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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화에 대항하기

이강국의 '세계화의 정치경제학' <16> 대안적 운동과 새로운 미래

***4. 세계화에 대항하기, 대안적 운동과 새로운 미래**

***반세계화 운동의 등장**

많은 이들은, 훗날 돌이켜보면 1999년 시애틀 전투(battle of Seattle)가 세계의 역사에서 하나의 기점이 될 것이라 말한다.(Tabb, 2001) 세계무역기구(WTO)를 주도하던 선진국 정부들이 비밀스럽게 추진해오던 다자간 투자협정(MAI: Multilateral Agreement of Investment)의 초안이 캐나다의 작은 여성운동 단체에 의해 인터넷을 통해 유출되었고 기업에게 무한대의 자유를 주겠다는 이 계획은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폐해를 우려하던 전세계 많은 이들의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마침내 1999년 1월 시애틀 WTO 총회에 4만이 넘는 시위대가 전세계에서 몰려들었으며 거리를 점거하고 투자협정 반대의 목소리를 높이 외쳤다. 이들은 나이키나 맥도날드 등 초국적기업의 상점을 공격했으며 WTO 총회가 열리는 시애틀을 마비시키고 말았다.

각국 대표들은 엄청난 시위대에 놀라고 압도되었으며 결국 다자간 투자협정의 성사는 수포로 돌아갔다. 그리고 소위 ‘시애틀 전투’는 이후 반세계화 운동으로 불리는 전세계적인 민중운동의 출발점이 되었던 것이다. 1968년, 68혁명으로 폭발한 이후 오랫동안 침묵을 지켜왔던 서구의 진보운동과 학생운동은 마침내 30여년 이 지난 이후 다시금 깃발을 들었고 개도국의 활동가, 민중들과 결합하여 전세계를 휩쓰는 새로운 운동의 서막을 열었다. 그리고 1989년 사회주의의 몰락 이후 전세계를 휩쓸었던 이른바 워싱턴 컨센서스와 신자유주의의 오만은 아래로부터의 저항에 직면하게 되었다.

21세기를 코앞에 둔 1999년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시기에 터져 나온 이 운동은 자본과 시장이 마침내 승리하는 세기가 올 것이라고 믿었던 많은 이들에게는 엄청난 충격이었다. 대부분의 우파들은 충격 속에서 이러한 전세계적 저항운동은 세계화에 대한 근거 없는 우려와 반대에 기초하고 있으며 그 주장과 인식도 비현실적이며 내부의 연대도 튼튼하지 못하다고 반박했다.

예를 들어 <이코노미스트>는 WTO 총회가 열리는 그 주의 특집판에서 인도의 소녀를 표지에 내세우며 세계화에 반대하는 것은 개도국의 빈민들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들에 따르면 “무역이 없다면 남아시아의 소녀는 오히려 교육이나 의료보장을 받지 못할 것”이고 “무역은 소수의 특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수백만에게 더 큰 기회를 주는 것”이며 국제무역에 대한 반대로 그녀를 일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그녀를 돕는 것이 아니라고 역설했다. 이미 <올리브나무와 렉서스>로 유명해진 뉴욕타임스의 칼럼니스트 토마스 프리드만은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Sleepless in Seattle)’을 패러디한 시애틀의 어리석은 밤(Senseless in Seattle)이란 제목의 칼럼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오늘 뉴스 중 WTO를 반대하는 시위대에 관한 것보다 어리석은 것은 없는 것 같다. 이 반WTO 시위대들은 헛된 믿음을 지닌 무역보호주의자 노조와 1960년대식의 혁명을 주장하는 여피들인데, 이들은 잘못된 목표에 대해서 잘못된 방식으로 투쟁하고 있다... WTO는 장벽없는 세계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이다. 더 많은 국가들이 서로 무역을 할수록 무역에 관한 기본적 규칙을 세우려는 기관이 필요하며 이것이 바로 WTO의 역할이다... 모든 국가와 기업들은 그 노동, 법적 그리고 환경기준을 개선해 왔는데 그 이유는 더많은 세계무역과 세계적 통합 그리고 인터넷 등 덕분이지 반대가 아니다. 이것이 우리가 세계적 지배구조를 개선하는 최선의 도구이다.(Friedman, 1999. 12. 1)”

물론 국제무역에 완전히 고개를 돌리고 심지어 우파의 주장에 동조하는 시위대들의 과격함에는 우려를 표명할 만하다. 프리드만은 스리랑카의 빅토리아즈 시크릿(Victoria's Secret) 속옷공장은 자신의 딸도 일하게 할 만할 정도로 노동조건이 양호하고 이는 역시 국제무역과 선진국의 소비자운동 덕분이라고 쓰고 있다. 뭐 정말로 열악한 착취공장의 현실을 볼 기회가 과연 있었는지는 상당히 의문스럽지만. 아무튼 반세계화 운동을 비난하는 이러한 주장은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전세계적 무역과 자본운동의 확대가 어떻게든 선진국과 후진국 모두에게 당연히 도움이 될 것이라는 기대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었다. 앞서 이미 보았듯 부분적으로는 이들의 반박도 일리가 있고 반세계화의 걱정도 너무 과장된 것이었지만, 올리브 나무의 뿌리가 렉서스의 엔진보다 더 튼튼한 것일까. 이후 반세계화 운동의 발전은 세계화 찬성론자들의 신랄한 비난 혹은 점잖은 무시가 오히려 근거 없는 것임을 잘 보여주는 듯 하다.

