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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세계사

조지 워싱턴

미국 건국의 아버지

[ George Washington ]

출생 - 사망 1732.02.22. ~ 1799.12.14.

1789.4.30 미합중국초대 대통령에 취임하다

1789년 4월 30일 뉴욕, 미국 임시정부의 청사 페더럴 홀에서 세계 역사상 중대한 의식이 거행되었다. 미국의 초대 대통령 당선자 조지 워싱턴이 오른손을 성경 위에 올려놓았다. 뉴욕 재판소장 로버트 리빙스턴이 물었다. “당신은 미국의 대통령직을 성실하게 수행하고 미국의 헌법과 국민의 권리를 수호할 것을 맹세합니까?” 워싱턴은 대답했다. “예, 엄숙히 맹세합니다.”

혈연에 따른 세습이 아닌 임기가 정해져 있는 세계 최초의 국가 원수

워싱턴 대통령의 취임은 세계 역사상 각별한 의미가 있다. 세계사에서 최초로 국민이 직접 뽑은 대표가 국가 원수가 된 사건이었다.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와 인도의 바이샬리에서 민주적 공화정이 실시된 적이 있지만, 규모가 작은 도시국가에 한한 것이었다. 이 취임식이야말로 대통령 중심제로 대표되는 현대 정치의 진정한 출발이었다. 참고가 될 만한 전례가 없다는 것이 워싱턴 대통령에게 막막했다. 대포와 총 앞에서는 의연했던 장군이 취임 연설을 하면서는 어느 때보다 떨고 있었다. 연설 말미에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조국의 부름을 처음 받았을 때, 이 나라의 자유를 위한 투쟁의 불빛 앞에서 나는 나의 의무를 생각했습니다. 그 불빛은 나에게 어떤 금전적인 보상도 바라지 말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 이에 나의 개인적 보수는 사절하겠습니다. 업무상 따르는 비용도 공익을 위해 꼭 필요한 실질 경비로 한정해주시기 바랍니다.”

조지 워싱턴의 미 합중국 초대 대통령 취임을 기념하는 우편엽서

이제 막 출발선상에 선 미국은 조지 워싱턴 같은 리더십을 원하고 있었다. 조지 워싱턴은 뛰어난 천재는 아니었지만 그만큼 독단적이지 않았고, 주위의 의견을 듣고 포용할 줄 아는 겸손하고 신중한 정치인이었다. 게다가 정직하고 도덕적이었으며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원칙을 저버리지 않는 굳센 의지의 소유자였다. 바야흐로 미국과 조지 워싱턴은 중대한 기로에 서 있었다. 만약 대의민주주의 원칙에 따라 실시된 대통령제가 성공하지 못하면 봉건적 왕정이 오히려 옳았다고 판명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결론적으로 조지 워싱턴은 초대 대통령으로서 국민과 역사의 기대를 조금도 저버리지 않았다. 미 합중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조지 워싱턴을 선택한 것이 그만큼 현명했음을 말해주는 결과였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읜 고난의 어린 시절, 항상 배우는 자세의 노력파

비교적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음에도 어린 시절의 조지 워싱턴은 유복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11세 때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는 이기적이었다. 아버지 어거스틴 워싱턴은 두 아들을 남기고 떠난 첫째 부인과 사별한 후 두 번째 부인 메리 볼과 혼인하였다. 어거스틴과 메리 볼은 아들 넷과 딸 하나를 낳았는데, 조지는 장남이었다. 조지의 학교 교육은 초등학교 정도에서 그쳤다. 아버지가 살아 있었으면 영국으로 유학 갈 수 있었지만, 어머니가 허락하지 않았다. 조지는 어린 시절에 병정놀이를 즐겼다고 하는데, 항상 지휘관을 맡았다. 그는 모든 운동을 좋아했고, 친구들 사이에 다툼이 생기면 중재자 역할을 했다.

