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협정 50년-흔들리는 재일동포> ①어제와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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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14.12.29. 오전 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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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정 때 권익 보장에 소홀한 것이 반세기 차별로 이어져

고국 지향에서 정주 지향으로…"다문화 공생 사회 희망"

<※ 편집자주 = 2015년은 한일 국교 정상화 협정이 체결된 지 50년이 되는 해입니다. 한일 협정으로 재일동포들은 비로소 법적 지위를 얻게 됐지만 미비한 규정 탓에 아직도 차별에 시달리고 있을 뿐 아니라 남북 분단에 따른 민단과 총련의 대립에다가 뉴커머와 올드커머의 갈등까지 겪고 있습니다. 더욱이 최근 일본에 부는 우경화 바람으로 생존권에 위협마저 느끼는 상황입니다. 재일동포의 역사와 현주소를 살펴보고, 현 상황과 개선 방안에 관한 재외동포들과 전문가들의 목소리를 들어보는 특집 기사를 3회 송고합니다.>

(서울=연합뉴스) 강성철 기자 = "한일 관계에서 재일동포의 존재는 늘 '뒷방 신세'였습니다. 1965년 국교 정상화 때 재일동포들의 권익 보장에 소홀했던 것이 지금까지 차별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점차 존재감이 줄어드는 그들을 내버려두지 말고 적극적으로 끌어안아야 합니다."

이구홍 교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일 국교 정상화 50년을 맞는 내년을 '재일동포 권익 신장의 해'로 삼아야 한다는 말로 감회를 대신했다. 그는 당시 3억 달러 정도의 대일 청구권 문제와 평화선 양보 여부보다 재일동포의 법적 지위 확보가 더 중요하다는 판단 아래 한일 회담이 한창이던 1954년 10월 교포문제연구소를 차리고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이 이사장의 지적처럼 왜 재일동포는 홀대를 받았을까.

재일동포는 식민지 지배의 산물로 생겨났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망한 1945년에는 210만 명까지 늘었다가 이듬해 3월까지 140만여 명이 귀국하고 60만 명이 남았다. 이들이 현재 재일동포의 원형이다.

전후 일본은 재일동포의 일본 국적을 박탈하고 1947년 외국인으로 등록시키면서 편의상 '조선'(朝鮮) 국적을 표기하게 했다. 이는 실제 국적이 아닌 외국인 등록상 기호였다.

1965년 한일 간 국교 수복으로 형식상 재일동포의 법적 지위가 보장되었다. 당시 협정 가운데 '일본에 거주하는 대한민국 국민의 법적 지위 및 대우에 관한 협정'은 그들이 일본 사회와 특별한 관계를 지니고 있다는 점을 고려해 안정된 생활을 영위할 수 있게 일본 정부가 협조하도록 명시해놓았다. 그러나 법적 지위에는 강제퇴거 조항이 있어 늘 재일동포의 발목을 잡았다.

이 이사장은 당시 일본 정부가 재일동포를 일본에서 쫓아내려고 이 조항을 신설했다고 설명했다. 이 조항에 따라 재일동포는 외국인 등록증을 상시 휴대하지 않으면 추방됐으며, 외국인 등록 신고를 할 때도 20년간의 거주 기록 작성이 의무화돼 누락이나 잘못이 있으면 영주권 자격을 박탈당했다. 이 이사장은 "이는 이동이 잦았던 동포의 현실을 무시한 처사였다"고 지적했다.

한일 국교 정상화를 통해 무국적인 '조선적'으로 남아 있던 재일동포를 한국 국적으로 끌어안으려 했지만 이런 까다로운 자격 심사 탓에 5년이 지나도록 한국 국적 등록자는 30만 명을 넘지 못했다.

나머지 재일동포는 친북계인 재일조선인총연합회(총련) 소속과 중립 입장을 고수한 조선적(朝鮮籍·무국적)으로 남으면서 지금까지 동포사회는 쪼개진 채 서로 반목해왔다.

더욱이 일본은 특별 영주 자격을 1951년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 이전 출생자로 한정해 이후 출생한 2세들은 귀화를 하거나 일반 영주자로 남아야 하는 차별을 감수해야 했다.

2013년 외교부 통계에 따르면 한국 국적이나 조선적의 재일동포는 55만여 명에 이른다. 이 가운데 조선적이 4만여 명, 신정주자(新停住者)인 뉴커머가 18만여 명으로 추산된다.

일본 법무성은 1952∼2013년 일본 국적으로 바꾼 재일동포 34만여 명을 포함해 일본 내 한반도 출신 인구를 89만 명으로 추정했다.

