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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연의 비블리오필리]알 카포네와 엘비스 프레슬리 그리고 `미국의 슬픈 연대기`

입력 : 
2013-05-03 14:50:57
수정 : 
2013-05-27 13:5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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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어진 갱 알 카포네 브라이언 드 팰머 감독의 영화 중 <스카페이스>라는 명작이 있다. 이 영화에서 알 파치노가 연기한 주인공 토니 몬타나는 미국의 전설적인 갱 알 카포네를 모델로 창작해낸 인물이다. ‘스카페이스(Scarface)’는 뺨에 있는 세 줄의 상처 때문에 생긴 알 카포네의 별명이었다. 19세기 말 가난한 이탈리아 이민자의 아들로 태어난 카포네는 초등학교도 졸업하기 전 폭력조직에 가담하면서 범죄의 길에 들어선다. 금주법이 발효된 1920년 시카고로 근거지를 옮긴 카포네는 밀주, 밀수, 매춘, 도박 등으로 순식간에 돈을 벌었고, 1929년 ‘성 밸런타인데이 대학살’ 등 수많은 폭력살인을 배후에서 지휘하면서 조직원 1000명을 거느린 시카고 마피아의 보스가 된다. 범죄 전문가이자 뉴욕주립대 교수인 루치아노 이오리초는 <알 카포네>(아라크네 펴냄)라는 책을 통해 카포네 신화의 이면을 밝힌다. 카포네는 단순한 갱 두목이라기보다는 20세기 초 미국의 이면을 드러내 보여주는 상징적인 인물이다. 사실 미국 주류사회와 미디어는 카포네를 ‘잔인함의 화신’으로 이용했다. 하지만 잔인한 폭력조직 두목이었고 범죄자였던 그에게도 다른 면모가 숨겨져 있다.

카포네는 효자면서 아내와 자식을 사랑한 가정적인 사람이었다고 한다. 또 학대받는 사람들을 도왔고, 미국 공황기에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풀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더 흥미로운 건 감옥에 수감됐을 때 그가 유순한 모범수였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미국은 왜 카포네를 피도 눈물도 없는 악당으로 만들고 그에게 유명세를 부여했을까.

여기에도 이면이 있다. 미국 주류사회는 카포네를 악의 화신으로 만들면서 이탈리아 이민자들을 차별했고, 자신들의 주류가치를 정당화시켰다.

따지고 보면 카포네를 거대한 갑부이자 밤의 황제로 만든 건 바로 미국의 주류사회였다. 부패한 미국의 주류사회가 카포네에게 뇌물을 받아먹으며 배를 불리는 동안 한낱 뒷골목 갱에 불과했던 카포네는 거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이러니한 건 감옥에서 나와 쓸쓸히 죽어간 카포네가 거의 한 세기가 지난 지금도 미국에 돈을 벌어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카포네를 소재로 한 수백 편의 영화, 드라마, 만화가 만들어지고 있고, 시카고에 가면 카포네를 추억하는 투어가 관광객을 끌어들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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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알 카포네, (오른쪽)엘비스 프레슬리
반항의 아이콘 엘비스 프레슬리 미국의 이면과 콤플렉스를 보여주는 또 하나의 인물은 엘비스 프레슬리다.

목화밭 이주노동자의 판잣집에서 태어나 음악계를 평정한 사람. 마을 장터 노래자랑 무대에서 시작해 로큰롤의 황제가 된 사람. 그가 바로 엘비스 프레슬리다.

엘비스 프레슬리는 가장 천하게 태어나 가장 강력하게 세상을 뒤흔들고 사라진 20세기의 아이콘이다. 음악평론가 데이브 마시는 엘비스를 “위대한 동시에 속되고, 무례한 동시에 설득력 있고, 강력한 동시에 나약했으며, 부조리할 정도로 단순한 반면 놀라울 정도로 복잡했던 인물”이라고 평한다.

