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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세계사

맬컴 엑스

급진적 미국 흑인 인권운동의 기수

[ Malcolm X 음성듣기 ]

출생 - 사망 1925.5.19. ~ 1965.2.21.

1965.2.21 16발의 총탄을 맞고 세상을 떠나다

흑인의 자유와 권리를 위해 투쟁했으나 여러 가지 면에서 마틴 루터 킹과 대조를 이루는 인물이 맬컴 엑스다. 뉴욕 할렘의 밑바닥 인생을 전전하다 무슬림이 되어 급진적 흑인해방운동을 이끈 맬컴 엑스. 스파이크 리 감독, 덴젤 워싱턴 주연의 영화 ‘맬컴 X’로도 잘 알려진 그의 치열했던 삶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한 때 몸담았던 '이슬람 국가운동'에 의해 암살 당하다

뉴욕 맨해튼의 오두본 볼룸. 시각은 오후 3시 10분. 맬컴 엑스가 막 연설을 시작할 무렵이었다. 아프리카계 미국인 단결기구(OAAU: Organization of Afro-American Unity)가 주최한 행사였다. 400명 정도의 청중들 사이에서 소란이 일었다. 한 남자가 갑자기 소리를 질렀던 것. “깜둥이 녀석! 더러운 손을 떼!” 보디가드들이 상황을 진정시키려는 순간 샷건 총탄이 맬컴 엑스의 가슴을 향해 발사됐다. 맬컴 엑스의 한 손이 가슴 위로 내려졌다. 곧바로 다른 두 남자가 연단 쪽을 향하며 권총을 발사했다. 맬컴 엑스의 다른 한 손이 위로 치켜 올려졌다. 흥건하게 흐르는 피. 16발의 총탄이 맬컴 엑스를 뒤로 쓰러뜨렸다. 청중들은 범인 한 사람을 붙잡았지만 다른 두 사람은 빠져나가고 있었다. 맬컴 엑스는 컬럼비아 장로교회 병원으로 옮겨진 직후 공식 사망선고가 내려졌다. 1965년 2월 21일이었다.

무자히 할림(토머스 헤이건과 탈마지 헤이어라는 두 개의 이름으로 활동했다)이 그 자리에서 체포됐다. 그는 이른바 ‘검은 무슬림’ 즉 흑인분리주의 종교운동인 ‘이슬람 국가운동(Nation of Islam)’ 소속이었다. 그리고 목격자들이 두 사람의 용의자 무하마드 압둘 아지즈(노먼 3X 버틀러)와 칼릴 이슬람(토머스 15X 존슨)을 지목했으며, 둘은 체포됐다. 무자히 할림은 범행을 부인하다가 재판 진행 중 범행을 인정했다. 무자히 할림은 무하마드 압둘 아지즈와 칼릴 이슬람이 현장에 없었고 암살에 연루되지도 않았다고 증언하면서 나머지 범인들의 이름을 대지 않았지만, 결국 세 사람 모두 유죄 판결을 받았다. 무하마드 압둘 아지즈는 1985년에 가석방되어 1998년에는 뉴욕 할렘의 이슬람 국가운동 성원(聖院) 대표자가 되었다. 그는 자신이 무죄임을 주장해왔다. 한편 칼릴 이슬람은 1987년에 석방됐다. 교도소에서 그는 이슬람 국가운동의 신조를 거부하고 수니파 무슬림이 되었다. 그 역시 자신의 무죄를 주장해왔다. 한편 무자히 할림은 1993년에 석방됐다. 마치 사형집행이라도 하듯 총탄을 16발이나 발사해 사람을 죽인 이들은 이렇게 장기 복역을 마치고 모두 석방되었다.

