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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민족문화대백과

미국

[ 美國 ]

이칭별칭 이칭 미합중국(美合衆國), 이칭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유형 지명/국가
시대 현대

정의

북아메리카대륙의 캐나다와 멕시코 사이에 있는 48주와 알래스카 및 하와이의 2주로 구성된 연방공화국.

개설

정식 명칭은 아메리카합중국(United States of America)이며, 약칭은 U.S.A.이다. 50주와 1수도구(컬럼비아구: Washington,D.C.)로 이루어진 본토 외에 해외속령(海外屬領)으로 푸에르토리코·사모아제도·웨이크섬·괌섬과 국제연합의 신탁통치령인 마샬제도·메리아나제도·캐롤라인제도 등을 보유한다.

면적은 982만 6675㎢이며, 인구는 3억 2136만 8864명(2015년 현재)이다. 세계 각국의 이민들과, 노예로 이입된 아프리카 흑인 및 원래의 토착 인디언들로 이루어진 복합민족국가이기 때문에 다양한 인종분포를 나타낸다.

그러나 백인종이 77.4%로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고 있고, 흑인종은 13.2%, 아시아계 5.4%, 원주민은 1.4%, 기타가 2.6%이다.

종교는 개신교(46.5%), 가톨릭(20.8%), 유대교(2%) 순으로 주종을 이루며 무수히 많은 종교들이 소수교단을 형성하고 있다. 언어는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하고 있으며, 기후는 대부분 온대 또는 냉대에 속하지만, 지역에 따라 열대사바나기후·몬순기후·서안해양성기후·냉대습윤기후·지중해성기후·스텝기후·사막기후·고산기후의 8개 기후구로 나누어진다.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경제부국으로, 국민총생산·지하자원 등의 면에서 타국의 추종을 불허하며, 자본주의경제의 지도적 위치를 차지하여 세계경제의 주도권을 행사하고 있다.

그러나 1950년대 후반부터 서독 등 유럽 여러 나라와 일본의 경제부흥이 진전됨에 따라 제2차세계대전 이전과 같은 미국경제의 압도적 지배력은 약화되고, 1958년 이후 국제수지가 적자를 기록하기도 하였다.

1973년 1월 유럽과 일본의 외환시장에서 달러화의 투매가 일어나 마침내 달러화의 평가절하가 이루어져 전후 세계통화의 기준으로 되어 있던 달러화의 신화는 무너지고 말았다. 이처럼 국제경제사회에서의 상대적 지위가 저하되었다고는 하나 미국이 여전히 세계 최대의 자본주의국가임에는 변함이 없다.

1997년 국민총생산액은 7조 1880억만 달러로 2위 이하의 자본주의 주요 선진국(서독·일본·프랑스·영국·이탈리아·캐나다)의 합계보다도 많았다.

1인당 국민소득에 있어서도 1979년에는 1만 630달러로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의 하나였으며, 1997년 1인당 국민소득이 2만 7607달러로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였다.

2014년 현재 국민총생산은 17조 4190억 달러, 1인당 국민소득은 5만 4629달러이다.

산업별 취업인구비율은 농림·수산업 4.3%, 광업 0.7%, 제조업 25.1%, 건설업 6.5%, 운수·통신업 6.6%, 도·소매업 25.3%, 공공서비스업 31.5%로, 농림·수산업 인구의 비율이 낮고 공공서비스업의 인구가 많아 그만큼 도시적 산업에 집중도가 높다고 할 수 있다.

형성 및 변천

1492년 콜럼버스(Columbus,C.)의 신대륙 발견 이래, 아메리카대륙은 유럽 열강들의 식민지 개척경쟁의 대상이었다. 16세기에 들어 퀘벡에 프랑스령 식민지가 건설된 것을 필두로 하여, 현재의 뉴욕에 근거지를 마련한 네덜란드, 그리고 국내의 복잡한 문제를 식민지건설로써 어느 정도 해결해 보려 한 영국 등이 북미대륙을 무대로 각축전을 벌이게 되었다.

1606년 유럽 열강 가운데서 최초로 영국이 버지니아 일대에 이주민 정착지를 건설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미국대륙에서의 식민지건설은 수많은 어려움과 난관을 경험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편, 1620년 종교박해를 피하여 네덜란드에 가 있던 청교도 일파가 신앙의 자유를 찾아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지금의 매사추세츠주에 상륙하여 플리머스식민지를 건설하였다. 이후 1733년까지 영국은 북아메리카의 대서양 연안에 13개의 식민지를 건설하였다.

그렇지만 북아메리카대륙에서는 기존의 원주민이었던 인디언, 영국의 식민지, 그리고 18세기에 건설된 프랑스의 식민지 등 3파의 항전이 계속되었다. 결국, 이 싸움에서 영국이 승리를 거두자, 북미대륙의 지배권은 영국이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본국과 식민지인과의 대립과 알력이 본격화됨을 뜻하는 것이었다.

각종 조세부과를 둘러싸고 “대표 없는 과세 없다.”라는 식민지인들의 주장과, “사실상의 대표”라는 영국 정부의 의견이 날카롭게 대립하였다.

1773년 ‘보스턴 차당사건(The Boston Tea Party事件)’을 계기로 영국 정부가 강력한 응징조치를 취하자, 북미대륙의 영국식민지들 사이에서는 공동의 저항운동이 일어났다. 그리하여 1774년 9월 필라델피아에서 식민지 대표들이 모여 제1차 대륙회의를 개최하였다.

1775년 4월 영국군과 식민지인 사이에 유혈충돌이 벌어졌고 이로써 아메리카혁명의 막이 올랐다. 1776년 1월의 대륙회의에서는 처음으로 독립문제가 공개적으로 논의되었으며, 이에 따라 북미대륙의 13개 영국식민지는 개별적으로 독립정부를 수립하기 시작하였다. 마침내 1776년 7월 4일, 독립선언서가 대륙회의에서 공식적으로 채택되어 영국으로부터의 미국의 독립이 정식으로 선포되었다.

미국의 독립혁명은 영국 본국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한 전쟁이었던 동시에, 식민지 내부에서의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확립을 위한 혁명이기도 하였다. 미국의 독립은 1783년 파리조약에 의하여 승인되었으며, 미국은 1787년 필라델피아에서 헌법회의를 열고 연방헌법을 제정하였다.

이후 미국은 프랑스·스페인·멕시코 등으로부터 영토를 획득하여 1848년경 거의 현재와 같은 대륙국가로 발전하였다. 그러는 가운데 미국은 정치적 민주주의를 나름대로 발전시켰고 개척지의 확장과 더불어 산업혁명과 교통혁명이 진행되었다.

원래 미국의 북부와 남부는 식민지건설 당시부터 그 성격을 달리하고 있었다. 북부는 그 건설단계에서 북유럽 및 서유럽으로부터의 이민을 받아들여 산업자본가들이 많았으나, 남부는 여전히 보수적이며 흑인노예제에 기초한 농업자본가들이 우세하였다.

1861년에 시작된 미국의 남북전쟁은 명분상으로는 주권론(州權論)을 주장하는 남부와, 합중국론(合衆國論)을 주장하는 북부와의 헌법상의 해석문제를 둘러싼 싸움이었다.

1865년 북부의 승리로 남북전쟁이 종결되자, 미국의 민주주의는 더욱 확고한 기반을 확보하여 마침내 1870년 흑인들에게도 투표권이 부여되어 노예제도가 폐지되기에 이르렀다.

남북전쟁이 끝난 다음의 약 25년 동안, 미국사회는 급속도의 경제혁명을 경험하였다. 급격한 산업화와 도시화의 과정에서 대기업과 산업주의의 원리가 국민생활 속에서 자리를 굳혀가고 있었다.

1865년부터 1900년까지의 이른바 산업주의시대가 활짝 꽃피게 된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으니, 첫째 남북전쟁에서 승리한 북부의 기업가와 상인들은 자신들의 경제활동을 순조롭게 추진할 수 있었고, 둘째 풍부한 천연자원과 넓은 국내시장을 가지고 있었던 미국은 열강들의 식민지쟁탈 경쟁에 휘말리지 않고 국내발전을 추진할 수 있었고, 셋째 유럽으로부터 끊임없는 이민의 물결을 흡수하여 노동력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으며, 넷째 기업에 대한 정부의 후원과 법원의 친기업가적 법률제정 등의 덕분이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팽창과 풍요의 이면에는 사회의 안정과 결속을 위태롭게 할 정도의 극심한 빈곤과 부패, 그리고 계급갈등이 내재하여 있었다.

즉, 극심한 빈곤과 소득 불균등, 그리고 경제력의 집중에 의한 독점현상은 미국 국민 전체의 경제적 자유와 정치적 민주주의를 위협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회·경제적 분위기에 대한 문제의식이 팽배해지는 가운데, 사회정의운동과 정치개혁운동을 공통분모로 하는 이른바 혁신주의운동(Progressive Movement)이 일어났다.

한편, 이 기간 동안 유럽의 열강들은 전세계에 걸쳐 영토와 이권을 확대해 가는 제국주의시대를 열고 있었다. 미국도 뒤늦게나마 이와 같은 시대적인 조류를 타기 시작하였다.

1898년 스페인과의 전쟁을 계기로 제국주의의 대열에 본격적으로 끼여든 미국은, 중국에서의 세력분할 경쟁에서 한발 뒤진 것을 만회하기 위하여 ‘문호개방정책(Open Door Policy)’을 선언하고 나섰다.

반면에 미국은 먼로 독트린(Monroe Doctrine) 선언 이후, 라틴아메리카에 대해서는 특수한 이해관계를 내세워 우월성을 주장하였다. 1914년 유럽에서 제1차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미국은 즉각 중립을 선언하였으나, 영국과 독일 등과의 경제적 이해관계로 말미암아 전쟁에 개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국대통령 윌슨(Wilson,T.W.)은 러시아혁명의 발발 등으로 연합국의 전열에 차질이 생기자 결국 1917년 4월 독일과의 전쟁을 선포, 제1차세계대전에 참전하였다. 제1차세계대전이 끝난 뒤 미국의 1920년대는 경제적 번영을 구가하면서 기업적 가치관과 물질주의가 우세해져 사회가 정신적인 획일화의 방향으로 치달았던 이른바 대중사회의 시대였다.

곧이어 미국을 강타한 것은 1929년의 대공황이었다. 그렇지만 1933년 루스벨트(Roosevelt,F.D.)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뉴딜정책(New Deal Policy)을 추진, 미국 자본주의의 위기를 어느 정도 극복하였다.

한편, 1940년대에 들어서자 세계는 유럽과 아시아에서 또 한 차례의 세계대전을 경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국도 수많은 논란 끝에 참전주의자가 선거에서 승리, 전체주의에 대한 반대를 명분으로 제2차세계대전에 개입하였다.

