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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실록 105권, 성종 10년 6월 10일 을미 1번째기사 1479년 명 성화(成化) 15년

제주도 표류인 김비의 등으로부터 유구국 풍속과 일본국 사정을 듣다

표류(漂流)했던 제주(濟州)사람 김비의(金非衣)·강무(姜茂)·이정(李正) 등 세 사람이 유구국(琉球國)으로부터 돌아왔는데, 지나온 바 여러 섬의 풍속(風俗)을 말하는 것이 매우 기이(奇異)하므로, 임금이 홍문관(弘文館)에 명하여 그 말을 써서 아뢰라고 하였다. 그 말에 이르기를,

"우리들이 정유년372) 2월 1일에 현세수(玄世修)·김득산(金得山)·이청민(李淸敏)·양성돌(梁成突)·조귀봉(曹貴奉)과 더불어 진상(進上)할 감자(柑子)를 배수(陪受)하여 같이 한 배에 타고 바다로 출범(出帆)하여 추자도(楸子島)로 향해 가다가, 갑자기 크게 불어오는 동풍(東風)을 만나 서쪽으로 향하여 표류하였습니다. 처음 출발한 날로부터 제 6일에 이르러서는 바닷물이 맑고 푸르다가, 제 7일부터 제 8일까지 1주야(晝夜)를 가니 혼탁(渾濁)하기가 뜨물과 같았으며, 제 9일에 또 서풍(西風)을 만나서 남쪽을 향하여 표류해 가니 바닷물이 맑고 푸르렀습니다. 제 14일 째에 한 작은 섬을 바라보게 되었는데, 미처 기슭에 대이지 못하여 키가 부러지고 배가 파손되어 남은 사람은 모두 다 물에 빠져 죽고, 여러가지 장비도 모두 물에 빠져 잃어버렸으며, 우리들 세 사람은 한 판자에 타고 앉아 있었습니다. 표탕(漂蕩)하는 사이에 마침 고기잡이배 두 척이 있어서 각각 네 사람이 타고 앉아 있다가 우리들을 발견하고는 거두어 싣고 가서 섬 기슭에 이르렀습니다.

섬의 이름은 윤이시마(閏伊是麿)라고 【그곳 풍속에 섬을 일컬어 시마라고 한다.】 하였습니다. 인가(人家)가 섬을 둘러 살고 있고, 둘레는 이틀 길이 될 듯하며, 섬사람은 남녀 1백여 명으로 풀을 베어 바닷가에 여막을 만들어서 우리들을 머물게 하였습니다. 우리들이 제주(濟州)를 출발한 때로부터 큰 바람이 파도를 일으켜 파도가 이마[顙] 위를 지나고, 물이 배 가운데 꽉 차서 뱃전이 잠기지 않은 것은 두어 판자뿐이었습니다. 김비의이정이 바가지를 가지고 물을 퍼내고, 강무는 노(櫓)를 잡았으며, 나머지는 모두 다 배멀미를 하여 누워 있어서 밥을 지을 수가 없어 한 방울의 물도 입에 넣지 못한지가 무릇 열나흘이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섬사람이 쌀죽[稻米粥]과 마늘을 가지고 와서 먹였습니다. 그날 저녁부터는 처음으로 쌀밥 및 탁주(濁酒)와 마른 바다물고기를 먹었는데, 물고기 이름은 다 알지 못했습니다. 7일을 머문 뒤에 인가(人家)에 옮겨 두고서 차례로 돌려가며 대접을 하는데, 한 마을에서 대접이 끝나면 문득 다음 동네로 체송(遞送)하였습니다. 한 달 뒤에는 우리들을 세 마을에 나누어 두고 역시 차례로 돌려가며 대접하는데, 무릇 술과 밥은 하루에 세끼였으며, 온 섬사람의 용모(容貌)는 우리 나라와 동일(同一)했습니다.

1. 그 나라 풍속은 귀를 뚫어 푸르고 작은 구슬로써 꿰어 2, 3촌쯤 드리우고, 또 구슬을 꿰어 목에 3, 4겹을 둘러서 1자[尺]쯤 드리웠으며, 남녀(男女)가 같이 하는데 늙은 자는 안했습니다.

1. 남자·여자 모두 다 맨발로 신이 없었습니다.

1. 남자는 머리를 꼬아 곱쳐서 포개어 삼베 끈으로 묶어서 목 가에 상투를 틀었는데 망건(網巾)을 쓰지 않았습니다. 수염은 길어서 배꼽을 지나갈 정도인데, 혹은 꼬아서 상투를 두어 겹을 둘렀습니다. 부인(婦人)의 머리도 길어서 서면 발뒤꿈치까지 미치고 짧은 것은 무릎에 이르는데, 쪽을 찌지 않고 머리 위에 둘렀으며, 옆으로 나무빗을 귀밑머리에 꽂았습니다.

1. 가마·솥·숟가락·젓가락·소반·밥그릇·자기(磁器)·와기(瓦器)는 없고, 흙을 뭉쳐서 솥을 만들어 햇빛에 쪼여 말려서 짚불로써 태워 밥을 짓는데, 5,6일이면 문득 파열(破裂)해 버립니다.

1. 쌀[稻米]을 전용(專用)하고, 비록 조(粟)가 있더라도 심기를 즐겨하지 아니하였습니다.

1. 밥은 대나무 상자에 담아서 손으로 뭉쳐 덩어리를 만들되 주먹 크기와 같이 하고, 밥상은 없고 작은 나무 궤(几)를 사용하여 각각 사람 앞에 놓습니다. 매양 밥을 먹을 때에는 한 부인이 상자를 맡아서 이를 나누어 주며 사람마다 한 덩어리씩인데, 먼저 나뭇잎을 손바닥 가운데 놓고 밥덩이를 그 나뭇잎 위에 얹어 놓고 먹으며, 그 나뭇잎은 연꽃잎과 같았습니다. 한 덩어리를 다 먹으면 또 한 덩어리를 나누어 주어 세 덩어리로 한도를 삼으나, 먹을 수 있는 자에게 덩어리 수를 계산하지 않고 다 먹는 데에 따라 주었습니다.

1. 염장(鹽醬)은 없고, 바닷물에 채소를 넣어서 국을 만들며, 그릇은 바가지[瓠子]를 사용하거나 혹은 나무를 파서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1. 술은 탁주(濁酒)는 있으나 청주(淸酒)는 없는데, 쌀을 물에 불려서 여자로 하여금 씹게 하여 죽같이 만들어 나무통에서 빚으며, 누룩을 사용하지 아니하였습니다. 많이 마신 연후에야 조금 취하고, 술잔을 바가지를 사용하며, 무릇 마실 때에는 사람이 한 개의 바가지를 가지고 마시기도 하고 그치기도 하는데, 양(量)에 따라 마시며 수작(酬酢)의 예가 없고, 마실 수 있는 자에게는 더 첨가합니다. 그 술은 매우 담담하며, 빚은 뒤 3, 4일이면 익고 오래되면 쉬어서 쓰지 못하며, 나물 한가지로 안주를 하는데, 혹 마른 물고기를 쓰기도 하고, 혹은 신선한 물고기를 잘게 끊어서 회(膾)를 만들고 마늘과 나물을 더하기도 합니다.

1. 혹 쌀을 불려 보구(步臼)373) 에 찧어서 이를 뭉쳐 떡을 만들되 종려나무 잎의 크기와 같이 하고, 종려나무 잎으로 싸고 짚으로 묶어서 삶아 먹습니다.

1. 그 거처는 모두 1실(室)을 만들고, 내실(內室)이 따로 없고 창[戶牖]이 없으며, 전면(前面)은 조금 높이 들려 있고, 후면(後面)은 처마가 땅에 드리워져 있으며, 대개 띠[茅]를 사용하고 기와가 없으며, 밖에는 울타리가 없고 잠자리는 목상(木床)을 사용하며, 이불과 요가 없고 포석(蒲席)을 깔아서 사용하며, 사는 집 앞에 따로 누고(樓庫)를 만들어 거둔 바의 벼를 쌓아 두었습니다.

1. 관대(冠帶)가 없고 더우면 혹 종려나무 잎을 사용하여 삿갓 모양의 것을 만들었는데, 우리 나라의 승립(僧笠)과 같았습니다.

1. 삼[麻]·목면(木綿)이 없고, 양잠(養蠶)도 하지 않았으며, 오직 모시[苧]를 짜서 베를 만들고, 옷을 만들되 직령(直領)과 같았으며 옷깃과 주름은 없고 소매는 짧고 넓으며, 염색(染色)은 남청(藍靑)을 쓰고, 속옷은 백포(白布) 세 폭을 써서 볼기[臀]에 매 었으며, 부인의 옷도 같았으나, 다만 속치마를 입고 속옷이 없으며 치마도 푸른 빛을 물들였습니다.

