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 단순하지만은 않은 '창씨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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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08.08.21. 오후 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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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즈노 교수 '창씨개명' 번역 출간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한국사회에서는 식민지시대를 보는 커다란 '금기'가 있다. 언제나 식민통치 주체는 '일제'(日帝)여야 하고, 그런 일제의 통치는 늘 폭압적이어야만 하고 수탈을 일삼아야 한다는 믿음이 그것이다.

이에서 조금만 벗어나는 듯한 이야기를 하면 친일파 후손 혹은 식민지 근대화론자라는 딱지를 붙여 일제의 식민지배를 찬양한다고 매도하곤 한다.

1939년 11월과 12월에 공포되어 이듬해 2월11일 시행에 들어간 개정조선민사령(改正朝鮮民事令)과 기타 법률에 따른 창씨개명(創氏改名)만 해도 그렇다.

이에 대한 국내의 평가는 "일제가 중일전쟁 후 '내선일체'와 '황국신민화' 정책을 강화하기 위해 조선에서 실시한 폭압적 민족 말살책"이라는 단 한 줄로 족하다.

같은 맥락에서 이런 폭압적 민족 말살책에 부화뇌동해 자발적으로 창씨하고 개명한 사람들은 거의 자동적으로 친일파라는 딱지가 붙는다.

하지만 창씨개명이 그렇게 단순하기만 한 일이었을까?

정선태 국민대 국어국문학과 교수가 옮긴 일본 교토대 인문과학연구소 미즈노 나오키(水野直樹.58) 교수의 '창씨개명'(산처럼 펴냄)은 창씨개명이 결코 그렇지 않은 일이었음을 다각도로 분석했다.

우리는 창씨개명을 추진한 주체로 '일제'를 거론하지만, 이 때 일제는 '내지'(內地)라 일컫던 식민본국 일본 정부를 말하는가? 아니면 조선총독부를 말하는가? 혹은 그것도 아니라면 두 정부 모두를 합칭한 것인가?

이런 의문 앞에서 조선총독부 산하 경찰청이랄 수 있는 경무국만 해도 창씨개명에 반대했으며, 일본 내지에서도 반대론이 거셌다는 미즈노 교수의 증거 제시는 당혹스럽기도 하다.

식민지 조선과 일본 내지에서 반대가 얼마나 거세게 일었던지 윤치호는 1940년 7월5일자 일기에서 미나미 지로 총독이 경질될 것이라고 예상하기도 했다. 윤치호는 이 일기에서 "10월 말까지 미나미 총독이 경질된다. 우사미, 세키야, 마루야마, 다나카, 사카타니, 유아사, 고다마, 미즈노 등의 (일본) 지도자가 (미나미가) 조선인에게 일본 이름을 강요한 데 적극 반대하고 있다"는 이유를 들었다.

일본 내지 쪽에서는 특히 조선총독부 관리 출신들이 총독부 후원 기관으로 조직한 '중앙조선협회'가 맹렬한 창씨개명 반대 운동을 전개했다.

자칫 총독의 경질까지 불러 올 수 있는 창씨개명을 그렇다면 누가, 무엇을 위해 주도했으며, 왜 일본측에서는 반대가 그토록 심했을까?

미즈노 교수는 우선 창씨개명이란 개념 자체에서 혼란을 일으킨다고 지적한다. 그에 의하면 창씨(創氏)는 일본식 성(姓)을 새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조선에는 없는 '우지(氏)'라는 것을 만들어내는 일이며 이것이 강제 조항이었다. 반면 이름을 바꾸는 개명은 권장 사항이었기 때문에 바꾸지 않아도 상관 없었고, 실제 이름을 바꾼 경우는 그다지 사례가 많지 않다.

미즈노 교수의 연구에 의하면 창씨개명을 입안하고 추진한 사람은 1937년 총독부 학무국장에 취임해 조선인의 철저한 '황국신민화'를 밀어붙인 시오바라 도키사부로(鹽原時三郞)였다. 이를 미나미 총독이 뒷받침한 것이다.

왜 창씨개명을 하게 되었는지는 다른 누구보다 미나미 총독의 다음과 같은 증언이 있다.

"반도인에게 이러한 혈통 중심주의에서 탈각하도록 해서 국가 중심의 관념을 배양하고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국체(國體)의 본의(本義)에 철저하도록 한다는 취지에서…씨(氏)를 짓는 일을 허용하게 했다"

총독부는 부부임에도 남편과 아내가 다른 성을 쓰는 당시 조선의 부계 중심 혈통주의 곧, '조상중심주의'가 천황을 정점으로 하는 국가 건설에 지장을 초래한다고 판단했다. 이에 가족과 종족(씨족), 지역을 완전히 해체함으로써 모든 조선인을 천황 아래에 두는 일본식 '이에(家)' 제도를 도입하려던 것이 창씨개명의 진정한 목적이었다고 미즈노 교수는 말한다.

이에 대한 일본인의 반대 여론이 의외로 높았던 것은 다른 무엇보다 조선인에 대한 차별의 약화를 두려워 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예컨대 총독부 경찰은 조선인이 똑같이 일본 씨와 성을 쓰게 되면, 그가 조선인인지 일본인인지 구별이 쉽지 않다는 반론을 제기했으며, 내지측 일본인들 사이에서도 이런 우려가 높았다는 것이다.

창씨개명에 대해 식민지배의 책임을 회피하려는 일본측에서는 "그것은 권고사항이었지 강제가 아니었다"거나 "총독부의 의도와 다르게 말단 기관에서 그것을 조선인들에게 강요하면서 벌어진 일"이라는 식으로 얼버무리곤 한다.

하지만 이 부분에 대한 미즈노 교수의 주장은 "창씨의 강제는 말단 직원에 의해 가해진 것이 아니라 총독부의 정책에서 유래한 것임이 명백하다"고 강조한다. 창씨를 위해 각종 공권력이 동원됐으며, 다른 무엇보다 이런 강압적인 분위기는 자식의 취업이나 취학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소문을 삽시간에 낳는 것으로 발전했다고 지적한다.

극소수를 제외한 조선인이 창씨개명에 저항했다는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하지만 창씨를 하게 된 사연은 다양했다.

미즈노 교수가 소개한 예화 중에는 의외로 '자식의 앞날에 대한 걱정' 때문에 창씨를 단행했다는 증언이 많다.

민족시인으로 알려진 윤동주조차 일본으로 들어가기 위해 창씨를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외에도 미즈노 교수의 이번 책은 창씨개명이 결코 단순한 사건이 아니며, 창씨했다는 사실이 친일이라는 주홍글자와 동일시될 수 없는 일임을 다각도로 보여준다. 요컨대 창씨개명은 민족말살책이란 한마디로써 모든 논의가 종결되는 것이 아니라, 그에 더불어 국가가 '국민'(신민)을 편제하려는 목적에서 획책된 전대미문의 '이름의 정치학'이기도 했던 것이다. 331쪽. 1만6천원.

http://blog.yonhapnews.co.kr/ts1406

taeshik@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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