제2차세계대전이 연합국의 승리로 끝나자, 미국은 이제 세계적 차원에서의 자본주의체제 수호의 선봉장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소련과의 체제경쟁이 가속화되어 가는 가운데 이른바 냉전의 논리도 정착화되어 미국은 세계적인 규모로 자본주의의 지원자·옹호자의 구실을 도맡게 되었지만, 유럽과 일본의 부흥에 따라 일등국가의 위치는 약화되어 갔다.

미국은 그 국호가 의미하는 바와 같이 주(州, State)의 집합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권력분립을 기본 이념으로 하고 있다. 권력분립은 구체적으로는 입법·사법·행정의 삼권분립과 연방정부·주정부로 분립된 두 개의 지주 위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건국 이후 19세기 말까지는 국가적 기능의 중요성이 아직 낮았고 주의 힘이 강력하였으나, 20세기에 들어와서 대내적으로는 독점산업자본의 거대화와 대외적으로는 국제적 경쟁이 극심해진 데다가, 더욱이 제2차세계대전 후 세계의 지도국가로서의 비중이 커지는 등 정세의 변화에 따라, 중앙정부의 권력강화를 모색하고 있다.

따라서, 형식상으로는 권력의 분립방식을 채택하고 있으면서 실제로는 행정부, 특히 대통령에의 권력집중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특징이라 하겠다.

미국독립 당시의 유럽은 프랑스혁명 뒤의 혼란기였기 때문에 미국은 분쟁에 휘말려들지 않으려고 중립주의를 취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먼로주의라고 하는 비개입고립주의로 미국외교의 기본자세였다.

그러나 19세기 말 국내의 자본주의체제가 정돈되고 개척지가 메워지자 태평양으로 적극 진출하였으며, 제1·2차세계대전 때는 먼로주의를 관철하지 못하고 수동적으로 개입하기에 이르렀다.

제2차세계대전 뒤, 전쟁 중에 지대한 구실을 수행하였던 미국은 유럽의 피폐, 소련을 중심으로 한 공산주의 대두 등의 국제정세에 비추어 외교정책을 적극적인 개입주의로 전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국제연합에의 참가, 마샬플랜에 의한 유럽의 부흥원조, 중국의 공산화, 더욱이 소련과의 냉전격화 등의 상황변화에 따라 미국은 공산주의에 대한 ‘봉쇄정책’에서 ‘반격정책’으로의 전환을 목표로 하는 상호방위조약의 체결과 신흥 제국에 대한 경제·군사적 원조를 세계적인 규모로 확대하기에 이르렀다.

미국은 소련과 냉전구조인 양극체제를 유지하면서 1960년대 평화공존과 1970년대의 데탕트라는 화해시대, 1980년대의 탈냉전시대를 도모해 왔다.

1989년 몰타에서의 미·소 마지막 정상회담을 계기로 탈이념과 탈냉전을 선언하고, 1990년부터 시작된 공산사회주의 사회의 붕괴로 소련이라는 국명이 사라지면서 미국 단독의 힘 중심으로 세계질서가 재편되었다.

광복 이전의 한미관계

(1) 수호조약체결까지의 관계

우리나라에 접근하려는 미국의 첫 시도는 1845년에 있었다. 1845년 2월 미국 하원의 해사분과위원회(海事分科委員會) 위원장인 프래트(Prat,Z.)는 제28차 본회의에서 ‘일본과 조선에 파견할 통상사절 연장’이라는 제목의 결의안을 제출하였다.

이 결의안의 주요 목적은 일본과 통상의 길을 트는 데 있었고, 우리나라는 일본에 사절단을 파견하면서 더불어 들러보자는 부수적 관심의 대상에 그쳤다.

아편전쟁을 계기로 서구 열강이 중국대륙으로 상륙하자, 미국은 1844년 중국과 왕샤조약(望厦條約)을 체결하여 중국진출의 발판을 굳혔다.

이에 미국 하원의 프래트 의원은 북중국으로 통하는 해상로를 가로막고 있는 일본 및 한국과도 접촉해 볼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프래트의 결의안은 곧이어 폭발한 미국의 내정문제로 밀려나 사장되고 말았다.

프래트 결의안이 사장된 지 9년 만에 미국은 일본과 통상조약을 체결하였다. 그렇지만 미국은 그로부터 다시 21년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조선왕조와의 통상에 관심을 표명하였다.

그 사이 1855년(철종 6)과 1865년(고종 2) 두 번에 걸쳐 미국 상인들이 동해안의 통천(通川)과 연일(延日) 연안에 표류한 일이 있었는데, 조선 정부는 이들을 육로를 통하여 청나라에 호송시켰다.

대원군의 천주교탄압이 고조되던 때인 1866년 5월 미국의 서프라이즈호가 평안도 철산 해안에서 난파당하자 선원들을 구조하여 역시 청나라에 이송하였다.

1866년 7월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가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평양 경내까지 들어와서 상품교역을 시도하다가 평양사람들의 분노를 사 선체가 불타고 선원 24명이 모두 피살되었다.

이보다 몇 달 전인 1866년 초 9명의 프랑스인 신부들이 조선 정부에 의하여 피살되었고, 이에 따라 프랑스는 신부 학살을 응징하기 위하여 같은 해 9월과 10월 두 차례에 걸쳐 함대를 파견하여 무력을 시위하였다. 이것이 병인양요였다.

미국은 이에 편승하여 셔먼호피습사건에 관하여 프랑스와 공동으로 대처하자고 제안하였다. 미국의 공동대처 제안의 목적은 프랑스함대의 힘을 빌리자는 데에 있었지만, 동시에 프랑스의 단독 원정에 따른 조선에 대한 프랑스의 독점적 지배권의 획득을 견제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미국은 결국 프랑스함대의 원정에 따라나서지 않았다.

1866년은 남북전쟁(1861∼1865)이 끝난 지 1년밖에 안 되던 해였으므로 미국은 전후복구작업에 몰두해야 하였다. 그 밖에도 1866년은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가 멕시코를 병합하려던 때였으므로 미국은 국경을 접하고 있는 멕시코문제로 프랑스와 신경전을 벌여야 하였다. 이와 같은 이유로 미국은 프랑스함대의 한반도 출정에 편승하여 셔먼호피습사건을 문책하려던 당초 계획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병인양요 때 프랑스함대를 물리친 대원군은 서양의 세력을 과소평가하게 되었고 척화비를 전국에 세우는 등 쇄국정책을 한층 더 강화해 갔다.

조선의 쇄국의 열기가 더욱 고조되어 가고 있는 가운데 슈펠트(Shufeldt,R.)와 페비거(Febiger,J.) 제독은 1866년과 1867년 각기 셔먼호의 일부 선원들이 살아 있다는 소문을 듣고 조선을 찾았다. 그러나 이들은 아무런 정보도 입수하지 못하고 평화적으로 조선 정부와 접근하기는 불가능하다는 믿음만을 얻게 되었다.

미국에서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남북전쟁의 충격도 서서히 가라앉고 중국과의 교역량도 증대되자 조선과의 수교 필요성이 점증해 갔다. 즉, 중국 북부에 개항장이 늘어나자 그쪽으로 항해하는 미국 상선들의 안전을 위하여 조선과의 친선관계가 요구되었으며, 또한 일본 내 개항지와 중국 북부의 항구들을 해로로 연결하는 중간선상에 한반도가 돌출되어 있으므로 한반도의 지리적 중요성을 중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

피시(Fish,H.) 국무장관이 1870년 한미수교의 목적을 설명한 대로, 수교의 주된 동기는 ‘조난 당한 선원들을 구조하고 보호할 수 있는 조약을 얻어내는 데’ 있었다. 그러나 조선이 좀처럼 문을 열어주려 하지 않자 미국은 ‘함포외교’를 단행하기로 하였다.

피시는 “미국 정부의 위엄을 보이기 위해서는 적당한 무력시위가 요구된다.”고 지적하면서 아시아함대 총사령관인 로저스(Rodgers,J.) 제독을 원정군 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85문의 포로 무장되었고 1,230명의 병력을 태운 5척의 증기기관 전함들은 1871년 5월 30일 한강 하류에 당도하였다. 신미양요가 시작된 것이다. 6월 로저스함대는 강화도의 광성진(廣城鎭)·초지진(草芝鎭)·덕진진(德津鎭)을 점령하였다. 이틀간에 걸친 한미간의 강화도 격전은 처절하였으며, 이 격돌은 봉건시대의 조선군과 근대병기의 접전이었다.

광성진의 수비사령관 어재연(魚在淵)과 그의 아우 재순(在淳)을 비롯한 수비대는 돌을 던지고 흙을 뿌리며 창과 칼을 휘두르면서 최후까지 저항하다 장렬히 산화하였다.

로저스 원정함대는 강력한 저항에 부딪혀 더 이상 진격이 어렵다고 판단, 중국의 북부 항구 즈푸(芝罘)로 회군하였다. 미국은 조선이 무력에 쉽게 굴복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체험한 뒤 전략을 변경하였다. 중국의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이용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로저스함대와 조선군 간의 강화도 접전이 있은 지 7년 만이며 일본이 강화도조약으로 쇄국 조선의 문호를 개방한 지 2년 만인 1878년 4월, 미국 의회에서는 다시 조선과의 통상수교안이 제안되었다. 미 상원의 해사분과위원장인 서전트(Sargent,A.)는 일본의 통상조약에 자극되어 조선과의 수교를 촉구하고 나섰다.

그는 결의안을 통하여, “조선왕조가 1876년 한일수교조약에 의하여 완전한 독립국가가 되었고, 조선의 왕이 세계의 국가가족으로서 그의 위대한 국가를 등록할 의향을 보였으며, 다른 국가들과 상호통상과 평화혜택을 누리도록 할 의사가 있는 한 미국과의 수교는 가능하다.”라고 역설하고 조선과의 통상, 미국 조난선원들의 보호, 조선 내 미국인의 채광권 획득, 러시아의 한반도 진출 억제 등을 위하여 한미통상수호조약이 필요하다고 지적하였다.

그는 결의안에서 미국 내 태평양 연안의 주들이 조선과 해운수송 및 교역으로 이윤을 볼 수 있을 것이며, 동부의 여러 주들도 조선에 광대한 시장을 개척함으로써 공산품을 수출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서전트 의원은 또 조선과 수교하게 되면 미국 선박들이 조선으로부터 식량과 물자를 보급받을 수 있으며, 미국 고래잡이 어선들도 위험하고 적대적인 조선 해안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다고 밝혔다.

그 밖에도 서전트는 조선에 대한 러시아의 팽창을 견제하고 미국의 영향력을 증진하기 위하여 한미수교가 요구된다고 피력하였고, 미국이 유럽문화권에 속한 모든 나라 중 가장 조선에 가까운 국가라는 것을 되풀이하여 강조하기도 하였다.