재일동포 2.5세인 김웅기 홍익대 교수는 "2차대전 때 일본은 조선 사람을 전쟁과 부역에 강제 동원했고 전쟁이 끝나자 그렇게 열도에 끌려온 재일동포를 외국인 취급하며 일본에서 내몰려고 했다"면서 "지금도 '재일(在日) 특권을 허용하지 않는 시민 모임'(재특회) 등 일본 우익이 재일동포에게 한국으로 돌아가라고 외치는 것은 전후 재일동포에 대한 배타적 시선이 그대로 존속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 일본 우경화로 위협받는 생존권

고국이 끌어안아 주지 못하고, 일본 정부가 끊임없이 추방하려는 가운데서도 재일동포들은 끈질기게 버티며 고국의 발전을 견인했다. 그러나 최근에는 우경화 때문에 생존권에 위협을 받고 있다.

일본의 우경화는 20년 이상 지속한 경기 침체로 말미암은 내부 불만의 외부 표현으로 풀이된다. 과거사 왜곡, 일본 평화헌법 개정 추진, 자위대의 군대 전환 추진, 정치인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 등과 더불어 재일동포에 대한 공격으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인종차별과 공격 성향의 헤이트 스피치를 주도하는 재특회는 2007년 발족 당시 회원이 500여 명에 불과했지만 7년 만에 30배로 몸집을 키웠다. 이들은 도쿄와 오사카의 코리아타운 등지에서 위협적인 시위를 벌여 재외동포의 생존권을 위협하고 있다.

뉴커머로 자수성가한 장영식 ㈜에이산(永山) 회장은 "일본의 혐한 정서와 우익의 위협 등으로 많은 동포가 두려움을 느끼고 있으며 실제로 사업에도 큰 타격을 받고 있다"면서 "일본에서 오래 살아온 올드커머는 소위 '내공'을 지니고 있어 비교적 잘 견뎌내지만 뉴커머는 '한류' 등에 편승해 사업을 펼쳐온 측면이 있어 먹고살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하소연했다.

장 회장은 "혐한류의 영향으로 일본 TV에서 한국 드라마가 사라졌고 K-팝 공연도 뜸해졌다"며 "역사적·정치적인 대립 탓에 문화적인 교류마저 위축돼 양국 관계는 더 나빠질 것"이라며 내다봤다.

최근 일본 최고재판소(대법원)는 조선학교 앞에서 시위를 벌인 재특회에 대해 조선학교에 1억여 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일본 경찰청도 재특회를 '극단적 우파 단체'로 분류하는 등 혐한 활동에 제재를 가하고 있지만 '차별금지법' 제정 등 적극적인 인권 보호로까지 이어질지는 불투명하다.

◇ 민단 vs 총련, 올드커머 vs 뉴커머, 한국적 vs 귀화자

전 세계 175개국에 흩어져 사는 700만 명의 재외동포 가운데 재일동포만큼 역사·정치·국적에 따라 다양하게 나뉜 사례는 없다. 역사적으로는 일제강점기에 건너간 1세대와 후손으로 이뤄진 올드커머(구정주자)와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 이후 유학, 사업 등을 목적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정착한 뉴커머로 구분한다.

정치적으로는 재일본대한민국민단(민단)을 구심점으로 하는 한국 국적 재일동포, 북한을 지지하거나 북한 국적을 가진 총련계, 어느 쪽도 지지하지 않는 조선적으로 갈라져 있다.

재일동포 가운데 드러나지 않는 존재는 귀화자다. 단일민족 지향성이 강한 일본에서 일본 국적을 취득하는 것은 대부분 일본식으로 성과 이름을 바꿔야 하는, 이른바 '일본으로의 동화'를 의미하기 때문에 귀화자는 늘 숨어 있다.

재일동포 시민단체인 코리아NGO센터의 곽진웅 대표는 "1990년대 이전의 재일동포 사회에서는 귀화를 '배신'으로 보는 부정적 시각이 강했다"면서 "지금은 '선택'이라고 여기며 저항감이 사라졌지만 귀화해도 여전히 차별은 존재한다"고 설명했다.

곽 대표는 "재일동포는 귀화하면 첫 번째 하는 일이 '이사'인데 그 이유는 재일 출신이라는 과거를 지우기 위해서"라며 "실제로 연예인·운동선수·정치인 가운데 재일 출신이라는 것이 알려져 공격받는 사례가 비일비재하다"고 소개했다.