1. 집에는 쥐·소·닭·고양이가 있으나, 소와 닭의 고기를 먹지 않고 죽으면 곧 묻었습니다. 우리들이 이르기를, ‘소·닭의 고기는 먹을 만한데 묻는 것은 옳지 않다.’라고 하였더니, 섬사람들은 침을 뱉으면서 비웃었습니다.

1. 산에는 재목(材木)이 많고, 잡수(雜獸)가 없었습니다.

1. 날짐승으로는 오직 비둘기와 황작(黃雀)뿐이었습니다.

1. 곤충(昆蟲)으로는 거북·뱀·두꺼비·개구리·모기·파리·박쥐·벌·나비·사마귀[螳蜋]·잠자리·지네[蜈蚣]·지렁이·개똥벌레[螢]·게가 있었습니다.

1. 철야(鐵冶)는 있으면서도 쟁기[耒耜]를 만들지 않고 작은 삽을 사용하여 밭을 파헤치고 풀을 제거하여 조[粟]를 심습니다. 수전(水田)은 12월 사이에 소를 사용하여 밟아서 파종(播種)을 하고, 정월 사이에 이앙(移秧)을 하되 풀을 베지 않으며, 2월에 벼가 바야흐로 무성하여 높이가 한 자쯤 되고, 4월에 무르익는데, 올벼[早稻]는 4월에 수확을 마치고 늦벼[晩稻]는 5월에 바야흐로 추수를 마칩니다. 벤 뒤에는 뿌리에서 다시 자라나 처음보다 더 무성하며, 7, 8월에 수확합니다. 수확기 전에는 사람들이 모두 근신(謹愼)하여, 비록 말을 하더라도 소리를 크게 하지 아니하고, 입을 오므려 휘파람을 불지 아니하며, 혹 풀잎을 말아서 불면 막대기로 이를 금하다가, 수확을 한 뒤에야 작은 피리[管]를 부는데, 소리가 매우 가늘었습니다. 한번 수확한 벼는 이삭을 연달아 묶어서 누고(樓庫)에 두고, 대나무 막대기로 이를 털어서 디딜방아로 찧습니다.

1. 풀과 벼를 베는 데에는 낫[鎌]을 쓰고, 쪼개거나 찍는 데에는 도끼와 무자(䥈子)를 사용하며, 또 작은 칼이 있고, 궁시(弓矢)와 부극(斧戟)374) 은 없으며, 사람들은 작은 창(鎗)을 가지고 기거(起居)하며 놓지를 아니하였습니다.

1. 사람이 죽으면 관(棺) 속에 앉혀서 언덕의 석굴[厂] 밑에 두고 흙으로 묻지 않았으며, 만약 언덕의 석굴이 넓으면 대여섯 개의 관을 함께 두었습니다.

1. 그 지역은 따뜻하여 겨울에도 서리와 눈이 없고 초목(草木)이 마르지 아니하며 또 얼음이 없습니다. 섬사람들은 홑옷 두 벌을 입고 여름에는 다만 하나를 입는데 남녀가 같았습니다.

1. 채소로는 마늘·가지·참외·토란[母鴟]·생강이 있는데, 가지의 줄기 높이가 3, 4척이나 되고 한 번 심으면 자손(子孫)에게까지 전하는데 결실(結實)은 처음과 같고, 너무 늙으면 가운데를 찍어 버리나 또 움이 나서 열매를 맺었습니다.

1. 나무는 오매(烏梅)·뽕나무·대나무가 있었습니다.

1. 과실로는 청귤(靑橘)·작은 밤[栗]이 있는데, 귤은 사시(四時)로 꽃이 피었습니다.

1. 등촉(燈燭)이 없고, 밤이면 대[竹]를 묶어서 횃불을 만들어 비추었습니다.

1. 집에는 뒷간[溷廁]이 없고 들에다 그냥 눕니다.

1. 베를 짤 때에는 성서(筬抒)375) 를 사용하는데 모양은 우리 나라와 같았고, 그 밖에 다른 기계는 같지 않았으며, 승수(升數)376)추세(麤細)377) 도 우리 나라와 같았습니다.

1. 땅을 파서 작은 우물을 만들고 물을 길을 때에는 바가지와 병을 썼습니다.

1. 배는 키와 돛대만 있고 노(櫓)는 없는데 순풍(順風)에만 돛을 달 뿐이었습니다.

1. 그 풍속에 도적이 없어서 길에서 떨어진 것을 줍지 아니하고, 서로 꾸짖거나 큰 소리로 싸우지 아니하며, 어린아이를 어루만져 사랑하여 비록 울더라도 손을 대지 아니하였습니다.

1. 풍속에 추장(酋長)이 없고, 문자(文字)를 알지 못했으며, 우리들은 저들과 언어가 통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오랫동안 그 땅에 있으니, 조금은 그 말하는 바를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들은 고향을 생각하고 항상 울었는데, 그 섬 사람이 새 벼의 줄기를 뽑아서 옛날 벼와 비교해 보이고는 동쪽을 향하여 불었는데, 그 뜻은 대개 새 벼가 옛 벼와 같이 익으면 마땅히 출발하여 돌아가게 되리라는 것을 말함이었습니다.

무릇 6삭(朔)을 머물고, 7월 그믐에 이르러 남풍(南風)이 불어 오는 것을 기다려서 섬사람 13명이 우리들과 같이 양식과 탁주(濁酒)를 준비해 가지고 같이 한 척의 배를 타고서 1주야(晝夜) 반을 가니, 한 섬에 이르렀습니다.

섬의 이름은 소내시마(所乃是麿)라고 하였습니다. 호송자(護送者)들은 8,9일 동안을 머물다가 본섬으로 돌아갔습니다. 소내시마는 좁으면서 길었는데, 둘레는 4, 5일정(日程)이 될 만하였고, 그 언어(言語)·음식(飮食)·의복(衣服)·거실(居室)·풍토(風土)는 대개 윤이시마와 같았으며, 우리들을 대접하는 것도 같았습니다.

1. 부인은 코를 양쪽으로 뚫어 조그마한 검은 나무를 꿰었는데, 모양이 검은 사마귀와 같았고, 정강이에는 조그마한 푸른 구슬을 둘러 매었는데, 그 넓이가 수촌(數寸)쯤이었습니다.

1. 벼와 조를 쓰는데 조는 벼의 3분의 1쯤 되었습니다.

1. 수확한 나락은 가까이 있는 빈터에 쌓아 두었는데 높이가 모두 두 길쯤이었고, 같은 마을 사람은 한곳에 모여서 사는데 많은 것은 4, 50여 소(所)에 이르렀습니다.

1. 집에는 쥐가 있고 소·닭·고양이·개를 기르는데, 소는 도살하여 이를 먹고 닭고기는 먹지 아니하였습니다.

1. 산에는 산돼지가 있는데 섬사람이 창을 가지고 개를 끌고 가서 사냥해 잡아다가 그 털을 태우고, 베어서 삶아 먹으나, 사냥한 자만 먹고 비록 지극히 친한 자일지라도 주지 않으니, 만일 남에게 주면 잡기가 어렵다고 말하였습니다.

1. 과실로 유자(柚子)·작은 밤·도토리[橡栗]가 있었습니다.

1. 채소로는 토란·치과(冬瓜)·생강·마늘·가지·박이 있었습니다.

1. 산에는 재목(材木)이 많아서 혹은 실어내어 다른 섬에 무역(貿易)하기도 하고, 또 동백나무가 있는데 높이가 두어 길[丈]이며 꽃이 피었습니다.

1. 마[薯蕷]가 있는데 그 길이가 한 자[尺] 남짓하고 사람의 몸 크기와 같으며, 두 여자가 함께 하나를 이고 도끼로 끊어서 삶아 먹습니다.

1. 날짐승으로는 까마귀·비둘기·바다가마우지[鸕鷀]·갈매기·해오리·황작(黃雀)이 있었습니다.

1. 곤충으로는 모기·파리·두꺼비·개구리·뱀·달팽이가 있었는데, 그 풍속에는 달팽이를 삶아서 먹었으며, 큰 뱀의 길이는 5, 6척이나 되고 크기는 서까래와 같았으며, 아이를 안고 있는 여자가 구렁이를 보고서 아이의 발을 구렁이 등에 올려 놓고 구렁이의 꼬리를 어루만졌는데 커서 흔들 수가 없었습니다. 그 나머지는 윤이도(閏伊島)와 같았습니다.

우리들은 무릇 5삭(朔)을 머물다가, 12월 그믐에 이르러서 남풍(南風)이 불기를 기다려 섬사람 5명이 우리들과 같이 한 척의 작은 배를 타고 하루 낮을 갔더니, 한 섬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 섬의 이름은 포월로마이시마(捕月老麻伊是麿)라고 하였습니다. 그 땅은 평평하고 넓어서 산이 없었는데 모두 다 모래와 돌로 된 땅이었고, 둘레는 소내도(所乃島)에 비교하여 조금 작았습니다. 그 언어와 의복·거실·풍토는 대개 윤이도와 같았으며, 우리들을 대접하는 것도 같았습니다.

