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리 선생 유고 ‘일본산고(日本散考)’<1>憎惡의 根源

  • 입력 2008년 7월 18일 09시 1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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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憎惡의 根源

해방 후, 1950년 일본서 초판을 발행한 世界문예사전 동양 편을 보면 문예사조 항목에 무려 26페이지가 일본문학을 위해 할애되어 있고 중국문학이 12페이지, 인도문학이 약 5페이지, 아라비아 페르샤 남방아세아가 각각 1페이지 안팎, 다음은 일본주변문학으로 묶었는데 아이누, 유구, 대만 순으로, 그 중에서도 맨 끄트머리에 조선 문학이라 하여 반 페이지를 쓰고 있다. 수록된 작품에서도 춘향전과 구운몽을 간신히 찾을 수 있었지만 이퇴계의 이름 하나, 그들에게 협력했던 한국의 대표적 작가 이광수의 이름조차 눈에 띄질 않았다.

책장에서 우연히 뽑은 책 한권으로부터 비근한 예를 들어본 것이지만 사실 이같은 일쯤은 다반사요 사례로서 두드러지는 것도 아니며 (일본에서는 대단치도 않는 일이다.) 우리 민족문화를 홀대하는 일본의 처사가 어제 오늘 시작된 것도 아니다. 신물 나게 겪어왔고 그 일에 대해서는 우리 거의가 불감증 상태다. 더러는 일본인 시각에 동조하여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도 적지 않는 듯싶다.

사실 요즘 일본에 관하여 거론한다는 자체가 일부 참신한 지식인들 귀에는 사양의 만가(挽歌)쯤으로 들리는 모양이고 민족주의자의 촌스러운 몸짓으로 보이는 모양인데 그것은 과거 강자의 논리가 아직 건재해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친일의 비난이 함축된 과거 강자의 논리운운을, 참신한 일부 지식인들은 당연히 부정할 것이다. 2차 대전 후 영토개념이 없어졌다는, 지극히 피상적 생각에 젖은 일부에서는 일본에 대한 우려를 한낱 노파심이라 하며 비웃을 수 있고 지구촌으로 이행되는 추세, 세계주의를 바라보는 시야에서는 민족주의 왜소하게 느낄 수도 있을 것이나 문제는 그러한 흐름에 편승하는 친일의 음흉함이며 일본에 대하여 그것이 선망이든 두려움의 기억이든 착각이나 환상일 수도 있고 혹은 일신의 처신을 위하여, 그 심리적 빛깔이 여하튼 이른바 새로운 친일인사에게 민족주의의 극복, 세계주의표방 같은 것은 빌려 입기에 그보다 지적이며 안성맞춤이 달리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전 일부 경향에 대한 얘기를 이 항에서 지금 하자는 것은 아니다. 우리 문화를 홀대했다 하여 감정적으로 따지자는 것도 아니다. 어떤 깨달음이라 해야할까 그것 때문에 붓을 들었고 미묘한 깨달음은 오랜 옛날 묻혀버린 시간의 수렁 속으로 나를 끌어들이는 것이었다.

어떤 깨달음이라 해야 할까, 아니, 깨달음이기보다 의혹의 연속이라 하는 것이 옳다. (왜냐하면 진실의 확신) 오랜 옛날, 있음직한 사건들, 시간에 묻혀버린 시체들이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나서 내 마음 속에서 걸어 다니는 느낌이라 해야 할까.

요즘 젊은 세대는 일제와 우리의 내력을 관념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경험자로부터 전달되는 간접경험은 (오랜, 오랜 옛날 시간 속에 묻혀버린 일들) 그런 만큼 관념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에게 일방적으로 우리가 당해왔다는 것, 따라서 우리의 원한도 일방적일 수밖에 없고 의식 깊은 곳에 물려있는 증오의 가시는 여간하여 뽑아내기 어렵다는, 이것이 세대를 불문하고 우리들 공통된 감정이며 인식이다. 한데 나는 언제부터인지 그들도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원한을 품고 있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어쩌면 그들의 의식 깊은 곳의 원한이 더 오래이며 큰 것인지 모른다는 생각. 우리가 저들에게 피해 준 일이 없고, 값진 문화를 전수했으며 나라의 기틀을 잡아주었거늘, 원한을 가질 이유가 없지 않은가, 반문해보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잠재된 과거의 열등감이 우리 민족문화를 짓이기려든다는 생각도 해보았다. 정복자의 속성이라는 꽤 관대한 생각도 해보았다. 그러나 그들의 집요함은 열등감의 발로나 정복자의 속성으로는 설명이 충분치 않았던 것이다.

한일회담의 주역들이 민족의 피 값으로 푼돈 얼마를 받아내어 역사적 치욕을 창출해 낸, 그로부터 몇 해가 지나갔을까.