<엘비스, 끝나지 않은 전설>(이마고 펴냄)에서는 너무나 인간적이어서 차라리 신성한 한 인간의 일대기를 만날 수 있다. 엘비스는 1935년 미국 미시시피주 투발로에서 태어났다. 엘비스가 세 살 때 아버지가 수표 위조로 교도소에 수감되자 어머니 글래디스가 집안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어머니는 목화를 따러 갈 때 아들을 꼭 데리고 다녔다.

엘비스는 걸음마를 시작할 무렵부터 흑인 영가, 블루스, 아프리카 민요가 뒤섞인 흑인 노동자들의 노래를 들으며 지냈다. 들판에서 울려퍼지는 노래가 그의 음악적 스승이었던 셈이다. 엘비스의 데뷔 무대는 ‘미시시피-앨라배마 시장 축제’였다.

열한 살의 엘비스는 이 무대에서 자신의 재능을 확인하고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선 레코드에서 자신의 노래를 녹음한다. 당시 레코딩 매니저였던 머라이언 키스커는 엘비스의 모습을 보고 “구걸하러 온 떠돌이인 줄 알았다”고 회상했다. 녹음실 관계자들은 가스펠과 컨트리가 뒤섞인 특이한 흑인 사운드를 내는 백인 청년의 최면을 거는 듯한 목소리에 호감을 가졌다. 트럭 운전사로 생업을 이어가던 엘비스에게 기회가 찾아온 것이었다. 소문을 통해 지역에서 인기를 얻기 시작한 그는 메이저 레코드사인 RCA에서 발매한 ‘Heartbreak Hotel’이 8주 동안 정상에 머물며 일약 대스타로 떠올랐다. 사실 엉덩이를 아래위로 흔드는 특유의 무대 몸짓은 돈밖에 몰랐던 매니저 톰 파커가 여성 팬들의 눈길을 끌기 위해 고안해낸 것이었다. 중남미 이민자의 아들, 흑인풍의 음악을 미국 주류사회는 도저히 용납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를 통해 돈을 벌려고 한 장본인 역시 미국 주류사회였다. 어쨌든 관객을 압도하는 무대 매너와 신들린 듯한 노래, 퇴폐적인 눈빛은 미국 주류사회에서는 지탄을 받았지만 10대 팬들에게는 열광적인 지지를 얻었다.

그가 할리우드에 진출해 첫 번째 영화 를 찍었을 때 ‘타임’은 이렇게 독설을 퍼부었다. “소시지인가? 분명히 매끈하고 촉촉해 보이는데. 180㎝에 77㎏짜리 소시지에 대해 들어본 일이 있는가.”

그러나 미국의 주류는 이 ‘소시지’의 마력을 막지 못했다. 엘비스가 군에 입대했을 때 수만 명의 여성 팬이 엘비스의 근무지였던 독일까지 따라갔을 정도였다. 군 생활 동안 엘비스는 자신이 그렇게 사랑하고 집착했던 어머니의 죽음을 맞게 된다.

이후 엘비스의 사생활은 더욱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약물에 의존했고, 여성편력 또한 멈추지 않았다. ‘It’s Now or Never’ 등을 히트시키며 여전히 황제로 군림했지만 그는 점점 망가져가고 있었다. 자신의 나약함과 불어난 몸매를 화려한 의상으로 감추고 무대에 섰지만 결국 운명은 한 천재를 무너뜨렸다. 1977년 화장실에서 심장마비로 죽은 채 발견된 그는 20세기 전설이 됐다. 대학에는 그를 연구하는 강의가 개설됐고, 그를 기리는 우표가 발행됐으며, 수많은 미술작품과 문학작품이 그를 위해 바쳐졌다.

온 미국이 엘비스에게 열광한 이유는 보다 근본적인 데 있었다. 당시 미국의 젊은이들은 베트남전에 지쳐 있었고 탈출구가 필요했다. 명분 없는 전쟁에 환멸을 느낀 젊은이들에게 엘비스는 일종의 탈출구였다. 몸짓과 노래로 미국의 주류가치를 비웃는 엘비스를 보며 그들은 위안을 느꼈던 것이다. 그는 미국 사회가 만들어낸 반항의 아이콘이었다.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32호(2013년 05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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