1. 기장·조·밀·보리가 있고 논과 벼는 없어서, 소내도에서 무역(貿易)해 온다고 하였습니다.

1. 밀·보리를 심고, 가을이 되면 우분(牛糞)을 사용하되 손으로 움켜서 밭에 넣고, 삽을 사용하여 흙을 일으켜서 덮으며, 2, 3월에 바야흐로 익습니다. 추수를 마치고 난 뒤에 밭을 일구어 심는데 아홉 종류의 곡식을 심고, 또 10월 사이에 파종(播種)하여 2, 3월에 수확해서 마치고, 다시 심어서 7, 8월에 또 수확하였습니다.

1. 날짐승으로는 비둘기·황작·갈매기가 있었습니다.

1. 집에는 쥐가 있고 소·닭·고양이를 기르며, 소를 잡아 먹으나 닭고기는 먹지 않았습니다.

1. 채소는 가지·토란·마늘·박[瓠]이 있었습니다.

1. 남녀가 귀를 뚫어 조그마한 푸른 구슬을 꿰었고 또한 구슬을 꿰어서 목에 걸었습니다.

1. 재목은 없고 집을 지을 때에는 모두 다 소내도에서 가지고 와서 짓는다고 하였으며, 또 과일 나무도 없었습니다.

1. 모기·파리·달팽이가 있었는데, 그 풍속에 달팽이를 삶아서 먹는다고 하며, 나머지는 윤이도와 같았습니다.

우리들은 한 달을 머물다가 남풍이 불기를 기다려 섬사람 5명이 우리들을 데리고 한 척의 배를 타고 하루 낮을 가서 한 섬에 이르렀습니다.

섬의 이름은 포라이시마(捕剌伊是麿)라고 하였습니다. 호송인은 다음날에 본섬으로 돌아갔습니다. 그 땅은 평평하고 넓어 산이 없고, 둘레는 2일정이 될 만 하였습니다. 인가(人家)는 겨우 40호 남짓하고, 언어·의복·음식·거실·토풍(土風)이 대개 윤이도와 같으며, 우리들을 대접하는 것도 같았습니다.

1. 그 풍속은 푸른 구슬로써 팔 및 정강이를 둘러감아 매었는데 남녀가 같았습니다.

1. 날짐승으로는 비둘기·황작·갈매기가 있었습니다.

1. 기장·조·밀·보리가 있고 벼는 없었으며, 쌀은 소내도에서 무역해 온다고 하였습니다.

1. 집에는 쥐가 있고 소·닭·고양이를 기르며, 소를 잡아 먹는데 닭고기는 먹지 않았습니다.

1. 채소는 가지·토란·마늘·박이 있었습니다.

1. 재목이 없고, 과일나무도 없었습니다.

1. 곤충은 모기·파리가 있고, 거북이·뱀·두꺼비·개구리는 없었으며, 나머지는 윤이도와 같았습니다.

한 달을 머물다가 남풍이 불기를 기다려 섬사람 5명이 우리들을 데리고 같이 작은 배에 올라서 하루 낮 동안을 가니, 한섬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섬의 이름은 훌윤시마(欻尹是麿)라고 하였습니다. 호송인은 다음날에 본섬으로 돌아갔습니다. 땅은 평평하고 넓어 산이 없고, 둘레는 1일정이 될 만하였으며, 그 언어·음식·의복은 또한 윤이도와 같았습니다.

1. 기장·조·밀·보리가 있고, 벼는 없는데 쌀은 소내도에서 무역한다고 합니다.

1. 날짐승은 비둘기·황작·갈매기가 있었습니다.

1. 집에 쥐가 있고, 소·닭·고양이를 기르며, 소는 잡아 먹어도 닭고기는 먹지 않았습니다.

1. 채소는 마늘·토란이 있었습니다.

1. 과일나무와 재목이 없었습니다.

1. 곤충은 모기·파리·달팽이가 있었는데, 그 풍속에 달팽이를 삶아 먹으며, 나머지는 윤이도와 같았습니다.

한 달을 머물다가 남풍이 불기를 기다려 섬사람 8명이 우리들을 데리고 같이 한 배를 타고 1주야(晝夜)반을 가서 한 섬에 이르렀습니다. 섬의 이름은 타라마시마(他羅馬是麿)라고 하였습니다. 평평하고 넓어 산이 없고, 둘레는 1일정이 될 만하며, 사람은 50여 호가 살고 있었고, 그 언어·음식·거실·토풍이 대개 윤이도와 같았습니다.

1. 기장·조·밀·보리가 있고, 벼는 없었습니다.

1. 재목이 없어서 혹은 소내도에서 가져오고 혹은 이라부도(伊羅夫島)에서 취해온다고 하며, 또 과일 나무도 없었습니다.

1. 그 풍속에 저포(苧布)를 사용하여 남색을 물들여 두드려서 옷을 만들었는데, 그 빛깔은 채단(彩段)과 같았습니다.

1. 날짐승으로는 비둘기·황작·갈매기가 있었습니다.

1. 곤충과 가축(家畜)은 앞의 섬들과 같았습니다.

1. 채소는 마늘·토란이 있었습니다.

한 달을 머물다가 남풍이 불기를 기다려 섬사람 5명이 우리들을 데리고 같이 작은 배를 타고 하루 낮을 가서 한 섬에 이르렀습니다.

섬의 이름은 이라부시마(伊羅夫是麿)라고 하였습니다. 호송인은 다음날에 본섬으로 돌아갔습니다. 둘레는 2일정이 될 만하고, 그 언어·음식·거실·토풍은 대개 윤이도와 같았으며, 그 의복은 타라마도와 같고, 대접하는 것도 같았습니다.

1. 부인은 수정(水精)으로 된 큰 구슬을 목에 걸었습니다.

1. 기장·조·밀·보리가 있고, 또한 벼도 있었는데 벼는 보리의 10분의 1이었습니다.

1. 작은 산골짜기가 있어서 종려나무·뽕나무·대나무가 있고, 또한 재목도 있었습니다.

1. 집에 쥐가 있고, 소·닭·고양이를 기르며, 소는 잡아 먹는데 닭고기는 먹지 않았습니다. 술을 빚는 데에는 쌀 누룩[米麴]을 사용하였습니다.

1. 날짐승으로는 갈매기·해오라기·황작·비둘기가 있었습니다.

1. 곤충으로는 모기·파리·달팽이가 있는데, 달팽이를 삶아 먹고 뱀은 없으며 나머지는 윤이도와 같았습니다.

1. 채소는 마늘·토란·생강이 있었습니다.

한 달을 머물다가 남풍이 불기를 기다려 섬사람 5명이 우리들을 데리고 같이 작은 배를 타고 하루 낮을 가서 한 섬에 이르렀습니다.

섬의 이름은 멱고시마(覓高是麿)였습니다. 호송인은 다음날에 본섬으로 돌아갔습니다. 그 땅은 평평하고 넓어서 산이 없고, 둘레는 5, 6일정이었으며, 그 언어·음식·거실·토풍은 대개 윤이도와 같았고, 의복은 타라마도와 같았으며, 우리들을 대접하는 것도 같았습니다. 술을 빚는 것은 이라부도와 같았으며, 벼·기장·조·밀·보리가 있었습니다.

1. 밥을 짓는 데에는 쇠 솥[鐵鼎]을 사용하는데, 발은 없고 가마와 비슷하였으며, 이는 곧 유구국(琉球國)에서 무역한 것이었습니다.

1. 부인은 구슬을 목에 걸었는데 또한 이라부도와 같았습니다.

1. 집에는 뒷간이 있었습니다.

1. 집에는 쥐가 있고, 소·닭·고양이·개를 기르며, 소는 잡아 먹어도 닭고기는 먹지 아니하였습니다.

1. 날짐승은 새·비둘기·황작·갈매기·해오라기가 있었습니다.

1. 곤충은 거북이·뱀·두꺼비·개구리·모기·파리·달팽이가 있었는데, 달팽이를 삶아 먹었으며, 나머지는 윤이도와 같았습니다.

1. 채소는 마늘·수박·가지·토란이 있었습니다.

1. 종려나무·뽕나무·대나무가 있고, 산에는 잡목이 많았으나 그 이름을 다 알지 못하였습니다.

한 달을 머물다가 남풍이 불기를 기다려 섬사람 15명이 우리들을 데리고 같이 한 척의 배를 타고 2주야 반을 가서 유구국(琉球國)에 이르게 되었는데, 바닷물의 기세가 용솟음치고, 파도(波濤)가 험악(險惡)하여, 섬사람도 모두 배멀미를 했습니다.

