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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임시정부청사포토
대한민국임시정부청사포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과 이동

    1919년 거족적인 3·1운동 이후 많은 민족 지도자들은 보다 조직적이고 지속적인 독립운동의 전개를 위하여 각처에서 임시정부 수립운동을 추진하였다. 노령의 ‘대한국민의회’, 상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서울의 ‘한성 정부’ 등이 그 결과로 수립된 대표적인 임시정부였다.

    3개의 임시정부는 각각 각료를 구성한 후 헌법을 제정하고 독립선언서에 기초한 민주공화정부의 수립을 선포하였다. 그리고 단일정부로 통합되어야 한다는 국민적 여망에 따라 곧 통합작업이 진행되였고, 1919년 9월 제6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새로운 임시헌장을 제정함으로써 마침내 통합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였다. 임시정부는 수립직후부터 내정, 외교, 군사, 재정 등 각 방면으로 정책을 수립하는 한편 독립운동의 장기화에 대비하고 민족역량의 증대를 위하여 한인 2세의 교육과 독립운동의 홍보에도 노력을 기울였다. 또한 각종 국제회의에 대표단을 파견하여 한국독립의 당위성과 일제침략의 부당성을 주장하는 등 적극적이고도 체계적인 외교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23년 상해에서 개최된 국민대표회의를 고비로 일시적인 침체의 길을 걷게 되였다. 이러한 임시정부에 활력을 준 것은 이봉창, 윤봉길 의사 등이 가담했던 “한인애국단”의 활동이었다.

    이봉창의사는 1931년 한인애국단에 가입하였고 1932년 1월 8일 일본국왕이 관병식을 마친 후 앵전문 앞에서 폭탄을 투척하였다. 윤봉길 의사는 국내에서 농촌계몽운동을 전개하다가 1931년 상해로 망명하였다. 1932년 4월 김구주석의 주선으로 ‘한인애국단’에 가입한 윤봉길의사는 4월 29일 상해 홍구공원(지금의 노신공원)에서 백천 일본사령관을 폭살시키는 캐거를 이루었다.

    윤봉길의사의 쾌거는 ‘만보산사건’으로 악화된 한중양국민의 감정을 회복하고 중국정부로 부터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그리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새로운 활력을 얻게 되였다. 그러나 일제의 발악적인 수색과 탄압으로 임시정부는 불덕불 상해를 떠나 항저우, 저아싱, 즈언지앙, 창사, 광저우, 류저우, 치지앙 등 중국 관내지역을 전전하다가 1940년 중경에 정착하여 흐뜨러진 전열을 재정비하고 항일독립운동에 박차를 가하게 되였다.

중경시기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1940년 9월 중경에 정착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한국광복군을 창설하는 한편 전쟁수행과 광복 이후 조국의 재건에 대비하기 위한 체제정비에 착수하였다.

    1941년 11월 28일 임시정부는 ‘대한민국 건국강령’을 제정 공포하고 1942년 10월의 제34차 임시의정원 의회에서 각 정당 단체를 망라한 통합의회를 구성하고 전 민족적인 전시대책과 헌법개정논의를 진행하였다. 그 결과 1944년 제36차 임시의정원 의회에서 각 정당을 망라한 연합정부를 구성하고 조국독립에 대비한 헌법을 마련하였다. 이는 광복 이후 대한민국 헌법의 기초가 되었다.

    한편, 임시정부는 태평양전쟁 발발이후 종래의 청원외교의 방식을 참전외교의 방식으로 바꾸어 임시정부가 연합국의 일원으로서 국제적인 승인을 받기 위한 적극적인 외교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임시정부의 외교활동의 결과 카이로회담과 포츠담회의에서 한국의 독립을 보장받게 되였다.

임시정부의 군사활동

    초기에는 군대를 수립하는 객관 여건이 성숙하지 못 하였기에 임시정부는 다양한 군사정책을 택하였다. 조국과 거리가 멀어 무장활동에 참여할 수 없는 미주지역에서는 독립군을 양성하였고 압록, 두만강을 경계로 한국과 접해 있는 중국 동북지역에서는 일제와 실전을 전개할 독립군단을 편성하였다.

    그리고 임시정부가 위치한 지역 주변에도 무장단체를 편성해 운영하였다. 임시정부가 상해에 있을 때에는‘한국노병회’, ‘병인의용대’, ‘한인애국단’등을 조직해 무장활동을 펼쳤다.