일본수상 가이후가 파고다공원에 나타난 그날, 정신대에 대한 항의와 사과하라는 피켓을 들고 외치는 여성들 모습을 TV화면에서 본 일이 있다. 겨울바람에 구르는 낙엽처럼 쓸쓸한 풍경이었다. 기왕지사 철판 깔고 온 가이후는 그렇다치고 입이 마르게 애국애족을 외쳐온 지도급 인사들은 그 풍경을 어떤 심회로 바라보았을까.

전국을 뒤흔들었던 성(性)고문사건을 독자들은 기억할 것이다. 당시 투쟁했던 사람, 성원을 아끼지 않았던 시민들, 그 분들은 또 어떤 가슴으로 바라보았을까?(펜을 들고 사는 소위 작가라는 내 자신은?) 한일합방을 늑대 이빨에 찢기는 양의 비극으로 비유한다면 수많은 이 강산의 딸들이 일본병사의 화장실 역할을 했던(부끄럽다.) 일은 무엇으로 비유해야 하는지, 침묵하는 이 땅 남성들에게 묻고 싶고 만일 저 아우슈비츠의 참혹보다는 났다고 자위하는 리얼리스트가 있다면 우리는 인간임을 사양할 밖에 도리가 없을 것이다.

한사람 책임지는 자 없고 벌 받은 자 없는 그들에게 푼돈 얻어낸, 청풍당상의 그야말로 더렵혀지지 않았던 양반들, 차라리 그것은 희극이다. 혹자는 말하리라. 그 푼돈도 우리 발전의 밑천이 되었노라고. 그러나 자(尺)로는 잴 수 없고 저울로도 달 수 없는 가치도 있다. 그 가치로 인하여 우리는 인간인 것이다. 아무리 즉물적 세태라 해도 우리는 그 이상의 가치를 꿈꾸며 산다. 물질도 있어야 하고 계산도 해야 하지만 삶의 존귀함도 있어야 한다. 그것은 심장이 있어야 인간의 존엄, 문화의 본질, 인간다운 연유이기도하다.

물질과 계산에 편중한 일본인들, 그들은 지난날을 잊는 듯 부담 없이 이 땅을 밟는다. 어디서든 흔히 마주치게 되는 일본인, 그러나 상투적인 그들 표면보다 내면에 숨겨졌을 서늘한 칼날이 왜 자꾸 가슴에 와 닿는 걸까. 일제 때 미신을 소탕한다 하여 무녀들을 잡아가두었던 그네들이 한편으론 조선의 맥을 끊겠다고 봉우리마다 쇠기둥을 박았던 섬뜩한 그 일이 연상되면서 어찌하여 그들은 그토록 광란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까. 그 광란의 뿌리는 무엇일까? 하기는 모순에 대하여 갈등을 느끼지 않는 순발력이 강한 민족이긴 하지만. 문예사전의 경우도 결코 이성적이지는 못했다.(공평성을 잃고 있다.)

조선 문학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고 전공한 사람도 없었다, 할 수도 있을 것이지만 그들이 얼마나 많은 우리의 역사적 자료를 훑었는가, 철저하게 치밀하게 경의를 표할만큼. 식민지사관은 바로 그와 같은 그들 노력의 산물 아니었던가. 나는 결코 일본주변문학을 집필한 다케시다 가즈마(竹下數馬)라는 사람이 의도적으로 그랬을 것이라 생각지는 않는다. 설혹 출판사의 방침이었다 해도 그것엔 관심 없다. 모두 지엽적인 것이며 개인이나 출판사의 편견이기보다 일본사회 전반에 걸쳐 오랜 세월 심어진 선험적인 것, 무의식 속에 깊이 박힌 것, 바로 그것에 문제가 있을 것 같다. 요인이 없으면 부인이나 시인은 성립되지 않는다. 일본은 아이누, 유구, 대만에 대해서는 부인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적어도 조상에 관한 한, 민족원류에 관해서는. 그들은 부인한다. 원류를 부인하면서 한국의 모든 것을 부인한다. 집요하게 광적으로.

어떤 우연한 좌석에서 중앙대학교에 계시는 유인호 교수가 말씀하시기를 "옛날 지독한 反體制가 일본으로 건너갔나부다" 모두들 웃었지만 나는 내심 놀랬다. 피로 점철된 그들의 역사, 잔인무도한 그들 행적을 보며 한반도에서 추방된 흉악한 죄인들이 그들 조상인가보다 하고 뇌까린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 생각하기를 도대체 그 아득한 옛날 어떤 부류의 한민족이 일본열도로 건너갔을까? 식민의 경우도 그러하지만 자고로 넉넉한 사람이 내 땅 버리고 떠날리 없고 사연 없이 떠날리 없다. 하물며 거센 파도에 일엽편주를 띄우고, 영원한 이별이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일본인종에 대하여 일본 사서에는 결론이 없다. 이노우에 키요시(井上 淸) 저 '日本의 역사'에서 인종에 관한 것을 발췌해보면 - 쇼오몬 시대, 일본인종의 원형이 형성되었을거로 보고 있고 후에 한국에서 높은 야요이(彌生) 문화가 들어와 지배했는데 신래인종이 조몬시대인을 멸망시켰는지 혼혈이 되어 인종적 특성이 말살되었는지 그러나 조몬시대인에게 흡수되었으리라는 것이 일본 인류학자들의 통설이라 한다. 그러면 조몬시대인과 구석기 시대인은 인종적으로 연속된 것인가, 그것은 의문으로 남겨놨고, 만약에 일본열도가 대륙의 일부였다면 조선해협이나 중국남부 어딘가에서 육교를 통하여 대륙과 연결이 되었을 것이며 일본어의 경우, 친족관계의 가능성이 있는 것은 오직 한국어뿐, 친족으로 가정한다면 공통의 조어에서 갈라진 시기를 언어연대학으로 추정해서 조몬시대 중기이전일 것이다-

