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묘한 호칭 갈등

권혁범 대전대 교수·정치학
[포럼]미묘한 호칭 갈등

호칭 문제로 싸우다가 살인이 일어나는 수도 있을까? 얼마 전 재미 한국 유학생들(각각 17세와 19세) 간에 실제로 그런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는 뉴스를 들었다. 반말과 존댓말, 형과 동생 호칭의 문제로 싸움이 일어났다고 한다. 국내 모 대학에서도 몇 년 전에 비슷한 사건이 발생했다. 나이가 분명 어린 후배가 자신에게 ‘형’이라고 부르지 않는다는 선배의 불만에서 시작된 싸움은 결국 살인으로 이어졌다. 어처구니없다고 생각하는 독자들도 있겠지만 호칭 문제로 인한 갈등과 폭력은 한국 사회에서 꽤 흔한 편이다. 권위주의적 서열 의식이 여전히 강하기 때문인가. 태평양 건너가서도 왜 이런 문제는 좀체 사라지지 않을까?

내가 대학에 다니던 1970년대만 해도 호칭과 존대 문제는 대체로, 특히 서클에서는 학번을 따라 결정됐다. 자신의 나이가 한두 살 많아도 학번이 높은 선배에게는 존대하고 ‘형’이라고 불렀다. 들어온 순서대로 서열을 엄격하게 정하는 군대와 유사했다. 요즘은 어떤지 자주 제자들에게 물어본다. 같은 학번끼리도 나이 차이가 나면 ‘형’ ‘누나’라고 부른다고 한다. 겨우 일 년 연상의 동기인데도 높이는 호칭을 쓰고 있는 것이다. 나이주의로 갈 위험도 있지만 그래도 갈등의 소지는 많이 준 셈이다. 단, 나이가 어린 선배와 나이가 많은 후배가 어울릴 때 여전히 어색한 분위기가 생기고 두 사람 간 호칭은 상황과 가치관에 따라 각양각색이라고 한다.

고백을 하자면 나부터도 나이에 따른 위계와 호칭에 민감하다는 것을 어떤 회의에서 깨달은 적이 있다. 두세 살 적은 한 학자가 내게 ‘권선생!’이라고 불렀을 때 기분이 미묘하고 불편했다. ‘선생’은 상황에 따라 높임말이지만 일상적으로는 자신보다 어린 사람에게 쓰는 호칭이 아닌가. 나는 그를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대응하고 말았다.

몇 년 전에도 우연히 인권운동을 하는 분들과 친해졌는데 곧바로 호칭 문제가 대두됐다. 나이가 많은 내가 그들을 ‘선생’이라고 부르고 그들은 나를 ‘선생님’이라고 불렀는데 시간이 갈수록 그게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세 사람이 합의한 게 성이나 이름 뒤에 ‘상’을 붙여 부르는 일이었다. 나는 ‘권상’ 혹은 ‘혁범상’이 되었다. 반일주의자들이 들으면 분기탱천할지 모르겠지만 일본말이라는 것을 제외하면 부담 없는 호칭이다.

나이, 입학 연도 및 입사 시기 등 특정한 기준을 세우고 그것에 따라 호칭 문제를 ‘해결’하는 관습은 사실 50년대의 문화와 대비하면 매우 이질적인 것이다. 그 당시는 서열 의식이 느슨했고 위아래 5년 정도면 친구처럼 지내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고 한다. 현재와 같은 촘촘한 서열 의식에 기초한 호칭은 인간관계에서 수평적 흐름을 차단하고 쉽게 위계화하는 경향을 갖는다. 히딩크 감독 역시 선수들 간의 위계에 따른 호칭을 문제 삼은 적이 있다. 축구 경기에서의 원활하고 효율적인 소통을 방해하기 때문이었다. 물론 모든 위계가 나쁜 것만은 아니다. 엄격한 서열을 고착시키는 위계주의가 문제라 할까.

문화적 위계질서가 호칭 문제를 유발하는 것인지, 한국어가 가진 특징 때문에 호칭 문제가 위계 문제를 만들어내는지 나로서는 잘 모르겠다. 아무튼 한국 사회에서 호칭과 존대 문제는 참으로 어렵다. 특히 한국어를 배우는 외국인들은 거기서 오는 다양하고 복잡한 뉘앙스의 차이를 잡아내지 못하거나 이해할 수 없어서 곤혹스러워할 때가 많다는 불만을 토로한다. 새해에는 이런 문제를 지혜롭게 해결할 수 있는 문화운동 같은 것 안 생기나? 호칭 문제 때문에 목숨을 잃고 싶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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