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Reformation,]

16~17세기 유럽에서 로마 가톨릭 교회의 쇄신을 요구하며 등장했던 개혁운동이다.

이를 통해 오늘날 프로테스탄트라 부르는 교파가 생겼다. 이 운동은 광범위하게 벌어졌는데, 특히 17, 18세기 영국에서 일어난 퓨리터니즘도 넓은 의미로는 이 운동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의견이 대두되었다.

로마 가톨릭교회는 아비뇽 교황의 대립으로 생긴 분열 결과, 14세기경부터 그 안팎에서 쇠퇴의 기미를 보이고 있었다. 이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공의회() 운동이 활발히 추진되어 피사·콘스탄츠·바젤 등지에서 공의회가 열렸으나, 문제의 해결을 보지 못한 채 무위로 끝났다.

한편, 프랑스·영국 등 유럽 각국은 근대 국민국가로의 길을 걷기 시작하여 중세적 그리스도교 세력은 점차 쇠퇴해 갔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종교개혁은, 교회의 혁신운동이지만 근대국가의 성립이라는 정치적 변혁과 밀접한 함수관계에 있었다.

본격적인 종교개혁은 M.루터에 의해서 비롯되었으나 루터 이전에도 개혁의 선구자로 불리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로는 민중 사이에서 성서적 신앙을 인도한 프랑스의 발도, 롤러드파()를 이끌던 영국의 위클리프, 위클리프의 사상을 이어받아 독립운동을 일으킨 보헤미아의 후스, 윤리적 쇄신을 시도하였다가 끝내 순교한 피렌체의 사보나롤라를 들 수 있다. 그러나 르네상스적 인문주의와 종교개혁과는 본질적으로 성격을 달리한다.

즉, 르네상스적 인문주의는 예술적이고 귀족적이어서 참으로 역사를 변혁할 힘을 갖지 못하였다. 이와는 달리 종교개혁운동은 깊이 민중의 마음을 포착하여 역사를 움직였다. 마찬가지로 근대의 서곡이라 할 르네상스와 종교개혁과는 그 출발점과 역사상 미친 영향면에서 볼 때 근본적으로 다르다.

[종교 개혁의 역사]

연도

사건

1483

루터, 아이스베른에서 태어남

1484

츠빙글리 탄생

1509

칼뱅 태어남

1513

루터 '하느님의 뜻' 발견

1517

루터, <95 개조 의견서> 내놓음

1519

루터, 라이프치히에서 에크와 논쟁

1520

루터에 대한 파문협박장 공포

1521

루터에 대한 정식 파문장 공포.
4월 루터, 보름스 제국의회에 출두하고, 귀로에 바르트부르크 성에 보호되다. 소르본 대학 신학부, 루터를 이단()으로 단정, 이어 르페브르의 저서에서도 똑같은 선고를 함.

1522

루터, 신약성서의 독일 번역판 출판

1523

츠빙글리, 취리히에서 개혁운동을 개시.
취리히 토론 열림

1524

독일, 농민전쟁 시작됨

1525

루터 결혼. 에라스무스와의 <자유 의지> 논쟁. 모에서 프랑스의 개혁운동단체에 탄압.

1526

제1차 슈파이어 제국의회 개최

1529

제2차 슈파이어 제국의회 개최. 이 때부터 '프로테스탄트'란 명칭이 쓰이기 시작함. 성찬문제에 관해서 루터와 츠빙글리 마르부르크에서 회담함

1530

아우크스부르크 제국의회 개최.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이 작성되어 루터파의 기본 신조가 되다. 그러나 로마 교회와의 타협 실패