유구국(琉球國)의 국왕(國王)이 호송인을 포상(褒賞)하여 각각 청홍 면포(靑紅綿布)를 하사(下賜)하고, 술과 밥을 후하게 먹이어 종일토록 취해 있었으며, 그 사람들은 하사받은 바 면포로써 옷을 만들어 입고 한 달을 머물다가 본섬으로 돌아갔습니다. 그 나라 사람과 통사(通事)가 와서 우리들에게 묻기를, ‘너희들은 어느 나라 사람이냐?’ 하므로, 우리들이 대답하기를, ‘조선 사람이다.’라고 하니, 또 묻기를, ‘너희들은 고기잡이를 하다가 표류되어 여기까지 이르렀느냐?’ 하므로, 우리들은 같이 의논하여 대답하기를, ‘다 함께 조선국 바다 남쪽 사람인데, 진상(進上)할 쌀을 싣고 경도(京都)로 향해 가다가 바람을 만나서 여기에 이르렀다.’라고 하였습니다. 통사는 우리들이 한 말을 써가지고 국왕에게 아뢰었는데, 조금 있다가 두어 관인(官人)을 보내어 와서 우리들을 맞아 한 객관(客館)에 있게 하였습니다. 이 집은 바다와의 거리는 5리(里)가 되지 못했는데, 판자로써 집을 덮었고, 문호(門戶)와 창벽(窓壁)이 있었으며, 돌 담장이 있었는데 높이가 두 길이요, 담장에 문이 있어 밤에는 자물쇠를 걸었습니다. 또 관사(官舍)가 곁에 있었는데, 수령(守令) 두 사람과 감고(監考) 두 사람이 있었고, 따로 하나의 창고를 두어 재물(財物)·전포(錢布)·어염(魚鹽)을 저장해 두었습니다. 무릇 출납(出納)하는 데에는 수령이 이를 감독하였는데, 통사가 이르기를, ‘이것은 너희 나라에 군읍(郡邑)의 관청이 있는 것과 같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들을 대접하는 데에는 매일 세 끼이고, 술도 있었습니다.

1. 한 집에서 5일의 양미(糧米)와 탁주(濁酒)와 생선젓을 관청에서 받아 대접하기를 마치면, 다음 집에서 또 받아서 윤차(輪次)로 대접하였습니다. 대개 5, 6일마다 수령이 한 번 우리들을 찾아와 술과 안주를 대접했고, 또 관인(館人)으로 하여금 상시(常時)로 풍후(豐厚)하게 대접하도록 하였습니다. 우리들은 마침 국왕의 어머니가 출유(出遊)하는 것을 보았는데, 칠련(漆輦)을 타고 사면(四面)에 발을 드리웠으며, 멘 자가 거의 20인으로 모두가 흰 저의(苧衣)를 입고 비단으로 머리를 쌌습니다. 군사는 긴 칼을 가지고 활과 화살을 찼는데, 앞뒤를 옹위(擁衛)한 자가 거의 1백여 인이었고, 쌍각(雙角)·쌍태평소(雙太平嘯)를 불었으며, 화포(火砲)를 쏘았습니다. 아름다운 부인 4, 5인이 채단(綵段) 옷을 입고, 겉에는 백저포(白苧布)의 긴 옷을 입었습니다. 우리들이 길 곁에 나가서 배알(拜謁)하니, 연을 멈추고 두 개의 납병(鑞甁)에다 술을 담아서 검은 칠을 한 목기(木器)로써 우리들에게 주었는데, 그 맛이 우리 나라의 것과 같았습니다. 어떤 소랑(小郞)이 조금 뒤에 따로 갔는데, 나이는 10여 세가 될 만하고 얼굴이 매우 아름다왔으며, 머리를 뒤로 드리우고 땋지 않았으며, 붉은 비단옷을 입고 띠를 묶었으며, 살찐 말을 탔습니다. 말굴레를 잡은 자는 모두 다 흰옷을 입었고, 말을 타고 앞에서 인도하는 자가 4, 5인이며, 좌우(左右)에서 부옹(扶擁)하는 자도 매우 많았습니다. 위사(衛士)로서 긴 칼을 가진 자가 20여 인이요, 일산(日傘)을 가진 자는 말을 나란히 타고 가면서 햇빛을 막았습니다. 우리들이 또한 배알하여 뵈이니 소랑이 말에서 내리어 납병에다 술을 담아서 대접하는데, 마시기를 마치자 소랑은 말에 올라서 갔습니다. 국인(國人)이 이르기를, ‘국왕(國王)이 훙(薨)하고, 사군(嗣君)의 나이가 어리기 때문에 모후(母后)가 임조(臨朝)하게 되었는데, 소랑이 나이가 들면 마땅히 국왕이 될 것이다.’라 하였습니다.

1. 7월 15일에는 모든 사찰(寺刹)에서 당개(幢蓋)378) 를 만드는데, 혹은 채단(彩段)을 사용하기도 하고, 혹은 채증(彩繒)을 사용하였으며, 그 위에 인형(人形) 및 조수(鳥獸)의 형상을 만들어 왕궁(王宮)에 보냈습니다. 거민(居民)은 남자 가운데 소장(少壯)한 자를 뽑아서 혹은 황금 가면(假面)을 쓰고 피리[笛]를 불고 북을 치면서 왕궁으로 나아가는데, 피리는 우리 나라의 작은 피리[管]와 같고, 북 모양도 우리 나라와 같았습니다. 그날 밤에는 크게 잡희(雜戲)를 벌이고 국왕이 임석하여 관람하였으므로, 남녀로 가서 보려는 자가 길을 메우고 거리에 넘쳤으며, 재물을 말에 싣고 왕궁으로 나아가는 자도 많았습니다.

1. 해안(海岸)에서 왕궁과의 거리는 10여 리였는데, 우리들이 멀리 바라보자 한 전각이 매우 높으므로 물어보았더니, 곧 국왕의 거처라고 하였으며, 인가(人家)는 간혹 개와(蓋瓦)였으나 판옥(板屋)도 매우 많았습니다.

1. 남녀가 상투를 이마의 가장자리에 틀어 올렸는데, 비단으로 싸고, 서인(庶人)은 모두 다 백저(白苧) 옷을 입었습니다. 부인은 머리 뒤에 머리카락을 쪽지어 올렸고, 모두 다 백저포(白苧布)의 적삼과 백저포의 치마를 입었고, 혹은 백저포의 장옷을 입었으며, 그 귀한 자는 또한 채단을 입었고 유오아(襦襖兒)·유상(襦裳)도 있었습니다. 그 수령은 아롱지게 물들인 비단을 사용하여 상투를 싸고 백세저포(白細苧布)를 입었으며, 의대(衣帶)는 붉은 물을 들인 비단이고, 나갈 때에는 말을 타며 종자(從者)가 수인(數人)이었습니다.

1. 논과 밭은 서로 반반이었는데, 밭이 조금 많고 논은 겨울에 파종을 해서 5월에는 벼가 다 익어 수확을 마치며, 또 소[牛]로서 이를 밟아 다시 파종을 해서 7월에 이앙(移秧)하고, 가을과 겨울 사이에 또 수확을 하였습니다. 밭은 작은 삽으로 이를 일구어서 조를 심는데, 또한 겨울에 처음으로 파종하고 5월에 수확하고, 6월에 다시 파종하면 8월에 처음으로 이삭을 드리우고 익어갑니다.

1. 밥은 쌀을 사용하고 또 염장(鹽醬)을 사용하여 국을 만들며, 채소를 섞는데 혹은 고기를 쓰기도 합니다.

1. 술은 청주와 탁주가 있는데, 납병에다 담고 은술잔[銀鍾]으로써 잔질하며 맛은 우리 나라와 같았습니다. 또 남만국(南蠻國)외 술이 있었는데 빛은 누렇고 맛은 소주(燒酒)와 같으며, 매우 독하여 두어 종지를 마시면 크게 취하게 됩니다.

1. 사찰은 판자로써 덮개를 하고, 안에는 옻칠을 했으며, 불상(佛像)이 있는데, 모두 다 황금(黃金)이었고, 거승(居僧)은 머리를 깎았으며, 치의(緇衣)379) 도 입고 백의(白衣)도 입었으며 그 가사(袈裟)는 우리 나라와 같았습니다.

1. 밥은 옻칠한 목기에 담고, 국은 작은 자기(磁器)에 담으며, 또 자접(磁楪)380) 이 있고, 젓가락은 있으나 숟가락은 없는데 젓가락은 나무였습니다.

1. 국중(國中)에 시장이 있는데, 채단(綵段)·증백(繒帛)·저포(苧布)·생저(生苧)·빗[梳]·전도(剪刀)·바늘·채소·어육(魚肉)·소금·젓갈이 있었고, 남만국(南蠻國)의 아롱진 비단·아롱진 면포(綿布)·단향(檀香)·흰 날에 검은 씨의 면포[白經黑緯綿布]·등당(藤唐)의 푸르고 검고 흰 면포·자기(磁器) 등의 물건이 있었습니다.