어머니 뱃속부터 폭력적이고 잔인한 흑백 인종차별을 겪다

맬컴X(오른쪽)와 버락 오바마의 초상화를 함께 걸어둔 뉴욕 할렘가

‘어머니의 이야기에 따르면, 내가 어머니 뱃속에 있던 어느 날 밤, 두건 쓴 큐 클럭스 클랜(KKK:Ku Klux Klan) 단원 한 패가 말을 타고 네브래스카 오마하시에 있는 우리 집에 쳐들어왔다. 그들은 집을 포위하고 엽총과 소총을 휘두르며 아버지에게 나오라고 고함을 질렀다. 어머니가 문을 열었다. 어머니는 자신이 임신 중임을 그자들이 똑똑히 볼 수 있는 위치에 서서, 지금 혼자 꼬마 셋을 데리고 집에 있으며 아버지는 설교 하러 밀워키에 출타 중이라고 말했다. 클랜 단원들은 아버지가 마커스 가비(자메이카 출신 흑인 지도자)의 ‘아프리카로 돌아가자’는 주장을 오마하의 선량한 흑인들 사이에 퍼뜨려 말썽을 일으키고 있다고 말했다. 그 꼴을 선량한 백인 기독교도들이 더 이상 두고 볼 수가 없다고 했다. 우리 가족이 마을에서 떠나는 게 좋을 거라고 어머니에게 큰소리로 협박 겸 경고를 했다.’

맬컴 엑스, 아니 본래 이름대로 하면 맬컴 리틀은 이렇게 뱃속에서부터 폭력적이고 잔인한 흑백 인종차별의 현실을 겪어야 했다. 맬컴 엑스의 아버지 얼 리틀 목사는 침례교회 순회목사이자 세계흑인개선협회(UNIA)의 조직담당자였다. 이 협회는 마커스 가비가 주도하는 단체로, 흑인들이 선조의 땅 아프리카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아버지의 형제 여섯 중 셋이 백인에게 살해됐고, 한 사람은 린치를 당해 죽었다. 어머니 루이즈 리틀(루이자 노턴)은 흑백 혼혈인이었다. 맬컴 엑스의 외할아버지가 스코틀랜드계 백인이었던 것. 맬컴 엑스는 이를 두고 “내 안에 있는 백인 강간자의 모든 피를 증오한다”고 말했다. 아버지 얼 리틀 목사는 1931년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전차 사고로 사망했지만, 백인우월주의자들의 소행이라는 설이 당시부터 분분했다.

중학교 2학년(미국의 8학년) 때까지 성적이 우수했던 맬컴 엑스는 자신의 장래에 관해 변호사가 되면 좋겠다는 희망을 밝혔다. 그러나 이 희망을 들은 백인 영어교사가 맬컴 엑스에게 말했다. “삶에서 제일 필요한 건 현실적인 자세다. 내 말을 오해하지는 마라. 사람들이 너를 좋아한다는 건 너도 알 거야. 하지만 넌 깜둥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해. 네가 가질 수 있는 직업을 생각해봐라. 넌 물건 만드는 재주가 좋지. 모두들 목수 솜씨를 높이 쳐준다. 왜 목수일을 해보겠다는 계획을 세우지 않니? 사람들이 인간적으로는 너를 좋아하니까 일거리는 얼마든지 얻을 수 있을 거야.” 8학년을 마치는 날 맬컴 엑스는 학교를 자퇴하고 이복누이가 사는 보스턴으로 향했다.