조지 워싱턴의 부인 마사 커티스의 초상화

당시 가부장제는 장자 상속을 원칙으로 하고 있었다. 따라서 아버지의 재산은 이복형인 로렌스의 것이었다. 조지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부지런히 노력하는 길밖에 없었다. 좋지 않은 조건이 그에게 오히려 더욱 노력해야 한다는 동기를 부여했다. 다행히 좋은 멘토도 있었다. 첫 번째 멘토는 이복형 로렌스였다. 로렌스와는 14살 차이나 나지만 조지는 형을 무척 따랐고, 형도 동생을 잘 이끌어주었다. 형이 버지니아 주의 명문가 페어팩스 집안에 장가를 가자 조지도 자주 그 집안에 드나들게 되었다. 사돈이 되는 윌리엄 페어팩스 대령은 조지의 새로운 멘토가 되었다. 형과 페어팩스 대령의 조언에 따라 조지는 독학하여 측량사가 되었고 일자리도 얻었다.

1748년 페어팩스 대령의 아들 조지 윌리엄은 셀리 게리와 혼인했는데, 당시 16세의 조지 워싱턴은 그만 셀리에게 푹 빠지고 말았다. 워싱턴은 셀리에게 사랑을 고백했고 서로 편지도 교환했다. 그것은 아마도 청소년 시절의 턱없는 열정이었을 것이다. 워싱턴은 사랑이 열정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일찌감치 깨달았다. 1759년 부유한 과부 마사 커티스와 혼인한 것은 현실적인 선택이었다.

독립군 총사령관에서 대통령 선출까지 - 전례 없는 역사를 이끌어간 지도자

1752년(20세) 형과 윌리엄 대령의 주선으로 영국군에 입대하여 군인이 되었는데, 조지 워싱턴이 세상에서 눈부신 활약을 펼치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그 해 7월 형 로렌스가 죽었지만, 그때 조지는 모든 슬픔을 이겨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조지는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지만 식민지 출신인 조지는 영국 정규군이 될 수 없었다. 좌절한 조지는 제대하고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이 전쟁 경험은 훗날 독립군 총사령관이 될 자질을 닦은 훌륭한 훈련이었다.

버지니아주 군대의 대령 유니폼을 입고 있는 조지 워싱턴. 그를 그린 그림 중
가장 초기에 그려진 작품으로 젊은 워싱턴의 모습을 담고있다.

젊은 시절 조지 워싱턴의 인생 목표는 간단명료했다. 사회적으로 성공하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 그는 늘 배우고 새로운 일에 도전했다. 군인의 길을 포기한 워싱턴은 정치에 도전했다. 그는 1759년 버지니아 주의 하원의원이 되어 정치계에 입문하였다. 하원의원으로 활동하면서 워싱턴은 영국 정부의 부당한 식민통치에 반기를 들게 되었다. 1774년 제2차 대륙회의에서 워싱턴은 새로 창설하기로 한 대륙군의 총사령관에 선출되었다. 사령관에 임명되었지만 군대의 실체는 없었다. 각 주마다 병사들을 모집하고 무장해야 했다. 버지니아에서는 패트릭 헨리의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유명한 연설이 민병대를 조직하고 무장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워싱턴은 훈련 받지 못한 군인들과 무기와 군수물품의 태부족을 슬기롭게 극복하면서 세계 최강의 영국군에 맞서야 했다.

아메리카의 혁명세력이 처음부터 독립을 주장했던 것은 아니었다. 조지 워싱턴을 비롯한 그들의 상당수는 식민지의 자치를 원했다. 그러나 영국 왕 조지 3세가 대륙회의의 요구를 전면 무시함에 따라, 더욱 결정적으로는 1776년 1월 토마스 페인의 소책자 <상식>이 발간됨으로써 독립에 대한 갈망이 불꽃처럼 타오르게 되었다. 1776년 7월 4일 워싱턴은 대륙회의로부터 독립선언서를 받았다. 독립선언서를 확인하고 난 워싱턴은 병사들에게 큰 소리로 읽어준 후 말했다. “여러분, 믿음과 용기와 희망을 가지고 싸우십시오. 이 나라의 평화와 안전은 하느님이 보호하고 계십니다.” 1781년 10월 요크타운 전투에서 워싱턴은 찰스 콘월리스가 이끄는 영국군의 항복을 받아냄으로써 전쟁을 종결시켰다.

