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비아[Libya]

아프리카 북부 해안에 위치한 국가이다. 1912년 트리폴리타니아와 키레나이카가 합쳐져 리비아가 되었지만 이탈리아의 식민지배를 받게 되었고 1951년 국제연합(UN)에 의해 트리폴리타니아, 키레나이카, 페잔이 리비아 연합왕국으로 독립하였다. 1969년 공화국이 되었다. 2011년 시민군에 의하여 카다피 정권이 무너졌으며 리비아 과도국가위원회(NTC)의 정부 기구가 출범하였다.
정식명칭은 대사회주의 인민 리비아 아랍국(Great Socialist People's Libyan Arab Jamahiriya)이다. 동쪽으로 이집트, 수단, 서쪽으로 튀니지, 알제리, 남쪽으로 차드, 니제르와 국경을 접하고 북쪽으로는 지중해에 면한다. 2006년 3월 헌법상 국가원수직인 전인민위원회 서기에 알바그다디 알리 알마무디(al-Baghdadi Ali al-Mahmudi)가 취임했지만, 1969년 쿠데타로 집권한 카다피가 2011년 시민군에 의하여 축출될 때까지 최고 지도자로 있었다. 2011년 시민군은 리비아 과도국가위원회(NTC)의 위원장으로 무스타파 압둘 잘릴을 선출하였으며 시민군과 카다피군의 내전이 2월 15일부터 10월 20일까지 지속되었다. 테러국가로 지목되어 서방국가들로부터 경제 제재를 받아왔는데 1999년 이후 아프리카 각국의 내전 중재자로 활동하는 등 태도를 바꾸고 서방국가들과도 관계를 개선하였다. 행정구역은 25개 자치시(baladiyah)로 이루어져 있다.

 

시르테라스라누프브레가베이다알자우프투브루크가다메스가트사바가리안미스라타리비아벵가지알쿰스트리폴리

참조항목

참조항목
디나르 화폐 단위의 하나.
트리폴리 리비아의 수도.
무아마르 알 카다피 리비아의 군인, 정치가. 1969년 쿠데타로 집권하였으며, 2011년까지 42년간 장기집권했다. 이슬람근본주의, 사회주의, 범아랍주의를 융합한 아랍공동체 건설을 주장하였으며 인민직접민주주의라는 명분을 앞세워 의회제와 헌법을 폐지하고 석유 등 국가기반시설을 국유화하여 독재권력을 강화했다. 2011년 장기집권과 철권통지에 반발해 일어난 반정부 시위로 권좌에서 물러나 은신 중 사살되었다. 저서로 《녹색서》가 있다.
아랍어 셈어족(語族)에 속하는 언어.
트리폴리타니아 리비아 북서부를 차지하는 지방.
키레나이카 리비아 동부의 지방명이자 1970년대 초까지 리비아의 주(州)였던 곳.
페잔 북아프리카의 고원 ·사막 지역.

1 . 자연

리비아는 사하라사막의 일부인 리비아사막이 전 국토에 걸쳐있다. 전체 면적 중에서 경작 가능지는 1.03%, 농경지는 0.19%, 사막 등 기타 98.78% 이다(2005년). 사람이 거주할 수 있는 땅은 총면적의 6.8%에 불과하다.

시드라만()에 면하는 서부의 트리폴리타니아 지방과 자발·아흐다르산맥이 있는 동부의 키레나이카 지방은 지형적으로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서부 트리폴리타니아 지방은 평탄한 해안평야에서 남쪽으로 갈수록 해발고도가 높고 기복이 많은 고원()이 되고, 남부의 페잔 지방에는 대규모 오아시스가 산재하는 저지가 동서로 가로놓여 있다. 더 남하하면 해발고도 3,500m를 넘는 산지가 된다. 동부 키레나이카 지방의 내륙은 리비아사막으로 작은 오아시스들이 산재하는 평탄지를 이루고 남단부에는 2,000m 이상의 산지가 있다.