서전트는 동해에 떠 있는 섬나라 일본을 한미수교를 매개로 강력한 무장국가로 발전시킨다면, 동해로 뻗어나오는 러시아 세력을 견제하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또한, 조선에는 금·은·동 그리고 소금이 풍부하지만 채광권이 정부에 의하여 규제되고 있다고 지적하였으며, 미국은 조선의 교육제도·군사문제·토목 등 여러 분야에 걸쳐 지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히기도 하였다.

그러나 서전트 상원의원의 결의안은 상원이 휴회로 들어감에 따라 자동 폐기되고 말았다. 33년 전 프래트 의원의 결의안과 같은 운명을 맞이하였던 것이다. 그로부터 2년 뒤인 1880년 미국은 슈펠트 제독으로 하여금 일본의 도움을 받아 조선과 개항교섭을 추진하도록 하였다.

슈펠트는 일본에 당도하였으나 일본측은 조선인의 반일감정을 들어 중재를 거절하였다. 이에 따라 슈펠트는 군함 타이콘데로가를 이끌고 1880년 5월 부산항에 당도하였지만, 조선 관리와의 접촉에 실패하고 다시 일본으로 되돌아갔다.

이에 청나라의 북양대신 이홍장(李鴻章)은 슈펠트가 일본을 통하여 조선에 접근하려 하였던 것을 불쾌하게 여겨 자신이 조선개항협상을 주선하겠다고 나섰다. 이렇게 해서 한미수교협상은 톈진(天津)에서 1882년 3월부터 시작되었다.

이홍장은 조선이 청나라의 부속국임을 한미조약에 삽입시키려 하였고, 슈펠트는 이를 반대하였다. 결국, 타협안으로서 슈펠트는 별도 공한에서 조선이 청국과는 부속적인 관계에 있다는 점을 인정하기로 하였으며, 조선측도 미국 대통령에게 조선이 청국에 부속한다는 서한을 보내기로 하였다.

마침내 한미수호조약은 1882년 5월 22일 미국을 대표한 슈펠트 제독과 조선을 대표한 전권대관(全權大官) 신헌(申櫶) 및 전권부관(全權副官) 경리통리기무아문사(經理統理機務衙門事) 김홍집(金弘集) 사이에 서명되었다.

조선왕조는 1876년 이미 일본에 문호를 개방한 터였기에 미국에의 개방을 굳이 마다할 이유가 없다고 판단, 수교에 응하였다. 뿐만 아니라 조선왕조는 미국을 끌어들여 일본·청국·러시아를 견제해 보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

청일전쟁과 영일동맹을 거치면서 조선에서 일본의 지위가 점차 강화되어 가자 일부 미국인들은 일본 세력의 비대가 극동에서 미국과의 충돌로 치달을 것을 우려하기 시작하였다.

주한미국공사 알렌(Allen,H.)은 “일본이 극동에서 우리에게 계속 말썽을 부려 급기야는 우리가 일본과 칼을 맞대지 않으면 안 될지도 모른다.”고 경고하였다. 그러나 루스벨트(Roosevelt,T.) 미국 대통령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개인적으로 일본의 사무라이정신을 숭상, 일본인을 좋아하였을 뿐만 아니라, 동북아시아에서 일본을 키워 러시아의 남하를 막아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그 밖에도 루스벨트는 임오군란·갑신정변·동학란 등 거듭되는 사회적·정치적 혼란으로 흔들리고 있던 조선에 대한 경멸감을 갖고 있었다. 러일전쟁이 벌어지고 일본의 우세가 판명되자 루스벨트의 조선정책은 더욱 분명해져 갔다. 한반도에 대한 지배권을 일본에 맡겨야 한다는 정책이 그것이었다.

루스벨트는 1905년 1월 러일전쟁이 종반에 들어서자, 조선인들은 “그들 자신의 방위를 위하여 한 주먹도 날릴 수 없기 때문에, 미국은 조선을 위하여 개입해 줄 여지가 없다.”고 털어놓았다. 그러므로 그는 러·일간에 “평화가 지금 달성된다면 조선은 일본의 보호국이 되는 길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다.”고 밝힌 바도 있다.

일본은 1905년 봄 루스벨트에게 평화중재의 역할을 맡아 주도록 부탁하였다. 루스벨트는 러·일 두 나라 중 어느 한 편의 결정적 승리가 극동의 세력균형을 깨뜨리고 만다고 판단, 중재에 끼여들기로 하였다.

루스벨트는 자신이 중재하는 러·일간의 평화협정이 체결될 기미를 보이자 휴전이 매듭지어지기 전 자신의 중재대가로 일본으로부터 무언가 얻어내야겠다고 생각하였다.

즉, 일본의 계속적인 팽창으로 위협을 받고 있었던 미국의 식민지 필리핀의 안전을 일본으로부터 보장받아야 한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는 일본이 필리핀에 대한 미국의 지배권에 도전하지 않으면, 그 대가로 일본의 한국지배를 인정해 준다는 기막힌 착상을 떠올렸던 것이다.

1905년 7월 루스벨트는 육군장관 태프트(Taft,W.)를 필리핀에 파견할 우연한 기회를 얻게 되었다. 루스벨트는 태프트를 필리핀 여행길에 일본을 방문하도록 하여 수상 가쓰라[桂太郎]와 태프트-가쓰라밀약을 체결하게 하였다.

7월 29일 동경(東京)에서 서명된 이 밀약의 골자는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일본은 필리핀에 대하여 하등의 침략적 의도를 품지 않고 미국의 지배를 확인한다. 둘째, 미·일·영 3국은 극동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실질적으로 동맹관계를 유지한다. 셋째, 러일전쟁의 원인이 된 조선은 일본이 지배할 것을 승인한다.

이 비밀협약의 내용을 루스벨트에게 건네자 그는 “귀하와 가쓰라가 체결한 내용은 절대적으로 옳았다. 나는 귀하가 가쓰라에게 확약한 말을 하나도 빠짐 없이 확인하더라고 전하라.”고 당부하기까지 하였다.

조선인들이 “자신의 방위를 위하여 한 주먹도 날릴 수 없기 때문에”, “지금 평화가 달성된다면 조선은 일본의 보호국이 되는 길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다.”라고 몇 달 전 피력한 한반도정책을 루스벨트는 태프트-가쓰라밀약을 통하여 실현하였던 것이다.

개항 이후 미국 문화의 이식

알렌은 선교의사로서 중국의 상해(上海)·남경(南京) 등에서 활동하다가 1884년 서울에 왔다. 그는 장로교 선교사로서 1885년 고종의 허락을 받아 선교병원 광혜원(廣惠院)을 개원하였는데, 이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병원이었다. 미국의 북장로교회에서는 선교 여의사 엘리스(Elless,A.)를 보내어 알렌과 합류시켰다.

고종은 이들의 진료활동을 높이 평가하여 알렌에게 정2품 자헌대부(資憲大夫)의 직첩을 내렸고, 엘리스에게는 정2품 정경부인(貞敬夫人)을 하사하였다. 광혜원에서 제중원(濟衆院)으로 이름을 바꾼 이 병원은 1886년 의학교를 설립, 16명의 학생을 뽑았다. 1899년 제중원의학교가 설립되었고 9년 뒤 졸업생을 내었다. 세브란스의학교의 모태였던 것이다.

민영익(閔泳翊)은 보빙사로 미국에 다녀와 고종에게 현대식 학교의 설립을 제의하였다. 민영익의 진언에 따라 고종은 미국교사 3명을 초청하였고, 이에 따라 유니온신학교 학생인 길모어(Gilmore,G.W.)·벙커(Bunker,D.A.)·헐버트(Hulbert,H.B.)가 1886년 7월 내한하였다.

이들은 육영공원(育英公院)을 설립, 영어·자연과학·수학·지리 등 근대교육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근대교육을 목표로 세워진 육영공원은 봉건적 세습에 젖어 있던 조선조의 지배층과 학생들의 자질문제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1894년 문을 닫았다.

제중원이 1886년 처음으로 의학교를 설립한 데 이어 아펜젤러(Appenzeller,H.)가 1885년 8월 두 학생을 대상으로 수업을 시작하였다. 신교육에 관심을 쏟고 있던 고종은 1886년 6월 아펜젤러의 개설학교에 배재학당이라는 교명과 간판을 하사하였다.

이어 언더우드(Underwood, H.)가 1886년 고아원 형태의 학교를 창설하였다. 경신학교(儆新學校)의 시작이었다. 이어 언더우드는 1915년 3월 경신학교 대학부를 세웠다. 이것이 연희대학교의 모태이다.

한편, 스크랜턴(Scranton,M.) 선교사는 1886년 5월 여학생 하나를 상대로 학교를 열었다. 이화학당의 출발이었다. 이어 1887년 서울에 정신여학교(貞信女學校), 1894년 평양에 정의여학교(正義女學校), 1895년 동래에 일신여학교(一新女學校), 1896년 평양에 숭현여학교(崇賢女學校), 1897년 인천에 영화여학교(永化女學校), 1898년 서울에 배화여학교(培花女學校)가 미션학교로 개설되었다.

조선은 군사훈련 분야에서도 미국군의 도움을 얻으려 하였다. 슈펠트는 조선의 군사고문 초청에 응하지 않았지만, 다이(Dye,W.) 준장, 커밍스(Cummings,E.H.) 대령, 리(Lee,J.) 소령 등 3명이 1888년 서울에 도착하였다.

일본에 체류중이던 닌스헤드(Neinshead,F.H.) 예비역 해군대령도 참여하였다. 조선왕조는 이들을 맞아 사관학교 연무공원(練武公院)을 창설하였다.

1887년 미국의 전기기사 멕케이는 경복궁 안 건청궁(乾淸宮) 부근에 증기발전기 두 대를 설치하고 에디슨전등 두 개를 가설하였다. 콜브란(Colbran)과 보스트윅(Bostwik,H.R.)은 서울 시내 전차·전등·전화 가설경영권을 얻어 조선왕실과 공동출자로 한성전기주식회사를 1898년에 설립하였다.

이 회사는 서대문과 홍릉 사이에 단선궤도전차 개통식을 1899년에 가졌다. 1900년 동대문발전소에 125㎾ 직류·교류 양용발전기를 증설, 종로 민가에 전등을 달게 하였다.

(3) 카이로·얄타·포츠담 회담과 38선의 획정

1943년 11월 말 루스벨트 미국대통령은 이집트의 카이로에서 처칠(Churchill,W.) 영국수상, 장개석(蔣介石) 중화민국총통과 전후 극동문제 처리를 위하여 3자회담을 열었다. 이 회담 결과로 나타난 것이 카이로선언이다.

이 선언은 일본이 1914년 이후 획득한 모든 영토를 연합국이 박탈하고 중국은 만주·대만·팽호군도를 다시 일본으로부터 돌려받는다고 명기하였다. 한국은 ‘적당한 절차’를 거쳐 독립시킨다고 단서를 달아놓았다.