1. 중국 사람이 장사[商販]로 왔다가 계속해서 사는 자가 있었는데, 그 집은 모두 다 기와로 덮었고 규모도 크고 화려하며 안에는 단확(丹艧)381) 을 칠하였고 당중(堂中)에는 모두 다 의자[交倚]를 설치하였으며, 그 사람들은 모두 감투(甘套)를 쓰고 옷은 유구국과 같았으며, 우리들에게 갓이 없는 것을 보고서는 감투를 주었습니다.

1. 나라 사람은 모두 맨발이고 신발을 착용하지 아니하였습니다.

1. 통사는 반드시 일본인(日本人)으로서 그 나라에 있는 자로 하여금 하게 하였습니다.

1. 강남인(江南人)남만국(南蠻國) 사람도 모두 와서 장사를 하여 왕래(往來)가 끊이지 아니하는데, 우리들도 다 보았습니다. 남만인은 상투를 틀어올렸는데, 그 빛이 매우 검어서 보통 사람보다 특이하였고, 그 의복은 유구국과 같았으나 다만 비단으로 머리를 싸지 아니하였습니다.

1. 활·화살·도끼·갈고리[鉅]·도검(刀劍)·무자(䥈子)·낫·삽·갑옷과 투구[甲胄]가 있었는데, 갑옷은 혹 철(鐵)을 쓰기도 하고 가죽을 쓰기도 하였습니다.

1. 군사(軍士)는 철로써 정강이를 싸고, 혹은 가죽에 옻칠을 입힌 것을 사용했는데, 행전(行纏)과 같았습니다.

1. 그 지대는 따스하기가 윤이도와 같았습니다.

1. 소나무·종려나무·대나무가 있고, 그 나머지는 잡목(雜木)인데 이름을 알지 못했습니다.

1. 집에 쥐가 있고, 말·소·염소·고양이·돼지·개·닭·집비둘기·거위·오리를 기르며, 말과 소를 잡아 먹기도 하고 혹은 저자에 팔기도 하며, 또한 닭을 먹었습니다. 날짐승으로는 까마귀·까치·황작(黃雀)·매·제비·갈매기·바다 가마우지·올빼미가 있었습니다.

1. 과실로는 매화·복숭아·유자·청귤(靑橘)이 있었습니다.

1. 채소로는 토란·가지·참외·동과(冬瓜)·무우·파·마늘·아욱·박·파초(芭蕉)가 있었습니다.

1. 곤충으로는 모기·파리·두꺼비·개구리·거북·뱀·달팽이·벌·나비·사마귀·잠자리·등에[蝱]·연가시새끼[蜱]·지네·거미·매미·빈대[臭蟲]·지렁이·개똥벌레가 있었고, 또한 메뚜기와 비슷하며 큰 것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잘 먹었으므로 혹 저자에 팔기도 하였고, 또 박쥐가 있었습니다.

우리들은 무릇 석 달을 머물다가 통사에게 말하여 본국(本國)으로 돌아가게 해주기를 청하였습니다. 통사가 국왕에게 전달하자, 국왕이 대답하기를, ‘일본 사람은 성질이 나빠서 〈너희들이〉 보전할 수가 없으므로, 너희들을 강남(江南)으로 보내고자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들은 이보다 앞서 통사에게 물어서 일본은 가깝고 강남은 멀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일본국(日本國)으로 갈 것을 청하였습니다. 마침 일본의 패가대(覇家臺) 사람 신이사랑(新伊四郞) 등이 장사하러 와서 국왕에게 청하기를, ‘우리 나라는 조선(朝鮮)과 통호(通好)하고 있으니, 이 사람들을 데리고 가서 보호하여 돌려보내기를 바랍니다.’ 하니, 국왕이 이를 허락하고, 또 이르기를, ‘도중에 잘 무휼(撫恤)하여 돌려보내도록 하라.’ 하였습니다. 이어 우리들에게 돈 1만 5천 문(文), 호초(胡椒) 1백 50근, 청염포(靑染布)·당면포(唐緜布) 각 3필을 주고, 또 석달의 양미(糧米) 5백 근, 염장(鹽醬)·어해(魚醢)382) ·왕골 자리[莞席]·칠목기(漆木器)·밥상[食案] 등의 물건을 주었습니다.

8월 1일에 신이사랑 등 1백여 인이 우리들을 데리고 한 척의 큰 배를 같이 타고서 4주야(晝夜)를 가다가 일본의 살마주(薩摩州)에 이르렀으나, 기슭을 오르는 데에 파도가 매우 사나워서 겨우 바다를 건넜는데, 형세가 제주(濟州)와 같았습니다. 김비의(金非衣)포라이도(捕剌伊島)에서부터 두통이 생겨서 낫지 않고 유구국에 이르러서는 더욱 심했는데, 국왕이 이를 알고 남만국의 약주(藥酒)를 주었습니다. 신이사랑 등도 이를 보고 또 쑥으로 뜸을 뜨는 등 곡진히 치료해 주었으며, 배 가운데에 있어서는 대변이나 소변 때에도 사랑이 매양 그 종자(從者)로 하여금 붙들어 주게 하였는데, 이는 뱃머리에서 추락할까 걱정해서였습니다. 그리하여 살마주에 도착하여서는 병이 즉시 나았습니다.

신이사랑 등은 우리들을 옛 주인집에 의탁하여 머물러 살게 하고, 술과 밥을 보냈습니다. 그 다음날부터 사랑 등은 류구국(琉球國)에서 준 양식과 반찬으로 우리에게 하루 세 끼를 대접해 주었습니다. 주(州)의 태수는 두 번 우리들과 신이사랑 그 집에 초대하여 술과 밥, 떡과 안주를 대접하였는데, 모두 마다 물고기였습니다. 그 집은 판옥(板屋)으로 매우 장엄하고 화려하였으며 항상 집에 있으면서 공사(公事)를 보았고, 재산은 넉넉하고 많으며 준마(駿馬) 수필이 있었고, 활과 화살을 가지고 긴 칼을 메고 있는 자 20여 인이 항상 문 아래에 있었습니다. 한 달을 머물다가 9월에 이르러 남풍이 불기를 기다려서 신이사랑 등이 별선(別船)을 사가지고 우리들을 데리고서 같이 타고 연안(沿岸)으로 해서 무릇 3주야 만에 타가서포(打家西浦)에 이르러 기슭에 올랐습니다. 신이사랑 등은 말을 타고서 우리를 데리고 육로(陸路)로 왔습니다. 김비의가 병들었다가 일어나기는 하였으나 기력이 충분하지 못하였으므로, 또한 말을 구하여 타게 하고 남은 두 사람은 도보(徒步)로 2일을 갔는데, 산골짜기가 매우 험했습니다. 패가대(覇家臺)에 이르니, 부관인(副官人) 좌미시(左未時) 등이 비용[盤纏]을 마련해서 해로(海路)를 경유하여 이미 먼저 도착해 있었습니다. 인가(人家)가 조밀(稠密)한 것이 우리 나라의 도성(都城)과 같았고, 그 가운데 저자가 있는 것도 우리 나라와 같았습니다. 신이사랑 등은 우리들을 데리고 그 집에 머물게 하였는데, 대접하는 술·밥·안주·반찬이 매우 풍부하였으며, 상관(上官)·부관(副官) 두 사람이 차례로 하루 세 끼씩 대접해 주었습니다. 대내전(大內殿)에서 보낸 바 주장(主將)이 우리들과 신이사랑을 맞아서 술과 안주를 대접하였는데, 사는 바의 기와집은 매우 웅장하고 화려했으며, 뜰 아래에 시립(侍立)해 있는 자 30여 인은 모두 다 칼을 찼고, 문밖의 군사도 집을 지키는 자가 그 수를 알 수 없었습니다. 우리들이 주장을 보고난 뒤 그는 소이전(小二殿)을 공격하기 위하여 군대를 거느리고 나갔는데, 창·칼, 작은 깃발을 가진 자가 3, 4만명이었습니다. 무릇 4일 만에 싸움에 이기고 돌아왔는데 6급(級)을 베어서 장대 끝에 효수(梟首)하고, 혹 어떤 사람은 그 이빨을 살펴서 그 사람의 귀천(貴賤)을 징험하였는데, 이는 대개 관작(官爵)이 있는 자는 이빨을 물들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신이사랑 등은 병란(兵亂)이 아직 그치지 않았으므로, 도망하여 숨었던 자가 몰래 해도(海島)에 있다가 나와서 노략질을 할까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여섯 달을 머물다가 병란이 평정(平定)되기를 기다려, 금년 2월에 이르러 우리들을 데리고 배에 올라 15리쯤 가서 작은 섬에 이르니, 이름을 식가(軾駕)라고 하였습니다. 거기에 머물면서 밤을 지내고 다음날 아침 일찍이 바다로 출범하여 초저녁 어두울 무렵에 일기도(一岐島)에 이르러 기슭에 오르니, 인가가 매우 많았습니다. 신이사랑 등은 우리들을 데리고 가서 주인집에 투숙시키고 가지고 온 양식과 반찬으로 우리들을 대접하였습니다. 사흘을 머물고 또 바다로 출범하여 하루 낮을 가서 저물녘에 대마도(對馬島)의 초나포(草那浦)에 이르러 기슭에 올랐습니다. 신이사랑 등은 우리들을 데리고 그 옛 주인집에 투숙시켰는데, 그 주인은 곧 신이사랑의 숙부(叔父)였으며, 가지고 온 양식과 반찬으로 대접해 주었고, 주인도 술을 대접하였습니다. 그 땅은 메마르고 밭이 없으며 백성은 모두 다 먹고 살기가 어려워 지나온 바의 여러 섬과는 같지 않았습니다.