***전진하는 역사, 반세계화 운동의 발전**

이 운동은 역시 80년대 이후 진행되어온 신자유주의와 세계화의 파괴적인 현실 자체에 기반을 두고 있었고 세기말 자본주의의 복잡한 갈등과 모순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우파의 기대와는 달리 쉽사리 사그러들기는커녕 해를 거듭하며 더욱더 발전해 오고 있다. 이제 반세계화 운동은 그 자체가 세계화되어 미국, 유럽 등 선진국과 아시아 그리고 아프리카 등 후진국을 막론하고 전세계의 시민들을 포괄하며 발전되고 있다. 그 운동 속에서 더욱더 진정한 세계주의(cosmpolitanism)가 꽃피는 것을 보면 반세계화라기보다는 자본주도의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대한 반대, 사람보다 이윤을 더 중시하는(profit over people) 체제에 대한 저항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게다가 이들의 운동방식도 세계화된 첨단자본주의에 정확하게 들어맞는 것이었다. 인터넷을 통한 이메일 그리고 휴대전화로 무장한 시위대들은 탄압의 눈을 피하며 무척 신속하고 효과적으로 스스로를 자발적으로 조직했으며 운동의 조직도 중앙집중적인 이전의 방식과는 다르게 매우 수평적이고 유연한 구조를 보여서 급격히 변화하는 상황에 아주 잘 대응할 수 있었다. 대중운동도 자본주의의 발전에서 직관을 얻었던 것일까, 보다 유연하고 전문화된 생산방식이 생산의 영역에서 퍼져나감과 동시에 운동에서도 이와 유사한 변화가 나타났다는 것은 무척 인상적이다.

필자가 대학원생이던 시절 2000년 4월 세계은행 총회에 맞추어 워싱턴의 반세계화 시위에 참여할 때 집결지와 행동에 대한 지침은 모두 이메일로 전달되었던 기억이 생생하며, 뚜렷한 중심이 없는 유연한 조직화로 인해서 경찰이 시위를 막는 데 큰 어려움을 겪었다고 보고되었다. 자본주의에서 기술은 흔히 이윤과 억압의 원천이 되지만 기술 자체의 힘은 이와는 다른 법, 네그리도 잘 지적했듯 시민들이 스스로 네트워크를 발전시키며 조직화하였고 인터넷 홈페이지 등 최신의 정보기술은 운동을 홍보하는 데 최선의 수단이었다.

이제는 세계사회운동(global social movement) 혹은 세계정의운동(global justice movement)으로 불리는 반세계화 운동의 함성은 99년 시애틀을 필두로 이후 국제기구의 총회가 열릴 때마다 세계 곳곳에서 불붙듯 타올랐다. 2000년 4월 세계은행-IMF 총회가 열린 워싱턴의 5만여 명, 그리고 2001년 7월 G10 회담이 열린 이태리의 제노바에서는 무려 20만여 명의 시위대가 집결하기도 했다. 한편 2001년 9월 11일 세계무역센터를 붕괴시킨 테러로 인해 운동은 잠시 위축되는 듯했다. 자칫 폭력적인 테러리스트의 공격으로 인해 반세계화 시위의 대중적인 지지와 정당성이 약화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미 정부와 우파들은 테러를 기회로 반세계화 운동의 불순한 의도를 부풀려 비판하기 시작했고 세계정의운동의 조직자들은 2001년 9월 예정되어 있던 세계은행 총회의 시위계획을 포기하고 말았다.

그러나 자본이 시장에서 내미는 악수의 뒤에는 언제나 주먹이 숨겨져 있는 법 아니던가.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은 언제나 보이는 주먹(visible fist)과 똑같은 것이고 미국중심의 세계화된 자본주의의 세계질서는 압도적인 세계경찰의 군사력으로 뒷받침되어 왔던 것이다. 나아가 테러를 빌미로 시작된 대이라크 전쟁은 군사적 점령에 기초한 석유자원의 확보와 미국 석유자본의 엄청난 이득을 보장하는 것이었다. 테러리스트의 공격은 결코 용납되지 않아야 할 극단적인 방법이었지만 어쩌면 금융자본과 군사력으로 세계화와 팍스아메리카나를 밀어붙이던 제국 미국이 자초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상황에서 반세계화 운동이 세계화의 반대를 전쟁에 대한 반대와 결합시킨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세계정의운동은 이제 미국의 대이라크 전쟁에 대한 반전의 목소리를 누구보다 앞장서서 외치고 있다.

이 운동은 과연 어떻게 발전해갈 것인가? 정말로 몇몇 이의 기대와 같이 새로운 미래를 여는 시발점이 될 수 있을까? 이들 세계시민들의 주장이 자본의 철옹성이었던 국제기구나 전세계적 질서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 이들의 목소리는 이제 전세계를 휩쓸고 있어서 국제기구의 총회에는 언제나 삼엄한 경비와 바리케이드가 동원된다. 지구 어디라도 쫓아올 듯한 시위대를 피해가며 2001년 WTO 각료회담은 카타르의 도하에서 열렸고 2003년 G7 회담은 두바이에서 개최된 바 있다. 선진국 엘리트들이 시위대를 피해 교통이 불편한 곳에서 자기들만의 회의를 여는 것은 볼썽사나운 일이지만 당분간은 이들의 숨바꼭질이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 세계사회포럼**

최근 이들은 세계경제포럼에 대항하여 세계사회포럼이라는 대규모 집회를 통해 집결하여 더욱 큰 조직적인 발전을 보여주고 있어서 주목을 받고 있다. 이 포럼은 시애틀 전투가 있기 이전 1999년 1월부터 준비된 세계경제포럼을 반대하는 ‘다른 다보스’ 혹은 ‘반(反)다보스’라는 캐치프레이즈의 운동에서 시작되었다. 세계대안포럼, 프랑스의 진보적 저널인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그리고 토빈세를 주장하는 프랑스의 ATTAC(Association for the Taxation of Financial transactions for the Aid of Citizens) 등의 주도와 다양한 운동그룹들의 참여에 기초하여 이들은 2000년 세계경제포럼이 열리는 다보스 주변에서 여러 시위와 토론회를 개최했다. 그러나 좁은 다보스에서의 반세계경제포럼 시위의 한계를 절감한 전세계적인 움직임은 이제 진보적인 기운이 드높은 브라질로 옮겨와서 이들만의 새로운 포럼의 개최로 발전되었다. 브라질의 진보적 기업가단체(Associacao Brasileira de Empresarios pela Cidadania)를 주도하던 오데 그라쥬(Oded Grajew)의 발의 하에 2000년 2월 ATTAC의 의장인 바르나르 까상 등이 브라질의 포르투 알레그레에서 세계경제포럼이 열리는 같은 기간에 세계사회포럼을 열기로 의견을 모았다.

