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테스탄트’의 탄생

  • 권홍우 논설위원
  • 2016-04-19 06:00:00
  • 사내칼럼
1529년 4월 19일, 독일 서남부 슈파이어. 제국회의(Imperial Diet)에 참석한 복음주의파(루터파) 영주 6명과 14개 제국자유시 대표들이 위기감 속에 머리를 맞댔다. 3년 전 열렸던 슈파이어 1차 제국회의에서 어렵게 얻어낸 신앙의 자유가 위협받았기 때문이다. *

마르틴 루터가 면죄부를 판매하는 교황과 교회에 대해 95개조의 반박문을 발표하며 개혁을 주창했던 게 불과 12년 전인 1517년 10월 말. 빠르게 세를 불려 나간 루터파가 ‘가톨릭 신앙의 도시’인 슈파이어에서 1526년 열렸던 1차 제국회의를 통해 제한적이나마 최소한의 신앙 자유를 인정받을 수 있었던 원인은 유럽의 정세 덕분.

합스부르크 가문의 위세를 업고 19세의 나이로 1519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선출된 카를 5세는 종교적 관용을 베풀 마음이 전혀 없었으나 포용 정책을 펼쳤다. 외부의 적을 처리하는 게 더 급했기 때문이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자리를 놓고 경쟁했던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와 끊임없이 전쟁을 치렀고 오스만 투르크도 호시탐탐 국경을 넘봤다.

등 뒤의 적을 만들지 않으려는 카를 5세의 계산은 이탈리아를 둘러싼 프랑스와의 경쟁에서 승리한 뒤 ‘내부의 이단부터 처단하자’는 결심으로 바뀌었다. 카를 5세는 1529년 3월 소집된 슈파이어 2차 제국회의에 대리인을 내보내 루터파 제후들에게 가톨릭으로의 복귀를 강요했다.

루터파는 공포에 쌓였다. 이전까지와는 전혀 다른 상황이 펼쳐진 탓이다. 당시 신성로마제국은 이름만 거창한 ‘제국’이었을 뿐 유력 제후와 영주, 부유한 자유도시들로 구성된 느슨한 정치적 연합체에 불과했었다. 제국회의의 결정을 우습게 아는 제후들도 적지 않았다. 황제도 선거권을 가진 유력 영주(선거후)들이 선출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카를 5세 치하에서 신성로마제국과 제국회의는 위상이 남달랐다. 카를 5세는 우선 돈과 땅이 많았다. 수차례 결혼 동맹을 통해 오스트리아와 동부 유럽 지역은 물론 스페인과 이탈리아 북부, 저지대지역(네덜란드와 벨기에, 서프랑스 일부)과 중남미 식민지로 구성된 광활한 영토를 가진 군주였다.**

영국왕 헨리 8세도 한때 경쟁에 끼어들었던 신성로마제국 황제 선거에서도 카를 5세는 막판에 80만 투카트의 자금을 살포해 누구보다 먼저 선거운동에 나서 30만 투카트를 썼던 프랑스의 프랑스와 1세를 눌렀었다. 돈의 힘으로 황제로 오른 카를 5세는 잔혹성도 보여줬다. 1527년 열흘간 약탈 당한 끝에 로마시대로부터 내려온 건축물과 문화재가 대부분 파괴된 ‘로마의 약탈’이 바로 카를 5세 휘하 신성로마제국 군대와 독일 용병들의 소행이었다.

루터파 제후들과 자유도시 대표들은 공포에 짓눌렸어도 굴복하지 않았다. ‘서구 문명사 최대의 오점 중 하나’라는 로마의 약탈을 자행한 군대를 지휘한 카를 5세의 신성로마제국에 맞서 종교적 자유를 인정한 3년 전 약속을 지키라고 역공했다. 똘똘 뭉친 루터파는 약속 불이행에 대한 ‘항의 서한(protestation von Speyer)’을 들이밀었다. 루터파가 이때 얻었던 별명인 ‘프로테스탄트(Protestantㆍ항의하는 자)’는 시간이 흐르며 신교도 전체를 통칭하는 용어로 굳어졌다.***

항의 서한을 받은 카를 5세는 군대를 동원하고 싶어도 참을 수밖에 없었다. 오스만 투르크의 군대가 신성로마제국의 핵심 도시이자 합스부르크 가문의 본거지인 비엔나를 노리고 국경을 넘었기 때문이다. 외적의 침입으로 봉합된 갈등은 17세기 초반 30년 종교전쟁(1618~1648)으로 터져 나오고 말았지만 16세기 초중반 국제역학 관계를 이용해 힘을 기른 신교는 자본주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독일의 철학자이며 사회학자인 막스 베버가 명저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1904년)’에서 ‘프로테스탄트의 종교 윤리에 근거한 근검절약이 합리적 정신과 근대 자본주의 발전으로 이어졌다’고 설파한 데에도 이 같은 역사적 배경에 담겨 있다. 베버의 관찰이 과연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해 보이는 게 두 가지 있다. 서유럽에서 종교는 신교와 구교를 막론하고 쇠퇴 일로라는 점, 한국 프로테스탄트의 짧은 역사에는 항의나 저항보다 굴종과 야합이 많아 보인다는 점이다.

/권홍우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hongw@sedaily.com

* 신성로마제국의 주요 의사 결정기구였던 제국회의는 754년부터 1529년까지 765차례 소집됐는데 같은 도시에서 회의가 이어졌던 사례는 슈파이어제국회의(2차례)와 바로 직전의 뉴렘베르크제국회의(1522~24·3 차례) 뿐이다. 그만큼 이 시기에 종교 갈등을 비롯해 제후들이 풀어야 할 과제가 많았다는 얘기다.

** 네덜란드 지역에서 자랐던 그는 막대한 영토와 부와 권력을 소유해 ‘중세의 마지막 황제’이자 ‘근대 최초의 황제’로도 불린다.

*** 가톨릭(Catholic)의 어원은 ‘보편적인, 공적으로 인정된’이라는 뜻을 지닌 라틴어 형용사 ‘Cayholicus’. 가톨릭이라는 단어에는 ‘전세계적인 만인의 종교’라는 의미가 담겨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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