맬컴 리틀에서 맬컴 엑스로. '푸른 눈의 백인 악마'가 붙여준 이름을 버리다

보스턴에서 맬컴 엑스의 삶은 밑바닥 그 자체였다. 나이트클럽 구두닦이, 접시닦이, 열차 물건 판매원 등을 전전했다. 그리고17살 때 뉴욕의 할렘으로 갔다. 범죄 소굴의 대명사로 일컬어지는 흑인 빈민가에서밀매, 도박, 사기, 공갈, 강도, 뚜쟁이 등의 일을 하다가 1945년 말 보스턴으로 가서 백인 주택을 털다가 체포됐다. 절도범으로징역 8년 형을 선고 받고 매사추세츠 교도소에 수감된 맬컴 엑스는교도소 생활 동안삶의 방향을 송두리째 바꾸게 된다. 소등 뒤에도 복도의 희미한 불빛을 조명 삼아 닥치는 대로 책을 읽어댔다. 영어 공부도 제대로 하고 라틴어 통신강좌까지 수강했다. 독학으로 공부한 동료 수감자 존 엘튼 벰브리(‘빔비’라는 별칭으로 불림)의 권유로 시작한 공부였다. 맬컴 엑스는 나중에 알렉스 헤일리와 자서전 구술 작업을 함께 할 때,운전 중에뉴욕공공도서관의 숌버그 흑인문화연구센터 입구 근처에서 주사위 놀이를 하는 흑인 청년 세 사람을 보고 차에서 내려 그들에게 말했다. “저 문 뒤에는 흑인에 관한 세상의 온갖 책들이 다 있어! 자네들이 주사위 놀이나 하고 있을 때 다른 사람들은 저 안에서 우리 흑인에 관해 공부하고 있단 말이야! 내가 얼마나 학창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지 아나? 6학년 정도로만 돌아갈 수 있다면, 정말 그럴 수만 있다면 저 도서관에서 밤을 새며 공부할 수 있을 텐데 말이지.”

1948년, 형 필버트가 이슬람 국가운동을 소개하는 편지를 보내왔다. 맬컴 엑스의 남매들 중 여럿이 이미 무슬림이 되어 있었고, 맬컴 엑스도형이 보낸 편지 내용에 흥미를 느끼면서 이슬람 국가운동 지도자엘리야 무하마드와 서신을 교환했다. 1952년 가석방으로 수감 생활에서 벗어난 맬컴 엑스는 엘리야와 만났다. 그에게 엘리야는 구원의 빛 그 자체였다. 무하마드에 깊이 감화된 맬컴 엑스는 성을 리틀에서 엑스(X)로 바꿨다. ‘푸른 눈의 백인 악마가 리틀이라는 자신의 성을 나의 선조에게 붙였던 것’이고 ‘(흑인) 무슬림의 X는 결코 알 수 없는 진정한 아프리카 조상 집안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무슬림으로 새롭게 태어난 맬컴 엑스는 1953년부터 이슬람 국가운동의 열렬한 조직원으로 활동하며 엘리야와 함께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TV프로그램 ' 증오가 낳은 증오'를 통해 전국적 명성을 얻으면서 국제적으로 주목 받다

1953년부터 미 연방수사국(FBI)이 맬컴 엑스에 관한 파일을 개설했다. 맬컴 엑스가 스스로를 공산주의자라 자처했기 때문이었다. 맬컴 엑스와공산당의 연계 가능성에 대한 FBI의 관심은 곧 이슬람 국가운동에 대한 요주의로 이어졌다.맬컴 엑스는 특유의 조직력과 카리스마로 디트로이트, 보스턴, 필라델피아 등에 이슬람 국가운동 성원을 속속 개설했고, 1954년 5월에 뉴욕 할렘 성원의 지도자가 되어 신도 수를 확장시켜 나갔다.

투기장에 모인 흑인들 앞에서 연설 중인 맬컴X

이슬람 국가운동의 조직원은 1952년 맬컴 엑스가 처음 몸담을 때 500명 정도에 불과했으나, 1963년에는 2만5천 명으로 늘어났다. 1959년 뉴욕의 TV 방송에서 이슬람 국가운동에 관한 ‘증오가 낳은 증오’라는 제목의 프로그램을 방영했고, 이후 맬컴 엑스는 전국적 명성을 얻으면서 각종 사회, 정치적 이슈에 관해 신문, 잡지, 방송 매체에서 견해를 밝히기 시작했고 국제적으로도 주목 받기 시작했다. 맬컴 엑스는 특히 1963년 8월의 ‘일자리와 자유를 위한 워싱턴 행진’을 비판했다(이 행진은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라는 연설로 유명하다). “살아 있을 때 우리를 좋아하지 않았던, 백 년 전에 죽은 대통령의(링컨) 상(像) 앞에서 백인들이 주도하는 시위에 왜 흑인들이 열광해야 하는가?” 맬컴은 백인들을 ‘악마’라 칭했고, 이에 백인우월주의자들의 공적 (公敵) 1호가 되었다. 늘 살해 위협에 시달렸기에 소총을 들고 스스로를 방어해야 할 때도 있었다.

