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어를 공용어로? 택도 없는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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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서진석 기자]
투표자 중 대다수가 찬성표를 던진 라트갈레의 중심도시 다우가우필스. 이곳에서는 러시아어권자수가 무려 80%에 육박한다.
ⓒ 서진석

"라트비아에서는 라트비아어로"... 당연한 이야기를 국민투표까지?

북유럽 발트해안가에 위치한 라트비아는 인구 200만 명에 불과한 작은 나라로, 작년 2011년 소련으로부터 독립한 지 20주년을 맞았다. 그러나 과거 청산과 역사 해석, 그리고 러시아 유민들과의 관계 등 풀지 못한 사회적 숙제들로 인해 여태 몸살을 앓고 있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라트비아어가 처한 문제였다. 라트비아는 발트해를 주변으로 해서 스칸디나비아, 핀란드, 러시아 등으로 둘러싸여 있지만, 주변의 언어와는 큰 연관이 없는 발트어군에 속하는 독특한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인도유럽어족에 속해있기는 하지만 게르만어, 슬라브어 등과는 별도의 궤도에서 발전을 해온 발트어는 현재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두 국가에서만 통용되고 있다. 이 발트어는 우리나라에서도 불교경전을 기록할 때 사용되는, 고대 인도어인 산스크리트어(범어)와 흡사한 단어들과 문법구조 등으로 세계 언어학자들의 관심의 대상이 된 지 오래다.

소련 시절 라트비아에 공업지대가 중점적으로 건설되고 러시아어권 노동자와 기술자들이 대거 이주하면서 라트비아의 러시아화가 진행되었고, 1991년 독립 이후에도 현재 라트비아 인구 중 대략 40%가 러시아 유민들로 분류되어 있다.

특히 수도 리가와 동부 라트갈레 지역 등에서는 인구의 절반 이상이 러시아인들로 이루어져 있다. 과거 소련에서 독립한 여러 나라들이 똑같이 겪고 있는 문제이긴 하지만, 라트비아 역시 그 결과 러시아어에 밀려 자국어가 사회 전반적으로 설자리를 잃고 말았다.

소련 독립 이후 라트비아 정부는 라트비아어의 활성화를 위해서 러시아 유민들이 라트비아 시민권을 딸 수 있는 기본적인 조건으로 라트비아 시험을 통과하도록 지정했다. 그러나 상당수의 러시아인들이 라트비아어 시험을 거부하여 라트비아 시민권을 취득하지 못한 채 '이방인'으로 거주하고 있다.

러시아 국적을 가진 경우라면 러시아 여권을 연장하면서 러시아 시민권을 유지하는 것이 가능했다. 하지만 소련 복속 후 라트비아에서 태어나 인생의 대부분을 보냈지만 라트비아어 시험을 치르지 않는 경우에는 라트비아도 러시아도 아닌 '이방인' 여권을 발급받아 어정쩡한 신분을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배경으로 인해 러시아 정부는 라트비아어를 구사하지 못하는 러시아인들에게 시민권을 부여하지 않는 라트비아 정부에 대해 '러시아인들을 차별한다'는 태도로 일관해 왔다. 라트비아에 사는 러시아 유민들은 러시아어도 라트비아어와 같은 공용어의 위치를 유지할 수 있도록 줄기차게 요구해왔다.

이는 수년간 <오마이뉴스>에서 발트3국 관련 해외통신원 일을 해온 내가 라트비아에 대한 기사를 쓸 때마다 언제나 마주해야 하는 끝나지 않는 화두같은 것이었다. 이렇게 독립 이후로도 20년간 줄곧 이어져온 문제가 드디어 종말을 고하는 시기가 마침내 도래한 것일까? 

라트비아어와 러시아어가 공존하는 라트비아 거리.
ⓒ 서진석

20년간 골칫거리, 드디어 역사 속으로?