도주(島主)가 떠나기 어렵다고 만류하기도 하였고 바람도 순조롭지 못하였기 때문에, 두 달을 머물러 있다가 4월 어느 날에 동풍을 만나 연안을 따라 가서 사포(沙浦)에 이르러 투숙(投宿)하였습니다. 여기서 이틀을 머물고 바람이 순조로우므로 또 기슭을 따라 가서 도이사지포(都伊沙只浦)에 정박하였으며, 사흘을 머물다가 동풍을 만나 아침 일찍이 바다로 출범하여 하루 낮을 가서 저물녘에야 염포(鹽浦)에 이르러 머물었습니다. 울산 군수(蔚山郡守)는 우리들이 감투를 쓰고 있는 것을 보고 각각 갓[笠子]과 베 1필씩을 주었으므로, 우리들은 옷을 만들어 입고 올라왔습니다. 이상 윤이도(閏伊島) 이하 여러 물산(物産)을 우리들이 본 것은 이 정도 입니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6책 105권 13장 A면【국편영인본】 10책 25면
  • 【분류】
    외교-왜(倭) / 외교-유구(琉球)

  • [註 372]
    정유년 : 1477 성종 8년.
  • [註 373]
    보구(步臼) : 디딜방아.
  • [註 374]
    부극(斧戟) : 도끼와 창.
  • [註 375]
    성서(筬抒) : 바디, 베틀에 달린 날을 고르는 제구.
  • [註 376]
    승수(升數) : 새수.
  • [註 377]
    추세(麤細) : 굵고 가늚.
  • [註 378]
    당개(幢蓋) : 기(旗).
  • [註 379]
    치의(緇衣) : 중이 입는 검은 물을 들인 옷.
  • [註 380]
    자접(磁楪) : 자기로 된 대접.
  • [註 381]
    단확(丹艧) : 단청.
  • [註 382]
    어해(魚醢) : 생선 젓갈.

