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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의 성인》으로 불리운 세종대왕
 

 

《동방의 성인》으로 불리운 세종대왕 

 

반만년 우리 력사를 돌이켜보면 나라와 민족을 위해 큰공을 세운 임금들이 적지 않다. 그들가운데는 《해동요순》(혹은 《동방요순》 요, 순은 모두 이웃나라 전설중의 《성인》으로 불리운 제왕들)으로 찬미된 리조의 제4대왕 세종대왕도 있다. 맏아들이 왕위를 잇는것이 원칙으로 되여있던 당대 사회에서 셋째아들이였던 그는 어떻게 되여 왕위를 이어받게 되였으며 과연 민족앞에 어떤 공을 쌓았는가. 그가 《동방의 성인》으로까지 불리울 업적을 쌓을수 있은 비결은 어디에 있었던가.

 

1. 태종의 갑작스런 정권이양 

 

1418년 7월 4일 개경에 가있던 태종은 세자를 한양(서울)에 가서 종묘에 참배하라고 떠나보낸 뒤 옥좌에 몸을 깊숙이 잠그고 사색을 모았다.

리성계의 다섯째아들로서 리씨조선을 세우는데서 큰 역할을 한 태종, 그는 이 태종이라는 묘호보다도 방원(자는 유덕)이라는 이름으로 독자들과 더 깊은 인연을 맺고있을는지도 모른다.

꿈에도 소원하던 왕좌를 노리여 배다른 동생 방번과 친형 방간을 죽이고 정도전, 남은 등 정치적적수들을 매장해치운 태종, 왕자리를 탐냈다는 비난을 모면해보고저 친형인 방과(둘째형)를 2대왕(정종)으로 내세웠다가 2년후에 밀어내고 1400년에는 자신이 왕좌에 올랐다.

전제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주되는 장애세력인 사원의 토지와 노비를 몰수하여 그를 약화시키고 반란의 화근이였던 사병을 철페하였으며 외척들의 세력확장과 그들의 정권참여를 가차없이 탄압한 태종.

그의 가혹한 성격으로 하여 무참히 죽어간 많은 신하들이 꿈에 나타나 그를 염라국으로 끌어가겠다고 잡아끄는 바람에 침상을 흥건히 적시며 깨여나기는 얼마였던가.

피로 얼룩져온 죄많은 과거사가 돌이켜져서인가 미간에 내천자를 그리는 태종, 50대초면 정치가로서는 한창나이이다. 그러나 33살에 보좌에 올랐던 이 사나이는 때이르게 자기의 정치적생애를 총화하고있었다. 권력과 음모의 소용돌이속에서 패권을 위해 골육상쟁도 서슴지 않았던 그가 어인일로 6월에 양녕대군 제에게서 세자의 자리를 넘겨받은 충녕대군 도를 종묘에 보냈던가.

령리한 신하들이 그의 뜻을 모를리 없었다.

그들은 금상(태종)이 은밀히 왕위를 양도할 뜻을 가지고있다는것을 눈치챘다.

6대언들은 울면서 간청하듯 말했다. 《전하, 그것은 신하들이 바라는바가 아니옵니다.》

태종은 무뚝뚝하게 오금을 박으며 말했다.

《이런 말을 절대로 입밖에 내지 말라.》

7월 29일, 근 한달만에 종묘를 참배하러 갔던 세자가 돌아왔다.

8월 8일에 태종은 경회루에 앉아서 지신사 리명덕 등을 불렀다.

그가 헐레벌떡 종종 걸음쳐 이르자 태종은 엷은 미소를 띠우며 말했다.

《과인이 왕위에 오른지 이젠 벌써 19년이로다. 밤낮으로 조심하고 두려워하면서 감히 편히 지내지 못하면서도 하늘의 의사에 보답하지 못하여 여러차례 재변을 당하게 된데다가 또 오랜 병이 요즘 더욱 심하여지기때문에 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하노라.》

《전하, 그래서는 아니되옵니다.》

《과인의 뜻이 이미 정해졌으니 다른 말 말라!》

명덕 등이 한사코 안된다고 하였으나 태종은 듣지 않았다.

그는 보평전에 나가서 내시를 시켜 세자를 불러오라고 두세번 재촉을 하고 상서사에 지시하여 옥새를 가져오도록 하였다.

의정부와 6조의 관리들과 공신들, 3군 총제들과 6대언 등이 대궐문을 떠밀고 들어가 통곡하며 옥새를 끌어당기여 바치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태종의 노여움만 더했을뿐이다.

태종은 세자에게 옥새를 넘겨주고 그의 거듭되는 사양에도 불구하고 직접 임금이 쓰는 모자인 익선관까지 씌워주었다.

1418년 8월 10일 경복궁 근정전에서 세자는 왕위에 올라 관리들의 축하를 받았다. 그리하여 우리 나라 력사에 뚜렷한 자취를 남긴 세종대왕 도가 21살로 리왕조 4대왕위에 오르게 되였다.

32년간의 통치년간을 성과있게 장식한 세종대왕.

그는 1397년 4월 5일(양력 5월 12일)에 한양 준수방에서 태여났다. 그의 어머니는 원경왕후 민씨였다. 그에게는 이미 1404년에 세자로 책봉받은 맏형인 제(양녕대군)와 둘째형인 보(효녕대군)가 있었다.

세종은 《영특하고 문명하면서도 과단성이 있고 강의하고 신중하면서도 너그러우며 인자하고 공손하며 효성스러운것이 타고난 천품》이였다고 한다.

그는 1408년에 충녕군의 봉호를 받고 우부대언 심온의 딸에게 장가를 들었다. 1413년 5월에는 충녕대군의 봉호를 받았다.

그러면 어떻게 되여 이 셋째 왕자는 형님들을 밀어제끼고 왕세자로 되게 되였는가.