성지 메카 순례 이후 인종 간 평화의 전도사가 된 맬컴 엑스

1963년 12월 1일, 맬컴 엑스는 케네디 대통령 암살(11월 22일)에 관한 의견을 요청 받자 싸늘한 어조로 “자업자득이니 내가 슬퍼할 까닭이 없다”고 말했다. 케네디에 대한 추모 분위기 속에서 맬컴 엑스의 그런 반응은 큰 논란과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이슬람 국가운동 측도 케네디 유족에 대한 애도 메시지를 발표하면서, 소속 간부들에게 암살에 대한 공식적인 의견 표명을 하지 말 것을 지시한 상태였다. 맬컴엑스는 조직에서의 지위는 유지했지만, 공개적으로 의견을 표명하는 것을 석 달 간 금지 당했다. 그리고 1964년 3월 8일, 맬컴 엑스는 공식적으로 이슬람 국가운동과의 결별을 선언했다. 자신은 계속해서 무슬림으로 남겠지만, 이슬람 국가운동이 지나치게 완고한 종교적 신조에 자승자박 당해 있으며, 이제 자신은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정치의식을 고양시키기 위한’ 흑인 민족주의 조직을 결성해나가겠다는 것이었다. 이슬람 국가운동은 백인들은 선천적으로 악하고 사후 세계는 없다고 주장했다. 노예 시절에 대한 보상으로 미국 내 아프리카계 미국인 국가 수립을 요구했고, 서방 세계에 대해 극단적으로 적대적이었다. 맬컴 엑스는 이슬람 국가운동에서는 시도하기 힘들었던 일, 즉 다른 민권 지도자들과 연대하고 싶다는 뜻도 밝혔다. 그러나 맬컴 엑스가 이슬람 국가운동을 떠난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그 지도자 엘리야 무하마드의 비도덕성에 대한 환멸, 그리고 조직 내 다른 간부들의 맬컴 엑스에 대한 질시였다.

1964년4월 성지 메카 순례 당시 사우디 아라비아의 왕 파이살 알 사우드와의 접견

1964년 4월 13~19일 맬컴 엑스는 이슬람 성지인 사우디아라비아의 메카로 순례를 떠났을 때의 느낌을 이렇게 회고했다. ‘아브라함과 마호멧 및 성서에 나오는 모든 선지자들의 고향에서 피부색과 종족이 제각기 다른 사람들이 보여준 것만큼 진지한 환대와 참된 형제애의 정신을 나는 본 적이 없다. 지난 주 내내 나는 온갖 피부색의 사람들이 내 주위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친절을 목격하고 완전히 말문이 막히고 넋을 잃을 정도였다.’ 인종과 종족을 초월하여 무슬림의 동포애로 하나가 되는 체험을 한 맬컴 엑스는 이슬람이 인종 문제를 뛰어넘을 수 있다는 확신에 도달했다. 메카 순례 이후 맬컴 엑스에게백인은 더 이상 ‘악마’가 아니라 ‘인간’, 때로는 협력할 수도 있고 결국 평화롭게 공존해야 할 ‘인간’이었다. 성지 순례를 계기로 맬컴 엑스는 수니파 무슬림이 되었고 엘 하지 말리크 엘 샤바즈라는 이름을 사용했으며, 아프리카계 미국인 단결기구를 이끌면서 미국 각지는 물론 해외 여러 나라를 방문하여 흑인의 동포애는 물론 인종 간 평화를 역설했다.

"비틀거린다는 것. 그러나 결코 쓰러지지 않는다는 것."

