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소련군 동상의 두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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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서진석 기자] 
ⓒ 오마이뉴스
에스토니아 수도 탈린 시내에 있다 철거돼 자리를 옮긴 소련군인동상
ⓒ 서진석
2007년 4월 27일, 세계 뉴스에 거의 얼굴을 보이지 않던, 발트해 연안 소국 에스토니아에 갑자기 전 세계의 시선이 몰렸다. 어찌 보면 고철덩어리에 불과할 수 있는 소련 시대 군인동상이 철거된 게 발단이다.

소련의 지배를 받다가 1991년 독립한 에스토니아인들에게 도심 한복판에 있는 소련 군인 동상은 아픈 과거를 떠올리게 만드는 상처였다.

하지만 에스토니아에 살고 있는 러시아인들은 달랐다. 그들에게 동상은 나치 치하로부터 에스토니아를 해방시켜준 자랑이자 자긍심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이런 상반된 생각이 공존하는 가운데 일이 터졌다.

양쪽의 충돌은 한 명이 사망하고 많은 상점이 약탈·방화되는 사태로 이어졌고, 러시아와 에스토니아 사이에 국교 단절 이야기까지 나올 정도로 심상치 않은 분위기로 이어졌다. 그러나, 그 후 러시아에서 시작된 것이라 추정되는 몇 차례 사이버 테러 외에는 다시 잠잠해졌다.

올해 4월 27일에 작년과 같은 폭력사태가 재현되지 않더라도, 적어도 대규모 집회나 시위가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있었다.

그렇지만 막상 그날 집회에 모인 사람은 약 100명 정도. 이들은 별 다른 문제 없이 해산했다. 정작 사람들은 1년 전 사건보다 곧 세르비아에서 열리는 유로비전 콘테스트에 더 많은 관심을 두고 있는 듯 했다. 텔레비전은 유로비전 콘테스트에 참가하는 국가들의 대표곡을 소개하느라 분주했다.

에스토니아 최대 일간지 <에스티 포스티메에스>는 4월 27일자 인터넷판에서 '청동군인사건 1주년이 되는 밤, 탈린(에스토니아의 수도)은 단꿈을 이루었다'라는 헤드라인으로 그 날을 평했다. 그 평온했던 1주년 기념일처럼, 에스토니아인들과 러시아인들 사이의 화합도 그렇게 평화롭게 진행되고 있는 것일까.

동등한 화합? 종속적인 화합?

4월 26일, 청동군인동상 소요사태 1주년을 기념하는 학술대회 광경.
ⓒ 서진석
4월 26일 탈린시는 그 날을 기억하기 위한 행사를 열었다. 핀란드·러시아·헝가리·독일 등에서 온 학자들과 언론 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그 사건이 전 세계에 어떻게 비추어졌으며, 정치·경제적 영향력이 어떠했는가를 논의하기 위해 개최된 학술대회가 바로 그것. 특별한 초청장이나 자격 조건 없이 모든 시민들을 대상으로 한 이 행사에는, 탈린 시내에서 가장 규모가 큰 행사장에서 열렸음에도 사람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자리가 없을 정도로 성황을 이루었다.

그중 가장 눈길을 끈 것은 독일 도이치벨레 방송사 소속 기자가 다룬 '그 사건이 독일 사회에서 어떠한 반응을 얻었는가' 하는 내용이었다. 그에 의하면 정작 뉴스를 접한 독일인들 사이에선 왜 에스토니아 정부가 그 동상을 철거하기로 결정을 내렸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 많았다.

베를린 한가운데에도 사회주의 시절에 만든 유물이 있지만 독일인들은 아무도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는데, 왜 유독 에스토니아에서는 그런 과거의 산물이 큰 사회 문제를 불러일으킨 것인지 납득하기가 어렵다는 것이었다. 독일인 기자는 현지 학교에서 이슬람 수업을 강화하는 등 독일 정부가 소수민족 중 대다수인 터키인들과 화합하기 위해 내세운 많은 정책들도 소개했다.

발표가 끝나자 여러 가지 질문이 쏟아졌지만, 그 중에서 가장 많은 공감을 얻었던 것은 다음 내용이었다.

"기자님이 생각하는 '화합'이란 동등한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말합니까, 아니면 한 부분으로 흡수되는 것을 말합니까?"

질문을 한 중년 신사는 관중으로부터 박수갈채까지 받았다. 질문을 받은 후 조금 망설이는 듯했던 기자는 화합의 개념을 설정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고 대답했다.

독일 역시 수십만 명에 이르는 터키인들과 화합하기 위해 애를 쓰고 있지만, 지금 에스토니아인들이 겪고 있는 문제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현재 독일에 살고 있는 터키인들은 독일을 지배하기 위해서 진출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화합의 방법을 끊임없이 찾는 여행가

에스토니아에서 인기있는 방송인 중 하나인 알렉산데르 주케르만씨는 에스토니아 내 다양한 민족들의 화합 방법을 모색하기 위해 전 세계를 누비는 사람이다. 유럽을 비롯한 세계 각지를 오가면서 그 나라 사람들이 사는 이야기를 들어보고 진정한 국제화에 도달하는 길을 찾는 일을 하고 있다. 아울러 에스토니아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풍경들을 자세하게 전해주기도 한다.