1531

슈말칼덴 동맹 결성. 츠빙글리 전사함

1534

헨리 8세. '성직자 임명법' 및 '수장령()'을 공포하여 영국 교회를 로마 교회로부터 결정적으로 분리시킴

1535

퀸스터에서 재침례파() 괴멸

1536

칼뱅, 《그리스도교 강요()》를 출판, 파렐의 요청으로 제네바의 개혁운동에 참가

1538

반대파의 책동으로 제네바의 개혁운동은 일시 좌절되고 파렐은 뉴샤테르로, 칼뱅은 스트라스부르에 감

1540

칼뱅, 또다시 제네바에 귀환

1545

트리엔트 공의회 개시됨(1563년까지)

1546

루터 죽음

1572

성() 바르톨로뮤의 학살

1620

메이 플라워호()에 의한 필그림(청교도의 일파)의 신대륙 이주

1640

청교도혁명 개시됨

참조항목

참조항목
95개조 의견서 1517년 10월 31일 루터가 면죄부(免罪符) 판매에 항의하여 비텐베르크성(城) 교회 정문에 내붙인 95개조의 의견서.
근대사회 봉건제사회(封建制社會)가 끝난 뒤에 나타난 사회.
존 녹스 16세기 영국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자·역사가. 퓨리터니즘 창시자의 한 사람이며 장로주의의 선구자이다. 종교전쟁에서 개혁파가 승리하자, 개혁파 교회 확립을 위해 노력했다. 그의 저항권 신수론은 개혁파 교회의 이론적 지주가 되었다.
비텐베르크협약 1536년 종교개혁 운동의 통일을 기하기 위하여 맺은 협약.
청교도혁명 1642년부터 1649년까지 영국에서 왕당파와 의회파 사이에 벌어진 내전.
프로테스탄트교회 16세기 종교개혁을 계기로 로마 가톨릭에서 분리하여 성립된 다양한 그리스도교의 분파를 총칭하는 말이다.
마르틴 루터 독일의 종교개혁자이자 신학자. 면벌부 판매에 '95개조 논제'를 발표하여 교황에 맞섰으며 이는 종교개혁의 발단이 되었다. 신약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하여 독일어 통일에 공헌하였으며 새로운 교회 형성에 힘써 '루터파 교회'를 성립하였다.
면벌부 가톨릭 교회가 신자에게 고해성사 이후에도 남아있는 벌의 일부 혹은 전체를 사면해 주었음을 증명하는 문서이다. 중세 말 금전적인 목적으로 면벌부가 남용되면서 비난받았으며 이는 종교개혁에도 영향을 끼쳤다.
스웨덴 북유럽 스칸디나비아 반도 동쪽에 있는 입헌군주제 국가이다. A.D.10세기에 최초의 통일 왕국이 성립된 이후 1397년부터 126년 간 덴마크, 노르웨이와 함께 칼마르(Kalmar) 동맹국을 결성, 주도권 다툼에 나서기도 했고 1849년부터 입헌군주제가 시작되었다.
스위스 유럽 중앙부에 있는 나라로, 중세에 프랑크왕국, 신성로마제국의 일부가 되었다가 1291년 스위스 지역의 3인 대표가 국가의 기원이 된 영구동맹을 맺었다. 1648년 베스트팔렌조약에 따라 독립을 승인받았다.
그리스도교 1세기에 태어난 나사렛 예수를 그리스도(메시아)로 믿는 종교.

1 . 독일

독일 종교개혁의 횃불은 1517년 10월 31일 아우구스티누스회의 수도사이면서 신학교수인 루터가 <면죄부()에 관한 95개조 논제>의 항의문을 비텐베르크대학의 성()교회 정문에 게시함으로써 올려졌다. 이 항의문은 마인츠의 대주교() 교회의 알브레히트가 재정적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판 면죄부에 대해 루터가 그 성사적() 효과를 신학적으로 문제삼은 것이었다. 이것이 루터 자신의 예상을 넘어 유럽 전체에 파급되는 대운동으로 발전한 것이다.