카이로선언의 초안은 미국측이 작성한 것으로서, 루스벨트 대통령의 특별보좌관 홉킨스(Hopkins,H.)에 의하여 기초되었다. 홉킨스는 애당초 그의 초안에서 한국의 독립을 ‘가능한 한 빠른 시간 내에’ 실현시킨다고 적었지만, 이 초안을 보고받은 루스벨트는 ‘적당한 시기’에 독립시킨다고 그 시기를 늦추고 말았다.

한국은 일본의 식민통치를 받고 있었던 나라이므로 자치능력이 부족하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자치능력이 결여된 한국에 광복과 더불어 독립을 부여할 때 한국은 정치·사회적 혼란 속에 빠져들고, 그렇게 되면 북방에 있는 중국과 소련이 한국지배를 위하여 19세기 말과 같이 또다시 각축전을 벌이게 된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은 한국의 정치적 혼란 방지를 위하여 즉각 독립을 부여할 수는 없다고 판단하였고, 상당 기간 주변 강대국들에 의한 신탁통치가 요구된다고 믿었다.

루스벨트는 한국의 정치적 혼란과 이를 방지하기 위한 조처로서 신탁통치를 생각하였고, 신탁통치 실시를 위하여 한국의 즉각적인 독립을 반대하고 ‘적당한 시기’로 늦추었던 것이다.

얄타회담은 1945년 2월, 루스벨트 미국대통령, 처칠 영국수상, 스탈린 소련수상 간에 열렸다. 얄타회담중 루스벨트는 스탈린에게 한국에서의 신탁통치 실시를 제안하였다.

신탁위임국으로서는 미·중·소 3국을 들었으며, 기간은 20년 내지 30년으로 제의하였다. 스탈린은 신탁통치 실시에는 동의하였으나 신탁통치 기간이 단축되어야 한다고 이의를 제기하였고, 외국군의 한국 주둔도 반대하는 입장을 시사하였다. 루스벨트와 스탈린의 한국신탁통치 토의는 단순히 상호 의견교환 정도에 그쳤다.

얄타회담이 끝난 지 두 달 만에 루스벨트가 죽고 트루먼(Truman,H.) 부통령이 승계하였다. 1945년 7월 포츠담회담이 3국 수뇌간에 열렸다. 포츠담선언은 일본에 무조건항복을 요구하였고, 이에 5월 8일 항복한 독일에 대한 점령통치 일반원칙을 선언하였으며, 그 밖에 전후처리문제들에 관하여 언급하였다. 그 중에서도 포츠담선언은 “카이로선언의 내용은 준수되어야 한다.”고 명기하였다.

미국은 포츠담회담중 소련측이 대일전(對日戰)에 참전하기를 요구하였지만, 소련이 대일전에 참전하게 될 경우 소련이 한반도를 모두 점령해 버릴 것을 우려하였다.

그 결과 미국은 한국의 독립을 보장한 카이로선언은 준수되어야 한다고 포츠담선언에 명기함으로써, 소련이 한반도에 상륙한다 하여도 카이로선언에 따라 한국을 독립시키도록 유도하려 하였다.

미국은 제2차세계대전중 한반도상륙작전을 포기하였다. 한반도에 주둔한 일본군의 결사적 저항으로 희생이 클 뿐만 아니라 일본 본토상륙을 위한 부담 때문에 군사력을 한반도 상륙에 빼돌릴 여유가 없었다는 데 그 이유가 있었다. 미국은 그 대신 소련이 한소국경선을 육로로 넘어 한반도로 진격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미국은 1945년 8월 6일과 9일 각각 일본의 히로시마(廣島)와 나가사키(長崎)에 인류 최초의 원자탄을 투하하였다. 8월 10일 일본은 의외로 신속히 무조건 항복을 시사하였고, 이로써 미국의 일본본토상륙작전은 필요없게 되었다.

그러나 일본이 항복의사를 밝힌 날짜는 8월 10일이었고, 이때는 이미 소련군이 한소국경선을 넘어 한반도 북단으로 점령하여 들어오기 시작한 이후였다.

미국은 일본상륙작전이 취소되었고, 그로 인하여 병력에 여유가 생기자 한반도 점령을 새삼 고려하게 되었고, 이를 위하여 8월 11일 <일반명령 1호>를 작성, 발표하였다. 이 <일반명령 1호>는 북위 38도선 이북에 있는 일본군은 소련군 사령관에게 항복절차를 밟고 그 이남에 있는 일본군은 미군 사령관에게 항복하라는 내용이었다.

이에 따라 북위 38도선 이북은 소련군의 점령하에 들어갔고 그 이남은 미군의 점령하에 놓이게 되었다. 38선 획정은 표면적으로는 일본군의 항복을 받아내기 위하여 취해진 군사적 조처였으나, 정치적으로는 소련의 남하를 38선에서 저지하려는 강대국 정치의 소산이었다.

광복 이후의 한미관계

일본이 패망하자 미국과 소련은 1945년 8월 25일 한국의 38도선 분단점령을 발표하고, 이어 맥아더(MacArthur,D.) 사령부가 미군에 의한 남한분할정책을 발표함에 따라, 9월 8일 하지(Hodge,R.) 중장 휘하의 미군이 인천에 상륙함으로써 향후 3년간의 미군에 의한 남한의 군정이 시작되었다.

같은 해 9월 11일 하지의 미군시정방침의 발표와 아놀드(Arnold,A.L.) 소장의 미군정장관 취임에 이어, 19일 ‘재조선(在朝鮮) 미육군사령부 군정청’이라는 공식명칭으로 발족하여 남한의 통치에 들어간 미군정청은, 통치 초기부터 한국인의 정신적 지주였던 임시정부의 부인, 신탁통치안의 고수, 미온적인 대공정책 등으로 우익 정치지도자들과 불편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특히, 이승만(李承晩)과 하지는 정치적 견해 차이로 반목이 극심하였다. 이에 따라 하지는 김규식(金奎植)중심의 중간우파와 여운형(呂運亨) 중심의 중간좌파에 의한 좌우합작을 통해 난국에 처한 한국의 정치적 국면을 타개하려 하였으나 이러한 시도는 실패하고 말았다.

결국, 미국은 1947년경부터 시작된 미소의 냉전에 따라 모스크바협정 노선을 버리고 한반도문제를 국제연합에 넘기기로 정책을 전환하여 1947년 10월 국제연합에 ‘한국독립촉진결의안’을 제출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이승만의 복안대로 남한단독정부가 수립되고, 미군정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1948년 8월 15일 0시를 기하여 폐지되었다.

대한민국이 출범하자 미국은 제일 먼저 한국을 승인하고 초대 주한 미국대표로 무초(Mucho,J.J., 1949년 대사 승격)를 임명하고 한국에서도 초대 주미대사로 장면(張勉)을 임명함으로써 약 반세기 만에 양국의 공식외교가 재개되었다.

한국은 건국 초기부터 북한의 군사적 위협, 신생국가로서의 경제사정 등으로 대미 일변도의 외교를 펴, 미국으로부터 군사·경제 원조를 획득하는 데 집중적으로 노력하였다.

그러나 미국은 제2차세계대전 후 군사비를 삭감해야 할 국내사정 때문에 병력을 감축해야 하였고, 한국에서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 아래 한국을 미국의 방위선에서 제외, 1949년 6월 500여 명의 병력과 군사고문단만을 남기고 미군을 전면 철수하여, 이것이 6·25전쟁을 유발하는 큰 요인의 하나가 되었다.

한미관계가 정치·군사·경제면에서 보다 긴밀하게 전개된 것은 6·25전쟁 이후이다. 전쟁이 발발하자 트루먼 미국대통령은 즉각 군대를 출동시키고 무기를 급송하는 등 한국에 대한 결연한 방어의지를 보이고 38선의 획정을 백지화하여 UN군을 북진시켰다. 또한, 미국은 전시중의 군사·경제 원조뿐만 아니라 전후에도 경제원조를 강화하여 부흥사업을 적극 도왔다.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이승만 대통령의 독재성향 때문에 부산천도시절부터 트루먼과 마찰을 빚었고, 아이젠하워(Eisenhower,D.D.) 대통령 때는 한국의 휴전협정반대 입장 때문에 심각한 의견대립을 보였다.

이승만은 이를 군사·경제 원조와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로 이끌어 타결지었다. 1960년 케네디(Kennedy,J.F.) 대통령 때에는 한국의 5·16군사정변 이후 제3공화국 출범과정에서 미국이 민정복귀를 강력히 요구함으로써 양국의 불편한 관계가 한동안 지속되기도 하였다.

존슨(Johnson,L.B.)·닉슨(Nixon,R.M)·포드(Ford,G.R.) 대통령시대는 비교적 소강상태를 이루었으나, 특히 1970년대 후반 카터(Carter,J.E.)가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미군철수문제·인권문제·박동선(朴東宣)사건 등으로 긴장된 관계가 또 한번 연출되었다.

레이건(Reagan,R.)이 대통령에 취임한 뒤 1983년 초 한국을 방문한 미국 국무장관 슐츠가 “한미간에는 어려운 현안문제가 없다.”고 말한 대로 비교적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다.

그 뒤 1989년에는 부시(George Bush) 대통령의 방한과 1993년과 1996년 두 차례의 클린턴(William Clinton) 대통령의 방한으로 두 나라의 유대관계는 더욱 긴밀하게 유지되고 있다.

미국은 1953년 10월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된 이래 꾸준히 군사원조를 제공하여 한국군 현대화를 도왔고, F-16기 등 최신예전투기를 한국에 배치하여 방어력을 강화하는 데 힘써 왔으며, 매년 한미합동의 팀스피리트훈련 등을 통하여 양국군의 실전능력을 높이고 있다.

또한, 1971년 이후 연례 한미안보협의회가 개최되어 한반도의 군사적 현안문제를 협의하여 왔다. 국교개설 이래 우리 나라에서는 이승만·박정희·전두환 대통령이 미국을 방문하고, 미국에서는 아이젠하워·존슨·포드·카터·레이건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하여 양국간의 당면문제를 협의하였다.

광복 이후, 특히 6·25전쟁 이후 강화된 미국의 한국에 대한 경제원조는 1961년 초까지 한국경제에서 거의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였고, 그 뒤 현재까지도 무역·자본도입·합작투자 등 경제 전반에 걸쳐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1980년 미국 국제개발처(AID)의 발표에 따르면 미국은 1946년부터 1979년까지 한국에 146억810만 달러의 경제원조를 제공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 중에는 1960년대까지 제공한 무상원조 47억 원이 포함되어 있다.

1980년 한미간의 국제무역은 우리나라 총무역 규모의 27%를 기록하였으며 460억 달러에 이르렀다. 한국은 미국의 국제무역 상대자로서 14번째에 속하며, 미국으로부터 매년 10억 달러 정도의 농산품과 민간수요품·비행기·군대장비·공업기술품 등을 수입하고 있다. 한국에 투자한 미국 개인회사들의 대부와 주식이 9억5000만 달러에 달한다.