그런 목적으로 제작되는 <수보테야(러시아어로 '토요일에 추는 춤'이라는 뜻)>는 명실공히 에스토니아에서 최고 시청률을 자랑하는 프로그램으로 손꼽힌다. 이 프로그램의 가장 큰 특징은, 에스토니아 방송사에서 제작되는 여러 프로그램 중 뉴스를 제외하고는 러시아어로 방송되는 유일한 프로그램이라는 것이다. 물론 에스토니아어로 자막이 나가기 때문에 현지인들도 이해하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다.

이 프로그램은 2007년 에스토니아에서 사회 화합에 가장 기여를 한 프로그램으로 선정되어 상을 받았고, 러시아 국제 TV 및 라디오 아카데미에서 '비러시아권에서 제작되는 최고의 러시아어 방송'으로 뽑히기도 했다.

그렇게 에스토니아인과 러시아인들의 화합을 주도하고 있는 주케르만씨는 정작 러시아 사람도, 에스토니아 사람도 아닌 우크라이나계 유대인이다. 그는 1년 전 그 사건을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그 사건이 있기 전까지 에스토니아 사람들과 러시아 사람들은 한 사회에서 서로 간섭하지 않고 비교적 평화롭게 살고 있었습니다. 청동 군인 동상은 러시아인들이 그토록 민감해 하던 사안이었음에도, 에스토니아 정부에서 그 동상을 건드려 두 민족의 감정을 화산처럼 폭발하게 만들었습니다."

한 곳에 존재하는 두 가지의 불편한 진실

수보테야의 진행자 알렉산데르 주케르만
ⓒ 서진석
주케르만씨는 에스토니아에는 두 가지의 진실이 살아 움직이고 있다고 말한다. "러시아인들은 에스토니아에 해방자로 왔다고 말하며, 에스토니아인들은 그런 러시아인들이 침략자로 왔다고 규정한다"는 것.

애석하게도 이 두 가지 말은 모두 진실이다. 그 두 가지 진실 속에서 갈팡질팡하고 있던 순간에, 사건은 급박하게 찾아왔고 양쪽은 어떻게 대처할지 몰라 난감해했다는 주장이다.

주케르만씨는 그 두 가지 진실 사이에서 해법을 찾기 위해서 유럽 여기저기를 다녔다. 그러나 어디에서도 에스토니아에 적용할 사례를 찾지 못했다.

에스토니아는 작지만 그만큼 복잡한 현실에 처한 나라이다. 2차 세계대전에서 시작된 문제가 아직까지 해결되지 않고 있고, 소수민족 간에 갈등도 심하기 때문이다. 십수년에 걸친 여행을 통해 그가 얻은 결과는 바로 이러한 것이었다.

"사람들은 농담 삼아, 에스토니아인들과 러시아인들에게 두 가지 진실의 문제를 해결할 한 가지 방법이 있다면 역사라고 불리는 학문을 철저히 금지시키는 것이라고 말하곤 합니다. 과거보다는 미래가 중시되어야 하기 때문이죠. 어쩌면 이에 대한 진정한 방법을 찾는 것은 새로운 세대의 작업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 세대는 일단 과거와 직접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과거에 대한 객관적인 결론을 내릴 수 없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구세대가 자기의 경험과 의견을 새 세대에 무조건 강요하는 것은 좋지 않죠. 모두 각자 생각을 중시하고 서로 열려 있어야 한다는 것은 기본입니다. 유럽은 통합되어 가고 있습니다. 젊은이들이 에스토니아가 아니라 전 세계로 시선을 돌리면 어디선가 해결책은 틀림없이 나올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프로그램이 사회 화합에 큰 기여를 했다고 생각하고 있을까? 그는 자신의 프로그램이 눈에 보이는 결과를 가져다주지는 못했다고 강조했다. 다만 민족 간에 존재하는 선입견을 없애는 데 조금이나마 기여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주케르만씨는 에스토니아 사람들에겐 '러시아 사람들은 집에서 보드카나 마시면서 어떻게 하면 소련 시대로 돌아갈 수 있는지 고민하는 사람들'이라는 선입견이 있는 것 같다고 말해주었다. 주케르만씨는 러시아어 프로그램 <수보테야> 시청자 중 70%가 에스토니아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떠올리며, 두 언어 사이에 장벽을 없애는 데는 어느 정도 기여한 것이라고 믿고 있다.