루터가 이와 같이 가톨릭교회의 근원을 이루고 있는 교리를 근본적으로 비판할 수 있었던 것은, 이미 4,5년 전 그가 수도원 생활의 악전고투 속에서 바울로의 ‘하느님의 뜻’이라는 복음을 재발견하였기 때문이다. 이로써 그는 인간의 영혼 구원이란 인간의 선행에 따른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만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확신하기에 이른 것이다. 따라서 종교개혁의 가장 깊은 근원은 구원문의 정확성을 둘러싼 루터의 내적 싸움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95개조 논제>는 경제적으로 로마에 의해 많은 수탈을 당하여 온 독일 국민의 지지를 얻게 됨으로써, 문제가 일개 수도사가 제기한 신학논쟁에서 독일 국민 전체의 정치적 ·경제적인 문제로 확산되어 갔다. 당초 교황 레오 10세는 이 문제를 경시하였다가 문제의 해결이 어렵게 되자 유화책을 강구하기도 하였으나 루터는 1519년의 J.에크와의 라이프치히 논쟁 때 결정적으로 가톨릭교회와 정면대결하기에 이르렀다. 그것은 이 논쟁에서 루터는 보헤미아의 후스를 본떠 교황과 교회회의의 가류성()을 주장하고 그 권위의 절대성을 부정하였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1520년 6월 드디어 루터에 대한 파문()이 단행되었다.

이어 1521년에 루터는 보름스 국회에 소환되어 황제의 심문을 받았는데, 여기에서도 그는 자신의 신앙을 관철하였다. 그는 심문을 받고 돌아가다 작센의 선제후(:중세 독일, 곧 신성로마제국의 제후 가운데 황제의 선거에 관여할 수 있었던 7명의 제후) 프리드리히 현공()의 호의로 바르트부르크성()에 보호되어 1년에 걸친 체재 중 신약성서의 독일어 번역을 완성하였다. 이 루터역 성서는 문학상으로도 중요한 역할을 하여 독일 국민의 정신적 유산이 되었다.

그러나 루터가 바르트부르크에 머물고 있던 사이에 비텐베르크에서는 1521년 카를슈타트(본명은 Andreas Bondenstein)가 지도하고 있던 과격분자들이 급격한 혁신운동으로 이른바 ‘비텐베르크소요’를 일으키고 있었다. 미사의 폐지, 평신도에 대한 성배() 부여, 성상() 파괴 등은 개혁운동의 논리적 귀결이라 하나, 원래 보수적이었던 루터는 이를 급속하게 실행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이 소요는 루터가 바르트부르크에서 돌아온 뒤 진정되었지만 그 여파는 1522년의 ‘기사()의 난’ 농민전쟁(1524∼25)으로 발전하였다. 이 무렵부터 개혁운동은 제2단계에 들어가 루터는 한편으로는 로마 가톨릭교회와 싸우면서, 한편으로는 재세례파()와 싸우는 양면작전을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그는 에라스뮈스와의 ‘자유 의지론’을 둘러싼 논쟁을 통해 인문주의와도 결별을 하여야만 되었다.

당시 유럽의 정치정세는 복잡하여서 신성()로마 제국의 황제로서 독일과 에스파냐를 지배하고 있던 카를 5세는 로마 교황과 손을 잡고 근대국가로서 급속히 부상한 프랑스와 싸워야 하는 한편, 동방으로부터의 투르크의 침입을 경계하여야만 될 어려운 입장이었다. 이 때문에 카를 황제는 독일 국내 제후()의 지지를 필요로 하여, 루터에게서 일어나기 시작한 개혁운동을 일방적으로 억제만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독일 국내의 정치세력을 양분하는 결과가 되었다.

