졸 쫓아 다니고 구애하여학생 커플이 되고동거를 시작한다. 남학생은 어려서부터 존 F. 케네디 같은 정치인이 되고 싶었고, 여학생은 법학도로서 자존감이 강하고 매력적인 지성인이었다. 남학생의 이름은 빌 클린턴, 여학생의 이름은 힐러리 로댐이었다.

힐러리와 사랑에 빠진 클린턴은 더 이상 여학생들의 꽁무니를 쫓아다니지 않고 열심히 공부해서 정치인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이 꿈꾸었던 케네디처럼 젊은 미국 대통령이 되어 민주당 역사상 루스벨트에 이어 두 번째로 재선에 성공했다. 클린턴은 재임기간 중 유연한 정치적 역량으로 국제 관계, 인종, 정치, 종교적 갈등 완화, 교육 개혁에 공헌했고, 특히 비약적인 미국 경제 성장에 기여하였다. 1999년까지 미국은 경제적으로 역사상 최고의성장기록을 세웠다. 클린턴이 대통령에 취임한 후, 1,800만 명의 신규고용, 실질 임금 상승, 소득 불균형의 점진적인 개선이 이루어져 1957년 이후 평화 시 최저 실업률을 기록했다. 클린턴 대통령이 이끄는미국은 젊고 활기찼고 정치적으로 건강했다.

공부 벌레 힐러리와의 운명적인 만남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그는 지금도 각종 사회 활동을 하고 있다. 부인 힐러리 역시 버락 오바마와의 민주당 대선 경선에서 패하긴 했지만, 국무장관이 되어 정열적인 활동을 펼치려 하고 있다. 클린턴과 힐러리에게는 아쉬운 일이 되었지만 미국은 제 44대 대통령으로 61년생 소띠인 민주당의 오바마를 선택했다. 지금 미국 국민들은 오바마에게 클린턴의 능력을 원하고 있을 것이다. 단순히 경제적인 요인만이 아닐 것이다. 젊고 정직하고 깔끔하고 ‘변화’를 주도하는 능력 있는 정치인으로서 오바마는 무거운 짐을 지고 있다.

클린턴은 불우한 유년기를 보냈다. 1946년 8월 19일 유복자로 태어난 클린턴은 미국의 남부 아칸소 주 시골 마을에서 성장한다. 이후 재혼한 어머니와 알코올 중독에 폭력적이었던 계부와의 사이에서도구김살 없이 성장했다. 클린턴은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외할머니는 클린턴을 건강하고 책 읽기 좋아하는 모범적인 소년으로 성장시켰고 외할아버지는 미국 남부에서 인종 차별 없는 삶을 몸소 실천했다. 어린 시절 클린턴은 동네에서 유일하게 흑인 아이들과 노는 소년이었다. 클린턴은 외할아버지를 통해 평생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귀를 가지고,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고, 알고, 느끼는 인간이 되기 위해 노력했다.

케네디 대통령과 악수한 소년,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연설에 울다

일찍이 대통령의 꿈을 키웠던 학창 시절의 클린턴

그는 언제부터 정치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을까? 우리는 소년단원으로존 F. 케네디 대통령과 악수하는 16세 클린턴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지만, 그는 이 때보다는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연설을 듣고 공적인 일에 투신해야겠다는 강력한 영향을 받았다고 고백한다. “1992년 내가 민주당 대통령 후보가 된 뒤 사람들이 이 필름(케네디와 악수하는)을 두고대통령이 되고자 한 나의 꿈이이 때부터 시작됐다고 이야기하곤 한다. 사실 나는 잘 모르겠다. 집에 돌아온 뒤 핫 스프링의 미국재향군인회에서 했던 연설문 사본을 지금도 가지고 있는데, 거기에서는 케네디와 악수한 것을 별로 중요하게 이야기하지 않았다. 당시 나는 상원의원이 되고 싶다는 생각은 했다. 그러나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링컨이 젊은 시절에 쓴 글처럼 생각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공부하고 준비하겠다. 그러면 내게 기회가 올지도 모른다.” “나는 킹 박사연설을 들으며 울기 시작해,그가 연설을 끝낸 뒤에도 한참 울었다. 그는 내가 믿는 것을 말했다. 내가 말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훌륭하게 말했다.그 연설을 들으면서 마틴 루터 킹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평생 동안 무슨 일이든 하겠다는 결심을 굳히게 된다.2주 뒤 나는 고등학교 3학년이 되었다.”

