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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교회의 교훈

중국교회의 교훈(14)

공산화 이후 중국교회는 삼자교회와 가정교회(집교회)로 양분되었습니다. 삼자교회는 정부에 등록된 공인 교회이고, 삼자교회에 가입하고 않고 주로 집에서 모이는 교회가 가정교회인데 미등록 교회라 해서 지하교회라 칭하기도 합니다. 흔히들 삼자교회는 중국 공산당이 만든 어용교회이고, 공산정부로부터 핍박을 받는 지하교회를 가정교회로 알고 있지만, 정확한 배경과 맥락을 이해하게 되면 사실이 많이 왜곡되었음을 알 것입니다.  
 
삼자교회나 가정교회나 서구 기독교에 대해 반제국주의적 토착교회를 추구한다는 점에서는 맥락을 같이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토착교회라 함은 중국인들 스스로 성경에서 발견한 진리에 따라서 순종하되 굳이 서구 기독교문화(특히 제국주의 문화)까지 답습할 필요는 없다는 취지였습니다.  
 
물론 삼자교회로 인해 가정교회가 핍박을 받고 있다고 말할 수 있지만, 이는 교회가 정치와 연루될 때 흔히 일어나는 현상이기도 합니다. 정치가 세상 권력의 기득권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기에 정치적 기득권에 해가 되거나 방해가 되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정적을 대적하고 제거하려 드는 것이 정치적 생리이기도 합니다. 종교가 정치와 연루될 때 온갖 핍박과 고문과 고초를 초래하게 되는 현상도 이 때문입니다.  
 
성경의 교회는 주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교회이고, 따라서 세상 조직에 등록할 필요가 없는 교회입니다. 세상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미움과 핍박을 받는 것은 정상적인 성경교회의 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중국 가정교회들이 미등록 교회라는 이유로 핍박과 고난을 당해 왔다면, 그 이유만으로도 성경교회의 길로 나아가고 있다고 인정해 줄 수 있을 것입니다. 더욱이 서구 기독교는 유다교와 바리새파의 전통을 이어받고 있기 때문에 서구 기독교를 거부하고 중국적 토착교회를 추구한 것은 지극히 잘한 일입니다. 다만 바른 성경의 기초 위에서 정확한 진리에 따라서 교회들이 세워졌다면 명실공히 중국의 성경교회로 인정받을만 했지만, 대부분의 중국 가정교회 운동이 처음부터 세대주의와 변질된 경건주의와 신비주의 뜸씨에 오염되어 출발하였기에 성경교회가 되는데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럴지라도 핍박 속에서 십자가의 진리를 배우고 왈덴시안, 재침례교회(재밥티스마교회)의 좁은 길을 택했다는 점에서 한국교회보다 훨씬 성경에 가까운 모델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중국의 삼자교회는 한국의 일반 기독교 교회들과 성격상 거의 비슷합니다. 예배형태나 설교내용이나 신앙형태나 실행에 있어서 별반 차이가 없고, 삼자교회가 정부에 등록된 교회이듯이 한국 기독교회의 대부분이 사실상 문공부에 등록되어 있는 등록교회인 점도 차이가 없습니다. 다만 중국 삼자교회의 정치적 색채가 보다 농후하고 애국운동이라는 민족적 배타성이 강한 점이 차이라면 차이일 것입니다. 따라서 한국교회가 성경으로 돌아가고자 할진대, 중국 삼자교회로부터 배우는 것보다는 중국 가정교회로부터 배우는 것이 보다 큰 유익이 될 것입니다.  
 
중국 삼자교회의 성립과정에 대하여 조금 더 자세히 정리하고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1921년 중국 공산당이 창립되고 1949년 10월 1일 새로운 중국으로서의 중화인민공화국(中華人民共和國)이 태동하자, 중국교회는 장제스(장개석)의 국민당 정권과는 다르게 도덕적이었던 마오쩌둥의 공산혁명에 대하여 처음엔 두려워하였으나 대부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중국교회는 '재중 해외선교부에 대한 19인 서명의 메시지'를 통해 제국주의의 주구로 인식된 서구 기독교와의 단절을 선언하고, 중국 공산당 정부와 보조를 맞추기로 결의하였습니다.  
 
