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Wayback Machine - https://web.archive.org/web/20170907165246/https://kr.usembassy.gov/ko/education-culture-ko/u-s-embassy-kids-students/american-celebrations-holidays-ko/martin-luther-king-day-ko/

마틴 루터 킹 기념일 (1월 셋째 월요일)

martinluther-king
martinluther-king

마틴 루터 기념일은 미국 시민권 운동을 이끈 선구적인 지도자 사람으로서 1964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마틴 루터 킹의 삶과 그가 남긴 유산을 기리는 날이다마틴 루터 기념일은 1 셋째 월요일이다.

마틴 루터 킹 기념일은 미국 시민권 운동을 이끈 선구적인 지도자 중 한 사람으로서 1964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마틴 루터 킹의 삶과 그가 남긴 유산을 기리는 날이다.

어려서부터 장래가 촉망되던 마틴 루터 킹 주니어는 9학년과 12학년을 월반하여 15세 되던 해에 모어하우스대학에 입학했다. 그는 두 사람 모두 목사였던 조부와 부친의 설교를 들으면서 자랐으며 어려서부터 평등과 형제애에 대한 믿음을 키워나갔다.

1955년 말에 신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 마틴 루터 킹 주니어는 아내 코레타 스콧 킹과 함께 앨라배마 주 몽고메리로 이주하여 침례교 교회에서 목사로 봉직했다.

그는 상당수 다른 남부 주들과 마찬가지로 몽고메리에서 흑인이 인종주의와 차별 그리고 부당한 법률로 인해 감내해야 하는 고통들을 눈으로 목격했다. 그 중에는 시내버스에 탑승하는 흑인은 반드시 뒷좌석만을 이용하고 앞좌석이 만석인 경우 백인 승객에게 자리를 양보할 것을 요구하는 법도 있었다. 킹 목사는 이 법이 모든 흑인의 권리를 침해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1955년 12월 1일, 용기 있는 흑인 여성 로자 파크스가 백인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구속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흑인 지도자들은 이에 봉기하여 몽고메리 시내버스업체들을 상대로 보이콧 운동을 기획했다. 킹 목사는 이 운동을 이끌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수천 명의 흑인과 백인이 버스 이용을 거부했다. 그 대신에 시민들은 카풀을 조직하고 도보로 이동했다. 킹 목사는 참가자들에게 평화적인 시위를 주문했으며 폭력에 기대지 말 것을 강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위자와 그들의 지지자들은 불평등한 제도가 바뀌는 것을 원치 않았던 세력으로부터 끊임없는 위협과 공격을 받았다. 시위자 가운데 상당수가 체포되고 구속됐다. 킹 목사의 사택에 폭탄이 날아들기도 했지만 다행히 그의 아내와 자녀들은 무사했다.

폭력 사태에도 불구하고 보이콧 운동은 계속됐으며 시내버스업체는 금전적으로 엄청난 손실을 입었다. 몽고메리 시내버스 보이콧 운동은 381일 만에 마침내 목적을 달성했다. 대법원은 앨라배마 주의 인종분리법이 위헌이라고 결정했다. 사소한 항의의 표시로 보이콧 운동을 촉발시킨 주인공인 로자 파크스는 훗날 ‘시민권 운동의 어머니’로 추앙을 받았다.

버스 인종분리 관행은 흑인을 상대로 자행되던 수많은 부조리 가운데 하나에 불과했다. 남부 전역의 학교들은 인종분리 정책을 시행하고 있었으며 흑인은 동등한 주거, 동등한 임금, 취업 기회, 공정한 투표권을 거부당하고 있었다. 상당수 호텔이나 식당에서도 흑인의 출입을 거부했다.

시내버스 보이콧 운동은 이러한 불평등과 킹 목사의 지도력에 국제적인 이목이 집중되는 계기가 되었다. 정의를 추구하는 부단한 투쟁은 결국 시민권 운동으로 이어졌다. 킹 목사는 이 운동을 선두에서 지휘했으며 국제적으로 흑인의 권익을 대변하는 진영의 상징이자 목소리로 여겨졌다.

1957년, 킹 목사를 비롯한 일단의 성직자들이 인종주의에 대항하여 비폭력 투쟁을 전개할 목적으로 남부기독교지도자회의(SCLC)를 창설했다. 그 이후로 킹 목사는 다수의 비폭력 시위를 주도했다. 그는 마하트마 간디의 사상을 연구했으며 비폭력 투쟁의 위력을 확신했다. 일부 흑인 지도자와 시민들은 그의 이런 철학에 전혀 동의하지 않았다. 하지만 킹 목사는 유혈 충돌에 의존하지 않을 때에 비로소 투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고 추종자들을 설득했다. 시민권 운동이 격동을 거듭하던 시기에 킹 목사는 여러 차례 수감됐다. 그는 앨라배마 주 버밍엄에 있는 어느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는 동안 ‘어느 한 곳의 불의는 모든 곳의 정의를 위협한다’는 명언을 남겼다.

1963년 8월 23일에 치러진 워싱턴 대행진은 시민권 운동사에 기록된 중요한 사건들 가운데 하나였다. 워싱턴DC에 운집한 25만 명 이상의 시민은 킹 목사의 인도하에 모든 국민에게 동등한 시민권을 보장하는 법률의 제정을 요구하며 의사당까지 행진했다. 킹 목사는 이날 링컨기념관 계단 위에서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라는 제목으로 역사에 길이 남을 명연설을 행했다. 워싱턴 대행진은 미국의 수도에 역사상 가장 많은 군중이 모인 집회 중 하나였으며 폭력 사태는 단 한 건도 발생하지 않았다. 이듬해인 1964년에 킹 목사는 비폭력 시위에 앞장선 업적을 인정받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같은 해에 동등한 고용과 교육의 기회를 보장하는 시민권법(1964년 제정)이 통과됐다. 그제서야 마틴 루터 킹을 비롯한 수천 명의 운동가들은 그들의 투쟁이 헛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새로운 법률을 시행하고 또 다른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여전히 과제가 산적해 있었다.

그 이후에도 킹 목사는 흑인 유권자가 안전하게 유권자 등록을 신청하고 투표에 참가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투표권법(1965년 제정)을 필두로 다수의 법률 개혁에 동참했다. 그해에 역사상 가장 많은 흑인 유권자가 투표에 참가했다.

1968년 4월 4일, 마틴 루터 킹은 테네시 주 멤피스에서 노동자 파업을 지지하던 도중 괴한의 총탄을 맞아 사망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서른아홉에 불과했다. 평화와 시민권을 쟁취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다했던 모든 이들은 큰 충격을 받았으며 분노했다. 세계는 평화를 갈구했던 이 위대한 인물의 죽음을 애도했다. 마틴 루터 킹의 서거에도 불구하고 시민권 운동의 기세는 늦춰지지 않았다. 1969년에 코레타 스콧 킹은 ‘비폭력적 사회 변혁을 위한 마틴 루터 킹 주니어 센터’를 설립했다. 남편의 꿈을 이루기 위해 평생을 헌신했던 킹 여사는 2006년 1월에 작고했다. 지금도 시민들은 사회 정의를 구현하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