한국은 세계 전체로 볼 때 이스라엘과 더불어 미국의 원조를 가장 많이 받은 나라 중의 하나이며, 1950∼1980년 사이에 50억2700만 달러의 군사원조를 미국으로부터 받았다. 6·25전쟁 이후의 경제원조는 적금투자의 형식으로 바뀌어 초과지불의 짐을 덜어주고 인플레이션의 압력을 줄여주었다.

1959년 이후 상당액이 감소되었으며 1962년부터 현재까지는 쌍무적 무역시대로 전환되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무상원조시대의 한국경제는 미국에 대한 의존적 타성 때문에 오히려 경제적 자립의욕을 저해하는 결과를 초래하였고, 1962년 무상원조가 끊어지고 차관으로 전환되면서 경제가 본격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하였다.

한국은 1962년부터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실시하기 시작하였고 도움을 받는 경제에서 협조하는 형태로 바뀌었다. 즉, 자금 대여 형식에서 투자형식으로 변하였기 때문에 미국에 의존적이었던 한국경제는 자립경제로 성장할 가능성을 확보하였고, 노동집약적 산업이 자본집약적인 형태로 변화하게 되었다.

무역의 대미 수출의존도는 1961년의 16.6%로부터 1968년 51.7%로 그 상승곡선의 정점에 달하여 절대적 비중을 차지하였으나, 그 뒤 다변화 수출정책에 따라 1976년 32.3%로 하강하기 시작, 1980년대는 26%를 나타내었다.

1987년 미국의 대한 수출은 87억 5821만 달러, 수입은 183억 1079만 달러로 심한 무역역조현상을 보이고 있으나 1995년 대한수출은 241억 3148만 달러, 수입은 304억 357만 달러를 기록하여 무역역조현상이 상당히 줄어들었다. 1980년대의 통상마찰의 원인은 1990년대 이후 대한수출이 수입보다 상대적으로 증가되면서 차츰 해소되고 있다.

2015년 현재 우리나라의 대 미국 수출액은 702억 8000만 달러로 주종목은 반도체·자동차·무선통신기기·석유제품 등이고, 수입액은 452억 8000만 달러로 주종목은 반도체·반도체 제조용 장비·항공기 및 부품 등이다.

한편, 미국으로의 한국인 이민의 역사는 그 뿌리가 깊다. 1885년 서재필(徐載弼)을 포함한 한국인의 이민이 처음 실시된 이래, 유학생 및 노동자의 이민이 행하여졌다.

1902년 하와이 사탕수수밭 노동자로 일하기 위하여 121명이 도미하는 등, 1905년에 이르러 한국인 이민자가 7,000명에 달하게 되었다. 일제하에서는 이민을 금지하였기 때문에 한국인의 미국이민은 불가능하였다.

그러나 1965년 쿼터제의 개정으로 한국이민은 날로 증가하였고, 미국이민 중에서 멕시코·필리핀에 뒤이어 많은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1980년대에 들어와서는 한국교포가 아시아계에서 네번째로 많은 숫자를 기록하고 있으며, 그 중 한국이민은 수적으로 가장 급격히 증가하는 소수민족으로서 미국이민국에 기록되어 있다.

1988년 한국의 재미교민은 101만5547명, 체류자는 7만3620명이었으나, 1995년 1월 현재는 재미교민이 166만1034명, 체류자는 14만650명으로 크게 늘어났다. 2014년 현재 교민은 약 223만 명이다. 지역적으로는 캘리포니아·로스앤젤레스·뉴욕·시카고·호놀룰루 등에 집중적으로 거주하고 있다. 미국은 제24회 서울올림픽대회에 779명의 선수단을 참가시켰다.

북한과의 관계

미국이 북한을 정권적 차원에서 의식하기 시작한 것은 1948년 북한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공산체제가 수립되면서부터이다. 미국과 소련의 군정기를 거쳐 수많은 시행착오와 갈등과 알력 끝에 남과 북에서 각각 독립된 정권형태의 정부가 수립되면서 미국의 대북한 관계는 구체화된 것이다.

1948년 미소공동위원회와 국제연합임시위원회의 실패로 한반도는 두 나라로 분리되고 분단시대의 고착화로 나아가게 되었다. 국제연합 총회에서 한국의 총선거를 국제연합 임시위원회의 감독하에 1947년 11월 14일 실시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북한은 국제연합의 감독을 거부하였고, 1948년 5월 3일에 부득이 남한에서만 총선거를 실시하게 되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이 개시되었고 한반도는 동족상잔의 참극에 휘말려 들어갔다. 6월 26일 뉴욕에서는 미국측이 국제연합 안전보장이사회를 긴급소집하여, 북한은 남침을 즉각 중지하고 38선 이북으로 철수할 것을 결의하였고, 국제연합 한국위원단(UNCK)은 한국의 전쟁상황을 보고하기로 결정되었다.

이 전쟁이 공산당의 아시아침입이라고 판단한 미국은 대만(臺灣)에 7함대를 보내고, 필리핀과 인도차이나에는 군사원조를 증강하였다.

1951년 6월부터 1953년 7월까지 계속되었던 휴전협상은 1953년 7월 27일 중국·북한·미국 대표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판문점에서 조인되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통일될 때까지 싸우기를 원하였고, 필요하면 한국 혼자서 전쟁을 계속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확대원조를 약속한 아이젠하워 미국대통령은 한미조약을 맺어 한국의 안보보장을 약속하였다.

1954년 4월 26일에서 6월 15일 한국전쟁참전 UN군 16개 국과 중국·소련 등의 각국 대표가 참석한 가운데 이른바 제네바회담이 개최되었다.

자유진영측은 ① 한반도의 자율선거, ② 국제연합기구의 인정, ③ 중국군 철수를 주장하였고, 공산진영측은 ① 남북한 대표위원회를 구성하여 총선거 실시를 위한 선거법 작성, ② 중립국가로 구성된 감독위원회가 남북한 총선거 감독, ③ 6개월 이내의 외국군대 철수와, 극동아시아의 평화에 관심 있는 강대국들의 한국의 평화적 발전 보장, ④ 남북한의 문화적·경제적 관계확보 등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양측간에 2개월 동안 아무런 합의점을 찾지 못하자 한국문제를 다루는 것은 더 이상 가치가 없다는 연합국측의 안이 태국대표에 의하여 제기되었다. 이것을 ‘16개국선언’이라 부른다. 제네바회담의 실패로 한국문제는 국제연합 총회로 넘겨졌다.

이후 미국과 북한과의 사이에는 공식적 접촉이 없었으며 이데올로기적으로 더욱 적대적인 긴장관계만을 굳혀갔다. 더욱이, 간헐적인 북한의 대남 및 대미 도발은 세계적 규모의 냉전적 체제대립을 대변하는 듯하였다. 1968년의 푸에블로호사건, 1969년의 EC-121비행기납치사건과 판문점도끼만행사건 등이 그것이다.

한편, 미군철수를 선거공약의 하나로 내건 카터 행정부가 들어서면서 미국의 대북한 안보정책이 느슨해지기 시작하였다. 한국정부는 카터의 대통령 취임 일주일 전에, 만약 북한이 한국과 비침공조약을 맺는다면 미군 철수를 반대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보이기도 하였지만, 결국 북한의 강력한 무장상태를 알게 된 카터는 이후 1977년 5월 5일에 발표한 대통령령, 즉 철수계획안을 취임 2년 반 만인 1978년 8월에 취소하였다.

외교적으로 북한을 인정하지 않던 미국은 닉슨 행정부 때 중국과의 교류를 시작하면서 북한에 대한 자세에도 변화를 보였다. 1972년 2월 27일 저우언라이(周恩來)와 닉슨의 상해합동코뮤니케조인에서 한국문제는 남북한끼리 상호 해결할 것을 주장함으로써 서울·평양간의 정치협상에 자극을 주었으나, 중국과 미국은 사실상 통일보다는 현상유지를 원하였다.

이후 미국은 남북한간의 직접대화를 지지하여 왔으며, 1988년 제24회 올림픽대회 개최 이후 한국의 대북방정책에 따라 대북한 봉쇄정책을 완화할 기미를 보이고 있다.

그 뒤 1990년대에 들어와 북한의 핵개발 의혹과 미사일 개발에 따른 일련의 상황이 동북아의 군비경쟁으로 치달을 지도 모른다는 미국의 우려가 작용함에 따라 북한의 군사무기 개발을 강력히 억제할 필요성을 갖게 되었다.

이에 북한을 자극하지 않으면서 효과적인 제재정책을 펴는 방법의 하나로 북한의 에너지공급을 돕고자 한반도에너지기구(KEDO)를 발족시켜 가장 밀접한 이해 당사자인 한국과 일본을 이 일에 참여시키고 있다.

그리고 미국 내의 대북한정책을 이해 당사자인 한국과 일본의 대북정책관과 함께 조율하여 1999년도에 <페리보고서>로 발표하였다. 이는 미국의 대북한정책의 종합안이자 대북한 제재를 위한 최후의 방안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미국 안의 우리 문화

우리나라와 미국과의 문화적 관계는 1882년의 한미수교를 기점으로 하여 본격화되었다. 미국인들은 우리나라에서 선교활동과 함께 통상활동을 시작하였고, 우리나라는 미국에 이민을 보내기 시작하였다.

공식적인 이민은 1903년에 시작하여 1905년 통감부의 금지조치에 의하여 중단되지만, 이미 그 이전인 1883년부터 1902년까지에 400명의 한국이민이 미국에 입국하고 있었다.

한편, 미국인들은 우리나라에서 선교활동의 일환으로 교육사업을 전개하여, 1885년의 배재학당 설립을 비롯하여, 이화여학교(1886)·경신학교(1886)·정신여학교(1887)·숭실학교(1897)·배화여학교(1898)·숭의여학교(1903)·호수돈여학교(1904) 등을 설립하였다.

또 한편으로는, 선교사·외교관·신문기자 및 여행가들이 미국과 캐나다뿐만 아니라 모든 영어사용권 사람들에게 우리나라를 진지하게 소개하는 일도 이 무렵에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1910년 일본이 우리나라를 강제로 합방하기 전에 출판된 많은 책들 가운데 대표적인 것으로 매켄지(Mckenzie)의 ≪한국의 비극 The Tragedy of Korea≫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책들은 곧이어 벌어진 국권회복을 위한 투쟁과정에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1) 한국의 문화재

재외한국문화재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주한미국외교관 출신인 헨더슨(Henderson,G.)의 소장품 중 한국문화재가 밀반출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가 제기되었던 1970년대 중반부터 일기 시작하였다고 하겠다.