클린턴은 정치도시인 워싱턴에 가고 싶다는 일념으로 아이비리그가 아닌 조지타운대학교의 외교 대학에 입학했다. 그는 고교 졸업식의 대표 기도에서 우리에게 우리 국민을 강하게 해주었던 젊은 이상주의와 도덕주의가 떠나지 않게 해주기를, 우리는 죽어도 다른 사람들은 여전히 자유로운 땅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하게 해 달라는 기도를 한다. 이후 클린턴은 존 F. 케네디의 동생이자 민주당 대통령 후보였던 바비(로버트의 애칭, 클린턴은 그를 ‘바비’라고 쓴다) 케네디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 존 F. 케네디의 암살 이후, 미국 사회의 가장 큰 불행이었던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암살은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를 경악시켰다.

자신의 형과 미국의 양심을 모두 잃은 바비 케네디는 그리스 시인인 아이스킬로스의 시를 인용하여 그의 일생에 가장 훌륭한 연설을 했다. 고통을 통해서 지혜를 가져다 준다는 시인의 마음으로 그는 이 시련을 이겨낼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우리는 오랜 전에 그리스인들이 남긴 글을 마음에 새겨 인간이 가진 야만성을 길들입시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의 삶을 고결하게 만들기 위해 기도합시다’ 하고 연설을 마쳤다. 민주당 지지자였던 클린턴은 바비 케네디에게서 희망과 신념을 보고 열정을 불태웠다. 클린턴의 정신적 지주였던 바비 케네디는 마틴 루터 킹이 암살당한 지 두 달하고도 이틀 째 되던 날, 42세의 젊은 나이에 암살당한다. 폭력과 편견과 인종차별은 미국의 부끄러운 치부였다.

풀 뿌리 선거유세를 통해 정치인으로서 성장하다

이 격동기에 클린턴은 워싱턴에서 대학의 마지막 학기를 보내고 있었다. 졸업 축하 행사가 취소되는 등 암울한 시절이었지만 클린턴에게 행운이 찾아왔다. 미국에서 32명의 엘리트 대학생을 선발해 영국 옥스퍼드 대학 장학생으로 2년간 공부하게 하는 프로그램인 ‘로즈 장학생’에 선발된 것이다. 그는 영국으로 향하는 배에서 ‘로즈 장학생’에 선발된 미국의 엘리트들과 친해졌는데, 이들은 훗날 클린턴이 대통령이 되었을 때 진정한 친구로서 미국을 위해 같이 일을 하게 되는 주역들이었다. 당시 미국은 베트남 전쟁으로 국론이 분열되고 혼란의 도가니에 빠져 있었다. 그는 반전운동을 하던 민주당 지지자들을 경찰이 과잉 진압을 하는 모습을 보고, 민주당원으로서 진보적인 정치인으로서 진보와 보수, 좌편향과 우편향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다.

딸 첼시와 함께 힐러리 클린턴 지원 유세에 나선 클린턴(2008년)

“나는 슈리브포트의 작은 호텔 객실에서 이 모든 사태를 지켜보면서 양쪽 당사자들의 감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전쟁과 경찰의 만행에 반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칸소에서 자라난 나는 날마다 맡은 바 의무를 다해야 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노고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극단적인 좌편향 혹은 우편향에 대해서 상당한 불신을 가지고 있었다. 좌익은 공허한 열광 때문에 자신의 역량을 제대로 펼쳐 보이지 못한 채 우익의 과격한 반동만 불러온 꼴이었다. 우익은 더 견고하고 더 체계적이며, 여전히 책략도 더 풍부하고 권력에의 집착이 더 강하며, 권력을 장악하고 유지하는 능력도 훨씬 뛰어나다는 것을 입증해 보이고 있었다.” 그는 공직 생활의 대부분을 문화적 심리적인 분열을 통합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노력하면 할수록 극우주의자들은 난폭해진다고 고백했다. 극우주의자들은 미국이 통합된 사회로 돌아가는 것을 원치 않았으며, 적과의 갈등을 유지하는 정책을 원했다.