○乙未/濟州漂流人金非衣姜茂李正等三人, 還自琉球國, 言所歷諸島風俗, 甚奇異。 上令弘文館, 書其言以啓。 其言曰: "俺等, 丁酉二月初一日, 與玄世修金得山李淸敏梁成突曺貴奉, 陪受進上柑子, 同騎一船, 開洋向楸子島, 忽値東風大起, 西向漂流。 自初發至第六日, 海水澄碧, 自第七日至八日, 行一晝夜, 渾濁如泔, 第九日, 又遭西風, 向南漂流, 海水澄碧。 第十四日, 望一小島, 未及泊岸, 柁折船毁, 餘人皆溺死, 裝載盤纏, 亦皆渰失, 俺等三人, 騎坐一板。 漂蕩間, 適有漁舟二隻, 各有四人騎坐, 見我輩, 收載而去, 到島岸。 島名閏伊是麿。 【其俗, 謂島爲是麿。】 人家, 環島而居, 周回可二日程, 島人男女百餘名, 刈草結廬於海濱, 將俺等住止。 俺等自發濟州, 大風激浪過顙, 水滿舟中, 舷不浸者數板。 金非衣李正, 操瓠挹水去之, 姜茂執櫓, 餘皆眩暈而臥, 不能炊爨, 勺飮不入口者, 凡十四日, 至是島人, 將稻米粥及蒜本來饋。 自其夕, 始饋稻米飯及濁酒、乾海魚, 魚名皆不知。 留七日, 移置人家, 輪次饋餉, 一里饋訖, 輒遞送次里。 一月後, 分置俺等於三里, 亦輪次饋餉, 凡饋酒食, 一日三時, 一島人容貌, 與我國同一。 其俗穿耳, 貫以靑小珠, 垂二三寸許, 又貫珠繞項三四匝, 垂一尺許, 男女同, 老者否。 一, 男女, 皆徒跣無鞋。 一, 男子絞髮, 屈而疊之, 束以苧繩, 作䯻於項邊, 不着網巾。 鬚長過臍, 或絞而繞䯻數匝。 婦人髮亦長, 立則及跟。 短者及膝, 不作䯻, 環統頭上, 橫揷木梳於鬢。一, 無釜、鼎、匙、筯、盤、盂、磁、瓦器, 塼土作鼎, 曝日乾之, 熏以藁火炊飯, 五六日輒破裂。一, 專用稻米, 雖有粟, 不喜種。 一, 飯盛以竹笥, 摶而爲丸, 如拳大, 無食案, 用小木几, 各置人前。 每食時, 一婦人主笥分之, 人一丸, 先置本葉於掌中, 以飯塊, 加葉上而食之, 其木葉如蓮葉焉。 一丸盡, 又分一丸, 以三丸爲度, 能食者不計丸數, 隨盡隨給。 一, 無鹽醬, 以海水, 和菜作羹, 器用瓠子, 或刳木爲之。 一, 酒有濁而無淸, (債)〔漬〕 米於水, 使女嚼而爲糜, 釀之於木桶, 不用麴糱。 多飮然後微醉, 酌用瓢子, 凡飮時, 人持一瓢, 或飮或止, 隨量而飮, 無酬酢之禮, 能飮者, 又添爵焉。 其酒甚淡, 釀後三四日便熟, 久則酸不用, 芻一肴, 用乾魚, 或聶切鮮魚爲膾, 加蒜菜焉。 一, 或漬米擣於步臼, 塼而爲餠, 如椶大, 裹椶葉以藁束之, 烹食之。 一, 其居, 率作一室, 無房奧戶牖, 前面稍軒擧, 後面簷垂地, 蓋用茅, 無瓦, 外無藩籬, 寢用木床, 無衾褥, 藉用蒲席, 所居室前, 別立樓庫, 以貯所收敗之禾。 一, 俗無冠帶, 暑則或用椶葉, 作笠狀, 如我國僧笠。 一, 無麻、木綿, 亦不養蠶, 唯織苧爲布, 作衣如直領, 而無領及襞積, 袖短而闊, 染用藍靑。 中裙用白布三幅, 統繫於臀, 婦人之服, 亦同。 但內着裳, 而無中裙, 裳亦染靑。 一, 家有鼠, 畜牛雞猫, 不食牛雞肉, 死則輒埋之。 俺等云: ‘牛雞肉可食, 不可埋。’ 島人唾而哂之。 一, 山多材木, 無雜獸。 一, 飛禽惟鳩與黃雀而已。 一, 昆蟲, 有龜、蛇、蟾、蛙、蚊、蠅、蝙、蝠、蜂、蝶、螳蜋、蜻蜓、蜈蚣、蚯蚓、螢、蟹。 一, 有鐵冶, 而不造耒耟, 用小鍤剔田去草以種粟。 水田則十二月間, 用牛踏播種, 正月間移秧, 不鋤草, 二月稻方茂, 高一尺許, 四月大熟早稻, 四月畢刈, 晩稻五月方畢刈。 刈後根荄復秀, 其盛愈於初, 七八月收穫。 未穫前, 人皆謹愼, 雖言語亦不厲聲, 不蹙口爲嘯, 或有捲草葉吹之以杖擬之, 而禁, 收穫後乃吹小管, 其聲甚微細。 一所穫稻, 連稭束之, 置於樓庫, 以竹枚鑷之, 舂以步臼。 一, 刈草及禾用鎌, 斫用斧䥈子, 又有小刀, 無弓矢斧戟, 人持小鎗, 於起居不舍。 一, 人死則坐置棺中, 置於厓厂下, 不埋之以土, 若厓厂廣, 則幷置五六棺。 一, 其土溫燠, 冬無霜雪, 草木不彫, 又無氷。 島人着單衣二, 夏則只着一, 男女同。 一, 蔬有蒜、茄子、眞瓜、蹲鴟、生薑, 茄子莖高三四尺, 一種則傳子孫, 結實如初, 太老則中斫之, 又生芽蘖結實。 一, 本有烏梅、桑、竹。 一, 果有靑橘、小栗, 橘四時開花。 一, 無燈燭, 夜則束竹爲烜以照之。 一, 家無溷廁, 遺矢於野。 一, 織布用筬抒, 模樣與我國同, 其他機械不同, 升數麤細, 亦與我國同。 一, 掘地作小井, 汲水用瓢罌。 一, 舟有柁棹無櫓, 但順風懸帆而已。 一, 其俗無盜賊, 道不拾遺, 不相詈罵喧鬪, 撫愛孩兒, 雖啼哭, 不加手焉。 一, 俗無酋長, 不解文字, 俺等與彼言語不通。 然久處其地, 粗解所言。 俺等思念鄕土, 常常涕泣, 其島人, 拔新稻莖, 比舊稻而示之, 東向而吹之, 其意, 蓋謂新稻如舊稻, 而熟當發還也。 凡留六朔, 至七月晦, 候南風, 島人十三名, 將俺等齎糧及酒醪, 同騎一船, 行一晝夜半, 至一島。 島名所乃是麿, 護送者, 留八九日, 還本島。 去所乃是麿狹而長, 周回可四五日程。 其言語、飮食、衣服、居室、土風, 大槪與閏伊島同, 供饋俺等亦同。 一, 婦人穿鼻兩旁, 貫小黑木, 狀如黶焉。 足脛繞繫小靑珠, 其廣數寸許。 一, 用稻與粟, 粟居稻三分之一。 所收禾, 積於近居閑地, 高俱二丈許。 同里人, 聚積于一處, 多者或至四五十餘所。 一, 家有鼠, 畜午、雞、猫、狗, 屠牛食之, 不食雞肉。 一, 山有豕, 島人持搶牽狗捕之, 熏其毛, 刲而烹之, 獵者獨食, 雖至親不與, 與人則難獲云。 一, 果有柚子、小栗、橡栗。 一, 菜有蹲鴟、冬瓜、薑、蒜、茄子、瓠。 一, 山多材木, 或輸載貿賣於他島。 又有冬栢樹, 高數丈開花。 一, 有薯蕷, 其長尺餘, 如人身大, 兩女子共戴一本, 斧斷之, 烹而食之。 一, 飛禽有烏鳩、鸕鷀、鷗、鷺、黃雀。 一, 昆蟲有蚊、蠅、蟾、蛙、虵蝸, 其俗烹蝸而食之, 有巨虵長五六尺, 其大如椽, 有抱兒女見蟒, 以兒足加蟒背, 而拊之蟒尾, 大不能掉。 餘同閏伊島。 俺等凡留五朔, 至十二月晦, 候南風, 島人五名, 將俺等, 同騎一小船, 行一晝至一島。 名捕月老麻伊是麿。 其地平衍無山, 皆沙石之地, 周回比所乃島稍小。 其言語、飮食、衣服、居室、土風, 大槪與閏伊島同, 供饋俺等, 亦同。 一, 有黍、栗、牟、麥, 無水(日)〔田〕 稻米, 貿易於所乃島。 一, 種牟、麥, 當秋月, 用牛糞, 以手掬置於田, 用鍤起土覆之, 二三月方熟。 刈畢後, 治田種之九種粟, 亦於十月間播種, 二三月收穫訖, 後種之, 七八月又(收獲)〔收穫〕 。 一, 飛禽有鳩、黃雀、鷗。 一, 家有鼠, 畜牛、雞、猫, 屠牛而食, 不食雞肉。 一, 菜有茄子、蹲鴟、蒜、瓠。 一, 男女穿耳, 貫小靑珠, 亦串珠掛頂。 一, 無材木, 構家, 皆取於所乃島而爲之, 又無果木。 一, 有蚊、蠅、蝸, 其俗烹蝸而食之, 餘同閏伊島。 俺等, 留一朔, 候南風, 島人五名, 將俺等, 騎一小船, 行一晝, 至一島。 島名, 捕剌伊是麿。 護送人, 翌日還本島。 其地平衍無山, 周回可二日程。 人家僅四十餘, 其言語、衣服、飮食、居室、土風, 大槪與閏伊島同, 供饋俺等, 亦同。 一, 其俗以靑珠, 繞繫臂及脛, 男女同。 一, 飛禽有鳩、黃雀、鷗。 一, 有黍、粟、麰、麥, 無稻, 稻米貿易於所乃島。 一, 家有鼠, 畜牛、雞、猫, 屠牛而食之, 不食雞肉。 一, 菜有茄子、蹲鴟、蒜、瓠。 一, 無材木, 又無果木。 一, 昆蟲有蚊、蠅。 無龜、蛇、蟾、蛙, 餘同閏伊島。 留一朔, 候南風, 島人五名, 將俺等, 同駕小船, 行一晝, 至一島。 島名, 欻尹是麿。 護送人, 翌日還本島。 其地平衍無山, 周回可一日程。 其言語、飮食、衣服, 亦與閏伊島同。 一, 有黍、粟、麰、麥, 無稻, 稻米貿易於所乃島。 一, 飛禽有鳩黃、雀、鷗。 一, 家有鼠, 畜牛、雞、猫, 屠牛而食之, 不食雞肉。 一, 菜有蒜、蹲鴟。 一, 無果木、材木。 一, 昆蟲有蚊、蠅、蝸, 其俗烹蝸而食之, 餘同閏伊島。 留一朔, 候南風, 島人八名, 將俺等, 同騎一船, 行一晝夜半, 至一島。 島名, 他羅馬是麿。 平衍無山, 周回可一日程, 人居五十餘戶。 其言語、飮食、居室、土風, 大槪與閏伊島同。 一, 有黍、粟、麰、麥, 無稻。 一, 無材木, 或取於所乃島, 或取於伊羅夫島, 又無果木。 一, 其俗用苧布, 染藍擣而爲衣。 其色如彩段。 一, 飛禽有鳩、黃雀、鷗。 一, 昆蟲、家畜, 與前島同。一, 菜有蒜、蹲鴟。 留一朔, 候南風, 島人五名, 將俺等, 同騎小船, 行一晝, 至一島。 島名, 伊羅夫是麿。 護送人, 翌日還本島。 周回可二日程。 其言語、飮食、居室、土風, 大槪與閏伊島同, 其衣服, 與他羅馬島同, (洪)〔供〕 饋亦同。 