대강 이상인데 진보적 학자로 알고 있는 이노우에 씨에게서도 역사의 애매한 부분에 서둘러 의문표로 마감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공통의 조어에 관해서는, 그 근거가 확실해지면 야요이 시대(彌生時代) 훨씬 이전부터 한반도 인종이 그곳에 있었다는 얘기가 되고 일본열도 역시 대륙에 연결된 것으로 가정한다면 지리적으로 한반도가 보다 가까운데 먼 중국남부를 들먹일 필요는 없다. 사실 요즘 분분한 역사적 확신을 일본은 애써 묵살하고 있다. 한낱 속설로 내버려 두고 있는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일본은 도래인이라 표현하는 한족(韓族)이 그들 지배계급을 형성했던 것을 부정하고 싶은 것이 그들의 심정일 것이며 가능하다면 일본인종을 일본열도 고유의 인종이기를 바라는 것이 본심일 것이다. 사족 같은 얘기지만, 사족이기보다 필자의 감성적인 것이라 해야 옳고 이 방면에 연구가 깊은 분들께 다소 켕기는 구석이 없지도 않지만 가령 "구다라"(百濟)는 강하한다는 일본말의 "구다루"를 연상하게 되고 구다루는 그들의 아마노다까하라(天の高原)를 연상하게 한다. 아마노이와도(天岩戶)는 또 어디인가 환상의 섬 이어도를 연상하게 한다. 일본의 神樂動作에 아지메(阿知女)라는 말이 있다.

유래는 아마데라스(天照)가 흉악한 동생 스사노오(素¤鳴)을 피하며 아마노 이와도(天岩戶)에 숨었을 때 아마노우즈메(天細女)가 아마데라스(天照)를 달래기 위해 춤을 춘데서 비롯된다. 과연 아지메는 춤동작의 명칭일까? 그보다 아마노우즈메(天細女)의 별칭으로 그녀는 일행중 누군가의 아지메(淑母)일 수도 있고 성년여성 통칭인 아지메일 수도 있는 일 아닐까? 신대(神代)에 나오는 神들 이도 그렇다. 天照, 天細女, 天忍穗耳, 天若日子, 이밖에도 아마(天)가 붙은 이름이 수월찮게 있다. 이들은 다까아마하라(高天原)에서 내려왔다 한다.

그러면 신라에서 망명한 王子 아마노히호코(天日槍)는? 여기서 다까아마하라(高天原)가 한반도와 무관하지 않으리라는 의문이 생긴다. 얼핏 듣기로 어느 학자께서도 그런 見解를 말했다 하는데, 이밖에도 스사노오 (素¤鳴)이 신라를 내왕하며 선재(船材)를 구해놨다는 등 수염이 가슴팍까지 자라는 동안 모국을 그리워하며 통곡을 했다는 기록, 이런 역사의 파편들이 나를 사로잡고 그 당시의 풍경이 떠오른다. 무리를 짓고 바닷가를 우왕좌왕하는 추방자들의 모습, 바다를 바라보는 절망의 눈동자, 한숨과 눈물과 절규하는 모습들이 마치 영화의 한 씬처럼 클로즈업되어 다가온다. 망명자들, 소위 반체제의 지도자들이 절치부심, 권토중래를 다짐하며 응어리진 유민들을 규합하는 광경이 떠오르기도 한다.

사정은 다르지만 우리는 지금 남북분단의 비극을 겪고 있다. 해방 후 50년이 못되는 세월인데 동족이 상쟁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6. 25 동란을 겪었다. 물론 쌍방간 힘의 구조에 길들여진 것이지만 동족 간에 패인 깊은 골, 강한 거부와 낯설음, 우리가 통일을 초조하게 성급하게 서두는 마음도 영원히 이별하고 타민족이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지금에 와서 우리와 일본이 동족 어쩌고 하는 것도 실은 진부한 얘기다. 역사연구의 영역일 뿐, 터럭만큼의 동질감도 없는 마당에 감상에 젖을 필요는 없다. 서로 이해하게 되면 좋고, 다만 인류라는 자각으로 나를 다스려가며 앞으로 이글을 써 나갈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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