1418년 6월 3일에 태종이 개성에 있을 때 모든 문무관리들이 세자를 그 자리에서 내쫓을것을 제의하였다. 그가 부화방탕하고 막된짓을 하면서 여러번 사단을 일으켰기때문이다.

태종 역시 자기를 절제할줄 모르고 나이 20살이 되자 학문을 좋아하지 않고 음악과 녀색에만 빠져돌아가는 세자를 좋지 않게 보았었다. 혹 너무 젊어 그럴수도 있겠다 하여 장성해서는 고칠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여러번 용서해주었으나 20살이 넘어서부터는 불량한 무리들과 개인적으로 왕래하면서 옳지 못한 행동을 자행하고 1417년 봄에는 일이 발각되여 여러사람이 처단되게 만들었다.

그후에도 세자는 자기 잘못을 깡그리 적어서 종묘에 고하고 태종에게도 글을 올려 스스로 뉘우치고 자책하는듯 하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간신 한로의 음모에 걸려들어 죄를 범하였다.

이때 와서 의정부, 공신, 6조, 대간과 문무의 모든 관리들이 일치한 의견으로 함께 수표한 글을 올렸다. 세자의 행실로 보아 왕위를 계승할 무거운 책임을 맡길수 없으니 내쫓아 지방으로 귀양을 보내는 동시에 임금의 아들가운데서 현명한 사람을 골라 세자로서 다시 세워야 한다는것이였다.

태종은 그들의 의견을 따르기로 하였다.

태종은 제의 맏아들을 세자로 삼으려고 하였으나 여러 신하들의 반대에 부딪쳤다. 아버지를 내쫓고 그 아들을 올려앉혀가지고 뒤날을 담보할수 있느냐 하는것이였다. 옳은 의견이였다.

마침내 군신들의 생각은 한사람에게로 모아졌다.

태종은 신하들에게 만족한듯 말하였다.

《충녕대군(세종)은 천성도 총명하지만 공부를 좋아하고 부지런하여 몹시 추울 때나 더울 때나 밤을 새워가면서 글을 읽고있으며 또 정사의 기본도 알고있기때문에 큰 사건을 당할 때마다 제기하는 의견이 모두 다른 사람으로서는 생각도 할수 없는 그런것이다. 또 그의 아들도 앞으로 크게 될 자질을 가지고있다. 나는 충녕을 세자로 정하고싶다.》

여러 신하들도 얼굴에 화색을 띠우며 임금의 말을 받았다.

《신 등이 현명한 임금을 고르십사 한것도 실은 충녕대군을 념두에 둔것입니다.》

이리하여 맏아들인 양녕대군 제는 왕세자자리에서 밀려나고 셋째아들인 충녕대군 도가 왕세자로 되게 되였다.

총명, 부지런한 학풍. 결국 이것이 그를 왕세자로 되게 하였던것이다.

1418년 6월 5일 태종은 세자에게 임명장을 주었으며 17일에는 정전에 나와서 세자를 책봉하는 의식을 거행하였다.

그로부터 한달이 좀 지나 태종은 뜻밖에도 세자에게 왕위를 넘겨준것이다.

어째서 태종은 부랴부랴 왕위를 넘겨주고 《은퇴》하였는가.

《임금이 더 나이들기 전까지 군사에 관한것만은 내가 직접 처리할것이고 그 이외의 처리하기 어려운 일은 그때마다 의정부와 6조에서 옳은가 그른가 하는것을 함께 의논할것이다. 나도 그런 의논에는 참여하겠다.》

이것은 왕위를 물려준 후 태종이 내시 최한을 시켜 의정부의 재상들에게 내린 지시이다.

그때에야 의정부의 재상들도 머리를 끄덕였다. 속으로 모략가로 자처하는 그의 음흉한 속궁냥에 코웃음을 친 자들도 있었는지 어이 알랴.

박은 등은 《전하가 왕위를 물려주는데 대하여 신 등은 편안하게 지내려는것으로만 여겼더니 이제야 전하의 의도를 알겠습니다. 청컨대 반포문을 내려 왕위를 물려준 의도를 타일러줌으로써 신하와 백성들의 속마음을 시원하게 해줄것입니다.》라고 제의하였다.

태종의 의도는 한마디로 정권안보를 노린것이였다. 이것은 온갖 권모술수로 고려왕조를 뒤집어엎고 또 왕좌를 가로챈 태종으로서는 충분히 가능한 뒤수습책이라고 할수 있었다.

태조 리성계의 다섯째아들로서 쉽지 않게 왕좌에 오른 그에게 있어서 새로 군림한 세자 역시 셋째아들로서 자기와 비슷한 운명의 길을 걷지 않겠는가 하는 위구심이 항시적으로 뒤따랐다. 마음이 온순한 새 세자에게 있어서 양녕대군만이 적수라고 장담할수 없었다.

태종은 세자가 더 나이들어 정치가로서의 체모를 갖추고 자기의 지반을 꾸릴 때까지 그를 군사적으로 뒤받침해 줄것을 목적하였다. 그렇게 하자면 자기가 죽기 전에 빨리 양위하여 세자가 자기 발로 걸어나갈수 있도록 도와주는것이 필요하였다.

태종이 부랴부랴 군권은 이전대로 자기가 틀어쥐고 왕권을 세자에게 넘겨준것은 바로 이런 의도에서였다.

왕실내부에서는 피할수 없는 권력을 노린 피의 쟁탈전, 그속에 영원한 패권자로 남아있게 하려는 《다심한》 부왕의 사랑이 낳은 《양위》였다고 할수 있다.

태종은 《상왕》이라는 존호를 받고 6년간 막뒤에서 아들의 통치를 조종하였다.