황제는 1530년 아우크스부르크 국회에서 양파의 화해를 시도하였으나 실패로 돌아가, 프로테스탄트측의 제후와 도시는 1531년 슈말칼덴 동맹을 결성하고 하나로 뭉쳐서 황제 및 교황측과 대결함으로써 이윽고 독일은 종교전쟁에 이르기까지 장기간의 내전에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그러나 이 사이 루터파 교회는 점차 발전하여, 루터가 죽은 뒤 ‘순정() 루터파’와 멜란히톤을 지지하는 ‘필리피스텐(필립파)’으로 분열되기도 하였으나, 독일 각지에서 꾸준히 성장하면서 확산되어 갔다.

참조항목

참조항목
요한 에크 독일의 가톨릭 신학자. 잉골슈타트대학의 신학부 교수. 종교개혁에 가장 적극적인 반대론자였다.
얀 후스 체코의 종교 개혁자로서 성서를 유일한 권위로 강조하고 고위 성직자들의 세속화를 강력히 비판하였다. 또한 체코 민족운동의 지도자로서 보헤미아의 독일화 정책에 저항했다. 1414년 콘스탄츠 공의회에 소환되어 화형에 처해졌다.
슈말칼덴동맹 16세기 중부 독일의 슈말칼덴에서 맺은 독일 그리스도교 세력의 방위동맹.
마르틴 루터 독일의 종교개혁자이자 신학자. 면벌부 판매에 '95개조 논제'를 발표하여 교황에 맞섰으며 이는 종교개혁의 발단이 되었다. 신약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하여 독일어 통일에 공헌하였으며 새로운 교회 형성에 힘써 '루터파 교회'를 성립하였다.
면벌부 가톨릭 교회가 신자에게 고해성사 이후에도 남아있는 벌의 일부 혹은 전체를 사면해 주었음을 증명하는 문서이다. 중세 말 금전적인 목적으로 면벌부가 남용되면서 비난받았으며 이는 종교개혁에도 영향을 끼쳤다.

2 . 스위스·프랑스

종교개혁 기념물
종교개혁 기념물

루터의 개혁운동이 면죄부에 대한 신학적 문제 제기, 보다 근본적으로는 ‘하느님의 뜻’에 따른 복음의 신앙이라는 종교 고유의 문제로부터 비롯된 데 반해서, 츠빙글리에 의해서 시작된 스위스의 개혁운동은 성직자의 결혼, 육식의 자유, 화상() 철거 등 휴머니즘적 동기에 바탕을 둔 가톨릭적 미신타파 운동으로 일어났다. 여기에 용병제() 폐지와 독립운동이라는 정치적 성격이 첨가되었다.

츠빙글리는 종군사제()로서 스위스 용병제의 부패와 비극을 체험하였다. 또한 그는 성지순례()나 면죄부 판매 등의 부패상을 낱낱이 보고 교회개혁의 필요성도 통감하였다. 그가 처음으로 개혁운동의 기치를 든 것은 1523년의 ‘취리히 토론’이었는데, 이로써 그는 취리히의 콘스탄츠 주교구()로부터의 독립과, 여러 종교적 미신으로부터의 해방을 위한 싸움을 개시하였다. 또한 그는 세속의 정치적 권위는 하느님으로부터 직접 유래하는 것이지, 교회를 매개로 해서 부여된 것이 아니라는 속권독립론()을 주장하였다.

츠빙글리의 주도하에 개혁이 이루어진 교회는 뒤에 제네바의 칼뱅파() 교회와 합동해서 개혁파 교회로 불리게 되었는데, 그 특색은 성서주의()와 간소한 예배에 있었다. 그에 비해 루터파 교회는 성화상, 기타 예배양식에 있어서는 가톨릭적 요소를 존속시키고 있다. 양파의 차이점과 분리는 1529년의 마르부르크 회담에서의 논쟁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 회담은 독일과 스위스의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결속을 시도하기 위해 이미 의견을 달리하고 있었던 성찬문제()에 관해서 루터와 츠빙글리가 회담한 것이었는데, 결국 합의를 보지 못하고 루터는 그리스도의 성체()의 현존(가톨릭적 해석)을 고수하였고, 츠빙글리는 그 상징설(프로테스탄트적 해석)을 양보하지 않았다. 이로써 루터파와 개혁파가 형성됨으로써 유럽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2대 세력이 되었다.

