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미의 진주' 아르헨티나의 눈물] (2) '반복되는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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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회사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코레엔테스(Corrientes) 거리.

아르헨티나 금융중심지인 이 곳 한복판에 있는 씨티은행 건물에는 특이하게도 유리창이 하나도 없다.

은행 입구의 쪽문만 열려있을 뿐 사면이 온통 철판으로 둘러쳐져 있다.

시티은행의 "철판 공사"는 지난 2001년 12월초에 이루어졌다.

아르헨티나 정부가 전격적인 예금인출 제한조치를 취했을 때이다.

예금의 강제 동결에 분노한 대중들이 전국 각지의 은행을 잇따라 습격한데 따른자구책이다.

세월이 흘러 예금인출 제한조치는 풀렸지만 씨티은행은 여전히 외벽을 단단한 철판으로 감싸고 있다.

당시 조치는 페르난도 델라루아 대통령이 발표한 것으로 모든 달러화 예금을 페소화로 강제 전환시키고 은행계좌의 월 인출액 한도를 1천페소로 제한하는 "혁명적인" 것이었다.

사실상 은행에 예치된 달러화 표시 뭉칫돈이 모두 동결된 셈이었다.

아르헨티나 정부의 이같은 "극약처방"은 1999년부터 경제가 극심한 침체국면에빠져들고 대외 채무를 갚지 못할 것이라는 위기감이 확산된데 따른 것이었다.

게다가 불과 1~2년 사이에 3백억달러가 넘는 예금자산이 해외로 빠져나갔다.

2000년말 기준 외환보유고가 2백68억달러에 불과했던 점을 감안하면 달러화의 해외 반출이 정부의 경제운용에 준 충격은 매우 컸다.

하지만 정보를 미리 입수한 권력자들과 부유층들이 조치를 발표하기 직전에 예금을 빼가면서 "죄없는 서민들"만 일방적으로 피해를 입는 결과가 나타났다.

발표 3일 전인 11월30일 하룻동안에 인출된 돈만 해도 7억달러에 달할 정도였다.

성난 국민들의 시위와 폭동이 벌어졌고 급기야 군 병력이 출동해야 하는 소요사태로 이어졌다.

그 유명한 "냄비 시위"도 이때 일어났다.

수십만명의 국민들이 매일 밤 거리로 쏟아져나와 생존권 보장을 촉구하는 뜻으로 냄비를 두들기자 12월20일 델라루아 대통령은 전격 하야를 발표했다.

그로부터 12월31일까지 불과 11일 사이에 아르헨티나 정세는 5명의 대통령이 바뀌는 전대미문의 혼미를 거듭했다.

급기야 이틀짜리 대통령을 했던 아돌포 로드리게사 사 산루이스 주지사는 24일1천3백억달러에 달하는 외채의 모라토리움(지불유예)를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 무능한 정부에 화살

돌이켜보면 2001년의 모라토리움 사태는 지난 1980년대초 부터 3~4년 주기로 진행돼오던 경제위기의 "종합판"이었다.

위기의 중심에는 늘 정부의 거듭된 실정(失政)이 있었다.

85세의 훌리오 헤르타인 증권거래소 회장은 "정부가 경제에 개입하는 양상은 도대체 종잡을 수 없을 정도로 일관성이 없었다"며 "외채 문제는 기본적으로 무분별하게 빚을 얻어쓴 정부가 야기한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노동자총연맹(CDT)의 로폴프 다에르 위원장 역시 "역대 정부가 모두 무능했을 뿐만 아니라 앞을 내다보는 정치를 하지도 못했다"고 혹평했다.

아르헨티나의 권력자들은 위기 때마다 국민의 단합을 호소했지만 2001년 사태에서도 나타났듯이 최후에 남겨진 것은 언제나 가난한 자들의 아우성 뿐이었다.

예금인출 제한조치를 경험한 아르헨티나의 상당수 부유층들은 더 이상 달러화를은행에 예치하지 않는다.

이른바 "콜촌"이라고 불리는 침대 밑에 감춰두고 있다는 것.

그 돈이 무려 2백억달러를 넘는다고 한다.

또 정책은 때를 놓치기 일쑤였고 그나마 국제사회의 룰과 포퓰리즘(대중영합주의)를 오락가락하는 양상을 보였다.