후에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왕위를 물려준것은 본래 세상일을 잊어버리고 한가로이 마음대로 지내보자고 한것이였다. 오직 군사에 대해서만 아직 내가 직접 틀어쥐고있는것도 임금이 나이 젊어서 군사관계는 잘 알지 못하기때문에 그렇게 하였을뿐이다. 나이 서른이나 되고 세상일에 대한 경험도 많아지기를 기다려서 모든 권한을 다 념겨줄 작정이다. 만약 여러 아들들을 원수로 삼고 여러 도의 군사를 나누어 맡기여 장수나 군사들과 접촉하게 하였더라면  임금이 왜 지금까지 군사관계를 알지 못하고있겠는가. 그러나 내가 굳이 그렇게 하지 못한것은 저런 시기꾸러기가 당장 세자로 있는 판에 여러 아들이 각각 군사와 관련된 권한을 잡고있는 날이면 어떻게 서로 용납되였겠는가.》

바로 세종은 총명으로 왕세자로, 왕으로 되였고 그의 지반을 굳건히 해주기 위해 태종은 부랴부랴 왕권을 넘겨주었던것이다. 

 

2. 력사에 남긴 뚜렷한 자취 

 

총명으로 왕위를 이은 세종, 그는 총명으로 왕좌를 빛내였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한 세종은 책과 깊은 인연을 맺고 다문박식한 정치가의 자질을 갖추어나갔다. 그는 책을 읽을 때 백번을 반복하여 그 내용을 완전히 섭취하였으며 《좌권》, 《초사》와 같은 경우에는 백번을 더 읽었다고 한다. 그는 비록 병을 앓을 때에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세종은  《나는 책을 한번 눈에 거치기만 하면 잊지 않는다.》고 하였다. 또 언젠가는 《내가 궁중에 있으며 팔을 끼고 한가로이 앉아있은적은 없었다.》고 말하였다.

세종은 왕좌에 올라서도 자기의 그 부지런한 품성을 유지하였다. 그는 매일 인시(새벽 4시)에 일어나 날이 밝으면 신하들의 조회를 받고 정사를 보며 다음에는 경연석에 나가 유신들과 강론하며 침전으로 돌아가서는 책을 읽으면서 하루일과를 보내였다.

총명한 두뇌와 부지런한 품성은 그에게 정치, 경제, 법률, 문학, 경전, 음운학, 천문, 지리, 력산, 음악, 의학, 군사학, 불경, 기계제작, 서화 등 여러 분야에 걸치는 폭넓은 지식을 소유하게 하였다.

이러한 지식을 바탕으로 하여 지금도 사람들이 조선의 자랑으로 이야기하는 많은 공적들을 이룩하고 그는 단군민족사에 뚜렷한 자리를 차지할수 있었다.

세종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허송세월하는것을 경계하였다. 그렇다고 무의미한것을 생각하거나 소용없는것을 한것은 결코 아니였다. 반드시 의의가 큰것을 생각하였고 필요한 일을 하였다.

그는 비록 유교를 숭상한 군주였지만 거기에 물젖은 편협하고 고루하며 공리공론만을 일삼는 속된 유교숭배자가 아니였다.

이러한 특질들이 그의 정치생애에 큰 영향을 주었다는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세종이 쌓은 공적가운데서 첫손가락에 꼽을수 있는것은 령토완정을 이룩한것이다. 그는 강력한 군사력에 의거하여 남으로는 해안지방을 로략하던 왜구를 징벌하고 북으로는 조상전래의 땅을 되찾기 위한 투쟁을 벌리면서 변경을 소란시키던 녀진을 정벌하였다.

력사에 《기해동정》으로 기록된 1419년의 쯔시마원정은 고려말기부터 계속된 왜구의 침입을 줄이고 남부해안의 평온을 유지하는데 기여하였다.

세종이 즉위한 다음해인 1419년 5월 한무리의 왜구가 충청도 비인현 도두음곶을 습격하여 막심한 피해를 끼쳤고 이어 연평(황해도) 앞바다에 침입하여 우리 나라 병선을 위협하며 식량 45섬을 략탈해갔다.

왜구의 횡포한 준동은 나라의 안전을 크게 교란시켰으며 리조정부와 군민을 격분케 하였다.

상왕인 태종과 왕인 세종은 왜구의 침입을 종식시키기 위하여 그 소굴인 쯔시마에 대한 원정을 단행하기로 결정하였다.

곧 리종무를 삼군도체찰사 겸 중군도절제사로 하여 원정군이 편성되였다. 원정군 총수는 1만 7,285명이고 병선수는 227척이였다.

원정군은 6월 19일 거제도를 출발하여 쯔시마에 대한 단호한 응징을 가하였다.

원정기간에 우리 군대는 적선 124척, 적의 가옥 2,007호를 소각하였으며 적병 123명을 소멸하고 21명을 포로하였다. 이와 함께 왜구에게 랍치되였던 주민 154명을 구출하고 20척의 적선을 로획하였다.

리조정부는 재원정을 계획하였으나 쯔시마도주가 항복서를 보내온 조건에서 중지하였다.

이번 원정의 결과 왜구의 침입은 현저히 적어졌으며 적지 않은 왜인들이 평화적인 통교자로 둔갑하게 되였다.

세종은 원정의 성과에 토대하여 왜인들에 대한 통제를 일층 강화할수 있게 되였으며 1443년에는 《계해약조》를 체결하여 왜인들의 탐리적인 무역활동을 제한하고 그에 대한 대우를 규범화하였다.

남쪽의 평온을 지키는것과 함께 북변에서 녀진인들의 빈번한 침입을 물리치고 나라의 안정을 이룩하는것은 세종에게 지워진 중대사의 하나였다.

1432년 12월 건주위녀진기병 400여명이 려연군(김형직군)에 침입하여 살인과 략탈을 감행한 사건이 터졌다.