프랑스의 종교개혁은 르페브르, 파렐 등의 인문주의자들로부터 시작되었다. 르페브르는 루터에 앞서 성서적 개혁사상을 품고 있었으나 루터의 개혁사상이 프랑스 국내에 유입된 이래 소르본대학 신학부를 중심으로 찬부 양론이 격렬하게 일었다. 그러나 1521년 4월 소르본측은 결국 루터가 이단임을 단정하고 이때부터 프로테스탄트에 대한 탄압이 시작되었다. 1525년 파리 교외 모에서 있었던 르페브르를 중심으로 하는 그룹의 모임이 탄압 해산되자, 지도자들은 각지로 흩어져 이 가운데 파렐은 제네바에 가서 개혁운동을 일으켰다. 그의 개혁운동은 뒤에 칼뱅에게 계승되었는데, 이 칼뱅을 통해 세워진 제네바 교회가 프랑스의 프로테스탄트 교회를 지도하게 된다.

칼뱅은 처음에 에라스뮈스를 숭배하는 인문주의자였으나 루터의 개혁사상에 끌려 복음주의로 전환하였다. 그는 1536년 《그리스도교 강요()》를 출판함으로써 일약 복음주의의 지도자로 부상하였고, 탄압을 피해서 스위스의 제네바에 자주 들렀다가 파렐의 설득으로 개혁운동에 가담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최초의 개혁운동은 복음적 신앙의 자유가 방종으로 오해되어, 개혁운동자들을 정치적 ·도덕적으로 민중을 속박하는 자들로 간주한 세력들의 반대에 부닥쳐 실패하였다.

칼뱅은 한때 스트라스부르에 피신하여 그곳에서 프랑스인 난민교회의 목사로 일했으나 1540년 초청을 받고 다시 제네바로 갔다. 이후 그는 죽을 때까지 제네바에 머물면서 제네바를 프로테스탄트의 일대 근거지가 되게 하였다. 칼뱅은 루터의 의인론(:오직 믿음으로만 의로워진다는 주장)을 계승하였는데, 이 점에서는 두 사람 모두 복음주의의 기반에 서 있었다. 그러나 칼뱅은 구원을 받은 자는 하느님의 도구로서, 하느님의 영광을 빛내도록 적극적으로 활동하여야 할 것(실천주의)임을 강조한 점에서는 루터와 다른 특색을 지닌다.

이와 같은 신앙은 뒤에 퓨리터니즘(청교도주의)에서 현세의 직업에 충실함으로써 스스로 하느님의 예정을 확정하려 하는 독특한 직업윤리를 낳았다. 이같은 직업관은 근대 자본주의 성립에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참조항목

참조항목
파렐 스위스의 종교 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설교에 감명을 얻어 설교자로서 각지를 돌아다녔다. 칼뱅과 함께 제네바, 로잔에서 종교 개혁을 위해 활약했다. 1538년 제네바에서 추방되자 뇌샤텔을 중심으로 하여 프랑스 종교개혁에 힘썼다.
장 칼뱅 프랑스의 종교개혁가. 제네바에서 종교개혁에 성공하고 신정정치적 체제를 수립하였다. 저서에 복음주의의 고전이 된 《그리스도교 강요(綱要)》, 《로마서 주해》 등이 있다.
츠빙글리 스위스의 종교개혁가. 취리히 대성당의 설교자로 일하며 체계적인 성경강해로 명성을 날렸다. 루터의 영향으로 취리히의 종교개혁에 나섰다. 가톨릭을 고수하는 주(州)들과의 전투에 종군목사로 참전했다가 카펠 전투에서 전사했다.