1970년 국제교육과학문화기구(UNESCO)에서는 ‘문화재의 불법 반출입 및 소유권의 양도 금지와 그 예방수단에 관한 협약’을 채택하였으며, 1978년 ‘전쟁이나 식민지로 인해서 빼앗긴 문화재의 원산지로의 반환 또는 원상회복에 관한 운동’을 개시하였다.

이러한 UNESCO의 정신에 따라 한국UNESCO에서는, “문화재도 사람과 마찬가지로 패스포트 없이는 여행할 수 없다.”는 이론에 근거하여 헨더슨의 소장품 반환을 주장한 바 있으며, 해외문화재 실태조사연구사업을 전개하기로 하였다.

1995년 이탈리아의 수도 로마에서 “도난 및 불법문화재에 관한 유니드로아(Unidroit) 협약”이 체결되었는바, 이 협약은 유네스코의 1970년 “문화재의 불법 반출입 및 소유권의 양도 금지와 그 예방수단에 관한 협약”을 일층 강화한 것으로 도난 및 불법적으로 반출(수출)된 문화재는 그 소지자와 소유자를 확인하면 경우에 따라서는 최고 75년을 소급해서 그 문화재를 원산지 국가로 반환 또는 원상복귀시키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이 회의에 많은 대표단을 파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못하고 있다. 현재의 기준으로 계산한다면 이 조약은 1923년 이후에 도난 또는 불법적으로 반출(수출)된 문화재를 되찾을 수 있는 길을 열어 주는 국제조약이다.

한편, 로스앤젤레스 소재 한국문화원에서 발행하는 계간지 ≪코리언 컬처 Korean Culture≫에 <외국수장품 속에 있는 한국미술품 Korean Art in Western Collection>이라는 기사가 실리기 시작하여 1988년까지 16회 연재되어 우리의 관심을 더욱 불러일으켰다.

또한, 한국국제문화협회에서는 1986년과 1987년 두 차례에 걸쳐 조사연구반을 미국에 파견, 유수한 박물관과 개인소장품을 조사하게 하였다. 완벽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이 조사보고서를 통해서 우리는 비로소 미국 안에 있는 우리 문화재의 규모와 반출경위를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조사연구작업은 1차연도(1986)에 피바디박물관, 프리어미술관, 브루클린미술관, 월터즈미술관, 보스턴미술관, 스미소니언인스티튜션의 자연사박물관, 버밍햄미술관과 메트로폴리탄미술관을 조사하였고, 2차연도(1987)에는 호놀룰루미술관, 인디애나폴리스미술관, 메트로폴리탄미술관, 하와이미술관, 로버트·무어소장품, 피바디박물관, 하버드대학의 포그미술관, 데이튼미술관, 보스턴미술관, 샌프란시스코 아시아미술관을 조사하였다.

이상의 조사된 박물관에다 헨더슨과 록펠러컬렉션, 그리고 몇몇 개인의 소장품을 합친다면 그 수는 상당수에 이른다고 할 수 있다. 이 조사보고서에 의하면, 미국에 소재하는 우리 문화재의 수는 1만 1140점에 이른다고 하는데, 이는 어쩌면 점 수가 아니라 종류 수일는지도 모른다.

한편, 이들 박물관의 초기의 한국문화재 수집경위를 보면, 1882년 한미수교를 전후하여 한국에서 활약하였던 외교관과 선교사들이 관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프리어미술관은 주한 미국공사를 역임한 알렌의 수집품을 구입, 본격적인 한국문화재 수집의 기틀을 마련하였고, 클리블랜드미술관의 경우 세브란스병원을 설립한 세브란스(Severance,L.H.)의 수집품을 기증받음으로 해서 본격적으로 한국문화재를 수집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개인소장품 가운데 쌍벽을 이루는 것으로 헨더슨컬렉션과 맥타가르트컬렉션을 들 수 있다. 헨더슨의 경우 그가 미국 외교관으로 두 번째 한국에 부임하였던 1958∼1963년 사이에 수집한 것이며, 맥타가르트(McTaggart,A.J.)의 경우 그가 1950∼1960년대에 외교관으로 한국에 재직할 때 수집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스미소니언자연사박물관에 2,436점, 피바디박물관에 1,359점의 우리 문화재가 수장되어 있는데, 이들은 대부분 민속자료로서 19세기 말에 수집된 것으로 판명되었다. 미국 내의 여러 곳에 흩어져 있는 우리 문화재를 몇몇 주요 소장처별로 살펴보기로 한다.

① 프리어미술관: 이 미술관은 주로 아시아의 미술품을 수집, 연구, 전시하기 위하여 설립된 미국 최초의 미술관이다. 프리어(Freer,C.L.)는 1905년 1만5434점의 미술품을 미국정부에 기증하였는데, 그 중 한국유물이 471점 포함되어 있었다. 이는 당시로서는 대단한 것이었다.

그가 한국도자기를 처음으로 구입한 것은 1896년이었으며, 1897년 일본인 회사로부터 10조(組)의 찻잔을 구입하였는데, 그 중 8조가 한국도자기였다. 초기에는 주로 ‘사쓰마야키(薩摩燒)’라는 일본도자기와 유사한 한국도자기를 수집하다가, 1907년 알렌의 수집품을 구입하고 나서부터 본격적으로 높은 안목을 갖추고 한국문화재를 수집하기 시작하였다.

이 미술관은 국보급 보물을 많이 소장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12세기에 만들어진 고려청자주전자는 프리어가 1907년 알렌으로부터 구입한 것으로, 보스턴미술관 소장품인 동형의 은제주전자와 동일한 것이다.

프리어가 1909년 일본인 회사로부터 구입한 36점의 고려청자 중 12세기의 청자오리형 연적이 있는데 이것도 국보급에 속하는 것이며, 또한 12세기의 청자표주박형주전자·청자정병(Kundika), 13세기의 기명이 들어 있는 화려한 상감문접시 등이 포함되어 있다. 또 하나의 명품은 상감인삼문매병인데, 그 당당한 형태와 유연한 문양 등이 나무랄 데 없는 일품이다.

1909년 이후 프리어의 수집활동이 다소 뜸해지는 것 같지만, 그 질에 있어서는 월등히 뛰어난 작품을 수집하고 있다. 1912년에 구입한 모란문에 봉황을 새긴 매병은 우아한 문양에 청명한 비색이 어우러진 일품이며, 1915년에 구입한 청자진사체연판문표주박형주전자는 뚜껑만 있다면, 우리나라 국보로 지정된 호암미술관 소장품과 동등할 정도로 뛰어난 작품이다.

프리어수장품의 질적 우수성은 그의 생존시에도 인정을 받아, 1914년 미국에서 개최되었던 ‘중국·한국·일본 도자기전’에 그의 수장품 중 29점이나 출품될 정도였다.

이 전시회는 최초로 한국도자기의 독특한 아름다움을 미국인들에게 일깨워주었다. 금속제 고고학적 자료도 상당량 수집하여, 200여 점에 달하는 금·은·철 제품이 수장되어 있다.

한편, 프리어가 수집한 한국화 가운데 1906년 일본인으로부터 구입한 14세기의 유양관음상이 있는데, 브룬디컬렉션의 것과 대동소이하다.

또, 16세기나 17세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수묵화가 두 점 있는데, 하나는 16세기로 추정되는 8폭 병풍화이고, 다른 하나는 산수화이다. 전자는 신사임당(申師任堂)의 <포도도>와 같고, 후자는 <고사관수도>와 같은 구도이다.

이 박물관의 코리아 갤러리(Korea Gallery)는 1980년대 말에 개관되었으나 확실한 연대를 알 수 없다. 여하간 영국의 빅토리아 & 앨버트 박물관이나 미국의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처럼 우리의 도움 없이 박물관 독자적으로 우리 문화재를 중국과 일본의 유물로부터 분리해서 독립적으로 한국관을 마련한 것은 이 박물관이 처음이다.

② 클리블랜드미술관: 이 미술관의 한국컬렉션은 워너(Warner,W.R.)가 기증한 청동삼존불상과 세브란스가 기증한 청자접시 한 점으로 시작되었다. 그 뒤 세브란스의 가족은 이 미술관에 총 200여 점의 한국도자기를 기증하였으며, 세브란스는 1936년 세상을 떠나기 이전부터 세브란스기금을 세워, 이 미술관이 한국의 미술품을 수집하는 데 기여해 왔다. 이 미술관은 도자기·회화·조각·공예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미술품을 가장 골고루 소장하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회화작품 중 이 미술관이 자랑하는 고려시대 불화로, 1250년작으로 추정되는 아미타삼존불상과 1300년작으로 추정되는 삼존불상 그리고 1235년작으로 추정되는 나한상 등을 수장하고 있다. 그림의 추정 연대나 품격으로 보아 불화 중에서도 으뜸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아미타삼존불상은 중앙에 큰 화염무늬 광배를 배경으로 서 있는 아미타불이 좌우에 협시불을 거느리고 있는데, 이것은 아미타불이 죽은 사람을 서방정토로 인도하러 오는 장면을 표현한 것 같다.

석가삼존상은 217.8×112.7㎝ 크기의 대단히 큰 그림으로, 비단에 채색과 금으로 그렸다. 이 두 작품은 혜호가 1313년에 그렸고, 현재 일본의 센소사(淺草寺)에 소장되어 있는 유양관음상에 버금가는 것이라고 평가되기도 한다.

특히, 이 미술관이 자랑하는 청동삼존불상은 여러 가지 면에서 특이하다. 다른 삼존불상과는 달리 협시불로 관음보살과 미륵보살 대신에 관음보살과 지장보살을 데리고 있으며, 각 불상들이 독립된 연화좌 위에 앉아 있는데, 주존불은 결가부좌하고 있고, 협시불들은 반가사유상의 경우에 있어서와 같이 지장보살은 왼쪽다리를, 그리고 관음보살은 오른쪽다리를 보좌 아래로 늘어뜨리고 앉아 있다.

한편, 52.5×40.6㎝ 크기의 나한상 그림은 500개 중의 하나로 여겨지는데, 이 밖에 두 개의 그림이 현재까지 전해 오고 있는 귀중한 작품이다. 오른쪽 상단에 ‘464(?) 나한’이라는 명문이 시주자들의 이름과 함께 보인다.

종교화가 아닌 그림도 상당히 많은데, 그 중 이수민(15세기 중엽)의 사계절 산수화는 일품이다. 이수민은 1425년 일본으로 건너간 화가로, 이것이 일본 밖에 있는 유일한 그의 그림이다.

이 미술관은 1979년 또 한 점의 15세기 한국산수화를 구입하였는데, 1490년을 밝히는 명문 이외에는 아무런 단서가 없다. 우리나라의 박물관이나 개인소장 중 이와 비슷한 유의 그림은 없다고 한다. 17세기의 작품으로 여겨지는 당상관 이상의 문과초상화도 한 점 수장하고 있다.