포르투 알레그레(Porto Alegre)가 위치한 브라질의 리오그란데 도 술(Rio Grande do Sul) 주는 그 유명한 브라질의 노동자당 PT가 통치하던 지역이었고 이 도시는 특히 주민들의 예산결정과 집행에 대한 참여와 같은 직접민주주의의 성공적 실험으로 이미 유명한 곳이었다. 2002년 130만 달러에 이르는 지역정부의 재정적 그리고 인적 지원에 힘입어 2001년 1월에 최초의 세계사회포럼이 시작되어 전세계의 진보적 조직들과 시민이 함께 하는 토론과 축제의 장이 되었다. 2001년 1월에는 전세계 117개국의 약 5천여명의 대표자와 2만 여명의 참석자, 2002년 1월에는 123개국의 약 1만2천여명의 대표자와 5만 5천여 명의 참석자가 함께 할 정도로 발전하고 있다.(Teivainen, 2002) 물론 한때 종속이론의 대표주자였다가 우파로 전향한 카르도소 대통령과 우파단체들은 지역정부의 예산낭비 등을 주장하며 이 포럼의 개최에 눈을 흘겼지만 전세계로부터 달려온 넘쳐나는 참가자들이 지역의 호텔과 식당 등을 가득 메워 그 비용보다 경제적 효과가 훨씬 더 컸다고도 보고된다.

이제 세계경제포럼과 세계사회포럼은 하나는 북반구 선진국의 겨울, 철통같은 경비 속에서 다른 하나는 남반부 국가의 여름에서 축제 분위기 속에서 대칭적으로 열리고 있다. 2001년 포르투 알레그레에서 '부에 대한 접근과 분배' '지속 가능한 발전' '시민사회의 영향력 강화'와 '세계화에 맞선 민주주의와 국가 구실의 보전' 등의 주제가 토론되었다. 2003년까지 브라질에서 열렸던 세계사회포럼은 2004년에는 인도의 뭄바이에서 무려 2만개 단체와 12만 여명이 참가하며 개최되어 브라질과 유럽 중심의 지역적 범위를 확장해 가며 진정으로 전세계적인 새로운 대안적인 질서를 위한 진지한 고민과 연대의 장으로 발전해가고 있다. 한 참가자는 세계사회포럼에 대해서 아래와 같이 말하고 있다.

“새로운 세기는 실제적으로 포르투 알레그레에서 시작되었다. 세계화의 광신자들은 이제는 일들이 더 이상 이전처럼 되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다. 왜냐하면 다른 세계가 가능하다는 것을 우리는 깨닫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반세계화 운동의 발전은 세계은행 등 국제기구들도 적어도 형식적으로는 개도국과 세계화의 피해자들의 목소리에 더욱 귀를 기울이게 만들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면 빈곤탕감이라든가 세계화의 악영향 등에 대한 논의들이 국제기구의 내부 연구에서조차도 중요한 주제로 떠오르고 있고 선진국의 엘리트들의 모임에서도 이러한 문제들이 이제 논의되고 있다. IMF와 IBRD는, 2000년 9월 프라하 총회에서 경제성장만으로 빈곤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는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5백억 달러의 자금을 조성해 극빈국을 지원하기로 합의하는 등 반세계화 진영의 요구를 일부 수용했다. 제임스 울펀슨 IBRD 총재는 민간 단체 대표들과 만나 대화를 나눴으며, 개막사에서 "전세계 20%의 인구가 80%의 소득을 쥐고 있다면 잘못된 것"이라고 고개를 숙였다.

또한 2002년 세계은행은 총회에서 이들 반세계화 운동 조직과의 토론과 협의를 만들어 나가겠다고 선언한 바 있고 세계경제포럼 등 전세계적 엘리트들의 모임조차 이들의 목소리를 경청하는 듯한 자세를 보여주었다. 시애틀의 힘에 기초해서 세계사회포럼이 처음 열리던 2001년 세계경제포럼은 이제 반세계화 운동의 목소리를 의식한 듯 성장을 촉진하며 동시에 격차를 줄이는 것을 통해 세계화된 미래의 새로운 틀을 짜자며 빈부격차의 문제를 처음 언급하기도 했다. 2002년에 뉴욕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 회의의 세션들은 ‘전세계적 분노의 이해’, ‘디지탈 디바이드(Digital Divide)의 축소’, 그리고 ‘사죄의 정치학’ 등이었다. 또한 오래전부터 양심적 운동을 해왔던 영국의 락그룹 U2의 리드싱어 보노(Bono)는 부채탕감의 필요성을 강조하여 2002년 회의의 스타로 떠올랐다. 빌 게이츠조차, “거리에 시위대가 있다는 것은 건강한 일입니다. 우리는 부자들이 개도국에 필요한 것들을 지원할 수 있는지에 관해서 토론해야 합니다.”라고 털어놓기도 했다. 물론 그의 재산을 사용한다면 아프리카 최빈국 10개국의 부채를 한꺼번에 갚을 수도 있었지만 말이다.

***다양한 그룹들과 입장들**

그렇다면 눈부시게 발전해 오고 있는 이 운동을 주도하는 이들은 과연 누구일까. 그 전세계적 영향력에도 불구하고 운동의 내부를 들여다보면 무척이나 혼란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반세계화 시위대에는 무정부주의자 극좌파부터 미국의 보호무역을 주장하는 극우파까지 온갖 다양한 그룹들, 심지어 전혀 진보적이지 않은 이들조차 한데 섞여있어서 그 주장은 중구난방이며 조직도 일사불란하지 못하다는 비판도 흔히 받는다.

반세계화 운동 내부의 무척이나 복잡해 보이는 여러 흐름들은 왼쪽에서 오른쪽까지 넓게 걸쳐있다. 우선 가장 오른쪽에서는 극우파들이 이른바 민족주의와 애국심을 내걸고 세계화에 저항하며 이들은 반세계화 시위대에서 눈에 띠기도 한다. 로스 페로 등 미국의 극우파들은 90년대 이후 NAFTA, 그리고 우루과이 라운드나 WTO 등을 내내 반대해왔다. 선진국에서 이들은 이민노동자에 대한 공격과 인종차별까지 외쳐대며 세력을 넓혀가고 있는데, 최근 프랑스 대선에서는 좌파의 분열 탓이었지만 극우파 르 펜이 2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이들은 주로 일자리 감소나 임금격차의 확대 등, 주로 세계화로 인한 선진국 노동자들이 받는 타격을 강조하며 좌파와 함께 거리에 나서기도 한다. 하지만 이들이 바라는 것은 역시 세계화에 대한 반발심리에 기초한 국내자본에 대한 응원으로 보이며 그 실체란 민족주의로 포장된 파시즘의 냄새조차 나는 극우반동인 듯하다.