세종은 크게 노하여 실태를 료해하게 하였으며 책임있는 자들을 처벌하고 최윤덕을 평안도 도절제사로 임명하여 건주위녀진의 소굴을 치게 하였다.

최윤덕을 총지휘관으로 하여 1만 5,000여명으로 구성된 원정군은 1433년 4월 건주위녀진에 대한 원정을 단행하여 170명의 적을 죽이고 236명을 포로하였으며 말, 소 등 가축을 로획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그 이후에도 건주위녀진이 련이어 평안도의 내륙변경으로 침입하여 략탈행위를 감행하였다. 세종은 격분하여 또다시 원정을 명령하였다.

1437년 9월 리천을 총지휘관으로 하여 7,700여명으로 편성된 원정군은 압록강을 건너 적의 소굴을 들이쳐 60명의 적을 살상포로하고 가옥과 알곡을 소각하고 개선하였다.

1433년 원정후 려연과 강계중간에 자성군을 설치하여 두 군의 련락을 짓게 하고 방비를 강화하게 한 세종은 1440년에는 려연 동쪽에 무창현(김형직군 무창리)을 설치하고  2년후에는 군으로 승격시켰으며 1443년에는 려연, 자성 중간지대에 우예군을 설치하였다. 1416년에 설치된 려연군까지 포함한 이 4개 군이 설치됨으로써 변경의 방비를 더욱 강화할수 있게 되였다. 또한 이 4군의 설치는 오늘의 조선과 같은 령역을 확정해놓는데서 중요한 의의를 가지였다.

세종왕은 한편 동북방에서 녀진침입자들을 몰아내고 령토완정을 이룩하는 공을 세웠다.

고려말, 리조초부터 동북방 두만강류역까지는 이미 우리 나라의 령역으로 되여있었다. 고려말에 길주만호부가 설치되여있었고 리왕조를 세운 리성계와 그의 아버지가 이 지역에서 《무공》으로 《위엄》을 떨치여 건국직후 령역은 두만강하류까지 미치고있었다.

1393년 8월 동북면도안무사 리지란이 공주와 지금의 갑산인 갑주에 성을 쌓아 다스렸고 1398년에는 동북면선무순찰사 정도전이 파견되여 주, 부, 군, 현의 경계를 확정하고 부를 공주에 두고 처음으로 경원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1406년 2월 녀진의 한 부족인 혐진올적합이 경원 소다로에 침입하였고 1410년 2월에도 올량합과 결탁하여 경원부에 침입하였다. 아군의 반격으로 격퇴되고 추장까지 피살되자 적들은 각 부가 련합하여 경원에 침입하였다.

조정론의끝에 부를 경성으로 후퇴시키기로 하였고 공주에 있는 두개 릉도 함흥으로 옮겼다.

태종은 경원부를 옛땅에 다시 두려고 하면서 먼저 부거로 전진시켜 설치하게 하였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녀진의 침입이 계속되자 1422년에는 부를 다시 룡성으로 후퇴시키자는 의견까지 나왔다. 이에 강하게 반발한것은 김종서였다. 그는 북변의 정황과 방비와 관련된 계책을 올리면서 부를 후퇴시켜서는 안된다고 주장하였다. 세종은 이에 찬성하면서 《조종의 강토를 줄일수는 없다. 땅을 개척함은 조종의 뜻이다.》고 하였다. 그리고 오히려 조정의 결의로 북쪽으로 전진하여 경원부를 1428년에 횟가(새별읍)로 옮기고 1432년에는 석막(부령)에 령북진을 설치하게 하였다.

세종은 국토회복의 포부를 안고 김종서를 함길도 도절제사로 임명하여 동북방개척을 추진시키게 하였다. 이것은 녀진족내부에서 일어난 분쟁을 좋은 기회로 여긴 세종이 황희, 맹사성 등 신하들과 의논하여 내린 결단이였다.

세종의 적극적인 비호를 받은 김종서의 노력에 의하여 1434년에는 백안수소(회령시 행영리)로 녕북진이 옮겨지고 회령도호부로 승격되였으며 1435년에는 공주(은덕군 고읍)에 공성현이 설치되였다가 1437년에는 경흥군으로 개편되였다.

그해 회령도호부 동쪽의 400호를 떼내여 백안수소에 종성군을 새로 내왔고 1440년에는 수주(온성군 종성구)로 옮겨졌으며 그 북쪽의 다온평에는 온성군을 설치하였다.

1446년에는 갑산 서북부에 삼수군을 내왔고 1449년에는 이미 1428년 부거에 설치하였던 부거현을 석막으로 옮기고 부령도호부로 격을 높이였다.

이리하여 15세기 40년대말까지 경흥, 경원, 온성, 종성, 회령, 부령 등 6개 진이 두만강 남쪽연안지대에 설치되였다. 이것은 세종의 통치년간에 이룩된 가장 큰 공적이였다고 할수 있다.

세종은 령토완정만이 아니라 문화의 발전을 이룩하고 국력을 강화하기 위한 사업에서도 공적을 남겼다.

여기에서 우선 취급해야 할것은 집현전의 설치와 인재의 배양이라고 할수 있을것이다.

그자신이 총명한 군주로서 인재 중요성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있었던 세종은 집권 다음해인 1420년에 고려에 그 연원을 둔 집현전을 다시 내왔다. 집현전은 일종의 학술연구기관으로서 국내의 수재들이 모여 경전을 위주로 하면서 여러 분야의 학술적인 문제들을 연구하고 서적을 편찬하기도 하는 두뇌기지였다.