2012년 2월 18일 라트비아에서는 이색적인 국민투표가 개최되었다. 바로 러시아어를 라트비아와 같은 공용어의 위치로 승격시킬 것인가를 국민들에게 묻기 위한 국민투표였다. 이 결과 라트비아 헌법에 러시아어를 공용어로 인정하는 조항을 첨가할지를 묻는 이번 국민투표에서 국민 대다수가 찬성을 하게 되면 헌법의 5개 조항을 수정해서 러시아어 역시 라트비아어와 동등한 공용어 자격을 얻게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국민투표 직후 라트비아 선거위원회 집계 결과 전체 투표참여자 중 70%가 넘는 절대 다수가 그에 대해 반대 의견을 내놓았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러시아, 라트비아 등 국적을 불문하고 라트비아에 사는 국민들의 대다수가 라트비아어 이외에 그 어떤 공용어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만천하에 공표한 셈이 되었다. 만약 러시아 사람들이 모두 찬성에 투표했을 경우에는 정말 다른 투표결과를 예상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라트비아 내에 러시아어 공용화 안건을 국민투표에 부치게 된 데에는 2011년 열렸던 총선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친러시아 성격의 정당인 '화합중심당(Saska?as centrs, 영어 Harmony Center)'이 정작 총선에서는 승리했지만, 당시 대통령직에 있던 자틀레르스와 수상 돔브롭스키스는 '화합중심당'을 배제한 채, 반러시아적 성향의 극우정당들의 연합전선인 '조국동맹'과 내각을 구성했다. 이는 라트비아 내 친러 정치인들로부터 많은 불만을 이끌어냈다.

조국동맹은 더 나아가 내각 구성 직후 라트비아 내 모든 학교에서는 오직 라트비아어로만 수업이 가능하도록 헌법을 조정하는 것을 국민투표에 부치고자 시도했다. 이를 위해서는 투표권자들 중 최소 10%의 지지서명을 받아야 했으나 서명표를 모으는 데는 실패하고 말았다.

그 후 친러시아 정치인들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라트비아 볼세비키 정당의 대표인 유대계 러시아인 블라디미르 린데르만이 이끄는 러시아인들의 연합인 '로드노이 야직(모국어)'이 러시아어를 라트비아의 제2공용어로 격상시키기 위한 국민투표를 제안했고, 그에 필요한 총 투표권자의 10%를 웃도는 18만여 명의 서명을 얻는 데 성공했다. 게다가 닐스 우샤코우스 리가 시장 역시 그들이 제안한 국민투표를 적극 지지하는 의사를 표명했다. 그는 바로 친러시아 정당 '화합중심당' 출신이었던 것이다.

사태가 갑자기 반대방향으로 흐르자, 몇몇 극우정치인들이 이 국민투표의 위헌여부를 심사하기 위해 헌법재판소에 회부할 것을 신청하기도 했고, 현 라트비아 대통령인 안드리스 베르진스 역시 초기에는 이를 저지하려고 시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대통령과 수상은 국민투표를 무효화하는 대신 "모두 국민투표에 참가해서 반대표를 던지라"고 호소했다.

1930년대에 조성된 자유의 여신상. 라트비아의 자유와 독립을 상징하는 조형물이다.
ⓒ 김성민

"러시아어는 탱크로 들여온 것이 아니다"

이번 국민투표를 성사시키기 위해서 지지서명을 모으고 있던 린데르만은 2011년 11월 라트비아 1채널의 아침방송 <좋은 아침, 라트비아>에 출연해서 국민투표의 이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호소한바 있다.

"(국민투표를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단지 언어가 아니라 명예에 관한 것이다. 우리 러시아인들의 명예는 위험에 처해 있다. 우리들은 이곳에 이등국민으로 남고 싶지 않다. 우리에게도 라트비아인들과 똑같은 권리를 누릴 자격이 있다. 러시아어는 이 땅에 탱크를 통해서 들여온 것이 아니라, 역사 내내 이곳에 언제나 있었던 언어이다."

이런 배경에서 치러진 국민투표는 라트비아 국내외에서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우선 이번 국민투표에서는 독립 이후 치러진 투표 중 역대 최대 인원이 참가한 것으로 집계되었다. 라트비아 전체에서 보았을 때 총 투표권자의 71.12%가 투표에 참여하였으며, 특히 리가에서만 77.11%가 참여하여 전국 평균 투표율을 훨씬 웃돌았다. 이는 2003년 유럽연합 가입여부를 묻는 국민투표보다도 더 높은 참여율을 보인 것이었다.