1783년 파리조약이 체결된 후 워싱턴은 군의 통수권을 연합회의에 반환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연합회의는 각 주의 이해관계 때문에 중앙정부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었다. 연합회의는 국가의 운영원칙을 세우기 위해 제헌의회를 구성하였다. 각 주의 대표들은 워싱턴을 의장으로 뽑았고, 워싱턴을 의장으로 한 제헌의회는 미 합중국의 헌법을 만들었다. 그 헌법에 따라 실시된 선거 결과 1789년 2월 4일 워싱턴이 첫 대통령으로 선출된 것이었다. 이렇게 하여 에이브러햄 링컨, 프랭클린 루스벨트와 더불어 미국 시민들에게 가장 존경 받는 대통령이 역사 속에 등장하게 되었다.

조지 워싱턴은 새로운 민주정부 체제 아래서 전례 없는 역사를 창조하는 막중한 임무를 실로 엄격하면서도 합리적으로 수행해나갔다. 먼저 합리적인 행정부를 구성하여 공명정대한 인사권을 발휘했다. 그에게 혈연, 지연, 학연, 종교, 친구관계 등은 일절 고려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그는 오직 능력에 따라 재무장관에는 알렉산더 해밀턴, 국무장관에는 토마스 제퍼슨, 전쟁장관에는 헨리 녹스, 법무장관에는 에드문트 랜돌프를 임명했다. 외교적으로는 중립노선을 폄으로써 적을 만들지 않았고, 국립은행을 창설하고 위스키 제조업자들에게 세금을 징수하는 등 단호한 재정 정책으로 국고를 튼튼히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수 세력과 인권 문제에서는 아쉬움을 남겼다. 여성 참정권은 이미 제헌의회에서 무산되었다. 대통령 자신은 인종차별 등에 비판적이었지만, 차별을 철폐하는 정책을 실행하지 못하고 백인 남성 위주의 인재만을 등용했다.

조지 워싱턴이 군 통수권을 연합의회에 반환하는 장면을 담은 그림
워싱턴이 토머스 제퍼슨, 제임스 몬로 등과 함께 서있고, 그의 부인과 가족들이 지켜보고 있다.

뒷마무리가 아름다웠던 대통령, "나 죽거든 사흘이 지나기 전 묻어주오"

조지 워싱턴 대통령의 퇴임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재선은 수락했으나 워싱턴은 3선은 파멸의 지름길이 될 수 있음을 직감으로 알고 있었다. 전혀 욕심 없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는 어느 선에서 욕망을 제어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전쟁에서 승리한 후에 왕이 되어달라는 국민의 성원이 있었을 때에도 그는 과감하게 욕심을 접었다. 임기가 6개월 남은 1796년 9월 17일, 워싱턴은 더 이상 대통령에 출마하지 않겠다는 ‘고별연설’을 발표했다. 제목은 ‘고별 연설’이었지만, 연설로 행해진 것은 아니고 일간신문에 발표되었을 뿐이다. “조국에 대한 고마움과 수 세대에 걸친 선조들과 이 땅에 뜨거운 애정을 느끼면서, 나는 은퇴 후에 누리고자 스스로 다짐했던 생활을 즐거운 마음으로 기대해봅니다.”