이보다 훨씬 개명된 보수파들은 반세계화는 아니더라도 기업만을 위한 세계화의 추악한 면을 조금은 스스로 규제해야 한다고 목청을 높인다. 착취공장에 반대하는 소비자운동 단체 등 주로 선진국의 NGO들로 구성된 이들은 아동노동이나 착취공장 등에 대해서는 기업 스스로가 자제하고 세계화된 자본의 축적 과정에서조차도 이른바 ‘사회적 책임’을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들의 활동은 나이키 등 착취공장에 반대하는 시민운동으로 잘 알려졌으며 양심적인 학생들의 노력은 미국 대학들의 구내매점이 열악한 노동조건을 사용한 제품은 불매하도록 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재미있는 것은 다국적기업 스스로가 이런 주장에 동의하고 있으며 때로 이들은 시민사회와 협력하거나 기업중심의 세계화를 반대하는 운동에 자금을 지원하기까지 한다는 점이다. 이쯤 되면 적도 아군도 불분명한데, 이러한 움직임은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이 여러 다국적기업들과 함께 노동기준과 사회적 책임 등을 준수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맺은 ‘세계 협약(Global Compact)’ 등 최근 발전되고 있는 기업과 시민사회의 밀월에서도 드러난다. 과연 기업들의 이러한 노력은 역시 자칫 소비자운동의 표적이 되었을 경우 나타날 끔찍한 손해를 겁내는 것이며 반세계화 운동의 힘을 보여주기도 한다. 또한 이런 협약이나 사회적 책임의 준수 등은 기업에게는 다른 홍보수단보다 싸게 먹히는 효과적인 전략일 수 있다. 실제로 유니레버사는 세계화를 반대하는 벤앤제리 재단을 통해 반세계화 활동가그룹에게 거액을 제공했지만, 이 과정 뒤에는 유니레버사가 벤앤제리의 아이스크림 사업을 인수하는 조건이 존재했다고 이야기된다.(캘리니코스, 2003) 기업은 역시 자본이고 화해의 제스처도 악어의 눈물 같은 것일까.

다른 유력한 그룹들은 ‘지역으로 돌아가자’라고 주장한다. 이른바 지역화와 지역중심성(locality)의 회복을 세계화에 대한 중요한 대안으로 내세우는 이들은 다국적기업의 세계적 침투가 억제되어야 하며 각 국가와 지역은 자기가 생산할 수 있는 생산품들은 스스로 생산하고 지역의 중소기업들이 발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자국 혹은 지역의 독립적인 경제를 발전시키기 위해서 높은 관세나 자본 활동에 대한 통제 등 다양한 규제조치들이 필수적이다. 말 그대로 세계화의 반대는 지역화일까. 이들은 흔히 녹색당 등의 환경주의자들 그리고 후진국 노동자들의 임금, 노동조건 그리고 환경 등을 개선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소위 ‘공정무역(fair trade)’ 주의자들의 주장과도 상당히 일맥상통한다.(Hines, 2000) 그러나 그 가능성은 둘째치고라도, 지역으로 돌아가는 것이 효율적일 수 있을지 그리고 지역적으로 제한되는 시장이 정의를 보장할 수 있을지 또한 그 지역의 단위가 무엇이 되어야 할지 의문점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반세계화운동에서 큰 주목을 받고 있으며 이론적, 실천적으로 저변과 영향력이 넓은 그룹은 역시 국제적 케인즈주의 혹은 개혁적 세계화라고 부를 만한 이들이다. 여러 그룹들이 조금씩 비슷하고 다르기 때문에 이름을 붙이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이지만 전반적으로 이들은 전세계적 자본운동에 대한 규제 그리고 케인즈주의적 국민적인 조절과 사회민주주의의 확립 등 일종의 체제내 개혁을 강조한다. 자본주의 자체에 대한 혁명적인 거부에 대해서는 눈감고 있다는 점에서 무척 개량적일 수도 있지만 현실적인 개혁의 목소리로 진보세력들의 상당한 지지를 받고 있는 듯하다. ATTAC 등 여러 NGO들과 여러 진보적인 경제학자들은 구체적으로 초국적 금융자본에 대한 토빈세의 부과 그리고 산업정책과 제한적 무역정책 그리고 국내적 금융의 통제 등 국가의 적극적 역할에 기초한 경제관리와 발전전략, 그리고 빈국의 채무탕감과 원조를 전세계적으로 도입할 것을 주장한다.

그러나 케인즈주의적 사회민주주의의 세계화를 지향하는 이들 내부에서도 이러한 정책의 추진을 위해 어떤 기구를 활용할 것인가, 즉 국제기구를 해체하고 국민국가와 다양성을 강조할 것인가 아니면 유엔과 세계은행 등 국제기구의 개혁을 통해 보다 개혁적인 전세계적 지배기구를 건설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상당한 논란이 존재한다.(Bond, 2000) 또한 이러한 개혁의 수행을 위해서 필요한 국민국가들 간의 상당한 협조가 과연 가능할 것인가에 대해서 의문이 존재하며, 선ㆍ후진국간의 혹은 다양한 계층간의 이해를 어떻게 조정할 수 있을까 그리고 이미 심각한 위기를 맞았던 케인즈주의적인 경제관리가 다시 새로운 번영을 가져다줄 수 있을까 하는 것도 쉽지 않은 질문이다. 보다 좌파적인 시각에서 본다면 역시 자본주의 자체의 모순과 갈등에 대한 고민이 부재한 개량적인 전술이라는 한계가 있을 것이다.

이들보다 더 왼편에 서 있는 급진적인 입장들은 네그리 등으로 대표되는 자율주의자들 그리고 캘리니코스가 사회주의적 반자본주의 운동으로 부르는 혁명적인 그룹들을 포함할 것이다. 자율주의자들은 기존의 국가권력이 아니라 중앙집권을 거부하고 벌떼처럼 분산된 형태의 불복종을 통해 일종의 자율적 권력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독특한데, 주로 자발적이고 다양하게 조직된 NGO들의 상호소통 그리고 무엇보다 멕시코의 사피티스타 운동 등에 주목한다. 그러나 ‘다중’의 자율적이고 분산된 투쟁을 강조하면서 제국주의나 민족적인 저항의 중요성조차 간과해버리는 이들의 주장이 얼마나 현실적일까 하는 것은 이미 지적한 바 있다.