민단과 총련은 지금까지 대결 구도를 유지해왔고 올드커머와 뉴커머 간에도 거의 교류가 없었다. 그러나 최근 총련계의 몰락과 뉴커머의 인구 증가 등 변화에 맞춰 민단도 이들을 끌어안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 흔들리는 동포사회의 구심점 민단

1948년 한국 정부가 수립된 직후 유일한 재일동포 공인단체로 인정받은 민단은 6·25 전쟁을 겪은 뒤 총련과 반세기 넘게 대립과 반목, 투쟁의 길을 걸으며 한국 정부의 생각을 대변해왔다.

경제적으로도 구로공단과 구미공단에 투자하고 새마을운동을 돕는가 하면 88년 서울올림픽 때 540억 원의 성금을 전달하는 등 모국의 발전을 위해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재일한국인투자협회'를 결성해 신한은행을 설립하기도 했고, 롯데를 비롯한 재일 기업들도 팔을 걷고 나섰다.

민단은 재일동포의 권익 신장을 위해 지문 날인 철폐 운동을 펼치고 취업 차별 철폐와 민족교육 실현을 위해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하는 등 동포사회의 구심점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최근에는 냉전 시대 이후 해체 위기에 놓인 총련계 동포, 뉴커머, 귀화자들을 껴안지 못했다는 지적을 받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일반사단법인 재일상공회의소와 분규를 빚으며 재일동포 대표 단체로서의 위상이 흔들리고 있다.

또 민단은 재외동포 단체 가운데 유일하게 매년 80억 원이라는 거액의 정부 지원을 받아 다른 지역 동포들로부터 '형평성에 맞지 않는다'는 항의를 받고 있다. 외교부도 최근 민단 지원금의 관리 감독 강화와 투명성 확보를 위해 법인화를 추진하라고 종용하고 나섰고, 국회 역시 예산 통과 과정에서 법인화가 이뤄지지 않으면 지원금을 삭감한다는 조건을 명시했다. 민단은 지금까지 임의단체로 활동해왔다.

안팎의 거센 반발에 직면한 민단은 뉴커머에 대해 문호를 개방하고 법인화도 검토하겠다고 밝혔지만 실효성에는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하정남 민단 사무총장은 "재일동포 1∼2세대가 주축이었던 민단은 고령화에 따라 중심이 차세대로 넘어가고 있다"며 "10∼20년이 지나면 뉴커머 등이 동포사회의 중심세력이 될 것이므로 지금부터라도 민단에 가입해 활동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재일동포 가운데 해마다 1만여 명이 일본으로 귀화해 올드커머가 줄어들면서 뉴커머가 자연스럽게 부상하고 있다.

◇ "차별 받지만 일본은 삶의 터전"

'재일(在日)'의 일본식 발음인 '자이니치'는 일본에서는 차별의 뉘앙스를 지닌 용어다. 재일동포는 한일 국교 정상화 때 법적 지위를 제대로 보장받지 못하면서 취직, 보험, 연금 등에서도 차별을 받아왔다. 특별 영주자로서 납세 등 의무를 다하지만 참정권은 행사할 수 없다.

이런 가운데 재일동포 사회 중심축이 2∼3세로 넘어오면서 일본을 '제2의 터전'으로 받아들여 뿌리를 굳건히 내리고 살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일본에서 나고 자라 현지화한 재일동포들은 심정적으로는 한국인이지만 사고방식과 생활상은 일본에 가깝다.

이구홍 이사장은 "일본 사회가 다문화를 받아들이고 공생의 길로 가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는 견해를 피력했다.

민단은 한일 관계가 어느 때보다 경직된 상황이지만 정치적 타협과는 별도로 시민단체 수준의 교류를 확대하고 있다.

오공태 민단 단장은 "2015년 하반기에는 일본 방방곡곡에서 '한국을 더욱더 알자'(가칭) 축제를 열 계획"이라며 "음식 체험, 공연 등으로 한국 문화를 소개해 우호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나가겠다"고 밝혔다.

서사황 민단 청년회장은 "지방자치단체 의원을 대상으로 인종차별 금지의 조기 법제화를 촉구하는 활동을 펼치고 있다"며 "공생 사회 추진을 위해 일본 내 양심적 단체들과 풀뿌리 네트워크를 만드는 데도 앞장서고 있다"고 소개했다.

재일동포를 연구하는 전문가들은 한국 정부가 자국민 보호에 더 힘써야 재일동포도 기를 펴고 당당히 살 수 있다고 입을 모은다.

김웅기 교수는 "헤이트 스피치가 일본 내 중국인을 겨냥하지 않는 것은 중국 정부의 눈치를 보기 때문"이라며 "관동대지진 때 조선인이 일본인에 의해 대량 학살당한 것과 달리 중국인에 대한 테러는 초기에 중국의 강력한 항의로 수그러들었던 것을 기억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wakaru@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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