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닉슨


새벽 2시 30분경, 캄캄한 건물 안을 회중전등 불빛이 이리저리 비추고 있었다. 한껏 죽인 발소리, 낮게 속삭이는 말소리. 뭔가 야릇한 분위기 속에서 사무실의 시계 바늘은 무심히 똑딱이며 새벽을 걷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뭔가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와 함께 다급히 뛰는 소리가 텅 빈 건물에 울려 퍼졌다.

 

“경찰이다, 손 들어!” 범인들은 그리 격렬히 저항하지 않았고, 다섯 사람이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그뿐이었다. 흔하디 흔한 건물털이 사건. 하지만 무심한 시계 바늘이 계속해서 돌아가는 동안, 문제가 보통이 아니라는 것이 조금씩 드러났다.

 

 

잡힌 범인들은 무기나 금고털이 도구가 아니라 도청 장비를 갖고 있었다. 그리고 다섯 명 중 세 사람은 쿠바인이었고, 하나는 처음에는 쿠바인으로 알려진 이탈리아계 미국인. 그리고 남은 한 사람은 제임스 매코드라는 미국인이었다. 이들이 붙잡힌 곳은 워싱턴의 워터게이트 종합빌딩, 민주당 전국위원회가 입주해 있는 곳이었다. 처음 이 사건을 전해들은 닉슨의 보좌관들은 픽 웃었다고 한다. 

 

 

“뭐 주워들을 게 있다고 민주당 전국위원회를 도청하지? 하려면 선거 캠프를 해야지 말이야.” “그러게. 게다가 저쪽(민주당 후보 맥거번)보다 19퍼센트나 앞서고 있는데 말이지…. 어디서 보냈는지 모르지만, 우리 쪽은 아닌 게 틀림없어.”

 

하지만 틀림이 있었다. 6월 19일, <워싱턴포스트>는 다섯 명의 침입자 중 미국인인 제임스 매코드는 전직 CIA 요원이며 닉슨 재선 운동본부의 경비조직에 소속되어 있다고 보도했다. 그리고 그 다음 날에는 그들의 수첩에서 역시 CIA 출신이며 닉슨을 위해 일했다고 알려진 하워드 헌트의 전화번호가 발견되었다는 기사가 나갔다. 6월 20일에는 민주당이 닉슨 재선 운동본부를 상대로 수백만 달러의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하지만 백악관에서는 워터게이트와의 연관성을 완강히 부인했다. 이 사건은 기본적으로 쿠바인들 몇몇이 벌인 하찮은 절도 미수 사건일 뿐이며, 매코드는 조직과 무관하게 사적으로 일을 벌였다는 입장을 되풀이했다. 당시 FBI는 이 사건을 수사하며 닉슨 재선 운동본부에서 다섯 명의 범인에게 자금이 흘러 들어갔다는 것, 재선 운동본부와 이들이 긴밀한 연락을 주고받고 있었다는 것 등을 밝혀냈으나 공표하지는 않고 있었다. 다만 <워싱턴포스트>만이 그런 사실을 계속 보도하고 있었는데, ‘익명의 제보자’로부터 들은 말이라면서 사흘이 멀다 하고 특집 기사를 내보냈다(이 익명의 제보자는 2005년에 가서야 FBI 간부인 마크 펠트였다고 공개되었다). 

 

닉슨은 <워싱턴포스트>에 유형무형의 압력을 가하는 한편 CIA를 움직여 FBI의 수사 활동을 막으려고 획책했으나 둘 다 여의치 않았다. 그래도 여론은 아직 이 사건에 큰 영향을 받지 않았다. 그리하여 1972년 11월, 닉슨은 종전의 예상대로 민주당의 맥거번을 큰 표 차이로 누르고 재선에 성공했다. 워터게이트는 찻잔 속의 태풍으로 그치는가 싶었다.