마지막으로 사회주의적 그룹들은 반세계화운동이 반자본주의 그리고 사회주의로의 혁명적인 변화로 나아가야 한다고 역설한다. 물론 이들의 사회주의는 스탈린주의적인 소련식도, 우경화된 서구의 사회민주주의도 아닌 뭔가 다른, 근본적으로 민주주의적이고 개혁적인 사회주의이다. 어쩌면 가장 비현실적이지만 근본적인 체제변혁을 꿈꾸는 이상주의자들인 이들은 제4인터내셔널의 트로츠키주의자 등을 포함하여 투쟁에 가장 헌신적으로 참여한다. 최근에는 이탈리아의 좌익민주당 그리고 영국의 사회주의당 등 유럽의 현실적인 정치세력으로서 그리고 반세계화운동에서도 차츰 저변을 넓혀가고 있는 듯하다.

마지막으로 주요한 그룹은 역시 환경운동단체인데, 이들은 현재의 기업주도의 세계화가 전세계적 환경에 재앙을 가져다주고 있다고 외치며 거리에 나선다. 그린피스 등 환경보호 NGO들은 환경이나 이윤을 가장 중시하는 체제가 환경파괴로 이어지고 있으므로 고래나 펭귄 등 희귀동물 그리고 열대우림 등에 대한 보호 그리고 더욱 엄격한 환경기준의 준수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유럽의 선진국에서는 환경운동세력이 녹색당 등을 통해 이미 중요한 정치세력으로 떠올랐으며 때로는 좌파와의 이른바 적녹연합을 통해 정권을 잡기도 했다. 인도 등 개도국에서도 지역의 자연자원에 대한 보존을 강조하는 환경운동세력이 지역주민들을 조직하며 초국적기업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고 있다. 실제로 인도의 반다나 쉬바 등과 같은 환경운동가들은 선진국에서는 스타로 떠올라 반세계화 시위에 빠짐없이 참여하고 있으며 최근 인도에서 발전하고 있는 코카콜라에 대항하여 물을 지키는 운동도 잘 알려져 있다. 성장일변도의 삶을 반성하고 지속가능한 개발과 생태계와의 조화를 고민하는 것은 물론 잊지 말아야 할 소중한 가치이지만 이들의 주장이 좌우의 여러 입장들과 어떻게 조화 혹은 갈등을 빚을지는 좀은 모호하다.

***반세계화 운동의 한계**

이 새로운 전세계적 사회운동은 어느 정도로 발전해갈 수 있을까. 2000년 워싱턴의 반세계화 시위에서 미국의 노조조직인 AFL-CIO의 노동자들은 중국의 WTO 가입을 반대했고 보수파 시위대들은 미국의 보호무역 조치가 필요하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세계화로 처지가 점점 악화되고 있는 선진국의 노동자들은 중국의 값싼 노동자와의 경쟁을 두려워했던 것이다. 이런 상황을 생각하면 전세계적인 연대는 기대만큼은 쉽지 않을지도 모른다. 특히 선진국 NGO와 활동가 중심의 반세계화 운동은 정작 후진국의 발전과 노동자들에 대한 관심이 부족했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세계화로 인한 폐해는 어쩌면 후진국에서 더 큰지도 모르지만, 정작 반세계화 시위대의 압도적 다수는 선진국의 시민들인 것이다. 미국이건 브라질이건 어디서 시위가 열리든, 후진국의 가난한 이들은 그렇게 멀리까지 여행하는 것 자체가 하늘의 별따기 아닐까. 체 게바라의 아들로서 쿠바 정부의 정치문화적 대외활동을 담당하고 있는 까미요 게바라는 1999년 시애틀 시위를 보며, 소외된 서양 젊은이들의 환상에 기초한 외침으로 들린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반세계화 운동의 가장 중요한 한계로는 역시 그 내부에 통일되지 않은 여러 그룹들과 입장이 혼재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양성은 때로는 힘이지만 자주 짐이 되는 법 아니던가. 보다 전통적인 맑스주의적 좌파가 아직 노동자의 중심성을 강조하는 반면 서구에서 이제는 더 강력한 신사회운동과 포스트맑시즘의 전통을 더욱 강조하는 이들은 시민단체 등을 포괄하는 가능한 광범위한 무지개연합을 더욱 중시한다. 또한 세계경제 내부에서 나타나는 선진국과 후진국 간의 갈등이 이 운동 안에서도 그대로 숨겨져 있으며 운동의 의제를 둘러싼 합의조차 결코 쉽지는 않아 보인다. 선진국 노동자들은 주로 자국 노동자들의 임금하락을 우려하고 선진국의 NGO들은 후진국의 노동착취문제를 제기하는 반면, 정작 후진국 노동자들은 WTO나 IMF 등 선진국 중심의 불공평한 세계경제질서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높인다.

후진국의 입장도 복잡해서 개도국 빈곤의 해소와 경제발전, 그리고 부채탕감을 더욱 강조하는 이들이 많지만 이를 위해서 외국자본과 무역에 얼마나 반대해야 할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분분한 실정이다. 혹자는 지역으로 돌아가서 자립적인 발전을 지향하지만, 또 다른 이들은 수출을 통한 세계시장에 대한 적극적인 통합이 필요하며 이를 위해 후진국에게 차별이 되는 선진국 중심의 국제무역질서를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게다가 환경을 강조하는 이들은 개도국의 발전과 빈곤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키는 반면 당장 빈곤문제가 심각한 개도국의 입장에서는 선진국 NGO들의 환경에 대한 우려가 한가한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다양한 그룹들의 존재로 인해 이들의 주장이 한데 모여 현실적인 대안의 제시로 이어지지 않는 것은 심각한 난점일 것이다. 무언가에 반대하는 운동이라는 깃발 하에서 아주 다양한 전세계의 시민들을 한데 모을 수 있었지만 무엇을 지향하는가 라는 질문은 쉽게 대답하기 어려운 법일까. 역사상 어느 운동이나 정치에서도 볼 수 있는 이런 갈등은 반세계화 운동에서도 예외가 아닌 듯하다. 급진적인 사회주의자들은 혁명적인 변화를 바라며 개혁파인 국제적 케인즈주의의 대안을 개량적이라고 비판하지만 이들의 목소리가 쉽게 피부로 다가오지는 않는다. 개혁적 세계화론자들의 내부에서도 구체적인 정책과 수단 그리고 선ㆍ후진국간의 입장 차이 등이 온존해 있으며, 여기다가 환경이나 여성 그리고 인종문제 등 다른 여러 주장들까지 겹쳐 있어서 반세계화 운동이 통일된 목소리를 내는 조직으로 발전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전망된다.

