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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교회사 100대 사건 - 역사의 현장을 찾아서] (71) 반종교 개혁

박영호 기자
입력일 2003-01-12 수정일 2003-01-12 발행일 2003-01-12 제 2331호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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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도.조직 정비’등 개혁 추진
쇄신운동의 일환…교회 영향력 회복 도모
독일 중심, 반가톨릭적 개혁 확산 저지 한몫
16세기 가톨릭 교회는 한편으로는 시대적인 혼란과 신앙 교리, 교회 관습과 전통의 혼돈으로 점철됐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이러한 어려움을 딛고 일어설 수 있는 개혁과 쇄신의 노력이 빛나던 시기이기도 했다.

15세기초 콘스탄츠 공의회(1414~1418)는 서구 대이교 사건(1378~1417)을 종결지었지만 교회의 쇄신이라는 목표는 달성하지 못했다. 이는 세속적인 정치 권력의 간섭과 영향 때문이기도 했지만 세속화된 교회 자체의 약점 때문이기도 했다.

이러한 현실을 인식한 교회는 다양한 계층에서 복음과 초기 교회의 정신으로 돌아가자는 쇄신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 쇄신의 여정은 쉽지 않았고 성과는 미진했다.

그런 가운데 15세기 말에서 16세기에 걸쳐 루터 등에 의한 종교 개혁 운동으로 교회는 분열됐고 이 분열을 치유하려는 운동이 16세기 들어서 본격적으로 전개됐으며 이러한 가톨릭 개혁을 19세기 초 역사가들은 「반종교 개혁」(Gegenreformation)이라고 불렀다.

16세기 교회 분열 치유 노력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구별해야 할 것은 「가톨릭 개혁」과 「반종교 개혁」이 결코 동일한 역사적 운동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이 두 가지 개념은 기본적으로 가톨릭 신앙에서 분열된 프로테스탄트와 관련된 역사적 사건들을 지칭하는 「종교 개혁」의 개념을 전제로 한다. 하지만 반종교 개혁이 루터의 시대에 일어난 가톨릭 교회의 모든 쇄신 운동 전체를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반종교 개혁은 루터의 종교개혁과 프로테스탄트에 대응해 가톨릭교회의 영향력을 회복하고 교회의 쇄신을 이루기 위해 특정 지역에 한정돼 발생한 운동이다. 하지만 교회의 쇄신 운동은 이러한 반종교 개혁보다 훨씬 앞서 이미 시작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반종교 개혁이 일어나기 이미 오래 전부터 교회 안에서는 쇄신을 열망하는 수많은 주교와 수도자, 평신도들이 각자 자신의 위치에서 거룩한 생활을 하면서 교회 쇄신을 위한 다각적인 노력을 기울여 왔다.

가톨릭 교회의 쇄신 운동은 루터의 종교 개혁 이전부터 이탈리아와 스페인이 중심이 되어 점차 전체 교회로 확산됐지만 반종교 개혁은 루터의 종교 개혁 이후에 생겨난 것으로 반가톨릭적인 개혁 운동의 확산을 저지하고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을 명확히 하려고 했다. 반종교 개혁은 특히 가톨릭 교회의 내외적인 개혁을 정치적으로 후원했으며 정치적 결속을 공고히 하고 잃어버린 교회의 영향력과 영토 회복을 도모하기도 했다. 그런 의미에서 반종교 개혁을 수행한 대표적인 나라가 독일이었다.

개혁 중추는 ‘예수회’

가톨릭 교회는 날로 거세지던 프로테스탄트의 반가톨릭적인 가르침들을 논박하고 정통 신앙 교리를 재확인함으로써 프로테스탄트로 돌아선 사람들을 다시금 교회의 품안으로 끌어안기 위해 노력했다.

독일에서 가톨릭 교회가 침체를 거듭하고 있을 때 1560년 경부터 여러 곳에서 활발하게 프로테스탄트에 반대하는 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러한 움직임은 오직 프로테스탄트에 대항하는 투쟁으로서만 인식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즉 이 운동은 가톨릭 교회 안에서 이미 지속되고 있던 개혁 운동과 보조를 맞춰 진행됐다.

교황청은 공의회에서 결의한 것을 각 지역교회가 충분히 이해하고 과감하게 실행하도록 촉구했고 교황으로부터 쇄신의 주역으로 각별한 관심을 받던 예수회는 16세기 가톨릭 개혁 운동의 중추가 됐다. 예수회는 특히 영성 생활 지도와 선교 활동, 자선 사업, 청소년 교육과 신학 연구 등을 통해 독일에서 반종교 개혁과 가톨릭 신앙 복구의 원동력이었다.

이러한 운동은 독일 뿐만 아니라 프랑스, 영국, 네덜란드, 폴란드, 헝가리 등 여러 유럽 제국에서 거의 동시에 나타났다.

독일의 가톨릭 제후들은 새롭게 변모하는 가톨릭 교회의 모습에 고무돼 쇄신을 실행했고 자기들의 영지 안에서 가톨릭만을 인정했다. 이에 따라 가톨릭 제후들이 통치하는 지역에서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확산되면서 정치적 종교적 갈등이 야기됐고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종교 회의를 통해 제국의 가톨릭 제후들은 자기 영토 안에서 가톨릭 신앙만을 인정하도록 허용됐다.

합스부르크가의 헝가리 왕도 동유럽에 프로테스탄트가 확산되는 것을 억제했고 신성 로마 제국의 페르디난드 1세(1556~1564)와 페르디난드 2세(1619~1637)도 제국 전체를 가톨릭 신앙의 전통대로 수호했다.

1617년 페르디난드 2세가 보헤미아의 왕이 됐을 때 프로테스탄트를 억제하려 함으로써 30년 전쟁(1618~1648)이 일어났다.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전쟁이 끝났을 때 정치적으로는 독일 황제의 권위가 실추됐고 종교적으로는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모두 동등한 권리를 갖는데 합의함으로써 적어도 형식적으로는 반종교 개혁과 종교 분쟁이 종결됐다.

전체 교회의 쇄신을 위한 역사적인 물결을 가리키는 용어는 「가톨릭 쇄신 운동」이 적절할 것이다. 반종교 개혁 운동은 대부분의 경우 특정 지역의 한정된 지역에서 일어난 운동이기 때문이다.

반종교 개혁이 가톨릭교회의 개혁과 쇄신 전체를 의미하지는 않지만 그 성과는 적지 않았다. 교회는 제도와 조직을 정비함으로써 개혁과 쇄신의 발걸음을 더욱 힘차게 내디딜 수 있었다.

하지만 프로테스탄트측에서는 반종교 개혁으로 인해 가톨릭에 대해 더욱 공격적이 됐고 첨예한 종파적 대립을 야기했다.

30년 전쟁. 가톨릭은 1631년 마그데부르크에서 승리함으로써 개신교 잔당들을 소탕했다. 전투는 중부유럽 전역에서 벌어졌는데, 이는 그곳의 교회가 영적으로 계속 불안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박영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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