수재로 집현전에 들어간 선비들가운데서 10명은 경연(왕에게 강독하는 곳), 10명은 서연(세자에게 강독하는 곳)의 직무를 맡아보았다. 그리하여 학사들은 매일 여기에 출근하여 고전을 연구하기도 하고 론쟁도 하면서 일관이 시간이 되였다고 하기 전에는 퇴근하지 못하였다.

세종은 이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집현전의 유신들을 교대로 숙직하게 하고 두터운 대우도 해주었다.

바로 이 집현전에서 성삼문, 최항, 박팽년, 리개, 하위지, 류성원, 량성지, 신숙주, 정린지, 신석견(후에 신석조로 고침.) 등 수많은 유명한 재사들이 배출되여 나라의 문화발전과 국력강화에 이바지하였다.

세종이 품들여 키운 인재들의 노력과 세종의 직접적인 지도에 의하여 가치있는 성과작들이 련이어 출현하게 되였다.

오늘도 사람들이 즐겨 외우며 세종시대의 자랑으로, 문화사적공적으로 전해가는 창조물들의 일부를 아래에 펼쳐보인다.

1420년 11월 세종은 공조참판 리천에게 활자를 새로 주조하게 하였다. 우리 나라가 세계에서 제일먼저 금속활자를 주조하였다는것은 누구나 잘 아는 사실이다.

더 좋은 책을 더 많이, 더 빨리 출판하게 하려는 세종의 이 요구에 응하여 재능있는 우리 기술자들은 아주 정교하고 빈틈없는 새로운 활자를 만들어냈다. 이것이 바로 《경자자》이다.

세종은 1421년에 리천과 남급에게 동판을 고쳐 주조하도록 하였다. 이번에 만든것은 글자모양과 서로 들어맞도록 하여 용랍이 없어도 식자가 정확히 되였다. 책을 찍는 사람들이 편리해하였는데 하루에 찍어내는 량도 20여장이나 되였다. 이로부터 찍어내지 못하는 책이 없게 되니 문화는 날로 발전하고 세상은 더욱 륭성하게 되였다고 한다.

세종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1434년에 리천에게 지시하여 옛 활자(큰자)를 고쳐 주조하도록 하였는데 경연에 소장된 《효순사실》, 《론어》 등 책들을 밑글로 삼고 부족되는것은 수양대군(후의 세조)에게 씌워 20여만자를 주조해냈다.

이것이 바로 《갑인자》라고 하는것이다. 하루에 인쇄량이 40여장인데 글자모양이 정밀하고 인쇄능률이 전에 비해 배나 늘어나 이것으로 인쇄된 책이 매우 많았다고 한다.

세종은 력사를 비교적 사실주의적으로 수록한 《고려사》를 만들어내도록 하였다.

건국직후 정도전과 정총 등은 고려의 력사를 편찬하면서 리색과 리인복이 쓴 《금경록》에 의거하여 37권으로 편찬하였다. 그런데 정도전은 원왕이하의 사료에는 참람된것이 많다고 하면서 《종》(宗)은 《왕》(王)으로, 《절일》(節日)은 《생일》(生日)로, 《짐》(朕)은 《여》(予)로, 《조》(詔)는 《교》(敎)로 바꾸어놓았다. 즉 고려가 황제국가의 징표로 사용하던 호칭들을 한급 낮은 왕급으로 교체해넣은것이다.

1418년에 임금이 류관과 변계량을 시켜 교정하게 하였으나 이때도 《태자》는 《세자》, 《태자비》는 《세자빈》, 《제, 칙》은 《교》로, 《주》(奏)는 《계》(啓)로 고치였다. 이것 역시 우와 같은 사정에서 력사를 심히 외곡한것이였다.

력사를 맡은 관리들인 리선제, 량봉래 등이 변계량에게 항의하였으나 그는 듣지 않고 임금에게 전달하게 하였다.

세종은 력사를 사실대로 기록하게 하였다. 변계량이 우기자 정도전이 고친것까지 포함하여 몽땅 이전의 글대로 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1424년 8월에 원종이전의 사실을 당시 실록원문에 따라 기록한 《수교고려사》가 편찬되게 되였다.

이후 세종은 1442년에 인쇄까지 된 새 고려사에 아직도 공정하지 못한 부족점이 있다하여 반포를 중지시키고 그것을 집필한 사관에게 형벌까지 가하였다.

이런 과정을 거쳐 세종 다음 왕인 문종대에 오늘날 우리가 보게 되는 《고려사》가 김종서, 정린지에 의하여 편찬되게 되였던것이다.

우리가 자랑하는 조선글자 《훈민정음》의 창제는 세종의 문화적업적가운데서도 가장 큰것이라고 할수 있다.

최항, 성삼문, 정린지, 신숙주 등이 이 훈민정음의 창제에 관여했다고 하지만 그 직접적인 발기자, 창제자는 세종이라고 한다. 그는 궁중에 정음청을 설치하고 여러 학자들과 고심참담한 노력을 기울여 1443년 12월(양력 1444년   1월) 《훈민정음》 28자를 창제하였다. 그리고 3년후인  1446년 9월에 《훈민정음해례》를 발표하였다.

이 독특한 우리 글자의 창제는 세종의 깊은 연구와 고심참담한 노력과 함께 그의 웅심깊은 생각과 단호하고 완강한 의지의 산물이라고 할수 있었다.

세종은 나라마다 모두 자기의 문자가 있어서 제 나라의 어음을 기록하는데 오직 조선만이 고유한 문자가 없으니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한다고 하였다. 또 관료들이나 지식층에서만 사용하는 한자나 관공문서에 쓰이는 리두문자 같은것을 일반백성들은 널리 통용하지 못하므로 자기 심정을 터놓지 못하는것이 많으니 이를 민망하게 여긴다고 하였다. 바로 이것이 세종이 새로 28자를 창제하게 한 기본동기였다.