이러한 한계는 세계사회포럼에서도 잘 나타나는데, 포럼 내부의 강연과 세미나 그리고 집회는 다양한 입장들을 모두 포함하여 때로는 어지러운 모습을 보여주며 최근에는 세계은행이나 서방의 지도자들을 초대할 것인가 말 것인가에 대해서도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세계사회포럼 자체가 다원적이며 정파적이지 않고 젠더, 인종, 문화 등의 모든 다양성을 포괄하며 민주적 원리를 강조하므로 그 자체로 조직력과 단결력이 취약하다는 비판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심지어는 인종적인 구성으로 보아도 포르투 알레그레의 세계사회포럼은 주로 백인 중심이라는 지적을 받기도 했다. 사실 포르투 알레그레가 위치한 리오몬테그라 주 자체의 주민이 브라질의 다른 주민에 비해 주로 피부색이 밝은 이들이 살고 있으며 해외의 참가자들도 당연히 선진국의 참여자들이 훨씬 많았던 것이다. 반세계화의 한목소리에 피부색이 뭐가 문제일까만은 인종갈등에 민감한 이들은 그다지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낼지도 모른다. 게다가 세계사회포럼조차 주로 선진국 중심의 NGO와 브라질의 단체들이 주도하고 이들이 후진국의 NGO에게 도움을 주지만 그들의 재원조차 대기업으로부터 받는 경우가 흔하다고 따끔한 지적을 받기도 한다.

***반세계화 운동의 미래와 전망**

결국 반세계화 운동은 전세계 사회단체들의 느슨한 연대의 형태로 유지되면서 가능한 그 외연을 넓혀갈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내부적인 입장의 조율과, 이론적인 기반과 현실적인 정책대안의 제시 등을 위한 보다 치열하고 생산적인 논쟁이 요구되고 있다. 선후진국간의 갈등 그리고 정치적인 스펙트럼과 지향에 따른 입장 차이가 어떻게 자본 중심의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대한 반대라는 대의 하에서 해결될 수 있을 것인가가 커다란 과제인 것이다.

특히 자국의 노동자를 위하는 것과 같은 국민적인 이해와 전세계 노동자의 연대에 기초한 세계적인 이해를 조정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이를테면 미국과 인도의 노동자 모두가 반세계화라는 깃발 하에서 WTO 체제에 반대하는 시위를 함께 벌이고 있지만, 자국의 노동자의 피해를 우려하며 무역자유화를 반대하는 선진국 노동자와, 선진국의 횡포를 반대하고 후진국에게 공정한 무역을 주장하는 후진국 노동자의 입장은 사뭇 다른 것이다. 물론 이러한 노력은 역시 가능한 많은 이들이 동의할 수 있는 현실적인 그리고 뚜렷한 지향을 지닌 대안의 제시로 이어져야 하며 이를 위해 이데올로기적 입장들 간의 차이도 극복되어야 할 것이다. 특히 노동자냐 아니면 광범위한 연대냐 하는, 반세계화 운동의 중심세력이 누가 되어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많은 고민이 나타나야 할 것이다.

또한 국내정치가 여전히 중요한 세력 갈등의 장이며 세계화에도 불구하고 국민국가의 정책이 경제의 관리와 체제의 향방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점을 고려할 때, 전세계적인 반세계화 운동과 국내적인 진보정치간의 연대와 결합의 노력이 요구되고 있다. 최근 많은 나라들에서 반세계화 운동이 활발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내의 좌파세력은 여전히 그다지 커다란 발전을 보이지 못하고 있는 것은 반세계화 운동과 국내의 진보정치 간의 거리를 보여준다. 이는 역시 반세계화 운동의 주장이 그 감정적인 호소에도 불구하고 세계화를 지지하는 입장과 세력에 비해서 이론적 그리고 현실적으로 그 힘이 미약함을 반영하는 것이다.

여전히 개방과 세계화가 경제에 도움을 주고 반세계화와 분배의 요구는 성장을 해칠 것이라는 주류경제학의 힘과 시장중심적 이데올로기가 압도적인 상황에서 비판적인 입장을 대변하는 주장과 논리가 학계 그리고 정책과정에서 힘을 얻으려면 역시 더욱 세련되고 치밀한 연구의 발전이 필요할 것이다. 현실에 발 딛고 선 이론과 사회운동과의 상호작용이 이루어질 때 반세계화 운동은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될 수 있을 것이고 국내정치에서도 실질적인 힘으로 성장하게 될 것이다.

앞서 살펴보았듯 두 얼굴을 모두 지닌 세계화는 기회이자 동시에 위기이며, 특히 노자간, 노동자간을 포함한 국내적인 갈등을 증폭시키고 있다. 이를테면 외국 금융자본에게 금융시장이 개방되면 미국에서 공부하고 외국의 금융기관에서 일하는 이들에게는 세계화가 축복일지도 모르지만 경쟁과 구조조정으로 길바닥에 나앉은 해고자들과 늘어나는 저학력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는 세계화는 재앙일 수도 있다. 세계화와 함께, 이른바 20대 80 사회로 불리듯 소득분배의 악화가 심화되면 역시 사회적 갈등의 조정이 심각한 과제로 떠오르게 될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반세계화 운동이 압도적 다수인 사회적 약자를 얼마나 잘 설득하고 조직할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경제성장을 촉진하는 생산적인 방식으로 갈등을 조정하는 지혜로운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반세계화 운동과 진보정치의 핵심적인 과제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한편, 반세계화 운동의 조직방식도 관료화에 대한 과도한 반대와 다양성에 대한 지지로 인해 너무 분산되어 있으며 지도력과 조직화가 부족하다는 비판도 끊이지 않는다. 직접행동 전술과 같은 저항의 형태도 국제회의에 대한 스토킹에 그칠 수 있으며 압도적인 자본과 국가의 물리력에 대항하는 데에는 역부족인 것이 현실이다. 세계사회포럼의 구성과 조직방식도 상당한 한계가 있는데, 브라질의 노조 단체와 토지없는 농민운동의 주도 하에 다른 시민단체로 구성된 조직위원회(Organising Committee)가 형식적인 의사결정기구이지만 전세계의 여러 단체들로 구성된 국제의회(International Council)도 2차 포럼부터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둘 간의 관계는 여전히 모호한데, 주로 국제의회의 회의에서 조직위원회가 제안을 하고 내부적인 협의를 거쳐 국제 의회에서 합의로 주요한 의사가 결정된다. 하지만 앞으로는 국제의회의 역할이 보다 강화되고 내부적인 의사결정 메커니즘이 더욱 투명하게 확립되어야 할 것이 기대되고 있다.