 

 

그러나 사건은 정작 닉슨이 다시 백악관의 주인이 되던 전후부터 심각해졌다. <워싱턴포스트> 말고도 <뉴욕타임스>, <로스앤젤리스타임스> 등이 경쟁적으로 워터게이트 기사를 내보내고 있었다. 그 중에는 법무장관 존 미첼이 민주당 관련 정보 수집을 총지휘했다는 것, 도널드 새그레티라는 변호사가 전국을 다니며 닉슨 재선을 위해 불법도청을 비롯한 정치공작을 벌여왔으며 워터게이트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는 것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또한 사법부 쪽에서도 닉슨을 몰아붙였다. 다섯 명의 침입자들에 대한 재판 과정에서 존 시리카 판사는 관련 사실을 털어놓는 대가로 그들의 형량을 줄여 주는 거래를 했고, 그에 따라 충격적인 증언이 잇달았다. 문제가 심각해지자 닉슨은 애초의 “백악관은 이 사건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입장을 뒤집고 “대통령은 까맣게 몰랐으며, 아랫사람들이 제 멋대로 저지른 일”이라는 입장을 표명했다. 그리고 보좌관 밥 홀드먼과 존 엘리히먼을 해직시키며 사과 의사를 표명했다.

 

그러나 사태는 악화일로를 치달았고, 닉슨은 취임 첫해인 1973년을 온통 워터게이트 문제로 소비해 버렸다. 집무 중의 모든 대화를 녹음한 테이프가 있음이 알려지면서, 그 테이프를 놓고 1973년 5월부터 상원 주최 워터게이트 청문회가 열렸다. 닉슨은 국가 기밀 사항이 있다는 이유로 테이프 공개를 거부했고, 끝내는 전체의 백분의 일에 불과한 40시간 분량만을 공개했다(테이프가 완전히 공개된 것은 1996년이었다). 이를 통해 법무장관 존 미첼, 국무장관 헨리 키신저 등이 온갖 도청 활동과 문서 위조, 매수 등의 부정행위와 연관되어 있었음이 밝혀졌다. 또한 닉슨이 거액의 탈세를 했다는 사실, 또한 선거 과정에서 걸프 오일을 비롯한 미국의 대기업들의 불법 자금을 받았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벼랑 끝에 몰린 닉슨은 자충수까지 두었다. 1973년 10월에 이 사건을 맡은 특별검사 아치볼드 콕스를 전격 해임한 것이다. 직접 해임권자인 법무장관이 대통령의 지시를 거부하며 사임하고, 법무차관까지 사임해 버리자 결국 특검 해임은 법무부 송무실장의 손에서 이루어졌다. 언론에서 “토요일 밤의 학살”이라고 대서특필한 이 사건으로 닉슨에 대한 민심은 완전히 떠났다. 상원 청문회와 특검을 통해서도 워터게이트가 닉슨이 직접 지시해서 벌어진 일이라는 명백한 증거는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그 사건의 진상을 은폐하려 했음은 분명했고, 워터게이트를 넘어 여러 비리 혐의가 드러나 버렸다. 1974년 7월, 하원은 닉슨의 탄핵을 결의했다.

 

닉슨은 이제 상원에서 탄핵안을 승인하면 자신이 미국 사상 최초로 탄핵된 대통령이 될 것임을 알았고, 탄핵안 승인이 거의 확정적임도 알았다. 그래서 1974년 8월 8일에 먼저 사임해 버렸다. 제럴드 포드 부통령이 대통령직을 이어받았고(원래의 부통령 애그뉴는 1973년 10월에 닉슨과 연관된 비리 혐의로 사임했다), 포드는 9월에 닉슨을 사면했다. 1972년 6월 17일에 시작된 워터게이트 사건의 대단원이었다.

대통령직을 물러난 닉슨은 그 후 언론의 인터뷰에서 “내가 몇 가지 잘못을 저지르기는 했지만 사소한 것들이었다. 그밖에 경제 문제나 외교 활동 등 큰 것들은 성공적으로 수행했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여유 있는 태도였다. 그러나 남들이 보지 않을 때는 그렇게 여유롭지 못했다고 한다. 국무장관이었던 키신저를 붙들고 울음을 터뜨리며 “이해할 수가 없어. 내가 대체 무슨 잘못을 했다는 거지?”라고 부르짖곤 했다고도 한다. 이후 그는 회고록 집필이나 정치자문 등의 활동을 하며 살다가 1994년 4월 22일에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리처드 닉슨은 캘리포니아 주 요바린다에서 태어났다. 휘티어 대학을 나와 듀크 대에서 법률을 공부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진주만 습격 후 자원입대해 해군에서 복무했고, 공화당에 입당하여 1946년에 하원의원이 되었다. 하원의원 시절 반미활동위원회에서 일하며 본격적인 매카시즘이 불어 닥치기 직전에 대표적인 ‘반공 투사’로 우파의 주목을 받았다. 유명한 앨저 히스의 간첩 활동 폭로도 그가 주도한 것이다. 이런 명성에 힘입어 1950년에 상원의원이 되었고, 1952년에는 아이젠하워의 러닝메이트가 됨으로써 미국 부통령이 되었다. 매우 순조로운 정치경력이었다.