一, 婦人, 掛水精大珠於頂。 一, 有黍粟麰麥, 亦有稻。 稻居麰麥十分之一。 一, 少有山谷, 有椶、桑、竹, 亦有材木。 一, 家有鼠, 畜牛、雞、猫, 屠牛而食之, 不食雞肉。 釀酒用米麴。 一, 飛禽有鷗、鷺、黃雀、鳩。 一, 昆蟲有蚊、蠅、蝸, 烹蝸而食之, 無蛇, 餘同閏伊島。 一, 菜有蒜、蹲鴟、薑。 留一朔, 候南風, 島人五名, 將俺等, 同騎小船, 行一晝, 至一島。 島名覔高是麿。 護送人, 翌日還本島。 其地平衍無山, 周回五六日程。 其言語、飮食、居室、土風, 大槪與閏伊島同, 衣服與他羅馬島同, 供饋俺等亦同。 釀酒與伊羅夫島同, 有稻、黍、粟、牟、麥。 一, 炊飯用鐵鼎, 無足似釜, 乃貿易於琉球國者也。 一, 婦人掛珠於項, 亦與伊羅夫島同。 一, 家有溷廁。 一, 家有鼠, 畜牛、雞、猫、狗, 屠牛食之, 不食雞肉。 一, 飛禽有(鳥)〔烏〕 、鳩、黃雀、鷗鷺。 一, 昆蟲有龜、蛇、蟾、蛙、蚊、蠅、蝸, 烹蝸食之, 餘同閏伊島。 一, 菜有蒜、西瓜、茄子、蹲鴟。 一, 有椶、桑、竹, 山多雜木, 其名皆不知。 留一朔候南風, 島人十五名, 將俺等, 同騎一船, 行二晝夜半, 至(流球國)〔琉球國〕 , 海勢洶湧, 波濤險惡, 島人亦皆病暉。 國王褒賞護送人, 人各賜靑紅綿布, 厚饋酒食, 醉倒終日。 其人等, 以所賜綿布, 造衣穿着, 留一月, 還本島。 國人及通事, 來問俺等: ‘爾是何國人?’ 俺等答曰: ‘朝鮮人。’ 又問曰: ‘爾釣魚漂流至此乎?’ 俺等共議答曰: ‘俱係朝鮮國海南人, 輸運進上米, 向京都, 遭風至此。’ 通事將俺等言, 開寫而去, 達于國王, 俄而遣數官人, 迎致俺等, 處於一館。 距海未五里, 以板蓋屋, 有門戶窓壁, 外有石墻, 高二丈, 墻有門, 夜則加扃鐍。 又有官舍在傍, 有守令二人, 監考二人, 別有一庫, 藏貯財物、錢布、魚醢。 凡出納, 守令監之, 通事云: ‘此猶汝國郡邑之有官廳也。’ 供饋俺等, 日三時, 亦有酒。 一, 家受五日糧米酒醪魚醢於官廳, 供饋訖, 次家, 又受而輪次供饋。 率五六日, 守令, 一見俺等, 饋酒肴, 又敎館人, 常時饋餉豐厚。 俺等適見國王之母, 出遊, 乘漆輦, 四面垂簾, 舁者幾二十人, 皆着白苧衣, 以帛裹首。 軍士持長劎, 佩弓矢, 擁衛前後, 幾百餘人, 吹雙角、雙太平嘯, 放火砲。 美婦四五人, 着綵段衣, 表着白苧布長衣。 俺等, 出道傍拜謁, 駐輦以二鑞甁, 盛酒, 酌以髹木器俺等, 其味與我國同。 有小郞, 稍後別行, 年可十餘歲, 貌甚美, 髮垂後不辮, 着紅綃衣束帶, 乘肥馬。 執鞚者皆着白衣, 騎馬前導者四五人, 扶擁左右者, 亦甚衆。 衛士持長劎者, 二十餘人, 持傘者, 竝馬而行, 以障日。 俺等, 亦拜謁見, 小郞下馬, 以鑞甁盛酒饋之, 飮訖, 小郞上馬去。 國人云: ‘國王薨, 嗣君年幼, 故母后臨朝, 小郞年長, 則當爲國王。’ 一, 七月十五日, 諸寺刹造幢蓋, 或用彩段, 或用彩繒, 其上作人形及鳥獸之形, 送于王宮。 居民選男子少壯者, 或着黃金假面, 吹笛打鼓, 詣王宮, 笛如我國小 管, 皷樣亦與我國同。 其夜, 大設雜戲, 國王臨觀, 故男女往觀者, 塡街溢巷, 駄載財物, 詣宮者亦多。 一, 自海岸距王宮, 十餘里, 俺等遙望, 一殿甚高, 問之, 乃國王所居也。 人家或蓋瓦, 然板屋甚多。 一, 男女推䯻於頂邊, 以帛裹之, 庶人皆白苧衣。 婦人推䯻於䐉後, 皆着白苧布衫, 白苧布裳, 或着白苧布長衣, 其貴者亦服綵段, 有襦襖兒、襦裳。 其守令, 用班染繒裹䯻, 着白細苧布, 衣帶紅染帛, 出則騎馬, 從者數人。 一, 水田陸田, 相半, 而陸田稍多。 水田則冬月播種, 五月稻皆熟收穫訖, 又以牛踏之, 更播種, 七月移秧, 秋冬間又收穫。 陸田則用小鍤治之, 種粟, 亦於冬月始播, 五月收穫, 六月更播種, 八月始垂穎向熟。 一, 飯用稻米, 又用鹽醬作羹, 和以菜, 或用肉。 一, 酒有淸濁, 盛以鑞甁, 酌以銀鍾, 味如我國。 又有南蠻國, 酒色黃, 味如燒酒, 甚猛洌, 飮數鍾則大醉。 一, 有寺刹, 以板爲蓋。 內施漆, 有佛像, 皆黃金, 居僧髡首, 或緇衣、或白衣, 其架裟, 與我國同。 一, 飯盛漆木器, 羹盛小磁器, 又有磁楪, 有筯而無匙, 筯則木也。 一, 國中有市, 綵段、繒帛、苧布、生苧、梳、剪刀、針、菜蔬、魚肉、鹽、醢, 南蠻國班繒、班緜布、檀香、白經黑緯緜布、藤唐靑黑白綿布、磁器等物。 一, 唐人商販來有因居者, 其家, 皆蓋瓦, 制度宏麗, 內施舟艧, 堂中皆設交倚, 其人皆着甘套, 衣則如琉球國, 見俺等無笠, 贈甘套。 一, 國人皆徒跣, 不着鞋。 一, 其通事, 必使日本人在國者爲之。 一, 江南人南蠻國人, 皆來商販, 往來不絶, 俺等皆目覩。 南蠻人推䯻, 其色深黑, 殊異常人, 其衣服與琉球國同, 但不裹帛於首。 一, 有弓、矢、斧、鉅、刀劎、䥈子、鎌、鍤、甲冑, 甲或用鐵, 或用皮。 一, 軍士以鐵裹脛, 或用皮着漆, 如行纏焉。 一, 其土溫燠, 與閏伊島同。 一, 有松、椶、竹, 其餘雜木, 不知名。 一, 家有鼠, 畜馬、牛、羔、猫、猪、狗、雞、鴿鵝、鴨, 屠馬、牛食之, 或賣於市, 亦食雞。 飛禽有烏、鵲、黃雀、鷹、燕、鷗、鸕、鷀、鴟。 一, 菓有梅、桃、柚子、靑橘。 一, 菜有蹲鴟、茄子、眞瓜、冬瓜、韮、葱、蒜、葵、瓠、芭蕉。 一, 昆蟲有蚊、蠅、蟾、蛙、龜、蛇、蝸、蜂、蝶、螳蜋、蜻蜒、蝱、蜱、蜈、蚣、蜘蛛、蟬、臭蟲、蚯蚓、螢, 亦有似螽而大者, 人好食之, 或賣於市, 又有蝙蝠。 俺等凡留三朔, 語通事請還本國。 通事達國王, 國王答曰: ‘日本人性惡, 不可保, 欲遣爾江南。’ 俺等前此問於通事, 知日本近, 江南遠, 故請往日本國。 適有日本 覇家臺新伊四郞等, 以商販來到, 請于國王曰: ‘我國與朝鮮通好, 願率此人, 保護還歸。’ 國王許之, 且曰: ‘在途備加撫恤, 領回。’ 仍賜俺等錢一萬五千文、胡椒一百五十斤、靑染布唐緜布各三匹, 又賜三朔糧米五百六十斤、鹽醬、魚醢、莞席、漆木器、食案等物件。 八月初一日, 新伊四郞等百餘人, 將俺等, 同駕一大船, 行四晝夜, 至日本 薩摩州。 登岸波濤甚惡, 僅得而濟海, 勢與濟州同。 金非衣, 自捕剌伊島, 患頭痛沈綿未瘳, 至琉球國轉劇, 國王知之, 賜南蠻國藥酒。 新伊四郞等見之, 又以艾灸之, 曲加救療, 在舟中大小便時, 四郞每使其從者扶執, 恐其墜落船頭也。 及到薩摩州, 病乃愈。 新伊四郞等, 將俺等, 投舊主人家住接, 饋酒飯。 自翌日, 四郞等, 以琉球國所贈糧饌, 供饋俺等日三時, 州太守, 再邀俺等及新伊四郞於其家, 饋酒飯及餠肴, 皆海魚。 其家板屋甚壯麗, 常在家行公事, 財産豐富, 有駿馬數匹, 持弓矢荷長釰者二十餘人, 常在門下。 留一朔, 至九月, 候南風, 新伊四郞等, 買別船, 將俺等, 同騎沿岸而行, 凡三晝夜, 至打家西浦, 登岸。 四郞騎馬, 率俺等, 由陸路金非衣病起, 氣力未充, 亦覓馬使騎, 餘二人徒步, 行二日, 山谷甚險。 至覇家臺, 副官人左未時等, 押盤纏, 由海路已先到矣。 人家稠密, 如我國都城, 中有市, 亦如我國。 四郞等, 率俺等, 投其家, 饋酒飯殽饌甚豐, 上官、副官二人, 輪次供饋日三時。 大內殿所送主將, 再邀俺等及四郞, 饋酒殽, 所居瓦屋甚壯麗, 庭下侍立者三十餘人, 皆佩刀, 門外軍士屯廬者, 不知其數。 俺等, 見主將, 往攻小二殿, 擁兵而出, 軍士持搶、釰、小旗者, 三四萬人。 凡四日, 戰勝而還, 斬六級, 梟首於竿, 或有人柱其齒, 以驗其人之貴賤, 蓋有爵者, 染齒故也。 新伊四郞等, 以兵亂未息, 恐有逃竄者, 潛居海島, 出而剽掠。 以故, 留六朔, 待兵亂平定, 至今年二月, 將俺等, 登舟行十五里許, 至小島, 名軾駕。 留泊經夜, 翌日早朝, 開洋, 初昏至一岐島登岸, 人家甚衆。 四郞等, 將俺等投宿主人家, 用所齎糧饌, 供饋俺等。 留三日, 又開洋, 行一晝及暮, 至對馬島 草那浦登岸。 四郞等, 將俺等投其舊主人家, 其主乃四郞叔父, 用所齎糧饌供饋, 主人亦饋酒。 其地磽瘠無田, 民皆艱食, 非如所經諸島。 以島主留難行狀, 風亦不便, 故留連二朔, 至四月不記日, 候東風, 沿岸而行, 至沙浦投泊。 留二日風順, 又沿岸而行, 泊都伊沙只浦, 留三日, 候東風, 早朝開洋, 行一晝及暮, 到泊鹽浦蔚山郡守, 見俺等, 着甘套, 各給笠子、布一匹, 俺等製衣穿着, 上來。 右閏伊島以下, 凡物産, 俺等所見, 止此。"


  • 【태백산사고본】 16책 105권 13장 A면【국편영인본】 10책 25면
  • 【분류】
    외교-왜(倭) / 외교-유구(琉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