이런 면에서 나오미 클라인은 세계사회포럼의 의미를 강조하면서도 그 조직구조가 “너무 불투명해서 결정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거의 알기가 불가능할 정도”라고 지적하고 있다.(Klein, 2001) 여러 비판들에 직면해서 세계사회포럼은 지난 4월 포럼의 조직과 형태를 더욱 발전시켜 2006년에는 전세계 각지의 동시다발 투쟁을 추진하고 2007년에는 아프리카에서 포럼을 개최하여 전세계를 포괄하며, 5번째의 포럼에서는 주요 테마를 결정해서 토론 이후 전략과 행동의 결의까지 실질적인 흐름을 만들어내기로 결의하기도 했다. 그러나 세계사회포럼 자체도 모임의 장(arena)인가 아니면 행동의 주체(actor)인가라는 점에서도 여전히 불분명하며 이에 관한 내부의 논란도 분분하다.(Teivainen, 2002)

199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의 지배와 함께 급변하고 있는 노동운동과 반세계화 운동이 어떻게 서로 영향을 미치며 발전해갈 것인가 하는 점도 중요한 관심사이다.(정성진, 2001) 1980년대 이후에는 사회민주주의의 약화와 함께 이른바 코포라티즘에 기초한 노동운동은 약화의 길을 걷고 있다. 많은 이들은 잘 조직된 노동조합의 연합체가 전국적인 차원에서 자본가 혹은 국가와 협상하여 서로 타협하며 임금과 고용 등의 협상을 이끌어내는 이러한 체제는 이제 국민국가와 노동에 대한 세계화의 압력으로 유지하기가 어려워지고 있다고 보고한다. 예를 들면, 사회민주주의의 기지였던 스웨덴에서도 1980년대 초반까지는 노조의 전국적 조직과 고용주의 조직이 직접 임금교섭을 하며 중앙집권적인 노사관계를 유지해 왔으나 80년대에는 기계와 금속산업을 필두로 한 주요 기업들이 기업 단위의 고용정책과 국제화를 지향하면서 개별적인 노사타협을 선호하게 되어 이러한 체제는 붕괴하기 시작했던 것이다.(정성진, 2003)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협효과 등으로 대표되는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의 노동에 대한 압력은 많은 국가들에서 노동자의 저항과 투쟁을 심화시키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노동운동은 수적으로는 쇠락하는 듯 보이지만, 이러한 갈등의 심화는 사회보장 축소와 공공부문 개혁을 반대하며 무려 5백만 명이 참가한 1995년 프랑스 공공부문 노조의 총파업, 1997년 170만이 참가한 이태리 노조의 파업, 1997년 노동시장 유연화에 대항하는 미국 UPS 운송노동자들의 파업. 2001년 경제위기와 실업을 배경으로 한 아르헨티나 민중들의 대대적인 자발적 봉기 등에서 보이듯 노동자들의 불안은 여기저기서 폭발시키고 있다.

실제로 시애틀 등의 시위 군중조차도 조직적인 동원과 저항은 노조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나아가 미래의 근본적인 체제적인 변화를 위해서는 역시 반세계화 운동이 노동운동의 사회경제적인 힘과 결합되어야 할 것이며 노동운동도 급속히 성장하고 있는 반세계화 운동의 에너지를 수혈받으며 새로이 발전될 수 있을 것이다.

여러 한계에도 불구하고 반세계화 운동은 앞으로 진보운동의 핵심적인 영역으로 발전할 것으로 보이며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와 전세계적 사회정의운동 세력 간의 갈등은 21세기 자본주의의 가장 심각한 갈등의 전선이 될 전망이다. 하지만 이러한 운동의 진정한 발전을 위해서는 누구나 인식하듯 ‘반’세계화의 외침만이 아니라 ‘대안적’ 세계화의 노력이 필수적이며 진지한 대안의 고민과 제시 없이는 ‘다른 세상’이 가능하다는 믿음은 기대로만 그칠지도 모른다.

***반대에서 대안으로, 혹은 대안적 원칙들**

무언가에 반대하고 저항하기란 어쩌면 쉬운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반대라는 깃발 하에서는 다양한 사람들을 모아낼 수 있다고 하더라도 이들의 통일된 힘에 기초하여 무언가를 새로이 건설하는 것은 얼마나 힘든 일이던가. 무언가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대안 없이는 저항 자체도 약화될 것이 자명하다. 신자유주의의 첨병이었던 대처가 소리 높여 외쳤던 것이 바로 “대안은 없다(There Is No Alternative: TINA)” 아니던가, 재미있게도 1970년대 중반 실패하고 만 영국 노동당의 경제전략의 이름은 “대안적 경제전략(Alternative economic strategy)”이었다.