 

닉슨은 매우 유능한 정치인이자 행정가였으며, 늘 성실하고 업무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래서 당 간부들에게는 많은 지지를 받았지만, 대중적인 인기는 그에 못 미쳤다. 늘 뭔가 음울하고 무미건조해 보이는 이미지를 벗지 못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는 사생활에서도 언제나 뭔가 고민이 있는 사람처럼 보였으며,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에서조차 가슴을 터놓고 남들과 어울리는 모습이 좀처럼 없었다고 한다. 결국 그 이미지 때문에 닉슨은 1960년에 ‘쉬운 상대’처럼 보였던 J.F.케네디에게 패배하여 백악관의 꿈을 접어야 했다. 1962년 캘리포니아 주지사 선거에도 패하자 ‘정계 은퇴’를 입에 올릴 정도로 낙담했으나, 결국 재기하여 1968년, 민주당의 험프리를 누르고 미국 제37대 대통령이 되었다. 하지만 매우 아슬아슬한 승리였다.

 

악관에서 닉슨의 활동은 그가 밝혔듯 ‘큰 것에서는 대체로 성공’이었다. 그는 부통령 시절에 사상 최초로 소련을 방문해 흐루시초프와 회담함으로써 세계를 놀라게 했고, 대통령이 되어서는 1969년에 ‘닉슨 독트린’을 발표하여 미국은 공격적인 세계전략을 포기할 것이며 집단 안전보장과 화해 협력을 위주로 하는 세계질서를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천명했다. 그리고 1971년에는 중국과 친선 탁구 시합을 기회로 관계개선을 모색하는 ‘핑퐁외교’를 벌이고, 1972년에 북경을 공식 방문하여 수교를 맺음으로써 동서 데탕트를 본격화했다. 1973년에는 베트남과 파리 협정을 맺어 미국을 악몽과도 같던 베트남전의 수렁에서 건져냈다.

 

경제에서도 성과가 좋았다. 닉슨은 당선 후 당시 미국경제의 가장 큰 이슈였던 물가와 실업 문제 해결에 착수했고, 대체로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케네디와 존슨 정부를 거치며 팽배해진 국방예산을 삭감하고 대신 복지예산을 늘리는 정책도 취했다. 이밖에 공교육 문제와 인권 개선 등에 대해서도 공로가 높았다고 평가된다. 이런 성과 덕분에 그의 인기는 꾸준히 상승했고, 문제의 1972년에는 민주당 후보를 19퍼센트나 앞설 만큼 여유 있는 상황이 되었다.


 

그러나 천성적으로 안심을 못하는 닉슨은 그런 여유를 즐기지 못했다. 그는 항상 콤플렉스와 ‘적들의 음모’에 대한 망상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런 성향은 그의 성장기부터 이루어졌다. 고교 졸업 때 하버드 대학에서 장학금을 제의할 만큼 우수한 성적이었지만 워낙 가난한 집안 환경 때문에 휘티어 대학을 갔고, 이는 유복한 집안 출신에 아이비리그 명문대를 나온 다른 정치인들(케네디 같은), 그리고 언론인들에 대한 콤플렉스를 낳았다. 당시로서는 아직 미국의 변방에 가깝던 캘리포니아 출신이라는 점도 늘 마음에 걸렸다. 자신의 업적에도 불구하고 선거에서 계속 불운했던 이유도 그런 주류 정치인과 언론인의 ‘닉슨 죽이기’ 때문이었다고 믿었던 닉슨은(오늘날 곧잘 사용되는 “언론은 검증 받지 않은 권력이다. 그런 권력이 선출된 권력을 위협한다”는 말은 사실 1969년에 닉슨의 부통령 애그뉴가 했던 말이다) 뭔가 ‘꼼수’를 부림으로써 물밑에서 ‘적들’을 감시하고 공격하려는 시도를 곧잘 했다. 그래서 압도적으로 유리한 상황에서도 불필요한 워터게이트 같은 일을 벌여, 결국 자기 발목을 잡고 말았다는 게 많은 심리학자와 정치학자들의 분석이다.