리비아는 국토가 광대하고, 급격하게 높은 산이나 산맥 등 지형적 장벽이 없어 지중해와 사막기후로부터 직접적인 영향을 받으므로 일기변화가 매우 심한 편이다. 연강수량은 해안에서 500mm에 달하나, 내륙에는 거의 비가 내리지 않고 와디(wadi)가 있을 뿐 하천이 없는 것이 특색이다. 여름과 겨울의 기온 차가 심하고 내륙지역에서는 세계 최고기온인 58℃를 기록한 바 있다.

참조항목

참조항목
사하라사막 아프리카 대륙 북부에 있는 사막.
리비아사막 아프리카 북부 사하라사막의 동부를 이루는 광대한 사막.
트리폴리타니아 리비아 북서부를 차지하는 지방.
아흐다르산맥 리비아 북동부에 있는 산맥.
키레나이카 리비아 동부의 지방명이자 1970년대 초까지 리비아의 주(州)였던 곳.
페잔 북아프리카의 고원 ·사막 지역.
오아시스 사막과 같은 건조지역의 특정한 위치에서 물 공급이 지속적으로 일어나 외부와 단절된 하나의 식생을 이루는 곳.
지중해성기후 온대기후의 일종으로, 겨울에는 온난한 우기가 되고, 여름에는 고온의 맑은 날씨가 계속되는 건기가 된다. 유럽 지중해 연안, 북아메리카의 캘리포니아주, 남아메리카의 칠레 중부, 남아프리카공화국 연안 등에 분포한다.
사막기후 건조기후 중 사막이 나타나는 기후.
와디 아랍어로 '하곡(河谷)'이란 뜻이며, 사하라, 아라비아의 건조지역에 있는 간헐하천을 말한다. 보통 마른 골짜기를 이루어 교통로로 이용되나, 호우가 내리면 홍수 같은 유수가 생긴다.

2 . 주민

인구 1000명 당 출생율은  26.09 명, 사망율은 3.47 명, 유아사망율은 22.82 명이다. 기대수명은 76.88세로서 다산소사형의 인구 구조를 보인다.리비아의 원주민은 베르베르인()이었지만 아랍인 침입 이래 두 종족의 혼혈이 이루어져 이들이 총인구의 97%를 차지하게 되었다. 공용어는 아랍어()이고, 베르베르어·영어·이탈리아어도 일부 사용된다. 국교는 이슬람교(97%)이며, 대부분이 수니파()이다. 그밖에 3개의 가톨릭교구가 설치되어 있으며 1999년 말 현재 약 5만 명의 신자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문맹율은 17.4%이다. 투르크 점령기간에는 사하라 횡단의 노예무역이 성한 탓으로 흑인과의 혼혈이 이루어졌는데, 현재도 트리폴리타니·페잔을 중심으로 약 3만 5000명의 흑인이 살고 있다. 그들 역시 아랍어를 쓰고 이슬람교를 믿는다. 그밖에 유대인·이탈리아인·그리스인들이 많이 살았는데, 1969년 이후 거의 귀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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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니파 이슬람의 가장 큰 종파이자 정통파로서 예언자 무함마드의 언행인 수나(Sunnah)를 따르는 사람을 의미한다.
아랍어 셈어족(語族)에 속하는 언어.
이슬람교 7세기 초 아라비아의 예언자 무함마드가 완성시킨 종교.

3 . 역사

리비아에는 오래 전부터 유목민 베르베르인()이 살았으나 지중해 연안부는 기원전에 페니키아인, 카르타고인, 그리스인, 로마인들의 식민지가 되었다. 641∼642년 아랍인의 서진세력(西)에 정복된 뒤부터 이슬람 문화권이 되었으며 16세기에는 오스만투르크 세력이 이 지역에 뻗쳐 19세기까지 통치하였다.

