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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교회사 100대 사건 - 역사의 현장을 찾아서] (17) 콘스탄티누스의 개종

로마=김상재 기자
입력일 2001-04-22 수정일 2001-04-22 발행일 2001-04-22 제 2246호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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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승 이끈 그리스도를 수호신으로”
기도속 ‘그리스도 군기’ 만들어 ‘밀비오전투’ 임해
박해종식·성직자 면세·주일공인 등 국교 기틀 다져
순교지의 대명사 꼴로세움과 순교의 승리를 보여주는 듯한 콘스탄티누스 개선문.
성주간이 되면 교황은 순교자들의 고귀한 희생을 기념하기 위해 순교자들이 맹수의 먹이가 되어 쓰러져간 콜로세움에서 십자가를 손수메고 십자가의 길 기도를 봉헌한다.

이 콜로세움에서 서쪽으로 1.5㎞ 정도를 가면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개선문이 나타난다. 후에 파리 개선문의 모델이 되기도 한 이 개선문은 콘스탄티누스가 312년 막센시우스를 물리치고 서로마를 제패한 기념으로 원로원이 건조해 콘스탄티누스에게 헌정한 것이다. 콘스탄티누스는 이 전쟁의 승리후 313년 밀라노에서 동로마의 황제 리치누스와 협정을 맺고 그리스도교의 종교자유를 허용했다.

순교지의 대명사 콜로세움과 순교의 승리를 보여주는 듯한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을 함께 바라보고 있노라면 남다른 신앙의 감동이 전해져 오는 듯하다. 지하교회 또는 카타콤바의 교회로 특징 지워지던 그리스도교는 콘스탄티누스에 의해 비로소 지상교회가 될 뿐 아니라 4~5세기 황금기를 맞이하게 된다. 이처럼 콘스탄티누스의 개종은 교회사적으로 뿐만 아니라 세계사적으로도 일대 전환점을 이루는 중요한 사건이다.

정치적 상황

로마황제중 가장 지독한 박해를 일으킨 디오클레시아누스는 노예가문 출신으로 황제에 오른 인물이다.

그는 쟁취한 황제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4두정치라고도 불리는 4분령통치 정책을 실시한다. 4분령통치는 로마 제국이 한 사람에 의해 통치하기는 너무 넓은 영토였고 정적들에 의해 권좌가 언제 찬탈될 지 모르는 상황에서 능력있는 정적들을 자기 휘하에 두고 넓은 제국을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제국을 4등분한 정책이다.

디오클레시아누스는 이 정책을 위해 먼저 자신의 명령에 복종하고 자신의 정책을 잘 추진할 인물로 비천한 농민출신 막시미아누스를 공동 통치자로 삼아 자신과 같은 황제(아우구스투스) 칭호를 주어 제국의 서쪽을 맡게하고 자신은 동쪽을 맡았다.

그리고 다시 이들 정제(正帝) 밑에 한사람씩의 부제(副帝, caesarea)를 두어 제국을 4등분하여 통치하게 했다. 즉 디오클레시아누스(소아시아와 북아프리카)-갈레리우스(발칸반도), 막시미아누스(이탈리아)-콘스탄시우스(프랑스와 스페인)의 4분령 통치가 이뤄진 것이다. 결과적으로 서기 293년 4명의 황제가 제국을 분할 통치하는 형태가 됐다.

이 사분령통치를 통해 제국이 안정되자 디오클레시아누스는 자신을 신격화하는 작업을 시작하는데 모든 군인들에게 황제숭배 등 종교적 의무를 강요하자 유일신을 믿는 그리스도교인 군인들과 충돌 할 수 밖에 없었다. 신자군인들은 황제숭배를 거부하거나 아예 병영을 이탈하기도 했다.

결국 로마제국은 반역죄인이라는 국사범으로 그리스도인들을 처형하기 시작한다. 4명의 황제 중에서도 갈레리우스가 다스리고 있는 지역에서 박해가 가장 심했는데 갈레리우스는 신자 군인들의 병역에 대한 이러한 태도를 위협적으로 느껴 군부내에서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색출하도록 종용하고 마침내 303년 디오클레시아누스를 설복해 제국전체에서 신자들에 대한 색출을 시작한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을 통해 최고의 권력을 장악한 갈레리우스는 305년 디오클레시아누스와 막시미아누스를 퇴위시키고 자신과 콘스탄시우스에게 아우구스투스 칭호를 부여한다.