32세에 아칸소의 주지사에 당선되다

그는 옥스퍼드에서 돌아와 예일 법대를 다니던 시절에 힐러리를 만났는데, 두 사람은 변호사 시험에 나란히 합격했다. 힐러리는 매사추세츠로 떠나고, 그는 고향인 아칸소에서 법대교수로서 지내면서 하원의원에 첫 출마했다. 그는 시골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는 ‘풀 뿌리 선거유세’에 나선다. 뛰어난 연설로 많은 지지자들이 생겨 승리를 확신했지만 결국 패배한다. 이 날의 패배로 이후 18년간의 소중한 아칸소 시절이 시작된다. 한 번의 패배로 그는 거대한 승리인 미국 대통령 당선의 기틀을 마련한다. 그는 성급하게 의원이 되어 워싱턴으로 가는 대신에 아칸소에서 착실하게 정치인으로 능력을 키운다. 노선을 바꾸어 아칸소 주지사에 출마한서른 두살젊은 정치인은 역대 최연소 주지사에 당선된다. 하지만 현실정치에 어두웠던 클린턴은 여러 가지 실정을 하게 되고 재선에 실패한다. 이 시절에 딸 첼시가 태어난다.

신은 인간에게 고통만을 주지 않는다. 고통이라고 생각되었던 일들도 다시 뒤집어 보면 그것이 바로 기쁨의 얼굴이었음을 알게 된다. 클린턴은 또다시 주지사에 도전해 성공한다. 이후 성공적인 주지사 활동으로 그는 미국주지사회의 부의장을 거쳐 의장까지 역임한다. 클린턴이 주지사로 있던 시절 아칸소는 비약적인 경제발전을 했고, 의장 시절에는 전국교육위원회 의장직을 맡았다. 클린턴은 경제, 복지 정책의 성공적인 실천과 치솟는 인기로 대통령 출마를 고려했다. 하지만, 전국적인 기반을 더 넓혀야 한다는 힐러리의 조언에 따라 포기하고, 교육개혁에 전념한다.

불리한 상황에서 정책 위주의 토론으로 대통령 당선

2000년6월25일 워싱턴에서 열린 한국전쟁 50주년 행사에서 연설중인 클린턴

클린턴은성공적인대통령으로 평가되지만, 출마 당시에는 그가 대통령이 되리라고 쉽게 예상할 수 없었다. 단 한 사람만이 그가 대통령이 될 거라고 믿었는데,바로 클린턴 자신이었다. 그는 선거전에서 여러 가지 악재에 시달렸다. 미국 남부 촌뜨기 이미지를 활용해 공화당의 부시는 정책보다는 인신공격에 가까운 선거전을 펼쳤다. 클린턴은 여러 가지 불리한 상황들에도 불구하고 정책 위주의 토론을 벌여 성공했다. 누구나 마찬가지이겠지만, 완벽한 사람은 없다. 클린턴은 재임기간 중에 르윈스키 사건으로 탄핵 위기를 맞게 된다. 개인적인 실수에 초점을 맞추어 탄핵을 추진한 공화당의 뜻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미국 국민들은 경제적 발전과 국익을 가져온 성공적인 정책을 지지했다. 선거에서 민주당은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대통령 탄핵이라는 악재 속에서도 민주당이 선거에서 완승을 거둔 것은 국민들이 클린턴을 용서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내 결점이 심각하다 해도 나를 비판하는 사람들의 권력욕이 민주정부에 더 위협적

“나는 수많은 돌에 맞았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입힌 상처를 드러낸 채 전 세계에 벌거벗겨졌다. 그것은 어떤 면에서 보면 해방이었다. 더 이상 감출 것이 없으니까, 나는 나 자신이 왜 그런 실수를 했는지, 나의 적수들은 왜 그렇게 증오심에 불타서 자신들이 공언하는 도덕적인 확신에 어긋나는 말들을 했는지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나 자신의 도덕성과 인간적 약점에 대한 인식, 그리고 어린 시절 내가 받았던 무조건적인 사랑 때문에 다른 사람을 심판하고 비판하려 하는 강박감은 없었다. 나는 나의 결점이 아무리 심각하다고 해도, 그것은 나를 비판하는 사람들의 권력욕에 비하면 민주적인 정부에 그다지 큰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2004년11월. 자신의 고향에 세워진 빌 클린턴 도서관을 찾은 클린턴

클린턴은 재임기간 중에 우리나라의 김영삼 대통령과 김대중 대통령을 만났고, 김대중 대통령의 ‘햇볕정책’을 지지했다. 남북한의 화해의 장을 마련하기 위해 북한 방문까지 고려했지만, 결국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성공적으로 8년간의 재임기간을 마치고 전통에 따라 대통령의 레졸루트 책상에 후임자를 위한 편지를 올려놓고 국민들에게 고별연설을 했다.