닐스 우샤코우스 리가 시장은 국민투표에 참가한 후 찬성에 투표했음을 공식적으로 알렸다. 그는 언론과 가진 인터뷰에서 "이번 국민투표는 분쟁을 일으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문제가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는 기회가 될 것"이라는 의견을 피력했다. 동시에 리가에서 라트비아어 학습이 용이하도록 더 많은 예산을 책정하도록 힘쓰겠다고 약속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와 관련된 기사에서는 그의 친러시아 정책을 비방하는 댓글이 줄을 잇고 있다. 

특히 투표 당일 폴란드를 순방 중이었던 현직 베르진스 대통령은 라트비아에서 투표를 하는 대신 폴란드에 있는 라트비아 대사관에서 투표를 마치고 라트비아에 귀국해 유럽의 언론사들로부터 관심을 끌어모으는 데 성공을 했다. 투표 결과 러시아어의 제2공용어화에 찬성하는 이들은 24.88%, 그리고 74.8%의 투표권자들은 반대에 표를 던졌다. 수치상으로 볼 때는 라트비아어의 완벽한 승리다.

하지만 이런 수치상의 결과에만 만족할 수 없는 이유가 하나 있다. 바로 러시아 인구가 절대 다수를 이루고 있는 동부의 라트갈레 지역은 전체 평균에 이르지 못하는 57.37% 만이 투표에 참가했으며, 투표자 중 60.03%라는 적지 않은 수가 찬성에 투표를 한 것이다. 이는 여전히 이번 결정이 모든 라트비아인들에게 유효한 것은 아님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라트갈레에는, 라트비아어보다는 리투아니아어에 더 가까운 라트갈레어를 사용하는 소수민족들의 문제도 안고 있어 문제가 조금 더 심각하다. 하지만 라트비아 서부 해안가에 주로 거주하는 또 다른 리브인들이나 라트비아 내 유대인들은 라트비아 정부의 입장에 발 맞추어 러시아어의 공용화를 반대한다는 공식입장을 표명하기도 했다.

라트비아 '조국동맹' 소속 정당 중 하나인 '조국자유당'의 반대투표독려 광고문.
ⓒ 서진석

힘 실린 라트비아. 그러나 맞서기엔 '너무 힘센 형' 러시아

라트비아 출신의 아나스타샤 랴하(23)는 한국인과 결혼하여 서울에서 수년간 생활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어머니와 라트비아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랴하는 이번 국민투표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을까.

"난 러시아 사람들에 대해 안 좋은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저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을 존중해줄 필요가 있다고만 생각한다. 평생 모국어로만으로 이야기하고자 하는 이들이라면 러시아 내에서도 그럴 수 있는 장소는 충분하다. 하지만 라트비아에도 물론 러시아 학교가 있으며 (나 본인도 그 중 하나에서 수학했다) 러시아어로 방영되는 텔레비전, 잡지, 신문 등도 있다. 심지어 러시아어가 통용되는 장소도 많다. 그러기 때문에 나는 라트비아가 러시아인들에게 불편한 장소는 아니라고 보며, 러시아인들이 라트비아의 언어와 문화에 대해 부정적인 편견을 갖지는 말았으면 하는 것이 내 생각이다."

유럽의 주요 언론들은 이번 라트비아 국민투표에 대해 대대적인 보도를 아끼지 않았다. 또 리투아니아와 에스토니아의 정치인들과 언론은 국민투표 결과에 대해 축하의사를 공식적으로 내비치기도 했다.

이번 국민투표를 통해 라트비아인들은 자신들이 겪어야 했던 문제들을 전세계적 차원으로 공론화시키고 입장을 표명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명백히 그들의 가장 큰 무역상대이자 이웃인 러시아와의 관계를 다시 새로이 정립해야 한다는 더 심각한 숙제를 덤으로 얻었다는 것 역시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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