주케르만씨는 모스크바에서 발트3국을 대상으로 송출되는 제1TV채널에서 에스토니아 국내 소식을 러시아어로 전해주는 역할도 하고 있다. 많은 에스토니아 사람들이 러시아에서 일방적으로 방송되는 그 채널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가 운영하는 제작사에서 매일 15분씩 에스토니아 소식을 자체적으로 내보낼 수 있는 방송권을 확보한 후 그러한 시각이 많이 변했다고 전해주었다. 러시아인들도, 러시아 정부의 시각이 아니라 에스토니아 시각에서 만들어진 뉴스를 러시아어로 쉽게 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를 해결할 유일한 방법, 젊은 세대들

유흐비 시가지의 모습. 공식언어는 에스토니아어지만, 이곳에 살고 있는 대부분의 러시아인들을 위해 러시아어가 병기된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 서진석
주케르만씨는 4월 25일 에스토니아 동부 러시아인 밀집지역인 이다 비루마 지역 중심도시 중 하나인 유흐비의 러시아 고등학교를 찾아 자신의 취재 경험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유흐비시는 전체 인구 중 60% 이상이 러시아인이다(인근 나르바시는 80%가 러시아인들로 구성되어 있다). 거리에서 모든 간판은 공식 언어인 에스토니아어로 적혀 있지만, 정작 사람들의 대화에서는 에스토니아어를 듣기가 힘들다. 이다 비루마 지역의 경우 러시아어 전용학교가 25개, 에스토니아어 학교가 14개, 그리고 그 두 언어를 동시에 사용하는 학교가 10개로 러시아어 학교의 수가 월등히 많다. 러시아어 학교의 경우 에스토니아어와 역사 교육은 필수다.

기자는 주케르만씨의 강의에 참석한 러시아 학생들과 잠시 이야기를 나눴다. 곧 학교를 졸업하는 마리나 패른푸는 러시아인 아버지 때문에 집에서는 러시아어로 이야기하지만, 에스토니아인 어머니 덕분에 에스토니아어 실력은 학교 전체에서 최고 수준이다. 마리나는 러시아인과 에스토니아인 모두 언어 문제 때문에 서로 잘 소통하지 않으려 한다고 전해주었다. 자신의 아버지 역시 시민권 통과 시험을 치렀기 때문에 기본적인 에스토니아어는 할 수 있지만, 그마저 사용할 기회는 거의 없다는 것.

청동 군인 동상 사건 이후, 그들의 삶에서 눈에 띄게 변한 것은 그리 많지 않다. 에스토니아인들과 러시아인들은 여전히 잘 소통하려 하지 않는다. 차이가 있다면 러시아 쪽에서 에스토니아인들의 출입을 더욱 통제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러시아에 자주 드나드는 아버지를 둔 17세 여학생 야나에 의하면, 핀란드에서 러시아로 입국하는 경우에도, 에스토니아인들의 차는 더 심하게 검사하는 등 변화가 눈에 띄게 늘어났다. 야나 역시 청동 군인 동상 사건이 좋지 않은 일이었다고 느끼고 있었다.

"아마 그 일은 대부분의 에스토니아인들이 원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렇지만 사실 그래야 할 필요는 없었다고 생각해요. 아무도 모르게 한밤중에 급박하게 철거가 진행된 것도 좀 그렇고요."

인터뷰에 응한 드미트리·야나·례나·마리나 역시 에스토니아에서 사는 것에 아주 만족하고 에스토니아어를 배우는 데에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말해주었다.

인터뷰에 참여해준 유흐비 러시아 고등학교 학생들과 교장선생님.
ⓒ 서진석
이 학교의 교장 선생님은, 기자가 학생들과 인터뷰를 하고 싶다고 하자, 학생들의 에스토니아어 실력이 충분치 않아 인터뷰하기 힘들 거라면서 자신이 러시아어 통역을 도와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내가 만난 러시아 학생들은 전부 에스토니아어를 잘했다. 기회가 되면 그들은 누구와도 에스토니아어로 대화를 나눌 준비가 되어 있었다.

주케르만씨는 3월 8일 방송된 프로그램에서 에스토니아에 살고 있는 러시아인들을 '어떻게 변할 지 모르는 에일리언'으로 표현한 적이 있다. 상대방에 대해 모른다는 것은 단지 의사소통의 불편함만이 아니라, 두려움과 공포까지 불러일으킨다는 내용이었다. 50년이라는 기간 동안 보이지 않는 유리벽 속에서 상대방에 대해 모르고 살았던 그들의 모습을 잘 대변해 주고 있는 듯하다.

다행스럽게도, 청동 군인 동상 사건의 1주년 기념일은 평화롭게 지나갔다. 이곳 사람들에겐 아주 큰 일이었지만, 1년 전 한국인들에게는 거의 조명 받지 못하고 넘어갈 만큼 조그마한 사건에 불과했다. 말 없는 청동 군인 동상은 우리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일까? 그런 것 같지는 않다. 한국 사회에도 예컨대 외국인노동자처럼 이른바 '이질적인' 존재들, '에일리언'처럼 비치는 존재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이들과 조화롭게 살아갈 준비를 한국 사회는 잘해가고 있는 걸까? 청동 군인 동상이 한국인에게 전하는 화두는 이런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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