드디어 공산정권 수립 직후 인민 정치협상회의에서 삼자운동이 추진되었고, 1949년 12월 중국 NCC(국가교회협의회)는 이 운동을 재확인하였으며, 1950년 5월 40만 중국 기독교인이 서명한 기독교 선언을 통해서 삼자운동을 전폭 지지하였고(당시 70만 기독교인의 절반 이상이 서명에 참여함), 1954년 7월에 중국 기독교 삼자 애국운동 위원회가 결성되어 삼자운동의 확산과 반대세력의 포섭, 교회의 양적, 질적 발전과 사회운동을 적극 지원하는 삼자운동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1956년 봄부터 시작된 백화제방 운동이 1957년 4월부터 정풍운동으로 바뀌면서 삼자교회도 어려움을 겪게 되었고, 1958년 대약진운동으로 교회 활동 자체가 대부분 중지되었으며, 삼자교회 지도자들도 제한된 범위에서만 활동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1966년 문화혁명이 일어난 후 근 10여년 동안 삼자교회를 비롯한 중국교회는 견디기 어려운 시련을 거쳐야 했고, 1976년 4인방이 실각하고 마오쩌뚱 사망 후 화국봉이 등장하면서 삼자교회의 활동이 재개되기 시작했습니다. 1979년 13년간 문을 닫았던 종교국이 다시 업무를 재개하였고, 그 해 9월에는 상하이 모엔 교회에서 천명의 신자가 모인 가운데 예배를 드렸습니다. 1980년 6월에는 80년대 중국교회의 방향을 제시하는 공개서한이 삼자 상임위원회에서 채택되었고, 10월에는 삼자위원회와는 별도로 중국교회협의회(CCC)가 정식으로 발족되었습니다. 1980년대 이후 중국 기독교의 새로운 모습은 지난 30년간의 경험을 토대로 더 이상 이념 문제를 심각한 걸림돌로 생각지 않게 되었고, 목회적 차원에서 중국 기독교의 발전을 새롭게 모색하는 것으로 특징지워지고 있습니다.  
 
중국 삼자교회의 대표적인 지도자 세 사람의 신학적 배경을 살펴보는 것도 삼자교회의 이해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1. 오요종(吳耀宗, 우야오쫑): 삼자운동을 주창한 사람으로서 원래는 반소, 친미, 반공적 인물이었습니다. 미국의 유니온 신학교에서 수학하였고, YMCA운동을 하였으며, 복음의 사회적 책임을 깊은 관심을 가졌습니다. 즉 사회에 대한 실천적 기여가 기독교의 근본 덕목이라고 생각하여 중국교회의 사명을 과거 제국주의적 잔재를 씻어버리고 새로운 중국의 건설에 생산적으로 참여하는 것으로 인식하였습니다.  
 
2. 정광훈(丁光訓): 성공회 감독으로 미국에서 잠시 수학한 후 난징(남경)신학교 총장을 역임하였으며 전공은 교회사였습니다. 그의 신학적 주관심사는 교회일치와 국가에 대한 교회의 봉사였으며, 공평과 균등을 통한 사회주의 가치관을 자본주의보다 우월하게 평가하였고, 국가는 유신론이거나 무신론일 수 없으며 믿음은 개인적인 것이라 하였습니다. 서구 기독교 국가는 기독교를 등에 업고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라 인식했습니다.  
 
3. 최헌상(崔憲祥) : 중국기독교협의회(CCC) 총무와 난징신학교 설립추진위원이었고, 성공회 평신도 지도자로서 삼자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지대한 기여를 하였습니다. 교회일치를 강조하였으며 정교분리를 반대하고 국가 영역에 있어서 기독교의 책임을 주장했습니다.  
 
애국적 민족적 관점 외에는 삼자교회 지도자들과 우리나라의 현대주의적 기독교 지도자들이 신앙과 실천에 있어서 큰 차이가 없음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은혜와 평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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