1911년 이탈리아와 투르크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자 이탈리아군()이 트리폴리타니아키레나이카에 상륙했으며, 뒤이어 투르크가 발칸전쟁에서 제1차 세계대전으로 돌입하자 이탈리아는 1912년부터 두 지역을 하나의 식민지로 만들고 리비아라고 불렀다. 제1차 세계대전 때부터 이탈리아에 대한 민중의 저항운동이 거세게 지속되었으나 파시스트의 압정이 심했고, 제2차 세계대전 때에는 격전지가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구()이탈리아 식민지 처리 문제에 대하여 미국·영국·프랑스 및 소련 사이에 이견()이 있었으나 UN의 권고에 따라 1951년 12월 트리폴리타니아, 키레나이카, 페잔 등 3개 지방의 연방제에 의한 리비아 연합왕국으로 독립하였다. 1969년 국왕 부재중에 M.A.카다피가 이끄는 군사쿠데타가 일어나서 왕정이 폐지되고 공화국이 되었다.

리비아는 카다피의 쿠데타 이후 혁명평의회()가 3권을 장악하고 그 의장인 카다피가 국가원수가 되어 군최고사령관을 겸하여왔다. 1977년 통치기구를 개편하여 최고결정기관으로서 국회에 해당하는 전인민회의(General People’s Congress)를 설치하고, 그 안에 전인민회의 서기국이 설치되었다. 서기국은 혁명평의회를 대신하는 것으로 카다피는 초대 서기장이 되었다가 1979년 3월에 사임하였으나, 계속하여 국가원수의 지위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2011년 2월 15일 인권변호사 페시테르빌이 정보국 요원들에게 체포당하자 이에 대한 항의로 벵가지에서 민주화 시위가 일어났으며, 이 시위는 42년 동안 독재 정치를 해온 카다피 정권에 대한 반정부 시위로 연결되었다. 처음 반정부 시위가 확산되었을 때, 경찰과 군이 펼친 대대적인 진압 작전으로 시민 1,000여명이 사망하게 되었으며 이 일로 시위대는 총을 들고 반격하게 되었고, 북대서양조약기구(NATO)군도 정권의 공습에 참여하게 되었다. 결국 2011년 8월 21일 반정부 시위를 주도한 시민군이 수도인 트리폴리에 입성하면서 카다피 정권은 무너지게 되었다. 시민군은 수도 트리폴리를 포함하여 리비아의 대부분을 점령하였으나 카다피군은 시르테, 바니 왈리드, 사브하 등에서 거세게 저항하여 교전이 지속되고 있다.

1986년 1월 미국은 미국내 리비아 자산동결, 무역거래금지 및 리비아 내 미국인 완전 철수 등을 내용으로 하는 리비아 경제제재조치를 발표하였으며, 1986년 4월 트리폴리에 있는 카다피 지도자숙소 및 벵가지의 주요시설을 폭격하였다. 미국과 영국이 1988년 12월 영국에서 발생한 팬암기 폭파범으로 지목된 리비아인() 2명의 인도를 요구하였으나 거절하였고, 1992년 3월 UN(United Nations:국제연합) 안보리가 항공기 운항 금지, 무기 금수 등을 결의하였다. 이후 1993년 11월 해외자산 동결, 원유관련장비 금수 등 추가제재를 결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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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베르족 아프리카 북부 지중해 연안이나 사하라 사막에 아랍인 ·베두인족과 더불어 분포되어 있는 함어계(語系)의 인종.
오스만 제국 13세기 말 이후 셀주크튀르크를 대신하여 소아시아(아나톨리아)를 중심으로 형성된 이슬람 국가(1299∼1922).
무아마르 알 카다피 리비아의 군인, 정치가. 1969년 쿠데타로 집권하였으며, 2011년까지 42년간 장기집권했다. 이슬람근본주의, 사회주의, 범아랍주의를 융합한 아랍공동체 건설을 주장하였으며 인민직접민주주의라는 명분을 앞세워 의회제와 헌법을 폐지하고 석유 등 국가기반시설을 국유화하여 독재권력을 강화했다. 2011년 장기집권과 철권통지에 반발해 일어난 반정부 시위로 권좌에서 물러나 은신 중 사살되었다. 저서로 《녹색서》가 있다.

