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엔 병사, 밤엔 장교 상대… 위안부 소녀들의 생활
너무 많은 군인들이 몰리자 부대별로 요일을 지정해 이용

   
▲ 1944년 10월 미육군 심리전투단의 일본계 미군 알렉스 요리치가 작성한 이 보고서는 일본군의 위안소 운영실태를 보여주는 중요 자료중 하나이다.

1944년 미군이 미얀마에서 한국 위안부 여성 20명을 생포해 위안부 여성의 일상을 조사한 보고서가 공개됐다.

‘일본군 포로 매춘 심문 보고서 49호’라 불리는 이 보고서는 미군이 대 일본군 심리전을 준비하기 위해 작성한 것으로 위안부 소녀들의 역할과 기능, 효과 등을 상세히 다루었다.

보고서는 위안부가 ‘일본군에 소속돼 군인들을 위해 일하는 매춘부 혹은 직업적 종군 민간인’이라고 명시하고 위안소를 ‘군대가 주도한 유례없는 인신매매 현장’으로 묘사했다.

위안부 소녀들(Comfort Girls)은 대부분 가난하고 교육받지 못했다. 부모의 빚을 갚기 위해 일본군이 소개한 ‘병원에서 부상자들에게 붕대를 감고 군인들을 행복하게 해주는 일’을 하려고 몇 백엔의 선불금을 받고 왔다. 이들은 6개월~1년의 계약기간을 맺었다.

위안부 소녀들은 학교 건물에서 네 개로 쪼갠 방에 한 명씩 배정돼 먹고 자고 성을 팔았다. 군인 계급별로 이용시간과 이용요금이 달랐는데 10 ~ 17시에 병사가 1.5엔으로, 17 ~ 21시에는 부사관이 3엔으로, 21~24시에는 장교가 5엔으로 이용할 수 있었다.

나중에는 너무 많은 군인들이 몰려 부대별로 이용요일을 정하기도 했다. 월요일 기갑부대, 화요일 공병부대, 목요일 의무대, 금요일 포대, 토요일 수송대, 일요일 사령부에서 이용했다. 수요일은 휴무로 신체검사를 받았다. 장교는 일주일 내내 이용할 수 있었다.

매달 소녀들은 평균 1500엔을 벌었지만 수입의 50~60%(최소 750엔)를 식비, 생필품, 화장품비 등으로 떼였다. 그러나 빚을 갚고 고향으로 돌아간 사람도 있었다.

위안소에는 피임기구들이 준비됐고 군의관이 일주일에 한 번씩 위안부 소녀들을 진료하거나 병원에 보내기도 했다. 종종 군인들이 직접 피임기구를 가져오기도 했다.

위안부 소녀들은 일본군 따라 가던 중 소규모 전투에서 뿔뿔이 흩어지게 됐다. 이후 영국군에게 생포됐고 미군에 넘겨져 심문을 받았다. 당시 이들은 자신들의 생포가 일본군에 알려지면 생명이 위태로울 수 있다며 도움을 요청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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