물론 미리부터 구체적으로 대안적인 사회의 상을 그리는 것은 불가능하고 어쩌면 불필요한 일인지도 모른다. 정치는 누구 말마따나 생물처럼 변화무쌍하며 미래는 언제나 현재의 상호작용 속에서 열려 있는 것 아닌가. 다양한 반세계화 운동진영의 목소리를 한데 모아서 통일된 대안을 제시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연구와 논쟁 무엇보다 저항과 세계시민들의 삶에 대한 천착이 필요할 것이다. 반세계화를 외치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금융자본에 의해 주도되는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아니라 단기금융자본의 세계적 운동을 통제하고 국내외적으로 공평하고 동시에 효율적이며 안정적인, 시장 뿐 아니라 국가와 공동체 등에 의해 조절되는 경제체제가 추상적인 지향일 것이다. 무슨무슨 자본주의든 뭐든 이름을 붙이더라도 아무래도 좀더 민주적이며 사회주의적인 형태를 누구나 그리고 있지 않을까.

즉 토빈세 혹은 국내적인 수준의 단기금융자본에 대한 다양한 통제조치, 초국적자본에 대한 개별국가의 다양한 규제의 확립, 개도국의 발전을 지지하는 여러 정책들을 허용하는 국제무역체제의 추진, IMF의 구조조정의 개혁과 더욱 안정적이고 성장촉진적인 국제금융체제의 모색, 세계경제 활성화를 위한 선후진국간의 적절한 정책협력, 국내적으로는 보다 누진적인 세제와 사회복지의 확립, 노동시장의 안정화와 적극적이고 공적인 노동훈련, 상품화의 억제와 교육과 의료 등 공공서비스 부문의 확대 그리고 공공부문의 내부적 개혁, 안정적이고 높은 투자를 위한 산업정책과 적절한 금융시스템의 확립, 그리고 생산과 기업 차원에서의 노동자의 참여와 정책수립과 집행에서 시민의 참여 강화 등. 여전히 추상적이지만 이러한 원칙들 하의 다양한 수단들은 창조적으로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대안의 고민을 위해서는 물론 서구의 사회복지국가나 소련 등의 계획경제까지 다양한 경험들의 교훈과 세계화가 상당히 진전된 현재의 상황, 그리고 각국의 역관계까지 다양한 요소들이 함께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다행히도 8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에 대한 진지한 반성은 경제학에서조차 논의의 추를 반대쪽으로 돌리도록 만들어, 여전히 한계가 있지만, 극단적 자유화에 우려를 표하는 포스트 워싱턴 컨센서스라든가 새로운 발전경제학이 고민되고 있고, 제 3의 길의 주창자 기든스조차도 최근 너무 오른쪽으로 꼬부라져버린 길을 우려하며 국가의 역할과 공공성의 회복을 강조하고 있다.

여기서는 구체적인 정책 대신, 반세계화 운동을 주도하고 있는 <세계화에 관한 국제포럼(International Forum on Globalization)>이 제시하는 대안적인 의제의 몇몇 원칙들만 살펴보자. 이들은 우선 일부 개도국에서 나타나고 있는 공동체의 직접적인 자원 통제나 예산에 대한 참여 등 새로운 민주주의와 대중의 참여를 첫 번째 원칙으로 제시한다. 그리고 세계경제보다는 지역경제와 지역의 자율성을 강조하고 동시에 환경의 지속가능성을 지지한다. 또한 UN 인권선언에서 제시된 바와 같이 인간의 정치적 그리고 경제적 기본권을 옹호하며, 특히 노동할 수 있는 권리와 고용의 안정성 등 노동자의 권익을 주장한다. 그리고 식량의 안정적인 공급과 함께 빈부의 격차 완화를 통한 공평성의 증진을 강조하고, 마지막으로 세계화에 의해 위협받고 있는 문화적, 생태적, 경제적 그리고 사회적인 다양성을 옹호한다.(International Forum on Globalization, 2001) 물론 이들의 주장이 반세계화 운동의 그룹들을 모두 포괄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더욱 구체적인 아이디어와 여러 논의들은 이들의 책, ‘다른 세상은 가능하다’와 이들의 웹사이트 www.ifg.org 를 참조할 수 있다.

물론 좋은 원칙들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것들이 어떻게 서로 조화를 이룰 수 있을지 어떤 구체적인 정책으로, 특히 현실에서 많은 이들이 지지할 수 있는 형태로, 제시될지에 대해서는 많은 논의들이 필요할 것이다. 특히 어떤 체제도 경쟁 속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압력, 그리고 경제적 효율성의 중요성은 진보적이고 대안적인 세계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에게도 어려운 과제가 되고 있다. 많은 논자들이 성장과 분배의 동시적인 달성, 즉 평등주의적 성장(egalitarian growth)의 가능성에 매달리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한국의 경우에도 대안의 고민과 모색의 어려움은 예외가 아니다. 현재의 개방된 신자유주의적이고 미국적인 자본주의가 문제라면, 단순한 반대를 넘어서서 과연 어떤 다른 길이 가능할까, 그것은 대타협에 기초한 사회민주주의일까 아니면 다른 무엇일까. 자유무역협정이나 자본시장 개방은 얼마만큼 그리고 어떻게 추진되어야 할 것인가, 그리고 그것은 얼마나 실행가능한가(feasible), 우리의 현재 그리고 미래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생산적인 토론이 진정으로 요구되는 시점이다. 미래는 바로 지금 모두의 노력에서부터 시작되는 법, 활동가들, 학자들, 나아가 정책결정자들의 분발, 그리고 무엇보다 경제정책의 결과를 피부로 느끼는 시민들 스스로의 관심과 참여에 의해 결정된다는 점을 상기하면서 여기서 끝맺도록 하자.

***참고문헌**

Klein, N. 2001. Farewell to "end of history": organization and vision in anti-corporate movements, in Panitch, L. and leys, C. eds., Socialist Register 2002: A World of Contradictions. Londeon: Merlin Press.

Calinicos, A. 2003. Manifesto of Anticapitalism. 정성진, 장진상 역, 반자본주의 선언.

정성진, 2003.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와 노동의 대응: 반세계화 운동의 교훈. 경제와 사회, 58.
Bond, P. 2000: Their reforms and ours: Bello, W. et al., eds, Global Finance.

Teivanine, T. 2002. The World Social Forum and global democratisation: learning from Porto Alegre. Third World Quarterly, 23(4)

Tabb, W. 2001. Amoral Elephant. Monthly Review Press. 이강국 역. 반세계화의 논리. 2002. 월간 말

Friedman, T. Senseless in Seattle. 1999. 12. 1. New York 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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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명. 2003. 다른 세상은 가능하다. 필맥. International Forum on Globalization, Another World is Possi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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