3 . 영국

영국은 위클리프 때부터 로마 교황의 세력권으로부터 독립하려는 운동이 있었는데, 헨리 8세의 이혼문제를 계기로 완전히 가톨릭 교회로부터 이탈하여 독자적인 길을 걷게 되었다. 이 이혼문제에는 국왕의 개인적 사정뿐만 아니라 내외의 정치적 ·종교적 정세가 복잡하게 엉켜 있었다. 그리하여 1534년의 ‘수장령()’에 따라 영국은 국왕을 최고관리자로 하는 독립된 교회가 되었는데, 그 교의 내용은 여전히 가톨릭적이었다.

다음의 에드워드 6세 시대에 들어서자 개혁정책이 단행되어 교회는 현저하게 칼뱅주의 경향을 띠게 되었다. 그러나 메리의 치하에는 다시 가톨릭교회에 대한 복귀정책이 취해져 많은 목사와 신도들이 박해를 받았다.

이같이 영국은 국왕이 바뀔 때마다 그 교회체제에도 크게 변동이 있어 오다가, 엘리자베스 1세 치하에 국운이 융성해지면서 일단 안정을 되찾아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중간입장인 중도적 방향을 걷게 되었다. 그러나 엘리자베스의 철저하지 못한 개혁에 불만을 품은 청교도들은 장로주의()의 스코틀랜드에서 제임스 1세를 맞이하여 보다 철저한 개혁의 실시를 청원하였으나 이들의 희망은 받아들여지지 않고 오히려 탄압을 받았다.

오랫동안 억압되어 있었던 개혁에 대한 기대는 잉글랜드 대 스코틀랜드의 전쟁을 계기로 촉발하여, 드디어 1649년 찰스 1세의 처형을 정점으로 하는 청교도혁명에 이르렀다. 이 혁명은 크롬웰의 주도하에 수습되었으나 이 혁명을 계기로 해서 많은 프로테스탄트파가 생겼다. 오늘날 미국의 프로테스탄트 교회는 이 청교도혁명으로 생긴 여러 파를 근간으로 하고 있다.

참조항목

참조항목
위클리프 영국의 선구적 종교개혁자. 교황에 대한 공세(貢稅)를 반대하고 특히 교회령 재산에 대해 공격하였다. 성직자의 악덕을 비판하는 등 교회개혁 운동에 앞장섰다.
청교도혁명 1642년부터 1649년까지 영국에서 왕당파와 의회파 사이에 벌어진 내전.
프로테스탄트교회 16세기 종교개혁을 계기로 로마 가톨릭에서 분리하여 성립된 다양한 그리스도교의 분파를 총칭하는 말이다.

4 . 의의

종교개혁은 루터의 ‘하느님의 뜻의 발견’에서 비롯되는 그리스도교의 혁신운동이었으나, 정치 ·경제 ·사회 각 분야에서도 세계적으로 크게 영향을 미쳤다. 이로써 근대 세계와 근대인이 탄생하였다. 종교개혁 후에는 계몽주의()가 일어나, 언뜻 비종교적 합리주의가 근대사회의 특징이 된 것 같이 보였지만, 근대인을 ‘마술’에서 진정으로 해방시킨 것은 단순히 자연과학이 아니라 세계에 대한 합리적 ·과학적 태도를 표출한 종교개혁의 정신이었다.

참조항목

참조항목
계몽사상 17세기 후반에 시작되어 18세기 프랑스에서 전성기를 이룬 사조이다. 신(神)이 아닌 인간의 이성(理性)에 의해 의식이 형성되어야 한다는 사상이며, 프랑스혁명의 사상적 배경이 되었다.
마르틴 루터 독일의 종교개혁자이자 신학자. 면벌부 판매에 '95개조 논제'를 발표하여 교황에 맞섰으며 이는 종교개혁의 발단이 되었다. 신약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하여 독일어 통일에 공헌하였으며 새로운 교회 형성에 힘써 '루터파 교회'를 성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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