    1932년 윤봉길의사 의거가 있은 후 임시정부는 중국측과 협의 해 많은 한인청년을 중국군관학교에 입교시켜 무장활동에 참여할 인재를 양성하였다. 많은 한인청년들이‘황포군관학교’, ‘육군강무학교’, ‘중국육군군관학교’등의 군사학교에 입교하여 근대적 군사 훈련을 받은 후 항일 무장활동에 참여하였다.

    1940년 9월 임시정부는 중경에 정착하고 9월 17일 임시정부의 직할무장부대인 한국광복군을 창설 해 조국이 광복되는 그날까지 항일투쟁을 이끌어갔다. 한국광복군은 구한말의 의병과 중국 동삼성에서 활동한 독립군의 전통을 이어 받은 민족의 군대였다.

    한국광복군은 창설 이후 1942년 ‘조선의용대’까지 편입하여 4개 지대와 특파단 공작대 등을 편성함으로써 조직적인 군사력을 갖게 되였다. 이 같은 한국광복군의 무장력을 바탕으로 임시정부는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대일선전성명서’를 발표하고 국제연합군의 일원으로 참전할 것을 천명하였다. 그리고 중국군은 물론 영국군과 미군과도 연합작전을 수행하여 인도와 미얀마 전선에까지 공작대를 파견하여 전투를 별였고 정보수집, 선전활동 등에 주력해 활동하기도 하였다. 그런가 하면 1944년에는 미군전략정보처와 군사합작을 합의하여 광복군 선발 대원들이 특수훈련을 받아 국내에 진공할 만반의 준비를 다 하였다.

    그러나 국내 정진대가 작전을 펼치기 전에 일제가 항복하고 실행되지 못 하였다. 광복 후 임시정부 요인들과 광복군 대원들은 기나긴 이국에서의 투쟁을 마치고 조국으로 환국하였다.

복원에 관하여

    1919년 3·1운동의 결실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마침내 상해에서 수립되였습니다. 이 후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조국이 광복 할 때까지 27년 간 온갖 역경속에서도 독립운동 중추기관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습니다.

    조국이 광복되는 50주년이 되는 1995년에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이어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사용한 마지막 연화지 청사를 복원하였습니다. 이번 복원공사는 중국 충칭시 인민정부 외사판공실과 문화국의 협조로 한국 독립기념관에서 추진하였으며, 현대중공업, LG그룹, 고합그룹, 대림산업, 대한항공 등의 기업에서 협찬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충칭의 기후로 인하여 낡아진 청사를 2000년 개·보수를 통하여 1호 2층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사활동전시실’을 신설하였습니다. 2000년 9월 17일 광복군 수립 60주년을 맞이하여 재개관식을 거행하였습니다.

    이 청사는 1992년 충칭시 정부의 비준을 받아 충칭시 문화재로 지정되였다.

    그리고 이 청사는 망국의 설움을 딛고 오로지 조국광복을 위해 헌신하신 애국선열들의 넑을 기리고 한중 우호의 새로운 이정표가 되었으면 간절한 소망입니다.

청사 배치도

 

호수

면적

비고

平方米

1호

1층

대한민국 임시정부 전시실

153.8

46.5

당시에는 경위대 사무실,선전부,완전 해체후 임시정부 전시실로 개조

2층

대한민국임시정부 군사활동 전시실

130.2

39.4

당시에는 문화부,선전부부장실,군무부,군사활동전시실로 개조

2호

1층

임시의정원 회의실, 휴게실

168.7

51.0

원형복원

2층

외무부, 외무부 부장실, 외무부 차장실

134.9

40.8

원형복원

3호

1층

경위대 사무실,내무부

110.7

33.5

원형복원

2층

재무부

109.9

33.3

원형복원

3층

김구 주석 판공실, 국무위원 회의실

114.1

34.5

원형복원

4호

1층

외빈숙소, 주석 비서실

48.4

14.7

신축 후 원형복원,방공호 복원

2층

국무의원(유동열,차리석,최동오,윤기섭)집무실 

48.4

14.7

신축 후 원형복원

5호

1

창고

47.11

14.2

원형복원

2

외빈 접대실

54.3

16.4

원형복원

3

관리 사무실

144.2

43.6

일부개조

편집: Liu K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