4 . 정치

리비아는 사회주의와 카다피 특유의 이슬람 이론을 혼합한 ‘그린북(Green Book)’ 사상에 의거하여, 헌법이 없으며 인민대중국(Jamahiriya) 체제가 코란과 함께 리비아의 정치사회질서를 규율하고 있다. 카다피에 의하여 정립되고 제도화된 이 체제는 서구식 의회민주주의를 가장한 전제적 독재체제이며 단일정당인 아랍사회주의자동맹(Arab Socialist Union) 또한 근대적 독재 통치기구라고 비난받고 있다. 리비아의 모든 인민은 지역단위의 기초인민회의(Basic People’s Congress)에 참여하여 지방자치 조직을 대표하는 서기국을 선임하고, 기초인민회의 대표들은 총리 및 각료는 임명하는 전인민회의(3,000명)의 일원이 된다. 1977년 인민대중국 체제 성립 이래 여러 차례에 걸친 대대적인 중앙·지방조직 개편이 있었고, 특히 공공행정 기능을 담당하는 전인민위원회는 혼란스러울 정도로 빈번하고 대폭적인 통폐합·부활과정을 거쳤다. 오늘날의 행정조직은 1994년 1월에 결정되었다. 최고사법결정권을 가지는 대법원은 코란의 율법을 따른다. 

카다피는 정부조직의 어떠한 공식적 지위도 가지고 있지 않으나, 이른바 ‘혁명의 지도자'(1990년 3월 전인민회의에 추대) 및 군최고사령관으로서 사실상 최고 권력을 행사하였으며, 전인민회의는 그의 결정을 추인하는 ‘고무도장’(rubber stamp)에 불과하였다. 카다피의 주요 권력행사 수단은 혁명위원회(revolutionary committee)로 카다피는 이를 통하여 국정 전반과 각 기관을 통제하였다.

서방세계에 대한 카다피의 도전에 대하여 미국은 1986년 1월 미국 내 리비아 자산동결, 무역거래금지 및 리비아 내 미국인 완전 철수 등을 내용으로 하는 리비아 경제제재조치를 발표하였으며, 1986년 4월 트리폴리에 있는 카다피 지도자 숙소 및 벵가지의 주요시설을 폭격하였다. 미국과 영국이 1988년 12월 영국에서 발생한 팬암기 폭파범으로 지목된 리비아인() 2명의 인도를 요구하였으나 거절하였고, 1992년 3월 UN(United Nations:국제연합) 안보리가 항공기 운항 금지, 무기 금수 등을 결의하였다. 이후 1993년 11월 해외자산 동결, 원유관련장비 금수 등 추가제재를 결의하였다.

카다피는 1993년 경제고립 등 난국 타개를 위해서 자국 순례자들의 이스라엘 방문을 허용하고 리비아계 유대인을 초청하였다. 1999년 4월에는 팬암기 폭파 혐의범 2명을 인도함에 따라 UN 제재조치가 정지되었다. 이후 영국과의 외교관계도 회복되었으며, EU(European Union:유럽연합) 국가들과의 관계가 급속도로 개선되었다. 1999년 9월 1일 집권 30주년을 맞은 카다피는 아프리카 각국의 내전에 대해 중재자로 활동하였으며 1999년 7월 OAU(Organization of African Unity:아프리카 통일기구) 특별 정상회담에 참석하여 아프리카연합 창설과 단일통화 채택 문제 등을 제기하였다. 이후 2000년 10월 아프리카연합 법안 비준서를 OAU 사무국에 기탁하는 등 아프리카연합 창설에 적극 기여하고 있다. 국방비는 GDP의 3.9% (2005년 추산)이며, 총병력은 6만 5000명(1999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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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아마르 알 카다피 리비아의 군인, 정치가. 1969년 쿠데타로 집권하였으며, 2011년까지 42년간 장기집권했다. 이슬람근본주의, 사회주의, 범아랍주의를 융합한 아랍공동체 건설을 주장하였으며 인민직접민주주의라는 명분을 앞세워 의회제와 헌법을 폐지하고 석유 등 국가기반시설을 국유화하여 독재권력을 강화했다. 2011년 장기집권과 철권통지에 반발해 일어난 반정부 시위로 권좌에서 물러나 은신 중 사살되었다. 저서로 《녹색서》가 있다.