새로 들어선 정부들은 개혁을 위한 단골메뉴로 노동개혁을 들고 나왔지만 과거페론 정권때의 영화를 그리워하는 노조와 노조 출신 정치인들의 반발에 부딪혀번번히 무산됐다.

<> 경제위기 전개과정

아르헨티나는 1970년대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비교적 경제사정이 괜찮았다.

1940~1950년대 곡물을 팔아 벌어놓은 달러는 넉넉했고 유럽 등에서 들어오던 투자 이민자들이 들여오는 돈도 짭짤했다.

하지만 1970년대를 거쳐 1980년대에 들어선 뒤 사정은 크게 달라졌다.

<>1980년대의 경제위기=하지만 1976년 중화학 공업 육성정책을 본격화하면서 성급하게 자본 및 수입자유화를 실시한 것이 화근이었다.

저축보다는 소비 중심의 경제구조가 짜여진 상황에서 아르헨티나는 대규모 경상수지 적자를 보게 됐고 총 외채는 1978년 1백25억달러에서 1982년 4백36억달러로 급증했다.

누적된 재정적자를 줄이기 위해 남발한 국채는 고스란히 빚으로 쌓이기 시작했다.

외채 상환을 위해 다시 외채를 끌어들이는 악순환더 이때부터 시작됐다.

1983년 군정을 끝내고 직접선거에 의해 당선된 라디칼 당의 라울 알폰신 대통령은 경제구조를 개선하기 위해 정치개혁과 노동개혁에 착수했다.

하지만 살인적인 물가를 잡는데 실패하고 최대 이익집단인 노조까지 조직적으로반발해 뜻을 이루지 못했다.

수출경쟁력 확보를 위한 환율의 평가절하도 "거품 형성-소비 증가-물가 상승-거품 붕괴-경기 침체"의 악순환을 연출했을 뿐이었다.

<>1990년대=이같은 상황에서 1989년 집권한 페론당의 카를로스 메넴 대통령은 경제회생을 위한 카드로 공기업 매각을 들고 나왔다.

1994년말까지 전체 공기업의 98%가 민영화됐고 총 4백억달러 상당의 외화가 유입됐다.

그 결과 아르헨티나 경제는 1990년대 초반 물가상승률을 제로 수준으로 억제하고 연평균 10% 안팎의 높은 성장률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민영기업으로 탈바꿈한 공기업들이 경영합리화를 위해 대규모 인력감축에 나서면서 실업률과 범죄율이 상승하는 등 사회불안이 야기되기 시작했다.

여기에다 메넴 대통령이 자국의 국제경쟁력을 무시한 채 1991년 미 달러화와 페소화의 교환비율을 1대1로 고정시킨 "태환 정책"을 쓰면서 막대한 무역적자에 직면하게 됐다.

업계는 물론 심지어 노동계까지 나서 태환정책을 폐지하고 페소화의 평가절하를 정부에 건의했지만 메넴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집권 기반을 놓치지 않기 위해선 무엇보다도 물가안정이 긴요했기 때문이었다.

메넴의 고집은 외채의 기록적인 폭증으로 나타났다.

1999년 그가 사임할 때 남긴 아르헨티나의 대외부채는 무려 1천4백50억달러로 불어나 있었다.

후안 루이스 부르 중남미경제연구소장은 "지난 1995년 멕시코의 페소화 폭락사태로 빚어진 "데킬라 파동"이나 98년의 아시아 금융위기,99년 브라질 헤알화의평가절하 등 국제적인 경제위기는 페소화의 탄력적인 적응을 요구했으나 이상하게도 메넴 정부는 초지일관이었다"고 말했다.

메넴으로부터 바톤을 넘겨받은 델라루아 대통령 역시 중장기 경제에 대한 비전설정 없이 메넴 정권에서 경제장관을 지내며 태환정책을 입안했던 도밍고 카발로를 재기용하고 IMF의 초긴축 정책을 그대로 수용하는 안이함으로 일관했다.

극심한 경제난을 해결하기엔 리더십이 턱없이 부족했고 믿었던 IMF 마저 등을 돌리면서 델라루아는 중도하차하는 비운을 맞이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조일훈 기자 ji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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