세종은 훈민정음을 세상에 발표하기 전에 《룡비어천가》(리왕조 조상들의 사적을 기록한 가사)를 지어 실지 은을 낼수 있는가를 확인해보게 하였다.

세종은 훈민정음을 널리 사용하기 위한 구체적인 대책까지 취하였다.

세종은 우선 정음의 창제와 보급을 반대하여나서는 관료들에 대하여 강경히 대응하였다. 집현전의 최만리, 신석조, 정창손, 하위지 등은 국문창제가 아무런 의의도 없고 유해로운것이라고 하였다. 최만리 등이 올린 정음반대상소를 받아본 세종은 몹시 불쾌하여 《너희들이 음으로 글자를 합치는것은 모두 옛적것에 위반된다 하는데 설총의 리두는 이 음이 아니고 무엇이냐, 운서의 사성칠음자모를 과인이 바로잡아놓지 않으면 누가 하겠느냐, 과인이 앞서도 정창손에게 말하기를 국문으로 삼강행실을 번역하여 널리 민간에  돌리여 백성들 누구나 다 알아보게 하고싶다고 하였다. 그런데 지금 창손의 말은 삼강행실반포후에 아직 충효의 소행이 많이 나타나지 않으니 사람의 행위는 자질여하에 달린것이요, 이를 꼭 국문으로 번역한 뒤에라야 효과가 있겠는가고 하니 이것은 선비된 자의 말이 아니다.》라고 추궁하였다. 세종은 상소한 자들을 모두 의금부에 가두었다가 놓아주게 하고 정창손만은 파직을 시키도록 하였다. 그리고 앞뒤말이 맞지 않는다 하여 김문에게는 심문을 진행하도록 하였다.

세종은 또한 자기가 직접 새 글자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그는 정음을 발표한 1446년 10월에 대간의 죄를 렬거하는 문건에 정음을 썼다.

세종은 새로 만든 국문으로 서적을 간행하는 사업도 적극 추진시키게 하였다. 그의 관심하에 《룡비어천가》에 이어 《동국정운》, 《석보상절》(석가모니일대의 사적), 《월인천강지곡》(석가모니에 대한 찬송), 《농잠서》 등과 유교 및 불교경전들의 번역본들이 출판되였다.

1446년에는 훈민정음을 아천시험과목으로 정하도록 하였다.

세종은 과학과 기술의 발전에도 깊은 관심을 돌렸다.

그는 1432년에 천체관측기구, 기상관측기구에 큰 흥미를 가지고 문화사적의의를 가지는 많은 성과물들을 내놓게 하였다. 그는 이러한 기구와 관련된 고전들을 조사하게 하고 리천과 장영실에게 그 제작을 맡아보도록 하였다. 7년간의 고심참담한 노력끝에 1438년에 간의대(관측시설), 흠경각, 혼의, 앙부일구(해시계), 자격루(물시계) 등이 생겨나게 되였다. 이것들은 모두 세종이 구상한것으로서 여러사람들은 헤아리지 못하고 오직 장영실만이 기이한 재주로 그의 뜻을 헤아려 한껏 기교를 부렸다 한다. 그리하여 그때 사람들은 《박연과 영실은 사실상 대왕의 성대한 제작을 위하여 시대에 응하여 태여난 사람이다.》라고까지 말하였다.

세종은 1433년에 직접 고금의 천문도를 참고하여 새로운 천문도를 만들어 돌에 새기게 하였으며 정린지 등에게 여러 력서를 참고하여 직정산내외편을 편찬하게 하였다. 그리고 력관을 백두산, 마니산(강화도), 한나산(제주도)에 파견하여 북극의 고도를 측정하게 하였다.

이가운데서도 특별히 이야기할수 있는것은 1442년도에 동으로 측우기를 만들어 서운관에 두게 한것이였다. 이것은 강우량을 측정하는 기구였다. 세종은 꼭같은 기구를 각 도, 각 읍에 나누어보내여 국내각지의 강우량을 명확히 재게 하였다. 측우기의 발명은 참으로 세계적인것이였다. 유럽에서는 1639년 이딸리아인 베네데토 카스텔리에 의해 6월에 강우량을 기구로 처음 측정하였다고 한다.

세종은 악곡에도 깊은 조예를 가지고 당시 음악의 대가로 불리우던 박연과 함께 조상전래의 악곡들을 정리하고 아악을 새로 창제하였으며 정대업, 보태평, 발상, 여민악, 봉황금 등의 새로운 악곡들을 제작하였다.

세종이 새로운 악기를 만들게 하고 중국의 악기소리와 대조해들으면서 좋은 점과 잘못된 점을 가려낸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처럼 세종은 집권기간 령토완정을 이룩하고 동방문화의 보물고를 풍부히 하였으며 세계문화사에 특기할만 한 공적을 쌓아올렸다.

그는 이밖에도 백성들의 곤난한 처지에 어느 정도 관심을 돌리고 그 해결책을 모색하기도 하였다.

《우리 나라의 민생가운데 곤궁한 자가 어이 없을가보냐, 과인이 궁중에서 나서자란 까닭에 인생의 고난을 하나하나 알지 못하고있다.》

《자손들이 깊은 궁중에서 자라다보니 농사짓는 고충을 알지 못한다. 참으로 탄식할만 한 일이로다.》

세종의 이 말들에 어느 정도 진심이 깃들어있는가는 제쳐놓고라도 그는 궁한 처지의 백성들을 구제하기 위한 대책들을 취하게 하고 지방관들로 하여금 구제사업에 힘쓰게 하였으며 매해 봄에 쌀을 꿔주었다가 가을에 가서 받아들이는 환곡법을 철저히 시행하게 하였다.

그는 자주 농사를 장려하고 1423년에는 금속화페인 《조선통보》를 주조하게 하고 재인, 화척들의 신분차별에 대한 불만을 무마하기 위해 그들의 신분명칭을 《신백정》으로 고치고 그들이 량인임을 재확인하였다.