 

 

하지만 닉슨의 ‘망상’이 망상만은 아니었고, 워터게이트는 하나의 음모였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폴 존슨은 그것이 1970년대에 들어 비정상적으로 커진 언론권력에 의한 정치권력의 ‘마녀사냥’이었다고 한다. 그러면 워터게이트는 날조였는가? 그렇지는 않다. 하지만 도청이나 불법정치자금은 오랫동안 미국 정치의 관행이었고, 특히 케네디와 존슨 정부 때 심각했다. 그런데도 닉슨이 희생양이 된 것은 닉슨의 생각처럼 그가 “듣보잡 대학을 나온 촌놈”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한편 대표적인 진보 사상가인 노암 촘스키는 다른 이야기를 한다. 닉슨이 ‘미국의 진정한 주인’인 다국적기업의 미움을 산 까닭에 백악관에서 “쫓겨났다”는 것이다. 촘스키에 따르면 닉슨이 1971년에 금-달러 태환을 중지하고 브레턴우즈 체제를 붕괴시킴으로써 다국적기업이 큰 손실을 입었고, 따라서 ‘하수인’에 불과한 대통령이 자신들에게 반항하면 어떻게 되는지 보여주려는 본보기가 되었다고 한다. 충격적인 주장이지만, 꼭 설득력이 있지는 않다. 브레턴우즈 체제의 붕괴는 어차피 불가피했고, 오랫동안 신자유주의자들이 주장해온 것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워터게이트 이후 한동안 미국을 사로잡은 권위에 대한 불신(이것이 닉슨보다 더 주변적인 정치인이던 지미 카터가 대통령이 될 수 있게 했다)이 주류 언론인이나 기업인에게 별로 유리했을 것 같지도 않다.

 

한편 론 콜로드니와 로버트 게틀린은 <조용한 쿠데타>라는 책에서 닉슨의 국방정책에 불만을 가진 군부가 그를 내몰았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사실 관계가 많이 부정확함이 지적되어 곧 잊혀졌다. 이런 음모론을 꼭 귀담아 들을 것은 없다. 하지만 “워터게이트는 닉슨의 유례없는 부정행위였으며, 그가 사임함으로써 미국은 대통령조차도 잘못이 있으면 용서하지 않는 사회임이 확인되었다”는 우리의 상식에 대해서는 한번쯤 다시 생각해볼 필요는 있지 않을까.

 

 

워터게이트는 우리나라에도 널리 알려진 사건임에도, 워터게이트의 전말을 자세하고 포괄적으로 소개하는 책은 찾아보기 힘들다. <닉슨 회고록>(김기실 역, 한섬사)과 그의 보좌관이던 밥 홀드먼이 쓴 <권력의 종말>(신현주 역, 샘터)은 1970년대 말과 1980년에 출판되어, 지금은 절판 상태다.

 

최근에 나온 <권력과 싸우는 기자들>(차미례 역, 프레시안북)은 워터게이트 사건을 집중 보도한 <워싱턴포스트>의 두 기자, 밥 우드워드와 칼 번스틴을 조명한 책이다.


권력과 싸우는 기자들지혜의 아홉 기둥살아있는 미국역사

 

이 책에서는 폴 존슨의 “마녀사냥론”과는 반대로 워터게이트 당시의 언론이 백악관 보도에 대한 한 “권력의 시녀”에 불과했으며, 이 두 젊은 기자들의 용기와 지혜로 워터게이트 사건이 전모를 드러내게 되었다고 한다.

 

<지혜의 아홉 기둥>(안경환 역, 비즈니스맵)은 그 밥 우드워드가 쓴 책으로, 미국 연방대법원을 다루면서 워터게이트 사건의 전말도 법원의 시각에서 다루고 있다. 하워드 진의 <살아있는 미국역사>(김영진 역, 추수밭)는 진보적인 시각에서 워터게이트를 바라본다. 하워드 진은 촘스키처럼 닉슨이 기업인들에게 쫓겨났다고는 보지 않지만, 워터게이트 수사가 기업인들을 건드리려는 시점에서 갑자기 멈췄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의 결론은 “워터게이트 이후 미국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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