“나는 먼저 대통령으로 일할 기회를 준 미국 국민들에게 감사의 뜻을 전하고, 대통령으로서 어떤 철학을 가지고 무슨 일을 했는지 간단하게 요약했다. 나는 미래의 과제 세 가지를 제시했다. 첫째, 계속해서 국가 재정을 올바르게 관리하고 책임을 감당하는 것, 둘째 미국의 안보와 번영을 위해서 세계의 경제 번영과 자유를 위한 싸움의 선두에 나서고 테러리즘과 조직범죄, 마약거래, 치명적인 무기의 확산, 환경파괴, 질병, 지구상의 모든 빈곤과 맞서 싸우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여러 가지 피부색을 가진 사람들을 씨실과 날실로 삼아 통합된 미국이라는 천을 짜는 일’을 지속하는 것이었다.” 더불어 미국이 세계적으로 전개해 온 지뢰 금지 활동을 앞으로 10년 더 지속해 줄 것을 마지막으로 당부하고 미국시민으로 돌아갔다. 50대의 건강한 남자는 앞으로도 할 일이 많다는 환한 웃음을 남겼다. 그것은 미국뿐 아니라, 세계인들의 희망의 얼굴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인간적인 결점인 여성문제는 퇴임 후에도 간혹 가십거리가 되어 세계인들의 주목을 끌기도 한다.

필자가 추천하는 덧붙여 읽으면 좋은 책

클린턴이 집필한 <빌 클린턴의 마이 라이프>는 미국의 현대사 중에서도 매우 중요한 시기를 퇴직 대통령의 시선으로 쓴 책이다. 미국이라는 거대한 나라의 격동기를 살았던 젊은이의 모습, 공화당과 민주당의 대결, 인권문제에서부터 중동평화문제 그리고 분단국인 우리나라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클린턴은 언제나 자신의 존재를 그 자리에 두고 있었다. 한 사람에 대한 완전한 평가는 그가 죽고 나서 먼 훗날의 일이다. 그가 가지고 있었던 여러 가지 부적절한 모습마저도 한 인간으로서 솔직하게 고백했다. 미우나 고우나 미국은 전 세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미친다.

우리나라 야당 의원들이 오바마가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때 기뻐하는 모습을 보라. 클린턴은 자서전을 통하여 역시 자신의 오류에 대한 변명보다는 뛰어난 정치인으로서의 모습을 잘 보여주었다. 또한 빌 클린턴은 <Giving :우리 각자의 나눔으로 세상을 바꾸는 법>을 썼다. 사람들의 공공의 이익을 위해 나눔을 베푸는 사람들, 빌 게이츠, 오프라 윈프리, 워렌 버핏, 모하메드 유누스 등 나눔을 실천한 인생을 통하여 받은 일보다 주는 일의 중요함을 이야기한다. 이 책에는 75년 동안 세탁소를 운영하며 근근이 모은 15만 달러를 흑인 학생들의 장학금으로 미시시피 대학에 기부한 오시올라 맥카티가 나온다. 클린턴은 정치를 나누는 일로 생각한다. 그것이 정치적인 일일지라도, 남의 손에 쥔 것까지 뺏으려고만 하는 세태에 익숙한 우리들에겐 매우 신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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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출처: 게티이미지 코리아)

발행일

발행일 : 2009. 02. 12.

출처

제공처 정보

  • 원재훈 시인, 소설가

    글을 쓴 원재훈은 1988년 시 '공룡시대'로 등단했으며 <낙타의 사랑>, <사랑은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라 하네> 등의 시집과 <만남, 은어와 함께 보낸 하루>, <모닝커피>등의 소설, <네가 헛되이 보낸 오늘은 어제 죽은 이가 그토록 그리던 내일이다.>, <나무들은 그리움의 간격으로 서 있다> 등의 산문집에 이르기까지 왕성한 집필을 통해 독자들과 만나고 있는 작가이다.

  • 이미지 gettyimages/멀티비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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