5 . 경제

산업별 GDP 구성 비율은 농업 2.1%, 제조업 81.7%, 서비스업 16.2% (2007년 추산)이다. 전체 노동력의 산업별 구성 비율은 농업 17%, 제조업 23%, 서비스업 59% (2004년)으로 본래 농업국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해안지대의 서부를 중심으로 보리, 감자, 대추야자 등 식량작물과 올리브, 감귤류, 아몬드 및 땅콩, 토마토 등이 재배되고, 양, 염소, 낙타 등이 사육되어 땅콩, 피혁, 양털 등을 수출하였다. 그러나 수출량은 극히 적고 식량도 자급이 어렵다. 전국토의 1.7%만 경작이 가능하고 경작면적의 5% 정도만 용수 공급을 할 수 있다.

리비아는 1959년에 유전이 발견된 이래 석유산출국이 되어 경제에 급격한 변화가 일어났다. 2001년 11월 현재 일일 생산량은 172만 배럴(세계 17위), 원유 매장량은 391억 3천만 배럴(세계 9위, 2006년)이며, 원유 생산이 국내총생산의 30%, 총수출의 95%를 차지하고 있다. OPEC(석유수출국기구), OAPEC(아랍석유수출국기구)의 주요 구성국이며, 수출액의 대부분을 원유 및 석유제품·석유가스가 차지하여 경제적으로 석유에 대한 의존도가 높다. 석유는 시드라만()에 면한 시르테 분지를 중심으로 산출되며, 잘탄·아말·인티사르 및 다라·사리르 유전 등이 중요하고, 서부 국경지역의 구다미스, 남서부의 무르주크, 남동부의 쿠프라 등지에도 석유가 매장되어 있다. 천연가스 생산량은 108.4억㎥(세계 39위), 매장량은 1조 4300억㎥(세계 23위)이다. 대수로사업 등 대규모공사와 고도기술을 요구하는 건설공사는 외국회사가 수행하여 왔으나, 최근 들어 자국화정책을 적극 추진중이다. 실업률이 30%( 2004년), 절대빈곤층의 비율이 7.4% (2005년)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가 많다.

정부의 경제정책의 기조는 석유수입을 효과적으로 이용하여 공업화를 비롯한 경제개발을 촉진하는 데 있으며, 사회주의 경제체제와 시장경제체제를 혼합 운용하고 있다. 주요 수출품은 원유, 천연가스, 석유제품이며, 수입품은 기계류, 자동차, 수송장비, 전기기기, 식품, 소비재 등이다. 주요 수출국의 비중은 이탈리아 36.7%, 독일 14.3%, 에스파냐 8.7%, 미국 6.1%, 프랑스 5.6%, 튀르키예 5.3% 이며 수입국의 비중은  이탈리아 18.9%, 독일 7.9%, 중국 7.5%, 튀니지 6.3%, 프랑스 5.8%, 튀르키예 5.2%, 미국 4.7%, 한국 4.3%, 영국 4%(2006년 기준)이다.

참조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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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유수출국기구 국제석유자본(석유메이저)에 대한 발언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결성한 조직.
아랍석유수출국기구 아랍 산유국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하여 설립한 기구.