이슬람 국가운동 측은 이런 맬컴 엑스에 대해 공공연한 위협을 가했다. 엘리야 무하마드는 “맬컴 엑스같은 위선자는 목이 잘려야 마땅하다”고 말했고, 이슬람 국가운동 매체는 맬컴 엑스의 잘린 목이 튀어 다니는 카툰을 실었으며, ‘맬컴 같은 인간은 죽어 마땅하다’는 내용의 글도 실었다. 엘리야의 최측근 존 알리 같은 이는 ‘위대한 엘리야 무하마드에 반대하는 이는 누구라도 목숨이 위태로워질 것’이라 말했다. 불시에 맬컴 엑스의 집을 방문해 살해 위협을 하거나 익명의 전화로 위협하는 일도 잦아졌다. 1964년 6월에는 이슬람 국가운동 측이 뉴욕 퀸즈에 있는 맬컴 엑스의 집이 국가운동 소유이기 때문에 그의가족이 퇴거해야 한다는 소송을 제기해 승소했고, 맬컴 엑스는 퇴거 명령을 받았다. 그리고 이듬해 2월 14일, 맬컴 엑스의 퇴거 날짜 연기 소송 하루 전날 그의 집은 불타서 무너졌다. 분명한 방화였다. 맬컴 엑스의 가족은 무사했지만 방화범은 잡히지 않았다. 그리고 2월 21일, 39살의 맬컴 엑스는 16발의 총탄을 맞고 쓰러졌다.

“꿈을 위해 목숨 바칠 각오가 되어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네 사전에서 자유라는 말을 지워라.”
“평화롭고 친절하고 법을 지키고 인간을 존중하라. 그러나 너에게 폭력을 가하는 녀석이 있다면, 녀석을 골로 보내버려라.”
“누가 너에게 자유를 주겠는가? 누가 너에게 평등, 정의, 또 다른 그 무엇을 주겠는가?
인간이라면, 자유, 평등, 정의를 스스로의 힘으로 쟁취해야 한다.”
“아무도 당신을 비판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성공할 수 없다.”
“비틀거린다는 것. 그러나 결코 쓰러지지 않는다는 것.”

맬컴 엑스의 치열했던 삶은 늘 백척간두에 선 위태로운 삶, 어떤 의미에서는 비틀거리는 삶이었다. 그리고 그는 흉탄에 쓰러졌다. 그러나 그는 결코 쓰러지지 않았다. 억압받는 자들의 저항을 생각하고 이야기할 때 우리가 그의 이름을 반드시 기억한다면, 그는 그리고 어쩌면 우리는 영원히 쓰러지지 않을 것이다.

필자가 추천하는 덧붙여 읽으면 좋은 책

<말콤 엑스(상, 하)> 맬컴 엑스가 구술하고 <뿌리>로 유명한 작가 알렉스 헤일리가정리한 구술 자서전이다. 헤일리는 1963년부터 50차례 맬컴 엑스와 동행하며 철저하게 인터뷰한 끝에 1965년에 초판을 냈다. 이 책은 맬컴에 관한 가장 권위 있는 전기이자 사료적 가치를 지닌다.

<미국민중사 1, 2> 억압받는 이들의 관점에서 역사를 바라보고 해석한 ‘아래로부터의 역사’로 미국사를 재구성한 역작이다. ‘전쟁과 더불어 전쟁에 대한 저항을, 불의와 더불어 불의에 맞서는 반란을, 이기심과 더불어 자기희생을, 폭정 앞에서의 침묵과 더불어 도전을, 무정함과 더불어 연민을.’이렇게 미국사의 얼굴, 아니 인류의 얼굴은 양면적이다.

발행일

발행일 : 2009. 02. 21.

출처

제공처 정보

  • 표정훈 평론가, 번역가

    표정훈은 1969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서강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번역가, 저술가, 칼럼니스트로 활동해 왔다. 삼성경제연구소 SERI CEO 강좌, 한국예술종합학교 등에서 강의했고 한국문학번역원의 계간 리스트(List) 편집자문위원, 월간 출판저널 편집자문위원, (재)김구재단 기획위원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 <탐서주의자의 책>, <나의 천년>, <하룻밤에 읽는 삼국지>, <책은 나름의 운명을 지닌다>, <철학이란 무엇입니까?(공저)> 등이 있다.

  • 이미지 gettyimages/멀티비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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