세종은 《도천법》이라는것을 과거시험외에 별도로 제정하여 각 도 관찰사들이 덕행과 재주가 있는 뛰여난 자들을 추천하게 하고 고을장관들의 임기를 《6기》 즉 6년으로 하는 법을 제정하여 임기중에 자주 옮기지 못하게 하였다. 그리고 토지제도와 권세법을 개정하여 토지는 비옥도에 따라 6등분하고 매해의 수확은 9등분으로 나누어 납세하도록 하였다.

세종은 사람들에게 함부로 형벌을 가하는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법관들에게 될수록이면 죄를 경감시켜 원한을 품는 자가 없도록 하라고 하였다. 그리고 《3복》의 법을 제정하여 사형에 처해야 할 대상이라도 반드시 세번 반복하여 심문하게 하였다. 특기할만 한것은 1444년에 《노비는 비록 천한 자이나 역시 하늘이 낸 백성이라 어찌 함부로 무고한 자를 죽일수 있겠느냐.》고 하면서 노비에게 죄가 있더라도 관부에 알리지 않고 제 마음대로 죽이는 자에 대해서는 법률에 의거하여 처리하도록 하였다. 노비는 사람으로 치지도 않던 당대 사회에 있어서 이런 규제령을 내린것만 보아도 세종의 소위 《민본정치》의 일단을 엿볼수 있다.

세종은 나라의 군력을 강화하기 위한 사업에도 관심을 돌렸다.

그는 군사훈련, 무기제작, 도성과 지방(특히 연해지방)성보의 수축, 병선의 개량, 병서의 간행을 꾸준히 밀고나가게 하였다. 그는 신하들이 백성들의 페해를 말하는 경우 군사적대책을 강구하는것은 조종의 뜻이고 선왕이 정한 제도이며 중대한 사업이라 페하여서는 안된다고 하면서 직접 금갑옷을 입고 열병식도 사열하고 사냥도 정기적으로 하였다.

새로운 화포의 제조와 조선의 력대 전쟁사를 취급한 《동국병감》편찬(세종대에 시작하여 다음왕인 문종대에 완성), 군사훈련의 강화를 위하여 《진도》, 《진설》을 출판하여 각 도에 배포하는 사업 등 군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세종은 계속되는 조치를 취하였다.

1421년부터 중앙관청들도 《진도》를 연습시키도록 하였다. 군사를 사열하는 날 모든 관리들은 중위의 5소에 나누어 소속되는데 의정부, 돈녕부, 제군부, 리조, 병조, 승정원, 사헌부, 사간원 3군진무소는 각기 자기 관하의 관청을 거느리고 중소에 소속되고 례조는 자기 산하관청을 거느리고 좌소에 소속되며 형조는 우소에 호조는 전소에 공조는 한성부와 함께 후소에 소속되도록 하였다.

세종은 군사에 대한 관심을 높이고 군사훈련을 강화하기 위하여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대궐안에 무관들의 활쏘는 곳을 꾸리게 하였다.

새로운 문물제도의 확립과 국력을 강화하기 위한 사업에서 이룩한 세종의 공적들은 민족사의 한페지를 빛나게 장식하고있다.

  

3. 세종의 인재등용 

 

확실히 세종의 정치는 당시로서는 성공적이라고 볼수 있다.

그러면 그 성공의 비결은 무엇인가. 과연 세종 혼자서 그 거창한 사업들을 해낼수 있었겠는가. 강력한 두뇌진이 세종의 고문이 되고 손과 발이 되여 그의 정치를 보좌하였다. 또 그 두뇌진들을 찾아내고 아낀데 세종의 성공의 비결이 있는것이다.

세종은 인재를 얼마나 중시하였는가.

세종은 태종에게서 왕위를 넘겨받은 그해(1418년) 11월 3일 첫 사업으로 중앙과 지방의 관리들에게 12항목으로 된 지시문을 내려보내게 하였다. 거기서 그는 재주와 덕행을 가지고도 민간에 파묻혀있으면서 출세를 바라지 않는 선비들을 감사들이 두루 찾아서 보고할데 대한 항목을 따로 쪼아박았다.

세종이 인재를 중시한 사실은 천인이였던 장영실을 궁중에 불러들여 자기가 구상한 사업들을 맡기고 크게 등용한 사실을 통하여 알수 있다.

장영실(14세기말-1450년)은 기생의 아들로 태여나 당시 사회의 가장 하바닥신분인 《관노》로 천대와 멸시를 받았다.

그무렵 세종은 천하지대본인 농사와 깊은 련관을 맺고있는 력을 정비하기 위하여 천문대의 건설에 착수하였다. 여기에 절실히 필요한것은 해시계, 물시계, 혼천의 등 기구였는데 제노라는 수많은 기능공들이 그의 뜻을 만족시켜주지 못하였다.

이때 한 대신이 경상도 동래에 뛰여난 기술을 가진 노비가 있는데 사람들의 칭찬이 대단하다는 보고를 하였다.

세종은 몹시 기뻐하며 사람을 시켜 알아보게 하였다. 소문그대로였다.

세종은 곧 장영실을 궁성으로 불러올려 천문대건설에 참가시키려고 하였다. 하여 여러 대신들의 의논에 붙였다가 강한 반대에 부닥치게 되였다. 노비를 사람취급하지 않던 당시 사회에서 이것은 너무도 응당한 귀결이였다.

세종은 장영실을 꼭 불러올리려고 상왕인 태종에게 말하고 도움을 청하였다.

태종의 도움으로 장영실은 등용되여 궁정기술자로 되였다. 그는 세종의 기대대로 천문대건설에 필요한 많은 기구들과 정교한 금속활자, 세계적인 발명품인 측우기 등을 만들어내고 력사에 그 이름을 남겼다.