그리고 이들밑에 자신의 꼭둑각시인 세베리우스와 막시미아누스 다이아를 부제로 삼았다.

이때 볼모의 형태로 로마에 머물던 콘스탄티누스는 자신이 아버지의 부제가 될 것으로 믿었다가 기대에 어긋나자 몰래 황궁을 빠져나와 아버지와 합류했다가 306년 아버지 사망후 군대에 의해 황제(아우구스투스)로 추대됐다.

개종

311년 제1정제인 갈레리우스 사망후 서로마는 콘스탄티누스와 세베리우스를 무너뜨린 막시미아누스의 아들 막센시우스, 동로마는 리치니우스와 막시미아누스 다이아가 다스리는 형태가 된다.

이들 네황제들은 지리적 환경과 그리스도교에 대한 정책에 의해 동맹관계를 맺었다. 콘스탄티누스는 서로마에서 막센시우스를 물리치기 위해 리치니우스와 동맹을 맺었는데 두황제는 콘스탄시우스의 그리스도교에 대한 관용정책을 그대로 시행했다.

콘스탄시우스는 일신교적인 태양신(미트라)의 신도여서 역시 유일신교인 그리스도교에 대해 혹독한 박해중에서도 비교적 관용정책을 써왔다.

콘스탄티누스는 이후 312년 이탈리아로 출정해 막센시우스와 서로마제국의 패권을 두고 다투게 된다.

군사적으로 열세에 있던 콘스탄티누스는 로마의 티베르강 밀비오 다리에서 결정적인 전투를 치르게 되는데 전투전 콘스탄티누스가 그리스도교 신자의 신에게 기도하면서 도움을 청했을 때 공중에서 빛나는 십자가와 ‘이것을 가지고 승리하라’는 문구를 보았다. 이에 자신감을 얻은 콘스탄티누스는 그리스어로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키(X)와 로(P)로된 군기를 만들어 가지고 싸워 승리했다고 한다.

이 밀비오 전투의 승리로 콘스탄티누스는 서로마의 주인이 됐고 그리스도를 수호신으로 공경하게 된다. 고대 로마인의 신개념에서는 종교의 교의보다 신의 능력이 우선시 했으므로 그리스도의 상징으로 승리한 그가 그리스도를 수호신으로 삼은 것은 당연했다.

콘스탄티누스의 이러한 개종은 박해의 종식과 함께 그리스도교가 로마제국의 국교가 되는 길을 열어놓는 대전환점이 된다.

콘스탄티누스가 죽기직전에야 세례를 받았다는 것과 312년 이후에도 로마제국의 최고 제사장(pontifex Maximus)으로서 이교 의식을 계속했다는 점에서 그의 개종이 단순히 정치적 술수였다고 폄하하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당시 로마제국은 집집마다 수호신을 모실만큼 다신교 국가였고 제국내의 속주민들의 종교도 그대로 허용되는 상황이었던 만큼 황제 자신이 비록 그리스도교로 귀의했다고 해도 한순간에 자신의 종교를 강요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콘스탄티누스는 이러한 제국의 풍습과 문화를 고려하여 이교를 금지시키지도 않고 자신이 이교행사에 참석하기도 했지만 밀비오 전투 이후 온갖 방법으로 그리스도교를 촉진했다.

그리스도교 성직자들에게 면세(312), 십자가형 금지(315), 교회상속권한 인정(321), 주일의 공인(321) 등 이교문화와의 공존 속에 시행한 수많은 그의 그리스도교 촉진정책은 어쩌면 당시의 상황을 고려할때 마찰을 피하면서 그리스도교세를 극대화 할 수 있는 현명한 조치인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의 이러한 조치는 후에 테오도시우스 황제에 의해 그리스도교가 국가종교가 되는 기틀을 다졌다.

로마=김상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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