한편, 세브란스가 이 미술관에 기증한 도자기를 종류별로 보면, 8세기의 뚜껑달린 함과 고려청자대접·정병·죽순형주전자·철채백퇴인삼잎문양매병, 그리고 분청사기류가 많다.

이 중 특기할 만한 것으로 ‘수복강녕(壽福康寧)’의 넉 자를 몸의 중앙에 돋을무늬로 새긴 백자항아리를 들 수 있다. 18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 항아리는 일본으로 건너가 차 도구로 쓰이다가 뒤에 이 미술관으로 오게 된 것 같다. 아마도 전성기의 광주분원요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③ 메트로폴리탄미술관: 350여 점의 한국문화재를 소장하고 있는 이 미술관은 유물을 상설전시하고 있지는 않지만, 상당한 수준급의 유물들이 많다. 1957년 한국미술걸작전이 미국을 순회할 때 이 미술관에서 전시되었고, 또 1981년의 한국미술 5천년전도 여기서 전시되었다.

이 미술관은 3∼19세기에 걸친 우리나라의 도자기·회화·조각 그리고 나전칠기를 소장하고 있는데, 특히 고려시대의 청자가 자랑거리이다.

8세기 중엽의 것으로 추정되는 금동불상은, 동류의 한국 불상들이 대체로 중국의 것을 모델로 하고 있음에 반하여, 이른바 우다야나 형식을 취하고 있음이 특이하다. 이 불상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2구의 약사여래상과 유사한데, 보다 날렵하고 균형이 더 잘 잡혀 있다.

또, 11, 12세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청동거울에 음각으로 새긴 아미타삼존불상이 있는데, 아미타불과 협시불들이 다같이 연화좌에 결가부좌하고 아미타불은 정면을 향하고 협시불들은 서로 마주보고 앉아 있는 것이 특이하다.

고려시대인 14세기로 추정되는 두 점의 불화가 있는데, 우수하고 희귀한 작품들이다. 하나는 수월관음상이라는 명패가 붙어 있는데, 특이한 점은 상단 왼쪽 구석에 도교적인 요소가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즉, 달 속에 토끼 한 마리가 계수나무 아래에서 불로불사의 영약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아미타삼존불화인데, 주존불은 높은 보좌 위에 결가부좌하고 있고, 그 앞에 서 있는 두 협시불은 그 키가 보좌의 높이와 같아서 난쟁이같이 보인다.

이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회화작품 중 두 점의 귀중한 산수화를 들지 않을 수 없다. 하나는 승려[僧]가 동자들을 거느리고 계곡의 다리를 건너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는데, 1918년 처음 이 미술관에 들어왔을 때 중국 그림으로 잘못 수록되었다.

현재 일본의 개인이 소장하고 있는 이와 비슷한 양식의 한 쌍의 그림이 15세기 초 한국화가의 그림으로 추정되고 있어, 이 그림도 한국화임이 판명되었다. 다른 하나는 18세기 후기의 것으로 추정되며, ‘삼오제’라는 명문과 낙관이 있지만 화가를 알 수 없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은 독립된 “한국미술갤러리” 창설 기념으로 1998년 6월 7일부터 1999년 1월 24일 사이 한국미술특별전을 개최하였다. 마침 우리나라 대통령이 미국을 방문하고 있는 시기였기에 개관식은 더더욱 큰의미를 가졌다.

이번 전시회에는 신석기시대부터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는 토기류, 신라의 금관, 사리 장치, 유리제품, 금제품, 나전칠기류, 반가사유상을 비롯한 불교조각 작품, 아미타삼존불, 지장시왕도, 수월관음도, 신윤복·김홍도의 풍속화, 윤선도의 이인도 등을 비롯한 회화작품을 포함하여 총 100여 점이 전시되었다.

국립박물관 소장 유물 이외에 다른 박물관들과 개인 소장품들이 포함되어 있어서, 이러한 세계적인 박물관에 독립된 한국관을 상설된 것은 의미있는 일이다. 이번 전시회에는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의 한국미술(Art of Korea,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이라는 제목의 도록이 출판되었다.

④ 록펠러3세컬렉션: 1981년 록펠러3세(Rockefeller,J.D. 3rd)는 260점에 달하는 그의 아시아 미술품들을 아시아학회(The Asia Society)에 기증하였는데, 그 중 한국미술품은 10점밖에 되지 않지만, 대부분이 국보급에 속하는 도자기류이고 한 점은 불화이다.

청화백자항아리는 18세기의 것으로 짐작되는데, 학이 달밤에 소나무 위를 날아가는 풍경을 묘사하고 있다. 그 우아한 형태와 문양이 뛰어나다.

또 하나의 청화백자병은 몸통 네 곳에 양식화되었으면서도 대단히 우아한 연잎무늬 한가운데에 활짝 핀 연꽃을 그려넣은 것이다. 이 두 백자는 대단히 인기가 있어, 1968년에 열린 한국도예전 이래로 주요 전시회에 단골로 출품되는 작품이기도 하다.

록펠러가 1965년에 구입한 한 쌍의 고려청자 10엽 형태의 잔과 잔받침은 그 기형이 날렵하며 코발트청색이 찬연한 걸작품이다. 한국미술 5천년전에도 이와 비슷한 작품이 두 점 포함되어 있는데, 모두 12세기 고려 인종대에 만들어진 것이다.

그는 또 1968년 11, 12세기의 것으로 보이는 고려청자 대접과 주발을 구입하였는데, 최근에 와서야 발표되었다. 대접은 내부에만 연잎문양이 새겨져 있고 밖에는 문양이 없다. 한편, 주발은 내부에는 문양이 없고 밖에만 연잎문양이 겹겹으로 새겨져 있다.

그가 죽기 얼마 전인 1978년 14세기 작품인 불화 한 점을 구입하였는데, 이야말로 국보급에 속하는 진품이다. 이와 비슷한 불화가 몇 점 일본 나라(奈良)의 야마토문화관(大和文化館)에 소장되어 있는데, 제작연대는 대체로 14세기 초기로 보는 견해가 많다.

⑤ 애버리·브룬디지컬렉션: 올림픽운동가로도 유명한 브룬디지는, 그가 미술품수집을 시작한 1935년부터 1975년에 죽기까지 높은 식견과 안목을 갖고 최상급의 미술품을 수집하였다.

현재 그의 수집품은 샌프란시스코 아시아미술관에 기증, 소장되어 있는데, 우리 미술품은 300여 점에 불과하지만, 회화·조각·장식미술품과 고고학 자료를 망라한 뛰어난 작품들이다.

이 미술관은 1966년 개관한 이래 1979년 미국을 대표하여 한국미술 5천년전을 주선하기도 하였다. 이 미술관의 자랑은 우리나라와 일본 외에는 없는 우리 문화재를 상당량 소장하고 있다는 점이며, 또한 한국미술품을 중국·일본의 것과 나란히 상설전시하고 있다는 점도 특기할 만하다.

소장품 중 고고학자료로는 5, 6세기의 신라 토용(土俑)을 비롯하여 같은 시대의 금동관을 들 수 있는데, 경주에서만 출토된 신라 토용이 구미에서는 유일하게 이 미술관에만 소장되어 있다.

이렇게 아시아의 고대 문화재를 전문적으로 수집, 전시하던 샌프란시스코 아시아미술관은 1996년 12월 20일부터 1997년 4월20일에 재미 한국인 작고 화가인 배융(1928∼1992)의 작품 21점을 그의 미망인으로부터 기증받아 전시하고 이 미술관의 영구 콜렉션에 포함하였다.

그는 1950년대에 한국에서 판화운동을 주도하였으며, 1974년 미국으로 이민간 뒤에는 우리가 소위 ‘몰골(沒骨)화법’이라 부르는 독특한 스타일로 명상을 주제로 하는 선(禪)적인 작품을 제작하였다. 배융은 아마도 21점이나 되는 많은 작품을 외국의 미술관이 기증받아 영구 콜렉션으로 소장한 최초의 한국화가일 것이다.

한편, 삼국시대의 고분에서 출토된 것으로 보이는 금동관은 불교 도입 이전의 토속신앙적 요소가 보이는데, 그것은 신라금관의 예와 같다. 아마도 백제의 고분에서 출토된 것으로 보이는 이 금동관은 우리나라 이외의 지역에서는 유일하게 이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다. 이 밖에도 삼국시대의 토기가 다수 소장되어 있다.

중요한 불교미술품으로는 통일신라시대인 8세기의 금동불상과, 14세기의 금동오층탑이 있다. 금동불상은 불상의 한국화 양상을 보여주는 중요한 작품으로, 조간시대(貞觀時代, 859∼876) 일본불상의 선조라는 평이 있다.

금동사리탑도 우리나라 밖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으로, 특히 지금은 그 자취를 찾아보기 어려운 고려시대 건축양식을 알아보는 데 귀중한 자료이다.

한편, 고려시대의 청자로 연꽃 마개가 달린 주전자가 있는데, 브룬디지가 제2차세계대전 직후 일본에서 구입한 것으로 우리나라 국보급에 해당되는 명품이다. 이 밖에도 12세기의 용머리에 거북몸통을 한 연적, 13세기의 상감문청자항아리 등 명품이 소장되어 있다.

⑥ 보스턴미술관: 이 미술관에는 최근에 한국관이 새로 마련되어 150여 점에 달하는 우리 미술품을 비교적 잘 전시하고 있다. 이 미술관이 여타 박물관과 다른 점은, 구미의 박물관들이 대체로 고려청자에만 중점을 두고 있는 데 반하여, 조선시대의 백자를 비롯하여 금속공예품과 나전칠기 등 여러 분야의 유물을 한데 모아 다른 분야와 연결시켜 연대적으로 감상할 수 있게 진열하고 있다는 데 있다.

이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명품 중의 하나로 통일신라시대 최고의 불상으로 알려진 8세기의 금동약사여래상을 들 수 있다. 키가 36㎝로 비교적 작은 입상이지만, 우리나라에서도 아직 보고가 되지 않은 귀중한 작품이다. 이와 유사한 53구의 금동불상이 금강산 유점사에 보존되어 있었다는 기록만이 보일 뿐 현품은 찾아볼 수가 없다.

다음으로 신라시대의 고분에서 출토된 일괄유물이 있는데, 이 유물들의 색깔(청록색)과 그릇의 틈새에 묻어 있는 흙을 조사해 본 결과 동일 고분에서 출토된 것이 확인되었다.

뚜껑에 고리가 달린 청동함을 비롯하여 말방울·말안장 장식 등이 있는데, 불행하게도 정확한 출토지를 확인할 수가 없다. 다만, 이 함 외부에 한자로 ‘왕씨’라는 음각 명문이 있는 것으로 보아 대략 5, 6세기의 왕실 부장품으로 볼 수 있다.