장영실이 만든 자동물시계인 《자격루》가 얼마나 정교한것인가 하는것을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1592-1598년 일본사무라이들에 의하여 강요된 임진조국전쟁을 겪으며 이 《자격루》는 심하게 파손되게 되였다. 여러 기술자들이 이것을 복구하려고 애써 노력하였지만 실패만을 거듭하게 되였다. 그러다가 1657년에 가서야 겨우 복구할수 있었다. 이것은 장영실의 뛰여난 재능을 보여주는 단적인 실례라고 할수 있다.

세종의 창발적인 지혜를 받아들여 기발한 재능과 창발성을 발휘함으로써 뜻을 만족시켜주는 장영실을 세종은 몹시 중히 여겼다고 한다.

세종은 장영실이 성과작을 내놓을 때마다 벼슬을 높여주고 큰상도 내리였다.

세종은 집현전을 설치하고 인재들을 뽑아올렸을뿐아니라 그들을 지극히 대해주었다. 그들은 일찌기 들어가고 늦게야 물러나오는데 대궐문을 닫게 되여야 겨우 나오게 되였다. 아침저녁과 같은 끼니때에는 내시들을 보내여 대접도 하게 하였다.

세종은 그렇게 하면서도 문학이 더 발전하지 못할가봐 념려하여 그가운데서 나이 젊고 총명한 사람들을 뽑아서 절에 올라가 글을 읽게 하였다. 그들에 대한 공급은 풍성하였다.

한번은 세종이 심부름군을 보내여 집현전에 가서 당직학사가 무엇을 하는지 보고 오라고 한적이 있었다. 그가 돌아와 신숙주가 초불을 밝히며 책을 보고있는 모양을 보고하였다. 세종은 그의 말을 듣고 자신이 직접 가보았는데 보고한 그대로였다. 신숙주는 밤새껏 책을 읽고 닭이 울녘에야 잠자리에 누웠다.

세종은 기뻐하며 자기가 입고있던 돈피로 지은 잠옷을 벗어주며 잠이 깊이 들기를 기다려 그에게 덮어주도록 하였다.

세종의 인재중시와 관련된 이러루한 일화들은 적지 않다.

세종은 신하들이 큰 죄를 저질렀다 해도 그에게 자그마한 공이라도 있으면 그 공을 아껴 극형에 처하는것을 거절하였다.

병조판서를 지낸 조말생의 처벌제의를 묵살한것은 그 대표적실례의 하나이다. 그는 세조 즉위 초년에 병조판서를 지내면서 태종과 세종의 뜻대로 쯔시마원정을 가장 강하게 주장하고 실무적인 사업을 처리한 공로있는 대신이였다. 그런데 그는 지나친 탐오행위로 하여 1426년 5월 강직되게 되였다. 그 탐오정도가 너무 한심하여 극형론의까지 제기되였다.

세종은 다른 처벌은 그만두고 먼 지방에 거주제한을 시키는 동시에 탐오한 물건을 관청에서 몰수하라고 하였다.

그러나 관료들은 계속 처벌을 제기하였다.

세종은 시끄러울 정도로 제기되는 처벌제의를 모두 묵살해버리였다. 그는 조말생이 한심한 정도로 탐오행위를 하였으니 그 죄로 보아 응당 죽여야 하겠지만 나라에 공로도 있고 하니 죽일수는 없다, 더구나 재상을 죽이지 않는다는것은 이미 조상의 법으로 되여있는것이 아닌가고 하면서 극력 변호해주었다. 이것은 조말생에게만 국한된 사실이 아니다. 하기에 옛사람들도 세종의 대에 사대부들가운데 극형을 당한 자가 없었다고 하였다.

물론 세종이 이러한 관용을 베푼것은 정치의 성공을 바라서였다. 그 역시 인민대중우에 군림한 착취계급의 한사람이였다. 그가 과연 피착취근로대중의 운명까지도 지켜주었던가. 1442년 작업과정에 실수한 장영실을 불경죄(임금을 존경하지 않은 죄)로 몰아 태형 100대를 치고 관직에서 몰아낸 사실은 그의 계급적제한성을 여실히 보여주고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재를 중시한 세종의 정책은 효력을 나타내여 정치, 경제, 군사, 문화 등 여러 분야의 성과가 여기에 기인된것이다.

리조 9대왕인 성종때에도 문사들에 대한 은총과 영화가 지극하였지만 문학으로 명성을 얻은 사람은 세종시대처럼 그렇게 성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리조 500년력사에 세종시대만큼 훌륭한 인재들이 배출된 시대는 찾아보기 힘들다. 명재상 황희, 허조, 문무를 겸비한 명재상 최윤덕, 김종서, 충효를 겸전한 성삼문, 박팽년, 리개, 류성원, 하위지, 세조때 명성을 떨친 정린지, 신숙주, 재능있는 기술자들인 리천, 장영실, 유명한 음악가인 박연 등은 그가운데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세종은 총명과 함께 이 재사들의 힘을 입어 통치 32년간을 성공적으로 수놓을수 있었던것이다.

총명으로 왕좌에 올라 부왕의 보살핌속에 자기 정치의 첫걸음을 뗀 세종, 나라의 원쑤들에게 무자비하고 조상의 땅을 확정하여 후대에 길이 전할 군사적업적을 쌓은 세종, 내정을 개혁하고 새로운 문물제도를 확립하며 문화적발전을 이룩하고 국력을 강화한 그의 공적은 오래도록 사람들의 기억속에 남아있다. 특히 오늘 우리가 쓰는 조선글자를 처음으로 독특하게 만들어내여 보급시킨 그의 공로는 민족의 자랑으로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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