1797년 3월 4일 워싱턴은 제2대 대통령 존 애덤스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대통령직에서 내려왔다. 초대 대통령의 자발적인 선택에 따른 평화로운 정권교체였다. 그것은 후대의 모범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에도 좋은 본보기가 되었다. 퇴임 후에 고향에 돌아갔지만 1798년 프랑스와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아지자 워싱턴은 다시 총사령관에 임명되었다. “내 몸에 남아 있는 모든 피를 조국에 바치겠다”라며 수락했지만 다행히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 1799년 2월 자필로 긴 유언장을 작성한 워싱턴은 그 해 12월 14일 “죽은 후 사흘이 되기 전에 묻어주오”라고 부탁한 후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언장에는 “개인 시중을 든 윌리엄을 노예 신분에서 즉각 해방하고 그에게 연금 30달러를 줄 것이며, 아내가 죽으면 나머지 노예들도 해방시켜달라”는 항목이 포함되어 있었다. 조지 워싱턴은 미국 독립을 일구어낸 독립운동가이자 첫 단추를 잘 꿴 미국의 초대 대통령으로서 남긴 업적도 훌륭하지만, 그것을 전혀 손상시키지 않은 아름다운 뒷마무리가 더욱 돋보인 인물이었다.

조지 워싱턴의 전기를 쓴 브래들리 T. 존슨의 다음과 같은 평가는 인간 워싱턴을 잘 설명해주고 있다. “워싱턴은 위대한 인물이다. 그는 감정이 격했지만 뛰어난 자제력을 발휘했다. 아무도 막을 수 없는 강한 의지력은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정신, 현명함, 관용, 정의감과 조화를 이루었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천재성은 없었지만 그는 신속한 통찰력과 정확한 판단, 그리고 지식을 적극적으로 추구하는 열성이 있었다.”

필자가 추천하는 덧붙여 읽으면 좋은 책

김형곤 교수(건양대, 미국사)가 쓴 <조지 워싱턴 - 미국의 기틀을 만든 불멸의 리더십> 은 조지 워싱턴의 생애가 남긴 교훈에 초점을 맞추었다. 워싱턴이야말로 어린 시절 자신의 악조건을 극복하고 항상 배우는 자세로 실력을 키운 사람이었다. 그는 일찌감치 뚜렷한 목표를 세우고 꾸준히 전진했다. 정직하고 용기 있었으며, 강한 책임감의 소유자였다. 늘 일하는 근면하고 성실한 사람이었다. 결론적으로 저자는 워싱턴이 물러날 때 물러날 줄 알고 사리사욕을 채우지 않는 고귀한 품성을 지닌 대통령이었다고 말한다. 워싱턴의 생애가 전해주는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면서 읽으면 큰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책이다.

제임스 T. 플렉스너의 <조지 워싱턴>(정형근 옮김, 고려원, 1994)은 절판된 것이 참으로 안타까운 전기이다. 조지 워싱턴의 생애를 재미있고도 자세하게 그렸을 뿐만 아니라, 그의 행적에 대한 자료도 친절하게 제시하고 있다. 워싱턴이 전투하면서 이동한 경로까지가 지도로 그려져 있다. 이 책에는 영국 정규군의 꿈을 키우던 식민지 소년이 독립군 총사령관과 초대 대통령을 거치면서 겪었던 갈등과 고난이 드라마틱하게 펼쳐진다. 조지 워싱턴의 생애를 자세히 알고 싶은 독자에게는 물론 소설처럼 편안하게 그의 생애에 접근하고 싶은 독자에게 이 책을 권한다. 서점에서는 구할 수 없지만, 도서관에서는 빌려볼 수 있다.

발행일

발행일 : 2009. 04. 30.

출처

제공처 정보

  • 차창룡 시인, 문학 평론가

    글을 쓴 차창룡은 1989년 <문학과 사회> 봄호에 시를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1994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부문에 당선됐으며, 제13회 김수영 문학상을 수상한 작가다. <고시원은 괜찮아요>, <해가 지지 않는 쟁기질> 등 다수의 시집으로 독자들과 만나고 있다.

  • 이미지 TOPIC / corb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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