또한, 고려시대인 11세기의 것으로 보이는 은제바리와 은제봉황마개가 달린 주전자도 소장되어 있는데, 이 또한 국보급에 속하는 명품으로 당시 불교의식에 사용된 기물로 보인다.

또 하나의 일괄유물로 고려 말이나 조선 초의 것으로 보이는 은도금 탑형태의 사리함이 있다. 이 사리함을 지공선사(指空禪師)와 관계가 있는 북한의 화장사 출토로 보는 학자도 있지만, 지공의 제자인 나옹선사(懶翁禪師)가 1376년 서울 근교에 세운 회암사 출토품으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이와 비슷한 사리함이 서울 근교의 수정사와 금강산에서 발견된 예가 있다. 사리함은 받침과 탑형태의 본함이 있고, 그 속에 5개의 탑이 들어 있는데 이 소형탑에 새겨진 명문을 보면, 3개의 탑에는 부처의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었다고 한다.

⑦ 그레고리·헨더슨컬렉션: 이 수집품은 헨더슨이 1948년 주한 미대사관의 3등서기관으로, 그리고 다시 1958∼1963년 문정관과 정치담당 참사관으로 근무할 당시 수집한 것이다.

이 컬렉션의 특징은 삼국시대의 토기로부터 조선시대의 분청사기와 백자에 이르기까지 한국도자기를 골고루 한데 모았다는 데 있다. 이 수집품만 가지고도 족히 한국도자기박물관을 만들 만한 훌륭한 수집품이다.

속칭 헨더슨컬렉션은 박정희 정권시대에 그가 유신을 반대하자 그의 컬렉션이 불법적으로 수집되었고 또 반출되었다는 이유로 1970년대에 사회적으로 큰 물의를 일으킨 일이 있었다.

많은 한국인들이 서울 중학동의 미국대사관 직원 관사를 드나들면서 그 집에 진열되어 있던 우리의 문화재를 보고 어렴풋이 ‘그렇구나!’ 하고 짐작은 하였지만 그 컬렉션의 진수를 우리가 알게 된 것은 1969년이었다.

그 해 미국 오하이오주립대학 미술관에서 개최된 그의 한국도자기 컬렉션전람회는 아마도 유사 이래 처음 있었던 한국도자기 해외 전시였을 것이다.

당시에 발간된 전시 카탈로그에 의하면 총 143점이 전시되었는데, 그 중에는 낙랑시대의 작품 1점, 김해 2점, 백제 3점, 가야 10점, 신라 29점, 고려시대의 음각·양각·상감청자 36점, 조선시대의 분청·백자·청화백자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 컬렉션은 소수의 희귀품과 명품을 포함하고 있지만, 무엇보다도 선사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한국도자기사의 연구에 대단히 중요한 연구 컬렉션(study collection)이다.

1990년대 초에 우리나라와 미국의 유수한 박물관들이 이 컬렉션을 입수하기 위해서 노력하였으나 조건이 맞지 않아 하버드대학교의 포그미술관(Fogg Museum of Art)으로 정착하게 된 것은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다.

⑧ 기타의 수집품들: 로버트·모어스컬렉션은 최근에 유명해진 수집품인데 지금과 같은 추세라면 우리나라와 일본을 제외한 지역에서는 거의 유일한 종합적인 컬렉션이 될 것이다. 이 수집품에는 삼국시대의 토기류, 고려시대의 불상·자기류, 그리고 조선시대의 자기류·회화·공예품 등이 망라되어 있다.

브루클린미술관도 상당히 다양한 수집품을 가지고 있는데, 앞으로는 특히 민화와 민예품의 수집에 역점을 두어, 우리나라 밖에서는 최고의 민예품수집미술관이 될 것으로 계획하고 있다. 고려시대의 청자주전자·불화와 조선시대의 회화·분청사기·백자·민화·민예품 등을 다수 소장하고 있다.

뉴와크미술관도 상당한 수집품을 가지고 있다. 아직 그 수집품이 다양하지 못하지만, 민화의 수집품은 그런대로 볼 만하다. 특히, 서산대사(西山大師)와 사명대사(四溟大師)의 영정은 그 필치가 민화풍에 가까운데, 아마도 무속에 사용되던 그림 같은 인상을 준다.

이 밖에도 우리 문화재를 200여 점 소장하고 있는 하와이미술관, 58종을 소장하고 있는 인디애나폴리스미술관, 158종을 소장하고 있는 하버드대학의 포그미술관, 그리고 55종을 소장하고 있는 버밍햄미술관 등이 있다.

한편, 현재 국제문화협회가 시작한 미국 안에 있는 우리 문화재에 대한 조사·연구는 앞으로도 계속되어 미국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밖의 모든 문화재를 골고루 찾아내어 재외문화재 도록 같은 책이 출판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2) 미국 안에서의 한국학

미국 안에서의 한국학 연구의 역사는 대체로 4단계로 나누어, ① 1940년 이전의 개척단계, ② 1945년부터 시작된 파종단계, ③ 1955∼1965년 사이의 발아단계, ④ 1965년 이후의 개화단계로 구분한다.

미국 안에서의 한국학 연구의 현황을 보면, 현재 3,340개에 달하는 미국의 고등교육기관 가운데서 한국학을 어느 정도 가르치고 있는 기관은 19개에 지나지 않는다.

미국의 전체 대학생 1240만 명 중 한국학을 공부하는 학생은 2,300명으로서 한국에 대한 미국의 여론에 영향력을 행사하기에는 역부족인 현실이다. 현재 미국에는 350명의 한국학 전문가가 있는데, 그 중 200명은 전문적으로 한국을 연구하며 76%는 대학에 재직하고 있다.

이들의 과반수는 한국 태생으로서, 나이가 대부분 50세 이상이다. 현재의 추세로 보아 이들이 퇴직하고 나면, 아마도 그 자리는 동결되어 버릴 가능성이 더 크다. 따라서, 미국에 있어서의 한국학에 관하여 관심 있는 사람들이나 유관기관에서 우려를 표명하는 경향이 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앞으로 미국 내에서의 한국학 진흥을 위해서는 미국에 의존하기보다 한국측에서 더욱 관심을 높여 투자를 할 시기가 왔다는 중론이 일고 있다.

현재 미국에서 한국학을 연구하는 주요 조직체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들 수 있다.

① 아시아협회의 한국협의회(The Korea Council of the Asia Society, New York, 1964).

② 아시아연구협회의 한국연구위원회(The Committee on Korean Studies, Association for Asian Studies Inc., 1966).

③ 재북미주 한국기독교한국학자협회(The Association of Korean Christian Scholars in North America, 1966).

④ 미국학술단체협의회와 사회과학연구협의회의 한국연구합동위원회(The Joint Committee on Korean Studies of the American Council of Learned Societies and Social Science Research Council, 1967).

⑤ 컬럼비아대학의 근대한국에 관한 세미나(Columbia University Seminar on Modern Korea, 1970).

⑥ 센트럴 코네티컷주립대학의 한국연구동우회(The Friends of Korean Studies, Central Connecticut State College, 1971).

⑦ 재북미주 한국정치학자협회(The Association of Korean Political Scientists in North America, 1973).

⑧ 남가주의 한국연구협회(The Association of Korean Studies of Southern California, 1974).

⑨ 피츠버그대학의 한미교육위원단(The Korean―American Educational Commission, University of Pittsburg, 1976).

⑩ 고려연구원(Koryo Research Institute, Los Angeles, 1978).

한편, 대학의 주요연구소로, ① 하와이대학 한국학연구소(The Center for Korean Studies, University of Hawaii, 1972), ② 웨스턴미시간대학 한국연구소(The Center for Korean Studies, Western Michigan University, 1972).

③ 캘리포니아대학 한국 및 일본연구소(The Center for Japanese and KoreanStudies, University of California, Berkeley, 1975), ④ 캘리포니아 주립대학 한미관계 및 한국학연구소(The Center for Korean-American Studies and Korean Studies, California State University, Los Angeles, 1979) 등을 들 수 있다.

이들 이외에도 한국에 관한 연구를 하거나 한국을 포함하는 주제를 연구하는 기관으로는, ① 아메리칸 엔터프라이즈 인스티튜트(American Enterprise Institute), ② 브루킹스인스티튜션(Brookings Institution), ③ 카토 인스티튜트(CATO Institute).

④ 전략 및 국제연구소(Center for Strategic and International Studies), ⑤ 헤리티지 파운데이션(Heritage Foundation), ⑥ 조지워싱턴대학 중국 및 소련연구소(Institute for Sino-Soviet Studies, George Washington University), ⑦ 랜드 코퍼레이션(Rand Corporation), ⑧ 스탠포드연구소(Stanford Research Institute) 등이 있다.

한편, 미국 내의 한국연구와 관련 있는 도서관으로는, 미국의회도서관을 비롯하여 하버드-옌칭연구소도서관, 컬럼비아대학의 동아시아도서관, 워싱턴대학도서관, 하와이대학의 동서연구소도서관, 캘리포니아대학(Berkeley)의 동아시아도서관, 웨스턴미시간대학의 왈도도서관과 브리감 영대학도서관 등을 손꼽을 수 있다.

특히, 캘리포니아대학의 동아시아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아사미문고(Asami Collection), 스탠퍼드대학의 후버연구소에 소장된 재한국 일본공사의 고문서자료와 가네자키문고(Kanezaki Collection), 뉴욕시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알렌의 필사본과 클레먼트에 있는 매코믹문고(McCormick Collection) 등은 한국에 관한 직접·간접적인 정보의 중요한 원천이 되는 특수문고들이다.

미국 위치

참고문헌

  • 『세계각국편람』(외무부, 1996)
  • 『미국사』(이주영, 대한교과서주식회사, 1987)
  • 『한미수교100년사』(국제역사학회 한국위원회, 1982)
  • 『미국의 대한정책 1845∼1980』(정용석, 일조각, 1976)
  • 『개화기의 한미관계』(이광린 역, 일조각, 1973)
  • 「미국교과서에 비춰진 한국―정책제안을 위하여」(조영환·남인숙,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제1회한국학국제학술회의논문집』, 1979)
  • God, Mammon and Japanese-Dr. Horace N. Allen and Korean―American Relations, 1884∼1905(Harrington,F.H., The University of Wisconsin Press, 1944)
  • 「Korean Studies in the United States」(Donald MacDonald, 수원대학교개최 해외한국학 연구현황기초조사 국제학술대회, 1988)
  • 「Current Status of Korean Studies in North America」-Problems and Prospects(Andrew,C.Nahm,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제1회한국학국제학술회의논문집』, 1979)
  • 「Organizing Korean Studies in the United States-History and Overview of the SSRC-ACLS Joint Committee on Korean Studies」(Ronald Agua,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제1회한국학국제학술회의논문집』, 1979)
  • Korean Culture-Korean Overseas Information Service(Los Angeles/각 호, 1982∼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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