6 . 사회

리비아는 다른 아랍국가에 비하여 문맹율(17.4%)이 낮음에도 불구하고 교육정책의 주목표가 문맹 퇴치이며, 중등교육과정까지 무상 의무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1977년 사립학교제를 폐지한 후 현재 학교는 모두 국·공립으로 운영된다. 학제는 초등교육 6년, 중등교육 3년(일반과정) 내지 4년(기술, 훈련과정), 고등교육 3년(일반과정) 내지 4년(교사 또는 특수훈련 과정), 대학교육 4년으로 이루어진다. 1955년에 벵가지에 리비아대학교, 1973년 리비아대학교 트리폴리캠퍼스가 세워졌고 그밖에 교원양성·기술계통의 단과대학과 전문학교가 있다.

1973년 보도기관은 모두 국유화되었다. 통신은 국영 자마히리야, 일간지는 정부공식 기관지인 《알 파즈르 알 자디즈》등이 있고 방송은 국영 TV 방송국 12개소와 라디오 방송국 3개소가 있다. 1994년 3월부터 반()정부조직이 "리비아 인민의 소리"라는 방송을 시작하였다. 인터넷 호스트수는 24개(2007년), 사용자수는 232,000 명(2005년)이다. 모든 생활의 규범은 이슬람교의 코란을 기준으로 운영되고 있으며, 종교는 개인생활은 물론 정부시책에도 많은 영향을 주고 있다.

공항은 141개소(2007년)가 있고, 철도는 전무하다. 전체 도로는 83,200 km으로서 천연가스수송관 3,425 km, 원유관l 6,956 km(2007년)이며 화물선 11척, 액화가스 수송선 3척, 원유탱크 수송선 2척, 롤선 1척 (2007년) 등 17척의 선박을 보유하고 있다.

참조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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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교 7세기 초 아라비아의 예언자 무함마드가 완성시킨 종교.
코란 이슬람교의 경전(經典)으로, 이슬람의 예언자 무함마드가 610년 아라비아 반도 메카 근교의 히라(Hira) 산 동굴에서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 처음으로 유일신 알라의 계시를 받은 뒤부터 632년 죽을 때까지 받은 계시를 집대성한 것이다.

7 . 대한관계

리비아는 한국과 1978년 5월 영사관계를 맺고 1980년 12월 29일 대사급 외교관계를 수립하였으며, 북한과는 1974년 1월부터 수교하여 대사관을 개설하였다. 우리나라와 1977년 의료협력협정, 1990년 문화협력·무역협정·경제기술협정에 가서명하였고 1999년 경제과학기술협정과 문화협정에 서명하였다. 한국-리비아간 양국 관계는 지난 20여년간 실질 경제 협력 성과를 바탕으로 지속적으로 발전되어 오고 있으며, 최근 우리나라의 국제무대 진출 관련 지지 및 고위 인사 교류 확대, 문화 교류 협력 등 제반 분야에서 협력이 확대·강화되고 있다. 특히 1970년대 말부터 건설 분야를 중심으로 발전된 양국의 실질협력관계는 UN 제재하의 어려운 여건에서도 꾸준히 확대되어 큰 성과를 거둠으로써 상호신뢰를 쌓았다. UN의 대리비아 제재 중에도 우리나라는 공관 규모를 축소하거나 철수하지 않음은 물론 리비아에 진출한 우리나라 기업이 성실히 공사를 이행하였다.

1997년 외무차관 아메르가 한국을 방문하였으며, 2005년 1월 반기문 외교통상부 장관이 리비아를 방문, 그간 경제 통상 분야에 주로 국한되었던 양국관계가 정치, 문화 등 전방위 협력관계로 확대되는 전기를 마련하였다. 2006년 9월 한명숙 총리가 리비아를 방문, 양국 관계가 한층 더 공고해졌다. 주요 수입품은 가전제품·기계·자동차·타이어 등이며, 수출품은 어류 알루미늄 원자재이다. 2001년 기준 한국인 체류자는 1,057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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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비아대사관 서울특별시 용산구 한남동(漢南洞)에 있는 리비아 외교사절단의 공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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