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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3) 광복과 분단, 그리고 북한의 전쟁준비

북한의 남침 준비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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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여기에서, 분단이 비극적 전쟁의 배경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비밀문서보관고’ 영상패널과, 전면에 보이는 보관고서랍을 열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국토가 반으로 갈리게 된 현실을 보여주는 자료들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전쟁의 배경을 숙지하셨나요?  이를 살펴보신 후에 이 방을 나가시면 북한의 남침 준비관련 자료들을 보실 수 있습니다.

좀 더 자세한 설명과 자료를 보시길 원하신다면, 하단의 관련 링크를 눌러주시기 바랍니다.

 

<참고>

남북분단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 일본이 연합국에게 무조건 항복을 거절하자 미국은 일본 영토에 원자폭탄을 두 개 떨어뜨렸고, 소련군은 한반도 북부 지역까지 진격했다. 이로써 한반도는 8월 15일에 일본 제국의 식민지에서 벗어나 독립, 광복절을 맞이하였으나 [제 2차 세계 대전] 이후 38선을 기점하여 일본군 무장해제를 명분으로 진주한 소련군과 미국군에 의해 남과 북으로 갈라져, 북쪽에 소련의 군정, 남쪽에 미국의 군정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분할 점령을 한국 전쟁의 배경으로 보는 것인 즉, 공산주의 국가인 소비에트 연방과 자본주의 국가인 미국이 한반도를 분할 점령하여 이념대결을 벌인 전쟁이 한국 전쟁이라는 곧 한국 전쟁을 대리 전쟁으로 이해하는 시각은 논리적으로 무리가 있다는 설명이 있다. 오스트리아와 독일도 제 2차 세계 대전 이후 분할 점령되었으나, 오스트리아는 1955년 분할 점령을 끝내고 영세중립국으로서 통일국가가 되었고, 독일도 독일연방공화국(서독)과 독일민주공화국(동독)으로 분단되었지만 동서간 외교적 노력으로 화해와 일치를 위한 대화와 교류를 했다는 것이 그 근거이다(사실 일본도 연합국들에 의해 분할 통치될 계획이였으나 예상보다 일본이 일찍 항복하는 바람에 무산되었다).

 

**한국전쟁 직전 남북 군사상황

한반도 내 일본군무장해제 점령군 철수

남쪽의 이승만과 북쪽의 김일성이 1948년 각각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를 세움과 동시에 남, 북 간의 긴장은 더욱 강화되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최고인민회의 간부회의를 통하여 통일을 위하여 점령군의 즉각적인 철수를 요구하였다. 소련군은 1948년 12월 시베리아로 철수하였고, 1949년 6월 29일 미군은 대한민국 정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약 500명의 군사고문단만 남기고 철수하였다. 그러나 김일성은 소련을 방문하여 비밀 협상을 하여 소련의 무기들이 대다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영토로 입수되었고 중국 인민해방군 역시 전쟁에 포함시키도록 하였다.

 

미 군부의 전략

미 군부는 한반도를 '전략적으로 포기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미국 군부 수뇌부의 사고관에서 '만일 소련이 동북아시아에서 3차 대전을 일으킬 가능성'이란 의문으로 대한민국의 가치를 평가하는데 가장 핵심적인 사고였다. 만일 미국이 육군전을 상정한다고 생각하면, 한반도 남쪽에 주한미군을 배치할 수 없었다. 한반도에서 3차 대전이 발발할 경우에 한반도에 투입될 소련 육군과 미국의 육군은 군사학적으로 근원적인 한계가 있었다. 소련과 한반도는 땅으로 연결되어 있지만, 미국 육군은 한반도에 투입되기 위해서는 태평양을 건너야 했다. 그런 상황에서 해군전과 공군전을 상정한다면 역시 한반도는 미국 입장에서 전혀 필요가 없었다. 어떠한 작전이라도 공군전과 해군전은 한반도를 우회해서 충분히 수행이 가능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미 군부는 잠정적으로 한반도에서 주한미군을 철수시키고, 만일 소련이 대대적인 도발을 감행할 경우에는 대한민국과 중화민국을 포기하고 북태평양에 있는 얄류산 열도와 일본으로 이어져 내려오는 도서방위선을 구축해 소련과 3차 대전을 수행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것이 미 군부가 1946년 비밀리에 수립한 핀서 계획과 문라이즈 계획이다. 핀서 계획과 문라이즈 계획의 도서방위선 구상이 바로 주한미군의 전면 철수를 명시한 애치슨 라인의 원형이다.

 

기타

이 밖에도 중화인민공화국 정부 수립, 소련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원조, 이승만의 북진통일론, 38도선 분쟁도 한국전쟁의 배경이라는 시각도 있다.

 

김일성의 스탈린 설득

북쪽의 김일성은 1949년 무렵부터 수 차례 소련의 지배자인 스탈린과 중국의 통치자인 마오쩌둥(모택동)을 만났으며, 공개된 구 소련의 문서에 의하면 그 당시 스탈린은 인민군이 절대적 우위를 확보하지 못하는 한 공격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인민군의 실력이 전쟁을 치를만한 실력이 아니라고 생각했을 뿐이 더러 미국과의 마찰을 두려워하여 무력 행사를 기피하였으나, 김일성과 마오쩌둥은 대한민국을 무력으로 침공하는 데 매우 적극적이었다. 그 당시 스탈린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강력한 군사적 원조를 하고 있었으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미국과 대한민국을 상대로 단독으로 전쟁을 치르는 것은 시기상조라고 판단하였다. 그럼에도 김일성은 수 차례 그를 설득하였고 스탈린 자신도 일부 연구자들이 옛 소련의 문서들을 근거로 주장하는 이론에 의하면, 미국을 시험하고 미국의 관심을 유럽에서 아시아로 돌리기 위해 중화인민공화국이 전쟁 원조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하는 조건으로 김일성의 남침을 승낙하게 된다. 그런데 김일성 주석이 남침계획을 세우면서 생각하지 못한 사실이 있었다. 바로 대한민국 내에 있는 좌파들이 자신들을 도울 것이라고 착각한 것이었다. 이는 1949년 남조선로동당 등의 대한민국 내부의 공산주의자들이 반공정권이었던 이승만 정권의 공산주의 탄압에 의해 대대적으로 검거되었다는 것을 대한민국에서 온 공산주의자들의 허위보고로 생각한 까닭이었다.

 

대한민국 내부의 혼란

조선로동당의 일당독재를 기반으로 반대파(민족주의자, 종교인 특히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이전 융성하던 개신교, 지주, 마름, 기업가, 기술자 등을 포함한 상당수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인민)에 대한 철저한 숙청을 통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 정치적 입지를 강하게 다지고 있던 김일성 주석과는 달리, 대한민국의 이승만 대통령은 귀국한 지 얼마 안 되는 입장으로, 대한민국 내의 정치적 다툼에 혼란을 겪고 있었다. 

박헌영과 같은 좌익 정당과, 또 김구와 같은 국내파의 민족주의 독립운동가들, 그리고 이승만과 같은 해외파 독립운동가들은 서로를 불신하였고, 그 결과 대한민국은 여러 개의 정당이 난립되는 등 심각한 정치 사회적 문제에 직면하고 있었다. 김규식 등은 좌우파의 합작과 협력을 추진해왔고 양자를 중재해보기 위해 한 차례 평양을 방문하는 등 노력을 기울였다. 여기에 장덕수 암살 사건으로 이승만과 사이가 틀어진 김구가 동참하여 힘을 얻는듯 했으나, 김일성이나 이승만이나 모두 강경한 태도를 조금도 굽히지 않았으므로 모두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